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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이단심문관의 악마 사냥법-30화 (30/42)

30화. 꿈을 꾸는 자 (1)

타이탄의 의견은 내게 많은 걸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래, 전제조건이 틀렸을 경우를 상정해 둬야 할 거다.

이전의 대책보다 더 강력하게, 피노키오의 목적 자체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고, 인간에 대한 악의가 가득 차 있을 경우의 얘기다.

그럼 두 가지 가정이 있다.

첫 번째로, 피노키오가 제페토가 알던 것과 달리 변심했을 경우.

두 번째로, 제페토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을 경우.

“…….”

멀리서 주저앉은 채 리네아가 끓인 차를 받아들고 있는 제페토의 모습을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우리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믿고도 싶고 말이다.

하지만…….

“저는 아직 성녀님처럼 되려면 한참 멀었나 봅니다.”

마음속에 싹트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아무래도 사람을 무턱대고 믿기는 힘든 모양이다.

성녀님처럼 무한한 신뢰를 내비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자, 그럼 어떻게 될지.”

크고 작은 기계 장치들을 부수고 여기까지 왔다.

드디어 니다벨리르의 중심부. 통칭 <기계 장치의 성>에 도착했다.

이제 와 돌아가기는 늦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뿐이다.

“경계한 채로 최대한 푹 쉬어둬.”

기계 장치의 성에서는 지금도 여러 기계 장치들이 쏟아지고 있다.

당장에 보이는 건 순록처럼 생긴 기계 장치. 이젠 순록에 장치를 달아놓은 것처럼 생물체의 형태에 상당히 가까워져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생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일. 저 녀석의 각력이 타이탄의 망치질을 막아냈을 때는 기함을 했다.

다행히 각력에 비해 다른 부분은 비교적 약한 개체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멸할 뻔했다.

약점은 붉게 점멸하는 코.

그걸 순식간에 파악해준 리네아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걸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불에 휩싸여 자멸했으니까.

제페토가 말하길 막강한 힘을 대가로 생성되는 열을 모조리 그쪽 부분을 통해 해소하는 모양.

그 밖에도 여러 잡다한 기계 장치들이 줄지어 빠져나오고 있다.

“돌아갈 길은 없고.”

뚫고 지나가야 할 곳에는 기계 장치들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기습도 회피도 불가능한 정면승부.

이젠 시련의 진가를 피할 수도 없이 직면할 때가 됐다.

*     *      *

길을 뚫기 시작한 이후.

제페토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도 타이탄도 빗발치는 총격 속에서 몸을 온전히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끼고 아낀 힘이다.

여기 오기까지 최대한 힘을 비축한 채 속전속결로 적들을 쓰러트려 오기까지 했다.

여력을 남긴 건, 지금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서였건만…….

“신형이다!”

신성력으로 빌려온 방패는 총격을 채 1분도 버티지 못했다.

유피테르의 번개로 일망타진하기는커녕 한 놈도 잡기 힘들었다.

생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들 몸체 군데군데가 금속이다.

그럴 텐데도 번개가 들지 않는다.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예상 이상의 위험에 뒤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저 앞을 바라본 채 타이탄과 함께 정면으로 길을 뚫고 가는 게 전부다.

“개 같은……!”

급소를 제외하고는 총격을 막는 걸 반쯤 포기하다시피 한 타이탄의 진격이 한순간에 멈춰 선다.

녀석이 길을 뚫을 수 있게 온갖 신성 마법을 걸어둔 상태였다.

힘도 적지 않게 상승했다.

그런데도 단 한 기에 의해 타이탄의 돌격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줄곧 냉정하게 적을 박살 내던 오크 전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든 게 보였다.

“쯧.”

이쪽의 방비를 일시적으로 낮춘다. 집중포화 당하기 직전인 타이탄을 향해 신성 마법을 전개한다.

절반의 신성력을 바친다.

그 대가로 빌려온 건…….

헤임달의 하얀 그늘.

미네르바의 방패.

브륀힐드의 사슬갑옷

카노푸스의 단지.

단번에 4개의 신성 마법을 전개했다. 그중 카노푸스의 단지는 네 신의 힘을 엮어낸 힘이다.

타이탄을 향해 쏟아지던 공격은 모조리 막힌다. 녀석의 돌격을 억누르던 개체는 튕겨 나간다.

“지속시간은 3분…….”

“충분하다!”

