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7화
“아름이랑 효민이요…….”
홍연헌은 말끝을 흐렸다.
거기서부터 그녀가 이 제안을 그리 달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은 보고 싶은 무대가 있거든요.”
그렇다면 먼저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누굽니까?”
“유선이요.”
언제나 기름칠한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던 성필의 혀가 삐걱거렸다.
유선.
그런 이름의 아이돌은 가로 엔터에 없다. 그러니 홍연헌이 말한 유선이란 인물은…….
“다키스트의 서유선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왜 이 이름이 나왔는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작년 HPT 뮤직 어워드에서 서유선은 이름이나마 무대 위에 드러냈었다.
‘오토마타’를 디렉팅한 공으로 서유선은 올해의 퍼포먼스 디렉터로 꼽히지 않았던가.
“가로 엔터와 연이 있죠? 상대가 케이어스와 븨이에스의 리더예요. 그럼 가로 엔터는 다키스트의 리더와 소녀연맹의 리더인 건 어때요?”
“실현 가능성이 아예 없네요.”
성필은 서유선이 출연할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렸다.
홍연헌이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성필이 설명을 시작했다.
“서유선 씨는 은퇴하셨습니다. 은퇴한 지 시간이 오래 지났고요.”
물론 성필은 서유선의 취미가 아이돌 퍼포먼스 커버란 것을 안다. 그의 실력은 녹슬기는커녕 점점 더 진보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필요한 능력이 실력뿐이던가. 가장 중요한 건 사람 앞에서 떨지 않는 능력이다.
너무나 기본적이라서 사람들이 아이돌의 능력으로도 쳐주지 않는 것이지만, 서유선에겐 그 능력이 없다.
“그런 분에게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무대에 서주세요’라고 하면 얼마나 당황스러우시겠어요. 안 그래도 시간이 얼마 없는데요.”
“몇 개월이나 남았잖아요. 그 시간이면 떡을 치겠어요.”
홍연헌은 설득 태세에 들어갔다.
어떤 무대를 하든 가로 엔터 마음이라고 했으면서, 일을 그르치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쩌면 홍연헌도 어린 시절 다키스트를 마음 한곳에 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작년 시상식에서 서유선의 이름이 보이자, 꺼졌던 덕질의 잿더미에서 불꽃이 되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성필을 달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데 저도 알죠. 알아요. 은퇴한 사람 불러서 현역이랑 같이 무대에 서란 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안다고요.”
“그런데요?”
“그래도 멋지잖아요! 만약 박 이사님이 힘내주시지 않으면 미래의 문화유산이 하나 사라진다고요!”
성필이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미래의 문화유산이 사라진다…… 그도 백 번 동의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할 때조차 말을 더듬는 서유선이 수십만 명이 보는 무대에서 떨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다.
‘방법이 있다면 와인을 한 병 먹이는 건데.’
케이팝 사상 최초 음주 무대가 되어버린다. 과거의 록스타들도 술 먹고 시상식에 서진 않았을 것이다.
“문화유산 소실에 대해선 저도 오장육부가 꼬이는 느낌입니다.”
“그럼……!”
“다키스트가 어떻게 해체했는지 모르시지 않지 않습니까.”
다키스트가 어떻게 해체했느냐.
그 말이 나온 직후, 성필과 홍연헌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알긴, 하죠.”
멤버 다섯 중 세 명이 정신적인 이상을 호소하며 7년 활동을 종지부로 해체했다. 아직도 KS 엔터에 남아 활동하는 건 하민과 영원, 둘뿐이다.
성필은 홍연헌의 사려 없음을 탓하지 않았다.
성필도 장막(다키스트의 팬덤)으로서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아이돌이 힘들다면, 팬은 아이돌을 걱정하면서도 그가 활동을 관두지 않길 바라는 양가적인 생물이다.
그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이란 팬의 입장에서 매우 이기적으로 판단된다. 애초에 팬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아이돌을 선택하는 이들이니까.
