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6화
성필은 토모에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바로 떠올랐다.
딱히 제이팝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토모에는 제이팝에 관심이 없어도 알 만큼 유명한 가수였다.
성필이 리카를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둘의 인지도는 달랐다. 리카는 오직 외모만으로 한국에까지 알려졌다면, 토모에는 음악으로 알려졌으니까.
‘일본 Z세대의 상징.’
한국에까지 그 유명세가 전해지자 기자들이 타이틀처럼 썼던 말이다. 자격도 없는 뮤지션에게 그런 타이틀이 붙을 리 없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어느 세대를 아울렀다는 건 대단한 업적이다.
스파이스 걸스의 활동 기간이 케이팝 아이돌의 7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짧았으나, 아직까지도 걸그룹의 전설로 남아 있듯이.
그런데.
‘이 시기였나?’
이렇게 빨리 한국에까지 알려졌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케이팝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주마다 스케줄러를 작성하라고 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토모에의 커리어는 성필의 관심사 밖이었다.
제이팝엔 관심 없는 자신에게까지 이름이 들려오니 어지간히 유명한 가수인가 보다, 그리 생각했던 게 끝이었다.
“대단하네요.”
장하양은 어느새 성필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성필의 폰에 떠오른 워터멜론 차트를 보며 감탄했다.
“일본 노래가 한국 차트에 든 건 처음 봐요.”
“그러게.”
제이팝은 한국에서 저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톱 제이팝 뮤지션들과 케이팝 톱 뮤지션들의 글로벌 청취자 수, 혹은 스트리밍 횟수는 비슷한 수준이다.
역사와 세월을 쌓은 천상계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각 분야의 톱이 세계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인지도를 공유하는 것이다.
제이팝은 애니메이션 산업과 결합함으로써 글로벌적 인지도를 확보한다.
음악과 뮤지션 자체가 인기의 근원이 아니기에 꾸준한 성공은 없지만,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장이다.
“미사토 씨가 토모에 씨를 ‘제2의 가후’ 같은 표어로 홍보했거든.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는가 했는데, 이건 뭐…….”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건 그거고, 성필은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장하양은 그의 응시가 거리감 때문인 줄 알고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하양이도 대단해.”
“제가요?”
“이 곡에 하양이가 작곡으로 꼈잖아. 하양이와의 작업이 영감을 준 거 아니야?”
“작곡이라뇨.”
장하양은 보기 드물게도 부끄러워했다. 언제나 의연함을 잃지 않던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옆에서 베이스만 쳤는걸요.”
“그렇게 따지면 ‘롱 포’도 설하가 옆에서 기타만 친 게 되잖아.”
‘롱 포’는 백설하가 아무렇게나 친 기타 멜로디로부터 탄생했다.
장하양은 백설하가 예시로 나오자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당해지기로 한 모양이다.
“그럼 조금은 잘난 척해볼까요?”
“얼마든지. 아, 그래. 이거 SNS에 올리면 좋겠다.”
곡의 크레디트를 보는 사람은 드물다. 장하양의 이름이 박혀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
‘Hayang’이란 이름을 보아도 소녀연맹의 장하양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홍보가 될 거야.”
일본과 세계에서 바이럴 히트(SNS에서 유행한 음악)한 곡에 장하양이 참여했다.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팬들에겐 떡밥이 된다. 또, 이대로 토모에가 더 유명해지면 소녀연맹의 인지도 향상에도 적지만 도움이 될 테고.
성필은 홍보팀에게 웨벡스에게 해당 안건을 말해보라고 지시했다.
“하양이가 SNS에 토모에 씨를 언급해도 되는지요. 내일 일본에 가니까 같이 사진도 찍어 올리면 좋겠어요.”
올해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다.
장하양은 용건을 끝내고 사무실을 나섰다. 성필은 일본에서 히무라를 만나 할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고, 1시간이 지나자 연락이 왔다.
