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에이지 포리스 (4)
에이지 포리스는 결국 로스트를 풀어주기로 했다.
다만 그가 멋대로 누굴 가두는 건 자주 봤지만 저렇게 풀어주는 건 처음이었기에 가문 내에서도 의문의 목소리는 나오고 있었다.
“당주님, 정말 저렇게 풀어줘도 괜찮으신 건가요?”
“읭?”
그리고 그걸 직접 물어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에이지 포리스의 후계자조차 그러지 못한다. 다만 그게 허락된 존재가 한 명 있긴 했다.
“오오, 우리 손녀딸. 뭐가 그리 궁금하니?”
시리스 포리스.
가문의 늦둥이 막내.
에이지 포리스는 지금까지의 위엄을 내다 버리듯 활짝 웃었다.
제아무리 괴물 같은 그라고 해도 손녀의 재롱에는 풀어지는 흔한 할아버지에 불과했던 거다.
“저 사람이요. 지금 저기! 저어어기 있는 저 사람!”
시리스 창밖, 정원을 거닐고 있는 포리스는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 로스트였다.
“정체를 알아내신 거예요? 아무 문제도 없다고 확신할 정도로?”
“아니, 그건 아니지. 나는 저 음흉한 놈이 숨기고 있는 정체를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단다.”
“네? 그럼 어째서…….”
순진한 손녀딸의 모습에 에이지 포리스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렇게 생각해보자꾸나. 네가 조리장에 찾아갔는데 밀가루와 달걀, 그리고 화덕이 있다면 무슨 요리가 생각나겠느냐?”
“어……. 빵이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성격이 꼬인 사람이라 빵보다는 다른 게 생각나더구나?”
추측하기 좋게 잘 포장까지 해놓은 요리 재료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걸 보기 좋게 먹어 치웠겠지만 그는 다르다.
“그 재료의 출처부터 봐야지. 독이 섞여 있을 수도 있는데.”
“아!”
“그래서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만 취해야 하는 법이란다.”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눈앞에 있는 재료가 진귀하다면 어떨까? 공수하기도 힘든 재료들을 늘어놓고 뻔히 보이는 요리를 하라고 들이밀었다면?”
“……그래도 독이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지 않을까요?”
“그래, 조심해야지. 그만한 재료라면 독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조차 결례가 될 수 있으니.”
로스트를 100% 믿는 건 아니다.
다만 그가 내민 재료들의 가치가 너무나도 높았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사제다. 그런 사제가 교황까지 팔면서 숨겨야 할 일이라면 관여해선 안 된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건 상당히 귀찮다. 어차피 교단 관련 일이라면 십중팔구 마인과 관련된 일이다.
그러니 에이지 포리스가 판단해야 할 건 오로지 하나.
“그러니 우린 재료가 아니라 재료를 보내준 사람을 알아야 한단다.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그가 나한테 독을 보낼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로스트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자신에게 해가 될지, 득이 될지. 아무것도 아닐지.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우리도 요리를 준비해야지.”
에이지 포리스는 창밖을 바라봤다. 단기간이지만 체재를 허락했기에 로스트가 저택 내 정원을 나돌아다니는 게 눈에 보였다.
“이쪽에도 재료가 갖춰졌으니, 놈이 완성될 음식에 손을 댈 수 있을지 확인해보는 게야.”
그리고 그런 로스트의 뒤를 노골적으로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 로스트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어울리지도 않는 산책같은 걸 하면서 인적이 드문 장소로 상대를 유인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라이안 남작의 저택을 습격한 이유도 나왔고, 버크 라이안이 마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도 나왔지. 거기에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지만 뒤에서 실을 당기고 있던 이단심문관의 존재까지.”
봐라.
벌써 뭐가 만들어질지 눈에 선할 정도의 재료들이 모여있다.
“숨기겠느냐? 우기겠느냐? 아니면 인정하고 사과라도 하겠느냐?”
손녀딸과의 대화로 인해 줄곧 미소가 머물던 에이지 포리스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완성된 게 독이 든 게 뻔한 요리라고 할지라도, 그놈이 상을 엎지 않을 자신이 있겠느냐?”
에이지 포리스는 클레어에게 이번 사건의 경위를 숨기지 않았다.
그게 기밀 사항이고 자신의 치부일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해도 당사자가 아닌가. 그러니 로스트에 대한 정보도 간단히 뿌려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모든 걸 잃은 소녀에게 원망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감춰야 한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설령 만신전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고 해도 번복하지 않는다.
“그놈이 정녕 떳떳하다면 그걸 삼켜야 할 거다.”
에이지 포리스는 포리스 공작령을 다스리는 영주다.
그런 그가 다른 가문의 귀족이라고 해도 자기 영지에 속해 있는 소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녀의 편을 들어주겠는가.
“그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놈의 목을 칠 테니.”
그는 늘 준비가 돼 있었다.
자신이 믿는 걸 위해 세상이라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준비가.
* * *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다.
클레어 라이안에게 내가 한 일을 숨길 생각 말이다.
“안녕하세요.”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온 소녀의 얼굴을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얘기를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인적이 드문 장소로 데려왔다.
눈물 흘리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이건 내 나름의 배려다.
그런데…….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건 내 쪽이었나 보다.
내가 알던 클레어는 당차고 강인한, 완벽에 가까운 기사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소녀는 아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나기도 전, 가장 여리고 힘든 시기.
“저는 클레어 라이안이라고 합니다. 로스트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다만 그 눈빛은 달랐다.
라이안 남작가의 저택에서 마주쳤을 때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명확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래, 클레어 라이안.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얼마든지.”
“로스트 씨가 이번 습격을 계획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아니.”
