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43화 (743/760)

743화

“카와이 베이스가 어때서!”

“카와이 베이스 때문에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것도 충격적이긴 하지만, 일단…….”

리카와 에리카의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노아는 그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성필은 그녀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고 어느 한 지점에 집중했다.

‘일본 관광청이라고?’

이상했다.

관광청이 사무라이 걸즈에게 일본 문화 홍보를 위한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요청했다고?

성필이 알기로 일본은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부서가 따로 존재한다.

90년대 영국의 ‘쿨 브리타니아’를 본떠 이름을 지은 ‘쿨 재팬’ 프로젝트라는 게 있다. 그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쿨 재팬실(室)’이란 부서는 관광청과 완전히 딴판인 곳에 소속되어 있다.

바로 경제산업성이다.

관광청이 소속된 국토교통성과 아예 다른 흐름에 존재하는 곳이다.

‘왜 경제산업성이 아니라 국토교통성이?’

딱 봐도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껴 있을 듯하다.

추측해볼 만한 것으로는, ‘쿨 재팬’은 어디까지나 일본 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방편이니 케이팝 아이돌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는 수상할 정도로 한식을 홍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쿨 재팬’의 성공에 영감을 받은 한국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이 진행한 것이었는데, 현재는 ‘돈만 버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때를 현재 상황에 대입하자면, 한식을 홍보하려고 유명한 한국인 일식 요리사를 쓸 수 없는 것과 비슷하리라.

‘리카, 에리카, 노아 세 명이 일본인이라도 케이팝 아이돌이니까.’

그래서 ‘쿨 재팬실’은 대외적인 홍보가 목적이지만, 사무라이 걸즈에게 제안을 할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으로의 관광객 유치가 목적인 관광청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케이팝 아이돌이든 뭐든, 관심을 끌려면 못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인가?’

성필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얽히면 인생의 장르가 엔터테인먼트 오피스물에서 오피스 스릴러로 바뀔 것만 같다.

유빈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조심 의견을 개진하려던 순간, 에리카가 아까와 전혀 다른 어조로 말했다.

“정부(政府)와 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에리쨩은 알아?”

“나도 잘은 모르지만, 기업과는 차원이 다를 거야. 차원이 다르게 깐깐할 거라고.”

그녀는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듯했다.

성필도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번쩍였다. 그리고 에리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맞아. 공무원 사회는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와 자발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중간의 누가 책임진다는 개념이 이뤄지기 힘들어. 만약 이 일을 받으면, 책임자라는 사람은 우리랑 결정권자 사이를 진짜 전서구처럼 왔다 갔다 하기만 할 거야.”

그리고 결정권자는 일선에서 떨어진 인간이다. 또한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이 알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더 넓은 시야에서 판단할 것이다.

그 괴리감을 조율하는 게 중간 관리자이다.

하지만 기업처럼 명백한 공치사가 존재하기 힘든 공직 사회에선 제대로 된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결정권자가 하달하는 지침을 받고, 받고, 받고, 받다가, 결국 우리가 원하는 형태랑은 전혀 다른 결과를 받게 될 수도 있어.”

성필은 유빈을 달랬다.

“유빈이 네가 제작비로 얼마를 지원받았는지 모르고, 이후에 조율이 어떻게 이뤄질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이래. 안 받는 게 나아.”

카와이 베이스에 꽂혀 있던 리카가 시무룩한 티를 냈다. 또한 왠지 모르지만 노아가 밝아졌다.

그리고, 가장 풀이 죽어야 할 유빈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유빈이 씩 웃었다.

“또 다른 후원자가 있어요.”

이 순간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듯 상쾌한 어투였다. 그때, 성필은 왜 유빈이 하필 오늘 자신을 불렀는지 눈치챘다.

‘허락을 받으려고.’

유빈이 꺼낼 두 번째 후원자의 조건도 이전 것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게 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원 발매’겠지.

그리고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음원 발매라는 목표가 추가된다면, 이는 더 이상 믹스테입 프로젝트가 아니다.

