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화
“아저씨?”
분위기를 읽은 듯 조아라가 둘의 낌새를 살폈다. 그러자 성필은 시계를 확인하곤 급히 일어났다.
“이야기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미안.”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안 좋은 일은 무슨.”
성필은 절망을 뒤로한 채 유빈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유빈은 성필에게서 마땅한 답을 듣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기색이었다.
조아라는 성필이 별일이 아니라고 하자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녀는 흥겹게 자신의 차로 다가가 홈쇼핑 쇼호스트처럼 짜잔, 닷지 챌린저를 가리켰다.
“와.”
유빈은 차의 매끈한 붉은 몸채를 홀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운전할 일 자체가 없지만, 자차를 갖는 건 그의 어렴풋한 로망 중 하나였다.
조아라는 그런 유빈의 선망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성필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어때요? 소녀연맹 멤버 중에서 내가 최초예요.”
“멋지다.”
“선심 좀 더 써봐요. 더 할 말 없어요?”
“칭찬은 한 이사님이 많이 해주시지 않았어?”
성필은 딱히 차에 대한 환상이나 로망이 없다. 한구인은 차 견적을 맞춰보는 취미가 있을 정도로 차를 좋아하니, 차라리 그에게 칭찬을 요구하는 쪽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사람마다 감상이 다르잖아요. 빨리.”
조아라가 보닛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모델처럼 다리를 꼰 포즈를 취했다.
“내 ‘지옥 고양이’를 칭찬해봐요.”
“지옥 고양이?”
“이 차 모델 이름이 ‘헬캣’이잖아요. 그래서 이름은 지옥 고양이로 했어요. 줄여서 ‘지고’.”
성필은 ‘헬독’ 정호환이 떠올랐다.
정호환의 유순한 인상과, 고양이처럼 날이 선 조아라의 눈매가 머릿속에서 겹쳤다.
확실히 눈을 찌르는 듯한 붉은색은 조아라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성필은 차의 사이드미러를 쓰다듬었다.
“귀엽네.”
“아저씨가 옛날에 나한테 파란색이 어울린다고 했잖아요. 그거, 유이 언니랑 휴게실에 있었을 때요. 그래서 파란색으로 할까 하다가, 걍 갠적으로 빨간색이 좋아서 이걸로 했어요.”
“네가 빨간색을 좋아해?”
“뭔가 비싼 차는 빨간색이라는 느낌?”
“잘 샀어.”
조아라가 혀를 찼다.
“칭찬 진짜 못하네요. 우리 칭찬할 때 10분의 1만 해도 이보다는 더 길게 말했을 텐데.”
“나도 진짜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떠오르는 말이 없어. 미안해.”
성필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조아라는 살짝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주제를 빠르게 갈무리했다.
“타요. 내 환상적인 운전 실력 보여줄게요.”
성필과 유빈이 차에 타려던 찰나, 운전석 문을 열던 조아라가 급히 외쳤다.
“아저씨! 핑크 선배님!”
“……핑크 선배님?”
유빈이 얼떨떨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샴푸―트리트먼트―컨디셔너―앰플로 매일 관리하는 그의 분홍색 머리칼이 찰랑였다.
“나?”
“선배님이 조수석 와야죠.”
방금 성필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유빈은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타려고 했었다.
유빈은 원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몇 년 동안 타고 다닌 터라 뒷좌석이 당연했다.
성필은 조아라가 운전하니 그를 보좌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탔다.
그런데 조아라가 바로 제지한 것이다.
유빈이 영문을 모르고 쭈뼛거리던 때 성필이 ‘아’ 소리를 냈다. 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라 너 설마…….”
“선배님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드리는 건데요. 운전석이 1, 조수석이 2, 운전석 뒤가 3, 조수석 뒤가 4예요. 4로 갈수록 상석이고요. 예의예요.”
그리 말한 조아라는 봤냐는 듯 성필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아라가 가로 엔터의 정식 연습생도 아니던 시절. 그녀가 단기 연습생으로 한 달간 트레이닝받던 때 성필이 알려준 것이다.
그녀는 5년도 더 지난 일을 착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그래요?”
유빈은 처음 듣는 사람처럼 놀랐다. 그리고 귀가 살짝 붉어져선 조수석으로 왔다.
성필이 만류했다.
