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41화 (741/760)

741화

유경민의 100도 인사에 손혜빈이 깔깔 웃었다. 직접 일으켜 세워주곤 용건을 물었다.

유경민은 주저하는 눈빛으로 카오틱 에너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에 든 아카이브의 앨범을 면벌부라도 되는 것처럼 내밀었다.

“후배님들한테 인사하러…….”

“혼자? 여기 마음에 드는 애 있어? 얘들아, 와서 인사해라!”

유경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단 듯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이 그녀의 앞에 섰다.

김사무엘이 시그니처 제스처를 하려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또래 여자 앞에서 이런 짓을 하려니 창피함이 극에 달했는지, 구호를 뱉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았다.

“컴베인드 위어들리, 케이아틱 에너지! 안녕하세요, 카오틱 에너지입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반갑다잖아.”

손혜빈은 얼어 있는 유경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유경민은 각 잡힌 인사를 받고, 또한 대선배 손혜빈의 손길을 받자 거의 넋을 놓았다.

혼자이지만 그녀도 그룹 구호를 말했다.

“에스 노운 에스 더 퍼스트 이즈 이브, 안녕하세요 아카이브 유경민입니다…….”

유경민이 앨범을 내밀자 김사무엘이 받았다.

김사무엘이 두리번거리자 매니저가 카오틱 에너지의 앨범을 가져왔다. 그가 앨범을 내밀자 유경민이 받았다.

“죄송합니다, 지금 가려고 했는데 먼저 찾아오시게 해드렸네요.”

“아뇨…….”

“그래서, 경민이? 누가 마음에 들어?”

“아니에요 선배님! 진짜 인사하러 온 거예요!”

“혼자서?”

감히 ‘카오틱 에너지가 먼저 안 와서 홧김에 내가 왔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유경민은 대답을 쥐어 짜냈다.

“카메라 리허설 있어서, 그때 오셨다가 없으면 헛걸음하게 되니까요…….”

“그렇구나.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하는 손혜빈의 말투가 어쩐지 싸늘하게 들렸다.

“내가 상상한 이유로 대담하게 혼자 찾아오는 애였으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도 잘 몰랐거든. 강 대표님은 잘 계시지?”

“아, 하하, 네, 잘 계세요…….”

이후로도 대선배의 아우라에 짓눌린 유경민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카오틱 에너지에게 인사하러 왔다가 손혜빈하고만 대화하고, 그녀는 대기실을 떠났다.

유경민이 나서자 손혜빈이 의뭉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진짜 그냥 인사하러 온 건가? 그런 거면 되게 성실한 성격이네. 어, 앉아 얘들아.”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면…….”

손혜빈이 임한결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마치 겨울 벌판에 버려진 병아리처럼 어깨를 말았다.

“‘천향’이랑 친구였다고?”

“네…….”

천향은 PTR―17의 멤버다.

카오틱 에너지는 PTR―17의 유닛 그룹인 PTR―Monody와 데뷔 활동 기간이 겹쳤다.

웨이퍼센트도 그러했었는데, 지금 활동하는 유닛과는 구성 멤버가 다른 PTR―Hamony였다.

PTR―17의 멤버는 총 네 명으로, 각 유닛당 두 명으로 구성되어 연달아 활동했다.

오늘 만난 PTR―Monody엔 그룹 리더인 시온과 임한결의 친구인 천향이 포함되어 있었다.

“친구였는데 반응이…….”

벌어진 상황은 이러하다.

복도에서 카오틱 에너지와 천향, 시온이 마주쳤다. 두 그룹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천향이 임한결에게 아는 척을 했다.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걸음도 멈추고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그런데 임한결의 반응은 고개를 숙인 채 억지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마치 천향이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반응이 너무 극적이었기에 따라가던 손혜빈도, 주변의 각 회사 스태프들도, 그리고 천향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임한결이 천향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걔가 너 괴롭히기라도 했어?”

“아뇨, 진짜, 친구였어요…….”

임한결은 더 말하기 싫은 듯했다. 하지만 내리깐 시선을 치켜올리자 눈에서 광선을 쏘아내는 듯한 손혜빈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말해야만 했다.

“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KS 엔터 오디션을 봤었다고…….”