본격적인 비즈니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리카가 정식으로 음원을 내기 위해선 내 허락이 필요할 테니까…….’

이 자리에 부른 거다.

물론 이는 조언을 받으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유빈은 투자자가 낀 상황에서 일을 진행한 적이 없을 테고, 그건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진정으로 성필의 도움이 필요한 때다.

‘당돌하네.’

나중에 결정한 뒤 성필에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아예 의사결정과정에 끌어들이다니.

“어딘데?”

성필이 물었다. 유빈을 기특하게 여기는 투였다.

그러자 유빈의 태도가 바뀌었다. 아까는 우스울 정도로 진지했다면, 이젠 약간의 긴장을 머금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라는 게 확 느껴진다.

“‘아마노가와’라는 기업이에요.”

처음 들어본다.

유빈은 ‘아마노가와’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매출액으로 보자면 석세스 엔터보다 조금 더 큰 곳이었다.

“뭘 파는 기업이야? 우리가 홍보해야 할 건?”

리카, 에리카, 노아의 눈이 성필과 유빈 사이를 번갈아 이동했다.

어느새 성필이 사무라이 걸즈의 책임자라도 된 것만 같았다. 유빈은 그 책임자에게 기획을 허락받으려고 애쓰는 A&R 직원처럼 변했다.

“이겁니다.”

유빈이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봉지를 꺼냈다. 노아가 ‘아!’ 놀라며 말했다.

“아마이볼!”

노아가 아까 계속 먹던 과자다.

“아마노가와는 과자를 만드는 기업이에요.”

“만드는 회사 이름은 처음 안다. 아마이볼을 만드는 회사 이름이 이렇게 멋질 줄은 몰랐어.”

노아는 ‘아마노가와’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성필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은하수’라고 한다.

확실히 과자를 만드는 기업치고 굉장히 낭만적이다.

“조건은 아까와 거의 같습니다. 음원 발매. 뮤직비디오 제작. 그리고 홍보 주제는 아마노가와의 과자들. 굳이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여도 되고, 가사에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뮤직비디오에 아마노가와사(社)의 과자가 노출되어야 합니다.”

“곡 주제가 훨씬 다양해지겠네. 사랑을 과자의 달콤함 같은 걸로 표현해도 되겠고. 노아가 어릴 때 먹었다는 과자니까 추억을 주제로 삼아도 되겠고.”

“아, 네. 맞아요.”

유빈은 자신이 설명하려던 것을 성필이 먼저 말하자 살짝 당황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확 잘려서, 다음 말을 꺼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음식을 메타포로 쓰는 아이돌 노래가 꽤 있잖아요. 소녀연맹 후배님들의 ‘애플 크러쉬’도 그랬고, 븨이에스 선배님들의 ‘아이스 온 레드’도 대표적으로 떠올라요.”

“관광송보다는 낫다.”

유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카와이 베이스와도 잘 어울려요.”

그엔 성필도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카의 성화에 못 이겨 성필은 카와이 베이스 곡을 십수 개 정도 들었다. 자주 쓰이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중 ‘아마이(달다)’도 포함됐다.

아무튼 카와이 베이스는 귀엽고 달콤하다.

“이게 제가 예산 문제를 해결할 방법입니다.”

“그냥 묻는 건데, 후원자는 어떻게 찾은 거야?”

“사무라이 걸즈 이미지에 맞는 곡을 만들 수 있을 법한 기업들에 전부 연락을 돌렸어요.”

“일본 관광청은?”

“혹시 몰라서 관련 부서에 연락했어요. 그랬더니 반신반의로 되게 짠 금액을 제시하면서 이것도 괜찮겠냐고 하더라고요. 진심이 아닌 거 같았는데…….”

“어차피 연말에 남아서 이상한 데 쓸 예산을 시험 삼아 주려던 거겠지.”

모든 정부 부서는 필요가 있든 없든 최대한 많은 예산을 타내려고 한다.

빠듯할 때도 있지만, 역으로 많이 남을 때도 있다.

그러면 하반기에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엎는 것 같은 사태가 매년 벌어지는 것이다.

