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44화 (744/760)

744화

“일본…….”

윤희연이 상체를 살짝 틀었다.

다리를 꼰 것이다.

테이블 아래라서 성필은 볼 수 없겠지만, 상대가 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선 나오지 못할 자세다.

“그래서요? 소녀연맹이 일본에 있다. 그러니까 소녀연맹이랑 케이어스가 엮이면, 일본에서 케이어스에 대한 반향이 있을 것이다. 참…….”

윤희연이 비웃음을 흘렸다.

“케이어스 고혈 빨아먹으면서 성장한 프로듀서님다운 생각이시네요.”

케이어스의 고혈을 빨아먹는다.

이는 소녀연맹의 성장 배경을 지적한 것이었다.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 접점을 하나둘씩 드러내면서 인지도를 얻어왔다.

처음은 신아름과 김민주. 이후로 진저와 조아라, 에리카와 백설하, 진소유와 장하양의 친분이 생겨났다.

친구인 동시에 라이벌.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체급 차이이지만, 소녀연맹은 그러한 프레임 속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물론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의 뒤를 추격하는 성과를 계속 거두지 못했다면 의미 없었을 것이다.

단지 두 그룹의 멤버들이 친하다, 이 정도의 인식에서 끝났겠지.

하지만, 성필도 안다. 윤희연의 말마따나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의 도움에 힘입어 성장했다는 것을.

“뭘 이유로 들까 궁금했는데, 고작 하시는 말씀이 이런 거라니. 실망이 커요, 정말로.”

성필은 굳이 ‘말투가 지나치다’ 등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인간에게나 효과가 있는 말이다. 윤희연은 대놓고 성필을 열받게 하려고 저런 말투를 썼다.

그리고 성필은 딱히 반발할 필요가 없다.

윤희연이 이토록 극렬하게 성필의 제안은 깎아내리는 건 이유가 있다.

“효과가 있을 거란 덴 이견이 없지 않으십니까?”

성필의 제안에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윤희연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떻게든 성필이 쥔 패의 가치를 깎으려고.

윤희연이 코웃음 쳤다. 이번에도 과장된 태도였다.

“같이 곡 내는 걸로 인지도가 상승할 정도면, 아이돌이 데뷔할 때마다 선배 그룹이랑 컬래버레이션하면 되겠네요. 홍보 참 쉽네요.”

“신인급 뮤지션이 빌보드에 가장 빨리 입성하는 방법이 유명 가수의 피처링을 받는 거란 걸 모르십니까? 왜 음반사들이 인맥을 동원해서 피처링을 구하러 다니겠어요?”

“돈이라도 달란 거예요?”

“그냥 허락만 해주시면 됩니다. 에리카 씨의 음원 발매 활동을 허락해주세요. 이 자리에서 그냥 ‘알겠다’고 말씀만 하시면.”

성필이 테이블을 검지로 톡 짚었다. 장군이 지도 위에 깃발을 꽂는 것 같은 기백이 풍겼다.

“올해 KS 엔터 연말 파티에서 이사회 사람들한테 면 좀 세우실 겁니다.”

윤희연은 테이블 위에 깃발처럼 선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이어서 천천히 그의 눈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잘 들으세요, 박 이사님. 먼저, 케이어스가 굳이 소녀연맹이랑 엮일 필요가 없어요. 이젠 엮이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정호환 이사님의 실수가 그거였거든요. 케이어스에게 이득이 있어? 아니, 아니죠.”

윤희연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들은 어른 같았다.

“2등 그룹인 소녀연맹이 1등 그룹 케이어스의 수혜를 입는 거겠죠.”

명확히 순위를 가르는 표현에, 이번엔 성필마저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등 그룹?”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초동 판매량, 케이어스가 걸그룹 1위일 텐데요. 그 외에도 스트리밍 글로벌 청취자 숫자 다 합쳐도 케이어스가 소녀연맹보다 앞서고요. 이사님, 거의 다 따라왔다고 생각하시죠?”

윤희연은 성필이 했던 것처럼 테이블을 검지로 짚었다. 그리고 조롱하듯 톡톡 두드렸다.

“따라왔단 건 결국 졌다는 뜻이에요. 한 끗 차이란 건 변명이잖아요. 결국 이기지 못한 사람이 한탄하는 말이요.”

“그럼…….”

“더는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의 피를 빨도록 두지 않아요. 피를 빤다는 말이 심한가요? 그럼 바꿔서, 소녀연맹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시너지를 발생시키지 않으려고 해요.”

성필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하지만 그 사이로 말이 새어 나오는 일은 끝내 없었다.

