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화
“상열!”
우렁찬 부름이다.
윤상열은 굳게 다문 이빨 사이로 뜨거운 한숨을 뿜어냈다. 고개를 돌리자 소년처럼 해맑게 웃는 엘릭이 보였다.
“씨!”
엘릭이 뒤늦게 ‘씨’를 붙였다.
‘봐주니까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올라선…….’
원래 엘릭은 윤상열을 윤상열 피디님 혹은 윤 피디님이라고 불렀다.
윤상열은 엘릭을 편하게 대한 적이 없다. 그런데 엘릭 스스로 친밀감이 쌓인 것인지, 요즘 점차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저렇게 시답잖은 장난을 치면서 벽을 허물어뜨리려고 한다.
“뭡니까.”
“그냥 보이니까 불러봤어요.”
“일 없으면 가겠습니다.”
엘릭이 윤상열의 곁에 따라붙었다.
윤상열의 걸음은 폭이 넓고 빨랐으므로, 엘릭은 그의 곁에 붙으려 경보 수준으로 뛰었다.
“저 지금 긴장돼서 미치겠어요. 카오틱 에너지가 성공한 거 보니까 더 그렇고요.”
“데뷔는 잘될 겁니다.”
엘릭의 눈이 커졌다.
웬일로 윤상열이 격려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도왔으니까요.”
그럼 그렇지.
“우리 애들 데뷔할 때 같이 생방송 무대 보실 거죠?”
윤상열은 열이 뻗쳤다. ‘우리 애들’이라는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윤상열은 ‘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
엘릭의 프로듀싱 2부가 탄생시킨 석세스 엔터의 새로운 그룹.
그건 엘릭의 작품이지만 윤상열의 숨결이 배어 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어느 누구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윤상열이 자신만만하게 ‘내가 만들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엘릭이 ‘온전히 내 공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윤상열은 그런 애매함과 부정확함이 불편했다.
“상황 봐서요.”
윤상열이 건물을 나서자 엘릭도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면서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하곤 사라졌다.
그는 오늘 RRBKZ 아지트로 간다. 정기적으로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 때문에 모인다.
‘예상대로야.’
가로 엔터가 사무라이 걸즈를 모은 이유는 웨이퍼센트를 홍보하기 위함이다.
그 이상의 가치는 두고 있지 않다.
증거로, 무려 노아와 에리카, 리카를 모아뒀음에도 가로 엔터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고 있다.
‘웨이퍼센트에게 닥친 위기를 돌파했으니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단 거지.’
가로 엔터 소속인 유빈이 이 믹스테입 프로젝트의 프로듀서이긴 하다.
하지만 그깟 애송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이 기적 같은 기회를 믹스테입 같은 놀이로 날려버릴 수는 없어.’
모든 게 명확해졌다.
가로 엔터는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내가 갖겠다.’
작곡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샌님인 강동현. 마찬가지로 뮤직 프로듀서 외의 경험이 전무할 정지음.
이 둘은 있으나 마나다.
온전히 프로듀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윤상열 자신뿐이다.
그는 그런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RRBKZ 아지트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던 중,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윤상열은 고개를 들었다. 내려오는 사람도 아래로 시선을 주며 윤상열을 보았다.
둘의 걸음이 멈추었다.
“하민…….”
다키스트의 하민이다.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 윤상열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RRBKZ엔 다키스트의 하민과 븨이에스의 박수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만약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떤 말을 할지도 조금은 생각해두었다.
그런데,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윤상열은 그답지 않게 침묵이 불편했다. 마치 자신이 그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려워해?
자신이 프로듀싱했던 아이돌을?
그의 자존심이 긴장을 깨부수었다.
“오랜만…….”
하민이 윤상열을 빠르게 지나쳤다.
윤상열은 당황하여 뒤로 돌아보았다.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가는 하민의 등을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졌다.
황망했다.
황망함 다음은 분노였다.
‘누구 때문에 지금도 솔로 뮤지션으로 먹고 살고 있는데…….’
전부 다 다키스트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인을 이따위로 취급하다니.
그때 등 돌리고 사라진 하민의 모습에 글로브의 지유가 겹쳤다.