만약 예산이 넘친다는 게 판명되면, 이후로 예산을 얻어내기 더 힘들어질 테니 어디에든 돈을 뿌린다.

“받아들일 생각 없는데 굳이 언급한 건 그거야? 한 번 거절하면 뒤의 부탁을 들어줄 확률이 높아지는 거?”

“그렇게 콕 집어서 말씀하시면 제가 되게 약은 거처럼 보이는데요…….”

“약은 거 맞아 임마.”

성필이 장난으로 어깨를 툭 치자 유빈이 헤헤 웃어 보였다.

“지혜 씨도 놀라겠네.”

가로 엔터 홍보팀 강지혜도 유빈과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손혜빈의 지시에 따라 소녀연맹을 홍보해줄 기업을 찾아다녔었다. 덕분에 ‘어바이비’와 ‘후쿠요 히다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은 강지혜가 들었더라도 놀랄 것이다. 유빈은 저돌적이기 그지없었다.

‘다짜고짜 앨범 만들겠답시고 은행 대출 받으려 하고 파티 참여한 것부터 알아봤지만.’

그에겐 실행력이라는 재능이 있다.

“어떠세요……?”

“유빈아, 알겠지만,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음원 발매’가 되면 더는 믹스테입이 아니야. 리카의 공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거니까, 가로 엔터가 정식으로 개입해야 해. 괜찮겠어?”

유빈은 성필이 이 프로젝트에 발을 들이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었다.

검증된 프로듀서인 성필이 참여한다면, 다들 유빈보다 성필을 의지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런데 유빈은 그런 심정을 전부 벗어던지고 성필에게 손을 내민 거나 다름없었다.

그 결심이 거짓은 아닌 듯, 그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사과와 부탁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네, 오히려 박 이사님께 괜찮으시냐고 여쭈어야겠죠. 자금이 충분해지는 걸 넘어 많아지면, 저로선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성필은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나보다 다른 애들의 이야기를 들어야지.”

“아타시(저)는 찬성이에요!”

리카가 곧바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동의는 그녀가 끝이었다.

유빈이 당황하여 다른 이들을 보았다.

노아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록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유빈이 안건이 있냐고 물었을 때 모든 멤버가 손을 들었었다.

아마 사무라이 걸즈의 스타일, 즉 록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노아는 탬버린까지 배우며 밴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었다. 그런데 장르가 1,080도 회전하여 카와이 베이스가 되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아, 그, 록 하고 싶어요……?”

노아가 검지를 맞부딪치며 턱 끝을 내렸다. 자기주장 없는 소심함이 돋보였다.

평소 천방지축인 노아를 떠올리면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유빈은 바로 답변을 내리기 힘든지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이번엔 노아 대신 에리카를 쳐다보았다.

에리카는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바로 말했다.

“원래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젠 할 필요가 없겠네요.”

“네?”

“더 큰 문제가 있으니까요. 정식 음원 발매로 목표가 바뀐다면, 저는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어요.”

유빈과 리카, 노아가 동시에 움찔했다.

이렇게나 쉽게 에리카의 입에서 탈퇴 의사가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왜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저는 꼭 이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단 거예요.”

“그럼 어째서…….”

“회사에서 허락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정호환 이사님이 계셨을 때라면 몰라도, 윤희연 이사님은 절대 허락해주지 않을 거예요.”

“저어, 제가 잘은 모르지만 정호환 이사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법조계도, 나쁜 예시이긴 한데, 전관예우 같은 게 있잖아요. 아직 영향력이…….”

“생사불명(生死不明)이세요.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도 몰라요. 사라지신 이후로 KS 엔터엔 완전히 발길을 끊으셨어요.”

에리카는 분한 기색으로 입술을 꽉 물었다.

“…….”

그걸 본 성필은 시선을 에리카에게서 약간 돌렸다. 정호환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그로선 에리카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에리카는 꼭 정호환이 죽은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한 말투에서 에리카의 상실감이 짙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죄송해요. 저는 반대할 수밖에 없겠어요. 물론 유빈 선배님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해요. 예산이 부족하단 건 큰 단점이지만, 그렇기에 믹스테입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에리카 씨.”