눈매는 단호하지만, 저 단단함 안에는 반드시 좌절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그렇고말고.’

여자 앞에서 망신당하는 것만큼 남자를 움츠러들게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자신만만하게 에리카를 끌고 찾아왔는데, 이곳을 나가 돌려줘야 할 말이 ‘미안하다’라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창피할까.

물론 성필이 에리카에게 연심을 품고 있단 뜻은 아니다.

그러나 윤희연은 확신한다. 최소한 미혼 남성인 이상, 아니, 기혼 남성이더라도 에리카와 마주할 때는 이성적인 긴장감을 느낄 것이다.

남자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할 거라고, 윤희연은 믿었다.

‘그건 아주 자그마한 차이.’

에리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아주 자그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무시할 만한 차이는 아니다.

그래서 윤희연은 현재 성필을 거의 절망에 빠뜨리고자 했다. 자신이 내밀 동아줄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도록.

“케이어스가 일본에서 영향력을 계속 확대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성필은 질문했다.

질문이지만, 그건 윤희연에게 하는 부탁과 비슷했다. 제발 그녀가 품은 사고방식을 조금만 바꿔달라고.

윤희연은 그의 화법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수룩해서 귀엽다.

“당연하죠. 지금까진 일본 활동에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을 뿐이에요. 케이어스가 본격적으로 글로벌에 진출하는 건 3.5년 이후라고 정해뒀으니까요. ‘스피너 뮤직’과의 계약도 그 연장선이죠.”

소녀연맹이 미국 시장에서 뒷배로 둔 ‘레버 레코드’처럼 글로벌 3대 유통사다.

“잊으신 건 아니죠? 케이어스는 일본 데뷔 때 앨범을 10만 장 판 그룹이에요. 상승이 완만하지만 증가하고 있고, 지금부터는 훨씬 더 상승 폭이 클 거예요. 소녀연맹처럼 일본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해마다 2·3개월씩 죽어라 일본에서 활동하지 않아도요. 참 힘들겠단 생각이 들어요. 회사가 힘이 없으면 아이돌이 저렇게 고생하는구나 싶어서요.”

윤희연은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이젠 그냥 카페에서 만난 친구를 대하듯 성필을 대했다.

“사무라이 걸즈. 그걸로 웨이퍼센트 홍보에 득 좀 보셨죠? 진짜, 사방이 다 막혔었는데 잘도 뚫으셨어요. 그래서 이번엔 뭐가 필요하신 건데요?”

“…….”

성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이제 어떡할까.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갈까. 아니면 이왕 틀어진 김에 거하게 욕이라도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애걸복걸할까.

아니, 전부 아니다.

‘넌 그런 남자가 아니야.’

저 얼음장 같은 표정 안에선 지금도 수읽기가 진행 중일 것이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거든.’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고작 십수 분 남짓 지났을 뿐이다. 겨우 십수 분의 엇갈림, 사소한 실패 따위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답이 없겠지.’

열쇠를 쥔 건 윤희연 자신이니까.

성필이 하나의 카드를 들고 아무리 골머리를 썩여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윤희연이 새로운 카드를 뒤집어야 비로소 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카드는 윤희연에게도 길이었다.

윤희연이 저녁 있는 삶을 포기하고 이곳에 달려온 이유가 있다. 그녀에겐 이 자리에서 얻고 싶은 명확한 목적이 있다.

‘사무라이 걸즈의 프로듀싱 권한.’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를 보고 윤희연은 가슴이 뛰었었다.

문규완은 그 사태를 보고 성내며 윤희연을 찾아왔었다. 웨이퍼센트를 죽이고 가로 엔터에게 상처를 입힐 셈이었는데 그게 엎어지게 생겼으니, 화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

그가 물었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때 윤희연은 이렇게 답했었다.

맛있겠다.

‘돌판에 관심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꿈꿔봤을 법한 꿈의 컬래버레이션…….’

각 그룹의 에이스를 뽑아 만든 팀.

물론 에리카와 리카에 비해 노아인지 뭔지 하는 아이의 가치는 매우 떨어진다. 그렇지만, 에리카와 리카가 한자리에 모였단 게 어디인가?

‘안 되지, 안 돼. 고작 KS 엔터 직원을 보내 한 발 멀리서 감독하는 정도론 만족 못 하지.’

윤희연 본인이 끼고 싶다.

그리고, 에리카가 사무라이 걸즈에 있는 한 윤희연이 참여할 명분은 차고 넘친다.

“만약.”

윤희연이 쐐기를 박았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느슨한 자세와 달리 올곧은 눈빛이 그에게로 박혔다.

