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54화 (754/760)

754화

“귀여워서……?”

“응, 귀여워서.”

노아는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혹시 그녀도 리카처럼 본인이 귀엽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세라는 귀엽지 않았나?”

“응?”

갑자기 위세라의 이름이 나왔다. 작은 키에 항상 뚱한 얼굴인 그녀가 떠올랐다.

“세라도…… 귀엽지.”

“정진이는?”

정진은 무뚝뚝한 성격이다.

성필이 판단하기에, 정진은 글로브 멤버 중 가장 성필과 친하지 않은 멤버였다.

칭찬할 때도 혼낼 때도 정진은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소민이랑 같이 만났을 때가 제일 부드러웠지.’

정진도 나이를 먹어가며 성격이 유들유들해진 게 분명하다. 성필에게 농담도 던질 정도였으니.

아무튼, 정진은 외모적으로 보자면 귀엽다고 할 순 없다. 성격도 그러했다.

하지만 성필이 정진을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중학생 시절이었을 때다. 그때 성필이 정진을 보고 느낀 인상은…….

“귀여웠지.”

“…….”

노아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제야 성필은 그녀가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알아냈다. 굳이 다른 멤버들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매력이 뭐였냐고 묻는 거구나.’

노아의 질문 방식 때문에 성필은 똑같은 대답밖에 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위세라나 정진을 연습생으로 뽑은 이유를 묻지 않고, 둘이 귀엽냐 아니냐를 물었으니까.

성필이 노아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그녀가 타깃을 바꾸었다.

“그럼 박 이사는 왜 리카를 뽑은 건가?”

리카의 외모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귀여운 타입은 아니잖나…….”

리카가 아주 좋아할 발언이었다. 그녀는 성필이 귀엽다고 할 때마다 아주 학을 떼니 말이다.

과연, 리카는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박 이사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해드릴게요! 아타시(제)가 소중하고 예쁘고 잘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에요!”

“날조하지 마!”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찬양 세례에 성필은 바로 제재를 가했다.

“내가 그렇게 노골적인 칭찬을 했다고? 너를 뽑은 이유로 그런 말을 했다고?”

“아닌 건가?”

“아뇨 노아 씨, 사실이에요! 박 이사님이 직접 저한테 하신 말씀이에요!”

“언제!”

“충격이에요! 진짜 기억 못 하시는 건가요! 저희가 데뷔했을 때예요!”

소녀연맹이 데뷔했을 때.

‘아, 생각났다.’

그런데 그건 리카를 소녀연맹으로 뽑은 이유가 아니었다.

에리카와 자신을 비교하고 침울해있던 리카를 달래기 위해 성필이 해준 칭찬이었다.

성필은 리카의 발언이 과하다고 여겼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니었다. 그때 성필이 해주었던 위로엔 ‘에리카 수십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너 한 명을 고를 거야’ 같은 말도 섞여 있었으니까.

성필이 리카의 말이 사실임을 기억해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리카는 승자 특유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아타시(제)가 소중하고 예쁘고 잘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에요! 그게 박 이사님이 저를 가로 엔터의 첫 번째 연습생으로 뽑은 이유에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노아는 리카의 말을 곱씹었다.

“그런데 뭘 잘한다는 건가?”

“에?”

“예쁘고 잘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뽑았다고 했다요. 근데 잘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잘한다?”

리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성필을 쳐다보았다.

“아타시(제)가 뭘 잘해서 뽑으셨죠!”

“그런 맥락 아니었어.”

성필은 노아의 눈치를 보다가 리카에게 귓속말했다.

“에리카 씨보다 ‘잘해 보인다’는 뜻이었어.”

“아아.”

리카가 다시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아타시(제)가 에리쨩보다 잘한다는 뜻이에요!”

노아는 여전히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손에 넣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눈엔 의문이 가득했지만, 굳이 더 물으려고 하진 않았다.

대신 씁쓸함이 감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구먼…….”

