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9화
한가로운 휴일의 어느 날.
유빈은 일과가 되다시피 한 라이브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책상 위에 세워둔 폰으로 채팅을 읽으면서 적당히 잡담을 떨었다.
손등으로 턱을 괴곤 채팅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때 어느 채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무라이 걸즈 스포 좀….]
웨이퍼센트 컴백 직전, 가로 엔터는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를 알렸었다.
리카, 에리카, 노아로 이목을 모으고 그곳에 웨이퍼센트의 유빈이 꼽사리 끼듯이 들어갔다.
이후로 유빈은 사무라이 걸즈 관련 정보를 라이브 방송으로 푸는 등 프로모션에 힘썼다.
사무라이 걸즈의 프로모션이라기보다는, 웨이퍼센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일까.
가끔 사무라이 걸즈에만 관심 있는 이들이 찾아온다. 유빈의 팬이라서가 아니라 사무라이 걸즈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 말이다.
“사무라이 걸즈요?”
유빈이 반응했다.
원래 유빈의 팬들은 라이브 방송에서 사무라이 걸즈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물론 유빈이 프로듀서를 맡은 믹스테입 프로젝트라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사무라이 걸즈가 금기처럼 변한 이유가 있었다. 한동안 그의 라이브 방송이 마치 사무라이 걸즈 설명회처럼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인민, 유스, 어스가 단체로 들이닥쳐 유빈에게 사무라이 걸즈 정보만 물었었다.
유빈과 소통하기 위해 방송에 들어온 팬들로선 그런 분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또 시간이 지나자 유빈도 버거워하는 기색을 숨기기 힘들어했고 말이다.
타 팬들도 유빈이 ‘작업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자 그의 라이브에도 발길을 끊었다.
“데모가 나왔는데…….”
유빈은 그리 말하며 현재 방송 중인 폰 외에 사적으로 쓰는 폰을 꺼내었다.
“조금 들려드릴까요?”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유빈은 저장한 데모 음원을 재생했다.
시청자들은 폰의 마이크를 통해 음원이 전달받는 것이라 음질이 깨끗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곡이 재생되자마자 채팅이 느려졌다. 다들 열악한 음질로나마 곡에 집중하고 싶은 것이었다.
[리카다]
[리카가 가이드한 거예요?]
[우와]
[조으다]
[장르가 뭐예요?]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채팅이 우수수 올라왔다.
음원을 켠 지 20초 정도 지났을까.
유빈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채팅을 보자 심장이 철렁였다. 반사적으로 재생을 중단했다.
“여기까지.”
[더 들려줘요]
[뮤비 만들어?]
[girl’s league bring me here]
“아직 이걸로 확정은 아니에요. 맞다, 이거 오늘의 TMI인데요…….”
유빈은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음원을 재생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싶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막상 평가가 쏟아지자, 심지어 나쁜 말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그는 겁을 먹었다.
방송이 끝날 때까지 사무라이 걸즈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라이브는 여기서 끌게요. 사랑해요 헌드레드. 내일 또 봐요.”
유빈이 손 키스를 날리며 라이브를 종료했다. 그리고 황급히 침대로 몸을 날렸다.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아까 보았던 채팅을 되새겨보았다.
나쁜 말은…… 없었다. 좋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좋다’ 정도의 말이야 딱히 감정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자냐?”
강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뻘뻘 흐르는 이마의 땀을 거칠게 닦았다. 바람막이를 벗자 땀으로 흥건한 티셔츠가 보였다.
“너 바로 씻을 거 아니지?”
“형, 이리 와봐.”
“아 뭔데. 나 찝찝해.”
“사무라이 걸즈 곡 나왔거든?”
“진짜?”
강현은 찌푸렸던 얼굴을 펴며 관심을 표했다.
“들어볼래?”
“어.”
유빈이 곡을 재생했다. 재생하는 동안 유빈은 곡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강현의 표정 변화만을 주의 깊게 살폈다.
곡이 끝나고, 유빈이 물었다.
“어때?”
“그냥저냥 괜찮은데?”
“막, 그런 거 안 느껴져? 되게 센세이셔널한? 이게 특이하잖아 좀.”
“어…… 요즘 노래들이랑 다른 필이긴 하다.”
“그리고?”
“그리고, 뭐?”
