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48화 (748/760)

748화

“죄송한데…….”

성필은 대답을 미루었다. 애초에 에리카가 어째서 이런 부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윤희연이 절박하다?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윤희연을 개처럼 기게 만들어달라?

‘왜?’

에리카는 본인의 프로듀서에게 최대한의 굴욕을 안겨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부터 방법까지, 성필이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해가 안 되는 게 많거든요.”

[어떤 게 이해 안 되세요?]

“윤희연 이사님이 에리카 씨의 음원 정식 발매를 바라고 계신단 거죠? 조건은 윤 이사님이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거고요.”

[네.]

“저희가 바라왔던 게 윤희연 이사님의 허락 아니었나요?”

[그렇죠.]

“그런데 왜 굳이…… 허락이 철회될 위험을 감수하고 윤 이사님께 굴욕을 줘야 하죠? 만약 그러다가 윤 이사님이 화나서 판을 엎기라도 하면요?”

과거, 윤희연이 성필을 불러 이야기했을 때도 서로에 대한 모욕이 오고 갔었다. 하지만 그건 쌍방이었다.

에리카의 요구는 성필이 일방적으로 윤희연을 모욕하라는 것 아닌가. 심지어 윤희연이 그걸 곧이곧대로 들어준다고 한다.

정말 그러할까?

그렇다면 그 모욕의 선이 어디까지지?

에리카는 ‘윤희연이 개처럼 기게 해달라’고 했다지만, 과연 어느 정도까지의 굴욕을 바라는 걸까?

무엇보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이대로 윤 이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모두가 행복하잖아.’

역으로 생각하면, 에리카는 행복하지 않으리란 답이 나온다.

[…….]

“에리카 씨?”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에리카는 전화로는 자신의 감정과 논리를 전달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에리카와 따로 만난다, 라…….

‘에리카 씨는 사무라이 걸즈의 핵심 멤버야.’

그런 에리카가 윤희연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

만일 윤희연이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합류했다가 에리카에게 모종의 이슈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이 순간 에리카의 사정을 듣지 않은 성필의 탓일 터.

“알겠어요. 어디서 볼까요?”

성필은 폰의 메모장에 에리카가 불러주는 장소와 시각을 메모하다가, 흠칫하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제 차 안에서요?”

[마땅한 장소가 없어요. 제가 감정을 잘 추스를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어요.]

대체 윤희연이 무슨 짓을 했기에.

[RRBKZ 아지트든, 아니면 카페나 음식점이든, 프라이빗이 보장되지 못해요. 긴 얘기도 아닐 테니, 이사님만 괜찮으시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성필은 차에 방향제가 남아 있나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아니면 시트에 어떤 냄새가 묻진 않았을까?

요즘엔 옛날처럼 소녀연맹 멤버들을 태우고 다니지도 않는다. 성필이 모르는 냄새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

얼룩 같은 건 있던가.

성필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차 안의 광경을 되새겨보곤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봬요. 죄송해요.]

“아뇨, 사무라이 걸즈 일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요.”

[옛날 느낌 나네요. 제 믹스테입 때요.]

“그때보다 복작복작해지긴 했죠. 그땐 저랑 에리카 씨, 민주 씨랑 리카뿐이었잖아요.”

[그때가 그리우세요?]

딱히 그립진 않다.

추억은 뒤에 남아 있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움이란 이미 지나온 길로 돌아가고 싶은 감정이다.

성필에게 에리카와 함께했던 믹스테입은 추억이라, 그리움은 없다.

그러니 성필의 답은 ‘안 그립다’여야 했다. 그런데 그리 말하면 에리카가 오해할 것이다. 그녀뿐 아니라 누구든지.

뒤에 따로 설명을 덧붙여야 하리라.

하지만 성필은 이런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웬만해선 말을 짧게 끊으려고 노력한다. 그가 배운 대화의 기술이다.

상대를 조금이라도 질리게 하지 않기 위한 기술. 그래서, 성필은 간단하게 답했다. 자신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에리카의 사고방식에 맞춰서.

“네, 그립네요.”

[저도요, 그리워요.]

아마 에리카의 ‘그립다’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그저 그때가 좋았다는 뜻이겠지.

[재밌었는데…….]

말끝이 흐려진 에리카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는지 ‘아’ 소리를 냈다.

[그럼 그때 봬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성필은 폰에 기록한 메모를 다시 확인했다.

“통화 끝나셨어요?”

성필이 화들짝 놀랐다. 그가 등으로 막고 선 문 안쪽에서 장하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에서 비켜나니 끼이익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장하양이 서 있었다.

“에리카 씨가 왜요?”