“아니야. 예의이긴 한데, 아라가 초보 운전이니까 내가 조수석에서 보조해줘야지. 유빈이는 운전 안 해봤지?”
“네, 면허는 있는데 운전은 안 해봤어요.”
“그럼 내가 조수석에 있을게.”
성필은 허락을 구하려 조아라를 보았다. 그녀는 맘대로 하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자리에 앉는 동안, 조아라의 입가엔 뿌듯함이 걸려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조아라가 물었다.
“아저씨, 내가 이거 기억할 줄 몰랐죠?”
“그래. 나 대우해줘서 고맙다. 드디어 이사가 된 보람을 느끼네.”
“내가 아저씨 안 챙겨주면 누가 챙겨줘요. 핑크 선배님, 나 없으면 아저씨 이렇게 챙겨주세요. 알겠죠?”
“기회가 있으면요.”
“자, 그럼 이제.”
조아라가 핸들에 손을 가져갔다.
우우우웅, 엔진이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토해냈다. 좌석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에 유빈과 성필이 동시에 전율했다.
이게 고출력 머슬카.
“자, 갑니다잉!”
3분 후.
조아라의 애차(愛車)는 갓길에 세워졌다. 성필이 조수석에서 뛰쳐나와 그녀를 운전석에서 끌어냈다.
“나와!”
“히잉.”
성필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운전석 핸들을 쥐었다. 조아라가 툴툴대며 조수석에 앉았다.
“이러면서 느는 거죠 뭐.”
“왜 적극적으로 차를 추월하는데? 무슨 레이싱이라도 해?!”
“깜빡이 켜고 차선 바꿨어요.”
“네가 하는 건 칼치기도 아니고 그냥 대검으로 내려찍는 거야!”
공격 운전의 성지라는 부산에서 벌였어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다행인 건, 사람들이 ‘지옥 고양이’의 외관을 보고 지레짐작 겁먹어서 자리를 비켜준단 것이었다.
성필도 놀랐다.
다른 차들의 창문이 열리고 일제히 중지가 튀어나와도 모자랄 상황이었는데, 모든 차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슬슬 물러난 것이다.
붉은색에다가 생소한 외관이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하다.
“에휴, 간다.”
결국 성필이 운전하게 됐다.
그리고 액셀을 밟는 순간 성필은 또 전율했다. 부드럽게 밟히고, 부드럽게 나아간다. 그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발가락에 전해져서 다리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울렸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붕붕이가 부족하단 생각은 한 적 없는데…….’
마치 마검(魔劍)을 손에 넣은 전사가 된 것만 같다. 이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느낌이다.
조아라가 실실 웃었다.
“좋죠? 원하면 가끔 말해요. 드라이브 운전수 있으면 나도 뭐, 좋으니까요.”
“차 사야겠다.”
“아저씨 나이에 차 같은 데 돈 쓰면 안 된대요. 집 살 돈 모아야지.”
이후로 운전은 쾌적했다.
조아라는 뒷자리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유빈이 신경 쓰이는지 그를 주제로 올렸다.
“아까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아저씨 표정 심각하던데.”
“아, 그게 있잖아요.”
유빈은 신나서 자신의 플랜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와이 베이스가 지닌 가치와 현재의 평가, 그리고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서.
그 이야기를 들은 조아라가 바로 말했다.
“선배님 진심 아니죠?”
유빈이 즉시 쪼그라들었다.
“리카한테 들었는데 선배님 목표가 막 돌풍을 일으키는 거라면서요. 뭐, 일본어가 공중파에 허용 안 되는 걸 바꾸고 싶댔던가. 근데 카와이 베이스로 되겠어요?”
조아라는 팔짱을 낀 채 무미건조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데도 유빈은 조아라에게 노려보아지는 것처럼 제대로 앞을 보지 못했다.
유빈은 움츠러든 것이다.
조아라는 소녀연맹의 ‘오토마타’ 앨범에 관여하며 아티스트십을 증명해냈다. 그녀는 어찌 보면 유빈에겐 상업적인 선배와 같았다.
유빈도 믹스테입으로 성과를 낸 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믹스테입 수준에서 대단한 성과였던 탓이다.
조아라의 말엔 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까요…….”
유빈은 성필에게처럼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다만 좌절하여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라야.”
그때였다.
성필이 말했다.
“너 그거 확신해?”
“네?”
