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대륙에는 여섯 개의 빛과 다섯 개의 어둠이 있다.
찬란한 태양이 되어 대륙에 우뚝 선 여섯 세력을 육황이라 칭했고, 음지에 깃들어 패악와 공포를 펼치는 자들을 오마라 불렀다.
그 육황 중 하나이자, 북방에 군림하는 패주가 바로 지그하르트 가문이었다.
“아우우.”
라온은 그런 지그하르트의 주인과 눈을 마주하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잘된 건가…?’
지그하르트는 전생의 자신을 실컷 이용해 먹다 죽였던 로베르트 가문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서 힘을 키운다면 복수할 시기가 훨씬 당겨질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저처럼 이 아이도 금발에 붉은 눈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실비아가 보드랍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글렌은 아찔할 정도의 위압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
라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글렌에게 안긴 순간 손목을 통해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웅….”
오랜만에 느껴보는 오러에 자신도 모르게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오러가….’
글렌의 오러는 따뜻하기만 한 게 다가 아니었다. 자연의 마나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어마어마한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몸을 녹여주고 있어.’
환생 이후엔 추위를 굉장히 많이 탔다. 처음엔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체질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글렌의 오러를 받자, 혈관으로 태양 빛이 들어온 것처럼 온몸이 따스해졌다.
우우웅.
글렌은 오러를 이용하여 라온의 육체 구석구석을 살핀 뒤 다시 실비아에게 건네주었다.
‘뭐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글렌 정도의 무인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건만,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손자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런 표정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비아.”
“네.”
“이 아이의 이름은 라온으로 하겠다.”
“라온이요? 아, 아버지. 라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실비아의 눈썹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뜻 그대로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의미다.”
부드럽게 오러를 운용할 때와 달리 글렌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피어났다.
‘허….’
이거 뭐 운명인가?
전생과 같은 이름인데다가 그 의미 역시 똑같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글렌이 냉정한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픈 손주에게도 관심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이상이다.”
글렌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검붉은 코트를 툭 털고서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아버지! 최소한 다른 이름을….”
실비아가 라온을 안아 든 채 따라갔지만, 글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저택을 나가버렸다.
부녀관계가 아니라, 남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우으!”
라온이 입술을 떨었다.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외부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 미안해!”
실비아는 라온을 끌어 안아주면서 그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언가가 있는데. 졸려서 생각할 수가 없어.’
라온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과 실비아의 온기를 동시에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이의 몸은 정말이지 불편하다니까….’
* * *
달이 하늘의 중심에 떠오른 시간.
아기용 침대에 누워있던 라온이 슬며시 눈을 떴다.
‘자는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는 바로 옆 침대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탁.
침대를 두드려도 깨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잠든 모양이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00일은 너무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잠은 끝없이 쏟아졌고, 일어났을 때도 실비아와 함께 있어서 마나를 운용할 수도, 연공을 할 수도 없었다.
연공 중에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아무것도 못 했지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아기 침대.’
시녀장 헬렌의 조언으로 오늘부터 온기가 있는 아기 침대에서 따로 자게 되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긴 했지만, 이 시간에 실비아가 일어날 리가 없다. 연공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다.
‘시작해볼까.’
라온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불의 고리 연성을.’
대륙의 연공법은 호흡을 통해 자연의 마나를 받아들여 단전에 오러를 쌓는다.
하지만 전생의 기연을 통해 얻은 연공법 ‘불의 고리’는 달랐다.
마법사가 서클을 만들 듯이 심장에 둥근 고리를 연성해서 체력과 육체를 성장시키고, 정신력과 마나 감응력을 높여준다.
즉, 오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켜 무인이 되기에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해주는 연공법이 바로 불의 고리였다.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지.’
불의 고리는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연공법. 아무리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도 자신이 불의 고리를 연성했다는 걸 알 수가 없다.
실제로 대륙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데루스 로베르트도 라온이 불의 고리를 익혔다는 건 알지 못했다.
불의 고리를 이용해서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키고, 지그하르트 가문의 검술을 익힌다면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복수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다만 라온의 육체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냉기.’
피가 흐르는 혈관처럼 마나가 흐르는 마나 회로가 지독한 냉기로 막혀 있었다.
이걸 처음 안 건 얼마 전이다.
자는 척하면서 잠깐 마나를 운용해봤는데,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냉기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뻔했다.
“후웁.”
라온은 폐가 말릴 정도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대기 중에 퍼진 마나를 느껴보았다.
