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화
성필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조절하려고 노력했지만, 고민이 많아 술을 많이 마셔버렸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모자를 쓴 후 호텔 내의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이제 웨이트…….’
성필은 아령을 붙잡고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그는 아령을 놓고 다시 러닝머신에 올랐다. 그렇게 수십 분을 뛴 후 피트니스 센터를 나섰다.
씻고 조식 뷔페를 먹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사소한 구겨짐과 매무새에도 신경을 쏟았다.
정장은 직장인의 갑옷이다. 전장에 나서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있어선 안 된다.
깔끔함은 상대를 향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자신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됐어.’
싸울 준비가 끝났다.
성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자그마한 소음도 없이 아래로 향했다. 문득 문 위의 스크린에 눈길이 갔다.
호텔의 그랜드 홀.
결혼식 풍으로 꾸며진 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가정을 이뤘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절로 그려졌다.
‘나도 언젠가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까.’
턱시도 차림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팔짱을 끼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까지 나타나진 않았다. 35살이지만, 결혼은 먼 이야기처럼 보였다.
1층.
건물 밖으로 나가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10분쯤 지나 어제 슈이치가 몰았던 벤츠 스프린터가 다가왔다.
슈이치가 운전석에서 나와 성필에게 다가왔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요.”
슈이치는 현관 앞에 선 호텔 직원에게 눈짓했다. 직원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성필은 어제처럼 사양하는 대신 익숙하게 차에 올랐다. 슈이치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슈이치는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재계약으로 머리가 복잡한 성필을 배려하는 것일 터다.
성필은 그 배려를 기쁘게 받았다.
창밖을 보며 히무라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자신은 어떻게 운을 뗄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봤자 어제 했던 상상의 반복이었다.
성필은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가져다 두곤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시간 감각 또한 흐려지기 시작했다.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소음이 음악 같았다.
그리고.
“도착했습니다.”
성필은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얼른 내려 문을 열어주려던 슈이치가 성필 근처에서 멈칫했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히무라가 서 있었다.
많이 변해버린 슈이치와 다르게, 그는 작년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히무라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박 이사님. 어제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성필은 그와 손을 맞잡았다.
“아닙니다.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박 이사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에스타스,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박 이사님도 저 못지않게 밝아지신 듯합니다. 빌보드 200 1위, 축하드립니다. 올해 HPT 뮤직 어워드는 일본에서 한다는데, 꼭 가겠습니다.”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면 굳이 오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박 이사님이 올해의 프로듀서상을 받으실지도 모르니까요.”
둘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화기애애한 웃음을 터뜨렸다. 히무라가 그의 앞에 서 웨벡스 사옥 현관으로 안내했다.
“가시죠.”
“예.”
그를 따라가며, 성필은 웨벡스 사옥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참 높은 건물이다.
층수에 비해 건물의 높이가 상당하다. 천장이 높아서일 것이다.
이 건물을 볼 때마다, 성필은 소녀연맹이 웨벡스로부터 받은 비현실적인 지원을 새삼 떠올리곤 했다.
일본의 3대 기획사가 소녀연맹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 일본에서 이름값이라곤 없던 시절부터.
바꿔서 말하면, 그건 KS 엔터가 일본의 무명 아이돌을 맡아 엄청난 지원을 해준 것과 비슷했다.
그런 꿈같은 일로 말미암아,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성장을 거듭해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성필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쩌면, 성필이 이 건물로 들어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러니 추억을 마셨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 * *
“토모에 축하해!”
일렬로 늘어선 가수관리본부의 직원들이 박수 쳤다. 토모에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박수 속을 걸었다.
그 끝에 있는 건 검은색 고급 세단이었다.
세단 옆에서 박수 치던 미사토가 차 키를 꺼내어 토모에에게 내밀었다.
“자, 선물.”
토모에의 데뷔 앨범이자 첫 번째 정규 앨범의 대성공을 축하하는 선물이었다.
“드림카라고 했지?”
‘렉서스’의 최신 모델.
미사토는 토모에가 지나가듯 ‘렉서스가 좋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이 선물을 준비했다.
토모에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남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차 키를 받았다.
“제 거?”
“응, 네 거. 선물이니까.”
토모에가 미사토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미사토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본부장님!”
“내가 준 거 아니야! 회사가 준 거지!”
“그래도요! 본부장님이 신경 써준 거잖아요!”
“내 돈 안 쓰고 감사받으니까 기분 더 좋다 야.”
