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58화 (758/760)

758화

‘도쿄가 바다에 접해 있긴 하구나.’

장하양은 새삼스럽게 도쿄가 항구 도시란 것을 실감했다.

레인보우 브릿지를 달리는 차의 뒷좌석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녀가 생각하는 바다와는 많이 달랐다.

보통 바다라고 하면 해변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띄는 바다는 오히려 강 같았고, 땅을 메운 창고와 산업 시설 때문에 삭막하게까지 느껴졌다.

“도착했습니다.”

장하양은 차에서 내렸다.

오늘 토모에의 공연이 있는 제프 다이버시티(Zepp Diversity)다. 소녀연맹도 공연했던 적이 있어서인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장하양은 웨벡스 직원에게서 미리 받은 스태프증을 목에 걸고 안쪽으로 향했다.

“아, 하양 씨?”

건물 현관에 토모에가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무대의 백스테이지에 도착하니, 그녀가 보였다.

“토모에.”

목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은 채 쉬고 있던 토모에는 장하양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매니저가 떨어진 얼음주머니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언니!”

“발음이 좋아졌네?”

토모에는 한국어 ‘언니’라고 장하양을 불렀다.

옛날엔 발음이 이상했는데, 이젠 꽤 한국인처럼 말한다. 그래도 외국인의 분위기를 지우진 못했다.

‘옛날 리카 같아.’

리카는 옛날에 발음을 명확하게 하려고 피치를 높이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리카는 요즘도 그런다. 그런데 그건 버릇이 든 것일 뿐, 발음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리카가 말할 땐 그냥 발음 좋은 한국인이 시끄럽게 떠드는 느낌이 난다.

그에 비해 토모에는 ‘외국인이구나’란 생각이 절로 드는 언니 발음이었다.

“와주셨네요! 바쁠 텐데 죄송해요.”

“와야지. 감사 인사도 해야 하고.”

“감사 인사요?”

장하양은 매니저에게서 종이백을 건네받았다. 종이백 겉면에 새겨진 글자를 본 토모에가 ‘설마……’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장하양이 싱긋 웃으며 선물을 내밀었다.

“네 곡에 나를 작곡가로 등록해줬더라. 최근에 알았어. 내 회사가 요청이 들어오니까 그냥 수락한 거 같아. 인사가 늦었지?”

“와아.”

토모에는 감탄하며 종이백을 받았다. ‘Louis Vuitton(루이 비통)’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갑이야.”

장하양은 토모에의 차림을 살폈다. 스타일리스트가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평범하고 편안한 차림이었다.

오버핏 티셔츠에 스크래치를 낸 핫팬츠다.

록을 주력 장르로 삼기 때문에 일부러 멋을 내지 않은 걸까. 아니면 돈을 번 지 얼마 안 되어 꾸미는 데 서투른 걸까.

아마 전자일 것이다.

‘미사토 본부장님이 따로 이미지 전략을 가지고 계시겠지.’

장하양은 종이백을 뒤적이는 토모에에게 설명했다.

“‘루이 비통’은 원래 여행용 가방을 만드는 사람이었어. 어느 날 모험가가 가게에 찾아와서 사막에서 써도 안 망가지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루이 비통이 직접 자기 가방을 들고 사막으로 간 거야. 몇 개월간 살고 가게로 돌아와서 그 손님을 다시 만났어. 그랬더니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멀쩡합니다, 손님.”

토모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장하양은 자신의 농담이 성공하자 그녀답지 않게 동요했다. 뒤늦게 뿌듯함이 따라왔다.

“그럼 이 지갑, 사막에서도 쓸 수 있어요?”

“글쎄, 내가 갔다 올까?”

“고마워요 언니. 내가 살면서 받은 두 번째로 비싼 선물이에요.”

“첫 번째는 뭐야?”

“렉서스요.”

“……렉서스가 뭐야?”

“도요타에서 낸 고급차 브랜드요.”

“아, 그렇구나.”

“한국에선 안 유명한가 봐요? 제 드림카였는데.”

“내…… 내가 차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걸 거야. 우리 쪽 아라한테 물어보면 잘 알걸? 그런데, 차를 선물받았어?”

“본부장님한테요. 아니지, 회사한테요.”

회사한테 차를 선물받았다고?

‘얘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

벌써 그만한 돈을 번 건가? 그만한 수익을 회사에 안겨다 준 건가? 아니면, 미래에 그보다 훨씬 큰 수익을 안겨주리란 확신이 있었나?