그녀가 윤상열에게 꽂아 넣었던 언어의 송곳이 다시금 형체를 갖추었다.
‘여기서 진심으로 최고의 아이돌 되려는 인간 하나 없어요. 피디님의 그 미친 소리는 피디님 머리에만 있다고요. 아시겠어요? 피디님은 정신이 나갔다고요.’
다 아문 줄 알았던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새어 나온다.
윤상열은 그 상처를 핥듯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쓸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윤 피디가 없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아지트로 들어오자 노아가 해맑은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윤상열은 하민이 게임할 때 앉는 소파에 자리하고 재잘재잘 떠드는 노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구호를 정했다. ‘칼 아래는 지옥! 한 걸음 앞은 극락!’이다. 기분이 좋으면 ‘고 사무라이 고’도 해도 된다.”
예상했던 대로 엘릭의 말보다 더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다.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흘렀건만 저런 이상한 것들만 정하고 있다.
유빈, 그 프로듀서란 인간에게 명확한 비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해 윤상열의 머릿속엔 벌써 무대 위에 선 노아와 리카, 에리카가 그려졌다.
“아, 맞다.”
노아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윤상열도 아까부터 그녀의 주머니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이돌답게 비율과 체형이 좋은 편인 노아는 와이드 팬츠 유행에도 굴하지 않고 스키니진을 고수한다. 그러니 주머니에 무엇을 넣으면 형태가 드러난다.
그녀의 주머니 양쪽은 골프공이라도 넣어둔 것처럼 빵빵했다.
“이거 먹다요.”
노아가 봉지에 담긴 과자를 내밀었다.
윤상열이 받았다. 투명한 봉지 안으로 누런색의 동그란 과자가 보였다. 겉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가 묻어 있다.
딱 보아도 굉장한 싸구려 과자다.
“아마이볼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매일 먹던 과자.”
윤상열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노아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맛있다. 오오가이토(노아의 성姓) 가(家)의 미슐랭 평가 투스타다…….”
맛없어 보여서 인상을 찌푸린 게 아니다.
노아가 계속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인지 과자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윤상열은 나중에 먹겠다고 했으나, 노아가 계속 닦달해서 어쩔 수 없이 바로 먹어야 했다.
‘밀가루 덩어리에 인공 감미료 맛…….’
초등학생이나 맛있다고 먹을 과자다.
이딴 걸 자랑스럽게 만드는 회사가 세상에 존재하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아마노가와란 회사에서 만든 과자다. 석세스 엔터보다 매출이 많다.”
윤상열은 우울해졌다.
음악은 대표적으로 돈이 안 되는 산업이다.
미국인은 하루에 평균적으로 깨어있는 시간의 1/3 동안 음악을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 산업 규모는 미국 총 GDP의 0.1%밖에 안 된다.
한국은 그보다 규모 비율이 더 적을 것이다.
불합리하기 그지없다.
음악이 발생시키는 외부 경제 효과를 합치면 그보다 훨씬 클 게 분명하지만, 그건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아니다.
‘요즘 것들은 음악이 얼마나 귀한 건지도 모르겠지.’
CD를 사기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던 경험. 한 CD를 커버가 닳아 빠질 정도로 들었던 경험.
그런 경험이 없으니 음악에 진지하지 못한 것이다.
눈앞의 노아처럼.
“구호랑 이 과자 말고 다른 일은?”
“없다.”
“그래.”
20분 정도가 지나자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과 정지음, 강동현이 모였다.
유빈은 가장 마지막에 왔는데, 편의점 봉투에 다과와 음료를 가득 담아왔다.
다들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노아 씨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에리카는 평소보다 명확히 들뜬 노아를 보고 물었다. 노아는 확실히 기세등등하게 가슴을 폈다.
“딱히 없는 거다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평소보다 당당해질 이유는 있었다.
윤상열의 존재였다.
노아는 학예회 때 부모가 찾아온 아이처럼 의기양양했다. 평소처럼 리카와 에리카라는 규격 외의 존재와 맞서 쭈글쭈글 쪼그라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단 피디님들께는 처음 알려드리는 소식을 텐데요.”