뭐가 그렇다는 걸까.

“사랑스럽고 귀엽고 잘하고 예쁜 리카……. 그런데 나는 귀여움뿐인가……. 완전히 졌구먼…….”

성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노아를 뽑은 이유는…….

‘……진짜 귀여워서인데.’

애초에 나이 어린 연습생의 뭘 보고 뽑겠는가. 당시의 석세스 엔터는 작디작은 기획사에 불과했다.

‘실력을 이미 갖춘 연습생이 올 리도 없으니, 볼 수 있는 건 외모와 느낌이 전부였어.’

진짜 진짜 귀여워서 뽑았다고 말해봤자 노아의 오해를 더 두껍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리카보다 더 귀엽다고 말할 수도 없고, 리카를 뽑은 진짜 이유를 말해줄 수도 없다.

진짜 이유는 리카가 KS 엔터의 연습생으로 있으며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특화된 다른 멤버들과 달리, 리카는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더였다.

그 이유를 말하면 노아는 또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잘하는 데다 실력까지 뛰어나다…….’

노아는 침울했다.

성필이 자신을 뽑은 이유가 생각보다 훨씬 단순했으며, 그 이유는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일 터다.

“그런 거예요! 제 승리네요!”

성필이 리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수긍했다.

“박 이사, 시간 내줘서 고맙다요.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도 잘되길 빌어. 가보겠다.”

오늘따라 유난히 노아의 등이 작아 보였다. 그녀가 등을 돌려 보일 리가 없는데도, 리카는 노아를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노아!”

성필이 노아를 불렀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난 너를 연습생으로 뽑았어.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야. 그런데 네가 원하는 답은 가능성 같은 게 아니지? 그렇다고 글로브와 관계없는 내가 뭐라고 할 순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네가 글로브의 일원이 된 이유가 있을 거란 거야. 네가 글로브에 있단 거 자체가 네 가치를 증명해. 그러니까 남들과 비교하면서 기죽지 마.”

“…….”

노아는 씩 웃으며 묵례했다.

“박 이사는 친절하다.”

그리고 그녀는 떠나갔다.

성필은 사라지는 그녀의 등을 쭉 바라보았다. 그때 리카가 성필의 어깨를 톡톡 쳤다.

“조마조마했어요.”

“왜?”

“저랑 비교해서 노아 씨를 위로해줄까 싶어서요. 저보다 나은 점을 줄줄이 말씀하시면 이사님을 어떻게 공격할지 고민했을 거예요.”

성필은 리카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주었다.

“네가 앞에 있는데, 그런 말은 못 하지.”

“그럼 제가 없으면 한단 말씀이신가요! 혹시 믹스테입 때 에리쨩을 격려하면서도 저를 들먹이셨나요!”

“돌아갈까?”

“우라기리모노(배신자)!”

리카가 성필의 등을 마사지하듯이 주먹질했다. 성필은 그녀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답했다.

“그런 적 한 번도 없어. 리카가 최고인데 누구랑 비교해.”

“말이나 못 하면 밉진 않아요!”

“어? 웃네?”

“저는 웃는 상이에요!”

둘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리카가 말했다.

“다른 소련 멤버들한테도 그런 말씀 하셨죠?”

“각자의 분야에서…….”

“같은 소녀연맹이니까 그건 봐 드릴게요!”

빨간불이다.

차가 멈추자 성필은 왼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까 윤상열을 대할 때처럼 어색한 몸짓이었다.

“리카.”

“네!”

“내 평가가 그렇게 중요해?”

“응……?”

“아니, 들어봐.”

성필은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건만 자신의 발언이 이상하게 들리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벌써부터 리카를 설득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게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는데,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을 쓰잖아? 신경을 좀…… 많이 쓰잖아?”

성필은 진지했다.

그래서 리카도 진지하게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이해가 안 돼. 너희는 내가 아니어도 스스로를 긍정할 통로가 많잖아. 팬들의 사랑과 주변의 인정, 하다못해 통장에 꽂히는 돈만 봐도 그래. 그런데 내 한마디가…….”