“KS 엔터에 감독권을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성필의 눈썹이 꿈틀댔다. ‘감독권’이란 단어에 서린 뉘앙스를 예민하게 캐치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되물었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한 최악의 사태가 아니길 빌면서.

윤희연은 비굴함이 언뜻 엿보이는 그의 태도에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감독권이라고 하면…….”

“최종결정권으로 번역해볼까요.”

윤희연의 OK 사인이 없고선 무엇 하나 허용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을까요? KS 엔터의 간판인 케이어스, 그 리더가 엮인 일이잖아요.”

“소녀연맹의 리카도 있습니다.”

“글쎄요, 부탁하러 오신 분이 누구였죠.”

“동업자로서의 지위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동업자이니 겸허하게 의견을 받아들이겠죠.”

“합의? 아뇨. 제 말씀 새겨들으세요. 절대 변하지 않을 조건이니까요. KS 엔터가 결정합니다.”

성필의 눈매가 조금씩 조금씩, 종이접기 기술자가 섬세하게 종이를 접어가듯이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명확한 변화를 보이며 가늘어졌다.

마치 배우가 세밀한 감정을 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윤희연은 성필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조건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설마 KS 엔터의 프로듀싱 능력을 의심하시는 건 아닐 테고. 걱정되는 건 역시 이사님의 권력인가요?”

“네?”

“다들 그러더라고요. 영향력이 줄어드는 걸 소름 돋을 정도로 싫어해요. 그게 자기 목숨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윤희연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바라시는 대로. 용건은 끝인가요?”

성필이 일어났다.

“끝입니다. 가보겠습니다.”

“배웅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성필이 집무실을 나섰다.

윤희연이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반드시 다시 연락이 올 거다.

그러고선 윤희연을 설득해서 조건을 더 가볍게 가져가려고 하겠지.

그때 바짝 엎드린다면 뭐…….

‘조금은 봐줄 수 있어.’

그때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 * *

에리카는 비서 데스크 쪽에 앉아 있었다.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도중 문이 열렸다.

에리카가 일어나 열린 문을 보았다. 성필 혼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에리카는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만약 이야기가 잘 풀렸다면 성필이 윤희연의 배웅도 없이 나올 리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역시나 성필은 사과부터 했다.

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에리카는 죄가 자신에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신발 끝이 죄 없는 바닥을 가볍게 톡톡 찼다.

“귀한 시간 내서 와주셨는데 성과가 없어서, 오히려 제가 죄송한걸요.”

“에리카 씨, 마음은 변함없으십니까?”

마음.

사무라이 걸즈에 대한 것이다.

“정식 음원 발매가 아니라 믹스테입이더라도, 열정이 변치 않으시겠습니까?”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뜨렸다.

성필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매우 진지했다. 아마, 이건 에리카가 웬만해선 볼 수 없는 그의 일면일 것이다.

프로듀서로서의 성필.

“원래부터 그런 계획이었잖아요. 변하지 않아요.”

“그럼, 알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빠지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저만 없으면 유빈 선배가 투자를 받으실 수 있잖아요.”

“노아가 했던 말 잊으셨어요?”

에리카는 발치에서 성필에게로 눈을 옮겼다.

말투와 달리 온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다는 것처럼, 그의 입에 인자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것을 보자, 에리카는 불안이 녹아내렸다.

“‘사무라이 트윈즈’가 될 순 없어요.”

* * *

이젠 밤이 꽤 깊었다.

그런데도 RRBKZ 아지트엔 여럿이 있었다. 자차를 몰고 돌아간 조아라를 제외하고, 원래 있던 멤버들이 모두 모여 있다.

성필은 사태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해졌다.

“예상은 했어요…….”

유빈은 쓴맛을 곱씹었다.

에리카는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혹여나 유빈이 자신을 사무라이 걸즈 계획에서 쫓아내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다.

“뭐, 별로 상관없어요.”

유빈이 산뜻하게 말했다.

“어차피 투자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요. 0이 또 0이 됐을 뿐이에요.”

“조금 아쉽군…….”

노아는 ‘아마이볼’의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마노가와’의 광고를 받으면 아마이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을 거 아닌가.”

“아마이볼 정도야 제가 가끔 사드릴게요. 뭐, 분위기가 이렇게 됐지만, 뭐, 암튼, 잘해봅시다 앞으로!”

유빈이 박수를 쳤다.

세 사람이 그를 따라 어색하게 박수를 쳤으나, 곧 그치고 말았다. 유빈도 뻘쭘하게 손을 내렸다.

그 순간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성필이었다.

“맞아.”

그가 박수를 멈추었다.