잠자코 있던 성필이 반응했다.

“한결아, 혹시 그때 걔야? 심사원이 ‘3옥타브 올리면 바로 합격시켜주겠다’고 했을 때 진짜로 올렸다는 애가.”

임한결은 성필이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에 놀란 기색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이지만, 저는 랩이 주력이었고 노래는 지금도 익숙하지가 않아서…… 못했는데…….”

천향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3옥타브 고음을 그대로 내질렀다. 그리고 그날 온 수십 명의 1차 비대면 오디션 합격자들을 전부 제치고, 혼자 연습생이 되었다.

“그러면…….”

성필은 대략적인 스토리가 이해됐다.

PTR―17의 그룹 이름에 들어간 17은 이러한 의미이다.

메인 보컬 4명.

메인 댄서 4명.

메인 래퍼 4명.

메인 비주얼 4명.

그들이 하나.

그래서 17.

네 명으로 구성된 멤버 전원이 메인 포지션급 실력자라는 것을 그룹 이름에서부터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PTR―17은 한 차례 홍역을 겪었었다.

“천향 씨는 연습생이 돼서 고작 몇 개월 만에 신규 멤버로 들어가신 거네?”

원래 있던 멤버 중 한 명이 학폭 논란에 휘말렸다. 학생 시절에는 당사자들끼리 화해한 것으로 결론이 났었는데, PTR―17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서 다시 불이 지펴진 것이다.

어지러운 진흙탕 싸움판이 벌어졌다.

KS 엔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 멤버를 보호하기보다, PTR―17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멤버를 추방한 것이다.

그 직후 논란의 결말은 흐지부지됐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어서, 성필도 그 결말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

욕하던 사람들은 심판이 이뤄졌다면서 흡족하게 신경을 껐고, 두둔하던 사람들은 허탈함에 사로잡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KS 엔터는 곧바로 이름값에 걸맞은 새 멤버를 몇 개월 만에 새로이 영입했다.

그게 천향이다.

“네, 몇 개월 만에…….”

임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띠었다.

“걔가 KS 엔터 연습생이 돼서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연습하고, 놀고 그랬었는데 이후로는…….”

만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거리감이 생겨 친구 사이라고 부르기 힘들어졌다.

물론, 임한결이 천향을 이상하게 대한 건 그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제 열등감이죠. 분명 친구였는데, 어느새 저 멀리 가버렸으니까…… 제가 되게 못난 사람처럼 생각돼서요…….”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상으로 가버렸다.

임한결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던 것이다. 분명 언제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친구였는데, 옆에서 사라졌다.

쉽게 말해서, 비슷한 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단 것이다.

“걔를 막상 보니까, 저 혼자 괜히 막 창피하고 그랬어요…….”

천향은 임한결을 보고 굉장히 반가워했었다.

옛날과 다름없이 웃으며 대해주는 친구에 비해, 임한결은 그가 모르는 앙금을 쌓아왔다.

그게 더 비참했을 것이다.

“카오틱 에너지로 있는 게 창피해?”

손혜빈이 그리 물었다.

임한결은 순간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하지만 곧바로 의미를 파악하곤 도리질 쳤다.

“아니요!”

“그런데 왜?”

대기실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임한결의 얼굴이 끓는 주전자처럼 김을 뿜어낼 듯했다.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옛날처럼 대하는 게…… 염치없이 느껴졌어요…….”

“사는 세계가 달라서?”

“저…….”

임한결이 괴로운 듯 눈자위를 매만졌다.

“오해할까 봐……. 천향이가…….”

“뭐라고?”

“제가 친하게 대하는 걸…… 자기가 유명해져서 그런 거라고……. 친분을 드러내는 게 그런 식으로 해석되는 게 싫어요…….”

그 답을 들은 성필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임한결의 나이대다운 섬세하고 민감한 사고방식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임한결이 내린 결론만 들을 뿐이다. 하지만 임한결은 저 생각을 입 밖으로 뽑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천향과 헤어지고 몇 년을.

저 답의 기저에 깔린 생각의 무게와 두께, 깊이가 절대 가볍고 좁고 얕을 리 없다.