유빈이 전달 사항을 꺼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부터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성필이 프로듀싱 업무를 일부 담당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만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게 아니라 재정과 외부 기업과의 교섭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는데, 더 놀랄 일은 뒤에 있었다.
“카와이 퓨처 베이스……?”
윤상열은 자기가 꿈속에 있는가 의심해야만 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유빈이 저 말을 맨정신으로 했단 뜻이 되니까.
“정지음 피디님은 만드실 수 있으시죠?”
정지음이 수긍했다. 애초에 리카에게 카와이 퓨처 베이스를 알려준 게 그이기도 했다.
“강동현 피디님은요?”
“가끔 듣긴 하는데, 만들어본 적은 몇 번밖에 없어서…….”
“윤상열 피디님은…….”
윤상열은 허파가 뒤집혔다.
다들 이 이야기를 태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답했다.
“만들어본 적 없는 게 당연하지…….”
“학원에서 배우지 않아요?”
정지음이 의외란 것처럼 물었다.
확실히 미디 학원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작곡해보길 권한다. 클래식처럼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다고 확장성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항상 새로운 장르가 생겨나고 있다. 마이너한 장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어느 게 메이저로 올라올지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학원은 카와이 베이스를 가르치기도 한다.
윤상열은 그 물음에 씹어 뱉듯 말했다.
“저는 음대 나왔습니다.”
“입시 학원…….”
“카와이 베이스란 게 있지도 않을 시절에!”
“왜 화를 내고…….”
정지음이 구시렁댔다.
윤상열은 자기가 과민 반응했음을 인정했다. 물론 정지음에게 소리쳤던 게 과민 반응이란 거다.
아직도 다들 카와이 베이스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때 유빈이 퍼뜩 무언가 깨달은 듯 멋쩍게 웃었다.
“아, 그렇네요. 이거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프로듀싱 자금을 확보했어요. 저희의 제1목표가 어느 정도 수정됐거든요.”
“네……?”
윤상열이 노아를 보았다.
아까 분명 별다른 소식이 더 있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없다고 했었다.
노아는 큰 눈을 깜빡이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 저능아가……!’
“아마노가와라는 회사에서 광고료를 받았는데, 광고라기엔 조건이 엄청 널널해서…….”
정말로, 굉장히 좋은 조건이다.
그냥 뮤직비디오에 아마노가와 제품을 노출만 하면 된다니. 사실상 소품을 지원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광고료는 짜다. 노아, 리카, 에리카라는 톱아이돌(노아는 이견의 여지 있음)을 기용한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이건 그러니까…… 협찬이다.
협찬해주는 대가로 돈을 주는 것.
정말, 정말로 좋은 조건이다.
그런데 윤상열은 그딴 말 전부 머리에 안 들어왔다. 유빈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가 이마를 감싸 쥔 채로 물었다.
“다들 동의합니까? 카와이 베이스로 하는 걸……?”
리카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모찌에 론(당하고 연)이죠!”
“뭐요?”
“……당연하죠! 카와이 베이스는 저의 영혼이라구요! 유빈 선배님의 강렬한 통찰력엔 아타시(저)조차도 감탄했어요!”
윤상열의 머릿속에 어느 멜로디가 흘렀다.
‘송 포 피플’ 앨범의 첫 번째 트랙, 리카의 ‘에, 아타시? 소오, 아타시!’였다.
“에리카 씨는…….”
윤상열은 희미한 희망의 끈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로 에리카를 보았다.
에리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요.”
“협박이라도 당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에욧!”
리카가 성내는 것을 무시하고, 윤상열은 정지음과 강동현을 보았다.
“당신네들, 명색이 케이팝 프로듀서잖아. 이 불가해한 사태를…… 이 황금 같은 기회를…… 이딴 거에…….”
“그만하세요.”
말한 것은 유빈이었다.
윤상열은 뻣뻣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제 슬슬 분노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런데 유빈을 본 순간,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만하세요…….”
유빈의 눈시울이 차츰 붉어지고 있었다.
“제가.”
프로듀서가.
“결정한 거예요. 비판은 듣겠지만, ‘이딴 거’ 같은 비난은…….”