“그럼 그렇게 유도했다는 건?”
“맞아.”
클레어는 크게 심호흡했다.
마치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택의 습격이 이뤄지는 동안 어디에 있으셨나요?”
“그 근처에. 말해줘도 모를 거야. 골목길 하나하나를 뒤지고 다녀야 할 텐데 네 체력으론 힘들겠지.”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이 됐는데도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일 뿐.
“당신이 이단심문관이라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원래라면 밝혀선 안 될 부분이지만…… 그래, 맞아.”
“…….”
발뺌할 이유가 없다.
클레어는 이미 모든 걸 알고서 왔다. 보나 마나 그 괴팍한 노인네가 그 입을 함부로 놀렸겠지.
“역으로 나도 하나만 묻지.”
“예?”
어차피 이다음에 올 질문이 뭔지 정도는 알고 있다.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이 될 뿐이겠지.
그러니 과감히 생략하겠다.
“너는 네 오빠가 마인이 됐다는 걸 알고 있었나?”
마인이 되면 눈이 붉게 변한다. 나름 조절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매일 그걸 의식할 수는 없다.
그런 게 가능할 상대였으면 내 앞에서도 잘 숨길 수 있었겠지.
하지만 버크는 신성력의 빛 앞에서 간단하게 자신의 붉은 눈동자를 보였다. 그건 마인이라는 걸 숨기는 게 미숙하다는 증거다.
가족들이야 상관없었겠지.
평소 마주치고도 싶지 않을 정도로 혐오하던 가족들이니까.
하지만 녀석에게 진정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래, 목숨마저 내던질 각오가 돼 있는 사람에게라면 어떨까?
“…….”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나무라지는 않았다.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일이지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답을 얻을 방법은 많이 있다.
그래, 그녀도 알고 있었던 거다.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던 그녀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 방법밖에 없었나요?”
“아니, 있었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지하 감옥에 처박아 버리는 방법이 있었어. 경우에 따라서는 죽는 것보다도 가혹한 일이지.”
그건 해결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포기나 다름없다. 죽고 싶지 않다고 한들 만신전에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혹시 모를 미래에 기대를 걸고 깊숙한 곳에 치워두는 것뿐이다.
“기회는 너한테도 있었다.”
“…….”
“네게는 자기 손으로 가족의 최후를 꾸며줄 기회가 있었어.”
마인의 최후가 어떨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주변에 사제가 없을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공격을 반복하는 거다.
그건 강한 마인일수록, 오래 산 마인일수록 그렇다.
막 마인이 됐을 때라면 인간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클레어는 그때 그릇된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버크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알면서도 외면한 거다.
“클레어 라이안, 버크 라이안의 유언이다. 나는 그걸 들어주기로 했고 이제 네 선택만 남았지.”
“어떤……. 어떤 유언인가요?”
“못난 오빠라 미안하다고 하더군. 나한테 네가 살아갈 수 있도록 부탁한다고도 남겼다.”
“그래서인가요.”
“…….”
“그래서 그런 못된 말들로 저를 다그치려 하시는 건가요?”
클레어 라이안은 영민했다.
그래, 맞다. 나는 그녀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려는 거다.
그녀가 에이지 포리스와의 만남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건, 살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가 이렇게 나를 찾아오고, 증오의 눈빛을 보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교회에 몸을 의탁해 사제가 될 수도 있겠지.”
그 정도 지원은 할 수 있다.
교회도 클레어를 외면하지 않을 거다. 그녀를 위한 돈을 남겨놓기만 해도 최선을 다하겠지.
그 정도 돈은 있다. 스승님께서 내게 남겨준 돈은 충분했으니까.
“다른 하나는 나를 따라오는 거야. 그 연약한 몸을 이끌고 내 곁에서 배우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원수와 마주 볼 수 있을 기회지.”
복수를 위해서라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게 낫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할 때까지 나는 기다려줄 용의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복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회귀 전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나를 싫어할지언정 내게 복수나 불이익을 준 적은 없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확고한 정의가 있는 거다.
“어떻게 할래?”
그러니 그녀는 조금 더, 세상을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 *
에이지 포리스는 그런 로스트와 클레어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 저택에서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7서클의 대마법사다.
누구도 자신을 배신할 수 없도록 만든 마음의 요새나 마찬가지.
“영악한 놈.”
로스트는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쪽에서 드러내기까지 했다.
떳떳하다는 거다. 자신이 한 행동이 옳다고 믿고 있다. 설령 그로 인해 자신을 원망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하는 게 옳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복수할 기회까지 마련해줬다.
물론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이긴 할 거다. 애초에 저런 연약한 아이가 육체와 정신 모두를 단련한 로스트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도.”
하지만 나중에는 어떨지 모른다.
클레어가 힘과 지식을 쌓고, 그의 뒤를 노릴 수도 있다는 리스크.
그 리스크를 품고 가는 거다.
그런 행동을 취한 이유는 뻔하다.
“죽일 정도는 아니야.”
로스트가 클레어를 보호하겠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 죽인 상대의 가족을 자신이 책임지겠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거다.
그렇다면 에이지 포리스가 나설 일은 없다. 적어도 이번 일로 그를 죽일 일은 없을 거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느껴지는군.”
에이지 포리스는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마치 벌레가 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찝찝한 느낌이 든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젊었을 적부터 지금까지 정치판 위에서 수없이 암투를 벌여온 상대인데.
제국의 황제를 제외한 에이지 포리스의 유일한 정적.
“저놈들은 내보내게나. 지금부터 중요한 손님을 맞을 예정이니. 괜히 그놈 눈에 밟혔다가는 그놈들까지 귀찮아질 수도 있어.”
제국의 또 다른 공작.
월스레스 호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