다시 말하지만.

성필은 그 말을 다시 덧붙였다.

“이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는데, 너희가 내 평가에 그렇게 큰 가치를 두는 게 이해가 안 돼. 어쩌면 가장 중요할…… 중요한 거 맞지?”

“그렇죠.”

“너희는 정말 모든 걸 가졌는데, 나라는 인간의 평가가 왜…….”

“당연하잖아요!”

“당연한 거야?”

“박 이사님은 프로듀서시잖아요!”

태생적으로 아이돌은 독립적일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이돌은 프로듀서의 페르소나다.

즉, 아이돌에게 있어서 프로듀서란 자신의 내면이나 마찬가지다.

창작물에 작가의 자아가 투영되듯이, 아이돌에겐 프로듀서의 자아가 투영된다. 아이돌은 프로듀서가 쓴 소설의 주인공이고, 연극의 주역이다.

“설령 제가 먼 훗날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해도! 소녀연맹은 항상 제 이름 앞에 붙을 거예요! 박 이사님이 만든 소녀연맹의 멤버로 남을 거라구요! 어떻게 안 중요하겠어요!”

“……그렇구나.”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성필은 지긋이 액셀을 밟으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감동하셨나요!”

“응.”

“밤에도 제 얼굴이 떠오르시겠네요!”

성필은 케이어스에 대해 생각했다.

감독이 떠난 후 연극의 주인공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리카가 한 말이 모든 아이돌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면, 케이어스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작가가 포기한 소설 속에서, 그녀들은 어떤 미래를 보고 있을까.

* * *

“이게 뭐야?”

최유현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방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청결하지 않단 뜻은 아니었다.

방 중앙에 떡하니 박스가 뜯어져 있고, 그 안에는 일본어가 적힌 과자가 한가득 들었다. 주위로 과자 봉지들이 흩어져 있다.

최유현은 기타를 내려놓고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 바닥에 놓지 말라고 했지?”

바로 옆이 침대임에도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노아가 꾸물꾸물 일어났다. 그녀는 최유현이 하듯 과자 봉지를 줍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하려고 했다, 미안해…….”

최유현은 노아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최유현이 아니어도 알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최유현은 청소를 마치고 외출복을 벗으며 물었다.

“과자 다 뭐야?”

“부모님이 보내줬다. 유현이도 먹어라.”

노아가 아마이볼을 내밀었다.

“나중에.”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세탁실의 빨래 바구니에 외출복을 넣었다.

방으로 돌아오니 노아가 아마이볼을 다람쥐처럼 아삭아삭 갉아먹는 중이었다.

최유현이 노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모님 보고 싶어? 데뷔하고 고향에 두세 번 갔었던가?”

자식이 취직하면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던가. 역으로 자식이 부모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귀찮다든가, 피곤하다든가, 시간이 없다든가.

노아는 데뷔하고 나서 부모님을 직접 찾아뵌 적이 두 번에 불과했다.

최유현은 그녀가 정기적인 향수병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유현, 천재를 본 적 있다?”

“천재? 천재 본 적 있냐고?”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최유현은 곧바로 한 밴드가 떠올랐다.

이탈리아 국적의 밴드인데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 보통 미국과 유럽 콘서트 투어를 도는데, 올해에는 일본에도 왔었다.

최유현은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비행기표를 끊어 일본에 갔었다.

“거기 메인보컬 보고 생각했어. 와, 천재다. 내가 아이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밴드가 노래는 몰라도 무대는 심심하단 느낌을 계속 받았거든. 근데 걔네는 쇼맨십이 쩔어. 미쳤어. 스타성이 저런 건가, 막 막 그렇더라. 내가 운 좋게 거의 맨 앞자리였거든? 근데 거기 프론트맨이 무대 끝에 서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거야. 스탠드 마이크도 쓰러질 정도로 기울여서 잡고. 그대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진짜 미…….”

