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화
[이미 얻었다…….]
윤희연은 에리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에리카는 그녀의 다음 제안이 무엇일지 기대되어 참을 수 없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비는 수밖에 없어.’
에리카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식비식 새어 나왔다.
뒤에 선 김민주는 자신들의 총괄 프로듀서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광경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건.]
윤희연의 고민이 끝났다.
[우리 둘 다에게 도움이 안 돼.]
윤희연은 빌지 않았다.
[네가 얻었다는 건 복수지? 네가 힘든 만큼 나도 힘들어라. 그런데 그건 너무 어중간하잖아. 진짜 복수는 죽이는 거 정도는 되어야지.]
뜨겁게 달았던 에리카의 피가 순식간에 식었다.
윤희연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뒤탈이 남지 않도록. 그냥 받은 걸 돌려준다고 복수가 아니야. 복수라더라도 싸구려잖아.]
“무슨 말씀을…….”
[네 마음 알아. 나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불합리를 감내해야 했으니까. 속에 삭일 수밖에 없는 일을 많이도 겪었어. 그런데 가끔 복수할 기회가 찾아와. 내가 했을까? 아니, 안 되지. 아무리 재수 없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더라도, 언젠가 쓸모가 있어. 감정에 충실한 인간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해. 너와 달리,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걸 알았거든.]
윤희연은 에리카에게 설교했다.
에리카는 자신이 칼자루를 쥔 상황에서도 열이 뻗쳤다.
왜냐하면, 칼끝을 들이대는데도 상대의 표정이 변함없으니까. 오히려 자신을 비웃고 있다.
[복수를 완전하게 이룰 수 없을 땐 말야, 에리카. 쥔 칼을 협상 도구로 써야 해. 고작 얕은 상처 입히는 걸로 만족하고 끝내려고? 그리고, 아예 나한테 원한을 사려고?]
에리카에게 공포가 찾아왔다.
그렇다. 성필이 윤희연을 대하는 것과 에리카가 윤희연을 대하는 건 질적으로 다르다.
윤희연은 에리카의 프로듀서다.
그때 에리카는 무언가가 자신의 손목을 툭툭 치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보니, 성필이 검지로 자신의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다. 에리카가 못 박힌 것처럼 핸드폰만 보고 있었으니까.
성필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단 거지?
‘숙여도 돼요. 어차피 3단계에서 다시 기회가 올 거예요.’
미친 듯이 흔들리던 에리카의 정신이 평정을 되찾았다.
‘맞아, 굳이 여기서 모든 결판을 낼 필요는 없어. 죽자 살자 덤벼들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협상 도구요?”
[네 솔로 데뷔 프로젝트. 투입하는 돈을 늘려줄 순 없지만, 인적(人的)으로 서포트 규모를 늘려줄 순 있어. 나와 프로듀싱 팀 전체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주겠단 뜻이야.]
“간섭하겠다는 건가요?”
[에리카.]
윤희연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건 너한테 이득이 될 제안이 아니잖아. 손해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인간이 어딨어? 도와주겠단 거야, 진심으로. 어때?]
“말뿐일 수도 있잖아요.”
에리카의 심장이 다시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는 강동현과 함께 솔로 프로젝트를 하면서 즐거운 동시에 불안했다.
무한하다시피 한 자율성에 기뻤고, 제대로 된 피드백과 지원이 없단 게 불안했다.
KS 엔터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면 이 불안감은 사라질 것이다.
에리카가 답을 고민하자 윤희연이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에는 강압적인 말투로.
[이게 최후통첩이야. 이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어. 몇 시간 후에 박 이사를 만나러 가야 해. 나를 안달 나게 만들어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순 없어. 할 거야 말 거야. 지금 정해.]
“…….”
에리카는 양손을 꼭 모으고 긴 숨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
2단계의 목적은 에리카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이루는 것이었다. 적당히 윤희연을 괴롭히다가 어쩔 수 없단 티를 내며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진짜는 3단계니까.
그런데 마치 보너스 점수처럼 새로운 이익이 굴러들어왔다.
‘박 이사님 덕분에.’
에리카는 반짝이는 눈으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미소로 그녀를 축하했다.