돌격의 가운데 주변으로 적들을 치우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타이탄이 자세를 제대로 잡는다.

빈틈 투성이의 자세다.

하지만 내 신성 마법을 믿고 저러는 거라면 가장 강력한 힘을 내보낼 생각일 거다.

우득!

타이탄의 근육이 부푼다.

한쪽 팔만이 아닌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올라 마치 몇 배는 더 커진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렇게 전신에 힘을 모은 타이탄이 양팔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땅을 향해 내리꽂는다.

투쾅!

충격파와 함께 전방에 있던 모든 기계 장치들이 모조리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가까이에 있었던 개체는 그 충격파를 견뎌내지 못한 채 산산이 조각나 부서진다.

“흐으…….”

타이탄이 망치와 창을 각각 한 손에 든 채 중심을 잃은 기계 장치들 사이로 뛰어든다.

격렬한 파괴음과 함께 붉은 물과 기계 장치들이 튀어 나간다.

“우욱……!”

그런 타이탄의 모습을 보던 가운데, 나는 갑자기 무언가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어 무릎을 꿇었다.

단번에 신성 마법을 전개한 부작용이다. 클레어와 비슷한 증상이다. 그 녀석은 365일 이런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거다.

물론 직접적으로 신성 마법을 써서 과부하를 일으킨 지금의 나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지금 내 상태는 단지 신성력의 영향을 너무 과도하게 받은 탓만이 아니다.

카노푸스의 단지는 간과 위, 폐, 장 등. 사람의 장기를 상징하는바.

그에 대한 부담이 더욱 심해져 내부가 진탕된 거다.

“우웨에에엑!”

피를 토해낸다.

아니, 피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섬뜩할 정도로 검은 무언가가 내 내부에서 튀어나왔다.

단순한 신성 마법의 여파가 아니다. 침식이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내 내부를 망가트려 놨다.

“로스트! 피해라!”

그렇기에 한눈을 팔았다.

침식의 영향에 시선을 빼앗긴 직후, 타이탄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의 형태를 확인한다.

“뭐…….”

처음 보는 무기였다.

타이탄은 내 신성 마법의 영향을 받는 동안 최대한 많은 적을 쓰러트릴 생각이었는지 이미 한참 앞에 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녀석을 향해 쏟아지던 포격 중 하나가 내 쪽으로 흘렸다.

처음 보는 무기의 형태에 한순간 반응이 무뎌진다.

총알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날붙이나 비수 같은 것도 아니다.

마치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형태. 끝부분에서는 불꽃이 나와 그 속도를 늘려가고 있다.

무기의 상태는 어떻지? 이대로 막아도 괜찮은 걸까? 처음 보는 무기인데 그걸로 괜찮나?

무기의 끝은 수렴돼 있다.

하지만 뾰족하다기보다는 조금 뭉툭한 느낌이다. 속도도 총알이 날아오는 거에 비하면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린 편이다.

이 정도면 지금 내게 걸려 있던 신성 마법 하나로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기술은 회피하는 게 최선이다.

“칫!”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과 결론이 흐른 끝에 나는 몸을 던졌다.

처음 보는 무기. 더군다나 총알보다도 느린 속도와 뭉툭한 끝부분.

신성 마법은커녕 일반인이 방패만 들어도 막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기에 피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약한 무기를 쓰는 개체가 나타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게 패착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나와 타이탄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길을 뚫는 데 정신을 팔려 리네아와 제페토에 대해서는 반쯤 잊고 있었다.

“리네아!”

격렬한 전장이 신경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끔찍한 실수다.

이런 신병들이나 저지를 법한 실수를 하다니!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전장을 누비던 나였건만, 회귀 이후 너무 편하게 지낸 거다!

내 옆을 지나가는 그 정체불명의 무기를 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손가락 끝을 스치듯 빠져나간 무기가 그대로 리네아와 제페토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간다.

땅을 내디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 당장 검을 휘두르면 격추할 수 있을 위치다.

“커흡!”

검을 손에 쥔 순간 검은 피가 다시 역류하듯 솟구친다.

몸이 경직되고 기회를 잃는다.

멀리서 몸을 피하려던 리네아가 한순간 멈춰서는 게 보였다.

잠시간의 고민, 그리고 입술을 씹어 물고서는 고개를 젓는다.

피하려던 리네아가 다시 몸을 돌려 제페토를 감싼 채 호신용으로 들고 있던 단검을 내던진다.