“성공…… 하겠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강현은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유빈의 절박함을 느끼곤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강현이 ‘괜찮다’ 이상의 칭찬을 했다가 유빈이 이 곡으로 확정하면? 그리고 망하면 강현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아 그러지 말고 좀. 뜨면 얼마나 뜰 거 같아? 중박, 대박, 쪽박?”
“모르겠어.”
모르겠다.
그 답에 활기 넘치던 유빈이 우뚝 멈추었다.
모르겠다는 말은 또 다른 사람에게서도 들었었다.
에리카였다.
유빈은 최근 주변인들에게 병적으로 곡을 들려주고 감상을 물었었다.
그때마다 돌아온 답이 둘로 나뉘었다.
모르겠다. 혹은 이게 뭐냐.
‘이게 뭐냐’는 질문은 진짜로 곡의 장르와 스타일을 묻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걸 발매할 생각이냐’는 뜻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모르겠다’는 건 좋은 반응인 축에 속했다.
정적이 흐르자 강현은 말을 덧붙였다.
“생각하기 귀찮은 게 아니라 진짜 모르겠는 거야. 나 씻는다?”
강현이 나갔다.
유빈은 편집증 환자처럼 손등의 피부를 앞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이거 혹시 안 좋은 건가?’
유빈이 듣기에, 이 곡은 대단하다.
대단하고 엄청나고 너무너무 좋다.
‘내 귀가 이상한 건가?’
대중들이 듣기엔 어떨까.
강현이야말로 대중 중의 대중인데, 그는 그냥저냥 괜찮다고 했었다.
‘히트할 곡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느낌이 확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만이 커져 갔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멘토인 성필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조언 중 이 상황에 들어맞는 게 분명 있을 것이다.
다행히 즉각 떠오르는 게 있었다.
‘회의를 아무리 해도 어떤 곡을 타이틀로 할지 결판이 안 나.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호불호가 심한 취향이거든. 똑같은 자기만의 플레이리스트를 가진 사람들은 없을걸?’
‘그럼 다수결로 정해요?’
‘투표를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정하는 건 프로듀서야. 애초에 난 투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왜요?’
‘투표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미룰 수도 있잖아.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까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짐을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넘기고 가벼워진다면, 자기도 모르게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
유빈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투표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미룰 수도…….”
성필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선택에 모든 책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유빈이 그러해야만 한다고.
유빈은 떨리는 한숨을 뱉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닌데…….’
심지어 이 프로젝트엔 자신의 미래만이 걸린 게 아니다.
리카, 에리카, 노아.
현세대의 최정상 아이돌들(노아는 이견의 여지 있음)의 평판이 달린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니…….
그때 유빈의 전화가 울렸다.
힘없이 일어나 폰을 드니, 성필의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유빈은 공손하게 폰을 쥐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잘 쉬고 있어?]
“넵. 방금 라이브 끝냈어요.”
[너 라이브 진짜 자주 한다. 리카보다 자주 하는 거 같아.]
“재밌어서요, 하하…….”
[다름이 아니라, 너 아직도 ‘아마노가와’ 광고 받았으면 좋겠어?]
“아마노가와요?”
[믹스테입에서 정식 음원 발매 프로젝트로 바뀌어도 괜찮겠냐는 뜻이야.]
“어…… 그러면 그냥 좋은 거 아닌가요?”
[알겠어.]
“아, 혹시 윤 이사님이 허락하셨어요?”
그때 유빈은 가슴에 번져가는 검은색 덩어리를 감지했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덩어리가 심장으로부터 혈관으로 기다렸단 듯이 달려 나갔다.
전신으로 두려움이 번졌다.
무엇으로부터 나온 두려움인지, 유빈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부담되는 프로젝트인데, 정식 음원 발매가 되어버리면 진짜 숨도 못 쉴 것이다.
‘옛날에는 이만큼 긴장되지 않았는데.’
곡이 나오고부터, 유빈은 자신에게 정신병이 생긴 게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
매 순간 불안감이 극에 달해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빈은 이렇게 빌었다.
‘허락하지 말았어라. 그냥 믹스테입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젝트로 남았으면…….’
[설득하려고.]
가쁘게 산소를 받아들이던 유빈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무조건 된단 건 아니거든. 그래도 해보려고. 오늘 결과 나올 테니까, 합의 끝나면 연락해줄게. 쉬는 날 연락해서 미안하다.]
오늘은 휴일이다.