성필이 그녀를 불렀다.

“저도 유빈이처럼 KS 엔터의 사정을 잘 몰라요. 그런데, 설득이라는 선택지는 없나요?”

“윤희연 이사님을요?”

에리카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나지막한, 그래서 쓸쓸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사무라이 걸즈 믹스테입 프로젝트가 광고된 후 문규완 회장에게 불려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만약 사무라이 걸즈가 정식 음반 발매 프로젝트가 되면, 아예 이사회에 불려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고백하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획사의 이사인 성필이 이 정도 애로사항을 모를 리 없을 테니.

“하암.”

조아라가 하품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즉시 입을 틀어막고 헛기침했다.

“아…… 커피라도 사 올까요?”

“아타시(나)랑 가자!”

리카가 조아라의 팔짱을 끼며 일어났다.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노아는 탬버린을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에리카는 일본 활동으로의 피로 때문인지 눈두덩을 손꿈치로 꾹꾹 눌렀다.

성필은 피곤한 에리카를 자극하고 싶진 않았지만,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에리카 씨.”

“네, 이사님.”

에리카가 곧바로 피곤한 기색을 지웠다.

“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셨어요?”

“왜 이 프로젝트에……?”

이전에 말해주지 않았던가.

에리카의 솔로 데뷔 때 프로모션 용도로 쓰면 좋겠다고 말이다.

“제 생각으로는 에리카 씨가 굳이 사무라이 걸즈를 할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요. 왜냐하면, KS 엔터의 프로모션이라면 굳이 사무라이 걸즈라는 소재 하나 정도 없어도 되니까요.”

케이어스는 멤버가 순서대로 솔로 데뷔한다는 계획이 있다.

그 첫 번째 타자로 진소유가 데뷔했다. 그리고 여성 아티스트 초동 판매량 1위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지 않았던가.

분명, 에리카의 솔로 앨범은 그보다 더 엄청난 성적을 거둘 게 분명하다.

“솔로 데뷔 프로젝트에 집중하시는 쪽이 낫다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해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성실하게 참여하시는 건가요?”

에리카는 말을 아꼈다.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윤희연 이사가 총괄직에 앉음으로써 거의 박살 났다.

회사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에리카는 스스로 발품을 팔아 프로모션 수단을 찾았고, 그게 사무라이 걸즈였다.

‘그런데 그걸 말하면 내가 너무 속물처럼 보이잖아…….’

에리카는 과거와 같은 후광을 억지로 흉내 낼 뿐이다. 그 거짓 후광이 벗겨지고 허름한 배경이 드러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RRBKZ 아지트에 올 때마다 활기가 넘쳤던 유빈이나, 아이돌로서 같은 선에 서고 싶다며 허리를 숙였던 리카,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곳에 꾸준히 나오는 그냥 노아에게 미안하다.

“만약.”

성필은 에리카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계속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에리카 씨가 믹스테입 프로젝트를 허락받은 거라면 거기엔 분명 의미가 있을 거예요.”

“의미요?”

“에리카 씨가 부산으로 가셨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정호환 이사님이 믹스테입 제작조차 반대하셨을 때요. 유희연 이사님은 그때의 정호환 이사님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신 분은 아니란 거죠?”

“아마도요.”

“그런데도 가만히 놔둔다면, 윤희연 이사님께 어떤 계산이 있는 거 아닐까요?”

에리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가 시작됐을 때 문규완 회장님이 나를 직접 부르셨었어. 아마도 나를 질책하려고. 그런데, 윤희연 이사님은 왜?’

어째서 에리카에게 일언반구도 없었지?

“거기가 파고들 구멍일 거예요.”

“……확실히, 거기가 윤희연 이사님의 구멍이겠네요.”

“…….”

곁에서 듣는 유빈은 둘의 단어 사용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본어로 ‘허점’을 ‘아나(구멍)’라고 표현한단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둘의 태도가 워낙 진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인인 노아도 둘의 대화에 담긴 한국어적 뉘앙스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결국 단어 사용을 지적하면 유빈만 이상한 놈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일까요?”