매서운 기세로 날려진 단검이 그 무기와 부딪친다. 그 덕에 그나마 무기의 방향이 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깝다.

콰아아아아앙!!

그녀의 바로 발밑으로 꽂히는 무기의 형태를 보는 걸 끝으로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의 빛과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     *      *

폭발의 여파가 사라진 즉시 리네아가 있던 장소로 뛰어간다.

멍청한 짓이었다. 리네아는 제페토를 감쌀 게 아니라 피해야 했다.

제페토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었다. 녀석이 우릴 그저 사지로 몰아넣은 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리네아가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우득!

입술을 씹어 문다.

선홍색 피가 뚝뚝 떨어지며 새하얀 사제복을 물들인다.

한순간 제페토와 리네아의 목숨값을 저울질했다.

더군다나 확정된 것도 없는 가설을 진실로 받아들여 판단했다.

이런 비겁한 자신에 환멸이 난다.

나는 역시 성녀님처럼 사는 게 불가능한 놈이다.

“빌어먹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리네아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였어도 리네아처럼 제페토를 감쌌을까?

나는 최후의 순간이나마 성녀님처럼 살고자 했었다.

그렇게 길목을 틀어막고 마족들과 농성을 벌였었다.

그건 준비된 죽음의 과정이었다.

미리 살 수 있는 길을 틀어막은 채 죽음을 준비했었다.

“헤헤…… 로스트 씨…….”

“입 다물고 있어. 치료 중이니까. 응급처치가 끝나면 돌아갈 거야.”

리네아가 간신히 미소를 띤 채 나를 올려다본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지 자꾸 끔뻑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가 아끼던 니다벨리르 산의 백의는 넝마가 됐으며 그 속으로 원래는 새하얬을 터인 피부가 눌어붙듯 화상을 입은 게 보였다.

그녀의 흑단 같던 머리카락은 절반 가까이가 불타버렸고 탐스럽던 꼬리 역시 불에 그을렸다.

그녀가 제페토를 감쌌기 때문.

원래라면 피할 수 있었을 공격을 그녀가 몸으로 받아냈다.

덕분에 제페토는 의식을 잃었을 뿐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저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렇게 말도 하잖아요.”

그래, 죽을 고비는 넘겼다.

인간보다도 몸이 튼튼한 수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었다. 더군다나 신성 마법이 없었으면 그녀도 버티지 못한 채 이 자리에서 천천히 죽어갔을 거다.

“피노키오를 구하러 가야죠.”

“제페토가 거짓말을 했던 걸지도 몰라.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 수도 있어.”

“아뇨, 그건 아닐 거예요.”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무기의 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됐어. 너를 한 번에 그 꼴로 만든 무기만 해도 그렇잖아? 확신할 수 없어.”

“그래도요.”

“왜.”

판단을 그르쳤다.

이래서는 안 됐다. 아직 마나도 쓸 수 없는 오크와 반쪽짜리 성직자. 싸움을 싫어하는 의사까지.

이런 조합으로 잘도 시련에게 도전할 생각을 했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데.”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

“저도 그랬거든요. 차라리 일찍 얘기할걸. 하고…….”

안전한 스피린 백작가라는 우리 밖으로 뛰쳐나온 리네아 스피린.

그녀에게도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다.

“로스트 씨. 후회는 두고두고 남아요. 힘들어 보이는 길일지라도 나중에 가면 그 길로 가야 했던 게 아닐지 고민하게 되거든요.”

“치료 중이니까 입 다물고 있어.”

“저도 의사니까 괜찮아요.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는 거 알거든요.”

“입 다물라고.”

“저도 그렇게 후회했는데……. 제페토 할아버지는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말없이 떠나가야 했던 피노키오는 또 어떻구요?”

“리네아, 제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생각보다 감정적이시네요. 로스트 씨.”

“하아…….”

포기해야 한다. 이미 나는 신성력을 절반도 넘게 잃었다.

그런 상태에서 리네아라는 척후까지 전선에서 멀어졌다.

타이탄도 지쳤다. 제페토 영감은 정신을 잃기까지 하지 않았나.

이제 겨우 절반 왔다. 이제야 겨우 길 하나를 뚫었다.

이 앞은 더 험난할 거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할 수도 있다.

길을 뚫는다고 해도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맞다. 더 많은 강자를 모아 시련에 도전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 참…….