장하양은 회사가 선물로 차를 사준단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살면서 받은 제일 비싼 선물들이 며칠 만에 다 찾아오네요. 제 인생이 좀 풀리려나 봐요. 아, 그거 때문인가.”

“그거?”

“왜, 전에 회사 복도에서 파쿠 이사님을 뵀잖아요.”

파쿠 이사.

듣기만 해도 희미한 불쾌감이 떠오르는 호칭이다. 누구한테 저런 호칭을 배웠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다.

“‘박’ 이사님이야. 따라 해 봐, 박.”

“박 이사님, 이렇게요?”

심지어 토모에는 잘 발음한다. 세이코가 이상한 걸 가르친 모양이다.

“응, 그렇게. 사람 이름은 똑바로 불러야 해.”

“그럴게요.”

“박 이사님이랑 계약한 거죠. 악마랑요.”

“악마?”

“로버트 존슨 이야기 모르세요?”

토모에가 로버트 존슨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형편없는 기타 실력의 로버트. 그는 밤의 삼거리에서 악마와 계약했다. 악마는 로버트의 기타를 조율해주었고, 그날로 로버트는 전설이 됐다.

블루스 장르의 시초로 추앙받고, 젊은 나이에 죽어버렸다.

토모에는 매니저에게서 기타를 넘겨받았다.

“박 이사님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제 기타를 조율해준 거예요. 분명 악마일 거예요. 아니면 악마 비슷한 거거나요.”

“사람한테 악마라니…….”

“에, 나쁜 뜻이 아니에요. 하양 언니는 상징에 약하네요. 악마는 모든 예술의 창조자예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모든 못생긴 여자는 신이 만들었고, 모든 예쁜 여자는 악마가 만들었다구요. 또, 악마가 사는 어둠은 미래의 비유예요. 보이지 않는 거니까요. 그래서 악마는 미래를 볼 수 있대요.”

토모에는 오컬트 관련 이야기가 나오자 눈이 반짝였다.

장하양은 그녀의 차별적인 발언이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신이 추함을 만들고 악마가 아름다움을 만들었다면 이건 추함을 칭송하는 건지 아름다움을 모욕하는 건지, 아니면 그 역인지 알 수 없었다.

장하양은 일부만 동감해주었다.

“박 이사님이 미래를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아이돌을 만드셨으니까 반은 맞네.”

“그렇죠? 그런데 박 이사님 지금 일본에 계신 거죠?”

“계시지. 왜?”

“저 일렉 기타도 샀거든요. 박 이사님이 조율해줬으면 좋겠어요.”

장하양이 입꼬리만 올렸다.

토모에가 배시시 웃었다.

“미신인 거 알지만요, 믿음이 중요해요.”

그때 무대 쪽에서 커다란 함성이 퍼져 나왔다.

“아, 뮤비 나오나 봐요. 준비해야 해요.”

준비해야 한다면서, 토모에는 장하양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저는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나처럼?”

그러고 보니, 옛날에 토모에가 장하양의 자작곡을 칭찬했었다.

가사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경험과 감성이 엿보인다고 말이다. 그것 때문일까.

“아니, 소녀연맹처럼 되고 싶어요.”

“전에 인민이라고 했었지?”

“네. 영상으로 보기만 하던 소녀연맹이었는데 이렇게 제 콘서트의 백스테이지에서 보다니, 유명해지고 볼 일이네요.”

“우리를 목표로 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장하양이 아하하 웃었다.

“토모에는 록 뮤지션이잖아.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우리보다 멋진 선배님들이 많을 텐데.”

“이젠.”

토모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록을 듣지 않는걸요.”

“응? 무슨…….”

“토모에 씨, 준비해주세요!”

토모에는 기타의 목을 붙잡고 아래로 늘어뜨렸다. 무사가 검을 잡은 모양새였다.

“갈게요.”

“……응.”

토모에가 무대를 향해 뛰어나갔다. 나가며, 그녀가 기타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가 왔다―!”

뮤직비디오가 나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함성. 거대한 선망이 공연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 * *

리카는 숙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중이었다. 평소의 그녀와 다르게 진지한 고민이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조아라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기간에 비해 수익이 안 난다, 고…….’

그 이유를 웨벡스가 돈을 많이 떼어가기 때문이라고, 조아라는 추측했었다.

매우 합리적인 추측이다.

리카는 장래 희망이 있다.

바로 가로 엔터의 임원이다.