웨이퍼센트가 쉬는 날이라서 휴일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이라 휴일이다.
물론 엔터 일이란 게 공휴일을 지킬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하다. 그러니 오늘은 성필에겐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일 것이다.
쉬는 날인데, 성필은 유빈의 프로젝트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유빈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유빈은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덩어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답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꼭 됐으면 좋겠.”
목이 건조했다.
유빈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좋겠, 네요.”
[응. 열심히 할게. 끊는다, 잘 쉬어.]
“네, 힘내세요.”
통화가 끝났다.
유빈은 힘없이 폰을 든 손을 내렸다.
실 끊긴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유빈은 폰으로 사무라이 걸즈의 데모곡을 재생했다.
1분 정도 듣고, 유빈이 생각했다.
‘이거 정말 좋은 거…… 맞을까?’
* * *
오랜만에 찾은 김민주의 연습실이다.
성필은 옛날보다 때가 더 탄 것 같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흔히 탄성 마루라고 불리는 나무 바닥이다. 힘을 주어 밟을 때마다 조금씩 아래로 파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접할 게 없는데…….”
김민주는 성필과 에리카에게서 등을 돌린 채 냉장고를 뒤졌다.
“짧게 있을 거니까 대접은…….”
그리 말하던 성필의 눈이 어느 한 곳에 꽂혔다.
쌀쌀한 날씨이지만 건물 안이라 따스한 연습실이다. 게다가 격렬하게 춤 연습을 하고 있던 김민주는 계절에 맞지 않는 복장이었다.
숏레깅스에 검은색 나시다.
그녀의 등이 성필의 눈을 사로잡았다.
‘후면 삼각근이랑 광배근, 하부 승모근이…….’
발달되어 있다.
인간의 후면에 위치한 근육은 남자더라도 발달시키기 어렵다. 일상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여자가 저렇게 관련 근육이 발달하려면 길고 깊은 노력이 필요하다.
성필이 감격했다.
‘진짜 자기관리의 신이다…….’
아이돌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따로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하다니. 댄스 퍼포먼스의 파워풀함이 다른 데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성필은 김민주의 직업 정신에 존경심마저 생겼다.
실은 단지 김민주의 취미가 운동인 것뿐이었다. 한 1~2년은 1팀장이 절규하기도 했지만, 이젠 그러려니 했다.
“오이 드실래요?”
김민주가 성필과 에리카에게 오이를 내밀었다.
에리카는 익숙하게 오이를 베어 물었고, 성필도 그걸 받았다.
김민주가 씩 웃었다.
“드세요. 아름 청과에서 산 거예요.”
“진짜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신아름네가 하는 데니까 멀어도 사고 그러는 거죠. 아주머니가 그러던데요, 오이가 피부에 진짜 좋대요. 그냥 오이는 사람 피부 좋아지라고 태어난 채소라던데요. 그거 듣고 저 오이 매일 사두잖아요.”
김민주가 오이를 덥석 물어서 끊어 먹었다.
“맛도 괜찮고. 90%가 물이래요.”
성필은 오이를 한 입 먹었다.
그냥 오이 맛이었다.
물을 마실 때보다 건강한 느낌이 들었다.
“맛있네요.”
“그죠?”
성필과 에리카는 자리를 옮겼다.
연습실의 한구석, 과거 에리카가 믹스테입을 만들 때 작업실로 쓰던 곳이었다.
청소 용구를 넣어둘 법한 골방엔 과거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에리카가 두고 간 앨범이 선반 위를 장식했다.
둘은 의자를 가져와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성필과 에리카가 폰을 책상 위에 두었다.
“이사님, 준비되셨어요?”
“네.”
김민주는 무슨 일인가 싶어 둘의 뒤를 기웃거렸다. 에리카의 분위기는 작전에 들어서는 특수요원을 연상시켜서, 호기심이 안 생길 수 없었다.
그만큼 에리카는 이번 작전에 진심이었다.
그녀가 성필을 바라보곤 손을 그의 눈높이로 들었다.
검지가 펴졌다.
하나.
중지.
둘.
약지.
셋.
성필이 윤희연에게 스피커 모드로 통화를 걸었다.
“…….”
“…….”
발신음 한 번 한 번이 심장을 울렸다.
윤희연은 에리카에게 사무라이 걸즈에 관한 의사를 대신 밝히게 했다. 에리카는 성필에게 말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했고 말이다.