그럼에도 어른들이 들으면 ‘뭐 그런 걱정을 하고 그러냐’고 말할 법한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또, 만에 하나, 걔가 저를 깔보거나 할 수도……. 그러면…….”

임한결은 말끝을 흐렸다.

성필은 그가 흐린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임한결의 머릿속에 남은 천향과의 추억은 아름다울 게 틀림없다. 그는 현재 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추억을 일그러뜨리길 바라지 않는 거다.

그 일그러짐이 천향 쪽에서든, 자신 쪽에서든 생겨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것이다.

“천향이가 싫어진 거야? 질투 같은 걸로?”

“아니요…….”

“그럼 뭐, 네가 편할 때 다시 얘기 걸어봐.”

손혜빈이 그저 그런 평범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임한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앨범 100만 장쯤 팔면 마음이 편해지겠어?”

“……네?”

“위로 올라간 친구, 목이 뻑뻑해질 정도로 고개 위로 치켜들고 보기 싫단 거잖아. 그럼 급을 맞추면 되지. 근데.”

손혜빈은 임한결의 어깨에 손을 꾹 올렸다.

“그동안 천향이가 네 마음을 오해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지금 네 마음을 알려주고,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해. 알겠지?”

임한결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아마 자신의 미래를 점치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은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에게로, 또 성필에게로, 마지막으로 손혜빈에게 머물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1위는 PTR―Monody입니다! 축하합니다!”

화려한 꽃가루가 터지며 시온과 천향이 MC들의 곁으로 나선다.

천향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리더인 시온은 담담한 모습이다. 시온이 트로피를 받아 천향에게 안겨주고, 천향이 감사를 전한다.

뒤에 선 수십 명의 아이돌들은 박수를 친다.

그중엔 카오틱 에너지도 섞여 있다.

임한결은 천향의 등을 바라보았다. 감격에 겨워 어깨를 떠는 오래된 친구의 등을.

“윤희연 총괄 피디님, KS 엔터의 스태프분들, 그리고 우리 스칼라(Scalar)들 너무 고마워요. 여러분이 저희의 힘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

천향은 나중에 PTR―17에 들어온 멤버라서 그런지 기존 팬덤에게 배척받는 경향이 있었다.

PTR―17이 거둔 괄목한 성과에서도 그는 얹혀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본인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유닛 활동에선 적어도 그의 덕이 50%는 될 것이다. 그룹의 형들에게 얹혀가지 않고, 자신의 힘이 주력이 되어 이뤄낸 성공.

그래서 더욱 값지고 행복할 것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해요……!”

PTR―Monody의 곡이 흘러나온다.

흐드러진 꽃가루 속에서 주역이 되지 못한 아이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임한결도 그 탁류에 휩쓸려 무대를 뒤로했다.

하지만 눈은 천향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천향(天響).

하늘을 울린다는 멋진 이름을 가진 나의 친구.

‘내가 같은 선에 설 수 있는 날이 올까.’

손혜빈은 가볍게 말했지만, 카오틱 에너지가 그들과 같은 높이에 설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관계와는 다르다.

PTR―17은 5년 차 활동을 거의 다 채우고 이제 6년 차 아이돌이 될, 선배 중에서도 고참급이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시 동등한 친구가 될 날은 다신 오지 않는 걸까.’

아직은 불확실하기만 하다.

PTR―17을 따라잡은 자신이 그려지지 않는다.

케이어스와 자신들을 비교하던 초기의 소녀연맹 선배님들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임한결은 희망을 품지 않은 건조한 마음으로 마침내 무대를 내려왔다. 뒤로는 계속 친구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 *

성필과 손혜빈은 스튜디오 구석에서 PTR―Monody의 앵콜 라이브 무대를 보았다.

손혜빈이 혀를 찼다.

“데뷔하자마자 1위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정말 초 쳤네.”

PTR―Monody.

초동 판매량 1,611,3**장.

161만 장이다.

앨범 점수로 모든 아이돌을 찍어 누를 수 있다. 완전체로 모이지도 않았건만 이 성적이다.

“다음 주엔 모르잖아.”

성필이 그리 말하자 손혜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탓하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카이브도 막 컴백했는데, 다음 주엔 아카이브한테 밀리겠지. 책임감 없이 말하지 마.”