성필이 언어의 즉흥연주를 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윤희연을 제대로 속여서 그녀가 에리카에게 판돈을 쓰도록 만든 것이다.
만약 에리카가 제안했듯 진즉 포기하고 3단계로 진입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다.
‘감사합니다.’
에리카는 성필에게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그 말, 지켜주셔야 해요.”
[넌 KS 엔터와 계약한 아티스트야. 난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고. 업무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아.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게. 박 이사가 도착하기 1시간 전이야. 미리 만나서 이 일 관련으로 얘기 좀 나누자.]
뚝, 윤희연이 전화를 끊었다.
그 즉시.
“와아아아아―!”
에리카가 환성을 내질렀다.
옆에서 성필이 손바닥을 번쩍 들었다. 에리카는 방방 뛰면서 그와 하이파이브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 때문에 온몸을 꼼지락거렸다. 뭔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녀는 성필을 향해 양손을 쥐었다 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포옹으로 기쁨을 표현해도 될까요……!”
“여기요.”
성필이 김민주를 에리카 앞에 데려다 놓았다.
에리카가 김민주를 힘껏 껴안았다.
김민주는 본인의 총괄 프로듀서가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을 봐서, 도저히 그녀의 기쁨에 공감해줄 수 없었다.
“민주야 나 해냈어!”
“대체 뭐 하는 거야 너……?”
에리카가 답해주지 않자 김민주는 성필을 보았다.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김민주와의 포옹을 끝낸 에리카는 갑자기 연습실 중앙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우 깔끔하게 ‘리프 앤 턴(정면으로 점프하여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고 착지한다)’을 구사했다.
그다음 ‘터치 덤블링(땅을 짚고 앞으로 반 바퀴 돈다. 발이 천장을 향했을 때 한 손을 뗀 후 바닥에 착지한다)’을 두 번 연속으로 해냈다.
그리고 또 다음으로 ‘론도 마네쥬(정면으로 도약하여 공중에서 발을 45도 사선 위로 향하며 풍차처럼 다리를 회전시켜 착지하는 테크닉)’까지 깔끔하게 완성했다.
“와.”
성필은 감탄했다.
스포츠 팬은 응원하는 팀이 득점하면 격렬한 함성과 함께 기쁨을 전신으로 표현한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거나 옆 사람과 껴안거나.
에리카도 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춤 배운 사람은 기쁘면 춤을 추네요.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많은 느낌이에요. 멋지네요.”
“포장하지 마세요. 포장하면 에리카가 저러는 게 정상처럼 보이잖아요.”
“와, 그런데 진짜 대단해요. 공중에서 몸이 저렇게 고정이 돼요?”
“아이돌이 할 법한 건 아니죠. 보통은 땅을 밟는 춤만 추니까요. 코어 힘이 되게 좋은 거예요.”
“민주 씨도 돼요?”
“네. 저랑 에리카 쟤 현대무용 같이 배웠어요. 제가 더 잘해요.”
“케이어스 안무에 들어가면 멋지겠어요.”
“숨차서 어떻게 노래하라구요. 그래서 진짜 뭐예요? 왜 둘이 윤 이사님을 속여요?”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싸움……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포장하시는 거죠?”
완전한 포장은 아니다.
에리카가 윤희연에게서 얻어낸 이익은 훗날 김민주와 진저의 솔로 데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에리카는 창작에 대한 열정이 크니 궁핍한 처지에서도 솔로 데뷔를 고집할 수 있다. 그런데 김민주와 진저까지 그럴 가능성은 적다.
‘케이어스 멤버들의 솔로 데뷔는 전생의 성과를 재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야.’
그러니, 연습실 중앙에서 연속 공중제비를 도는 에리카는 정말 케이어스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2단계는 성과가 커.’
2단계에서 얻은 이익은 두 개다.
첫 번째, 에리카의 솔로 데뷔 프로젝트가 한층 더 탄력을 받았다. 이건 예기치 못한 성과다.
그리고 둘째.
앞의 계획에 있어선 이게 가장 중요하다.
‘윤희연 이사님이 얼마나 절박한가.’
찬밥 신세로 만들었던 프로젝트에 지원하면서까지 참여하고 싶을 정도로, 윤희연은 사무라이 걸즈를 바란다.