“지금으로선 안 된다고 합니다.”
성필은 순간 당황했다.
‘당연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토모에와 얽히면 소녀연맹에게 이득이 있다. 그건 토모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녀연맹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핫한 케이팝 아이돌이란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송 포 피플’은 일본의 각종 음악 차트 TOP100에 아직까지 걸려 있다. 발매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곧 일본 컴백도 해. 지금부터 접점을 만들어두는 게 좋을 텐데, 왜 안 된단 거지?’
성필이 내릴 수 있는 답은 두 개였다.
첫 번째, 소녀연맹과 얽히는 건 토모에의 이미지 전략과 어긋난다.
두 번째, 토모에가 거부했다.
‘첫 번째는 미사토 본부장님이 거부한 거고, 두 번째는 토모에가 거부했단 가정이야. 둘 다 일리가 있어.’
성필은 자그마한 아쉬움을 품었다.
“이유를 물어볼까요?”
“아니요.”
안 된다고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도 못 할 짓이다. 말할 수 있는 이유라면 진즉 해줬을 테고.
“어차피 제가 내일 일본에 가니, 기회가 있으면 여쭐 수 있겠죠.”
그렇게 토모에에 관한 사안은 끝났다.
일하던 중, 성필은 아이튜브에서 토모에를 검색해보았다. 그녀의 라이브 영상을 찾아서 클릭했다.
비주얼, 가창력,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성공한 이유는 음악 그 자체에 있다. 스스로 작곡, 작사, 노래와 연주까지 가능한…….
‘정말 세이코 씨 같네.’
성필은 토모에의 앨범 크레디트를 찾아보았다.
모든 곡의 작곡, 편곡에서 토모에의 이름이 가장 앞에 있었다. 크레디트에서 이름의 순서는 작곡 과정에서의 비중을 나타낸다.
‘진짜 혼자서 작곡, 편곡, 작사를 다 한 거구나.’
다시 라이브 영상으로 돌아왔다.
옛날엔 산발이었던 머리칼을 깔끔하게 뒤로 묶었다. 말끔하게 드러난 얼굴, 그중에서도 시선을 빼앗는 게 있었다.
왼쪽 눈가 아래에 찍힌 점이다. 흔히 눈물점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토모에가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물점이 두 개다.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수직으로 두 방울이 찍혀 있다.
‘전에 봤을 때 있었나? 타투나 화장인가.’
아니면 전엔 화장으로 숨겼던 건가.
성필은 팔짱을 끼곤 아예 감상자가 됐다. 마이크에 입을 바짝 다가가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아이돌 했어도 괜찮았을…….’
“박성필 이사 월급루팡 한대요!”
옆자리의 손혜빈이 소리치자 성필이 급히 아이튜브를 껐다.
아이돌을 보고 있었다면 당당하게 ‘일이야’라고 했겠지만, 아이돌과 관련 없는 여가수를 보고 있으니 지레짐작 겁을 먹었다.
* * *
성필은 소녀연맹보다 한발 먼저 일본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슈이치 씨!”
팻말을 든 슈이치였다. 과거 아이돌의 정수를 배우겠다며 가로 엔터에서 한동안 지냈던 그다.
어린 샌님 같았던 그때와 달리 이젠 제법 어른 같은 티가 난다.
성필은 그와 악수하며 그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너무 달라지신 거 아니에요?”
슈이치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의 하얗던 피부는 태닝으로 건강한 구릿빛을 띠었다. 펌으로 물결치듯 곡선을 그린 머리칼은 왁스로 멋지게 모양을 냈다.
게다가 맞춤인 듯 정장은 그의 몸 라인을 타고 깔끔하게 떨어져 내렸다.
정말이지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여름에 바다 다녀오셨어요?”
“아뇨, 따로 태닝을 받았습니다.”
“이야.”
성필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의 어깨를 팍팍 두드렸다. 아이를 놀리는 어른의 웃음이었다.