그 결과는 윤희연의 바람과는 달랐다. 둘이서 그녀에게 굴욕을 줄 계획을 세웠으니 말이다.
어제 에리카는 윤희연에게 성필의 답을 밝혔다. 성필이 고민한 후 직접 답을 준다고.
[여보세요?]
윤희연이 받았다.
성필은 남을 속이는 데 천성적으로 서투르다. 애초에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굳이 할 필요 없으며 피할 수도 있는 거짓말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윤 이사님, 에리카 씨에게 들었습니다.”
[답 주시려고요?]
“예.”
[말씀하세요.]
윤희연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같았으나, 들뜬 티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미묘하게 기뻐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성필은 에리카를 보았다.
마치 로켓 발사를 명령하는 과학자처럼, 에리카가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이 담담히 전했다.
“거절하겠습니다.”
1단계, 시작.
[……잠시만요.]
윤희연의 말이 몇 초간 들리지 않았다.
[잠시만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뭐라고 하셨죠?]
“거절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유는요?]
바로 물어올 줄 알았다.
성필과 에리카는 윤희연이 어떤 질문과 반응을 해 올 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기록해두었다.
에리카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노트를 넘기더니, ‘이유는?’이란 질문란을 가리켰다. 아래쪽에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작성한 답변이 적혀 있었다.
성필의 눈이 답변의 첫 문장을 읽었다. 그러자마자 뒷부분은 보지도 않고 입이 먼저 열렸다.
“상황이 변했습니다.”
윤희연은 거절당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먼저.
‘블러핑이라고 생각하겠지.’
왜냐하면, 성필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윤희연의 제안은 모두가 행복한 해피 엔딩이다. 그걸 굳이 마다하고 노멀 엔딩을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제부터 성필은 첫 번째 회차에서 노멀 엔딩을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음원 발매는 너무 무겁다, 그런 의견이 나와서요.”
[무겁다구요?]
“예. 믹스테입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입니다. 자유롭게 창작하는 거요. 그런데 돈과 회사가 엮이면 더는 그럴 수가 없겠죠. 유빈이와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은 믹스테입 프로젝트란 것에, 즉 창작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단 데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그럼 왜 박 이사님이 이 연락을 받으시는 거죠?]
윤희연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물어왔다.
[박 이사님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박 이사님은 거기 계실 필요가 없잖아요. 아이돌들만의 믹스테입 프로젝트에, 왜 아직도 박 이사님이 껴 계시는 거죠? 왜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게 박 이사님이어야 하죠?]
에리카가 노트를 파라라락 넘기고 해당 질문 페이지를 성필에게 보여주었다.
보지 않아도 답변은 기억하고 있다.
“유빈이의 보유 자금 때문이죠. 3,000만 원.”
[그.]
윤희연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겨우 그 돈만 들고서 그 세 명을 불러 모았……?]
“혈기 넘치게 이러다 저러다 탕진하기 딱 좋은 돈입니다. 어쩌면 도중에 예산이 모자라 프로젝트 자체가 정지될 수도 있겠고요. 돌봐주는 어른이 필요하죠. 경험이 있는 어른, 저요. 저는 프로듀싱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재정과 외부 업체 교섭만을 담당하죠.”
에리카와 미리 짠 대답과는 미세한 부분이 달랐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말했다.
에리카는 대단하단 뜻으로 엄지를 치켜올렸다. 성필은 피곤함이 묻어나오는 미소를 띠었다.
[너무 자세하게 말씀해주시네요.]
윤희연은 아까처럼 치고 나오듯이 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알 필요 없는 부분까지, 자세하게. 꼭 미리 대본이라도 적어둔 것처럼. 그냥 ‘안 된다, 죄송하다’로 끝내도 됐을 텐데요.]
에리카는 당황하여 노트를 넘겼다.
이런 질문은 상정되지 않았다.
‘뭐 이런 인간이…….’
성필은 혀를 내둘렀다.
윤희연은 뼛속부터 타인을 의심하는 버릇이 배어 있었다.
처음 이 전화를 받을 때부터, 자신이 듣고 싶은 답 이외의 모든 말을 믿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 대화를 대결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공교롭게도, 윤희연의 태도는 타당하며 그녀의 의심은 옳다.
[저한테 얻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빨리 말씀하세요.]
윤희연은 여유로웠다.
