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원죄 (3)
당장에 움직이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자는 동안 자연히 회복된 신성력이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몸을 완전히 치료할 수준은 안 된다.
최소한의 조치를 해둔 뒤 나머지는 한 번에 치료하는 게 효율이 높을 터. 그동안은 클레어와의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72점. 거기다 28번 문제는 내가 틀리기 쉬운 문제니까 실수하지 않도록 기억해두라고 했지?”
“씹…….”
원한 관계의 정리는 정리고. 교육은 교육이다. 클레어는 최소한의 기초 교육은 끝내둬야 한다.
저택에 감금되다시피 살아온 기간이 길었던 만큼 남들보다도 지식의 양이 뒤처지니 말이다.
“씹? 방금 씹이라고 했냐? 뒤에 붙는 말은 뭐냐? 이거 안 되겠네. 예절 수업을 두 배로 늘려야겠어.”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세 배.”
“…….”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일이다.
나야 애초에 뒷골목이나 돌아다니던 놈이라지만 클레어는 아니지 않나. 몰락했어도 귀족 영애.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직위에 걸맞은 삶을 살게 될 거다.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자유로운 밑바닥 인생에서 억압되고 괴로운 귀족으로 만들어주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이쪽이다. 외우는 쪽이 아닌 네 이해력을 확인하기 위한 산수 문제지. 풀어. 10분 준다.”
“‘그나저나’라고 했잖아요!”
“그래 휴식 5분 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동안 끝내.”
휴식은 중요하지.
스트레스가 쌓인 거 같으니 휴식 시간을 주기로 했다.
물론 곧바로 시간을 잰다.
갔을 때 리네아가 사준 회중시계가 큰 도움이 됐다.
“언니가 증오스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원래 어릴 때는 감정의 기복이 큰 편이지. 너도 지금은 이렇게 욕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다 널 생각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우선 박사 학위부터 따자. 그러면 내 마음을 이해해줄 거다.
“……그나저나 전부터 생각한 건데 문제를 꽤 잘 만드시네요.”
“그런가? 그만큼 너한테 교육의 기회가 없었다고는 생각…….”
“리네아 언니도 그렇다고 말한 거니까 제 교육 환경으로 트집 잡을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래? 그럼 내가 문제를 잘 만든다는 게 맞다는 건데.”
기초 교육이 덜된 클레어와 달리 리네아는 이미 박사 학위까지 따낸 뒤다. 괜히 의사겠는가?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온 그녀라면 클레어와 달리 내가 만든 문제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거다.
“가르치는 건 성격이 더러워서 안 맞지만, 내용 자체나 설명에 문제도 없다고 했어요.”
“칭찬하는 거 맞지?”
“맞지 않을까요?”
리네아의 인증이다. 이쯤 되면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 잔머리가 아니라 지식 면에서 말이다.
“혹시 로스트 씨도 귀족이었던 건가요?”
“글쎄. 모르페우스에게 기억을 빼앗겨서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 그랬죠…….”
“그런데 내 지식의 근원은 귀족과는 상관없을걸?”
“그런가요?”
“좋은 선생님이 있었거든.”
내게 검을 가르쳐준 게 스승님이었다면, 내게 사회적인 지식 전반을 가르쳐주신 건 선생님이다.
스승님은 내가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사회생활을 잘 못 했다.
산에 틀어박힌 이유가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
그때 당시의 생활 전반은 기본적으로 선생님이 해결했다.
식사, 의류, 교육 같은.
“좀 엄격하긴 했지만, 확실히 수완은 있었다고 생각해.”
이렇게 내가 배운 것들을 클레어에게 베풀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스승님께서는 지식을 단순히 기억시키는 게 아니라 그 지식의 활용처 같은 걸 같이 기억시켰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나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좋은 분이셨나요?”
“글쎄……. 의외로 나는 선생님을 좋게 생각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지. 뭐, 엄격하시기는 했으니까.”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화내는 게 무서운 타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한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그녀의 도움이 컸으니까.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혹이 괴롭다.
“내가 선생님과 스승님을 기억한다는 건, 그 순간이 소중하지 않았다는 걸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나는 세상에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꿈을 꾸는 자> 모르페우스와 마주쳤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이해하기 힘든 게 시련이다.