폴 메카트니가 말하길,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 투자하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음악 저작권 사업을 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가로 엔터가 상장하면 지분을 분할해야 해.’

먼저 회사 사람들에게 지분을 팔 것이다.

그때 리카는 지분을 왕창 사들일 생각이다. 그래서 최대한 돈을 모으는 중이다.

이 정도로 리카는 가로 엔터에 진심이다. 아니면 본인의 노후 준비에 진심이거나.

그런 만큼 가로 엔터의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에 오기 전, 리카는 한구인과 사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 사업이라지만 소녀연맹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왜 일본에서 버는 돈이 이렇게 적나요!’

리카는 조아라보다 먼저 의구심을 가졌었고, 조아라보다 먼저 불만을 드러냈었다.

한구인은 웨벡스에게 매니지먼트를 일임하며 맺은 계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리카가 해답을 제시했었다.

‘웨벡스 말고 다른 곳과 일하면 안 되나요?’

소녀연맹에게 웨벡스는 고맙기도 하지만, 동시에 괘씸하기도 한 곳이었다.

일본 매니지먼트를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정작 일본에 오니 반겨주었던 건 적대적이기 그지없는 환경이었다.

심지어 사상 초유의 방법으로 소녀연맹을 홍보했는데, 바로 경연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케이팝 아이돌을 일본의 경연 프로그램에 말이다.

아니, 이건 다 참아줄 수 있다.

진짜 참아줄 수 없는 건 세이코다. 그녀 때문에 성필이 죽을 뻔했었다.

‘그래 놓고선 친하게 구는 꼴…….’

웨벡스의 모두는 전부 그날의 일은 잊은 것처럼 하하호호 웃고 떠든다.

그걸 볼 때마다 리카는 허파가 뒤집히는 듯했다.

‘사람 목숨 구해주고 나서야 제 할 일 하는 게 뭐가 기특해?’

소녀연맹을 가족으로 대해주겠다고?

가족이 되는 조건이 경연에서 일본 굴지의 뮤지션을 이긴 후, 프로듀서가 그 뮤지션이 죽는 걸 몸을 던져 막는 건가?

‘어이가 없어.’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입지를 충분히 다졌다. 굳이 웨벡스가 아니어도 괜찮은 매니지먼트사가 있을 것이다.

이참에 벗어나는 것도 좋겠지.

리카가 그런 의도로 물으니, 한구인은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고는 어떤 자료를 보여주었다.

X축과 Y축의 그래프였다.

X축은 연도였고, Y축은 금액이었다.

한구인이 한 막대를 가리켰다. 막대의 1/5에서 1/6 정도의 눈금이었다.

‘리카 씨, 이건 세계 음악 시장의 규모를 나타낸 막대입니다. 막대 전체가 세계 전체죠. 이만한 파이를 가지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전 세계의 1/6 정도 규모.

나라 하나만으로도 세계의 1/6.

리카는 빠르게 답을 냈다.

‘미국이요!’

‘일본입니다.’

‘에엑?!’

‘그러면.’

한구인의 손가락이 막대의 절반 이상을 짚었다. 퍼센트로 표현하면 55%에서 60%.

‘거기에 다른 나라 하나를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어디일까요.’

‘미국…….’

‘두 나라를 합친 것만으로도 전 세계 산업 규모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본이 세계 음악 산업 규모 2위란 말을 들어도 대단한지 모르더군요. 심지어 일본인인 리카 씨도 그랬습니다. 시각적으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나라 두 개를 합치면 전 세계 음악 산업 규모의 절반 이상.

‘이 정도로 거대한 시장입니다. 다음으로.’

한구인은 다른 자료를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막대였다. 그 막대는 여러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딱 보아도 비중, 즉 퍼센트를 표시한 것이었다.

‘이건 케이팝이 콘서트 수익을 얻는 나라의 비중을 표시한 겁니다. 여기 가장 많은 색을 차지하는 부분이 어느 나라일까요.’

‘에…… 한국?’

아무리 해외에서 인기가 많다 해도 결국 케이팝은 한국의 음악이다. 한국에서 얻는 콘서트 수익이 가장 많을 것이다.

모든 케이팝 아이돌을 합한 수치이니, 기사에서 잘 보지 못하는 중소 그룹도 포함했을 테니.

‘약 40%입니다. 한국이 아닙니다.’

‘……미국?’

‘일본입니다.’

‘…….’

‘미국은 여기, 10%도 안 됩니다. 북미, 동남아, 유럽, 한국을 합쳐야 일본의 수익에 버금갈까 말까 하는 수준입니다.’

