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침식하는 자 (2)
얕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도시에 들어오기 전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쿠루드를 구슬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에 더해 사냥꾼의 시선이 아닌 상인의 시선까지 생각했다.
쿠루드가 상인 길드 마스터와 모종의 연결이 있었다는 걸 행운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
……그런데 그 모든 게 무의미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먼저 쿠루드와의 결투에서 열세에 몰려 있던 타이탄이 노려졌다.
콰드드드득!!
방심한 건지, 아니면 작은 체구 탓에 대응 방법이 그뿐이었던 건지. 타이탄은 그 소녀의 공격을 한 손으로 받아내려고 했다.
그렇게 정면으로 날아드는 발차기를 손바닥으로 막아봤으나 그대로 땅을 긁으며 밀려 나간다.
쭉 뻗고 있던 팔은 얼굴에 닿기 직전까지 굽혀졌으며 전신의 근육에는 힘줄이 도드라졌다.
“으힛!”
“무슨……?”
외형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강력함. 그에 더해지는 민첩함까지.
타이탄을 밀어 넣던 상태에서 이어진 다른 쪽 다리의 발차기가 이윽고 타이탄의 머리를 후려 찼다.
노린 건지 우연인 건지 모른다.
다만, 그 추가 공격이 정확히 턱을 가격해 단 일격에 타이탄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이적을 이뤄냈다는 게 문제.
“다음은 너!”
“이런 씹……!”
타이탄과의 체구 탓에 자기 키만큼의 높이 위에 떠 있던 소녀가 타이탄을 딛고 날아들어 이윽고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창을 뻗는 쿠루드를 포착한다.
휘둘러지는 팔, 닿을 수 없는 거리. 하지만 안개처럼 흩어진 소녀의 손은 정확히 창을 붙잡고 있던 쿠루드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어진 안개 전체가 육신이라는 것처럼 소녀가 힘껏 손을 잡아당기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큭?!”
깡!
곧바로 붙잡힌 손에서 창을 놓은 쿠루드가 반대편 손으로 창을 들어 올려 소녀의 주먹을 막아낸다.
마치 금속과 금속이 부딪친 듯한 소리와 함께 쿠루드의 몸이 크게 뒤로 젖혀졌다가 용의 날개와 꼬리를 이용해 중심을 다잡는다.
“흐앗!”
“컥!”
소녀의 추가타는 또다시 발차기.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리꽂히는 그 일격은 겨우 중심을 잡아두고 있던 쿠루드를 땅에 못 박는다.
“읏! 아파라…….”
거대한 소리와 함께 돌바닥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가운데. 그 틈에 섞여 있던 회색의 오러가 소녀의 뺨에 작은 실선을 그었다.
예전에 들은 걸 토대로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게 첫 유효타.
바닥에 쓰러진 채 창을 들어 올리고 있던 쿠루드의 피투성이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 게 보였다.
“흥.”
쾅!
소녀는 그 작은 상처에 열이라도 받은 건지 쓰러져 있는 쿠루드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발을 날렸다.
하지만 위력이 약하다.
명백하게 힘 조절을 하고 있다.
아까와 같은 수준의 공격을 했다면 제아무리 튼튼한 용인이라고 해도 버틸 수 없었을 터다.
-그 꼬맹이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까.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전, 상인 길드의 마스터, 앤이 했던 말.
지극히 야생짐승 같았던 소녀의 행동에 깃든 유일한 인간성.
아니, 그어져 있는 일선.
그게 유일한 공략의 단서다.
“…….”
지금은 일단 상황을 지켜본다.
쿠루드가 걷어차인 직후 상황 파악이 끝난 사냥꾼들이 모조리 달려들기 시작한다.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던 현장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난입.
그로부터 곧바로 이어진 타이탄과 쿠루드의 제압.
거기까지가 불과 몇여 초.
그런 상황에 이 정도로 행동을 빨리했다는 건 그들의 판단력이 결코 흐리지 않다는 걸 뜻한다.
하지만 오러를 사용하지 못할망정 전투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타이탄에 이어 길드 마스터인 쿠루드까지 순식간에 당한 상황.
달려들고 제압당한다는 일련의 흐름은 결코 뒤집을 수 없었다.
물론 수의 우위라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칫!”
쿠루드가 해낸 것처럼. 다수의 실력자가 달려들자 소녀에게도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신을 안개처럼 변하게 할 수는 없는 건가?”
한계점이 도드라진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적진 한복판에 들어선 거다.
