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에이지 포리스 (1)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 당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르페우스의 꿈 조각>을 사용해야 하나? 그걸 사용한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을 거다.
“…….”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다.
그걸 사용하는 건 정말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때다.
그걸 사용한다고 해봤자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한계일 테니까.
얻을 것에 비해 대가가 비쌀 터.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암흑의 왕, 벨리알은 제국의 수면 아래에 숨어 암약해왔다.
제국을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들고, 또한 부패하게 했다.
인간의 악의가 들끓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기 가장 좋은 위치는 어디일까.
바로 권력의 중추다.
벨리알은 제국을 지탱하는 양대 공작가 중 하나인 호프 공작가의 당주다. 지금의 내가 녀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제국의 공작이 악마라고 말해본들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리고 설령 신성 마법을 통해 검증할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녀석에게 통할지는 미지수.
“이보게 청년. 왜 말이 없나?”
내가 벨리알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녀석은 세상을 멸망까지 몰고 간 괴물이다. 성녀님조차 녀석을 어떻게 하지 못했는데 아무런 기반도 없는 지금의 내가 녀석을?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그걸 위한 여행이지 않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사전작업이 많이 필요할 거다.
그러니 지금은 눈앞에 찾아온 기회에서 눈을 돌려야 한다.
“자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그 잠깐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지 벨리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나를.”
현자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남아있는 건 지독한 악귀의 형상.
“아는 거야.”
그 눈빛에 붉은빛이 감돈다.
찢어질 것처럼 늘어난 입꼬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미 늦었다. 녀석은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 확정했다.
여기서는 아니라고 부정한들 녀석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아는 척을 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는 척? 내가 누군데?”
그렇다면 오히려 여기서는 아는 걸 전제로 가야 한다.
“호프 공작가의 당주, 월스레스 호프 공작님 아닙니까?”
“…….”
악마인 녀석이 아닌 녀석이 사회적으로 내세운 껍데기로.
호프 공작가의 당주라면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전혀 상관없는 포리스 영지에서 그를 알아본다는 건 있을 수 없겠지.
하지만 알아본 사람이 이단심문관이라면 어떨까? 각지의 마인들을 토벌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다니는 존재들이라면?
물론 상대가 마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당사자라면 나 같은 이단심문관을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 당장에 죽여버리고 싶겠지.
하지만…….
“그렇군, 내 짓궂은 질문이었네. 자네의 배려도 모르고 괜한 질문을 했구먼, 모르는 척해주게나.”
녀석은 내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건든다는 건 그 확신을 만들어주는 꼴이다.
녀석이 그렇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일 녀석이었다면 세상이 멸망까지 치달았을 리가 없다.
녀석은 강하고 간교하며 치밀하다. 그렇기에 성공했다.
여기서 단순히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공격했다가 다른 이단심문관들에게 꼬리를 밟힐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무시할 리가 없다.
“알겠습니다. 호프 공작님. 저는 오늘 여기서 아무도 보지 못한 겁니다. 호프 공작님도 오늘 여기 있었던 일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끌끌끌……. 그래, 그러세.”
암흑의 왕, 벨리알.
아니, 월스레스 호프 공작은 내 제안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받아들이고는 먼저 나를 지나쳐 떠났다.
그제야 나는 그가 왔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개새끼가…….”
월스레스 호프가 온 방향에는 라이안 남작가가 보였다.
녀석의 보이지 않는 흉수가 하나 더 밝혀진 순간이었다.
기분이 꽤 더러웠다.
* * *
“아읏……. 으으으윽!”
리네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무너지는 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남작 부인을 쓰러트리고 인신매매로 잡혀 왔던 아이들을 구하는 건 성공했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싸움의 여파가 미치지 않을 곳까지 탈출하려던 도중이었다.
그때 타이탄의 분노의 일격이 트로스 라이안을 분쇄하고 그대로 저택까지 무너트리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그 안을 전전하고 있던 리네아 역시 그 폭력에 말려들 수밖에 없던 상황.
“괘, 괜찮아요! 제가 이대로 버틸 테니까 여러분은 괜찮…….”
리네아는 아이들을 향해 떨어지던 건물의 잔해를 붙잡고 버텼다.
수인은 인간보다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평소 단련을 따로 하지 않는 리네아였기에 그리 큰 차이는 없을 터였다.
“저희가 도울게요!”