성필의 반문에 조아라는 변명하듯 빠르게 답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송 포 피플’ 앨범에 개인 곡 중에서도 리카 거가 제일 먼저 차트아웃됐어요. 또 엄청 마이너한 장르인데 성공 가능성이 있겠냐고요. 나 말고 다 그렇게 말할걸요?”
“진짜?”
“……뭘 묻고 싶은 거예요?”
“갑자기 신이 나타나서 ‘유빈이가 카와이 베이스로 성공하면 너는 죽는다’라고 말하면, 그래도 바로 성공 못 할 거라고 말할 수 있어?”
조아라가 멈칫했다.
약 2초에서 3초.
그녀가 메마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뭔 소리예요 그게.”
“유빈아, 새겨듣지 마.”
갑자기 말하는 대상이 유빈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려 성필을 보았다.
“만약 네가 정말로 카와이 베이스에서 가능성을 봤다면, 앞으로 아라 같은 얘기를 정말 많이 듣게 될 거야. 근데 보통 ‘안 된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걸지 않았어.”
“네?”
“그러니까, 아무런 책임도 없는 의견이라고. 진짜 베팅하는 건 너잖아. 넌 돈과 시간과 네 미래, 향후의 평판까지 걸었어. 만약 너에게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게 틀렸을 때 10만 원이란 조건만 걸어도 죄다 입 다물걸. 아니, 10만 원이 뭐야. 1만 원만 돼도 아무런 얘기 안 해. 네가 들을 비난은 대부분 그런 거야. 그러니까 잘 구별하라고.”
유빈은 성필의 격려와도 같은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 반해 조아라는 머리가 살짝 뜨거워졌다.
마치 조아라가 책임감 없이 아무런 말이나 해대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은가.
“아니 뭐 진짜 돈 걸어요? 내가 선배님 욕하려는 것도 아니고 걱정돼서 그러잖아요.”
“아라야.”
성필이 목소리를 낮추자 조아라는 반사적으로 압박을 느꼈다. 연습생 때부터 정신과 몸이 체득한 반응이었다.
조아라가 성인이 아닌 시절부터 성필은 그녀에게 여러 가르침을 주었다. 어른으로서, 프로듀서로서.
들을 때는 꼰대가 하는 말이란 생각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마음에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아라의 머리가 차가워진 건 그 때문이었다.
“정말 걱정돼서 하는 조언이라면 배려가 들어있어야지.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말을 잘 감싸야 해. 말에 덕지덕지 붙은 수식어는 허례허식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야. 그냥 ‘진심이냐, 그게 되겠냐’고 직설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조아라의 눈이 사이드미러로 향했다.
아까만 해도 활기차게 미래를 입에 담던 유빈은 눈에 띄게 위축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때도, 아니. 그보다 전인 ‘아라베스크’ 때도 느꼈잖아. 다들 수정 전 안무가 버겁다고 느꼈지만, 너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서 버티고 미루고 고민했어. 나도 그랬고. 그건 우유부단한 게 아니라 상냥함이었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
조아라는 좌석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녀가 귀밑머리를 매만졌다.
“유빈 선배.”
“아, 응?”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나야 뭐, 사무라이 걸즈 멤버도 아니니까 말할 자격이 없었네요 애초에. 선배 이야기를 다 들은 것도 아닌데.”
유빈은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가 껄끄러우면서도, 조아라가 사과해준 게 고마웠다.
또 성필이 자신을 옹호해준 게 기쁘기 그지없었다.
‘박 이사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실 정도면…….’
그가 희망을 담아 성필에게 말했다.
“박 이사님도 카와이 베이스가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
차는 RRBKZ 건물에 도착했다. 근처의 빈 자리에 주차한 후 세 사람 다 내렸다.
“나도 가도 돼요?”
유빈은 조아라의 방문을 흔쾌히 수락했다.
셋이 아지트 문을 열자 리카와 노아가 있었다. 둘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보드게임을 하는 중이었는데, 보석을 모으는 게 목적인 ‘스플렌더’란 게임이었다.
노아의 표정이 우울했다. 자꾸만 룰북과 게임판을 확인하는 모양새가, 게임을 즐기는 게 어려운 듯했다.
“얘들아.”
성필이 부르자 리카와 노아가 동시에 그쪽을 보았다. 그리고 둘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박 이사님!”
“박 팀장!”
특히 노아가 기뻐 보였다. 그녀는 합법적으로 머리 아픈 게임에서 탈출하여 성필 앞으로 왔다.