한구인은 자료를 끄고 리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수익이 적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투자입니다. 아까 리카 씨가 보셨던 압도적인 수치를 소녀연맹이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투자 말입니다.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계속 유명해져야 합니다. 마음 같아선 일본에서 반년 이상 체류했으면 합니다.’

웨벡스는 일본 내에서만 활동하는 기획사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기업이 세계를 상대로 하는 한국의 대형 기획사와 비슷한 크기를 유지하는가.

여기에 답이 있다.

‘어지간한 뮤지션 하나가 히트한 케이팝 아이돌보다 돈을 더 잘 버니까. 그게 답입니다.’

작년, 소녀연맹은 ‘애플 크러쉬’로 그해 일본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그런데 아이돌 앨범은 개인이 중복구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팬덤의 충성도를 확인할 수 있지만, 팬덤의 수는 어림짐작하는 수준입니다. 아마 판매량만큼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앨범을 많이 판 아티스트가 소녀연맹. 그럼 톱10에 진입한 아티스트들 중, 4위 아래의 아티스트들은 소녀연맹보다 수익이 적을까?

‘아닙니다. 일본 내에서의 공연만으로 소녀연맹보다 더 많이 벌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일본에서만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세금 징수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잠시 들었다가 여러 일을 하고 콘서트 투어를 한 후 훌쩍 사라진다.

‘가로 엔터의 목표는 소녀연맹을 일본의 토종 뮤지션들과 같은 위상으로 올려놓는 겁니다.’

그러면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수익성 측면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이돌이 탄생하겠지.

‘그리고 그 일은 웨벡스 없이 불가능합니다.’

웨벡스의 영업력 때문이든, 혹은 그들을 배신했을 때 돌아올 보복 때문이든.

‘저희는 웨벡스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미래를 보고 현재를 포기하는 상태란 건가요?’

‘그건 또 착각입니다.’

‘네?’

‘웨벡스가 소녀연맹을, 과연 그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계속 푸쉬해 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까지 겪었다.

성필이 웨벡스의 간판스타인 세이코를 구하려고 몸을 날리지 않았던가.

한구인은 리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사업에 인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오히려 웨벡스가 여기까지 해준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히무라 실장님이랑 미사토 아줌마는…… 그럴 기미가…….’

‘회사는 혼자 굴러가는 게 아니니까요. 주주들과 그들을 위시한 이사회 사람들이, 언젠가는 이렇게 말할 때가 올 겁니다.’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를 지원해주는 게 훨씬 수익성이 좋다. 그런데 왜 저 케이팝 아이돌에게 매달리는 건가?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옵니다. 저희는 웨벡스를 버릴 수 없지만, 웨벡스는 저희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리카는 축 늘어졌었다.

‘저희는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일본은 리카의 고향이다. 당연히 일본에서 유명해지고 성공하고 싶다.

그런데 거기에 한계가 있다.

이유는 케이팝 아이돌이기 때문이며, 결국 웨벡스 입장에선 친자식이 아닌 양자이기 때문이다.

‘리카 씨.’

좌절한 리카에게, 한구인이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회사는 혼자 굴러가는 게 아닙니다.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란 겁니다. 웨벡스엔 소녀연맹의 성공이 중요한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틈을 노려야겠지요. 그 틈을 노리는 사람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가로 엔터의 현재에 충분한 이익을 가져다주면서, 웨벡스가 소녀연맹을 적극적으로 푸쉬하도록 동기를 가져다주며, 그러면서도 가로 엔터의 미래를 크게 희생하지 않아야 한다.

가로 엔터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살찌우면서, 웨벡스에겐 안대를 씌우고 앞으로 달려 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요?’

‘모릅니다.’

리카는 질문을 바꾸었다.

‘누가 그런 일을 하나요?’

한구인이 답했다.

‘아마, 박 이사님이.’

침대에 누워 있던 리카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정말, 어떻게?”

그런 신묘한 균형을 찾을 수 있지?

* * *

성필이 이야기를 이었다.

“일본 프로모터로서의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프로모터?”

“소녀연맹의 콘서트 투어를 맡으시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가로 엔터가 공연기획사와 함께 일을 진행했지만요.”

“그럼 왜 하시던 대로 하지 않으시고?”

“가로 엔터엔 콘서트 사업부가 없습니다. 만들더라도 제 기능을 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요. 수십만 명 규모의 투어를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게 명확합니다. 현지 프로모터 없이는 일이 불가능하죠. 물론 아시다시피, 일본은 콘서트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도 공연을 배운다고 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도 하고요.”

