3화
“마님. 가져왔습니다.”
시녀장 헬렌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대접을 실비아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실비아는 대접 안에 든 영약을 식히면서 잠이 든 라온을 바라보았다.
“먹이기 힘들겠지?”
“아이들은 쓴 걸 싫어하니까요. 실비아 님도 어렸을 때 쓴 약을 싫어하셨죠.”
“나도?”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약 먹기 싫다고 도망가신 적도 있었어요.”
“에이, 라온이 듣잖아.”
“후후.”
두 사람은 고로롱 숨소리를 내는 라온을 보며 옅게 웃었다.
“하긴 약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지. 거기다 라온은 이렇게 어리니, 더 싫어할 테고.”
“실비아 님. 그래도….”
“알아. 먹여야지.”
실비아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께서 주신 영약인데, 한 방울도 남겨선 안 되지.’
그날 아버지에게 빌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페드릭은 별관에 다시 들려 질 좋은 화속성 영약 세 개를 건네주었다.
영약을 희석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을 테니, 그 시간 동안 다른 영약을 구하면 된다. 그분이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라온.”
실비아는 라온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으….”
라온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떴다.
“잘 잤니?”
“아우우웅.”
“오늘부터 라온이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이걸 전부 먹어줘야 해.”
실비아는 작은 나무 수저로 약을 떠서 라온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먹긴 하겠지만, 바로 울겠지.’
아이의 본능 상 약은 먹겠지만, 쓴맛에 짜증을 내고 뱉을 게 분명했다.
“자, 먹자.”
실비아는 영약이 흐르지 않도록 긴장한 채 라온의 입에 영약을 넣어주었다.
“으으….”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곧 터질 울음을 기다리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
살며시 눈을 뜨자, 라온이 고사리 같은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꼭 더 달라고 하는 것처럼.
“헬렌. 이건….”
“도, 도련님이 더 달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그거 맞지?”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영약을 떠서 라온의 입에 흘려 넣었다.
“우우!”
라온의 눈썹이 팔(八)자로 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울지 않았다. 좀 전보다 더 빠르게 손을 까닥였다.
“아….”
실비아가 입을 떡 벌렸다.
“라온이 내 마음을 알아준 건가?”
“분명합니다! 도련님께서 실비아 님의 뜻을 알고 참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면 쓴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저렇게 더 달라고 하는 걸 보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참겠다는 게 분명했다.
“라온!”
실비아는 참지 못하고 라온을 꽉 끌어안았다.
* * *
‘됐고, 빨리 약이나 더 주세요.’
라온이 실비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손을 흔들었다.
‘좀 쓴 건 대수도 아니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냥 약이라면 모를까. 지금 가장 필요한 화속성 영약이다. 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쓰고, 뜨겁더라도 전부 먹어 치워야 한다.
“라온 좀 봐! 너무 예쁘게 먹지 않아?”
“그럼요!”
라온은 실비아와 헬렌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넘겨주는 영약을 꿀떡꿀떡 삼켰다.
‘뭔지는 몰라도 효과가 장난이 아니야.’
영약을 먹자마자, 뱃속에 용광로를 피운 것처럼 뜨끈한 기운이 타올랐다. 더운 열기가 마나회로를 흐르며 추위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약효도, 농도도 적당해.’
연약한 아이의 몸에 강한 영약은 오히려 독일 될 수도 있다.
실비아와 헬렌이 신경을 썼는지 영약의 농도는 받아들이기 딱 좋은 정도였다.
“끅.”
라온은 수저에 남은 영약까지 쪽쪽 빨아 먹은 뒤 작게 트림을 하고서 눈을 감았다.
“마님.”
“응. 잠시 자도록 놔두자.”
실비아와 헬렌은 감격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아우.”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라온이 눈을 번쩍 떴다.
‘한동안은 안 오겠지.’
오더라도 건드릴 일은 없을 테고.
밥도 먹고 약도 먹었으니, 실비아나 헬렌이 자신을 깨울 일은 없다. 연공을 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라온은 체내에 차오른 뜨끈한 기운을 끌어당겨 불의 고리 연성을 시작했다.
‘영약 덕분에 불의 고리를 만들고, 냉기를 녹이는 시간이 더 빨라지겠어.’
그의 입가에는 본인도 모르는 미소가 지어졌다.
* *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라온이 불의 고리 연성을 시작한 지 2년하고도 반이 지나갔다.