“업계 활동에 트라우마가 있으셔도 이상하지 않아요. 홍연헌 사장님께선 그런 분을 부르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은퇴한 연예인이라서, 막연히 잘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면 기쁘지 않을까 싶었고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 무대를 위해 힘써주신 건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아름이와 효민이로 괜찮을까요?”
“네, 뭐…….”
홍연헌은 꿩 대신 닭이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우효민은 그렇게 불려 마땅한 아이돌이 아니다.
우효민의 입지는 솔로 뮤지션 중 독보적이다.
현재 그녀만큼 인지도가 높은 솔로 아이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효민이는 알겠는데, 왜 짝으로 아름이에요?”
“프로젝트 포유.”
홍연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불타오르는 요소 중 하나죠.”
* * *
RRBKZ 아지트.
에리카의 프로듀서인 강동현이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로봇처럼 무기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온갖 장르의 제이팝 약 1,001곡을 듣고 빅데이터로 도출해낸 제 해답입니다.”
“아니.”
정지음이 그의 곁에 서서 똑같이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
“우리의 해답이죠.”
“아타시(저)도 있다구요!”
사무라이 걸즈의 목표가 카와이 베이스로 고정됐다. 그러자 강동현과 정지음은 연료를 가득 채운 스포츠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진했다.
현세대 최고의 케이팝 뮤직 프로듀서로 손꼽히는 둘이 만들어낸 카와이 베이스의 정수…….
“아타시(저)도 있다니까요!”
최고의 케이팝 뮤직 프로듀서와 카와이 퓨처 베이스의 신인 리카, 셋이 만들어낸 카와이 베이스의 정수…….
그 위업을 마주하게 될 에리카와 노아가 긴장했다. 그리고 둘의 반응을 살피게 될 유빈은 그보다 몇 배는 더 긴장했다.
참고로, 윤상열은 오지 않았다.
원래부터 따로 곡만 받아서 편곡해주기로 해서, 딱히 올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노아는 평소보다 어깨가 처져 있었다.
“아, 가사가 있어요!”
“가사가?”
에리카가 놀랐다.
곡이 윤곽을 갖추었다는 연락을 받은 게 바로 며칠 전이다. 그런데 바로 가사가 붙었단 말인가?
“누가 썼어?”
“내가!”
“…….”
“에리쨩 표정 때문에 상처받겠어…….”
“지, 진짜 가사는 아니에요.”
강동현이 설명했다.
“원래는 제가.”
정호환과 다르게 음치인 강동현이.
“그냥 보컬 멜로디 따라서 ‘라라라’ 불렀거든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분위기와 발음을 고려한 글자가 붙는 편이 나으니까…….”
“헤헤.”
리카가 자랑스러운 감정을 한껏 표출했다. 별거 아니란 듯 코를 긁적이지만,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마아(뭐어), 하양 언니랑 같이 작업하면서 작사에 눈을 떴달까. 그냥 생각 없이 발음 붙인 거니까 너무 진지하게 듣진…….”
“리카가 아무 말 대잔치를 했단 뜻이죠? 알겠어요. 보컬 멜로디만 들을게요.”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에리카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저.”
학부모 없이 운동회에 참석한 아이처럼 노아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나중에 가사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건가?”
“맞아요! 물론 다들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여서 ‘이 가사가 아니면 안 돼’라고 외칠 테지만요!”
“그런가…….”
노아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리카는 대단하구먼……. 작곡도 할 줄 알고 작사도…….”
“노력했으니까요! 박 이사님이 연습생 때부터 작곡을 배우게 했어요! 아타시(저)의! 잠재력을! 알아보셨으니까요!”
리카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자기 자랑을 했다. 그녀는 의기양양, 자신만만, 기세등등한 기운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노아를 곁눈질했다.
“노아 씨도 박 이사님이 뭔가 가르치셨나요!”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춤이랑 노래만 배웠다.”