그와 반대로 성필과 에리카는 당혹으로 범벅이 됐다. 윤희연이 ‘뭘 바라냐’는 식의 질문을 하리라곤 생각했지만, 이런 태도로 할 줄은 몰랐다.
계획대로라면 윤희연은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같이 유순한 태도로 나왔어야 했다. 에리카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절박한 입장이니까.
[전에 박 이사님이 말씀하신 게 맞아요. 양쪽에 득이 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말씀하세요.]
에리카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나무 갉아먹는 비버처럼 검지 손톱을 앞니로 따닥따닥 씹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폐기되는 게 계획이라더니, 에리카는 그 금언을 그대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원하는 거, 빨리.]
에리카는 눈을 질끈 감더니 노트를 가장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
그곳엔 ‘3단계로 진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3단계, 즉 윤희연과의 직접적인 협상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성필은 윤희연에게서 판돈을 뺏어왔어야만 했다. 그다음 본격적인 승부에 뛰어들기로 했다.
하지만 둘이 가진 판돈의 액수는 같다.
이대로 승부에 임하면, 에리카가 바라는 것은 이뤄줄 수 없다. 오히려 성필이 굴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성필에겐 윤희연을 속여서 얻어내려고 했을 만큼 간절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녀는 이렇게 판단할 여지가 충분했다.
에리카가 그만하면 됐다는 듯 노트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소리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
즉흥적으로 말을 꿰맞추다 보면 협상이 더 불리해진다.
차라리 즉시 3단계로 진입하는 쪽이…….
“원하는 거…….”
성필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에리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성필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성필을 말리려고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거, 없습니다.”
[이사님…….]
윤희연은 성필이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게 피곤하단 티를 팍팍 냈다.
[피차 바쁜 사람들끼리…….]
“왜 윤 이사님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자세하게 꺼냈냐고요?”
성필은 불안한 마음과 달리 오히려 목소리를 키웠다. 그의 불안이 분노로 탈바꿈하여 목소리에 힘을 덧입혔다.
성필과 에리카가 윤희연의 태도에 당황한 이유가 있다.
윤희연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필에게 다른 저의가 있는지 의심했고, 실제로 성필에겐 속내가 있었다.
그래서 당황한 것이다.
거짓말한 사람은 거짓말이 들키면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한다. 일반적인 사람이 할 만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이 들키면, 그 사람은 논리로 거짓말의 탑을 쌓기 시작한다.
감정조차 논리적인 거짓말이 된다.
진짜 상대를 속이고 싶으면 여기서 발상을 바꾸어야 한다. 감정을 끌어내야 한다.
만약 속내가 따로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저 친절하게 설명했을 뿐인데 의심받는다면…….
“윤희연 이사님이 상대니까요!”
화가 날 것이다.
성필에게 속내가 없었다면 애초에 윤희연은 협상 상대조차 아니다. 굳이 그녀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이 의심당했단 데에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네?]
윤희연은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를 상대하는 거니까, 그에 걸맞은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의 호의를 거절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이유를 말씀드리는 게, 당연하죠…….”
이번엔 성필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담겼다.
진짜 실망한 게 아니었다. 이 또한 거짓말이 들킬 수도 있다는 불안을 실망감으로 탈바꿈한 것에 불과했다.
“윤 이사님은 호의로써, 과거 제가 드렸던 무례를 잊으시고 에리카 씨의 정식 음원 활동을 허락하셨어요. 그걸 듣고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성필은 고의로 말을 끊었다.
몇 초 후 윤희연이 물었다.
[뭐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속이 넓은 분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리카의 눈동자에 혼탁한 당황이 새겨졌다. 프리 재즈를 처음 듣는 사람이 ‘어디까지 하려는 거야?’라며 경악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에리카는 경악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성필은 즉흥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거짓말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어떤 형태로 끝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윤 이사님은 먼저 제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겁니다. 그에 비해 저는 지난 몇 주간 윤 이사님이 하신 말씀만 곱씹으며 분을 삭였습니다. 그런데, 윤 이사님이 먼저 화해를 하자고 하시니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제가 속이 좁은 놈처럼 느껴졌습니다.”
성필은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목이 깔깔했다.