“맞아! 우리도 도울 수 있어요!”
리네아가 진땀을 빼고 있는 사이, 아이들이 리네아의 곁으로 달려들어 함께 건물의 잔해를 붙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빨리 나가주세요!”
물론 리네아의 목적이 잔해를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방해였다.
탈출해주지 않으면 리네아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쿠구궁!
아이들의 함성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에 리네아의 절박한 목소리는 묻히고, 미묘하게 의사소통이 안 통하는 가운데.
그녀가 들고 있던 잔해가 그대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타이탄 씨, 감사…….”
“으응, 아닐세. 고맙기는? 오히려 내 쪽이 고맙지. 내 영지에서 이런 쇼를 대대적으로 저질렀으니까.”
“…….”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네.”
들려오는 대답에 리네아는 상대가 타이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잔해를 들어 올리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잔해는 저절로 떠올라 있었고 그 앞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서 있었을 뿐.
그리고 그 목소리가 성벽 앞에서 들은 적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
리네아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포, 포리스 공작님?”
“그래, 리네아 스피린 백작 영애. 혹 내가 그때 그냥 지나쳤다고 많이 섭섭했던 건가? 그래서 이렇게 시위라도 할 생각이었고?”
“그, 그그, 그럴 리가요!”
로스트가 말한 계획에 따르면 에이지 포리스가 나타나는 것 역시 예견된 사항이다.
하지만 예견됐다고 한들, 저런 괴물과 마주하고 있는 건 실시간으로 심력이 깎여나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바깥에 있는 저 망아지 놈을 좀 말려보는 게 어떤가? 내가 죽여버리기 전에 말일세.”
“넵! 제가 해볼게요!”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에이지 포리스의 눈빛에 리네아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산적보다도, 오크보다도. 에이지 포리스가 더 무서웠다.
그야말로 힘과 권력, 모두를 품은 절대적인 강자였으니까.
“흠.”
리네아를 저택 밖으로 쫓아낸 에이지 포리스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붕괴하고 있던 건물과 떨어지던 잔해들도 모두 공중에 멈추며 정적이 찾아온다.
“허허, 이거 참……. 라이안 남작에게 딸린 식구가 많군.”
파즉!
에이지 포리스가 짚은 지팡이가 푸르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상아로 만들어진 그 지팡이는 끝부분에서부터 푸르게 물들더니 마치 기사의 오러라도 되는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참 많아. 감히 내 영지에서 내 눈을 속일 생각을 했다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권위가 손상됐다.
감히 자신에게 덤빌 자가 아니라서 시선을 뗀 결과가 이거다.
“본보기가 필요한가?”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영역에서 행패를 부릴 수 없을 본보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흠?”
그때 다른 아이들 사이로 유독 침착한 아이의 모습이 에이지 포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백발과 붉은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
한순간 마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에이지 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 색 같은 건 그저 특징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 특징은 꼭 마인에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일반화를 저지를 정도로 에이지 포리스는 헛살지 않았다.
하지만…….
“꼬마야, 이름이 어찌 되느냐?”
“……클레어 라이안.”
백발의 소녀, 즉 클레어 라이안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 순간 에이지 포리스는 폭소했다.
“하하하하! 이거 원, 늙어 죽어가는 몸이라고 해도 내 감이 완전히 죽은 건 아닌 모양이군.”
툭, 툭.
에이지 포리스는 지팡이를 짚으며 클레어 라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때마다 떨어져 있던 잔해들이 마치 길이라도 열어주는 것처럼 깔끔하게 옆으로 밀려났다.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힘과 잔해들 하나하나를 모두 붙잡은 기교, 그 위에 더해진 또 하나의 마법.
그것만으로도 클레어 라이안은 에이지 포리스의 저력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는 걸 깨달았다.
“클레어 라이안 남작 영애.”
“예.”
“두렵지 않으냐?”
“뭐가 말인가요?”
“내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에이지 포리스는 유난히 탁해 보이는 소녀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채 물었다.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절 죽이실 생각이시군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야 조금 두렵다고 느껴지느냐?”
“아뇨.”
“어찌?”
“죽지 못해 살고 있었으니까요.”
쾅!
에이지 포리스는 클레어 앞에 다가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팡이를 짚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에이지 포리스의 지팡이가 부딪친 대지가 그 격렬한 마나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진다.