“진짜 왔나!”
“어, 왔지. 유빈이가 허락해줘서.”
“온 김에 밥이나 사라요.”
“그래. 에리카 씨는…….”
아직 안 온 모양이다.
“에리카 씨 오면 내가 살게. 뭐 먹을까?”
“난…….”
“근처에 맛있는 중국집이 있어요!”
리카가 그리 말하자 노아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아타시(저)는 간짜장이요!”
“오, 중국집 좋다.”
유빈은 벌써 군침이 도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야끼우동과 잡채밥 중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노아는 뭐 먹을래? 아, 자장면 좋아했었지. 그냥? 간짜장?”
“……나는 괜찮다.”
“밥 사달라면서.”
“메뉴는 나중에 생각해본다…….”
“그럴래?”
성필은 소파에 앉아도 되냐고 유빈에게 허락을 구했다. 유빈은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소파에 앉자 정면에 커다란 모니터가 보였다. 그 아래 선반엔 게임기가 종류별로 모여 있었다.
‘다키스트 하민 씨의 공간이구나.’
그럼 여기가 하민이 앉는 자리인가.
확실히 사람의 흔적을 탄 느낌이 있다. 소파가 살짝 움푹 들어가 있는 게, 꽤 오래 사용한 듯하다.
소파에 잠시 앉아 있다가, 성필은 선반으로 다가가서 무슨 게임이 있는지 보았다.
젊었을 때는 게임기도 따로 살 정도로 관심이 있었지만, 이젠 게임과 친하지 않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몇 년 전, 장하양에게 블루레이 감상용으로 주었고 말이다.
‘하민 씨 취향은 이런 거구나.’
액션보다는 잔잔한 내용의 게임이 많다.
“여기 좋네요.”
아지트 탐방을 마친 조아라가 성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 데 있으면 재밌겠다, 그죠?”
굳이 필요하냐.
그리 물으려던 성필은, 그녀가 숙소 생활을 하고 있단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무리 개인 방이 있더라도 다른 멤버들과 부대껴서 살아가니, 자신만의 아지트가 있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텐데.”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음, 일단 개인 춤 연습?”
“회사에 연습실 있잖아.”
“그건 그런데요, 나만의 공간은 얘기가 다르잖아요. 내 취향으로 도배해놓는 거예요. 거긴 진짜 일에 관련된 거 하나도 없고.”
“로망이긴 하네.”
“아, 차를 사지 말고 아지트를 꾸밀걸. 아지트 구하면 아저씨가 인테리어 도와줘요?”
“시간 나면.”
그때 유빈, 리카, 노아가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찰랑찰랑 쇳소리가 들렸다.
성필이 보니, 노아가 탬버린을 흔들고 있었다.
“리카와 에리카가 놀랄 정도로 연습했다!”
그러고선 탬버린을 연주했는데, 정말로 잘했다.
노아가 하는 말을 듣자 하니, 탬버린도 악기이니 당연히 전문 연주자가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필수적으로 배우는 거라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절대 무시할 악기가 아니라고.
노아는 북 부분과 테 부분을 번갈아 치며 현란하게 연주했다.
전문 연주자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로 잘하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또 다른 무기도 있다. 실은 이게 내가 탬버린을 택한 이유요!”
과거 유빈은 ‘뭔가 일본적인 것’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때 제시했던 게 록 사운드이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노아는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없었는데, 그래서 탬버린을 따로 연습한 모양이다.
“잘 봐라요, 내 스타성을.”
노아는 탬버린을 쥔 채 뒷짐을 졌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입에서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멋짐에 도취된 것이다.
“어떤가!”
리카와 유빈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유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뭐야?”
노아가 충격받아서 어버버거렸다.
“리암 갤러거지?”
성필이 그렇게 말하며 노아에게 다가갔다.
노아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박 팀장은 알아본다! 맞다, 리암 갤러거다!”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보컬이었던 리암은 노래할 때 특이한 포즈로 유명하다.
지금 노아가 하는 것처럼 탬버린을 들고 뒷짐을 쥔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것. 그리고 스탠드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른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을 미치게 했던 포즈다.
성필이 픽 웃었다.
“그거 때문에 탬버린으로 한 거야?”