“유빈이와 사무라이 걸즈가 믹스테입 쪽으로 노선을 틀었습니다. 예, 물론 외부인인 윤 이사님께 이런 정보를 드릴 필요는 없죠. 윤 이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심플하게 ‘안 된다’고 해도 됐을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안 그러고 싶었습니다. 먼저 화해를 제안해주신, 앉은 자리의 높이에 좌우되지 않는 도량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필요 이상의 정보를 알려드린 겁니다. 예, 맞습니다.”
뭐가 맞는데?
뭐가 맞지?
뭐가 맞다고 하지?
“둘에게, 저희 둘에게, 아니, 저희 둘뿐만 아니라 각 회사에 이득이 되는 제안이었죠. 그런데 일이 이렇게 풀려서 죄송하다는, 어른스럽지 못한 저에 대한 반성과 윤 이사님을 향한 예의의 표명이었습니다.”
주어와 동사가 마구 뒤섞이고 책에서나 쓸법한 단어가 계속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런데…….”
성필이 왼손을 마구마구 휘저었다.
그는 재즈를 하고 있었다.
언어의 즉흥연주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계속 꺼내려니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머리가 텅 비어 있는데 말만 계속 나왔다.
“따로 속내가 있는 거라니…… 정말, 정말…….”
성필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뇌에서 적합한 언어를 뽑아내려는 발악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쐐기가 나왔다.
“실망, 입니다…….”
최후의 쐐기치곤 맥없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힘없이, 진짜 힘이 없어서 힘없이 말했다.
“필요한 거? 없습니다. 윤 이사님이 이보다 더 나은 분이길 바랐던 게 저에게 필요하던 거였겠지요. 그럼 이만…….”
성필은 고의적으로 숨을 거칠게 쉬었다.
이야기를 오래 해서 숨이 차기도 했고, 윤희연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만…….”
제발 잡아줘.
잡아줘야 해.
즉흥연주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진짜 거절을 해버리게 생겼다.
윤희연이 잡아주지 않으면 정말 끝이다.
“이만.”
그러나 윤희연은 대답해오지 않았다.
“끊겠습니다…….”
성필의 검지는 이미 액정의 통화 종료 버튼 위에 있었다. 하지만 끊겠다고 하고서도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성필은 다시 시간을 끌었다.
한숨으로.
“하아…….”
긴 한숨이었다.
한숨이 이어지고 폐의 잔기량까지 전부 소모될 때까지, 윤희연은 답을 주지 않았다.
성필은 에리카를 보았다.
에리카는 낙담하여 고개를 저었다.
‘끝이다.’
성필도 눈을 꽉 감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
[잠깐만요.]
성필과 에리카가 화들짝 놀랐다.
성필은 놀란 순간 손이 떨려서 하마터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뻔했다.
[지금 만나요.]
에리카가 소리 지르지 않고 호들갑을 떨었다.
[휴일인 거 알아요. 미안해요.]
성필은 숨을 가다듬고 최대한도로 기쁨을 억눌렀다.
기쁨을 억누르기 위해선 배우가 하듯이 필요한 감정의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성필은 기쁨과 반대되는 감정을 느낀 순간을 찾아냈다.
치논이 백합을 주며 빚을 갚겠다고 했던 때를 떠올리는 게 도움이 됐다. 거기에 세이코의 고백을 처음 거절했던 때를 동시에 떠올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윤 이사님을 뵙는 것도…….”
[전에 저희 만났죠? 박 이사님이 만나자고 하셔서요.]
“…….”
[그건 빚이에요. 갚으세요. 오늘 만나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믹스테입이 아니라 정식 음원 발매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러려면 제가 아니라 유빈이를 만나셔야 할 텐데요. 혹여 저한테 대답을 듣길 바라시더라도, 사무라이 걸즈 팀과 회의를 해봐야…….”
[일단 만나요. 설득이라면 저보다 박 이사님이 나으실 테고, 박 이사님이 수긍할 정도라면 유빈 씨도 받아들이겠죠. 아닌가요? 박 이사님은 저를 만나고 듣기만 하시면 돼요.]
“…….”
[고민할 게 아닐 텐데요?]
드디어 윤희연에게 초조함이 드러났다.
[저희가 오늘 직접 만나기 전까지, 박 이사님은 저에게 빚이 있는 거예요. 지금만은 박 이사님이 빚을 진 상태라구요.]
성필은 한숨을 푹 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세요. 시간은 2시간 이후 시간부터 가능해요.]
“그럼…….”