성필은 주머니에 숨기듯이 폰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사무라이 걸즈 일 때문에.”

“이제 다시 하양이 일로 돌아오셔야죠?”

장하양은 싱긋 웃으며 들어오란 뜻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성필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담아 미소 짓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3층의 이 사무실은 이유이와 배헌용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과거 장하양의 프로듀싱 때는 장하양과 이유이가 박혀 옷을 연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테이블 위엔 패션 잡지에서 뜯어낸 여러 장의 스크랩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 하얗게 깔린 서류들은 장하양이 하반기에 받은 광고 목록이었다.

‘많기도 하지.’

통신사 요금제 광고.

렌즈와 화장품.

각종 패션과 주얼리, 향수 등.

종목이 굉장히 다채로웠다.

‘하양이가 지금까지 받은 광고 전체를 합쳐도 이보다 많진 않아.’

‘송 포 피플’의 대성공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건 뭐라 해도 장하양이었다.

과감하고 세련된 패션과 그녀의 비주얼이 시너지를 일으켰고, 현재 그녀는 비주얼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아이돌이 됐다.

‘광고가 많이 들어올 만도 하지.’

성필은 다시금 잡지 스크랩을 살폈다.

가장 눈에 띄는 게 몇 있었다. 바로 패션 잡지에서 가져온 명품 패션 사진이었다.

네 개가 있다.

전부 장하양에게 광고를 요청한 브랜드들이다.

장하양에게 브랜드 글로벌 앰배서더 제안이 온 건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의미 있는 광고 제안이 왔다.

‘제품 광고.’

첫 번째는 아르마니(ARMANI).

두 번째는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

세 번째는 생 로랑(Saint Laurent).

네 번째는 후쿠요 히다카(HUKUYO HIDAKA).

이탈리아 하나, 프랑스 하나, 일본 두 개.

각자의 철학이 확고한 브랜드들이다.

그리고 저 모든 브랜드가 장하양에게 제품 광고를 제의하며 건 하나의 조건이 있다.

‘6개월 동안 동일한 종류의 타 브랜드 제품 광고를 하지 말 것.’

동일한 종류란 외투, 액세서리, 시계, 주얼리 등의 구분을 일컬었다.

장하양은 아르마니의 잡지 스크랩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밝은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아르마니는 남자 정장으로 유명한 걸로 알아요.”

“그렇지. 나도 아르마니 정장 하나 갖는 게 꿈 중 하나야.”

“생일 선물로 드릴까요?”

“네 생일 때 어떻게 갚으라고.”

장하양은 기억했다는 듯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성필은 가느다란 실이라도 빼내는 것처럼 그녀의 이마 앞에서 검지와 엄지의 집게를 죽 잡아당겼다.

“그런 거 가져오면 진짜 안 받아. 아르마니는…… 최근에 10대와 20대를 겨냥한 하위 브랜드를 하나 만들었거든.”

“10대랑 20대가 명품을 어떻게 사요?”

“마데 인 치나(Made in china).”

“아.”

“생 로랑이랑 꼼 데 가르송은 ‘송 포 피플’ 때 SNS로 홍보를 도와줬었지. 후쿠요 히다카는 널 패션쇼에 세울 정도로 좋게 봐줬고.”

“결국 앰배서더가 된 건 소유 언니였지만요.”

“그랬지. 글로벌 앰배서더였나? 아니면 아시아권?”

장하양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박 이사님, 알고 계시잖아요? 케이어스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요.”

“고민이네.”

정말 고민이다. 각 브랜드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제시한 상품들도 장하양에게 썩 잘 어울린다.

“정말 알고 계셨던 거예요?”

명품. 그 가치를 결정하는 건 외양이나 재료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상품은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상승한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소비로 기업이 이윤을 보고, 그 이윤을 상품을 개선하는 데 재투자하기를 바란다.

수요의 증가, 가격의 상승, 상품 개선.

이 사이클은 일반적으로 어느 수준에서 끝난다.

“이사님? 왜 대답이 없으세요?”

하지만 ‘어느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 상품도 있다. 수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마침내 개선할 여지가 없을 수준까지 상품의 퀄리티가 상승해버린다.

상품이 이 단계까지 이르면 제품 자체에 들어간 노동력, 재료, 노하우 이상의 것을 판다.

바로 인간이 상상해낸 가치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사이클의 정점에 이르러 더는 올라갈 길이 없는 상품.

그것을 명품이라고 부른다.

작품의 경지에 오른 상품.

성필이 모를 뿐이지, 이 모든 브랜드의 상품 아닌 작품들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

“아악!”