에리카가 묻자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저야 모르죠. 에리카 씨가 알아보실 수 없을까요?”

“제가요……. 도저히 그런 그림이 안 그려져요. 제가 윤 이사님을 추궁해서 해답을 얻는 거요. 애초에 설득이란 게 가능이나 할지…….”

성필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답답함 때문에 머리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제가 설득해볼 수 있을까요?”

“박 이사님이요? 가능하시겠어요?”

에리카는 성필의 제안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제안을 하는 게 성필이기에 깊은 희망을 가지게 됐다.

“프로듀서의 마음은 프로듀서가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마주 보고 대화하면 뭔가 건지는 게 반드시 있을 거예요.”

에리카는 고민했다.

만약 이 일이 윤희연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리고 귀에 들어가게 만드는 주체가 자신이고, 설득의 주체가 성필이라면.

과연 윤희연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최고의 결과는 윤희연이 허락하는 거고, 최선의 결과는 윤희연이 거절하더라도 앙금을 품지 않는 거다.

최선이 그 정도라고 생각될 수준으로 에리카는 윤희연이 껄끄러웠고 거북했다. 그녀는 에리카에게 인간적인 친절함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네.”

하지만, 에리카는 받아들였다.

윤희연에 대한 불안감보다 성필에 대한 신뢰가 더 컸다. 자신도 왜 이렇게 성필을 믿는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믿었다.

논리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지극히 감정적이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부탁드릴게요.”

“좋아요. 그럼 회사의 중역끼리 비즈니스를 논하는 자리가 되겠네요. 마땅히 예의를 취해야 할 텐데, 누구를 통해야 할까요?”

“저희 매니지먼트 팀장님이 계세요.”

“언제 말씀드릴 수 있나요?”

“오늘…… 저녁쯤엔 보고가 갈 거 같아요. 잘은 모르지만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저도 준비할게요.”

“감사합니다.”

에리카는 벌써 일이 전부 해결된 것처럼 말했다.

“아, 그런데 그 전에.”

성필이 유빈을 보았다.

유빈은 조마조마하게 둘의 대화를 듣다가 희망이 보이자 막 들떴던 참이었다.

“유빈아, 네가 조건 하나를 허락해줘야 해.”

“아, 네. 뭐든요.”

“KS 엔터 쪽 사람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을 거. 그게 다야.”

“……강동현 피디님이 계시지 않나요?”

“이 일을 허락받는다면 윤희연 이사님 쪽 사람이 반드시 추가될 거야. 나도 이 프로젝트를 계속 주시할 생각이니까, 윤 이사님도 그러려고 하겠지. 만에 하나, 내가 생각해도 가능성이 없긴 한데, 윤희연 이사님이 직접 오겠다고 할 수도 있고.”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가 직접……?”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KS 엔터가 개입하겠다고 할 때, 내가 그걸 수락해도 될까? 물론 과도한 간섭은 없도록 할 거야. 네 자율성이 근본적으로 침해받지는 않도록. 어때, 괜찮을까?”

유빈은 고민했다.

고민하고, 약간은 주저하며 동의했다.

“이사님이 잘 말씀해주시면 뭐…….”

“고마워.”

“왔어요.”

조아라와 리카가 커피를 사서 돌아왔다. 테이블에 커피가 놓이고 다들 잔을 하나씩 차지했다.

유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혔다. 그러다 문득 리카에게도 안건이 있단 사실을 떠올렸다.

“리카 후배님도 할 말 있지 않았어요?”

“아, 있어요!”

리카가 한라봉 에이드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근엄하게 테이블에 양손을 짚었다.

“사무라이 걸즈는 서비스 종료예요!”

“엑?!”

노아가 탬버린을 든 자세로 절망했다.

“왜, 왜인가!”

“소녀연맹이 일본 컴백해야 하거든요!”

“케이어스가 오니 소녀연맹이 가는 건가……. 글로브도 일본에서 진득하게 활동해보고 싶다…….”