토모에는 황홀한 눈으로 차를 훑어보았다.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수관리본부의 직원들도 토모에를 부러워했다.
갓 성인이 된 나이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고, 또 회사로부터 고급 세단을 선물받았다.
부러움이 없는 건 미사토뿐이었다. 그녀는 뿌듯하게 토모에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그런데 왜 렉서스야?”
토모에는 보닛 위에 앉았다. 그리고 흥얼흥얼 노래하듯 말했다.
“어릴 때 읽은 책이 ‘렉서스는 좋은 차야’라고 했어요.”
“어……?”
“무슨 책인지도 기억 안 나고, 내용도 기억은 안 나는데, 딱 그 말만 기억나요. 렉서스는 좋은 차야. 그래서 계속 렉서스를 가지고 싶었어요.”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그래도 렉서스는 좋은 차가 맞으니, 어쨌거나 토모에에겐 좋은 일이었다.
“오늘 공연 그 차 타고 가면 되겠다.”
“무서운데.”
토모에는 폰을 직원들 쪽으로 내밀었다.
“사진 잘 찍으시는 분?”
직원들이 침묵하며 서로를 보았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건가?
그 의도를 뒤늦게 깨달은 막내가 ‘아’ 하며 급히 토모에에게 폰을 받았다.
막내라 해도 모인 이들 중에서 막내였다. 그의 직급은 팀장으로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부탁해요.”
“아,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토모에는 차를 껴안거나 차에 타거나 보닛 위에 눕거나 여러 자세를 취했다.
팀장은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결과물을 확인한 토모에는 ‘음’ 의도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 팀장은 왠지 모르게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로 미사토가 끼어들었다.
“지금 운전해볼래?”
“본부장님이 해주시면 안 돼요?”
“어, 나? 아니, 첫 운전을 내가 해도 돼?”
“어차피 여기 끌고 오면서 누가 했을 거잖아요.”
“제, 제가 하겠습니다!”
본부장에게 운전을 시키려는 토모에의 패악질을 보다 못한 팀장급 인원들이 나섰다.
그런데 토모에는 딱히 권력에 맛을 들여 패악질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본부장님이랑 드라이브하고 싶어서 그래요. 뭣하면 제가 할게요. 안전 벨트 꽉 매세요.”
“네가 해달라면 해주긴 하겠는데……. 진짜 첫 운전이 나여도 괜찮아?”
“당연하죠.”
“후우, 좋아.”
미사토는 떨리는 마음으로 렉서스 운전석에 앉았다. 토모에는 평소 매니저가 차를 태워줄 때처럼 평온했다.
“목적지는?”
“스타벅스요. 제가 살게요.”
“드라이브 스루로?”
“넵. 고고고!”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토모에가 뒤늦게 감격을 드러냈다.
“본부장님 감사해요. 저 찾아주셔서요. 본부장님 아니었으면 이런 차도 못 타봤을 거예요. 루미네(백화점) 근처에서 버스킹 하고 있었을 텐데.”
“뭐래. 나 아니어도 너 채갈 사람 많았을걸?”
“많았을지도 모르지만, 데뷔까지 작곡 100개 시키는 사람은 본부장님 한 명일 거예요.”
둘 다 수줍은 웃음을 머금었다.
“잘 견뎌줬어. 안 도망가줘서 고마워.”
“세이코 선배님도 100곡 작곡했어요?”
“아니.”
“그런데 저는 왜요?”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세이코쨩은 처음부터 대중적인 곡을 썼어.”
“작곡을 하자마자요?”
“응. 많은 사람이 안 들어주면 의미가 없다던가. 우리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었지. 아니, 세이코가 오히려 우리한테 뭐라고 했지. 우리가 곡을 주면 화내면서 ‘나한테 이딴 곡을 부르게 할 셈이냐’면서 화냈어.”
“대단하네요. 천재? 라는 느낌.”
“너도 천재야. 솔직히, 이 기록은 제정신이 아니야. 세이코도 그랬지만 말야.”
기획사들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으로부터 지표 확인 서비스를 받는다.
어느 국가, 어느 지역, 언제, 어느 정도로 스트리밍이 됐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자료는 보통 콘서트 지역을 선정하는 데 유용하다.
웨벡스는 토모에의 스트리밍 지표를 확인했고, 그 결과는…….
‘스포티파잉 앨범 스트리밍 1억 회 돌파.’
프라임 뮤직, 애플뮤직, 아이튜브 뮤직 등 주요 음원 플랫폼의 앨범 스트리밍도 1억 회에 근접한다.
