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난 죽는다.
서늘한 밤바람도, 반만 고개를 내민 달빛도, 암살자로 살아온 감각도 모두 같은 말을 속삭인다.
난 곧 죽는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털처럼 폭신해 보이는 정원의 수목들 사이로 수많은 샛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나갈 수 있는 생로는 없다. 죽음의 악취가 흐르는 사로뿐이다.
“라온.”
심장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리를 빗은 듯한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중년인이 보인다.
이 자다.
데루스 로베르트.
로베르트 가문의 주인인 이 남자 한 명 때문에 이 거대한 정원 전체가 죽음의 늪처럼 진한 사기를 뿜어냈다.
“예.”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넌 그림자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실적을 보여주었다. 네가 음지에서 움직여준 덕분에 가문의 성장세가 더욱 빨라졌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기쁜 척도, 기쁘지 않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목각인형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라온.”
그가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넌 그림자에게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데루스가 손을 뻗었다. 바닥에 비치는 그의 그림자가 똑같이 손을 내밀었다.
“그림자는 주인을 따르면 그만이다. 생각도, 감정도, 마음도 필요 없다.”
“맞습니다.”
“그걸 알면서 왜 네 스스로 움직였지?”
급격하게 차가워진 데루스의 목소리가 심장을 꽉 조였다.
“세뇌는 어떻게 풀었고.”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놀란 척을 하지 않기 위해서 혀를 깨물었다.
뭐지?
이전과 다른 언행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세뇌가 풀린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말해라. 세뇌를 언제, 어떻게 풀었지?”
이렇게까지 나오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세뇌.
그건 로베르트 가문이 암살 단체 ‘그림자’를 운용하는 방법이다.
놈들은 어린아이들을 납치 혹은 구매해와서 감정을 죽이고, 세뇌를 걸어 평생을 암살자로 사용한다.
나도 세뇌에 걸렸었지만, 우연히 얻은 기연 덕분에 그 지독한 족쇄를 풀어낼 수 있었다.
“네가 가문에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데루스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너를 포함한 그림자의 암살자들에겐 두 개의 목줄을 채워놓았다. 첫 번째는 세뇌 그리고 두 번째는….”
“크헉!”
폐와 심장을 톱으로 써는 듯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레이지 웜이다. 네 몸속에 넣어 둔 벌레가 내 명령에 따라 심장을 파먹고 있지.”
“레, 레이지 웜….”
레이지 웜은 노예의 감정마저 파악할 수 있는 최악의 주술이다.
데루스는 레이지 웜을 이용하여 내가 가문에서 도망치려던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고, 공명정대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세뇌도 모자라, 레이지 웜까지 먹였던 건가? 이 지독한!”
“지독한 게 아니라, 철저한 거다. 실제로 넌 세뇌를 풀었지 않나.”
데루스가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다정한 눈빛으로 웃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지. 내 가면은 남들보다 조금 두껍고 특별할 뿐이야.”
“데루스 로베르트….”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수는 없어.
난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이에 납치되어 로베르트 가문의 음지에서 사냥개이자, 암살자로 사육되었다.
감정도, 마음도 잃은 채로 살아가다가 기연을 얻어 간신히 세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야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건 철창을 벗어날 열쇠가 아니라 죽음의 족쇄였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망할!
말라붙었던 감정의 우물에 붉은 물이 차오른다. 처음으로 느끼는 분노였다.
“그 상태에서 일어선다고?”
데루스의 눈동자에 작은 흔들림이 피어났다.
“마지막까지 꼴사납게 죽진 않겠다.”
허리춤에 매단 검을 쥐었다.
정원에 들어오며 느낀 죽음의 감각은 변하지 않았다.
난 여기서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그냥 가진 않겠다. 최소한 팔 하나 아니, 상처 하나라도 만들고 죽겠다.
“으아아아아!”
단전에 가득 찬 오러를 폭발시키며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뻗어나가던 칼날이 반으로 뚝 부러졌다.
딸칵.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계가 회전하며 데루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뒤집히고, 달이 거꾸로 섰다.
아….
이제야 알았다. 내 목이 데루스의 검에 잘려 나갔다는 걸.
하지만 암살자의 검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부러진 검날 뒤에 숨은 섬뜩한 오러가 데루스의 허연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추잡하군.”
데루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파리를 쫓는듯한 가벼운 손짓에 마지막 검격이 촛불처럼 꺼졌다.
역시나….
데루스는 대륙 최강이라 칭해지는 무인. 내가 이기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놈은 강하고, 난 약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을 리가 있나!
가슴 밑바닥에서 번져가던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 올랐다.
데루스에게 평생을 농락당한 게 억울했고, 기연으로 얻은 ‘불의 고리’를 완성 시키지 못하는 게 미치도록 아쉬웠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신도, 악마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루스의 가면을 벗기고 놈의 목을 베겠다는 분노가 전신을 가득 메운 순간 내 세계가 빨갛게 멎었다.
* * *
“음….”
데루스 로베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막았거늘.’
저 쓰레기가 마지막에 내지른 검격을 완벽하게 차단했음에도 손등에 작은 상처가 벌어졌다.
피가 흐르는 상처라니,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군.’
놈은 스스로 세뇌를 풀었고, 레이지 웜의 고통을 견뎠으며, 자신에게 상처까지 입혔다.
소모품으로 사육한 사냥개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당혹스러웠다.
‘다만.’
라온은 이미 죽었다. 상식을 벗어난 놈이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치워라.”