더군다나 여긴 길드 건물의 훈련장. 물러날 수 없는 위치다.
그렇기에 전력의 온존을 위해 대기시켜놨던 실력자들 모두가 나설 수 있다.
“로스트 씨.”
“리네아, 클레어를 데리고 물러나 있어. 이제 위험해질 테니까.”
“로스트 씨는요?”
“한 말은 지켜야지.”
나는 이미 협력하겠다고 했다. 상황을 관망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은 해야 한다.
상대, ‘떼를 쓰는 꼬맹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녀석이 그 칭호 그대로의 성격이라면 위험해질 거다.
몸에 상처가 생길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면 그동안 다친 적도 없었던 걸로 보인다.
그런 상태에서 익숙하지 않은 고통에 연속해서 노출된다면?
알량한 불살주의가 어디까지고 통할 거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흐아앗!”
아니나 다를까 소녀의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았던 여유가 사라졌다.
아까와는 명확하게 다른 위력.
쿠르드나 타이탄을 차 날리던 위력의 발차기가 평범한 사냥꾼의 몸에 작렬한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간 사냥꾼은 잠시 몸을 떠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죽지는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그동안 계속 지켜오던 불살의 규칙을 단번에 깨트릴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수위는 달라졌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위력으로 공격한다고 해도 문제없다.
그런 발상에서 이어진 수위 높은 공격들이 사냥꾼을 덮칠 거다.
그때 우연히 죽는 자가 나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자괴감에 멈출지, 아니면 폭주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번의 경험이 앞으로의 주저를 조금씩 지워나갈 거라는 건 틀림없다.
“우선 억눌러둘까.”
이렇게나 많은 전위가 붙잡아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성 마법의 전개에도 상당히 여유가 생긴다.
신성력을 대가로 빌려온 건 용기의 신, 티르의 족쇄.
신을 잡아먹는 늑대를 봉쇄한 전설에서 비롯된 속박의 힘이 한창 날뛰고 있던 소녀를 옭아맨다.
“윽?!”
물리적인 봉쇄에 더불어 힘과 속도에도 제약이 걸린다.
준비 시간이 길고 신성력의 소모가 격렬한 만큼 효과적이다.
“신성 마법이다! 억눌러!”
내 존재를 눈치챈 건지 몇몇 사냥꾼들이 소리친다.
다행이다.
전쟁과 용기의 신 티르는 사냥꾼들 역시 많이 믿는 신.
덕분에 당혹감을 대신해 재빠른 판단을 내려줬다.
“이게!”
지금은 일단 이 정도.
소녀의 저력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모든 걸 쏟아붓지는 않는다.
억눌린 소녀는 허우적대며 자신을 향해 무기를 들이미는 사냥꾼들을 향해 마구잡이식으로 팔다리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거리를 유지한 채 소녀를 억압하고 있는 사냥꾼들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정말로 몰려들어 마수를 사냥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그사이 바닥을 기어 내가 있는 쪽으로 피신해온 쿠루드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말을 걸어왔다.
“저 정도로 붙잡을 수 있을 놈이었으면 진즉에 붙잡았지.”
“그렇겠죠.”
“나도 하나 줘봐.”
“나중에 청구할 겁니다.”
“거 사제라는 놈이 쩨쩨하게.”
침식 때문에 쓰린 속을 진정시키고자 연초를 입에 물었더니 쿠루드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벌려왔다. 나는 바가지를 한껏 씌운 후 품에서 연초 하나를 더 꺼냈다.
“손을 떠네. 혹시 위험한 약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금단증상?”
“혹여라도 그런 거 했다가는 저희 의사 선생님이 어흥 하십니다.”
“여우가 어흥하고 울던가?”
“모릅니다. 딱히 리네아를 울리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요.”
“……당사자를 두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물러나 있으라니까.”
“클레어는 아까 본 상인분에게 맡겼어요. 물러나라고 해도 저희가 숙소를 잡은 것도 아니고 안전한 곳이 어딘지 모르니까요.”
“그것도 그렇네.”
앤의 신원은 확실한 편이다. 확실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사냥꾼 길드 건물 내에 있지도 않았겠지.
거기다 상인이니 주거 환경도 상당히 괜찮게 꾸며져 있을 터.
우리 짐 덩이가 지내기에 부족함은 없지 않을까 싶다.
“온다.”
그때 쿠루드의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내가 전개해뒀던 신성 마법이 찢겨나갔다.
전승에 따르면 신을 잡아먹는 늑대까지 붙잡은 족쇄지만, 역시 원본이 아닌 그 힘의 일부로는 시련을 붙잡아둘 수는 없는 모양.