“그렇다. 수상할 정도로 오아시스를 좋아하는 유현이가 추천해줬다. 이걸로 나도 밴드의 일원이 될 수 있어. 네이밍도 했다. 탬버린 무사시다!”
노아가 탬버린을 흔들자 징글이 찰랑찰랑 울렸다. 그 순수한 모습에 성필이 웃음을 터뜨렸다.
노아는 성필이 웃자 왜 웃는지 몰라서 ‘응? 응?’이란 소리를 냈다. 그게 웃겨서 성필은 더 웃었다.
결국 노아도 웃었다.
“그런데.”
리카가 말했다.
“노엘은 메인 보컬리스트 아닌가요!”
노아의 웃음이 멎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나, 나 일본어라면 노래도 자신 있다. 우린 사무라이 걸즈잖나! 백업 멤버로만 세우는 건 너무하다! 그럴 거면 이름도 ‘사무라이 트윈즈 앤드 어 닌자’ 같은 걸로 바꿔야 한다!”
“농담이에요!”
노아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성필은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리카는 보통 골탕먹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그런데 남을 골탕 먹이다니, 심지어 그러한 관계가 성립되는 인간이 존재한다니.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에리카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에리카는 피곤한 표정으로 문을 닫곤, 성필과 조아라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박 이사님? 아, 온다고 하셨죠.”
“에리카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에리카는 성필과 조아라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조아라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에리카의 앞까지 걸어왔다. 에리카와 사적인 장소에서 대면하는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한 티가 났다.
그 긴장은 에리카와 마주하고서 극에 달했다.
‘와, 무슨.’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움이다.
분위기를 제외하고서 얼굴 자체에서 아우라가 흘러넘친다.
특히 피부가 대리석으로 깎은 것처럼 매끈한데 생기가 느껴진다.
그게 굉장히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그 특징이 에리카에게 일종의 신성함을 부여했다.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리카와 장하양의 아름다움에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둘에게 익숙해진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새로운 미(美)와 가까이서 마주하자 절로 경탄이 가슴에 맺혔다.
조아라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아라예요.”
“반가워요 아라 씨.”
지금까진 슬쩍슬쩍 지나가면서만 봤다. 그럴 때마다 ‘예쁘네’ 정도의, 아니, ‘진짜 예쁘네’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이젠 리카가 왜 열등감을 느꼈는지 알겠다.
“여기가 제 아지트는 아니지만, 환영해요.”
이어서 에리카는 유빈과 리카, 노아에게도 차례로 인사했다. 그러고 그녀는 테이블에 배낭을 올려두곤 안에 든 것을 우르르 쏟아냈다.
“기념품이에요.”
케이어스는 얼마 전까지 일본에서 활동했다. 즉, 일본에 있었단 뜻이다.
일본인인 에리카가 일본에서 기념품을 사왔단 건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기념품을 가져왔다.
대부분이 먹을 것이었다.
“앗! 도쿄 바나나!”
리카는 눈을 빛내며 바로 박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에리쨩, 먹어도 돼?”
“응. 여러분도 드세요.”
리카가 박스를 뜯자 봉지 안에 등 빵 같은 게 여러 개 나왔다. 그녀는 하나를 개봉하여 입에 넣곤 감탄했다.
“내 고향, 도쿄의 맛…….”
참고로, 리카의 고향은 도쿄가 아니라 가와사키다. 그녀는 도쿄 바나나 하나를 세 입 만에 전부 먹어버리곤 또 봉지를 뜯었다.
성필이 그녀를 만류했다.
“리카 그거 칼로리…….”
“괜찮아요! 천국의 계단 한 시간 동안 탈 거니까요! 오늘은 고향의 맛을 즐기는 거예요!”
성필은 행복한 리카를 보곤 더는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조아라도 황홀해하는 리카를 보곤 호기심이 생겨 하나 먹었고, 꽤 괜찮단 평을 내렸다.
“그렇게 호들갑 떨 건…….”
“고향의 맛이라구!”
노아는 테이블을 뒤적이더니 투명한 봉지에 쌓인 동그란 과자를 들었다.
“오, ‘아마이볼’ 아닌가.”
노아는 그녀답지 않게 향수에 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봉지를 뜯은 그녀가 아마이볼을 입 안에 넣었다.
아사삭, 사과를 씹는 것보다 건조한 소리가 났다.
노아가 흥겨운 코웃음을 흘렸다.