그동안의 일과는 참으로 간단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실비아와 헬렌과 놀아주다가 점심과 영약을 먹은 뒤 낮잠을 자는 척하면서 불의 고리를 연성했다.
저녁을 먹고 조금 일찍 자다가 자정쯤 깨어나 모두가 잘 때 두 번째 연공을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대륙 전체의 3살배기 중에서 가장 열심히 사는 거 하나는 자신 할 수 있었다.
‘잘하면 오늘 불의 고리가 1성에 오를 수도 있겠는데.’
영약 덕분에 연공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진도가 막힘이 없었다.
적절한 시간과 집중력만 확보되면 오늘 불의 고리를 연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관심이 없군.’
글렌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뒤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딸인 실비아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나.’
그쪽에서 관심이 없다면 이쪽도 줄 필요 없다. 전에 생각했듯이 얻을 것만 얻어서 가문을 나가면 그만이다.
‘다만 아주 조금….’
이곳에 남아 있을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이 마음에 걸렸다. 3년 동안 함께 있으며 자그마한 감정의 싹이 트인 것 같았다.
“라온. 엄마라고 불러봐!”
미래를 생각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실비아가 헤헤 웃으며 자신을 안아 들었다.
“어마!”
“아우우! 한 번 더!”
“어마!”
“꺄아악!”
억지로 발음을 뭉개며 엄마라고 불러주자, 실비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행복에 푹 잠긴 눈빛이었다.
“라온. 딱 한 번만 더!”
“어마!”
“실비아 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조금 지친 얼굴로 실비아와 놀아주고 있으니, 헬렌이 따뜻하게 데운 영약을 가지고 왔다.
“아, 수고했어.”
실비아는 헬렌에게 영약이 들어 있는 대접을 넘겨받았다.
“자, 라온.”
그녀는 따끈한 영약을 조금 식힌 뒤 내밀었다.
“아웁!”
라온의 작은 입이 약이 든 스푼을 마중 나갔다.
“잘 먹네!”
2년 반이 지났는데도 실비아와 헬렌은 영약을 삼키는 자신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졸려….”
라온은 영약을 다 먹은 뒤 졸린 것처럼 눈을 꿈뻑였다.
“약 다 먹었으니까. 낮잠 잘까?”
“응.”
“그래. 코자자.”
실비아는 창가 앞에 놓인 침대에 자신을 내려놓고, 배를 두드려주었다.
“우우웅….”
라온이 자는 척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실비아와 헬렌이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자는 척하는 이 시간이 저 둘의 휴식 시간이었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군.’
라온은 눈을 감은 채로 불의 고리 연성 구결을 외우며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웅.
들숨에 빨아들인 자연의 마나를 전신으로 흘려보냈다.
‘마나의 흐름이 매끄러워.’
평소와 똑같이 호흡했지만, 마나가 부드럽게 흘러간다. 무언가를 이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침착하자.’
차분히 숨을 내쉬며 마나 회로를 흐르는 마나의 선을 연결했다. 폐가 작아 숨이 달려 손끝이 떨렸지만, 꾹 참았다.
고오오!
영약의 뜨거운 기운과 자연의 마나로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를 깎은 뒤 전신으로 순환시켰다.
뿌득.
영약의 기운과 마나가 뼈와 근육, 피부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칼날을 벼리는 것처럼 점점 날카로워지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불의 고리를 연성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불덩이가 심장을 가로지르는 듯한 후끈한 감각이 가슴을 울렸다.
뜨거운 기운이 심장을 후프처럼 휘돌고 있었다. 드디어 불의 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드디어 됐….’
눈을 뜨고 환호를 지르려 할 때 금색의 빛이 번쩍였다.
띵!
[첫 번째 <불의 고리>가 연성되었습니다.]
[최초의 업적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성 <불의 고리(1성)>이 생성됩니다.]
‘이, 이게 뭐지?’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마법진 같은 빛이 눈앞에 떠 있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육체가 조금 더 굳건해집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근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체력이 상승합니다.]
[특성 <수속성 저항력(1성)>이 생성됩니다.]
<불의 고리>를 습득했다는 메시지 이후로도 다른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어?’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이 내용들은 뭐….’
메시지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몸이라 엄청난 차이까진 아니지만, 변화 자체는 확실했다.
‘거기다 통증도 줄어들었어.’
마나 회로를 막고 있던 냉기의 통증도 감소했다.
‘불의 고리에 이런 능력이 있었나?’