“움직이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다 쉬었다.”
쿠루드가 창대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선다. 타이탄은 아직도 턱을 얻어맞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건만.
“만신전 소속이라며, 다른 신성 마법은 뭐 없어?”
“있습…….”
다시금 소녀를 몰아붙이기 위한 정보교환을 하던 도중이었다.
“만신전?”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였다.
마구잡이식으로 싸우던 소녀의 눈이 정확히 이쪽을 향한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짙은 살의가 물씬 느껴졌다.
“……아는 사이야?”
분위기가 일변한다.
관망하려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도망쳐야 할 상황으로 변했다.
“초면입니다. 이거 당신 때문입니다. 입조심 좀 하시지.”
“만신전에 저렇게 증오를 품고 있을지 내가 알았겠냐?”
“몰랐다곤 해도 책임은 지셔야죠. 못 오게 막아주십시오.”
“글쎄……. 그게 내 마음대로 되려나 모르겠다. 노력은 해볼게.”
소녀가 나를 적으로 인식한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 * *
에덴 제국에는 금역으로 여겨지는 장소가 여럿 있었다.
당연하지만 시련이 자리 잡은 자리 역시 그에 속한다.
그중 대표적인 게 <침식하는 자>가 자리를 잡은 ‘검은 숲’.
본디 초록색 수풀이 우거졌을 게 분명했던 그 숲은 <침식하는 자>가 그저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검게 물들었다.
<침식하는 자>는 덩치가 거대한 편이지만 여타 시련들이나 고위 마수에 비하면 아직 작은 편.
그런 그가 움직이지도 않고 중앙에서 숨만 쉬고 있음에도 숲 전체가 금역이 된 건 다름이 아니다.
“여전한 독기군.”
<침식하는 자>가 숨을 쉬기만 해도 새어 나오는 독기가 숲 전체를 물들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가장 얌전한 시련. 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련.
불분명한 미래도, 확인할 수 없는 미지와도 다른.
명확한 형태로 존재하는 시련.
“죽고 싶어서 찾아왔나?”
그곳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멋스러운 옷과 실크햇을 쓴, 장식용 지팡이로 오염된 대지를 짚어나가는 늙은 인간의 형상.
“멜리스.”
암흑의 왕, 벨리알.
“이런,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자네를 적대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났지. 감히 그 저열한 기운을 품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검게 물든 숲에 낮게 깔린다.
혐오에서 비롯된 살의가 벨리알을 향해 쏟아진다.
“살벌하군. 에레무스. 숨이 막힐 정도야. 조금 진정하지 않겠나?”
“감히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뭐 어떤가. 이 세상에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얼마나 있다고?”
“그럼 오늘 여기서 그 한 명이 사라지겠지.”
쩌억!
<침식하는 자> 언터쳐블.
또 다른 이름으로는 에레무스라 불리는 검은 사자가 싸늘하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선언과 함께 침식이라는 권능이 벨리알이 서 있던 공간 자체를 침식해 깨트려버린다.
공간 자체를 통째로 지워버리는 방어 불능의 권능.
벨리알은 그 노골적인 공격을 피해내며 혀를 내둘렀다.
공방 일체의 그림자.
그것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힘.
‘확실히…… 성가시군.’
벨리알은 에레무스의 힘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저건 괴물이다. 인지를 벗어난 초월자라는 게 과언이 아니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그조차도 쉽사리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
설령 쓰러트릴 수 있다고 한들 그만한 피해를 동반해야 한다.
“그만하게, 나는 어디까지나 대화를 하려고 찾아왔을 뿐이야.”
“나는 그럴 생각 없어.”
“……피곤하게 만드는군.”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네놈이지. 내가 너를 찾아가지 않았듯, 네놈도 나를 찾지 말아야 했어.”
일광욕을 즐기듯 엎드려 있던 검은 사자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때마다 공기가 흔들리며 주변을 침식해 들어간다. 이미 본인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힘.
그렇기에 더는 세상에 피해 주지 않게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존재.
눈앞의 절대악을 쓰러트리기 위해 소모된다면 오히려 좋다.
그런 생각이 여과 없이 드러났기 때문에 벨리알은 오히려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에레무스의 생각이 저렇다면 벨리알에게는 손해밖에 없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조만간 사라질 존재와 맞붙어 회복 불가의 상처라도 입었다가는 큰일.
“자네 딸이 걱정되지는 않나?”