리카는 대답 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그러고선 정지음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가요!”
“하앗!”
정지음이 노트북의 엔터를 때렸다.
하민이 아지트에 마련해둔 뱅앤울룹슨의 보름달 모양 스피커가 소리를 뱉어냈다.
[에, 시작하면 되나요?]
평상시 리카의 목소리.
하지만 일본어였다.
그리고.
[그거 알아?
나이를 먹으면
미각 세포가
무뎌진대!]
달려간다.
리카의 괴상한 가사는 둘째치고, 에리카는 곡을 듣자마자 그런 느낌을 받았다.
경쾌하게 반주를 이루는 피아노는 어떤 이펙트를 입혔는지 어린이 피아노 같았다. 그 피아노가 뽁뽁이 신발을 신고 뛰어가는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내달렸다.
[쓴맛을 잘 못 느껴서
채소를 잘 먹게 돼!
우리가 어릴 때 사랑했던
과자도 달지 않아!]
에리카는 민감하게 곡에 사용된 악기를 잡아냈다. 카와이 베이스라고 했는데, 예상외로 록밴드의 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베이스, 일렉 기타, 드럼.
거기에 카와이 베이스의 시그니처 같은 사운드 장치들이 군데군데서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무엇보다 이 곡의 근간은 귀여운 소리의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귀엽고 깜찍한 종소리다.
왜, 유치원에서 어린아이들의 음감을 길러준다면서 손에 쥐여주는 자그마한 종이 있잖은가. 색깔별로 음이 다른.
그걸로 유치원생들이 합주를 하곤 한다.
[단 걸 좋아하는 날
너는 아이 같다며
놀리곤 하지!
그런데 착각이야!
내가 어린 게 아니라
네가 늙은 거야!
미각 세포가
퇴화한 거라구!]
에리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소리가 있는데 잡아내기 힘들다. 찰그랑찰그랑, 그리고 드럼의 소리와도 다른 무언가 치는 소리.
‘아, 탬버린인가?’
에리카는 노아를 보았다. 그녀는 예전엔 열심히 탬버린을 연주하더니, 요즘엔 어디 뒀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혀 위에서 녹는 건
초콜릿 빼고는 없어!
진짜 혀에서 녹는 맛
혀에 번지는 검은색
이 맛을 잊은 너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유의미한 멜로디의 변화가 보인다.
하이라이트 파트다.
에리카가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모르고 먹은 척해봐
어린애처럼 보인다고
겁먹지도 마
알고 있어 다 알고 있다구
달고 단 이 맛을 찾아온
어린이가 바로 너란 걸!]
하이라이트가 아니다.
새로운 벌스(Verse)다. 1절 하이라이트가 스킵되고 바로 2절로 들어간 것이다.
원래부터 워낙 가볍고 흥겨운 곡이라 에리카는 자신이 하이라이트를 놓친 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이라이트는 나오지 않았다. 곡이 매 순간 같은 텐션이다. 멜로디 라인도 똑같이 반복된다.
리카의 정신 사나운 벌스가 이어지고, 마침내 곡이 다시 유의미한 변화 상태에 접어들었다.
만약 이번에도 하이라이트가 없다면…….
‘이런 곡이 있을 수 있나? 모든 상태가 평이하게 유지되는 곡이란 게…….’
븨이에스의 ‘포트레이트 인 유’를 따라 하려고 한 건가? 그렇다면 엄청난 열화품이다.
그보다 나은 건 곡 내내 유지되는 깜찍하고 귀엽고 흥겨운 텐션이다. 계속 들어도 지겹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니, 지겨운 부분이 없다.
그때, 드디어, 프리코러스가 확실한 파트가 등장했다.
[퀘스천! 퀘스천!
독터 프리스크립션!
해답은 이거야!
좋아한다고 말해!]