“연애하세요? 애인이 건강미 있는 타입을 좋아해요?”
“애들이…… 하라고 해서…….”
“……아.”
애들이란 슈이치가 맡은 그룹인 ‘에스타스’를 말하는 것일 터다.
“애들이 하라고 했다고요……?”
“어느 날부터 패션 잡지를 읽히더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제 보니 귀에 작은 피어싱도 있다. 귀를 뚫으면 기본으로 주는 은색의 동그란 것 말이다.
피어싱 주변에 붉은 기가 보이는데,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래서, 하신 거예요?”
“그게 애들이랑 친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슈이치는 가로 엔터에서 아이돌의 정수를 배웠다. 그리고 그가 배운바, 프로듀서는 아이돌과 친해야 한다.
그러한 친밀감이 시너지를 일으킨다고 판단했다. 성필과 소녀연맹 멤버들의 관계로부터 추측한 것이었다.
슈이치는 웃으며 이것저것 권하는 에스타스 멤버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이 된 것이다.
“근데.”
슈이치가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화내시고…… 저도 제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이 기겁할 만도 하다.
항상 모범생이었던 아들.
도쿄대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간 아들이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서 왔으니, 얼마나 놀랐을지 가늠도 안 된다.
심지어 그 이유가 부하 직원(에스타스)이 시켜서라고 한다. 대체 뭐라고 생각했을까.
슈이치가 울먹임이 섞인 한숨을 뱉었다.
“죄송합니다. 박 이사님을 뵈니 순수했던 그 시절의 제가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한 이사님은 잘 지내시죠?”
“네, 네에, 잘 지내세요…….”
성필은 슈이치가 에스타스 멤버들에게 괴롭힘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괴롭힘이라기엔 묘하게 슈이치에게 도움이 된다.
옛날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으니까.
보니까 간단한 기초 화장도 하는 듯하다.
에스타스는 까마득한 어른이 자신들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게 재밌었던 걸까. 정말이지 끔찍하다…….
그때 성필은 홍규헌이 떠올랐다.
‘나도 사장님 때문에 운동하고 화장도 배우고…….’
바로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없앴다.
‘나는 자의로 한 거니까.’
슈이치와는 다르다.
둘은 공항을 빠져나왔다. 슈이치가 가져온 차를 본 성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벤츠 스프린터네요. 와, 크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크네요. 이거 연예인들이 쓰는 거 아니에요? 저 때문에 쓰셔도 괜찮아요?”
“원래 에스타스한테 쓰이던 겁니다. 오늘은 휴일이라 박 이사님을 모시는 데 가져왔습니다.”
차의 천장이 굉장히 높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현재 타는 밴도 크지만, 이것보다 크진 않다.
‘이런 게 있으면 애들도 이동 중에 더 편히 쉴 수 있겠지.’
그런데 멀쩡한 차를 놔두고 고가의 차량을 산단 것도 이상하다. 한구인의 얼굴이 거무죽죽할 게 눈에 선하다.
‘차는 나중에 더 여유가 생기면 사자.’
아까 슈이치를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에 비유했던가. 사실 그건 가로 엔터에게 더 들어맞는 비유였다.
우효민, 소녀연맹, 웨이퍼센트, 카오틱 에너지로 이어지는 컴백과 데뷔는 가로 엔터를 거의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여기선 쉬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순 없다.
가로 엔터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피 흘리고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칼을 휘둘러야 한다.
‘최종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성필이 일본에 온 건 웨벡스와의 재계약을 위함이다. 동시에 가로 엔터가 최종 목표에 도달할 여유를 남기기 위함이기도 하다.
가로 엔터에게 유리하게 재계약을 맺어야 한다.
성필은 굳은 의지를 품고 조수석 문을 잡…….
“아, 뒤에 타셔야죠!”
슈이치가 바로 달려와서 뒷문을 열어주었다. 성필을 상석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둘이 타는 데 제가 뒷자리에 앉는 건 슈이치 씨를 기사처럼…….”
