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에이지 포리스 (2)
로스트가 라이안 남작가 쪽으로 향했을 무렵. 월스레스 호프로서 움직이고 있던 암흑의 왕, 벨리알은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흠…….”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글쎄…… 문제일까? 아닐까.”
그의 곁에는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사내가 함께였다.
“괜히 포리스가 영지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고…….”
에이지 포리스는 월스레스 호프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권력자다.
다만 그는 기본적으로 적이 아닌 자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자기 영지에서 이단심문관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껏 있으면 없애고 없으면 말고 식의 인식이었던 마인에 대한 태도가 척살로 바뀔 거다.
적도 아군도 아닌 사내를 적으로 돌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에이지 포리스가 껄끄러운 건 그가 대마법사여서가 아니다.
그가 제국의 ‘공작’이기 때문이지.
최대한 은밀히 처리한다고 해도 용의 선상에 월스레스 호프가 오르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다.
공작을 저격할 자가, 그게 가능한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에이지 포리스를 건드리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섣불리 만신전의 전문 처리반을 건드리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야.”
“…….”
사내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얌전히 월스레스 호프의 이어질 말들을 기다렸다.
그러자 월스레스 호프가 비로소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는 누구라도 섬뜩할 만한 기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놈을 한 번 더 봐야겠다. 죽이지 말고 데려오도록. 메즈.”
“예!”
월스레스 호프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메즈라고 불린 사내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어디, 저놈은 쓸만하면 좋겠군.”
벨리알이 직접 선별해, 마기를 불어넣은 그를 상징하는 일곱 칼.
그중 ‘속박의 칼’로 삼은 마인의 능력을 확인해볼 기회가 왔다.
“오늘 내로 볼 수 있으면 좋겠건만……. 불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월스레스 호프는 멀리서 느껴지는 흉흉한 마나의 기운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가 향한 방향에는 이미 에이지 포리스가 와 있다.
아마 당분간은 자신도, 메즈도 조심할 필요가 있으리라.
* * *
에이지 포리스는 붙잡은 로스트를 심문하기 전, 먼저 그를 지하 감옥으로 밀어 넣었다.
심문은 천천히 이뤄질 예정이다.
그 과정이 험악하지는 않겠지만, 지하 감옥에서의 생활은 제법 쓸쓸하게 느껴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찝찝했던 에이지 포리스의 얼굴도 조금이나마 펴질 수 있었다.
“포리스 공작님. 로스트 씨를 풀어주세요.”
“불허.”
“로스트 씨는 그저 범인이 누군지 밝혀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영지에서 행패를 부렸지. 그놈이 그 정보를 나나 경비대가 아닌 그쪽 빌어먹을 멍청한 오크 왕자에게 전해준 탓에 말일세.”
“나는 멍청하지 않다.”
에이지 포리스의 일갈에 타이탄이 입술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렌 와이즈와 싸워볼 기회였건만 눈앞의 노인이 그걸 말렸기 때문이다.
아이와 노인은 지켜야 한다.
그게 그나마 타이탄에게 남아있는 양심이었다. 그러니 직접 화를 내지는 못하고 이렇게 끙끙거리며 입술이나 삐죽이고 있는 거다.
“그럼 일을 저지른 타이탄 씨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뭔가요?”
“타국이라고는 하나 왕족을 지하감옥으로 밀어 넣으라는 겐가?”
“나는 상관없다만?”
“입 좀 닥치고 있게!”
“노인네가 정정하군.”
에이지 포리스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타이탄의 만행에 목덜미를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놈은 왕족이다.
제아무리 오크 왕국이 폐쇄적인 집단이라고는 해도 여기서 저놈을 후려 패면 국제 문제가 된다.
제국의 공작으로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영주님, 아무리 그래도 조금 심한 처사 아닙니까?”
보다 못한 사냥꾼 길드의 마스터, 알렌 와이즈가 끼어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실행범인 두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로스트가 지하 감옥에 갇혀야 한다는 건 너무한 처사로 보였다.
물론 타이탄이 저지른 사고에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이유가 악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니 알렌은 따로 나무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안 그래도 거친 사람이 많은 게 사냥꾼들이다. 그런 사냥꾼들 사이에서 정도를 지키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길드 마스터라는 자리는 그런 자들을 지켜주기 위한 자리다.