기다렸다는 것처럼 등장한 하이라이트는 리카의 3옥타브 고음이었다. 그녀는 높은 음계에도 전혀 개성을 잃지 않은 깔끔한 소리로 외쳤다.
[쓴맛은 싫어!
억지로 안 먹어!
혀 위에서 녹는
달콤함만
오직 이 단맛만!]
에리카는 이 하이라이트를 구현해내는 테크닉에 소름이 돋았다.
1절과 2절을 통째로 붙이고 그다음에서야 하이라이트를 집어넣는다.
이어서 읊조리듯 빠르게 랩하는 파트가 나왔다. 랩마저 쓸 수 없었는지, 리카는 진짜 아무 말 대잔치를 했다.
[아마이볼 달아
달고 맛있어
아 달다 달아
맛있다 너무
달고 맛있다]
이어서 연속으로 또 하이라이트 파트가 터져 나왔다.
[쓴맛은 싫어!
억지로 안 먹어!
혀 위에서 녹는
달콤함만
오직 이 단맛만!
너도 빠져버렸지?]
곡이 찾아왔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끝났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강동현과 정지음, 리카가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에리카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리카의 가사는 수정할 거라니까 넘어가구요.”
“에에에에엑?!”
“무대에서 부를 수 있는 곡이 아닌데요. 템포가 너무 빨라요.”
진짜 빠르다.
꼭 원래 있던 곡을 1.15배 혹은 1.2배 더 빠르게 재생시킨 것 같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가끔 리카의 발음이 억지로 빠르게 한 듯 씹히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아앗! 에리쨩 모르는구나!”
리카는 에리카가 모르는 게 있단 사실이 굉장히 기쁜 듯했다.
“이건 ‘나이트코어’라는 거야! 원곡의 템포보다 가속시키는 기술이야!”
“나이트코어?”
에리카는 곧바로 생각나는 게 있었다.
‘클락’이나 ‘아이튜브 숏츠’를 볼 때면 원곡을 빠르게 돌린 곡들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느린 곡도 템포와 피치를 높이면 귀엽고 신나는 분위기로 바뀌기도 한다.
“거기에 이름이 있었구나.”
“반대는 ‘데이코어(Daycore)’야! 마아(뭐어), 에리쨩은 이해할까? 나이트코어의 미학을?”
“뭔지 이해했어. 그러니까, 무대에서 부르기 힘들다니까.”
“그게 포인트예요!”
정지음이 항변했다.
“빨라서 이 느낌이 사는 거라고요!”
에리카는 리카와 정지음은 번갈아 보았다.
눈에서 불이 타오르는 둘에 비해 에리카는 침착했다. 침착하게 반대를 시작했다.
“네, 노래 부르는 건 가능해요. 셋이서 나누는 거기도 하고요. 그런데, 춤은 없나요? 만약 있다면, 춤추면서 부르긴 힘들 거 같은데요. 안 그래도 모든 파트가 옥타브가 높아서요.”
그리 말하며, 에리카는 노아를 곁눈질했다. 노아는 에리카의 시선을 받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직접 부른 리카는 그렇다 쳐도, 노아 씨는 글로브에서 포지션이?”
“아, 어, 포지션은 따로…… 그게, 서브 보컬이다…….”
“춤, 있나요?”
에리카의 타깃은 유빈이 됐다.
유빈은 에리카의 공격적인 태도를 감당하는 게 버거운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에리카는 현세대에서 가장 인기 많은 걸그룹의 리더인 것이다.
그런 아이돌에게 ‘이게 맞나요?’ 같은 말을 들으면 어떤 프로듀서라도 진이 쏙 빠질 것이다.
“춤은 케이팝 아이돌의 상징이니까 꼭 들어가야겠죠…….”
“그런데 곡을 이렇게…….”
유빈이 쭈뼛쭈뼛 물었다.
“그렇게 별로예요……?”
에리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빈을 상처입힐까 봐 겁나서?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저기, 돌려서 말씀하시지 마시고…….”