“유빈이가 옳아. 0에서 0이 된 거에 불과해. 3,000만 원. 빠듯한 돈이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유빈아.”

“아, 네, 이사님.”

“나한테 재정을 맡겨줄 수 있어?”

“이사님이요? 이사님이 그런 잡일을…….”

“잡일이 아니야. 돈을 관리하는 건 프로듀서의 중요한 일 중 하나야. 머릿속에 든 것을 현실에 구현한다. 당연히 주어진 돈에 한해서.”

성필이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상상을 구현하는 한계는 상상력의 크기보다 돈에 더 좌우되거든. 그리고 난 이런 열악한 상황을, 옛날에 질리도록 겪어봤어.”

석세스 엔터 초창기의 일이다.

과거, 아이돌은 흔히 3년 차까지 수익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일반적으로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게 3년인 시점이라고.

그러니 주어진 돈을 계속 까먹기만 하는 일이 이어진다. 단순히 프로듀싱에 국한된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이돌이 돈을 벌어들인다면, 일단 가장 먼저 회사 시설과 인력을 유지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

프로듀싱과 관련 없는 것에 계속 돈이 빠져나가는 상황 속에서, 프로듀서는 항상 기적을 만들어내길 기대받는다.

“물론 내가 프로듀서는 아니었지만, 석세스 엔터 초기엔 정말이지 심각했으니까. 거의 모든 직원이 프로듀서나 다름없었어. 가난한 상황 속에서 최고의 효율을 뽑는 방법을, 싫어도 배워야만 했어. 만약 유빈이 혼자였다면 프로젝트 도중에 자금이 사라져서 끝났을지도 모르지만.”

성필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그러니까 유빈아, 나한테 자금을 맡겨줘. 돈을 쓰는 일에 관한 모든 교섭도.”

“하지만, 이사님…….”

유빈은 황송함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평소엔 계절을 만난 꽃과 나무처럼 총천연색을 자랑하는 그의 분위기가, 지금은 수묵화처럼 진하고 검었다.

그는 미안해하고 있다.

“그건 정말…… 이사님을 제 보조로 쓴다는…… 그런 개념이잖아요…….”

가로 엔터 총괄 프로듀서.

기적을 만들어낸 프로듀서에게, A&R팀에게 시킬 법한 거의 모든 일을 위임하는 거다.

누가 그런 사치를 부릴 수 있겠는가.

홍규헌?

안타깝게도 유빈은 홍규헌이 아니다.

“제가 어떻게…….”

따지자면 유빈은 성필에게 은혜를 입었다. 갚을 수 없는 은혜다.

그런 은인에게, 자신의 욕망에서 생겨난 이 프로젝트의 잡일을 맡기겠단 거다.

심지어 무보수로. 유빈이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이런 짓은 못 한다.

그에 성필이 간단히 답했다.

“네가 어때서. 유빈이는 가로 엔터 식구잖아.”

유빈이 울컥했다.

그는 ‘잠시만요’라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다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이야기를 이었다.

“네가 하고 싶다니까, 도와주고 싶어.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는 거야.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또 여기 다른 식구인 리카도 있잖아.”

“덤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소녀연맹을 여러 차례 도와주신 케이어스의 에리카 씨도…….”

“‘썸이 1호로서 팬이 되기로 맹세한 에리카 씨도 있고’ 아닌가요?”

“……에리카 씨도 있고. 또.”

성필이 노아를 보았다.

노아가 큰 눈을 깜빡였다.

“노아도 있고.”

“이상하게 내 설명만 짧은 기분이 든다.”

“그냥 노아도 있고.”

“두 배로 길어지긴 했는데 더 초라해졌잖나…….”

성필이 짓궂은 미소와 함께 재차 말했다.

“내가 직접 연습생으로 뽑았던 노아도 있고.”

“에, 박 이사님이 직접 뽑으셨나요!”

“응.”

리카가 노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노아는 그 시선의 의미를 몰라서 그냥 자랑하기로 했다.

“박 팀장이 뽑았다! 아, 박 이사가 뽑았어!”

“아타시(저)도요!”

“오, 동지다!”

“네.”

“……?”

묘하게 답변이 칼 같아서, 노아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했다.

“아무튼, 유빈아. 허락해줄래?”

유빈이 감동하여 목소리가 떨렸다.

“허락해주고 말고 할 게 어딨어요……. 감사하단 말씀밖에는 진짜……. 제가 가로 엔터 크리에이티브 파트 이사 자리에 앉을 때 무조건 박 이사님 의견에 동조할게요.”

“그 자리는 제 건데요?!”

“꼭 그럴게요…….”

“무시?!”