“아까는 사냥터에서 싸우지 말랬다고 민간인 구역에서 시위하는 거냐고 화를 내던 놈이 이제 와서 말은 잘하는구나.”
“여, 영주님!”
“시끄럽다! 신원도 불명확한 놈을 가두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
리네아는 가문의 인장을 보여줬다. 타이탄 같은 경우는 애초에 에이지 포리스가 크레이그와 일면식이 있는 사이여서 안다.
하지만 로스트는 달랐다. 그는 그 간단한 신분증조차 없었다.
사제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 신성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하나, 가명까지 쓰는 녀석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문제다.
에이지 포리스는 권력자다. 당연히 남들은 모를 것들도 알고 있다.
성직자라고 마냥 신실하고 깨끗한 자들만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단심문관은 만신전의 비공식 처리반으로 유명하지 않나.
“하, 하지만 가명을 대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꿈을 꾸는 자>와 마주쳐서 이름을 잃기라도 했나? 그래서? 그게 뭔 상관인가?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행동일세.”
로스트처럼 가명을 댈 수밖에 없는 사람은 많다.
시련이라는 건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이미 상관이 없다.
“도대체 뭐겠나? 응? 의외로 사람이라는 건 캐다 보면 꽤 많은 게 나오는 법일세.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이름 잃은 부랑자마저도 캐다 보면 가족관계가 나와!”
당연하지만, 공작인 이상 알고 싶지 않은 것도 귀에 들어온다.
파급력이 크면 클수록 말이다.
그리고 에이지 포리스는 정보의 힘이라는 걸 괄시하지 않았다.
당장에 정보 길드 셰이드가 포리스 공작령에 터를 잡도록 허가해준 것도 바로 에이지 포리스다.
오크의 출현이라는 건 단연 파급력이 큰 문제였다. 타이탄과 관련된 정보와 그때 함께 있던 이들의 정보까지. 많은 게 들려왔다.
하지만 로스트에게는 그런 게 없다. 이름을 잃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꿈을 꾸는 자>와 접촉한 인물 중에 로스트 같은 인상착의를 지닌 사람은 없었다.
“그놈의 행적은 정확히 그 타이탄 왕자와 마주친 그 마을, 여관에서 처음 발견됐네. 그전까지의 내용은 존재하지도 않아.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이미 교단에 문의까지 남겼다. 로스트가 보여준 신성 마법을 토대로 해당 교단과 만신전까지.
로스트라는 가명을 쓰는 사제가 있는지 물었고 없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물론 만신전에서 그의 존재를 숨기려고 하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에이지 포리스를 상대로?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하면서까지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고?
앞뒤가 안 맞다.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라면 존재를 확인해줄 수 있었을 거다.
반대로 보호해야 하는 존재라면 어떻게든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쪽도 아니다. 말 그대로 로스트라는 인물을 모른다.
따악!
포리스 영주가 의자 옆에 걸쳐뒀던 지팡이를 크게 내리찍어다.
“그 이름을 아는 자도 없고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자도 없네. 그런데 셰이드를 알고 있었으며 수준급의 검술, 수많은 계통의 신성 마법을 다룰 줄도 안다? 거기다 이 판을 설계한 게 그놈이라고?”
가명을 댄 것.
그래, <꿈을 꾸는 자>와 마주쳐 이름을 잃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름을 잃는다는 건 잃을 게 남지 않았다는 소리기도 하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백치다. 아니라고 해도 새로운 지식과 기억을 쌓는 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하지만 로스트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20대 초반에 불과하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의심하지 말라고?”
“시답잖은 문제에 목을 매는군. 노친네. 그게 중요한가?”
“물론 7서클의 마법사인 내게는 중요하지 않지.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려도 죽여버릴 수 있으니까.”
흉흉한 기세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 기세에 리네아는 숨이 막힌 듯 얼어붙었고 사냥꾼 길드의 마스터인 알렌 와이즈는 고개를 숙이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포리스 영지의 영주인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중요한 문제야!”
쩌억─!
결국 에이지 포리스가 내뿜는 마나의 기세에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찻잔에 금이 갔다.
“그러니 대답해보게, 자네들 대답 여하에 따라 그놈을 대할 내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깨진 찻잔 사이로 홍차가 마치 핏물처럼 방울져 흘러내린다.
마치 누군가에게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자는 누군가?”
* * *
벨리알은 나를 죽이려 할 거다.
한 번 의심이 풀렸다고 해서 시선을 완전히 뗄 정도로 녀석은 멍청하지 않으니까.