“괜찮습니다. 그러려고 온 걸요.”
어쩔 수 없이 성필은 뒷자리에 탔다.
슈이치는 외모처럼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실력으로 운전했다. 그는 백미러로 성필의 안색을 살폈다.
그게 계속되자 성필이 먼저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 괜찮으신가 해서요.”
“뭐가요?”
슈이치는 히터의 온도를 낮추었다.
“그, 저도 압니다. 박 이사님이 한국에서 어떤 말을 듣는지요.”
성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내가 무슨 말을 듣는지?’
프로듀싱의 신?
아니면 전설로 남을 프로듀서?
모르겠다.
“매국노, 라고…….”
“아아.”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성필이 풋 웃었다.
“에스타스 때문에요?”
“예…….”
에스타스의 프로듀싱엔 가로 엔터의 입김이 닿았다. 정지음과 성필의 입김이 말이다.
에스타스의 등장은 일본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껏 케이팝을 모방하고자 한 시도는 몇 개 있었지만, 전부 다 완성도 면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에스타스는 쓰는 언어만 일본어지, 문화적 문법은 케이팝 그 자체였다.
이는 한국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비웃음을 사야 할 일본 아이돌이 케이팝과 거의 같은 완성도로 성공을 구가했으니.’
그 뒤엔 가로 엔터와 성필이 있다.
그래서 성필은 매국노라는 소리를 얻어먹었다. 주로 일본을 비하하는 영상이나 국뽕 영상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기분이 나쁘진 않으십니까?”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에스타스 때문에 제가 욕을 먹어서 그런 거죠?”
슈이치의 마음씨는 고맙지만, 성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럼에도 슈이치는 안심하지 못한 듯했다.
성필이 말했다.
“슈이치 씨, 케이팝 아이돌은 네 단계를 거쳐서 만들어지죠? 뭐였죠?”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입니다.”
“당연한 과정이죠. 사람들도 정확한 용어를 모를 뿐이지, 아이돌이 대충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걸 알아요. 그런데, 이건 당연한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 창조하고 체계화해낸 것이다.
“KS 엔터의 정호환 이사님이요. 최초로 지속 가능하고 퀄리티를 보장하며 성공을 이뤄내는, 그런 체계를 만들어내신 거예요.”
대중음악의 역사 약 100년간, 이런 체계를 생각해낸 인간이 없었다.
생각은 했을지언정 시도한 사람은 없었고.
시도한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30년간 이어질 안정된 체계로 만든 사람은 없었다.
정호환이 최초다.
“그건 기술이에요.”
기술의 첫 번째 조건은 재현성이다.
우연이 아니라 수천, 수만 번이고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정호환은 아이돌의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제가 에스타스에게 케이팝을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 또한 기술이죠.”
케이팝은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만 만들어져왔다. 한국에서 만들어낸 것만 성공해왔다.
그런데 아주 옛날부터 케이팝을 한국이 아닌 토양에서 만들어내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수상할 정도로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던 SMS 엔터의 강성욱 대표였다. 10년도 더 전부터 그는 케이팝 4단계론을 주장해왔다.
최종 단계인 4단계가 이것이다.
‘현지에서 현지 기획사가 아이돌을 만들어낸다. 즉, 한국 국적이 아닌 아이돌을 성공시킨다.’
그 단계론을 따르자면 성필의 성공은 3단계가 될 것이다.
“제가 이뤄낸 업적 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매국노란 게 말이 안 되는 거기도 하고요. 오히려 나라에서 상을 줘야죠.”
“제, 제 말이 그겁니다. 그렇죠.”
슈이치는 안심한 기색이었다.
오늘 성필을 만나기 전까지 그를 어떻게 위로할지 계속 고민했을 수도 있겠다.
성필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 걸로 걱정하지 마세요. 에스타스는 더 성공해야 해요. 제가 성공하도록 도울 수 있으면 영광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호텔에 도착했다.