“왜 그래. 이거 소련이들이 컴백할 때마다 누나가 나한테 했던 말인데. 희망을 잃지 말라면서.”

손혜빈의 입술이 꾹 닫혔다.

그녀는 아까와 다른 의미의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 되게 무책임했구나?”

“무책임한 희망을 강요했지. 근데 어쩔 수 없어. 책임자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 거스르기 싫어서라도 좋은 말만 하니까.”

“역지사지 치료 효과 좋네.”

손혜빈이 벽에 기댔던 자세를 바꾸었다. 바닥을 발로 디디고 똑바로 섰다.

“KS 엔터는 축포 터뜨리겠네.”

성필이 수긍하듯 한숨을 쉬었다.

윤희연이 총괄 프로듀서로 앉고 난 후, 첫 번째로 거둔 업적이다.

‘아니, 두 번째지.’

정호환이 총괄 자리에서 물러났단 기사는 실제 사건보다 훨씬 뒤에 나왔다.

즉, PTR―17을 두 개로 나누어 유닛 데뷔시키는 발상은 윤희연의 총괄 아래 이루어졌다.

두 개 다 축포를 터뜨리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대성과다. 둘 다 완전체가 아닌데도 초동 100만 장을 넘어섰으니까.

“그러게, 대단해.”

성필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성공은 마치 정호환이 없어도 KS 엔터는 무너지지 않는단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가 창조해낸 이 시스템이 너무나도 단단하고 강하다는 것을, 잔혹하게도 알려준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정호환은 기뻐할까, 슬퍼할까.

적어도, 성필은 슬프다.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

성필은 시온과 천향의 뒤에서 윤희연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 그림자를 향해서, 성필이 속으로 뇌까렸다.

‘네 자리가 아니니까, 내려와야 해.’

그냥 내려오길 기다리진 않는다.

성필이 끌어내릴 것이다.

정호환과 함께.

‘정호환 이사님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윤희연, 네가 내려와야 한다.

속상해하진 않길 바란다.

정호환의 원래 자리가 정점인 것처럼, 윤희연의 원래 자리는 정점에서 살짝 비켜난 곳이다.

지금 그녀가 선 곳은 너무 높다.

* * *

가로 엔터 주차장에 생소한 디자인의 자동차가 끼익 멈춰 섰다.

영롱한 붉은색의 자동차는 안광처럼 라이트를 뿜어내더니 우렁찬 엔진음을 뱉었다.

크라이슬러 닷지 챌린저 SRT 헬캣.

그 문이 열리고 매니저 안이상이 나왔다. 뒤이어 반대쪽 문에서 조아라가 나왔다.

“도착했…….”

“끼아아아아아아악!”

안이상이 귀신을 본 소녀처럼 비명을 내지르며 현관으로 도망쳤다.

덜컹거리며 닫히는 문을 보며 조아라는 어이없는 듯 하 웃었다.

“오버하긴.”

조아라는 자신의 애차(愛車) 보닛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시속 380km까지 가속할 수 있는, 그야말로 야생마다.

길가를 다닐 때마다 멸치처럼 어깨가 좁은 자동차들이 비키는데, 그걸 보면 조아라는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게 차 가격 때문인지 조아라의 엉망진창인 운전 실력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사람이…….’

조아라는 레이싱 모델처럼 보닛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폰을 열어 오늘 ‘아라 택시’를 이용할 사람 목록을 찾았다.

“아저씨네.”

콘서트를 마치고 돌아온 조아라.

그녀는 드디어 고대하던 차를 손에 넣었다. 한국에서 쓰는 사람 적은 생소한 기종이라 사고도 손가락을 빨며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선물처럼, 콘서트를 마치고 한국으로 온 날 딱 출고된 것이다.

그녀는 시험 삼아 회사 사람들을 태워주었다. 첫 탑승자인 리카와 한구인(밖에 나갈 일 없지만 억지로 끌려 옴)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리카는 신나 했고 한구인은 안색이 파리해져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 도망쳤었다. 안이상은 방금 봤다시피 비명을 지르며 가버렸고 말이다.

“히.”

조아라는 ‘소녀 포즈’로 팔을 들어 올리고 막춤을 추었다. 차가 생긴 흥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곧 비명 지를 성필을 생각하니 더 기뻤다.

