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침식하는 자 (3)
행운인지 불운인지.
난입해온 소녀. 즉, 릴리아는 로스트를 바로 죽이지는 않았다.
죽일 듯한 살의를 품은 채로 목을 조른 그녀였으나 그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
“컥……!”
사실상의 고문이 시작됐다.
마치 사냥이 끝난 맹수가 사냥감으로 장난을 치는 것처럼.
으득! 으드득!
릴리아는 로스트의 팔 한쪽을 붙잡은 채로 발에 힘을 줬다.
무언가 뜯겨나가는 듯한,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문에 내성이 있는 로스트였기에 비명을 내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주변에 쓰러져 있는 사냥꾼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팔은 잡아 뽑을 것처럼 고통을 주고 있는 자.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고통을 감내하는 자.
그 침묵으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들려오는 인간이 부서지는 소리.
“아, 이제야 알 거 같아.”
릴리아는 한참이나 로스트를 괴롭히다가 돌연 떠올랐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로스트를 살려두고 있는 건 그녀의 소신 때문이 아니다.
물론 남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생명의 무게라는 건 그녀가 가장 실감하고 있는 거니까.
고통은 찰나에 불과할지언정 죽음은 영원하다.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괜찮아지지만, 죽음만큼은 되돌릴 수 없다.
“너한테 아빠의 흔적이 느껴지는 이유가 뭔지, 이제야 알겠어.”
그녀는 죽음이 싫다.
하지만 그와 비슷할 정도로 만신전의 사제들이, 악마들이 싫다.
그녀가 지금까지 로스트를 죽이지 않은 건 그에게서 ‘침식’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도.
그런 힘을 몸에 담았으면서도 살아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보류했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모종의 이유가 있기에 살려두는 건가 싶었다.
눈앞의 존재가 자신을 향해 보내온 전령일 가능성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의 진짜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아빠도 지금의 나처럼 너를 그냥 죽여버리는 거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게 분명해.”
그녀가 싫어하는 것만큼. 아니, 그녀보다도 더욱 <침식하는 자> 에레무스는 만신전을 싫어한다.
그는 만신전의 어두운 역사 그 자체다. 태곳적부터 시행되온 만신전의 외면의 결과물이다.
‘이 자식…….’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
릴리아는 로스트를 죽이기 위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로스트는 몽롱한 정신 상태로도 그걸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괴로워하는 거지? 그치?”
로스트는 죽어가고 있다. 그녀도 에레무스와 마찬가지의 권능을 조금이나마 행사하는 게 가능하다.
침식을 가속화시키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라는 거다.
“아프지? 속이 뒤틀릴 텐데? 내부에서부터 장기가 녹아내리는 감각. 느껴지지 않아?”
릴리아가 로스트를 짓밟은 채로 물었다. 발을 지르밟을 때마다 몸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피를 울컥 쏟아낸다.
내부가 녹아내리고 있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침식이라는 권능을 자극한 결과다.
로스트의 눈앞에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상대의 능력을 살펴보던 눈은 결국 고통 속에서 서서히 꺼져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얏!”
촤악!
로스트를 짓밟고 있던 릴리아의 다리가 날아갔다. 자잘한 상처라면 모를까 수많은 사냥꾼을 상대할 때도 입지 않았던 중상이다.
불시의 일격이었기 때문에?
‘아니야.’
릴리아는 자신의 다리가 날아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고찰했다.
자신을 공격한 그것에 대해 살핀다. 검은 머리카락과 흰색 의복.
몸놀림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가진 무기도 특별하지 않다.
여우 귀를 가진 소녀, 리네아 스피린의 모습을 확인한 릴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지?’
그녀가 상처를 입게 된 것도 너무나도 많은 공격을 불시에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녀의 권능 중 하나는 육신을 안개처럼 만드는 것.
그녀의 부모처럼 전신을 안개로 휘감는 건 불가능할지언정 이런 치명상을 입을 확률은 극히 낮다.
애초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그녀가 한 공격에 반격당했을 때 정도.
주먹이 까지거나 발등이 찢어지는 게 대부분이고 쿠루드처럼 안개마저 뚫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들이 예외에 속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한 공격이 그 예외에 속하는 공격이었나?
“흐음.”
릴리아는 피가 쏟아지기 시작한 절단면을 순식간에 안개로 변화시켜 잘려 나간 다리를 이어붙였다.
스칵!
그리고 안개로 이어진 다리를 바로 당겨오지 않고 채찍처럼 휘둘러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컥!”
“응?”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상대를 뒤에서 걷어찬 끝에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괴롭히고 있던 사내가 어느새 사라졌다는 사실.
무방비했던 게 아니다.
“이해가 안 되네…….”
등을 내어준 거다.
자신에게서 사내를 지키기 위해.
타오르던 분노가 사그라든다.
그녀는 사람이 죽는 게 싫다. 그 의미를 실감하고 있으니까.