* * *

윤희연은 녹색의 테이블을 늘어뜨린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개는 절대 돌리지 않았다. 눈만을 잠깐 움직여 테이블에 앉은 다른 플레이어들의 낌새를 살폈다.

딜러가 카드 두 장을 주었다.

능숙한 손으로 카드의 끝만 뒤집어서 무엇인지 보았다. 다이아 4와 클럽 5였다.

커뮤니티 카드 3장이 공개됐다.

원 페어다.

턴.

네 번째 카드가 공개됐다. 아직까지도 원 페어다. 만들어질 만한 패는 없다.

“올인.”

오늘 연인과 놀이 삼아서 온 게 분명한 남자가 웃으며 그리 말했다. 어수룩한 손길로 칩을 전부 앞으로 내민다.

“죽어요.”

윤희연은 그리 말하곤 빨대로 칵테일을 쪽쪽 빨아 마셨다. 게임 결과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로 홀덤펍 전체를 살폈다.

평소에 자주 보이던 사람이 반이고, 방금 올인한 남자 같은 사람이 또 반이다.

그때 올인한 남자의 패가 공개됐다.

끝까지 따라간 사람이 있던 것이다.

올인남의 패는 쓰리 오브 어 카인드, 같은 숫자 세 장이다.

‘자신 있을 만했네. 손에 원 페어가 있잖아.’

초보자가 흔히 승부수를 띄우는 패였다.

그런데 끝까지 그를 쫓아 콜한 사람의 패는 스트레이트였다.

올인남이 울상을 지었다.

‘공유 카드의 숫자가 드문드문 연결된 것을 보고 눈치를 챘어야지.’

올인남이 떠나고 게임이 재개됐다.

윤희연이 테이블의 흐름이 집중하려던 찰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뺨과 어깨 사이에 폰을 끼운 채 게임을 했다.

“어, 여보세요?”

카드를 확인했다.

“아, 네 1팀장님. 왜요?”

커뮤니티 카드가 공개됐다.

“으음, 으음, 네. 그래요? 아.”

턴.

네 번째 카드가 공개됐다.

“으으음, 그러니까아…….”

산 사람은 윤희연과 아까 올인남의 돈을 전부 먹어 치운 남자 둘뿐이다. 그가 계속 레이즈를 해대니 다들 겁을 먹고 그만두었다.

이번에도 레이즈를 했다.

윤희연이 받았다.

“지금 바로 되나요? 물어봐 주세요.”

리버.

다섯 번째 카드가 열렸다.

마지막 베팅이다.

윤희연이 칩을 전부 앞으로 밀었다.

“올인할게요. 네? 아뇨, 이쪽 일. 모처럼 오늘 시간이 돼서요.”

윤희연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테이블에 집중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상대에게 눈을 박아넣듯이 하고 있었다.

‘받아라, 네가 이길 거니까 받아.’

상대가 받았다.

패가 공개됐다.

윤희연, 원페어였다.

상대, 원페어였다.

비겼다.

“어어…….”

겨우 원페어로 이렇게나 배짱을 부렸다고?

홀덤에서 비기는 건 가장 김빠지는 결말이다.

윤희연은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 딜러를 향해 말했다.

“이거 이용권으로 바꿔서 이 테이블에 앉으신 분들 음료나 먹을 거 다 돌려주세요. 공평하게.”

그러고선 외투를 집어 들고 홀덤펍을 빠져나갔다. 버버리의 트렌치코트로도 막아내기 힘든 찬 바람이 불어오자 머리칼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녀가 코를 한 번 훌쩍이곤 통화를 이었다.

“네에, 온다고요? 어디라시는…… 아니다, 오라고 하세요. 위치는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집무실이요.”

윤희연은 폴더블 폰을 접어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안에 타자 따스한 공기에 절로 기분 좋은 신음이 나왔다.

“KS 엔터 사옥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박성필이 온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가지고서.

* * *

성필은 방문증을 목에 걸고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그 문이 황금으로 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성필은 황홀한 눈으로 문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너무 일찍 왔을까요.”