장하양이 성필의 양뺨을 붙잡고 옆으로 꾸욱 꼬집어 벌렸다. 성필이 순간적인 고통에 소리를 지르자, 장하양이 빨리 손을 뗐다.

그녀의 눈썹 끝이 사선으로 솟아 있었다.

“모른 척하지 마세요.”

“미안…….”

성필이 뺨을 문질렀다.

“사실 소유 씨가 글로벌 앰배서더인 거 알고 있었어…….”

“박 이사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대답을 안 하는 건 그만둬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알겠어.”

성필이 시무룩하게 답하자 장하양의 눈썹이 다시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그거 아세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거짓말하는 이유는 혼날까 걱정돼서래요. 혼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는 거죠.”

“나를 애에 비유하는 거야?”

“웬만한 건 전부 용서할 테니까, 저한테는 뭐든 말해주세요.”

“그래…… 웬만한 게 아닌 건 뭐야?”

“음, 맹약(盟約)을 깼다던가…….”

“그냥 약속도 아니고 맹약을 깼으면 화내야지.”

“모른 척하고 케이어스의 리더를 몰래 만나실 약속을 잡았다던가…….”

성필의 눈동자가 습관처럼 사선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곧바로 장하양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장하양이 덧붙였다.

“밖에서 이야기하시는 거 들렸어요. 이사님 통화가 끝나고 제가 ‘통화 끝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이사님이 들으신 것처럼요.”

“……내일 저녁에 뵙기로 했어.”

장하양은 입을 일자로 앙다문 채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업무잖아요.”

“응…….”

뭘까, 이 익숙하면서 은근히 포근한 기분은.

구속되는…….

‘악, 머리가!’

* * *

저녁 시간.

에리카는 얇은 코트를 꽉 여미며 KS 엔터 뒷문을 나섰다. 흰색의 마스크를 쓰고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편집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도중 옛날에 본 기억이 있는 차를 발견했다. 갓길에 세워진 차로 다가가 조수석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창문이 아래로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성필의 얼굴이 보였다.

에리카는 급히 조수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히터에서 나온 따스한 온풍이 반겨주자, 그녀는 여몄던 옷깃을 풀었다.

“안녕하세요.”

“많이 춥죠?”

“네. 어제 생각하고 얇은 외투를 입은 게 실수였어요.”

성필은 히터의 온도를 높이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진도가 빠르네요.”

“그럴 만한 일이니까요. 궁금하죠.”

본인의 프로듀서를 물 먹여달라고 제안하는 아이돌이라니.

만약 소녀연맹 멤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러한 부탁을 했단 것을 알게 되면, 성필은 그 자리에서 실신할 자신도 있었다.

“먼저…….”

에리카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윤희연이 에리카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단 것이다.

갑자기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 TF팀 사무실(강동현의 골방)에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사무라이 걸즈, 허락해줄게’라고 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거잖아요!”

에리카는 흥분했다.

성필은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다. 유심히 들으면서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에리카의 이런 모습은 희귀하다. 비슷한 결의 감정을 표현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나 타인을 싫어하다니.

“박 이사님이랑 집무실에 같이 갔잖아요. 그때 기억나시죠? 저를 집무실 밖에 세워두고, 또 이사님을 모욕하고, 결국엔 거절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선심 쓰듯이 ‘허락할게’라뇨?”

“괘씸하다는 느낌인가요?”

“거기까지는…….”

에리카는 호흡이 가빠져 잠시 말을 멈추었다.

“거기까지는, 네, 이해해요.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복수를 꿈꾸게 된 건 이후에 이어진 윤 이사님의 말씀 때문이었어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연말에 특별 무대가 있대요. 제가 나가게 됐는데…….”

그리 말한 에리카는 성필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이야기는 실언이었다. 특별 무대는 대외비로 취급되는 사안이다.

그런데 경솔하게 입을 놀렸다.

“아, 방금 건…….”

“븨이에스 수련 씨와의 합동 무대 말씀이시죠?”

에리카는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제 마음을 읽으신 거예요?”

“들었어요. 에리카 씨한텐 안 들었으니까 방금 하신 말씀은 사외비 유출 같은 건 아니겠죠?”

“그렇, 죠. 조심해야겠어요. 원래 안 이러는데…….”

“저를 편하게 여기시니까 그럴 수도 있죠.”

성필 나름의 농담이었다.

그런데 에리카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동의를 표했다. 이번엔 성필이 놀라야만 했다.

“정호환 이사님이 없으니까, KS 엔터가 KS 엔터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제집이 아니라 다른 사람 집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박 이사님을 무심코 더 편하게 느끼는지도 몰라요. 박 이사님은 전부터 저를 많이 도와주고 신경도 써주셨으니까요. 비록 다른 회사이지만, 윤 이사님보다는…….”