유빈이 감정을 추스르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삼가 주세요.”
“…….”
윤상열은 재차 오른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팍, 팍, 팍, 때렸다.
그걸 바라보는 노아의 입이 살짝 열려 있었다. 윤상열이 자신의 의견도 물을 줄 알고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듯하다.
노아는 모두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울분을 참는 유빈을 본 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기보다 훨씬 빛나는 리카가 주장하고, 자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에리카가 동의했으니, 자신 따위에게 발언권은 없을 듯하다.
노아는 아까 까먹은 아마이볼의 봉지를 부스럭부스럭 만져댔다.
* * *
가로 엔터 회의실.
A&R 3팀장이 된 이재호가 이젠 꽤 능숙한 프레젠테이션 실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주제는 올해 연말의 HPT 뮤직 어워드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에 홍콩에서 열렸었고, 올해는 일본에서 열린다는 모양이다.
매년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올해도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매년 가파르게 케이팝 규모가 성장하고 있으니, 그에 투자되는 비용도 따라서 상승하는 것이다.
“소녀연맹이 메인급 아티스트로 배정받았어요. 소련이들한테 할당된 시간이 무려 15분입니다. 세 곡을 연달아서 보여주는 것보다, 추가적인 요소를 넣어서 두 곡으로 구성하는 게…….”
이재호는 팀에서 나온 의견을 쭉 보여주었다.
거대한 무대 구조물과 무대 효과.
시간을 채울 VCR과 등장 시나리오.
혹은 아예 곡을 연극의 요소로 사용해서 15분짜리 단막극처럼 꾸민다는 등.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들뜬 게 눈에 보인다. 당연하다.
15분을 할당받았단 건 시상식의 메인 아티스트가 되었단 것이다. 뮤직 페스티벌로 따지면 헤드라이너다.
그 말은 즉, 소녀연맹이 대상(大賞) 후보로 지명될 거란 뜻이다.
드디어!
“음…….”
손혜빈은 서류를 뒤적였다. 그녀가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재호가 긴장했다.
“두 곡 중 하나는 당연히 ‘송 포 피플’일 거고, 나머지 하나는요? 생각해봤어요?”
“‘오토마타’면 정말 좋겠지만, 작년 시상식 무대도 오토마타여서 사골 느낌이 많이 나지 않을까 합니다. 오토마타로 상도 여러 개 받았으니까요. ‘송 포 피플’이 가벼운 분위기니까, 앨범 수록곡 중에서 진지한 분위기인 곡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데요.”
“어떤 거요?”
“그건 논의를 더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성필이 넌 어때.”
“……음?”
성필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손혜빈을 보았다. 곧 상황을 인지하고 급히 서류를 보았다.
“어…… 음…… 그렇지. 오토마타랑 애플 크러쉬를 쓸 순 없지. 올해는 타이밍이 안 맞긴 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1년에 2번 컴백을 기본 골자로 삼았다.
그런데 ‘송 포 피플’이 시작부터 워낙 대형 프로젝트였던 터라 발매일이 늦어졌다. 이어서 미국 투어도 있었으며, 곧 소녀연맹은 일본 컴백을 해야 하기도 한다.
올해 하반기는 소녀연맹에게 가혹했다.
게다가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렇지.”
손혜빈이 동의했다.
“효민 씨랑 웨이퍼센트랑 카오틱 에너지까지…… 기적이다 기적이야.”
어떻게 가로 엔터가 네 명의 아티스트를 한 해에 전부 데뷔·컴백을 총괄했는지…….
진실로 기적이었다. 회사 규모를 뛰어넘은 업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리카 프로듀싱까지 11월이나 12월에 딱 끝냈으면 ‘송 포 피플’이랑 합쳐서 무대 꾸미면 좋았는데. 아, 근데 탓하는 건 아니고.”
손혜빈이 성필의 어깨를 격려하듯 꾹꾹 주물러주었다.
“오히려 대단한 거지. 네 개야 네 개. 대형 기획사 본부급 부서도 못 하겠다. 심지어 다 성공이고. 해 넘기면 어때. 내년에 리카랑 아름이 합쳐서 시상식 제패하는 그림도 괜찮잖아. 우리 총괄 프로듀서님!”