그런데 탑승객은 성필 혼자가 아니었다. 웨이퍼센트 분홍머리 걔, 유빈도 함께였다.

조아라는 잘 모르지만, 오늘 RRBKZ 아지트는 ‘No 윤상열 day(윤상열이 안 오는 날)’라는 모양이다.

그래서 성필이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 진행에 조언을 주려고 유빈과 함께 간다고 한다.

‘안 나오나?’

기다린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도 성필과 유빈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혹시 안이상이 있는 말 없는 말 떠들어서 겁을 먹고 도망친 건가.

조아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가로 엔터로 향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곧바로 둘이 보였다.

현관문으로 들어와서 오른쪽, 이젠 소녀연맹보다 카오틱 에너지가 자주 앉아 있는 휴게 공간.

그 소파에 성필과 유빈이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척 보기에도 심각했다. 성필이 눈가를 파들파들 떠는 중이었다.

* * *

유빈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리카 후배님이 퓨처 베이스 명반을 추천해줬거든요. 전 처음엔 ‘생긴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장르에 무슨 명반(名盤)이야. 애초에 피지컬 앨범 형태로 존재하긴 하나?’ 싶었는데요. 아 이거 진짜 뭐가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유빈아?”

“모에숍(Moe shop)이나 스네일즈 하우스(Snail’s house), 이런 대가들부터 시작해서요. 사이키(Psyqui)도 좋고, 카와이 베이스 커뮤니티에서 관련 작곡가들이랑 작업하는 보컬 중에선 유노미(Yunomi)가 좋고…….”

“그게 정말이니 유빈아?”

“제가 처음 계획했던 건 뭔가 ‘일본적인 것’이었거든요? 근데, 카와이 베이스가 진짜 일본적인 거 아닐까요? 진짜 현대 일본에서 탄생한 장르잖아요. 일본의 현대 음악 장르요. 그건, 그건 정말 완전 일본적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 계획은, 이 카와이 베이스로 일본적인 느낌을 살린 곡을 만들어서 히트시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뽕짝으로 한대음(한국대중음악상) 수상하는 소리니?”

“그런 반응, 이해해요.”

“내가 이상하단 것처럼 보지 말래?”

“의외로 재패니즈 하우스 스타일을 서양권의 일렉트로닉 디제이들도 많이 참고하더라고요. 안이상 매니저님도 그랬어요. 클럽에서 막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일본어나 제이팝을 섞은 믹스곡을 자주 틀어준대요. 재패니즈 하우스는 이미 일렉트로닉 업계에서 거스를 수 없는 주류에요.”

“설령 그렇더라도 좀 마이너한 디제이들이겠지. 내가 그쪽 분야 모른다고 너무 부풀리…….”

유빈이 폰을 들어 더 체인스모커스(The chainsmokers)의 스포티파잉 아티스트 페이지에 접속했다.

체인스모커스는 ‘Closer’로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켰던 일렉트로닉 디제이다. 그 곡의 아이튜브 뮤직비디오 조회 수는 현재 거의 3,000,000,000(30억)이다.

더 체인스모커스의 현재 스포티파잉 월별 청취자 수는 대한민국의 인구와 맞먹는다.

보통 월별 청취자가 1,000만을 넘으면 슈퍼스타 취급해주는데, 그 몇 배나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규격 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정상급 디제이.

유빈은 보란 듯이 체인스모커스의 이름을 가리키고, 한 곡을 재생했다.

[이케 이케 단쵸(가라 가라 단장)!

간바레 간바레 단쵸(힘내라 힘내라 단장)!]

“아니 시X 이게 왜 진짜 있음?”

“보셨죠. 저희도 올라야만 해요, 이 빅 웨이브에! 타지 않을 수 없다고요! 카와이 베이스는 가장 일본적인 음악이며! 이는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바예요! 이 파도에 타는 게 사무라이 걸즈에게 밝은 내일을 가져다줄 유일한 방법이라고요! 제 프로듀서로서의 감이, 사무라이 걸즈가 이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요! 어때요, 이해하시겠죠?”

성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눈가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이게 절망이니, 유빈아…….”

“네, 정말이라니까요!”

“절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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