성필은 에리카의 말투에서 짙은 스트레스를 느꼈다. 이전에 있던 담임이 떠나고 새 담임이 왔는데, 그 담임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할까.

“아무튼, 그 무대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제 솔로 데뷔 일로 바빠요.”

“특별 무대, 안 하실 생각이었나요?”

“하려고 했어요. 그냥 ‘솔로 데뷔 일로 바쁘니 수련 선배님과 일정을 맞추기 어려워요’ 같은 뉘앙스로 말했어요. 그랬더니 윤 이사 니미 뭐라고 하시는 줄 아세요?”

“어, 네?”

“윤 이사님이 뭐라고 하시는 줄 아세요?”

“아.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거 아직도 하고 있어?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내년으로 미루든지 해. 아예 케이어스 자체에만 신경 쓰는 편이 낫고.

“잠시만요, 케이어스가 솔로 데뷔하는 계획이…….”

“윤 이사님이 반대하시는 프로젝트예요.”

성필은 침통함을 숨겼다. 정호환이 사라진 것으로 전생과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최소한 전생의 케이어스가 걸었던 길은 그대로 맞춰주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정호환과의 협업까지 계획했는데. 일은 점점 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케이어스를 전생과 같은 궤도로 돌려놓는 건 최소한의 양심인데, 그게…….’

점점 더 허황되게 느껴진다.

이번 일만 보아도 그렇다.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전생의 케이어스와 현재의 케이어스를 잇는 핵심적인 가교다.

그런데 윤희연이 총괄직에 오르자마자 그 가교가 무너져내리기 직전이다. 에리카의 이야기에서 추측해보자면, 아예 끝난 건 아니지만 지원이 없는 듯했다.

‘최대한 빨리 정호환 이사님이 KS 엔터로 돌아가야 해.’

“저는 필사적인데…….”

성필은 가슴 속에서 들끓는 다짐들을 지우고 다시 에리카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성필과 다른 의미로 가슴이 들끓는 듯했다. 무릎 위에 올린 손끝이 허벅지 살을 파고들 것처럼 꽉 쥐었다.

“아직도 하고 있냐니…….”

성필은 그녀를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에리카는 KS 엔터가 옛날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차이일 것이다.

그러한 차이로부터 오는 괴리감에, 에리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가장 원초적인 반응이 나왔다.

복수.

“에리카 씨.”

“네.”

에리카는 잘 벼린 칼을 보는 것처럼 성필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복수를 대행해줄 거라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유빈이가 프로듀싱 자금을 얻어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하시죠?”

그런데, 돌아온 건 에리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성필은 분기탱천하여 에리카의 복수에 가담해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에리카가 잊고 있던 사실을 끄집어왔다.

“‘아마노가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유빈이의 고민이 대부분은 해결돼요. 리카와 지음이, 강동현 작곡가님이 만든 카와이 베이스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가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사……?”

“‘아마노가와’의 제안이 물 건너간 현재에도, 리카가 쓴 가사는 과자의 달콤함이 주제예요.”

그건 유빈이 부탁한 것이다.

리카는 흔쾌히 수락했고.

“유빈이는 아직도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가로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를 불러다 놓고 잡일꾼처럼 쓰고 있는데, 희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아마노가와로부터 자금을 얻으면 굳이 성필에게 희생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희생이다.

유빈은 성필이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리카가 얽혀 있고, 유빈 자신이 가로 엔터에 속해있다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윤희연 이사님이 에리카 씨가 정식으로 음원 발매하는 걸 허락하셨다고요? 그것도 단순하게 제작진으로 참여하는 것만을 조건으로요?”

모든 게 행복하게 끝났다.

해피 엔딩이다.

“그런데 에리카 씨의 사심만으로, 일을 그르칠지도 모를 도박을 감행할 순 없어요.”

“…….”

“물론 에리카 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야기는 다르겠죠.”

에리카는 희망을 품고 앉음새를 고쳤다.

“어떤…….”

“제가 에리카 씨의 부탁을 안 들어주면, 에리카 씨가 아예 사무라이 걸즈를 관두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요.”

“그건, 그건…….”

“그러실 거예요?”

“아니요!”

에리카는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턱 끝을 코트의 목깃에 파묻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고개가 한껏 아래로 숙인 모양새가 됐다.

“아니요…….”

땅끝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점점 더 아래로,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이제야 이해했기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렇네요. 제 사심 때문에 이 기회를 날릴 수는 없어요…….”

“정당한 이유 없이 위험을 감수할 순 없으니까요. 이해해주세요.”