도쿄에 위치한 비즈니스 호텔이다. 도쿄에 위치한 호텔, 이 말부터 엄청난 가격을 암시한다.
그런데 슈이치가 데려온 곳은 5성급 호텔이었다. 게다가 스위트룸이라고 한다.
슈이치가 발렛을 맡기며 너무나 태연히 말해서, 성필은 자신이 무슨 대기업의 임원쯤 된단 착각까지 들었다.
홀 안으로 들어오자 뭐라고 할 정신이 생겼다.
“스위트룸이요? 그렇게 넓은 델 저 혼자요?”
웨벡스가 호텔을 잡아준다기에 재계약을 앞두고 돈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돈을 써도 너무 많이 쓴다.
그냥 예전처럼 웨벡스가 가진 건물 중 한 곳의 방을 빌려주어도 좋았을 텐데.
“이전처럼 몇 개월 동안 계시는 것도 아니시잖습니까. 하루 이틀 정도,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님께 이만한 대접을 해드리는 건 당연합니다.”
이런 말까지 듣고서 사양할 순 없었다.
성필은 소녀연맹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느꼈다.
‘나한테 이런 대접을 해주고도 아깝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소녀연맹이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뜻이겠지.
슈이치는 체크인하곤 룸카드를 그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일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박성필 이사님.”
* * *
소녀연맹 멤버들은 일본에 올 때마다 썼던 숙소로 들어섰다. 이곳에서만 총 몇 개월을 지냈어서 그런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도 빼먹지 않았다.
이번에 독방을 쓰게 된 건 백설하였다.
“아.”
그녀는 자신이 낸 가위를 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독방을 쓰는 거야……? 리더 따위가 독방을 써도 되는 거야……?”
“싫으시면 제가 쓸까요?”
장하양이 농담을 던졌다.
백설하는 캐리어를 들고 호다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고 찰칵 문이 잠겼다.
멤버들은 둘씩 짝지어 방으로 향했다.
리카와 조아라가 같은 방이었다.
“아라쨩.”
리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등졌다. 그녀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갔다.
“둘만 남았네? 이건 운명이야!”
리카가 조아라에게 달려들어 꼭 껴안았다.
“오늘이야말로 내 1,902번째 고백을 받아줄 거지?”
“아니.”
“손나(그런)!”
조아라는 리카에게 안겼음에도 능숙하게 캐리어를 열고 옷을 정리했다. 리카가 주접떠는 게 아예 들리지 않는단 기색이었다.
“에?”
조아라가 속옷들을 꺼내어 바닥에 두자 리카가 놀랐다. 리카는 공포에 떨며 말했다.
“아, 아라쨩. 티팬티 다 어디 갔어?”
조아라는 편하다는 이유로 스포츠 티팬티를 고집해왔다.
돈을 번 이후엔 바디 프로필 찍는 여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의류, 켈빈 클라인의 티팬티를 왕창 사들였었다.
그런데 그녀가 꺼낸 건…….
“왜 이렇게 평범해! 내가 아는 아라쨩은 이런 무미건조한 패션을 추구하지 않아! 당신 누구야앗―!”
리카는 조아라의 심리스 팬티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거의 반바지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다.
조아라가 그녀의 손에서 팬티를 빼앗았다.
“걍.”
“그냥이 어딨어! 이유를 말해! 안 그러면 더는 세쿠시(섹시)라고 안 불러줄 거야!”
조아라는 답 없이 캐리어에서 옷을 척척 꺼냈다. 리카가 심술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아도 말이 없었다.
마지막 옷이 나왔다.
겹겹이 쌓인 레깅스였다. 그것을 보자 리카는 그녀가 속옷을 바꾼 이유를 알아냈다.
“아, 알아냈어!”
조아라는 편함을 추구한다. 그런 조아라가 최근 찾아낸 가장 편한 의류가 바로 레깅스였다.