“나를 협박할 생각이었다면 큰 실수를 한 거다. 내 딸의 목숨과 네놈이 생각하는 자신의 목숨.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는 저울에 알아서 달아보고 왔어야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정신.
벨리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만 그 덕에 오히려 새로운 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벨리알은 에레무스가 어떤 존재인지 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가장 외로운 존재.
그렇기에 은둔자(ĕrémus)라는 이름이 붙여진 게 아니던가.
그런 그가 유일한 동족이라 할 수 있는 딸을 걱정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일.
에레무스가 했던 말처럼 벨리알 역시 저울질은 해봤다.
그렇기에 담은 말이다. 그럼에도 저런 식으로 반응했다는 건…….
‘이미 손을 써뒀군.’
확인하고자 했던 걸 확인했다.
분명 강력한 존재지만, 아직 어른스럽다고는 할 수 없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외로웠던 존재로서는 떠올릴 수 없었던 거다.
강하고 통제할 수 없었기에 외로웠고 그로 인해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침식하는 자> 언터쳐블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
“물러가도록 하겠네. 쫓아오는 건 뭐……. 알아서 하시게.”
물론 쫓아올 리가 없다.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괴물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이상 세상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벨리알이 아닌 다른 시련들조차도 꿰뚫고 있다.
그런 자가 움직일 리가 없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변 일대를 죽음으로 물들인다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벨리알은 자신의 권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늦게 퍼져나간 침식이 주변 일대를 잠식해 부숴버리는 걸 보며 등골이 오싹해지기가 잠시.
“그나저나…….”
에레무스가 써둔 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십자가 새겨진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기묘한 분위기의 청년.
만신전 소속의 이단심문관.
“……만에 하나라도 그게 정말이라면 감탄할 수밖에 없군.”
가장 떠오르기 쉬운 답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결론이다.
에레무스는 멜리스를 증오한다.
자신을 마인으로 만들어 세상에서 고립시킨 존재다.
당장에 보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에레무스는 멜리스와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
그래서다.
“나만큼이나 싫어했을 만신전에게 고개를 숙였는가.”
그를 마인으로 만든 게 멜리스라면 그를 세상에서 고립시킨 게 바로 만신전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두 존재 앞에서 하나를 용서했다.
아니, 설령 용서한 게 아닐지라도. 그저 일시적인 용인에 불과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어린애가 어른이 돼버렸군.”
시련이 자신을 극복했다.
그 사실은 벨리알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 *
“우습지 않아?”
자신을 가로막던 수십 명을 모조리 때려눕힌 소녀가 말했다.
“너희들은 마인이 되어버린 사람 앞에 늘 두 가지 선택지를 말하지. 이대로 살해당할지, 아니면 기약 없는 미래를 기다리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소에 처박힐지.”
소녀의 힘 조절은 대단했다.
아무리 봐도 꼭지가 돌아버린 것처럼 돌격해오던 소녀는 이 순간이 될 때까지도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내 목을 짓누르고 있는 발에는 그 어떠한 조절도 없다.
느껴지는 건 명확한 살의.
물러날 타이밍을 놓쳤다.
“너희는 자의로 마인이 된 자들이 아니라, 휘말려 그렇게 된 자들에게도 그런 소리를 지껄였어.”
호흡곤란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질 즘 들려온 말.
-버크 라이안, 너한테는 실질적으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익숙한 선택지다.
-나한테 여기서 정화 당하거나.
내가 감히 입에 담았던 말이다.
-혹은 지하 감옥,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장소에 갇혀서 평생을 보내거나.
-하……! 죽음과 감금, 그 두 선택지에는 무슨 차이가 있어?
-차이는 하나뿐이야. 후자의 경우에는 더 비참해지는 거지.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후자를 선택한 이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말이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공간에 내팽개쳐졌다.
흡사 고독의 항아리처럼, 식량도 없고 간수도 없는, 그런 어둠 속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
아니면 언젠가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꿀 뿐.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들을 위한 노력을 해본 적도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너희가 불편하다고 밀어둔 것들,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둔 이들.”
그들을 위한 연구는 없다.
마인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찾는 건 몇 세기나 지났는데도 지지부진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으니까 당연한 결과다.
사실상의 연구 포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마인 앞에서 그 선택지를 내밀어왔다.
어쩌면 그건 그저 상투적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희망 고문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당연한 결과다.
만신전이 외면했던 진실.
쌓아둔 고독의 항아리의 내용물.
“그게 바로 우릴 만들었어.”
그 원죄가 돌아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