“정말 모르겠어요. 구리면 구리다고 말하기라도 할 텐데, 정말 몰라서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어떤 예술이든 알면 알수록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아는 게 많을 땐 분석하느라 감상하는 즐거움이 사라진다는 건, 아는 게 많아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지는 흔한 오해다.
음악이라면 장르의 역사, 악기의 종류와 주법, 리듬, 멜로디, 사운드 장치, 코드, 작곡 테크닉 등 감상할 요소가 많다.
그리고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쓸 감상의 도구는 단 하나다.
직관(直觀).
에리카는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안 좋냐’고 물으면, 안 좋지 않아요.”
“그럼 ‘좋냐’고 물으면요?”
“‘나쁘지 않아’라고 답할래요.”
“애매하단 건가요?”
“아니요. 제 말을 그대로 이해해주세요. 일물일어(一物一語), 아시겠죠?”
일물일어, 플로베르가 ‘어떤 상황에 들어맞는 언어는 하나뿐이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어느 감상물을 평가할 때 막연히 좋다, 재밌다, 멋지다 등으로 평가하는 건 부정확하다.
그건 무엇에든 들어갈 수 있는 말이니까.
그 감상물에 들어맞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리카의 감상은 아까 말했듯이.
“모르겠어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는 카와이 베이스와 제이팝의 어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의 제작에 가담한 입장에서,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좋고 나쁨에 따라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 곡이 공개됐을 때 반향을 얻을 수 있겠느냐, 유빈 선배님의 질문은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죠?”
“아, 네에…….”
유빈은 에리카가 정말 일본인인지 의심됐다.
외국인 수준의 한국어 구사력이 아니다.
에리카 옆의 노아는 에리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눈치인데 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리카와 유빈 선배님이 동의하시니, 다수결에 따라야겠죠. 선배님께 확신이 있다면요.”
유빈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프로듀서, 즉 결정권자는 언제든 반대에 부딪힌다. 그런데 반대만 있는 게 아니다.
애매한 반응도 있다.
프로듀서는 만장일치가 나왔을 때 허락하는 직업이 아니다. 만약 그게 프로듀서의 일이라면, 프로듀서가 왜 필요하겠는가?
프로듀서는 반대가 있어도, 반응이 애매해도, 자신의 믿음에 따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직업이다.
그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에리카가 저리 말하니 식은땀이 흐른다.
‘내 선택으로…….’
사무라이 걸즈라는 그룹의 이미지가 결정되는 건가?
유빈은 옷의 목깃을 잡아당겨 늘렸다. 늘어난 공간으로 바람이 들어와 그의 몸을 식혔다.
“이, 일단은.”
유빈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것을 보던 리카는 자기가 창피당하는 것처럼 ‘아으’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시작이니까요. 아직은 미완성이고요. 의의가 있다면 송폼(Song form)이 확정됐단 거고요.”
“그것도 묻고 싶었어요. 뭐예요?”
1절 다음 2절이 바로 나오고, 뒤에 하이라이트 두 번이 연달아 나왔다.
“요즘 유행하는 거예요? 이런 건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건 아타시(내)가 설명할게!”
거의 목석이 되기 직전인 유빈을 대신하여 리카가 튀어나왔다.
“메이저로 올라오는 장르들은 원래부터 메이저가 아니잖아?”
“그렇지.”
“모든 장르는 마이너 시절을 거쳐! 결국엔 마이너로 머무르는 경우도 많아! 나랑 지음 오빠, 강동현 작곡가님 셋이서 마이너 곡들의 실험장을 뒤적이다 발견한 거야!”
“사운드 포그 같은 곳?”
정호환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진짜 유행은 그런 곳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혁신을 바란다면 빌보드 차트나 오리콘 차트, 워터 멜론 차트만 봐선 안 된다고 했었다.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들을 리믹스한 거였는데 짜임새가 좋…….”
“알겠어.”
“너무해…….”