꽉 조이지 않고 피부에 부드럽게 달라붙어 불편하지 않은 스타일의 레깅스 말이다.
“티팬티 입고 레깅스를 못 입어서 그런 거구나!”
“어, 맞아. 맞으니까 그만 말해.”
“공연음란죄로 잡혀갈 수도 있으니까!”
“……어.”
“자기도 모르게 남자들을 유혹……!”
조아라가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리카가 바닥을 팍팍 치며 ‘항복!’을 외쳐도 조아라는 놓아주지 않았다.
“살려줘어엇……!”
리카의 얼굴에 피가 몰려 새빨갛게 변한 다음에야 놓아주었다.
조아라는 바로 티셔츠와 레깅스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옷장에 옷을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리카는 조아라에게 조여진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왠지…….’
조아라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공연음란죄니 뭐니 해서 그런 걸까.
리카가 쭈뼛쭈뼛 조아라에게 다가갔다. 조아라의 뒤에 서서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라쨩,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애.”
“넌 아무렇지도 않아?”
“에, 뭐가?”
“일본 활동.”
“일본 활동이 왜……?”
리카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서, 설마 일본을 싫어하는 거야? 인종차별이얏! 이에(아니), 아타시(내)가 일본의 좋은 점을 잔뜩 가르쳐줄게! 놀러 가자!”
“일 년에 두세 달이나 여기서 활동하잖아. 근데 들이는 시간만큼 돈이 안 들어와.”
“어?”
조아라는 옷장을 세게 닫았다.
“이거 웨벡스가 우리 수익 다 가져가는 거지? 그래서 이런 거지?”
“에…….”
에?
* * *
“죄송합니다. 오늘은 쉬고 싶어서요.”
성필은 호텔 방 창가에 앉아 한껏 기분을 내는 중이었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 손에는 룸서비스로 시킨 일본주가 들려 있다.
“모처럼 초대해주셨는데 거절하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통화 상대는 히무라였다. 그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성필은 야경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쉬고 싶다, 고 말했었다.
그런데 성필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호텔에만 있었다. 쉬어도 너무 쉬었다.
‘진짜 쉰 건 아니지만.’
웨벡스와 맺었던 계약서를 다시 읽고, 가로 엔터 이사들과 머리를 쥐어 짜내어 만든 요구 사항을 계속 검토했다.
그리고 내일 있을 재계약 관련 미팅을 수백 번도 더 상상했다.
내일 성필의 목표는 명백하다.
‘가로 엔터 쪽의 수익 비율을 높이는 거.’
처음 웨벡스와 계약을 맺을 때, 가로 엔터는 그들로부터 1억 엔의 계약금을 받았다.
거기서 기인한 문제가 있다.
웨벡스는 일본에서의 소녀연맹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기로 했고, 그에 따른 수익을 가로 엔터와 나눈다. 그리고 이는 웨벡스 쪽의 비율이 높도록 이뤄졌다.
‘그땐 당연했어.’
가로 엔터는 일본에 어떠한 기반도 없었다.
웨벡스에게 의지한 채 일본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로 엔터의 상상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텔레비전, 잡지,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웨벡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소녀연맹을 홍보했다.
‘그 덕에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톱의 자리에 앉았다.’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걸그룹.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 가수로선 최초로 앨범 플래티넘 인증.
홍백가합전 출장.
소녀연맹 정도로 일본에서 성공한 아이돌은 전무후무하다.
전성기의 다키스트만이 콘서트 집객과 수익률에서 소녀연맹을 앞지른 정도다. 그렇다고 소녀연맹이 다키스트와 비슷하다고 할 순 없다.
‘다키스트가 현대의 그룹이었으면 소녀연맹을 진즉 압살할 성적을 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웨벡스의 덕에 소녀연맹이 현세대의 톱에 도달했단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들만의 덕이 아니지만, 그들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 웨벡스를 향해, 성필은 내일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로 엔터 쪽의 수익 비율을 높게 조정합시다.’