일본에는 유명한 프로모터가 많다.

“아니면 사업 지역이 전 세계인 글로벌 프로모터 회사에게 맡겨도 되겠죠.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그 두 회사들에게요. 본업이 그쪽인 분들에게 맡기는 편이 저희도 편할 거고요.”

성필은 빈 종이에 글자를 적어나갔다.

“그런데, 웨벡스는 따로 콘서트를 맡는 부서가 있는 걸로 압니다.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장사를 하셨고, 세이코 씨라는 대가수도 있으시니 큰 규모의 투어를 기획해본 경험이 풍부하겠죠.”

무엇보다, 웨벡스는 다키스트를 매니지먼트했던 회사다.

“맡겨보려고 합니다.”

글자가 늘어갈수록 히무라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일반적인 공연 계약과 같습니다. 프로모터인 웨벡스가.”

성필이 히무라를 만년필 끝으로 가리켰다.

“가로 엔터에게 보증금을 지불한다. 그리고 소녀연맹이.”

성필은 만년필 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보증금 이상의 초과 수익을 낼 때부터 정산이 시작됩니다. 보증금은 5,000만 엔에서 1억 엔 사이로 합시다. 이왕이면 1억 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시겠지만, 가로 엔터가 최근 돈을 너무 많이 써서요. 공연 퀄리티를 유지하려면 필요합니다.”

성필은 회사의 치부를 드러냄에도 여유로운 말투와 표정이었다.

히무라는 3년 전과 달라진 성필의 모습에 놀랐다. 웨벡스가 1억 엔을 준다고 했을 때 잔뜩 굳었던 초짜 프로듀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성필은 ‘1억 엔’이라는 글자를 너무나 쉽게 적었다.

“보증금이 모두 상환되면 수익 분할이 진행. 수익 분할은 일반적으로 아티스트와 프로모터 간에 85%와 15%부터 시작하죠. 혹은 90%와 10%요. 이게 ‘국룰’…… 표준입니다.”

“박 이사님은…….”

히무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목청을 가다듬었다. 몇 번의 헛기침 이후 다시 물었다.

“박 이사님이 제시하실 비율은…….”

“92.5%대 7.5%입니다.”

“……?!”

“그리고 손익분기점의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르면 95%대 5%로 넘어갑니다.”

“더 줄었잖습니까?!”

“이쪽 일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슈퍼스타에게 적용되는 비율이에요.”

“소, 소녀연맹이 슈퍼스타라고 자화자찬하시는 겁니까? 아직…….”

“이게.”

성필이 만년필을 서류 위에 탁 두었다.

“히무라 실장님이 지금 제 제안을 거절했을 때 벌어질 일입니다.”

“……예?”

“내년에 소녀연맹이 성과를 내고 나선 늦습니다. 아니, 아예 제가 웨벡스가 아닌 프로모터와 계약해버리겠죠.”

“다른 프로모터를…….”

“어차피 웨벡스는 전문 프로모터도 아니잖습니까?”

히무라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찌 근처로 물고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수면 아래로 물고기의 그림자가 보인다.

“지금 계약하면 91%대 9%로 해드립니다. 추가 분할 비율 변동 없이요.”

별로 줄어들지도 않지 않았으냐.

그런 눈빛에, 성필은 찌를 문 물고기를 감지한 낚시꾼처럼 득달같이 입을 열었다.

“100만 명. 100만 명을 모으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아십니까? 대충 계산해서 150억 엔입니다. 보증금을 빼면 140억 엔입니다. 여기서 약 10%면 14억 엔입니다.”

히무라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의 호흡이 자기도 모르게 가팔라졌다.

“히무라 실장님이 여기 사인한다. 그리고 소녀연맹의 100만 집객이 현실이 되면, 히무라 실장님 혼자 웨벡스의 영업 이익 20%를 벌어들이는 게 됩니다.”

“호, 혼…….”

히무라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눈이 거칠게 선 핏발 때문에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혼자 회사 영업 이익의 20%……?!’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소녀연맹이 케이팝 걸그룹 최대 기록이 근접하면 영업 이익의 4%다.

그리고 그건 현실성이 높다.

아니, 반드시 그 기록은 달성할 수 있다.

히무라가 사인한 계약 하나로 30억 원을 번다.