그건 그녀가 죽음을 앞둔 부모의 곁에서 도망친 경위이기도 했다.
소중한 누군가가 영영 사라진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와 상실감.
누군가를 죽이려 할 때마다 그 감각이 떠올라 주저하게 된다.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 생각했건만,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 중 하나인 만신전의 사제가 상대라면 그 속박에서 벗어날 줄 알았건만.
“소중한 사람인가 봐?”
저런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진다.
“……아뇨. 솔직히 말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럼 왜?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나?”
“없죠. 지금도 후회되네요.”
리네아는 짐승의 손톱에 찢겨나간 듯한 등의 상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아프다. 너무나도 아프다.
로스트의 말대로 물러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가장 위험한 곳, 가장 위험한 순간에 저질렀다.
“로스트 씨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착한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
“글쎄요.”
그녀가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만큼 로스트에게 가치가 있는가 하면 역시 그건 아니다.
그는 마냥 착한 사람이 아니다.
선동을 일삼고 사람을 은연중에 조종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예전에 투정 부린 적이 있었어요. 그 대가라고 생각하려고요.”
“이상한 녀석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녀는 줄곧 자기 목적 외의 것들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로스트를 따라왔던 것도 그의 비밀을 밝혀내려고 했을 뿐이다.
그녀는 타산적인 거짓말로 자신을 꾸민 채 로스트에게 접근했다.
오직 자신을 위한 일이다. 그렇게 되뇌며 말이다.
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로스트가 꾸미고 저지르는 일들이 즐거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겠어요.”
니다벨리르에서 피노키오를 구하려고 했을 때. 로스트가 책임감을 느끼며 뒤돌아서려고 했을 때.
그녀는 그걸 만류했다.
로스트의 의견에 따랐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왜 상대의 의견을 반박하는 듯한 행동을 했을까?
지금껏 로스트에게 잘 보여 그의 비밀을 캐낼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 답은 생각보다도 간단했다.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인걸.”
그저 그녀가 그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냉정할 수 없었다.
순간순간의 충동으로 일을 저지른다. 그녀 자신조차도 부정하고 있던 인간성은 의외로 그녀의 뿌리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곧 죽어도 의사인가 보죠.”
그녀는 유서 깊은 의사 가문인 스피린 백작가의 핏줄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된 그 마음가짐이 어릴 적부터 받아온 교육에 녹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유라면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냐고 하셨죠? 아쉽게도 저는 의사라 그런 가치를 따지지 않아요.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거야.”
리네아는 단검을 든 채 로스트와 릴리아 사이를 막아섰다.
다리를 잘라낼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아서였을 뿐이다.
숨죽인 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찰나의 순간, 기적적으로 그녀의 눈에 보이는 선이 다리를 완벽하게 일순했을 뿐이다.
수인의 신체 능력은 인간보다 뛰어나다. 감각 역시 마찬가지.
백작 가문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내에서 받은 각종 지원이 있었다.
호신술이라곤 해도 이름 높은 교사에게 배운 기술이 있다.
그러니까 싸울 수 있다.
“물러나.”
“…….”
“물러나지 않으면 다음에는 다리가 아니라 목을 벨 거야.”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협. 존댓말을 그만두고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허세다. 결국 허세일 뿐이다.
앞서 떠올린 온갖 조건들을 다 겹쳐봐도 승산은 없다.
이미 근처에 쓰러져 있는 사냥꾼들 몇몇만 해도 그녀보다 강한 자들이 수두룩할 거다.
다리를 자른 건 요행. 하지만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
자신의 이질을 이용해 상대에게 경계심을 강제한다.
“으힛.”
“…….”
“으히히히힛!”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상대는 그런 협박이 통할 존재가 아니다.
“목을 벨 수 있다면 베어봐.”
간과할 수 없는 이질?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런데 그렇게 해도 날 죽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걸?”
고작해야 이질일 뿐이다.
그녀는 숱하게 싸워왔다.
이 루비아에 들어와서 그녀가 쓰러트린 숫자만 해도 백이 넘는다.
그런데 그중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
“그리고 말에 앞뒤가 안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
쿵!
가볍게 땅을 내디딘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걸음에 리네아에게 다가간 릴리아는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의 반격을 걱정하지 않는 오로지 공격만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이야말로 그녀가 리네아의 위협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읏!”
팔을 들어 올려 릴리아의 발차기를 막아낸 리네아는 짧은 신음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일격에 팔이 부러졌다.
반격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상대는 보란 듯이 목을 내어줬는데.
“의사라며? 그럼 너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럼? 죽일 수 있어?”
“살릴 수 없다면.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는 게 우리 일이니까. 나는 살린 만큼 죽여왔어.”
“멋지네!”
퍽!
릴리아의 추가타가 한쪽 팔을 늘어트리고 있던 리네아의 복부에 정확하게 틀어박힌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힘이 없어.”
