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8화
과거 소녀연맹의 숙소였지만 현재는 카오틱 에너지(가명, 假名)의 숙소로 사용되는 집.
그 현관에서 거실로 이르는 복도에서 때아닌 소란이 벌어졌다.
“잘 바.”
흰 티셔츠에 반바지만 입은 유우토가 백수현을 향해 자신만만히 선언했다.
“못 한다니까.”
“할 수 이써.”
유우토는 육상 선수가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려는 듯 허리와 다리를 굽혔다.
그러다 절반쯤 수행한 시점에서 멈추었다.
그 직후, 유우토는 뛰었다.
벽을 향해서.
“흡!”
짧은 호흡과 함께 도약한 그는 오른 다리로 벽을 찼다. 아니, 디뎠다.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수축했다. 그 직후 유우토가 땅을 박차듯 벽을 박찼다.
유우토는 총알이 튕기듯 반대쪽 벽으로 순식간에 날았다. 그리고 이번엔 왼발의 차례였다.
그의 왼발은 오른발이 했던 것처럼 벽을 박찼고, 유우토는 한층 더 높이 도약했다.
그리고 또다시 오른발.
마지막으로 벽을 차서 도약한 유우토는 빙글 돌았다. 그의 등과 천장이 손뼉을 부딪치는 것처럼 짝 맞닿은 후, 그가 기계체조 선수처럼 우아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후우.”
유우토는 자랑이라도 하듯 어깨를 후인 하강하여 광배근을 강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을 단련된 광배근이 자랑스럽게 채웠다.
정면에서도 그의 역삼각 등이 드러났다.
“코레가 오레노 치카라(이게 나의 힘)…….”
“와 씨 미쳤다.”
백수현은 즉시 눈을 빛내며 달리기 자세를 취했다. 유우토의 눈에 조소의 빛이 스며들었다.
“수혀니는 모태.”
“네가 하는데 내가 왜 못해.”
유우토는 과거 백설하를 보고 영감을 얻어 육감적인 몸(남성적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노력에 힘입어 풍채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좋아졌다.
하지만 백수현도 그에 지지 않았다.
딱히 유우토처럼 운동에 미친 건 아니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어깨와 등이 넓었고 다리가 길었고 체격이 좋았다.
천성적으로 그는 매우 남성적인 신체를 타고났다. 누나인 백설하가 매우 여성적인 신체를 타고난 것처럼.
따라서 그는 운동한 유우토보다 어깨와 등이 넓었고 비율도 좋았다. 흔히 근수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운동 수행 능력도 보통 사람을 넘어서 있었다.
“잘 봐라.”
유우토가 비웃었다.
“얏떼 미로(해 봐라).”
백수현이 뛰었다. 그는 유우토가 도약한 지점에서 정확히 같은 동작을 재현해냈다.
유우토의 눈이 놀라움으로 번쩍 뜨였다.
백수현은 벽을 박찼다. 그리고 그대로 반대쪽 벽으로 튕겨 나가 벽에 머리를, 바닥에 무릎을 박히고 쓰레기처럼 뒹굴었다.
“아아아아아악!”
백수현이 무릎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뭐야?!”
김사무엘이 심각한 얼굴로 방에서 튀어나왔다. 눈에 보이는 건 무릎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백수현이었다.
“나, 나, 아파!”
김사무엘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큰 소리가 들리기에 뭔가 했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백수현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던 것이다.
“개 같은 새끼이…….”
백수현이 유우토에게로 손을 뻗었다.
“나 좀 도와줘…….”
유우토가 어깨와 등에 힘을 주고 보디빌더처럼 등과 어깨의 근육을 과시했다.
“코레가 겐지츠(이게 현실)…….”
“도와달라고…….”
“자연재해라고 생각해라. 비, 바람, 화산, 지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건 복수하려는 자는 없지. 살았으니 충분하지 않으냐…….”
“메인 댄서가 다쳤다고오 개새끼들아…….”
그때 콜베르가 샤워실에서 나왔다.
유우토가 끙끙대는 백수현을 부축하는 것을 보곤 콜베르가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백수현은 일어나서 무릎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멍이 살짝 들었을 뿐 문제는 없었다.
“괜찮네.”
“벽이 울리던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너도 해볼래?”
콜베르는 유우토의 허공답보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콜베르의 눈에 흥미로움이 깃들었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괜찮습니다. 저한테는 불가능해 보이네요.”
콜베르는 두 형을 뒤로하고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냐’라는 유우토의 으스댐이 들려왔다.
동생 라인의 방으로 들어오니 책상에 자리한 임한결이 보였다. 그는 헤드폰을 쓴 채 고개를 규칙적으로 까닥였다.
책상 위에는 사전과 수첩이 있었다.