“유빈 선배님,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 수정을…… 해야 할까요?”
에리카가 쓰게 웃었다.
“제 말씀, 제대로 안 들으셨네요?”
“네?”
“그대로 들어 달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이 곡이 싫거나 마음에 안 들어서 ‘모르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프로듀서인 유빈 선배님의 결정이 필요한 때겠죠. 노아 씨는 어떠세요?”
에리카는 유빈을 이 이상 괴롭히지 않으려 노아에게 질문을 돌렸다.
“아, 나도 잘 모르겠다…….”
“싫거나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시죠?”
“나도 정말 모르는 거다. 응, 그렇다…….”
“그러면 저희 둘에게서 들을 건 없을 테고. 오늘은 이걸로 끝내도 될까요?”
유빈이 손에 쥔 서류를 꼼지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는 시계를 보곤 강동현에게 고갯짓했다.
“작곡가님.”
“아, 응.”
에리카와 강동현은 남은 이들에게 인사했다.
강동현이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며 정지음을 향해 웃었다. 정지음도 그와 같은 포즈를 취하며 웃었다.
어느새 둘 사이에 유대감이 생긴 듯했다.
그 사이에 리카가 끼어서 똑같은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강동현이 등을 돌리고 난 후였다. 대신 정지음이 그녀와 마주 보고 그 자세를 취해주었다.
강동현의 차 조수석에 탄 에리카는 피곤함을 역력히 드러냈다.
시동을 걸며 강동현이 그녀를 위로했다.
“힘들지?”
“힘들 예정이죠.”
“아…….”
강동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맞장구쳐주지 않았다.
에리카가 할 것은 뒷담이었다.
“A&R팀 사람들, 우리 솔로 프로젝트가 거의 엎어진 거나 다름없다지만 태도가 너무해요.”
너무하지 않아요? 그렇게 공감을 유도하는 화법을 쓸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에리카는 강동현이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에리카 본인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공감을 바라는 타입도 아니었다.
깔끔하게 자기감정만 말했다.
“곡 평가 때 와서 하는 게 뭐예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정호환의 퇴임 이후 동력을 잃었다.
현재는 에리카와 강동현의 듀오 프로젝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회사 사람들이 평가하는 과정을 거치긴 한다. 그런데 A&R팀 사람들이 와서 하는 말이라곤 ‘좋지 않을까요?’, ‘에리카 씨가 괜찮다면’ 이런 것뿐이다.
그게, 에리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예 오질 말던가.”
“……아마도 그건.”
강동현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건, 뭐요?”
“……아니야. 아닌 거 같아.”
에리카도 더 묻지 않았다.
둘은 회사로 돌아와 익숙한 골방으로 향했다. 현재는 강동현의 작업실이자 에리카의 솔로 프로젝트 전담실로 쓰이는 곳이었다.
가던 도중, 에리카가 물었다.
“작곡가님, 이런 대접을 받으시면서도 KS 엔터에 계속 있고 싶으세요?”
“으, 응?”
“수석 프로듀서셨잖아요. 이젠 아니고요. 어딜 가도 이보다는 대접이 나을 거예요.”
“……KS 엔터는 내 집인걸. 또, 언젠가 사라지신 정호환 이사님이 돌아오실지도 몰라. 그땐 내가 다시 곁에서 보좌해드리고 싶어.”
그런 날이 올까.
에리카는 당연히 정호환이 돌아오길 바라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거에도 정호환이 이사회의 입김 때문에 프로듀싱을 손에서 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정호환은 노인이 아닌 중년이었다.
현재의 정호환은 기력과 열망, 꿈을 잃은 노인이었다. 그가 다시 돌아올 일은 요원했다.
강동현은 경직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요량으로 경쾌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느낌이 좋아. 잘될 거 같아. 이번 프로젝트가 잘 끝나면.”
강동현이 골방의 문을 열었다.
“윤 이사님이 잘 봐주실지도 모르…….”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이제 와요?”