불의 고리는 분명 전설이라 불리는 연공법이지만, 고리 3개가 생길 때까지는 큰 효과가 없고, 4개 때부터 제 능력을 발휘한다.
1성을 이룬 것으로 이런 변화를 주는 건 전생에 없던 일이다.
‘영약이나, 아이의 몸 때문인가?’
여러모로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이 메시지 때문인가….’
라온이 눈앞에 뜬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전생과 지금은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이 메시지 같았다.
“도련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머리 위에서 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공을 하는 동안 다시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헤렌! 이거 바!”
라온이 손가락으로 마법진 같은 메시지를 가리켰다.
“네? 침대요?”
헬렌은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지 침대를 보며 웃어줄 뿐이다.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헬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저 메시지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변화를 확인하시려면 <상태창>을 확인하세요.]
‘상태창? 어?’
무슨 말인지 모른 채로 상태창이라는 말을 되뇌자, 메시지와 같은 빛의 창이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아홉 가닥), 저질 체력, 전신 냉증,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 불의 고리(1성), 수속성 저항력(1성)
*추가 능력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뜬 상태창이라는 걸 천천히 살펴보았다.
‘혹한의 저주, 저질 체력, 전신 냉증, 운동능력이랑 마나 감응력 저하라….’
상태에 적힌 내용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역시 내 몸은 여러모로 거지 같군.’
혹한의 저주는 그렇다 치고 냉증에 저질 체력까지 있다. 평소에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지.’
라온이 입매를 다물었다. 좋지 않은 체질이 가득했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자신은 전생에서 최고의 암살자라 불렸고, 불의 고리라는 천고의 연성법을 알고 있다.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의 고리를 완성한다면 저 단점 따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다 여긴 지그하르트니까.’
지그하르트가 가진 검술 비기까지 익힌다면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베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복수만 생각해선 안 된다.
‘난 고작 3살이니까.’
데루스는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이다. 지금부터 복수하겠다고 열을 냈다간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
어차피 놈은 죽일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느리더라도 안정적으로 힘을 쌓아서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에 끝을 내야 한다.
라온은 다짐을 하듯 주먹을 움켜쥐고 다시 상태창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 메시지는 정말 뭐지?’
갑자기 이 메시지와 상태창이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암살자의 감각으로 내게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만 느껴질 뿐.
‘아마 환생과 관계가 있겠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한 이유와 이 메시지가 관계가 있다고 어렴풋이 짐작만 갔다.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노리는 것처럼 천천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가자.’
* * *
[두 번째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마나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정신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기력이 상승합니다.]
메시지창을 확인한 라온이 씩 웃었다.
‘드디어 됐어.’
첫 번째 고리가 생성된 후 2년 반 동안 꾸준히 수련한 덕분에 두 번째 불의 고리가 생겨났다.
첫 번째 불의 고리는 가로로, 지금 생겨난 두 번째 불의 고리는 세로로 심장을 휘돌고 있었다.
감응력이 올랐다는 메시지 때문인지 방 안에 떠도는 마나에 대한 감각이 민감해졌다.
역시 저 메시지가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 같았다.
‘5살에 두 개의 불의 고리를 만들다니.’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설급 연공법 불의 고리를 습득한 건 대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거다. 뿌듯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래도 만족해서는 안 돼.’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떤 방해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철저하게 대비해놓아야 한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은 내게 베풀어 주기만 했다.
떠날 사람이라, 도움을 주지 못하겠지만, 그들의 호의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휴우.”
라온이 다시 연공을 시작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들!”
실비아가 들어왔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안색이 조금 어두웠다.
“엄마?”
5살이 넘었기 때문에 이젠 실비아에게 제대로 엄마라 불러야 했다. 발음이 조금 새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오늘은 엄마랑 갈 곳이 있다고 했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온 검붉은색 예복을 침대에 놓고 자신의 잠옷을 벗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어린 직계와 방계 아이들을 모아다가 무슨 확인을 한다고 했었다.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날 거야.”
실비아는 자신이 안심시키려는 듯 방긋 웃었다.
“응.”
“우리 아들은 어쩜 이리 착하고 예쁠까.”
실비아는 옷을 갈아입히다 말고 자신의 볼에 얼굴을 비볐다.
‘으, 제발….’
라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만 떨었다.
옷을 갈아입고서도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 있던 실비아의 폭주를 멈춘 건 헬렌이었다.
“마님. 지금 그러고 계실 시간이 아닙니다. 곧 ‘판별식’이 시작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