성필은 적당한 거리의 카페를 골랐다.
통화가 끝났다.
“에리카, 무슨 일…….”
김민주가 질문했다.
그런데 에리카는 그녀의 질문은 안중도 없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성필의 팔을 붙잡으며 기쁜 비명을 질러댔다.
에리카는 흥분으로 얼굴이 상기됐다. 그녀가 환희를 담아 외쳤다.
“성공했어요 성공했어요! 경찰 같았어요! 막 작전처럼!”
그녀는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어 꺄악 꺄악 소리를 질렀다.
“공안청(公安庁, 일본의 정보기관)에 취직할 걸 그랬어요! 아, 아, 이렇게 재밌던 게 얼마 만인지……. 가능하면 매일 윤 이사님을 속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비도덕적이었다.
하지만 성필은 에리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에리카가 이토록 원초적으로 행복해하는 건 처음 보았다.
“이제 2단계로……!”
그때 에리카의 전화가 울렸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에리카 씨 차례예요.”
에리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께에 들어 보였다. 꼭 첫 사건을 맡게 된 초보 형사 같았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에리카?]
윤희연이었다.
“아, 윤 이사님. 안녕하세요.”
[휴일에 미안해. 잘 쉬고 있어?]
“네, 덕분에요.”
[뭐 하고 있어?]
“놀아요.”
[어딘데? 혹시 시간 내줄 수 있어?]
에리카는 성필을 곁눈질했다.
성필이 고개를 계속하라는 뜻으로 손으로 원을 그렸다.
“시간이요? 왜 그러세요?”
[박 이사님을 뵐 거야.]
성필은 조마조마하게 에리카의 통화를 들었다. 에리카는 별다른 말 없이 ‘네 네’ 답하며 윤희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윽고 윤희연이 용건을 다 끝내자, 에리카가 말했다.
“박 이사님을 같이 설득해달라는 말씀이시죠?”
[너도 바라던 일이잖아. 네가 동의를 표해주기만 하면 박 이사님도…….]
“가능할까요, 그게?”
[뭐?]
“제가 동의를 안 할 건데요.”
[왜.]
윤희연이 싸늘하게 물었다.
[왜 안 하겠다는 건데? 거기 유빈이라는 애가 뭐 단체로 뇌물이라도 돌렸어? 왜 박 이사랑 네가 동시에 의견이 바뀌어?]
“박 이사님은 모르겠고, 저는 이유가 있어요.”
[뭐야. 유빈이 뭐라고 한 건데?]
“유빈 선배님 때문이 아니에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이유는 방금 생겼어요.”
[……방금?]
“네.”
에리카의 입꼬리가 극도의 쾌락에 차서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저항 없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럼에도 눈이 웃는 것까진 참지 못했다.
에리카는 머릿속에서 ‘환희의 송가’가 재생되는 것만 같았다.
“윤 이사님, 절박하신가 봐요?”
[뭐라는…….]
“제 절박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셨으면서 말예요.”
[네 절박함이라고? 네가 뭐가?]
“아, 설마 했는데, 아예 모르시는구나. 제 솔로 데뷔 말하는 거예요. 뭐라고 말씀하셨었죠. 아직도 하고 있냐고…… 맞나요?”
[…….]
하아아아아.
깊고 긴 한숨이었다.
성필이 연기하느라 뱉어냈던 한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원하는 걸 말해.]
그걸 듣고서, 성필은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윤희연은 진실로 절박하다. 진심으로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원하는 거…….”
에리카는 미칠 것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이 있을 줄 몰랐다. 타인을 사슬에 옭아매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 일일 줄은…….
혈관에 피 대신 기쁨이 들어 있어서, 심장에서 끊임없이 행복이 순환하는 것만 같다.
전율이 짧은 간격으로 연속해서 찾아온다. 등골이 섬뜩할 정도로 짜릿하다. 이 순간을 영원토록 이어 나가고 싶기까지 하다.
“원하는 게, 그러니까…….”
좌절한 표정의 윤희연의 얼굴을 떠올리니까, 더, 아.
“없어요.”
에리카의 행복이 절정에 달하고, 만면에 쾌락이 흘러넘쳤다. 기진맥진할 정도의 황홀함이 전신을 타고 진동했다.
그녀가 달뜬 숨과 함께 말했다.
“이미, 얻었거든요…….”
2단계, 시작.
이제.
‘빌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