사무라이 걸즈, 믹스테입 프로젝트로 복귀!

“아, 좀 심심하네. 구호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구호를 생각해왔소.”

“오, 역시 노아. 뭔데?”

“칼 아래는 지옥, 한 걸음 앞은 극락.”

“……무슨 뜻이야?”

“아아, 모르는 건가.”

고지능자 노아는 오랜만에 본인의 지식을 자랑할 기회가 오자 한껏 기세등등해졌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칼을 맞으니 움직이란 뜻이다. 무사시의 ‘오륜서’는 현대인의 필독 목록(노아 기준)에도 있으니 꼭 읽어야만 한다요.”

“울림이 있는 말이네. 리스크를 감수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란 뜻이구나.”

심지어 무사시가 감수했을 리스크는 목숨이었을 테니, 그야말로 그의 뼈와 살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사무라이 걸즈 이름에도 맞고 우리 상황에도 맞다. 어떤가.”

다들 그 구호를 부끄러워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유빈만은 달랐다.

“좋은데요?”

에리카와 리카가 진심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유빈은 굴하지 않았다.

20대 중반. 한창 사무라이와 닌자가 좋을 때다.

“그럼 노아 씨가 선창해주실래요?”

“서, 선창?”

갑자기 노아가 쭈글쭈글 찌그러졌다.

“내, 내가 리더나 할 법한 그런 일을 해도 괜찮은 겐가……? 여, 여기 진짜 리더도 있는데…….”

쭈뼛쭈뼛 노아가 에리카를 공손히 가리켰다.

에리카는 선선히 그녀에게 선창 권한을 넘겼다.

“노아 씨가 생각하셨으니까요.”

노아는 용기를 구하듯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노아. 사무라이가 되렴.”

“아, 알겠다. 나한테 이런 순간이 오다니…….”

노아는 심호흡하곤 손을 앞으로 뻗었다.

유빈과 성필이 그곳에 손을 겹쳤고, 리카와 에리카가 머뭇거리며 손을 가져갔다.

노아는 세상에서 가장 신난 사람처럼 외쳤다.

“칼 아래는 지옥!”

“한 걸음 앞은 극락!”

“그, 극라악…….”

“극락…….”

리카와 에리카는 구호의 마지막만 겨우 말했다.

성필은 리카가 이런 것을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다. 의외로 진지하게 오글거리는 문장은 면역이 없는 것일까.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인 시세리의 대사는 잘만 말하던데.

“고(GO) 사무라이 고!”

노아가 또 신나서 정하지도 않은 구호를 외쳤다. 성필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과 함께 물었다.

“그건 뭐야?”

“그냥 신나서 말해봤다.”

성필이 또 웃었다.

에리카는 성필의 유머 코드를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다. 하하 입매는 웃고 있지만, 성필처럼 노아의 재롱에 진심으로 웃진 못했다.

그래, 웃지 못했다.

리카도.

* * *

윤희연은 자신의 앞에 올라온 칩을 만지작거렸다. 정신 사나운 행동이지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박판에 올라온 사람이 편집증적인 행동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카지노가 아니라 홀덤펍이긴 하지만.

윤희연은 한숨을 쉬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어 보았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남자 답장 기다리시나 봐요.”

윤희연이 옆을 흘끗 보았다.

남자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꽤 자주 봤을지도 모른다. 얼굴이 눈에 익다.

잠시 후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얼마 전, 윤희연이 성필을 만나러 가기 직전. 일부러 칩을 잃으려고 올인했을 때 같이 올인했던 남자다.

둘 다 원 페어가 나와서 비겼었지.

이 남자도 단골인 터라 얼굴이 대강 눈에 익었다.

윤희연이 몇 번인지도 모를 정도로 폰을 꺼내고 보고 넣고를 반복하자, 남자는 궁금했는지 질문을 던진 것이다.

흘깃 봤을 땐 20대 정도로 젊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세월이 얼굴에 새겨져 있다.

윤희연 자신보다 살짝 어린 정도인가.

“음.”

윤희연은 석연찮게 답했다.

“남자가 맞긴 하죠.”

“싸웠어요?”

“싸우긴요. 그냥 원하는 대로 움직이질 않네요.”

“잔인하네요.”

“……잔인하다니, 뭐가요?”

“여자들은 남자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잔혹하게 변하곤 하잖아요. 항상 증명하길 바라는데,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입니다.”

윤희연이 칩을 테이블 위에서 굴렸다.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런 남자는 없는 거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냥 제 경험이라서.”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 - 하나호

전생에서 못 이룬 아이돌 프로듀서의 꿈

이번에는 내 손으로 만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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