“나도 있다. 압도당하지.”

“압도…… 맞아. 압도당해.”

“그런 천재를 경쟁자로 두면 어떤 기분인가…….”

노아가 반쯤 남은 아마이볼을 한입에 삼켰다.

“난 요즘 느끼고 있다.”

최유현은 노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했다. 리카와 에리카 이야기이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해. 이길 수 있단 생각이 안 든다.”

“사무라이 걸즈 말하는 거야?”

노아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계속했다.

“학창 시절엔 공부 잘하는 애들 보고 아무 생각 없었다. 내가 노력을 안 해서 못 따라잡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노력하면 전교 10등 안에는 들 줄 알았어. 사회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진심을 내면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성공이 찾아올 줄 알았어. 아니더군…….”

열등감도, 열패감도 들지 않는다.

상대를 적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들다.

오히려 매료된다.

“그런 천재를 위해 바닥에 깔려 있는 게 내 역할이라고,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납득하게 돼버려. 그게 비참하지도 않은 게…….”

노아는 그녀의 말마따나 비참한 기색이 아니었다. 무미건조하게 아마이볼을 까서 또 입에 넣었다.

으적으적, 밀가루와 인공 감미료 합성물을 다 씹은 그녀가 툭 내뱉었다.

“비참하단 생각조차 안 드는 게, 비참하다.”

“뭘 말하는 거야? 뭘 따라잡을 수 없단 건데?”

“리카는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다. 나는 그냥 귀엽기만 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냥 그렇게 정해진 거야.”

“너 뭐 하고 있어?”

“신세 한탕 중이다. 들어주면 안 되나. 속이 조금 시원해지려고 하는데…….”

“아니, 사무라이 걸즈가 뭐 하는 프로젝트냐고. 노래하는 거잖아. 무슨 화보 찍냐? 아트 필름 만들어?”

정곡을 찔린 듯 노아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다 듣기 싫다면서 다리를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최유현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노아의 위에 올라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건 가산점이지 평가 기준이 아니야. 너 그거 변명이지?”

“변명 아니다. 사실이다. 다들 안다…….”

“윤상열 피디님한테 곡은 들려드렸어?”

“…….”

노아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들려줄 필요도 없다. 윤 피디는 새로운 곡을 만들 거야. 나 같은 건 방해다…….”

“믹스테입은 너희의 창작이…….”

“그래 창작이다!”

노아가 홱 고개를 돌려 최유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잘 걸렸단 것처럼 목소리를 키웠다. 위로해주는 친구를 향해서.

“리카는 곡을 써! ‘우리들의 프로듀싱’으로 프로듀싱 경험을 쌓아! 에리카도 마찬가지야! 에리카는 자작곡으로 솔로 데뷔한다! 근데 나는 뭔가! 작사? 글 쓰는 건 다섯 살 어린애도 할 수 있는 거다! 창작했다고 해맑게 가서 글 몇 자 끄적인 걸 보여주면…….”

노아가 울먹였다.

“뭔가, 그게. 진짜 어린애처럼 보이잖아. 어른들이 열심히 일하는데, 어린애가 아무 생각도 없이 뭐라고 하는 거잖나아……!”

“가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다! 가사를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조금밖에 없어! 다 멜로디만 듣는다!”

“가사는 노래의 영혼이야.”

“곡 만드는 사람이 대단한 거야! 윤 피디도 작곡가고 정호환 할아버지도 작곡가다! 프로듀서 중에 작사가는 없어! 진짜 가사가 중요한 거면 왜 댄스 음악이 제일 인기 많나! 왜 사람들이 뜻도 모르는 팝송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건가! 글 같은 거 아무나 쓸 수 있다! 아무나 할 수 있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내가 뭐라도 된단 건가!”

노아가 벌떡 일어나서 열변을 토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거다! 애초에 난 사무라이 걸즈를 하면 안 됐다!”

“그럼 내가 도와준 건 다 뭔데?”