‘이 정도면 진짜 기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
퍼포먼스를 마친 에리카가 숨을 헐떡이며 성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도 빛을 잃지 않았다. 기쁨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그녀가 양손을 보였다.
성필도 양손을 들었다.
둘의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
“해냈어요!”
어쩌면 처음 봤을지도 모르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에리카의 미소였다.
그녀의 기쁨은 자신의 창작 활동이 마침내 인정받았단 기쁨이다.
“해냈다구요!”
그야말로, 아티스트가 가질 법한 행복.
그걸 바라보는 성필이 다 뿌듯했다.
“완전히 골탕 먹여드렸어요!”
“…….”
성필은 눈을 비볐다.
자극받은 눈이 눈물을 미량 분비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성필은 흐린 눈으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솔로 데뷔가 지원받게 돼서 다행이에요.”
그야말로…… 아티스트가 가질 법한 행복.
그걸 바라보는 성필이 다 뿌듯했다.
* * *
약속 시간이 다가오기까지 3시간.
윤희연은 다시 성필에게 연락하여 만남 장소를 바꾸었다.
‘개방형 카페보다 프라이빗한 공간 쪽이 나을 거 같아서요.’
그런 이유를 댔지만, 진짜 이유는 에리카가 회의에 참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필은 그녀의 속내를 쉬이 짐작했다.
‘내가 당황하길 바라는 거구나.’
윤희연은 성필과 에리카가 밀월관계라는 것을 모른다. 그녀는 에리카를 비장의 무기로 쓰고 싶으리라.
갑자기 에리카가 나타나면 성필은 당황할 테고, 에리카가 정식 음원 발매를 주장하면 성필이 두 배로 당황할 테고, 그러면 윤희연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뼛속까지 승부사라고 해야 할까.
윤희연은 그런 인간이었다.
약속 시간.
성필은 한 건물을 올라 스터디룸으로 들어갔다. 개방 공간과 격리된 다인용 미팅룸이 십수 개 자리하고 있었다.
성필은 복도에 빽빽이 붙은 문 중 한 곳에서 멈추었다.
Room E.
문에 자그맣게 난 창으로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성필이 노크하자 윤희연이 걸어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성필이 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녀는 와주어서 고맙단 말을 하지 않았다.
윤희연의 논리에 따르면 성필은 오늘 그녀에게 진 빚을 갚으러 온 것이니까.
새삼스럽게 그것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불쾌함을 가장해야 했다.
“에리카 씨……?”
에리카는 천상 연기인이었다.
그녀는 성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 죄책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윤희연이 보는 둘의 현재 상황은 이러하다.
성필은 영문도 모르고 에리카를 대면하게 됐다. 에리카는 사무라이 걸즈를 배신하고 정식 음원 발매를 위해 성필을 설득해야 한다.
둘은 착실하게 서로의 역할에 몰입했다.
성필이 믿기지 않는단 듯 물었다.
“설마, 아니죠?”
“…….”
“저희 이미 이야기 끝난…….”
성필은 말을 끝내는 대신 윤희연을 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란 뜻이다.
성필의 자리는 에리카 바로 옆이었다. 윤희연은 성필의 맞은편이고 말이다.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배치였다.
심리학적으로, 거리적으로는 아주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책상과 맞은편 상대보다 바로 옆의 상대에게 더 공감을 잘한다고 한다.
물리적인 장벽이 하나 없을 뿐인데도 말이다.
윤희연은 절박한 에리카를 꾸며내어 성필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이다.
솔직히, 코미디 같았다.
‘자기가 속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못 하시는 건가. 하긴, 당연하지. 자기 회사 아이돌이 다른 회사 이사랑 손잡고 자기를 속일 거라곤 도저히…….’
코미디 같으면서도 비극 같았다.
성필은 윤희연을 동정했다. 그리고 그녀를 계획적으로 속이는 자신이 조금은 혐오스럽기도 했다.
‘내 연기가 그렇게 뛰어났나?’
언어의 즉흥연주가 그 정도로 진실되게 느껴졌던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연기를 해볼걸.