‘일본만의 인기로 가능한 게 아니야.’
세계적인 반향을 얻고 있다.
물론 유행을 탔을 뿐이라는 설명도 있다. 우연히 사람들의 눈에 띄어 곡이 주목받게 됐다고 말이다.
미사토는 멍청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냥 찾아오는 우연이 어딨어?’
눈에 띄더라도 음악이 별로면 이렇게 성공할 순 없었으리라.
미사토는 조수석의 토모에를 곁눈질했다. 고양이처럼 헤픈 하품을 터뜨리는 이 아이가, 미래의 일본 음악을 이끌어갈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제2의 가후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다.
다만 걱정되는 점은…….
“소녀연맹 하양이랑 SNS에 사진 올리는 건, 생각해봤어?”
토모에는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하는 프로모션에 소극적이다.
예술가답게 자아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제안이 오면 애매하게 ‘생각해본다’고만 말해서 곤란하다.
“음.”
역시, 이번에도 명확한 답을 피하고 있다.
“네 노래가 한국 차트에 입성한 건 알지? 애니메이션 곡이 아닌 게 한국 차트에 들어선 건 이례적이야. 이 기세를 타고 한국에서 인지도를 높이면 콘서트 할 곳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야.”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라면서요.”
“어? 그렇긴 한데…….”
전성기 다키스트는 한국에서 관객 5만 명 정도의 콘서트를 벌였다.
하루에 5만 명이 아니다. 모든 날을 다 합쳐서 5만 명이다.
그런데 일본에선 100만 명을 모았다.
한국의 음악 산업 규모는 세계 10위권이지만, 그럼에도 작다. 괜히 케이팝 아이돌들이 해외로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글로벌적 인기를 구가하는 케이팝 아이돌이 한국에서 거두는 수익이라고 해 봤자, 전체의 10%가 될까 말까다.
“그래도, ‘사랑과 사람’ 작곡에 하양 씨가 도움을 줬잖아. SNS에 서로를 언급하면 너도 좋겠지만 하양 씨도 고마워할 거야.”
“음.”
토모에가 검지로 아랫입술을 지분거렸다.
“본부장님.”
“응?”
“소녀연맹 재계약해요? 그쪽 사람 웨벡스에 왔다고 하던데요.”
“네가 어떻게…….”
“그냥 들었어요. 재계약해요?”
무슨 의도로 묻는 걸까.
미사토는 토모에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 할 거야.”
“왜요?”
“웨벡스의 도움 없인 일본에서 톱이 되지 못하니까. 일본의 케이팝 팬덤 내에서만 인기를 얻는 걸론 부족해. 매년 수금하듯이 들러서 공연으로 돈을 뽑는 이상의 뭔가는 없겠지. 하지만 우리와 계속 손잡으면,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와. 가로 엔터도 그걸 알 거야.”
“음.”
“그게 왜 궁금해?”
드라이브 스루에 도착하자 토모에가 동전 지갑을 꺼냈다. 500엔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어 미사토에게 주었다.
미사토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드라이브 스루의 길을 도는 동안 토모에가 말했다.
“오늘 공연에 하양 언니 와요.”
“에, 왜 말 안 했어?!”
“백스테이지에 잠시 인사만 한댔어요.”
“그럼 그때 사진 찍으면 되겠네! 하양 씨가 안 올지도 몰라서 생각해보겠다고 한 거지?”
“오늘 재계약 결정되죠?”
“어?”
한 바퀴 돌아서, 미사토가 커피 두 잔을 받았다.
토모에가 아메리카노를 가져갔다. 그녀의 입술을 검고 쓴 액체가 적셨다.
“그거 결과 저한테 꼭 알려주세요.”
* * *
성필이 모든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히무라는 전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근심에 무의식적으로 불편하다는 제스처가 나올 법도 한데, 그는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내는 침묵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성필은 초조하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위상만으로…….”
기다리다 지친 성필이 이야기를 재개했다.
“위상만으로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두 개가 모두 필요해요.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만족할 수익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히무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였다.
“웨벡스와 처음 계약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1억 엔을 상환 의무 없이 지급해드렸죠? 신생 회사인 가로 엔터에겐 피와 같은 돈이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텔레비전 방송 출연. 꽤 여러 개였습니다. 일본에서 텔레비전이란 미디어가 가지는 힘을, 박 이사님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꽤 큰일이었죠.”
성필은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히무라는 성필을 힐난하지 않았다. 그저 웨벡스가 소녀연맹에게 해준 것만을 읊었다.