‘흩어지는군.’
기본적인 마나 감응력이 별로인지, 전생과 달리 마나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 끝에 간신히 마나를 받아들여서 마나 회로에 가라앉혔다.
‘음.’
라온은 흡수한 마나로 불의 고리 연성을 시작하려다가 우뚝 멈췄다.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어깨 부근의 마나 회로 절반 정도가 서늘한 냉기에 막혀 있었다.
‘이러니 잠이 오고, 추울 수밖에.’
그동안 20시간 넘게 잠을 자고, 지독한 추위를 느낀 이유가 바로 이 냉기 때문이었다.
‘아홉 곳인가?’
마나를 흘려 전신을 훑어보았다. 냉기에 막혀 있는 마나 회로는 전부 아홉 개였다.
‘심각한데….’
아기의 마나 회로는 성인과 달리 활짝 열려 있다. 그런 상태에서 냉기가 반 넘게 차올랐으니, 나이가 들면 마나 회로 전체가 냉기로 막힐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는 추위와 고통이 찾아오거나, 심하면 죽게 될 거다.
그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이 냉기들을 지워버려야 했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마나 회로의 냉기를 뚫어야겠어.’
불의 고리 연성이 한참 늦어지겠지만, 지금은 사는 게 우선이다.
후욱.
라온이 천천히 숨을 들이켜 마나를 받아들였다. 흡수한 마나를 송곳처럼 얇고 예리하게 저며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냉기를 찔렀다.
티익!
얼어붙은 폭포를 포크로 찌른 것처럼 작디작은 냉기가 떨어져 나갔다.
‘잠깐. 이 냉기를 이용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대로 냉기를 내보낼 수도 있지만, 냉기의 순도가 아까웠다.
라온은 떨어져 나간 냉기를 자연의 마나와 함께 불의 고리의 흐름대로 이끌었다.
자연의 마나와 마나 회로를 막고 있던 냉기가 하나로 뭉쳐 전신의 마나 회로를 순환하기 시작했다.
‘됐어!’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생보다도 훨씬 느린 속도였지만, 큰 문제 없이 불의 고리의 흐름에 따라 마나를 운용할 수 있었다.
우우웅.
마나와 함께 이끈 냉기가 몸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아이의 몸 덕분이군.’
마나 회로가 활짝 열린 아이의 마나 회로가 아니었다면 냉기 때문에 순환 자체를 할 수 없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음으로… 어? 벌써?’
조금 머리와 힘을 썼다고, 졸리기 시작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꺼풀이 커튼처럼 내려갔다.
‘망할….’
라온은 분하다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가 잠에 빠지고, 하늘에 걸린 달이 손가락 세 마디만큼 움직였을 때 방문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문조차 열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지그하르트의 가주 글렌이었다.
“…….”
글렌은 잠이 든 라온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노을처럼 연한 빛이 피어났다.
화아아.
마나 회로의 냉기 때문에 찡그려진 라온의 이마가 벨벳처럼 매끄럽게 펴졌다.
* * *
“아부부.”
라온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쉽지 않아.’
깨어 있는 시간이 짧고, 그마저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불의 고리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다만 한두 시간 밖에 안되는 연공 시간과 냉기로 인해서 진도가 지체되는 것 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성과가 나쁘지 않았다. 꼭 누가 도와주는 것처럼.
“라온. 오늘은 조금만 더 움직여볼까?”
실비아가 허리를 굽히고 딸랑이를 흔들었다. 계속 반응해주었더니, 딸랑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놀아주기 힘들군.’
솔직히 말하자면 실비아나, 시녀들과 놀아주는 게 냉기를 견디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아이의 육체에 성인의 정신이 들어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우웅.”
라온이 고개를 까딱이고서 실바아를 향해 기어가려고 할 때였다.
달칵.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누군지 모를 백발의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거적때기 같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눈만큼은 호수처럼 맑았다.
“어? 아저씨!”
실비아는 노인을 알고 있는 듯 환하게 웃으며 문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이구나.”
“아, 아니지. 성자님….”
“아웅.”
라온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옹알이를 해버렸다. 성자라는 칭호와 거지나 입을 듯한 의복을 보자 저 노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넝마의 성자!’
넝마의 성자 페드릭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치료사 중 하나다.
신성력, 의술 모두 하늘에 닿았지만, 방랑벽이 있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성자는 무슨. 예전처럼 아저씨라고 부르거라.”
페드릭은 클클 웃고서 라온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네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 이 아이냐?”