“그, 그건 고맙다. 그으, 그, 말했잖나! 그냥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거다! 글 몇 자 끄적이는 걸로 주목받으려고 한 내가…….”

노아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풀썩 주저앉았다.

“고지능자답지 않게, 내가 바보 같았던 거다…….”

“…….”

최유현은 노아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아는 흠칫 놀라서 팔로 몸을 감쌌다.

최유현이 폭력이라도 행사한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니, 굳이 최유현이 아니더라도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최유현은 노아를 패지 않았다. 대신 평소 하던 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그리고 또 평소 하던 대로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노래가 흘러나왔다.

최유현이 좋아하는 밴드, ‘오아시스’의 곡이었다.

‘아, 이 노래…….’

최유현이 기분 안 좋을 때 듣는 노래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

최유현이 우울한 노아를 위로해줄 때마다 틀어주기도 해서, 멜로디가 귀에 익었다. 음울하면서도 밝은 곡이다.

그 말은…….

‘유, 유현이가 화났어.’

노아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노아와 최유현은 같은 방을 쓴다. 그런데 싸우기라도 한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유현…….”

최유현은 노트를 꺼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곧잘 하는 일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를 노트에 기록하는 것 말이다.

노아와 대화하기 싫다는 제스처였다.

‘어, 어떡하지?’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매일 최유현과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잠드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오늘은 끔찍한 정적만이 나돌 것이다.

이젠 아침에 최유현이 깨워주지도 않겠지.

옷도 안 갈아 입혀줄 것이다.

노아가 같이 놀러 가자고 해도 무시할 것이다.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상상만으로도 눈이 젖었다.

빌어서라도 옛날의 관계를 되찾아야 한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최유현은 곡의 가사를 노트에 쓰며 음미하는 취미까지 있다. 록밴드를 좋아해서 영어를 오랜 시간 독학하기도 했었다.

그런 친구에게 가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니.

노아가 가사를 쓰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좋아하고 성심성의껏 도와준 게 최유현이었는데…….

“야, 노아.”

“죄송하다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사실 나 학교에서 지능 검사했을 때 언어지능이 100보다 낮았어! 대신 공간지각력이 150이었다! 반만 고지능자였다! 죄송하다니다!”

“이거.”

최유현이 노아에게 다가가 노트를 건넸다.

노아는 바짝 엎드린 자세에서 노트를 받았다. 조선의 사신이 명의 황제에게 교지를 받드는 것 같았다.

노트를 보니 일본어 글이 적혀 있었다.

“이 노래.”

오아시스의 ‘The Masterplan’.

“가사야. 내가 몇십 번이나 들려줬는데도 가사 모른댔지. 읽어봐.”

“나를 위해서 일본어로 가사를 써준 건가……?”

“한국어는 못 읽는다며.”

“고, 고맙다…….”

최유현이 노아의 옆에 꿇어 앉았다.

“가사는 중요해. 네가 말대로 가사만 쓰는 게 창피한 일이었으면 내가 먼저 말렸을 거야.”

노아는 상체를 일으켜 노트를 읽었다.

[나가 하고픈 말을 정리할 시간을 가져봐

그리고 저 파도 너머로 던져버려

오늘의 희망이라는 배 위에 태워

그들을 조용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클래식은 보통 가사가 없지. 오페라도 있긴 했지만, 가사가 없이 음악만이 발전했어. 그런데 왜 현대에 이르러서 대부분의 음악에 가사가 있겠어?”

“그게…….”

“그게 더 좋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거야.”

[배가 도착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해

오늘을 외치고

자랑스럽게 노래해]

“정말 멜로디만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멜로디만을 들었으면, 노래가 아니라 곡만 남았겠지.”

[춤추고 싶다면 춤춰]

“노아, 네가 만든 노래를 부르고 싶지?”

[형제여 기회를 잡아]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싶잖아.”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고작 거절당할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에.”