그때는 이미 한 차례 내 기억에 구멍이 뚫렸겠지.
그럼에도 두 분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는 건 어쩌면…….
“어쩌면 두 분이 날 납치했고 고된 훈련을 강요하거나 교육이 강압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건…….”
내 기억 속의 추억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추억으로 기억하는 것과 그때 당시의 감정은 별개.
모르페우스가 그 기억을 건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의아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 선생님과 스승님. 두 분 다 내게는 훌륭한 보호자였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언제 한 번 돌아가서 대화해보기는 할 거야.”
“기억을 잃는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가혹한 일이었네요.”
그들이 내 은인이었다는 걸 믿고 싶다. 그래서 기억을 잃고 뒷골목을 전전하면서도 원래 있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거다.
무서웠으니까.
내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이 행복한 추억이 사실은 가혹했던 고통의 순간이 아니길 바랐으니까.
“5분 지났다. 책 펴.”
“하나만 더요. 선생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나요?”
“레벤나. 레벤나 선생님.”
“그렇군요. 제가 기억해둘게요. 정 무서우면 제가 먼저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니까요.”
“꼬맹이가 건방지게 어른을 배려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나약한 인간은 아니다. 예전이라면 몰랐을지라도.
지금은 내 씁쓸하고 괴로우며, 동시에 소중했던 추억들을 하나둘 버려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짜로 책 펴.”
클레어는 얌전히 책을 폈다.
이야기가 조금 무거워졌던 만큼 반발할 수 없었던 거겠지.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이젠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일이지만.
클레어가 저렇게 부담감을 느끼고 열심히 해준다면야 불쌍한 척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게 한동안 클레어의 교육을 진행했다. 클레어는 교육에 열성적으로 따라와 줬지만…….
“집중력이 한계인가?”
“네.”
“순순히 대답하는 걸 보니 진짜로 하기 싫은가 보네.”
저걸 곧이곧대로 말하네.
일말의 망설임도, 빈말도 없는 걸 보니 질색하는 게 분명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나갔다 와야겠네.”
“그 몸으로요?”
“이젠 괜찮아.”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깁스는 진즉에 빼버렸다.
이제 신성력은 어느 정도 모았으니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다.
“그랬다가 습격이라도 당하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루비아 사냥꾼 병력의 80%가 집결해 있는 장소에도 생각 없이 들이받는 녀석이야. 습격하려면 내가 기절해 있을 때 했겠지.”
그러지 않는 걸 보면 그쪽도 역시 그냥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타이탄이 그 꼬맹이와 함께 실종이라는 건 신경 쓰이지만…….
그 괴물 같은 녀석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애초에 버티지 못할 걸 판단했으면 도망이라도 쳤겠지.
그걸 고집 피우면서 개죽음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녀석이 아니다.
“그래서 실패했으니 조금 더 신중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령 혼자 돌아다니는 걸 노린다던가.”
“혼자 갈 생각은 없어. 내가 지금 일어난 걸 보면 쿠루드도 일어났겠지. 나보다 튼튼하잖아?”
“사냥꾼 길드의 마스터를 마음대로 부리는 게 자연스러우시네요.”
“우리 동료가 생명의 은인이라는데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거기다 그 녀석의 입방정 때문에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았다.
지금까지 나만큼 깊은 다친 사람이 없었으니 녀석이 책임감이 있다면 모른 척할 수는 없을 터.
“사냥꾼들을 보살핀 건 리네아 언니인데 어쩜 그렇게 뻔뻔하실 수가 있는지…….”
“리네아라면 이해해줄 거야.”
“리네아 언니가 있었다면 나간다고 입을 턴 시점에 이미 화를 내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애초에 전제조건 시점에 제지당했을 게 뻔하다.
일단은 수인이라 완력으로는 나도 당해낼 수가 없다.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억누른다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아마 지금의 나로서는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겠지.
의사의 마음가짐이라는 게 생각보다도 독하다.
“그럼 더더욱 리네아가 없을 때 다녀와야겠네.”
리네아가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한 번 돌아보고 오는 게 좋겠다.
* * *
예상대로 쿠루드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염병.”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
원래 남자라는 생물이 즐거울 때 욕 나오고 기쁠 때도 욕이 나온다.