“애 앞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 남 보여주기 부끄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포리스 공작님.”
“어떤 놈이냐!”
콰가가가강!!
에이지 포리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공중에 띄워두고 있던 잔해들을 모조리 처박았다.
“어이쿠, 정정하기도 하시지.”
잔해들을 황급히 피한 로스트가 어깨를 으쓱이자 에이지 포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
“반갑습니다. 에이지 포리스 공작, 저는 로스트라고 합니다.”
“가명이구나, 애송아. 내 앞에서 떳떳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느냐?”
“제가 뭐가 무서워서 공작님께 떳떳하지 못하겠습니까. 제가 떳떳하지 못한 건 늘 저희를 내려다보고 계신 신들의 시선인데.”
에이지 포리스의 시선이 그제야 로스트의 가면에 닿았다.
그 이마에는 이단심문관의 상징인 역십자가 새겨져 있었다.
“빌어먹을 사이비 놈이로군.”
더러운 일에 엮였다. 에이지 포리스는 진심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보라고 하는 짓이었다.
“천벌 받으십니다.”
“정작 천벌 받을 일을 하고 다니는 너희들이 멀쩡한 걸 보니 신이라는 작자도 믿을 게 못 돼.”
“뭐, 공작님이 무신론자인 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죠.”
“쯧.”
에이지 포리스는 로스트의 여유로운 대응에 혀를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족속이다. 한낱 기사조차도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건만, 이단심문관이라는 것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을 모욕해도 참는다.
“그 아이를 해치지 말아주시죠.”
“……빌어먹을 애송아, 날 도대체 뭐로 보는 거냐.”
에이지 포리스는 클레어의 어깨를 잡아끌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무고한 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그의 신념에 반한다.
“보이느냐? 뼈만 앙상하더구나. 거기에 죽음이 뭔지도 모를 아이가 죽음에 대해 초연하기는 늙은이들만도 더하다.”
클레어 라이안이 라이안 남작가의 재물로 호의호식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모를까 이렇게 천대받았다는 걸 알면 더더욱.
“그런 뻔히 피해자로 보이는 아이를. 이 내가 처형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게냐!”
에이지 포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분개했다. 그건 라이안 남작이 저지른 일이 뭔지 짐작해냈을 때보다도 격렬한 반응이었다.
라이안 남작이 몰래 헛짓거리를 하고 다녔다는 건 화가 난다.
자신의 영지에서 벌어진 일이니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자신을 의심하는 게 더 용서가 안 된다.
“애송아, 내가 너를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네놈이 어디 소속이고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는지도 상관없지.”
콰드드득!
에이지 포리스의 기세에 마법으로 지탱해두고 있던 저택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잔해 하나 남기지 않고 공중으로 떠올려진 건물은 그대로 압축되나 싶더니 거대한 바위로 변했다.
“네놈이 저 미련한 타이탄 왕자의 뒤에서 실을 당겼을 거란 것도 안다. 순진한 스피린 가의 여식을 이용해 나와 먼저 마주치게 해 화를 면하게 하려던 것도 알지!”
“딱히 순진한 거 같진 않던데.”
“시끄럽다!”
에이지 포리스는 이미 머릿속의 퍼즐을 완성한 뒤였다.
그리고 그 퍼즐의 완성본에 어떤 요소가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감히 자신의 영지에 있으면서 그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도, 왕자라는 타이탄의 직위를 사용해 일을 무마하려던 것도 상관없다.
“네놈이 살아 있는 건, 네놈이 한 일이 본디 내가 해야 했던 일이어서다. 그 행동이 옳았으니까!”
콰아아아앙!
공중에 떠올라 있던 바위가 그대로 로스트의 옆에 틀어박힌다.
그건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지키고 있다는 걸 뜻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지만 말한 것처럼 로스트를 죽이지는 않겠다.
그에 대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애송아,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하고도 그냥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콰드드드득!
에이지 포리스가 또다시 지팡이를 휘두르자 이번에는 땅속에서 흙이 솟구쳐 올라 로스트의 주변을 휘감았다. 하지만 로스트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 구속들 담담히 받아들였다.
“네놈을 심문해야겠다.”
“편할 대로 하시죠.”
“하여간 요즘 애새끼들은 사람 무서운지를 모르는구나.”
이놈이고 저놈이고.
애가 애 같지 않은 상판을 하고 있는 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