“아, 네.”
“오호! 금발에 적안? 너 이후에 처음 아닌가?”
“맞아요. 예쁘죠?”
실비아가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긋 웃었다.
“그 말 그대로다. 한 살도 안 된 녀석이 예쁘게도 생겼군. 글렌처럼 사나운 놈이랑은 전혀 달라.”
페드릭은 낄낄 웃으며 라온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름은 뭐지?”
“라온이에요….”
“라온?”
그는 라온이라는 이름을 듣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그림자라는 뜻 아니겠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을 그림자로 짓다니, 글렌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페드릭은 지그하르트의 가주인 글렌의 이름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불렀다.
‘글렌 지그하르트와 넝마의 성자가 친구라는 소문은 진짜였군.’
라온은 빗자루 같은 페드릭의 머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암살자로 살았기 때문에 세계의 정세에 관해서는 나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글렌 지그하르트와 넝마의 성자가 상당한 친분이 있다는 정보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라온. 이 할아버지가 잠깐만 보자꾸나.”
페드릭이 자신의 어깨와 팔뚝, 다리와 가슴 부근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으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다가 마지막으로 하얀빛을 펼쳐냈다. 그 빛을 쬐자, 온천에 들어간 듯한 후끈한 기운이 전신에 차올랐다.
“후우.”
페드릭이 낮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돌렸다.
“어떤가요? 다른 아이에 비해 성장이 늦고, 추위를 많이 타던데….”
실비아가 양손을 꼭 모은 채로 페드릭에게 다가갔다.
“혹한의 저주다.”
페드릭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 저주라뇨? 갑자기 그게 무슨!”
“혹한의 저주는 실제 저주가 아니다. 지독한 냉기가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체질이지.”
“아…”
“여자아이에게 드물게 나타나는 체질이거늘. 남자아이가 혹한의 저주를 타고난 건 나도 처음 보는구나.”
그는 묘한 눈빛으로 라온의 몸을 훑어보았다.
“지금은 마나 회로가 열려 있는 시기라 큰 문제가 없겠지만, 네 살 이후 마나 회로가 닫히기 시작하면 심각한 추위와 고통을 느끼게 될 거다”
“그, 그런….”
실비아가 불안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알아서 고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온이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냉기를 지울 수 있다. 딱히 치료받을 필요는 없었다.
“이 아이의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냉기 덩어리는 총 아홉 개. 내가 치료했던 여자아이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숫자다. 거기다 하나하나의 냉기가 강하니, 억지로 뚫었다간 백치가 될 가능성도 있겠어.”
“치, 치료할 방법은요!”
실비아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페드릭의 소매를 확 잡아당겼다.
“화속성 영약을 희석해서 하루에 한 번씩 물처럼 마시게 하고, 해가 가장 높게 뜬 정오부터 2시간 동안 햇볕을 쬐게 해주어라.”
“그렇게 하면 나을 수 있나요?”
“말했다시피 이건 병이 아니라, 체질이다. 내가 말한 대로 한다면 최소한 어린 나이에 하늘의 품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다. 다만….”
페드릭이 말을 끊고 뜸을 들이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냉기가 이 아이의 체질과 체력을 잡아먹어서 치료가 끝나도 검사가 되기는 힘들 거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실비아는 죽지만 않는다면 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 생각하면 다행이구나. 어쨌든 지금부터는 이 아이를….”
똑똑.
페드릭이 추가적인 조언을 해주려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고급스러운 검은 예복을 입은 중년인이 방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 성자님을 찾으십니다.”
“나중에 간다고 전하거라.”
“지금 당장 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쯧, 하여튼 때를 못 맞추는 녀석이라니까.”
페드릭이 짧게 혀를 차고서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 나중에 다시 들리마.”
“아, 네.”
페드릭은 라온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년인과 함께 방을 떠났다.
‘혹한의 저주라….’
라온이 손가락을 비볐다.
‘드디어 알았군.’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냉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졌다. 다만 특별히 달라질 건 없다.
지금까지처럼 불의 고리를 연성하는 동시에 냉기를 지우면 성인이 되기 전에 혹한의 저주를 치료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육체와 마나 감응력을 만들 수 있으니까.
“라온.”
문이 닫히자마자, 실비아가 침대에 누워있던 자신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그녀가 불안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엄마가 꼭 구해줄게. 어떻게 해서든.”
항상 웃기만 하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뭐지…?’