“무카시토 오나지다네(옛날이랑 똑같네)…….”
순간 다들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마이볼을 또 한 입 먹은 그녀는 주변이 조용해지자 눈을 굴렸다. 그러곤 불안한 투로 물었다.
“왜 그러나……?”
“노아 씨 목소리가…….”
“목소리?”
일본어로 말하니까 한국어로 말할 때와 완전히 달랐다. 성필은 옛날에 들은 적이 있지만, 다시 들어도 놀랍다.
웬 천방지축 초등학생 같은 목소리에서 단아한 숙녀의 목소리로 변하니 말이다.
“아, 원래 외국어로 말하면 말투랑 목소리가 바뀐다요. 다들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한데, 너무 달라서요.”
“그 정도는 아니다요.”
노아는 아마이볼을 또 한 봉지 들더니 에리카의 눈치를 보았다.
“저, 이거 두 개쯤 챙겨도 괜찮나?”
“네, 멤버들 드리려는 거면 다른 것도 좀 챙기세요.”
“아니다.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 주려고 가져온 거잖아. 윤 피디 주려고 한다.”
노아는 아마이볼 두 개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평평했던 청바지 주머니가 빵빵해졌다.
윤상열의 이름이 나오자 리카와 조아라가 성필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의외로 성필은 개의치 않고 도쿄 바나나를 먹는 중이었다.
과자 타임이 끝나고, 유빈이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으며 말했다.
“오늘도 모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져온 안건이 있는데, 혹시 알림 사항 같은 게 있으신 분?”
리카, 에리카, 노아가 전부 손을 들었다.
유빈이 당황하자 에리카가 말했다.
“선배님이 프로듀서시니까 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후배님. 크흠.”
유빈이 눈을 빛내며 진지한 자세를 잡았다.
“저희 프로젝트의 후원자를 찾았습니다.”
“진짜?”
성필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옛날에 성필은 유빈이 계획한 프로젝트의 가장 큰 난관이 자금이라고 했었다. 그가 모은 3,000만 원만으로는 그가 바라는 퀄리티를 낼 수 없으리라고 말이다.
훗날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이 진지해지면, 각자 돈을 각출해서 쓰게 되리라고 예상했건만.
유빈이 후원자를 찾았다고?
“누구야?”
“일본 국토교통성 관광청입니다.”
“……응?”
“일본 정부가 후원자입니다.”
“……조건, 은?”
성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빈이 짐짓 쾌활하게 답했다.
“글로벌 음원 사이트, 즉 애플 뮤직이나 스포티파잉 같은 곳에 곡이 등록될 것. 뮤직비디오가 제작될 것. 그리고 주제가 일본 문화를 홍보하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노아가 드문드문 답했다.
“우리한테 관광송을 만들라는 거인가?”
“그거부터 묻는 거예요?”
에리카가 어이가 없단 듯 노아를 질책했다.
“먼저 어떻게 관광청한테 그런 의뢰를 받았는…… 아니다. 그냥 노아 씨 질문에 먼저 답해주세요.”
어쩐지 체념한 기색이었다.
이번엔 노아가 학생처럼 손을 들며 물었다.
“관광용 노래? 홍보 노래를 만들라는 건가? 사무라이 걸즈가?”
유빈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러분께는 고향을 샤라웃(shout out)하는 노래가 되겠죠. 에리카 씨, 고향 교토. 노아 씨, 고향 오사카. 리카 후배님, 고향 가와사키.”
“도쿄예요!”
“래퍼들이 자기 홈타운에 경의를 표하는 곡을 만들곤 하잖아요. 여러분은 고향이 일본이니까, 이건 관광용 홍보 노래가 아닙니다. 고향에 바치는 헌정곡입니다.”
노아가 손을 힘없이 내렸다.
너무나 커다란 정보라서 누구도 쉽게 다음 질문을 내지 못했다.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를 정리하는 것만 해도 힘들 것이다.
그때 성필이 손을 들었다.
유빈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이목도 성필에게로 쏠렸다.
“그.”
성필은 목이 조이는 사람처럼 막힌 목소리로, 아주 조심스럽고도 섬세하게 질문했다.
“카와이 베이스로?”
유빈은 이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얼굴, 즉 매우 진지하고도 비장하며 숭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쩔 수 없네요!”
리카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한번 해봅시다!”
“앞 내용은 도쿄 바나나랑 같이 까먹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