[우리가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모른단 것뿐인데]

“거절당하고 비웃음당하는 고작 몇 초가 무서워서.”

[뭐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너무 비참하잖아.”

[형제여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둬

인생은 우리를 이해시켜주지 않아]

“너에게도, 네가 쓴 가사에게도. 비참하기만 할 거야.”

[우린 모두 어떤 계획의 일부일 뿐인걸…….]

일렉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의 대위법(서로 다른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 차츰 자취를 감춘다.

마침내 두 개의 멜로디가 하나가 되고, 갈등하던 두 개의 선은 조화롭게 나아간다. 음울했던 분위기는 금관악기의 등장으로 극적으로 변환한다.

노아가 피상적으로 느끼기만 했던 분위기의 반전은, 가사를 이해함으로써 훨씬 극적으로 변화했다.

“춤추고 싶으면 춤춰…….”

노아가 노트에 쓰인 가사를 검지로 훑었다.

“형제여 기회를 잡아…….”

우리가 아는 거라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단 것뿐인데…….

노아는 감동으로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이전까진 아무런 감흥 없이 듣던 노래였는데, 이젠 반복되는 멜로디만 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아니,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만 같다.

“노래는 이야기야. 가수가 들려주는 이야기. 나는 가끔 그 이야기에 대답하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음악으로 만들어. 너는 어때? 이 노래에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노아는 노트를 덮고 최유현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내복을 벗고 외출복을 입기 시작했다.

토끼 캐릭터가 그려진 털모자까지 꾹 눌러쓴 그녀는 문 앞에 섰다. 그러자 잊은 게 생각나 뒤로 돌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노아에게로 날아왔다.

노아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찰그랑,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그것을 붙잡은 노아의 가슴으로 번졌다.

내려다보니, 탬버린이었다.

노아는 다시 앞을 보았다.

“형제여, 기회를 잡아.”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한 번도 쓴 적 없던 앱을 켰다.

내비게이션 앱이었다. 그녀는 앱이 알려주는 대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

작업실 밖에서 노크가 들려왔다.

“들어와!”

윤상열이 외치자 문이 열렸다. 그는 모니터에만 눈을 박아 넣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누구야.”

“윤 피디, 시간 괜찮나?”

쯧.

윤상열이 혀를 찼다.

그의 책상에는 에너지 드링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사무라이 걸즈를 위한 신곡을 쓰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는 충혈된 눈을 비볐다.

“뭐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윤상열의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윤상열은 기지개를 켜곤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모니터 안에선 곡이 착실히 쌓이는 중이었다.

딸깍, 딸깍.

윤상열은 작곡에 몰입하려던 시점에서 퍼뜩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노아가 들어왔었다. 아마 수십 초는 지났을 텐데, 노아는 아직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단 생각에 문득 짜증이 치솟았다. 용건이 없으면 나가라고 하려던 순간.

“윤 피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윤상열은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를 왜 데뷔조로 뽑았나.”

“하아…….”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한계까지 치솟아 있다.

그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작곡이 주는 즐거움과 그 곡이 사무라이 걸즈에게 쓰인단 기쁨 때문이다.

몰입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데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데 이딴 등신 같은 질문이나 듣다니…….

“넌 네 포지션도 모르나?”

윤상열이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서브 보컬. 왜 뽑았겠어? 노래를 잘 부르니까 뽑았지.”

“……그런가.”

딸깍, 딸깍, 딸깍딸깍.

또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윤상열은 목청을 높이며 의자를 뒤로 돌렸다.

“용건 없으면 꺼…….”

“윤 피디.”

노아가 탬버린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노아와 악기의 조합. 심지어 그 악기는 탬버린.

윤상열의 사고 범위를 넘어선 풍경에 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저 모자는 뭔가.

토끼 모자다.

“가사를 썼다. 곡은 유현이가 써줬다. 들어봐 줄 수 있겠…….”

노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두려움 따윈 없는 맑은 미소를 보였다.

“윤 피디가, 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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