공격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성필은 끊임없이 난타당하는 기분이었다.
“잡지와 라디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딘가에 출연시켜준단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건 자원입니다. 한정된 자원이요. 그곳에 웨벡스의 아티스트를 꽂아 넣었다면, 소녀연맹의 매니지먼트처럼 수익을 나눌 필요도 없었겠죠. 웨벡스는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했을 때보다 더 큰 이익을, 현재 시점에 달성했을 겁니다.”
성필은 압박 속에서도 그를 제지했다.
“가정은 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또, 성사되었던 리카 씨의 매니지먼트 기한 연장 계약을 박 이사님의 부탁으로 파기해드렸죠.”
“예, 그건…….”
“이걸 꺼내는 것도 실례였군요. 박 이사님의 말씀대로, 일본에서 활동 기한을 늘리는 것보다 소녀연맹에 집중하는 쪽이 더 나았을 게 확실하니까요. ‘오토마타’는 대단한 성공이었습니다. 다만…….”
히무라의 손이 그의 무릎에서 떨어졌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니 저희의 배려가 부족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희도 회사이니 이윤을 추구합니다. 소녀연맹을 지원한 건 미래에 수확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계약이 이렇게 흔들릴 거란 걸 알았다면…… 소녀연맹을 지금까지처럼 대하진 않았겠죠.”
웨벡스는 1년에 2개월, 소녀연맹의 일본 매니지먼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은 성심성의껏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했다. 프로모션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 넣었다.
그건 소녀연맹을 가족으로 여기겠단 약속을 지킨 것이었으나, 훗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니, 온정으로만 움직일 순 없다.
“지금까지처럼, 배려가 넘치진 않았을 겁니다.”
만약 재계약이 불투명하다면, 웨벡스는 무슨 수를 써서든 여태껏 들인 자원을 회수하려 할 것이다.
막말로 소녀연맹을 뺑뺑이 돌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돈만 벌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웨벡스는 소녀연맹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유지했다. 들인 자원에 비해 절박하지 않았다. 소녀연맹이 이 상태 그대로 재계약을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가로 엔터를 믿었으니까.
웨벡스는 가로 엔터에게 이유 없는 신뢰를 주었다. 왜냐하면…….
“저희는 가로 엔터를 가족으로 여기기로 맹세했었습니다. 그걸 지켰고요.”
오직 믿음만으로 소녀연맹을 푸쉬했다. 그 결과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케이팝 아이돌이 됐다.
“위상만으로 최고가 되지 않고, 돈을 많이 버는 것만으로 최고가 되지 않는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둘 다 추구하다간 둘 다 잃는 수가 있습니다. 또다시 실례되는 질문을 드리게 됐습니다만, 다른 대형 기획사가 연락했습니까?”
“템퍼링(계약이 끝나기 전에 다른 회사와 접촉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당연한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다른 대형 기획사로 가봤자 웨벡스만큼은 못 할 겁니다. 웨벡스는 일본 내에서 케이팝 아이돌 매니지먼트 경험이 가장 풍부한 회사입니다.”
히무라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성필은 침묵으로 답했다.
히무라는 회의가 길어지리라 생각했는지 부하 직원에게 말하여 커피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커피가 나올 몇 분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둘의 앞에 커피가 내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히무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런 일은 흔한 편입니다. 뮤지션들은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나면 회사를 상대로 계약을 조정하길 원합니다. 변호사를 데리고 당당하게 홀로 들어오는 경우가 꽤 많죠. 그때마다 얼굴이 붉어집니다. 저희뿐 아니라 상대도요. 가족이라고 여겼는데 말입니다. 물론 압니다. 돈이 엮이면 가족이고 뭐고 없죠.”
히무라는 가방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었다.
“수익 비율은 조정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박 이사님이 제시하신 정도로는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성필은 그가 내민 서류를 읽었다.
히무라는 포켓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양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여기서 돌이키기엔, 웨벡스가 쏟은 자원이 너무 많습니다. 부디 여기서 만족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성필은 서류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는 히무라가 내민 만년필을 쳐다보았다.
대치 상태가 얼마간 이어졌다.
히무라는 손에 든 만년필을 힘없이 테이블에 두었다. 그러자 유순했던 그의 눈에 야수와 같은 호승심이 떠올랐다.
“박 이사님, 앞으로의 대화가 길어지겠군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신사적인 대화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먼저 드릴 말씀은, 이 이상의 비율 조정은 수락할 수 없단 겁니다.”