저건 분명 자신의 과오를 씻어낼 생각에 기쁜 게 분명하다.
“환자라는 놈이 얌전히 병상에 누워있을 것이지.”
“언제 그놈이 돌아올지 모르는 이상 정보 수집은 철저히 해야죠.”
“쯧.”
내 말에 틀린 요소는 없다.
꼬맹이가 습격해오지 않는 건 그만한 피해 때문일 거다.
사냥꾼 여럿을 상대하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몸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터프한 타이탄이 직접 막아서기까지 했으니까.
더군다나 그렇게 막아서는 모습에 자신감과 여유가 있었다고 하니 뭐라도 숨겨둔 수가 있겠지.
없다면? 뭐, 문제가 있겠는가?
그 꼬맹이는 이런 상황에 이를 때까지도 나를 죽이지 못했다.
물론 그게 남들이 노력해준 결과라는 건 안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토록 증오하는 만신전의 사제인 나를 살려주겠다는 제안.
그건 그만큼 녀석 내부에 살인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타이탄이 죽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뭐, 최악의 경우에는 죽지만 않고 어딘가 붙잡혀서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이름부터 듣죠. 그 망할 꼬맹이. 자기소개도 할 줄 모르던데 따로 들은 건 없습니까?”
“아, 그렇네. 이름은 릴리아. 성은 없어. 평민…… 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람인지도 의심스럽지.”
“안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릴리아라니, 그 맹견한테는 너무 화사한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하긴 애초에 패션부터 이상했다.
“옷은 한없이 짧고 편하게 입으면서 이런 비 오는 날, 털 달린 코트 고수하는 미친년이다 보니 더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화가 많네. 사제 친구.”
“팔다리를 으스러트리도록 짓밟히면 없던 증오도 생깁니다. 그래도 저는 신실한 사제로서 그 망할 미친년을 용서하기로 했지요.”
“말과 행동이 다른데?”
“원래 사람이라는 게 겉과 속이 다른 법입니다. 그걸 회개하는 게 저희가 행해야 할 고행이지요.”
“그럼 그 고행 좀 하지 그래.”
“하려고 찾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뭐하러 이런 비가 쏟아지는 날 그 망할 꼬맹이의 정보를 찾고 있겠는가.
우선은 정보 수집이다. 실종됐다는 녀석이 어디 있는지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찾아내야 할 거다.
만일 이대로 루비아를 떠났다가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살해라도 당했다가는 회귀 전의 반복이다.
적어도 여기서 붙잡아야 한다.
“그럼 이제 세력에 대해 말해보시죠. 그쪽은 어떻습니까?”
제3세력. 그러니까 릴리아라는 소녀는 홀로 세력 취급을 받아도 될만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세력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겠지.
“그 꼬맹이 비위 맞추는 문제아들,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그야 뭐…….”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은 많고 그런 놈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반감을 사는 법이다.
그 말은 즉.
“전부 길드 유치장에 처박아놨지.”
그동안 고생이 심했을 사냥꾼과 상인들이 구심점을 잃은 문제아들을 내버려 뒀을 리 없다는 거다.
“들은 건 있습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이것저것 대답하는 놈들이라 편하긴 했어.”
“쓸만한 정보는?”
“없지. 애초에 일정한 행동 패턴이라는 게 없는 꼬맹이였으니까.”
“그럼 발품 파는 거죠. 지금처럼 이렇게. 일합시다. 마스터.”
쿠루드의 표정이 구겨진다. 마스터의 위치에 오른 이후로 이런 잔일을 해본 지 꽤 됐을 거다.
“로스트 씨!!”
그렇게 한동안 도시 내를 수색하고 있던 차. 약초를 캐러 갔다던 리네아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서는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니, 환자가 멋대로 탈주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어. 돌아가자.”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네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
“내가 못 살아, 진짜!”
마주 손을 흔들어주던 리네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 등짝을 연신 후려치기 시작했다.
“커흡?!”
하는 행동은 귀여운 편이지만,
리네아는 자신의 완력이 얼마나 강력한 건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게 내가 고통에 입도 뻥긋 못하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쿠루드는 오늘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이야, 속이 다 시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