에리카가 묻자 그제야 성필이 정신을 차렸다.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9시 전에는 오신다고 했으니까 그보다 빠를 수도 있고요.”

“……이사님, 이상한 거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나 이상한데요?”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리카가 바라고, 유빈이가 원하니까요.”

“그런가요.”

“어? 왜 실망한 것처럼 말씀하세요?”

성필이 문고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썸이 1호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제 바람을 이뤄주시려는 걸 줄 알았어요.”

“물론 그것도 있고요.”

“그것‘도’예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가로 엔터 이사니까, 가로 엔터의 일이 가장 중요해요. 썸이 1호의 일은 언젠가 발표될 에리카 씨의 앨범을 사는 걸로 만족해주세요. 아니면, 또 에리카 씨가 홀연히 부산으로 떠났을 때 차비가 없다던가요. 바로 달려갈 테니까.”

에리카는 미소 지었다. 허전함이 엿보였다.

성필은 그녀의 약점을 찌르지 않으려 조심했다.

“정호환 이사님이 가신 후론 어떠세요? 옛날이랑 달라진 게 있다던가.”

“모르겠어요. 달라진 게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겠죠.”

성필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의 혀 위에 하지 못한 말이 잔뜩 얹혔다.

정호환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아, 미안해요!”

집무실과 마주 보는 형태로 길게 뻗은 복도의 끝. 그곳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희연이 서 있었다.

그녀는 코트 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다가오다가 성필과 가까워지자 손을 뺐다.

에리카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그녀의 곁을 윤희연이 빠르게 지나쳤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그 짧은 순간, 성필은 윤희연과 에리카의 관계를 알 듯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곱씹을 시간도 주지 않고 윤희연이 손을 내밀었다.

“윤희연 이사입니다.”

윤희연이 문을 향해 고갯짓했다.

문에 ‘윤희연’이라는 이름이 멋들어진 금속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요. 가로 엔터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 이사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주로 정호환 이사님께요. 이젠 많이 못 듣게 됐지만요.”

에리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윤희연이 고개를 돌렸다. 윤희연이 영혼 없이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에리카는 기다리고 있을래?”

부탁처럼 보였지만 명령이었다.

성필은 그 말을 강압적으로 느꼈다. 직접 듣는 에리카는 더욱 그러하리라. 그리고, 성필은 윤희연이 그리 말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KS 엔터의 간판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인 케이어스, 그 리더를 향해 어떻게 저토록 차갑게 말할 수 있을까.

저렇게 냉혹하게 대할 수 있을까.

질문이 떠오른 즉시 해답이 나왔다.

왜냐하면, 성필은 윤희연과 비슷한 종류의 인간을 한 명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상열.’

윤희연에겐 자신감이 있다.

KS 엔터가 창조해낸 스타시스템.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장엄한 문화적 결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다.

윤희연은 그 시스템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돌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아이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은 곧, 시스템이 아이돌에 선행한다는 믿음을 뜻했다.

윤희연에게 아이돌은 장인이 깎은 도구이며, 포커 플레이어가 손에 쥔 패에 불과했다.

이름을 남기는 건 장인이고, 승리하는 건 패가 아니라 플레이어다.

그 믿음이 윤희연의 행동 하나하나에 흔적처럼 묻어나온다. 마치 윤상열이 그러한 것처럼. 아니, 그와는 또 다른 종류의 짙은 신념이 느껴졌다.

“네.”

에리카가 힘없이 대답했다.

윤희연은 성필을 집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성필은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간절한 눈빛을 가진, 동시에 무력감 가득한 에리카가 보였다.

이윽고 문이 모두 닫히고 틈이 사라지자, 그녀의 모습 또한 사라졌다.

성필이 집무실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집무실을 꾸민 화려한 공예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윤희연의 사유물일 것이다.

이곳은 그녀만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이 공간은 그녀 자체였다. 공예품과 장식을 설명해줄 법도 한데, 그녀는 거침없이 본인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성필은 허락을 구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하아.”

윤희연이 한숨을 쉬었다.