성필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히무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히무라는 의식적으로 눈썹을 꿈틀댔다.
“송구하지만 제가 아까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어느 회사도 웨벡스보다 낫지는 못할 겁니다. 어느 회사도, 절대.”
그걸 히무라가 어떻게 알까.
미래를 보기라도 하는 걸까.
그가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어느 회사도 웨벡스 이상의 성과를 올리도록 두지 않겠다, 라고.
히무라는 간접적인 협박을 꺼낸 것이다.
사석에선 웃고 떠들며 형 동생 해왔다.
하지만 정장을 입고 만난 현재, 그는 자본주의의 맹수였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여태껏 쌓았던 인간관계를 전부 뭉갠다.
우정보다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다.
히무라는 웨벡스 회장의 아들로서.
성필은 가로 엔터의 이사로서.
둘 다 어깨에 수많은 이들의 삶을 걸고 있다.
“사인.”
히무라가 만년필을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성필이 만년필을 받았다. 그리고 촉에 뚜껑을 끼워 닫았다.
“저는.”
성필이 만년필을 서류 위에 두었다.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알고 계시겠죠.”
“예.”
“그건 너무 크니까 일본으로만 한정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소녀연맹은 유일무이한 궁극의 아이돌이 되어야 합니다. 향후 몇 년간 어떤 케이팝 아이돌도 따라잡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요. 그러기 위해선 돈과 위상, 명예 전부 다 필요합니다. 그건 가로 엔터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일본에 뿌리박은 웨벡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 것만 빼먹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저는 소녀연맹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이사님의 인생에 끼어든 작위적인 부자 캐릭터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부조리한 계약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최고라면, 역시 돔 투어를 돌아야겠죠. 수용 인원 몇만 명의 돔을 수십 번 가득 채워야, 그래야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히무라는 이야기가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성필은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히무라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는 히무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을 돌려 허공을 보는 중이었다.
“웨벡스의 도움이 있다면 향후 2년…… 소녀연맹 6년 차쯤 되어야 할까요.”
“뭐 하자는 겁니까……?”
“히무라 실장님.”
드디어 성필이 히무라와 눈을 마주했다.
“케이팝 아이돌의 일본 집객 최고 기록이 몇입니까?”
“……다키스트의 100만일 겁니다, 아마도요.”
“걸그룹은?”
“‘인티머시’의 25만 명…….”
“소녀연맹의 목표는 돔 투어로 100만 명을 모으는 겁니다.”
“100만 명……?”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케이팝이 2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한 현재에도 다키스트의 기록을 뛰어넘는 그룹은 나오지 않았다.
KS 엔터가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건 다키스트가 일본에 진출했기 때문이란 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동네 구멍가게인 KS 엔터를 케이팝의 첨단으로 끌어올린 건 다키스트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 해 동안 콘서트에 100만 명을 끌어모으는 뮤지션이 있으니, 최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펑펑 써대며 온갖 실험을 할 수 있었을 테니.
“일본 열도의 북쪽 끝부터 남쪽 끝까지, 공연장이란 공연장은 전부 다 돌 겁니다.”
“박 이사님의 꿈 이야기는…….”
“이건 꿈도 아니고 망상도 아닙니다. 2년 이내에 반드시 이룰 목표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세요.”
성필이 가장 처음 꺼냈던 서류를 히무라에게 내밀었다.
꿈 이야기를 줄곧 하다가 아무런 협상도 없이 초기 조건에 사인하라는 건가?
히무라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지려던 찰나.
“그러면 콘서트 수익을 추가로 나누겠습니다. 미래에 100만 명을 콘서트에 불러들일 아이돌의 수익을요. 그러니까.”
성필이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그것을 히무라 앞에 놓인 서류 위에 탕 놓았다.
“그때까지, 소녀연맹을 정점으로 밀어 올리세요.”
“……가정(假定)을 꺼내지 말자고 먼저 말씀했던 건 박 이사님입니다. 어떻게 될 거다, 그런 불확실한 선언만 듣고 사인할 순 없습니다.”
“그래요?”
성필이 그의 앞에 둔 만년필을 가져갔다.
“그럼 두고 봅시다. 내년 초에 일본 투어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몇 명이 모일지요. 제 목표는 인티머시를 뛰어넘는 겁니다. 그걸 보고 2년 후에 소녀연맹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점쳐보시지요. 그런데 그때가 되면.”
성필은 손안에서 만년필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 조건으로 절대 다시 계약 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