“아 하지 마…….”
손혜빈이 귀를 검지로 만지작거리자 성필이 소심하게 저항했다.
“아무튼 뭐…….”
성필은 머릿속에 소녀연맹의 모든 곡을 떠올리며 말했다.
“곡 구성은 이번 주 내로 정하도록 하죠. 제가 애들이랑도 말해볼게요. 최대한 빨리 정할 거니까, 재호 씨도 팀이랑 좋은 조합 구상해보고요.”
“예.”
“저거, 페스티벌적인 분위기는 좋네요.”
성필은 서류 중 하나를 꺼내었다.
“보통 아이돌이 밴드 세션 쓴다고 하면 록밴드 구성이잖아요. 근데 금관 악기…….”
트럼펫과 색소폰 같이 밝은 느낌이 나는 세션을 구한다. 그럼으로써 밴드 악기로는 내기 힘든 가볍고 화려한 느낌을 낸다.
성필은 이것을 보자마자 놀이공원이 떠올랐다.
장하양은 놀이공원을 좋아한다. 이번 소녀연맹 시상식 무대의 주인공은 장하양이니, 이미지적으로도 꽤 괜찮다.
또, 치논이 생각나기도 했다. 금관 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녹음했던 치논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날의 기분이 다시 찾아왔다.
말로 표현하긴 힘든 기분이다. 긍정적인 단어를 전부 합쳐놓으면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좋아요 이건.”
“감사합니다.”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초조해하지 말고요.”
“예.”
이재호는 정말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성필이 총괄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그가 결정하느라 기한을 미루어 일을 그르친 적은 없다.
반드시 시간 내에 일이 해결될 거란 믿음이 있기에, 이재호는 불안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며, 손혜빈은 그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쳤다. 그리고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응? 뭐가? 내가?”
“요즘 계속 그러던데. 뭐라고 할까, 여자 답변 기다리는 남자 같아.”
성필이 흠칫했다.
“모야 모야. 나 몰래 연애 시작했어? 누군데? 드디어 애들이랑 맺은 맹약을 깼구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데?”
“……그냥.”
여자 답변을 기다리는 건 맞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답변은 아니다. 성필은 상대가 질문해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윤희연에게서.
성필은 그날 확신했다.
‘윤희연은 이 프로젝트에 꼭 참가하고 싶어 한다.’
마지막에 흘리듯이 전권을 주면 참여하겠다고 말한 게 단서다.
‘하고 싶지 않을 리 없지.’
프로듀서인 성필은 그리 확신했다.
윤상열부터가 그러했다. 그가 진심으로 노아를 돕고 싶어서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참여했을까? 절대 아니다.
‘프로듀서라면 군침을 흘리지 않고는 못 배길 기적 같은 기회.’
톱티어 아이돌 멤버들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윤상열마저 그러했다.
그런데 윤희연이, 업계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서 마침내 KS 엔터의 정점에 오른 그녀가.
‘이 일에 관심이 없을 리 없어.’
프로듀서로서의 욕망.
거기가 윤희연의 허점이다.
성필이 가만히 있으면 윤희연 혼자 몸이 달아서 연락해올 거다.
분명 그럴 거다.
분명 그럴 텐데…….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기미가 없으니…….’
성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을 본 손혜빈이 고개를 저었다.
“여자 맞구만.”
“나 1층.”
“뭐 먹게? 나도.”
윤희연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신경이 바짝 서버렸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겸 당류를 섭취할 생각이었다.
1층으로 내려오니 휴게 공간 소파에 리카와 유우토가 있었다. 유우토는 일렉 기타를 들고 있었고, 리카는 그의 곁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는 중이었다.
성필과 손혜빈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 해?”
“앗, 이사님!”
리카가 칭찬해달라는 듯 해맑은 미소와 함께 상황을 설명했다. 요컨대, 유우토에게 자신의 역할을 인수인계하고 있던 것이다.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문을 막고 신원을 물어야 해요! 유우쨩, 알겠지? 우리가 가로 엔터를 지키는 거야!”