“네…….”

이야기가 끝났다.

에리카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차의 문손잡이를 쥐었다. 창피해서 최대한 빨리 이 공간을 뜨고 싶었다.

이곳의 공기가 더운 건 히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달아올라서인 것만 같았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

“위험을 감수하려면.”

에리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겠죠. 윤희연 이사님의 심기를 건드려서 일을 파탄 낼 수 있단 점에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박이지만요.”

에리카는 문 쪽으로 향한 고개를 천천히 성필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도박은 나쁜 게 아니에요. 애초에 인생에서도 운이 개입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삶은 장기(將棋)가 아니죠. 완벽히 통제되는 환경은 없어요. 오히려 섰다에 가까워요.”

“섰다?”

에리카는 ‘뭐가 섰냐?’고 묻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성필은 재빨리 비유를 바꾸었다.

“아, 어, 화투(花鬪)?”

“화투……?”

“포커!”

“아, 포커!”

“네. 그런 도박이요. 노력과 기술적인 요소가 무시될 정도로 운이 과한 요소가 아니고, 기술만이 전부가 아닐 정도로 적절하게 운이 개입해요. 도박, 해야죠. 그것을 하는 데 정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고, 얻고자 하는 게 명확할 때요. 에리카 씨는 윤희연 이사님이 개처럼 기길 바라시죠?”

에리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제의 자신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는지 알겠다.

“다행히 에리카 씨의 목적과 제 목적이 일치되는 지점이 있을 거 같아요. 제가 윤 이사님께 드릴 굴욕은 비즈니스적인 실패예요. 목표가 생겼으니까, 이젠 행동의 이유가 있어야죠. 어디까지 굴욕적인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어디까지……?”

“윤희연 이사님이 어떤 제안까지 감내하실 건가, 그 선이 필요해요. 막연히 ‘여기까지’는 안 돼요. 윤희연 이사님이 절박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과연 얼마나 절박한지 알아야겠어요. 그러고 나서.”

성필은 에리카를 안심시키기 위해 인지한 미소를 띠었다. 과거의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곧잘 보여주었던 미소였다.

“함께 도박을 해보죠.”

그 미소를 보고…….

물론 미소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가 한 이야기와 말투, 목소리의 색깔과 감정을 듣고 나서, 에리카는 생각했다.

성필은 자신이 만나본 사람 중 가장 관대한 인간이다. 마치 마음의 한계가 없는 사람 같다.

감정의 우물이 무한해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라도 감정을 쓰는 걸 피곤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가까운 사람은 그를 상대할 때 파도가 덮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지금 에리카가 그랬다.

성필은 그녀에게 온전히 집중해주고, 온전히 마음을 써주고, 진심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진실로 그녀에게 공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지닌 관대함의 발현으로 여기까지 왔다.

“윤희연 이사님이 얼마나 절박할까요?”

거절할 수도 있었을 제안을, 거절하는 게 당연한 제안을, 그는 받아들였다.

그의 시간과 그의 감정과 그의 미래를, 그는 아낌없이 베푼다.

비록 에리카와 목적은 다르지만, 그는 에리카에게 시간과 감정과 미래뿐 아니라 복수까지 안겨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나니까…….’

상대가 에리카 자신이니까, 성필은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다. 굳이 어려운 길로 가려는 것이다.

성필이 과거에 말했었다.

자신은 에리카의 첫 번째 팬이라고.

썸이 1호라고.

그리고, 성필은 에리카가 처음으로 사인을 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데뷔한 날, 복도에서 만나 사인을 부탁하는 그를 만났었다.

‘나는…….’

성필의 우상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에리카는 생각했다.

‘무조건 성공해야 해!’

그가 ‘하겠다’고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다고, 내가 생각이 짧았다고, 그딴 말을 지껄이며 그만둘 수는 없다.

없어.

그를 실망시킬 순 없다.

에리카는 그가 어떤 제안을 하든 무조건 실현시킬 마음가짐으로 물었다. 그처럼, 에리카 또한 그의 목표를 이뤄주기로 다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안을 하실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사무라이 걸즈’ 제작기를 독점적으로 가로 엔터 채널에 게시하고 싶습니다.”

“에.”

에?

“그건…….”

“힘들까요?”

에리카는 성필의 눈을 보았다.

자동차 안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그의 눈을.

“히, 힘들…….”

에리카는 왠지 모르지만 얼마 전의 리카가 떠올랐다. 유빈이 카와이 베이스를 하자고 했을 때의 리카가.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뭐…….”

에리카는 검지를 치켜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까짓거 한번 해봅시다!”

까짓거 이유 없는 굴욕이 윤희연을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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