알코올 향이 섞인 달짝지근한 숨결이었다.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저희 남자판 여자판 평행이론 같지 않아요?”

“평행이론이요?”

“박 이사님은 로드 매니저부터 시작해서 이사가 됐고, 저는 계약직으로 이사가 됐잖아요. 저희 동년배인 건 아시죠?”

“아, 네. 윤 이사님은 이 업계 전설이시죠.”

“그렇죠. 박 이사님도 그렇고요. 아, 근데.”

윤희연이 유리 벽 너머의 야경을 보며 말했다.

“같은 이사 자리로 올라왔는데, 아직은 높이 차이가 좀 있긴 하죠?”

윤희연이 나이에 맞지 않은 순박함을 담아 웃었다. 배시시 새어 나온 웃음을 귀엽다고 생각할 만도 한데, 성필은 전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조롱이니까.

너와 내가 선 높이를 보라. 그러한 의미의 조롱이니까, 도저히 귀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야기는 대략 들었어요. 오랜만에 저녁 있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워낙 황당해서 급히 모시게 됐네요. 그럼.”

윤희연이 그를 향해 어서 말해보란 듯 손바닥을 보였다.

“말씀하세요. 어쩌다 그런 제안이 나올 수 있는지요.”

“윤희연 이사님께 이득이 있죠.”

“어떤 이득이요?”

“에리카 씨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거 자체가 이득입니다. 오히려 윤 이사님이 이쪽에 부탁하러 오지 않으신 게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득이죠.”

시종일관 미소로 범벅이 되어 있던 윤희연의 표정이 굳었다. 굳었더라도 미소인 채로 굳어서, 그 얼굴이 싸늘하게 얼은 듯 차갑게 느껴졌다.

“부탁이요? 제가?”

윤희연이 자신을 가리켰다.

“박 이사님한테?”

그리고 성필을 가리켰다.

“부탁이라고요?”

“네.”

“왜죠?”

“일본.”

그 단어 하나로 성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것만으로도 설명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윤희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본?”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제가 설득해야 할 입장이 아닙니다. 윤희연 이사님이 부탁해야 할 입장이죠. 그런데 에리카 씨를 밖에 세워두신 것부터 해서, 그다지 취급이 좋지 않네요.”

“아하니.”

윤희연이 어이없단 듯 말에 웃음을 섞어 늘렸다.

“제가 먼저 무례하게 대했으니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부탁이란 건 제가 바라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제가 원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데 어떻게 부탁을 할 거란 생각을 하시죠?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예술가시네요.”

“뭐라구요?”

“예술가이시지만, 사업가는 아니시네요. 정호환 이사님이랑은 딴판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윤희연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 바닥으로부터 격렬한 분노와 열등감이 만조(滿潮)에 이르는 것처럼 쌓여갔다.

성필의 눈빛은 그녀와 반대로 더욱 차분해졌다. 그가 잘 들으라는 듯 상체를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정호환 이사님이 앉으셨던 그 자리, 너무 넓지 않나요? 윤 이사님이 못 채우실 거 같은데, 언제까지 앉아계실 수 있으시겠어요? 제 제안을 받아들이면, 아직도 훨씬 넓겠지만, 조금이나마 빈자리를 채우실 수 있으실 텐데.”

성필이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되돌려 의자에 반듯이 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약간 더 멀어졌다.

그 공간으로 성필과 윤희연의 눈빛이 얽혔다.

시선으로 나누는 감정의 대화.

그것을 끝내려 성필이 말했다. 눈빛으로는 전하지 못했던 자신감을 담아서. 그리고 윤희연 못지않게 세상을 오시(傲視)하듯이.

“아직도…….”

저 건방진 기색.

자기가 위에 섰다고 확신하는 눈.

하지만 윤희연은 성필의 태도가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울린다.

왜냐하면.

“윤 이사님 본인이 이 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눈앞의 남자는 정호환을 끌어내린 인간이니까.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끝나자 윤희연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웃음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윤희연이 속으로 웃었다.

‘이 남자가.’

내 적이구나.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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