윤희연이었다.
그녀는 꼰 다리를 풀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와 관련된 서류가 몇 장 들려 있었다.
“이, 이, 이사님?”
“강동현 작곡가, 잠시 자리 비켜주세요.”
“아, 네, 네에…….”
강동현은 불안한 눈빛으로 문에서 물러났다.
에리카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았다.
“에리카.”
“네, 이사님.”
에리카는 긴장했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고, 그 가정이 옳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예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를 폐기하시려는 걸까…….’
직감이 논리적인 언어로 변하자, 에리카는 불현듯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솔로 데뷔곡인 ‘블루 와이셔츠’는 그녀의 자식이었다. 심지어 ‘서울 시티 보이’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다.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그 곡이 세상에 드러날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이젠 다 끝날 듯하다.
에리카는 감정을 추스르려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윤희연의 발을 비스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이 천천히 다가왔다.
멈춘 곳은 에리카의 바로 앞이었다.
“내가 너무 모질었단 생각이 들어서.”
에리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던 눈엔 눈물 대신 희망이 맺혔다.
“이러나저러나 아예 틀어막는 건 너무했던 거 같아.”
“아, 아아, 이사님…….”
에리카는 또 눈물이 나올 듯했다.
슬픔 대신 기쁨 때문에.
“드디어 케이어…….”
“사무라이 걸즈.”
에리카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네……?”
윤희연이 시원한 미소를 드러냈다.
“사무라이 걸즈, 허락해줄게.”
* * *
“이사님, 전화 왔어요.”
잡지에서 뜯어낸 화보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테이블 위.
장하양이 근처에 있던 성필의 폰을 집어서 그에게로 가져다주었다.
“아, 고맙…….”
성필을 향해 뻗어가던 장하양의 손이 멈추었다. 폰에 뜬 ‘에리카 씨’라는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
“…….”
장하양이 아주 천천히 그에게로 폰을 넘겼다. 성필이 죄지은 사람처럼 폰을 받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 어, 잠시만.”
성필이 3층의 빈방에서 나와 문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에리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끼이이익.
등진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필이 등을 확 기대어 문을 쿵 닫았다.
[이사님, 통화 괜찮으신가요?]
“네, 에리카 씨. 괜찮…….”
덜컹덜컹.
성필은 힘으로 열리려는 문에 대항하여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괜찮아요!”
[윤희연 이사님이 말씀하셨어요. 사무라이 걸즈가 정식 음원으로 발매하는 걸 승인하겠다고요.]
“……아.”
아.
‘그럼 그렇지!’
성필의 뇌에서 엔도르핀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왔다. 무려 십수 일이 걸린 인내 끝에 성필이 이긴 것이다.
‘프로듀서면 하고 싶지 않을 리 없지!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고!’
성필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윤희연 이사님이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합류하는 거예요. 어떤 사안의 결정에 대해선 다수결로 정하고, 제 몫의 표를 가지는 걸로요. 케이어스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고, 케이어스에게 해가 될 것 같으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성사되면 KS 엔터의 자원을 쓸 수 있게도 해주신대요.]
“네.”
그 정도까진 충분히 예상했다.
윤희연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성필은 그녀가 어떤 제안을 해 올지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충분한 허용 범위 이내다.
“그럼 오…….”
[제가 보기에.]
에리카가 성필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 목소리에 원한이 맺힌 것만 같았다.
[윤희연 이사님은 절박하신 거 같아요. 박 이사님이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전부 받아들이실 거예요. 그러니까 윤희연 이사님을 최대한 굴욕적으로 만들어주세요.]
“……네?”
[아예 개처럼 기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실제로 개처럼 기실 수도 있을 거예요. 아.]
사무적이었던 에리카의 어투에 웃음기가 서렸다.
[이건 비유예요. 비유로 다시 말씀드릴게요. 개처럼 기게 만들어주세요. 썸이 1호로서, 해주실 수 있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