일본은 소녀연맹의 밭이다.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소녀연맹의 팬 절반은 일본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이니까.
그런데 수익은 그렇지 못하다.
‘소녀연맹은 늪에 빠졌어.’
1년의 3개월을 일본에 있다. 웨벡스와 맺은 2개월을 필수적으로 일본에서 활동한단 계약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수익은 총액의 1/4에 못 미친다. 시간 대비 이익에서 효율성이 극악이다.
중개업자가 하나 꼈는데, 그 중개업자가 가져가는 비율이 너무 크다.
그래서 바꾸고자 한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성필은 그 단어가 떠올랐다.
웨벡스가 준 1억 엔. 웨벡스가 해준 홍보, 웨벡스가 준 기회.
그건 가로 엔터가 100억 원을 들여서도, 심지어 1,000억 원을 들여서도 할 수 없었을 일이다.
‘가족이라고 했지.’
웨벡스는 소녀연맹을 웨벡스 소속 아티스트로, 가족으로 대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걸 지켰다.
어쩌면 웨벡스가 소녀연맹에게 투입한 자원에 비해 그만큼 수익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본이 문제가 아니라 인력과 영업력, 시간의 문제다.
웨벡스가 소녀연맹에 쏟은 자원은, 가로 엔터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이겠지.
‘그런데 이제 다 컸으니 계약 내용을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바꾸자고…….’
흔한 일이다.
흔한 일이지만,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웨벡스는 재계약 내용을 조정하려고 시간을 질질 끌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도의를 들먹이며 성필의 마음을 바꾸려고 할지도.
아니면 아예 중역들이 한국으로 날아가 홍규헌을 설득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비즈니스다. 이익이 안 된다면 끊어낼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받은 게 너무 많다.
‘내 목표는.’
그리고 앞으로도 받아야 할 게 있다.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것.’
웨벡스의 도움 없이 일본을 제패할 순 없다.
‘서양권과 연이 없는 아이돌 그룹에게 일본은 최고·최대의 시장이야. 소녀연맹에게도 그래. 영미권에서 인민들이 결집할 조짐이 보이지만, 만약 그게 이뤄지지 않거나 미뤄진다면…….’
소녀연맹에겐 여전히 일본이 가장 중요한 전장일 것이다.
소녀연맹은 단순히 앨범만 많이 팔고 콘서트를 많이 돌아선 안 된다. 일본에서 확고부동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순수하게 소녀연맹이 일본에 들인 시간만 1년이다. 씨앗을 뿌렸으니, 그 대가를 얻어야 한다.
성필은 그 대가가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웨벡스의 도움이 절실해. 동시에, 웨벡스에게 너무 많은 이권을 줄 수도 없어.’
성필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만 좋은 쪽으로 계약을 다시 바꿔주세요, 라고.
히무라의 초대를 거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인간적인 교류를 해봤자 내일 방해만 될 것이기에.
* * *
“안 오신다는데.”
히무라가 세이코의 눈치를 보았다.
세이코는 평온한 눈빛이었다. 최근 들어 그녀는 바뀌었다.
옛날처럼 어린애와 같이 소리를 빽 지르지도 않았고,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또 험담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워.’
꼭 보리수 아래서 가부좌를 튼 부처 같다.
저 평온한 눈빛을 봐라. 마라 파피야스도 세이코의 눈을 보면 당황할 게 분명하다.
세이코의 입이 열렸다.
“파쿠 이사는 아침부터 계속 호텔에 있는 거지?”
“어.”
“소녀연맹을 보지도 않고?”
“응.”
“슈이치가 관광을 시켜준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었고?”
“으응…….”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호텔에만 있다, 는 거지?”
“…….”
세이코가 눈을 반쯤 감았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바로 폰을 꺼내어 메신저 앱을 켰다. 번개처럼 타자를 쳐냈다.
[너 어디야?]
상대는 치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