“혹시 공연 프로모터에 대해 모르실까 말씀드리면, 프로모터는 보증금을 지불한 시점에서 공연 실현에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추가 비용이 발생해도 그건 가로 엔터가 감당할 거지, 웨벡스가 어찌할 게 아니란 겁니다. 제가 무슨 계산을 빼서 140억 엔이란 말이 나온 게 아닙니다. 진짜 그 돈에서 웨벡스가 받아 갈 10%는, 무엇 하나 제하지 않고 14억 엔일 겁니다.”

“하지만, 프로모터는 광고비를 씁니다. 공연이 흥하도록요. 거기에 들이는 비용도 생각…… 아.”

“드디어 정답에 도달하셨네요. 웨벡스는 일본의 미디어를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전처럼 소녀연맹을 계속 푸쉬해주세요.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요.”

히무라는 서류에 적힌 글자를 핥듯이 눈에 담았다.

7.5%는 10억 엔. 5%는 7억 엔, 9%는 13억 엔. 숫자 하나 바뀔 때마다 널뛰기하듯 금액이 변한다.

‘이게 매출이 아니라 순익이라고…….’

물론 공연장을 잡고, 홍보하고, 스폰서를 모으고, 이런 일에 자금이 소모될 거다.

‘그런데 어차피 공연 규모를 결정하는 건 프로모터 쪽이야. 손익을 계산해서 규모를 설정하면 적자는 절대 보지 않을 자신이 있어. 무조건 이득이다.’

심지어 공연을 한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다.

해마다 할 거다. 그때마다 히무라가 이 계약을 성사시켰음이 계속 주목받을 것이다.

회장의 아들로서 그는 마땅한 업적이 없었다. 그나마 별탈 없이 부서 하나를 굴리고 있단 게 업적이라면 업적일까.

그로 말미암아 야심 차게 만들었던 에스타스를 몇 년간 애물단지처럼 박아뒀어야만 했다.

치욕과 굴욕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이 계약만 있으면, 그는 단숨에 웨벡스 내에 단단한 입지를 다지게 될 터다. 그가 바라마지않던 이사회의 인정마저도 꿈이 아니게 되겠지.

본인들이 돈을 냈다고 회사 일에 간섭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

‘하는 말이라곤, 저 회사는 저렇게 한다던데 우리도 이렇게 하는 게 어때. 그딴 저능아 같은 소리밖에 못 하는 쓰레기들…….’

돈을 내놓으라고 빽빽 소리 지르는 것밖에 못 하는 애새끼들.

그들은 히무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져왔다. 하지만 이 일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히무라의 입지가 변한다.

“현재 소녀연맹에게 부여된 매니지먼트 수익 비율을 변경하시고, 실장님께서 소녀연맹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시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성필이 서류를 히무라 쪽으로 내밀었다.

그때 열망으로 불타던 히무라의 뇌가 차갑게 식었다. 떨어졌던 지능이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야. 손해이고, 애초에 소녀연맹이 그 수준까지 갈까?’

일본인 중에서도 극히 손에 꼽는 이들만이 이루어냈던, 콘서트 100만 집객이란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케이팝 아이돌 중에선 다키스트만이 닿았던 기록이기도 하다.

‘그냥 내가 여기 사인만 해도 이득인 건 확실해. 그런데 단기적으로 수익이 하락하면 이사회에서 지랄을 떨 테고. 또 수익이 안 나는데도 소녀연맹을 푸쉬하면 개지랄을 떨겠지. 게다가 그 지원이라는 거…….’

히무라가 주판을 튕겼다.

웨벡스의 미래를 이어받을 사람으로서, 그는 더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만한 전폭적인 지원을 소녀연맹에게 할 바엔, 차라리 웨벡스 소속 아티스트를 지원해주는 게 웨벡스엔 이득이 아닌가?’

히무라, 지능 완전 회복!

그때.

“웨벡스의 아이돌 사업을 총괄하시게 되고, 언젠가 웨벡스의 회장 자리에 오르실 분답게, 후회하지 마시고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그래.

‘내가 맡은 건 아이돌 사업이잖아. 다른 아티스트에게 줄 지원이라고 해 봤자, 미사토가 맡은 가수관리본부 쪽이고. 어차피 미사토는 임원 승진이 내정되어 있는데…….’

히무라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나도,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성공하기만 한다면, 미사토조차 앞지를 수 있어. 나 혼자 이 회사의 몇 년을 책임지는 거나 마찬가지야. 성공하기만 한다면…….’

따기만 한다면!

‘내 승리잖아?!’

히무라, 지능 감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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