실비아의 떨림이 전해지자,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꺼끌한 철사로 심장을 긁는 듯한 느낌이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찌르르함을 계속 느끼고 있긴 싫었다. 그래서.
“아부부.”
라온은 실비아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작은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
“도련님!”
“세, 세상에….”
실비아가 눈을 부릅떴고, 시녀들이 짧은 비명을 터트렸다.
“라온….”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물기 젖은 자신의 손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에게 가봐야겠어.”
실비아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 * *
실비아는 라온이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지그하르트의 가주전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성자가 지나갔기에 가는 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 실비아 님!”
“지금은 가주님과 성자께서….”
“비켜!”
앞을 막아서는 시종과 시녀들을 억지로 뚫고 알현실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노크 같은 주먹질을 다섯 번 했을 때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페드릭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글렌이 인상을 구겼다.
“부탁드려요.”
실비아는 이를 꽉 깨물며 무릎을 꿇었다.
“라온을 구해주세요!”
뒤에 시종들이 있음에도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
글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실비아가 머리를 숙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너도 들었을 텐데? 그 아이의 체질이 낫는다고 해도 무인으로 살기 힘들다는 걸.”
이미 전해 들었는지 글렌은 라온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무인으로 키우지 않으면 돼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가 무인이 되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치 없는 아이에게 왜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아버지의 손자니까요.”
“네가 인연을 끊는다고 가문을 나간 후에 데리고 온 손자지.”
“그건….”
실비아가 떨리는 눈동자를 바닥으로 깔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내려주는 것뿐이다. 바보짓은 한 번이면 족해.”
글렌의 얼굴은 얼음장을 씌운 듯 싸늘했다.
“지그하르트는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땅. 나약한 손자 따위는 없는 게 낫다. 거기다 영약 정도는 너도 구할 수 있을 텐데?”
“밖에서 구하는 것보다 가문의 보고에 있는 영약들이 훨씬 효과가 좋으니….”
“그건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 자들에게 주기 위한 물건이다. 손자라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이에게 줄 건 없다. 그만 나가거라.”
“아버지! 제발!”
실비아는 피가 흐르도록 주먹을 말아쥔 후 다시 머리를 박았다.
‘물러나선 안 돼!’
혼자였다면 여기서 돌아갔다. 자존심을 생각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겐 지켜야 할 아이가 있었다. 라온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매달려야 했다.
“끌고 나가라.”
글렌의 단호한 지시에 기둥 뒤에서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실비아의 양팔을 잡고 문으로 끌고 갔다.
“제, 제발 라온을!”
실비아가 끝까지 라온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글렌은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후우….”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페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막내 손자의 상태를 봐달라고 불러놓고, 연기 한 번 잘하는군. 솔직히 대하는 게 그리 어렵나?”
“시끄럽고, 자세한 상태나 말해.”
“말했듯이 마나 회로 아홉 개가 냉기로 막혀 있는 상태다. 지금은 괜찮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위험해지겠지.”
페드릭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가 오러로 냉기를 밀어준 덕분에 한동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글렌과 페드릭은 라온의 몸을 직접 확인했음에도 그가 불의 고리를 연성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불의 고리는 천 년 전의 연공법이었고, 단전을 사용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도 불의 고리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혹한의 저주 증상이 있는 여자아이들은 순도 높은 냉기를 이용하여 뛰어난 마법사나 검사 될 수도 있지만, 더운 기운이 많은 남자아이는 달라. 말했듯이 네 막내 손자가 무인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무인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 살기만 하면 돼.”
“실비아에겐 윽박질러놓고 상관없다? 북멸왕도 막내 손주는 예쁜 모양이구먼.”
페드릭이 클클 웃었다.
“…….”
글렌은 페드릭의 말을 무시하고서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그었다.
우우웅.
공간이 십(十)자로 갈라지며 금빛의 차원이 열린다. 불길로 가득한 공간 안에서 작은 나무 상자 세 개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페드릭에게 넘겨주었다.
“어휴, 이래서 내가 가문 같은 걸 만들지 않는 거야.”
페드릭은 한숨을 내쉬고서 나무 상자를 받았다.
“부탁한다.”
글렌의 시린 목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낮게 울렸다.
“다 좋은데, 그 아이의 이름을 왜 라온이라 지은 거냐. 좋은 이름이 쌔고 쌨는데, 하필 그림자라고….”
“라온이라는 이름에는 그림자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하늘 높게 뜬 금빛 태양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에는 그것과 정반대의 뜻도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