“으, 으응.”
성필과 손혜빈을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문으로 향했다.
“흠, 누나. 왜 사장님은 여기에 데스크를 안 만드셨을까? 데스크 직원이 있으면 편할 텐데.”
“어차피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오면 아무나 직원이 와서 열어주면 되는 거니까. 우리 신사옥으로 옮기면 그때쯤엔 데스크가 필요하겠지.”
“뭐, 여긴 외부인한테 뚫릴 만한 문이 아니지.”
“그치.”
그때 현관문에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 문 앞에 선 것이다.
가로 엔터 직원이면 비밀번호를 누르고 바로 들어올 텐데, 그는 계속 문 앞을 기웃거리기만 했다.
그때 리카가 외쳤다.
“가, 유우쨩!”
“어, 어?”
“가라구!”
“어, 응.”
유우토가 문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외부인의 발이 문틈으로 슥 들어왔다.
“아, 고맙…….”
쾅!
유우토가 문을 어깨로 막았다. 반 팔로 드러난 그의 팔 근육이 수축하여 단단해졌다. 푸른 힘줄이 드러나는 팔로 문을 밀며, 그가 말했다.
“누구시나요!”
“잘한다 유우쨩!”
문으로 들어오던 외부인의 발이 콱 끼어버렸다.
유우토의 뒤에 선 리카는 옛날과는 다르게 폰에 정확히 112를 입력하고 있었다.
“이르믈 알…… 어?”
유우토가 천천히 밀리고 있다. 상대가 유우토의 몸무게와 힘을 이겨내고 문을 밀어내는 것이다.
유우토가 양손을 문에 대고 꽈악 밀었다. 그가 절박하게 외쳤다.
“비, 비상사태! 누나, 110(일본의 112)!”
“거긴 국민권익위원회야!”
“손나(그런)!”
마침내 문이 벌컥 열렸다.
튕겨 나가듯 뒷걸음질 친 유우토가 곧바로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타난 건…….
“온나(여자)……?”
유우토가 그녀를 보고 처음 느낀 감상은 ‘크다’였다. 가슴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거기도 크긴 하지만, 몸이 전체적으로 컸다.
키는 180cm가 넘어 보였다.
실루엣도 키에 지지 않았다.
정장 재킷으로도 그녀의 팔 굵기를 커버하기 힘들 정도다.
‘살이 많은 건가……?’
아니, 아니다.
저건 뼈가 큰 거고 근육이 발달한 거다.
무골(武骨)이다.
타고난 무인의 체형.
“아, 더워.”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재킷을 벗고 어깨에 걸쳤다. 흰 나시 티 하나에 정장 바지 차림.
비싸 보이는 구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옷에 무인을 연상시키는 체형.
대체 누구인가.
“앗!”
리카가 반응했다.
“누나, 알아?”
유우토의 물음에도 리카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릴 뿐이었다.
그때 여자가 리카를 보며 반색했다.
“오.”
솥뚜껑만 한 손이 리카에게로 향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끼에에엑!”
리카가 비명을 지르며 성필의 뒤로 숨었다.
유우토는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때 성필이 그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어, 그래요. 박 이사님. 이사님도 오랜만!”
솥뚜껑만 한 손이 성필에게로 향했다. 악수가 아니라 하이파이브를 하려는 것처럼, 손바닥이 성필의 얼굴과 마주 보았다.
성필이 떨떠름하게 그녀와 손을 맞추었다.
그 즉시 그녀가 성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괴상한 악수였다.
악수가 끝나고 성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종잇장처럼 꼬깃꼬깃 접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경련하며 ‘죽여줘……’라고 신음하는 듯했다.
“유우토, 인사드려.”
성필이 신음하는 손으로 그녀를 공손히 가리켰다.
유우토는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소개가 나오면 즉시 허리를 굽힐 준비를 마쳤다.
“우리 사장님의 언니분이신 홍연헌 사장님이셔.”
“안녀하세으엑?”
그 가냘픈 한 떨기 백합 같은 홍규헌 사장님의…….
“언니, 분?”
홍연헌이 사람 좋게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손이 위압적이었다.
“홍연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