“……이거. 얼마라고 했었지?”

리네아가 선물해줬던 회중시계를 꺼낸다. 은으로 된 체인까지 걸려 있는 고급품이다.

“이번 일로 빚진 건 없는 거로 할 거야. 알겠어?”

“분명 후회할 일 없으실 거예요.”

나는 벨리알을 쓰러트리기로 했다. 그런 다짐까지 해놓고 고작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는 로스트 씨와 타이탄 씨를 따라온 걸 후회하지 않거든요.”

“그 말 잊지 마. 앞으로 온갖 험지를 누빌 테니까. 그때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야 한다?”

“네, 꼭 그럴게요.”

이번 원정의 달성을 위한 선행조건은 둘.

하나, 니다벨리르의 중심을 향해 피노키오를 찾아낼 것.

둘, 그 과정 중에 제페토를 반드시 살려서 데려갈 것.

“쉬고 있어. 네가 분전해준 덕분에 제페토가 살아남았으니까.”

그 두 번째 목적을 지킬 수 있도록 리네아가 노력해줬다.

“너는 충분히 노력해줬어.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네, 헤헤.”

리네아의 쓴웃음에 내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던 오랜 패배자 근성이 조금씩 지워진다.

그래, 성녀님이 나한테 방향성을 가르쳐 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리네아가 흔들리는 나를 다잡아줬다.

타이탄은 굳건히 정면에 선 채로 든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도 힘을 내야지. 이 앞은 분명 더 험난할 테니까.

내가 바꿔놓은 운명이니까.

내가 책임지도록 하자.

“타이탄. 지금부터는 내가 길을 뚫을 거야. 그러니 너는 두 사람을 지키면서 내 등 뒤를 따라와.”

“어떻게? 이대로라면 도착하기 전에 죽을 거다.”

“조금 거친 방식으로.”

“드디어 돌아버린 건가? 뭐,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네놈 광증에 어울려주지.”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

“혹시 모르니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가명인데도 말인가?”

“지금은 그게 내 진짜 이름이야.”

지금의 나는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자, 이전의 고통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추억을 하나 더 지우자.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품에서 <모르페우스의 꿈조각>을 꺼내 움켜쥐었다.

이걸 결국 쓰게 되는구나 싶었다. 솔직히 꺼림칙한 물건이었으니까.

안 쓰길 바랐다. 그래서 벨리알과 조우했을 때조차 참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써야 한다.

“하늘이 아닌, 땅을 기기로 선택하신 우리 아버지.”

이 기도문을 읊어보는 건 처음이다. 신전에서도 금지했고 이단심문관들조차 꺼리는 기도문이다.

“옅은 안개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눈을 가리시고.”

헤카테가 말했다.

멜리스(Malice), 벨리알은 무려 악신이라고.

그리고 내가 그 끔찍한 사실을 비교적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나는 이미 지상에 거하는 신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세상을 빚으시니.”

악신은 존재한다. 벨리알이라는 존재가 그걸 증명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를 올리는 신들은 어디에 있을까.

수많은 교단에서 말한다.

신들은 이 땅을 우리에게 맡기고 하늘에 올랐다고. 그렇게 하늘에 올라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모든 신이 그랬을까?

혹시라도 남아 있을 악신을 걱정해 지상에 남으려 한 자는?

“그 관대한 마음은 우리에게 꿈을 보여주시기에.”

이건 만신전 내부에서도 최고위 신관밖에 모르는 사실.

이단심문관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알 수 있는 사실.

성녀님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툭 던져준 정보를 바탕으로 알아내게 된 안타까운 실체.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을 기어 다니기로 선택한 어떤 신의 말로.

“지금, 이 자리에서 부족한 능력에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의 아들이 그 이름을 목 놓아 부릅니다.”

꿈의 신.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차마 보지 못해 달콤한 꿈으로 마음을 달래는 신.

하지만 홀로 지상에 남은 신은 점점 이지를 상실하고 약해졌다.

사람에게 달콤한 꿈을 보여주나, 그 대가로 소중한 무언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계약이 성립됐다.

부족한 힘을 채우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 그 잔혹한 대가로 인해 붙여진 오명.

시련 : <꿈을 꾸는 자>

“모르페우스.”

나는 선생님이 주신 매개체를 이용해 내 기억과 추억을 앗아갔던 그 시련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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