데루스가 등을 돌리자, 정원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무인들이 튀어나와 라온의 시체로 다가갔다.
우우웅.
뻘건 핏물에 잠긴 라온의 목걸이가 푸른빛을 내뿜었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노>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분노>가 당신의 육체에 강림…그릇이 사망했습니다!]
[오류가 발생….]
* * *
환생.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부분은 믿지 않는 환상의 개념.
라온 역시 환생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평생을 세뇌에 걸려 있었고, 세뇌에서 풀려났을 땐 로베르트 가문을 벗어날 준비로 바빠서 그런 허무맹랑한 것 따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햇살아. 여기 봐봐!”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적안의 미녀가 파란색 딸랑이를 흔든다.
“빨간색도 있어!”
왼손에 들고 있던 빨간색 딸랑이도 앞으로 내밀었다.
딱딱딱!
두 딸랑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금발 여성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후.”
라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딸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 이쪽으로 와!”
금발 여성은 활짝 웃으며 더 신나게 딸랑이를 휘돌렸다.
지금 시야에 보이는 건 두 개다. 소시지처럼 오동통한 팔과 신나게 딸랑이를 흔드는 여성.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저 팔이 내 팔이고, 저 사람이 내 어머니라니….’
저 여성의 이름은 실비아. 지금도 믿기 힘들지만, 난 암살자였던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저 여성의 아이로 환생해버렸다.
처음엔 당연히 꿈이라고 여겼다.
한숨 자고 나면 다 끝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도 자도 이 요상한 꿈이 깨질 않았다.
그렇게 의심스러운 하루하루가 지나 100일이 되었고, 그제야 라온은 자신이 환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햇살아! 이쪽이야!”
“아우!”
딸랑이를 향해 천천히 기어가자, 실비아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 조금만 더!”
라온은 실비아를 따라 아장아장 기어서 딸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부….”
하지만 무거운 머리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헉!”
실비아가 딸랑이를 던져버리고 몸을 던져서 쓰러지려던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빠르네.’
그녀의 몸은 쾌속했다. 오러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적당한 무예는 익혔던 것 같았다.
“놀랐지? 괜찮아요. 괜찮아.”
실비아가 라온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우.”
라온이 손을 흔들었다. 조금도 놀라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표현했지만, 그녀의 두드림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햇살이. 엄마랑 꽃님 볼까?”
실비아는 자신을 업은 채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따스한 햇볕이 솜이불처럼 보드랍게 내려왔다.
‘아직도 햇살이라고 불리다니….’
실비아가 부르는 햇살이는 당연히 이름이 아니라 태명이다.
가주가 와서 이름을 정해줘야 한다는데 더럽게 바쁜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100일이 지난 지금도 태명인 햇살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후….’
라온은 실비아의 품에 안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었고, 벽엔 고급스러운 바다색 벽지가 발라져 있었으며, 천장에는 마법 등이 달려 밤에도 불이 들어왔다.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자는 아이의 몸인지라, 많은 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여긴 부잣집이다. 그것도 꽤 명성 있는 가문.
‘나쁘지 않아.’
어차피 환생했다면 평범한 가정보다는 돈 혹은 힘이 있는 가문이 낫다.
‘복수해야 하니까.’
데루스에게 목이 잘릴 때의 섬뜩함은 아직도 선하다.
암살자로 사육되며 감정이 모두 마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죽기 전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는지 놈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만큼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조급해서는 안 돼.’
라온은 차분히 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까지 이 방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의 위치가 뭔지 아는 게 없다.
일단 상황을 파악한 뒤 복수 준비를 해도 늦진 않는다.
암살자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내였고, 자신은 최고라 불렸던 암살자였다.
감정과 복수심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거기다.’
전생의 기연을 통해 1000년 전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검사의 기예 ‘불의 고리’를 얻었다.
지금부터 ‘불의 고리’를 익혀나간다면 암살이 아니라, 정면 승부를 통해서도 데루스 로베르트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서 참고 또 참아야 한다.
‘그건 그렇고 또 졸리기 시작하는데….’
실비아의 품에 안긴 채로 따스한 햇볕을 받으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얼마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졸리다니, 아기의 몸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햇살이 졸려? 그럼 코 자자.”
실비아가 방긋 웃으며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더 느리게 한다. 꾸벅거리며 목이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실비아 님!”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실비아의 직속 시녀가 들어왔다.
“가, 가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시녀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
그녀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 집안의 가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지, 지금이라도 준비를….”
“이미 늦었습니다. 바로 앞까지 당도하셨어요!”
“이런!”
실비아도, 시녀들도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뚜벅.
반쯤 열린 문밖에서 몸이 움츠러질 정도로 딱딱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가 대체 누구지?’
라온이 살며시 눈을 뜨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금발을 이마 위로 넘긴 적안의 노인이 다가온다. 그 위압적인 걸음에 실비아도, 시녀들도 몸을 떨었다.
‘아….’
노인의 눈을 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주변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
“아, 아버지.”
“이 아이인가?”
실비아의 앞에서 멈춘 금발 노인은 싸늘함만이 담긴 시선으로 턱짓했다.
“아, 네.”
실비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라온을 가주에게 내밀었다.
‘아….’
라온의 동그란 눈매가 크게 뜨여졌다. 정면에서 가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발적안. 그리고 얼음장을 두른 듯한 냉막한 인상의 노인…아!’
작은 머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대륙의 정점이라 불리는 가문의 주인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작은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난 대륙 최강의 가문에서 환생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