아마 나라는 존재가 한 번이라도 껄끄럽다고 생각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날 처리하려 들 거다.
당장에 죽이지는 않아도 사고로 위장하는 방법이야 많다.
그리고 에이지 포리스는 나를 의심할 거다. 몇 번이고 그랬듯이 나에 대한 정보는 그 셰이드조차 완전히 파악해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이번 일을 설계하고 뒤에서 실을 당겼다.
내가 나중에 합류한 걸 토대로 그마저도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겠지.
그렇기에 나를 심문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이 차가운 지하 감옥 밑으로 처박아놨다.
덕분에 나는 벨리알의 마수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꺄하하. 오랜만에 신입이네.”
“선배님이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로스트라고 합니다.”
“안녕! 안녕! 나는 벨라야. 너는 무슨 일로 잡혀 왔니?”
“성격 고약한 늙은이에게 말대답 좀 했다고 이렇게 됐습니다.”
옆방에는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머리가 이상한 존재가 있었다.
그녀는 종신형의 죄수다. 다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죄수.
“선배님,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뭔데? 아! 석식이라면 6시쯤에 들어와. 이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시간관념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꺄하하하!”
“혹시 <헤매는 자>와는 언제쯤 연락이 닿습니까?”
“…….”
시련은 인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존재, 지명을 칭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련이 모두 인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호의를 가지고 있는 시련도 있으며, 교류하는 시련도 있다.
그중 하나가 <헤매는 자>.
에이지 포리스는 <헤매는 자>와 교류하고 있다. 나를 심문하겠다고 했으면서 이런 지하감옥에 처박아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직 밤 되려면 시간도 남았는데, 잠깐 얘기라도 하시죠.”
“에이, 뭐야? 알고 있잖아?”
옆방에 있던 여자는 시시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나를 심문하기 위한 에이지 포리스의 협력자다.
“있잖아, 악몽은 좋아해?”
“글쎄요. 좋아하진 않습니다.”
“나는 좋아해. 악몽을 꾸는 사람들한테는 씁쓸한 맛이 나거든.”
“인간인 저한테 얘기하셔도 저는 잘 모르는 감각입니다.”
그녀의 정체는 나이트메어.
꿈속에 들어와 그 꿈을 악몽으로 바꾸는 유령의 일종이다.
그리고 꿈속에 들어온다는 건 곧 인간의 심층 심리에 들어온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식으로 나에 대한 정보를 캘 생각이 분명할 거다.
물론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기억은 모두 신성 마법을 써서 보호하면 그만이니까.
이미 상대를 알고 있으니 대처하는 것 역시 간단한 일이다.
“아! 맞아. 그런데 우리 집에는 무슨 볼일인데? 입주하려고?”
“아뇨, 그건 아니고…….”
“아쉽네.”
<헤매는 자>, 네크로폴리스.
그건 말 그대로 세상을 헤매고 있는 망자들의 나라를 말한다.
언데드와 고스트로 이루어진 그 집단은 이미 하나의 나라가 됐다.
그런 그들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폐해를 낳는다.
그 기운에 영향을 받은 시체가 언데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공동묘지 근처라도 돌아다녔다가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다행히 <헤매는 자>는 인간에게는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는 경로가 조심스럽지만 말이다.
“입주시켜야 할 놈이 있어서요.”
“엑, 우리 그런 일 안 하는데? 너 무슨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우리는 그런 청부살인 같은 건 안 해. 다들 착한 언데드들이라구!”
“흑마법사입니다.”
“아하?”
벨리알이 나를 처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쓸까? 나는 그것부터 고민해야 했고 어처구니없게도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회귀 전, 타이탄은 살해당했다.
그렇기에 크레이그가 세상 밖으로 나올 계기를 만들었었다.
그리고 크레이그의 입에서 나온 범인의 행색은 벨리알의 정예 중 하나인 ‘속박의 칼’을 가리켰다.
‘속박의 칼’ 메즈는 흑마법사.
그리고 흑마법사란 시체를 강제로 일으켜 그들의 이지를 빼앗아 조종하는 마법사들을 뜻한다.
“그렇게 우리가 좋다면 동료로 만들어드려야지.”
메즈는 <헤매는 자> 네크로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언데드들의 철천지원수.
이걸로 벨리알이 보낼 흉수를 사고사시킬 방법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