리네아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연신 콜록거렸다.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몸은 바들바들 떨린다.
경험 부족이다.
이미 팔 한쪽이 부러졌음에도 그 대처를 생각하지 못했다.
“네 멋진 각오를 봐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죽이지 않을게.”
릴리아는 이미 로스트를 죽인다는 계획을 접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다음에도 자신의 눈앞에서 거슬리는 빛을 휘두른다면 얘기는 다르다.
그러니 다음에도 죽이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를 해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이지 않는다니까?”
자기 발목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는 리네아 때문이다.
“……너무 뻔한 말이잖아요. 죽이지만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건데. 제가 그걸 왜 보내줘요.”
연신 피를 토하던 리네아의 호흡도 다시 고르게 돌아오고 있다. 고통을 다스리고 있는 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짜증 나는 놈들뿐이네.”
릴리아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리네아의 팔을 다른 쪽 발을 이용해 지르밟았다.
“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리네아의 팔이 푸르게 물든다. 부서진 돌바닥의 조각들에 찔리고 찢겨나간 손목에선 피가 새어 나온다.
그렇게 발목을 붙잡고 있던 리네아의 손에서 힘이 빠졌을 때.
“으어어어어어어어어!!”
또 다른 방해꾼이 나타난다.
릴리아는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괴성이 들려온 방향을 쳐다봤다.
처음 운 좋게 일격으로 쓰러트릴 수 있었던 녹색의 괴물이었다.
외형과 괴성에 걸맞은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게 보인다.
“…….”
릴리아의 표정은 싸늘했다. 더는 놀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마치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자제하고 있었던 ‘침식’의 힘이 퍼져 나온다.
“큭……!”
콰드드드드드득!!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든 타이탄이 전력을 다해 달려든다.
첫 조우 때와 같은 상황이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이뤄진다.
타이탄의 돌격을 막아내던 릴리아가 그 힘을 견뎌내지 못한 채 땅을 긁어내며 뒤로 밀려난다.
침식의 힘을 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 이상의 힘.
처음 있던 장소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뒤에야 릴리아는 타이탄의 돌격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리네아 스피린.”
타이탄은 지금껏 한 번도 부른 적 없던 리네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인정의 의미.
꺼림칙한 목적으로 합류했다고 한들 조금 전에 보여준 모습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스트를 데리고 벗어나라.”
전력을 다한 공격이 막힌 순간 타이탄은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처음에는 우연에 의해 당했다. 하지만 이미 상대는 쿠루드를 비롯한 강자들을 여럿 쓰러트렸다.
이 기습적인 돌격마저 막아낸 이상 승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장 튼튼하고 가장 강직한 자신이 남아야 한다.
“훌륭하군.”
타이탄의 명령조나 다름없는 말에 비척거리며 일어난 리네아는 곧바로 로스트를 들쳐멨다.
릴리아에게 차이고 짓밟힌 등에서 쓰라린 고통이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였다.
“웃기지 마.”
릴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본인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목숨을 버려서까지 살려내야 할 만큼 소중하지 않다고 했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건데!!”
그렇기에 두 사람의 행동이 그저 자신을 방해하려는 걸로 느껴졌다.
자신의 모든 걸 부정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릴리아는 자신을 억누르려던 타이탄을 단번에 밀어내고 로스트를 들쳐멘 채 달아나고 있는 리네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윽?!”
그 무방비한 등을 찢어발기려던 찰나, 릴리아는 다시금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강한 자는 아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내릴 것처럼 덧없는 느낌까지 드는 존재였다.
“와, 정말이네요.”
토끼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백발과 붉은 눈동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제일 약하다. 그녀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죽어버리고 말 거다.
그렇기에 막혔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릴리아의 망설임을 이용했다.
그 도박의 칩(chip)은 목숨.
“대성공이에요.”
본디 앤의 곁에 대피해 있어야 했던 클레어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번 잠깐의 시간.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클레어는 혀를 베 내밀더니 곧바로 총총 달려갔다.
릴리아는 그런 클레어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고 그녀를 상대로 힘을 조절할 자신도 없다.
그저 모든 게 싸늘하게 식어갔다.
사냥꾼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세상.
릴리아는 그런 세상에 마치 홀로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외로움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그게 침식이라는 이름의 권능으로 새어 나온다.
“그놈은 왕이 모두를 이끄는 자라고 했지. 맞는 말이다.”
타이탄은 그런 소녀에게 고했다.
“놈이 특별해서 구하려는 게 아니다. 특별한 건 나지. 그런 음흉하고 시답잖은 놈마저 이끄는 게 훌륭한 왕이 아니겠나.”
녹색 피부 위로 황금색의 문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왕이, 자신의 각오를 백성에게까지 강요해선 안 될 일이지.”
타이탄은 죽음 앞에서도 선보이지 않으려 했던 힘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