옛날에 홍연헌이 성필을 처음 봤을 때 말하길, 성필은 아침드라마 서브 남자 주연처럼 생겼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은 수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성필은 어쩔 수 없이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는 사람을 연기했다.
윤희연은 에리카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에리카, 말씀드려.”
“……네.”
에리카는 목이 막히는 듯 짧고 강하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목소리가 바로 나오진 않았다.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을 성필에게 보내며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 어떻게든 성필의 화를 억누르려는 동작이었다.
“이사님.”
목소리에서조차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희미한 애교가 섞여 있다.
여우가 따로 없다.
저런 얼굴에 이런 행동에 이 목소리면 어떤 남자가 용서 안 할 수 있을까.
“죄송해요. 믹스테입으로 결정했었지만, ’아마노가와‘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정식 음원 발매 쪽으로…….”
“협박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아니에…….”
성필은 분노에 차서 윤희연을 노려보았다.
윤희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에리카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네, 네, 아니에요.”
에리카는 성필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마치 성필이 분에 못 이겨 윤희연에게 달려들 거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성필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열과 성을 다했다.
“협박이라뇨. 말도 안 돼요. 아시잖아요? 저는 케이어스의 리더인걸요. 협박 같은 거…….”
에리카는 진정해달라고 호소하듯이 미소를, 하지만 평소와는 명백히 다르게 먹구름이 껴 있는 그런 미소를, 처연하게 띠었다.
“당할 리가 없는걸요…….”
그걸 본 성필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윤희연을 향했다.
“윤 이사님, 용건이 뭡니까?”
그 순간, 성필과 에리카는 같은 생각을 했다.
‘에리카 씨, 여우주연상감이다.’
‘박 이사님, 남우주연상감이다.’
둘의 연기는 천지합일(天地合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영혼은 이어진 것처럼.
서로는 서로의 역할에 몰입했다.
에리카는 강자의 압박에 못 이겨 소중한 동료인 성필을 배신했다. 성필을 설득하려면서도, 그를 향한 죄책감을 숨기지 못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성필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던 동료가 새장 속에 갇힌 것을 보곤 충격받았다. 당장이라도 그 족쇄를 끊어내고 싶지만, 그게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주리란 것을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대의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에리카 씨를 볼모로 잡아서, 저한테 뭘 얻어내시려는 겁니까?”
“박 이사님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드…….”
“에리카 씨는 가만히 계세요.”
에리카는 고운 눈썹을 떨어뜨리며 힘없이 성필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보는 윤희연이 생각했다.
‘뭐야……?’
그녀는 딱히 에리카를 협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리카와 공정한 거래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에리카의 저 태도는 뭔가.
‘마치 내가 악당이라도 된 것처럼…….’
윤희연은 당황해서 말도 더듬었다.
“에리카 너 왜 그러…….”
“에리카 씨를 무기로 쓰지 마세요!”
갈(꾸짖을 喝)!
윤희연은 예고 없이 터져 나온 성필의 고함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건 저와 윤 이사님의 일이잖습니까!”
“아니, 에리카 쟤 이상…….”
“에리카 씨는 그만 끌어들이세요!”
“그게 아니라 쟤가…….”
“에리카 씨를 가만히 두는 게 제가 여기 계속 앉아 있는 첫 번째 조건일 겁니다!”
윤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에리카가 안쓰럽게 처진 눈으로 성필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감동을 머금고 젖었다.
“이사님…….”
비련의 여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그러자 성필은 기사도 문학의 전형적인 주인공처럼 고결한 눈으로, 또한 다부지고 힘 있는 목소리로, 동시에 부드럽고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가만히 계세요 에리카 씨.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 읏…….”
에리카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은 옅게 타오르기 시작한 둘 사이의 분위기처럼 발그레 달아올랐다.
슬픔과 희망이 혼재된 속에서, 그녀는 희망에 더 무게를 두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이 필사적으로 참는 울음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성필을 향한 신뢰는 미소가 되어 드러났다.
그렇기에, 잔뜩 찌푸려졌으나 결코 슬프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그녀는 성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답했다. 가늘고 힘없지만 희미한 황홀함과 행복이 담긴 목소리로.
“네헤에…….”
윤희연은 이제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허파가 뒤집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