임한결은 시간이 남을 때 운율이 맞는 단어를 찾아 수첩에 기록한다.
사람, 사랑, 삶.
라이밍, 샤이닝, 스위밍 등.
메인 래퍼다운 취미였다.
콜베르가 바닥에 앉아 드라이기를 켜자 임한결이 헤드폰을 벗었다.
“다 끝났어요?”
“응.”
“나도 씻어야겠다.”
임한결이 갈아입을 속옷을 챙기는 동안 머리 말리기가 끝났다. 콜베르는 원래 입던 옷을 벗고 파자마로 갈아입으려고 했다.
임한결은 잠시 그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콜베르가 물었다.
“왜?”
“아…… 그 멍 안 사라지는 건가 싶어서요.”
콜베르는 아래를 보았다.
왼쪽 가슴과 명치, 허벅지 안쪽에 멍이 있었다. 콜베르는 그 멍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아…….”
임한결은 겸연쩍게 ‘그렇구나’라 말하곤 도망가듯이 방을 떠났다.
콜베르는 파자마로 갈아입은 후 벽을 보았다. 침대 옆에 세워진 콘트라베이스가 보였다.
그 옆엔 콜베르의 허리 높이보다 살짝 낮은, 그렇기에 보통 의자보다 확연히 높은 스툴이 있었다.
콜베르는 스툴을 방 중앙에 두었다. 그리고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그곳에 앉았다.
잠시 의자에 앉은 위치와 베이스를 품에 안은 위치를 조정하던 그는, 마침내 가장 완벽한 포즈를 잡아내었다.
가슴, 명치, 허벅지. 멍이 든 곳에 콘트라베이스의 각 부분이 볼트와 너트가 끼워지듯 딱 맞아들어갔다.
멍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은 퍼즐을 맞춘 것처럼 콜베르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멍이 언제 없어지냐고…….’
이 자세를 계속 취하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콘트라베이스는 현악기 중 가장 크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체격은 저마다 다르다.
따라서 사람마다 취하는 자세가 달라서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달리 멍이 드는 자리가 제각각이다.
콜베르가 가장 편한 자세는 이것.
가슴, 명치, 허벅지로 콘트라베이스를 품에 안은 자세였다. 그로써 생긴 멍이다.
이 멍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목에 든 멍이며, 첼리스트의 가슴과 명치에 든 멍과 같다.
1년 365일 같은 포지션을 취함으로써 드는 상처 말이다. 그건 울퉁불퉁한 발레리나의 발처럼, 악기 숙련자의 표식이자 훈장이기도 했다.
‘사라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콜베르는 크게 심호흡하고 애인을 안는 것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베이스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콘트라베이스의 질감을 음미했다.
바니시를 발라 부드러운 나무 재질의 그것을 애정 어린 손길로 쓸었다. 둥근 곡선이 손에 잡힐 때면 간질이는 것처럼 손길이 집요해졌다.
코는 베이스의 목에 밀착했다.
목제 악기의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발리는 바니시의 향이 흡족했다. 그냥 화학적 조합물 냄새가 아니다.
비싼 바니시는 일류 조향사가 만든 것처럼 향기롭다. 물론 그것도 단순히 악기 연주자의 편애일지도 모르지만, 콜베르는 그리 느꼈다.
향이 있고, 부드러운 촉감이 있다. 사람의 체온마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나의 애기(愛器)…….’
베이스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던 그의 손이 지판(指板)에 닿았다. 지판과 떨어져 창공을 가르는 구름처럼 직선으로 이어진 현(弦)과도.
비행운처럼 곧은 현을 쓸던 그의 손이 뚝 멈추었다. 현 하나가 부족하다.
콜베르는 황홀한 상념에서 깨어나 베이스의 지판을 바라보았다. 현 하나가 애처롭게 끊겨 바닥과 마주하고 있었다.
가로 엔터 연습생 오디션 때 끊어먹은 것이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마친 콜베르는, 아이돌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려 베이스를 그대로 손에서 놓았던 것이다.
땅과 충돌한 콘트라베이스는 나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현을 토해내듯 놓쳤었다.
십수 년간 쌓은 경험, 추억, 애정, 그리고 고국(故國)을 버리고 이곳에 섰다는 증표로서 새겨진 참혹한 상처.
“나는…….”
콜베르가 중얼거렸다.
클래식 연주자로의 길은 흔히 악보로 이루어진 계단을 오르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한 곡을 소화해내면 또 다른 곡이 기다린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커리큘럼이 코스 요리처럼 어린 지망생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건 고된 일이다.
한 계단을 오르는 것마저 사력을 쏟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동년배들에게 추월당해 전문 연주자로의 길을 포기해야만 하니까.
콜베르게르는 인생을 걸고 악보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렇게 오르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내려갔다.
그가 올랐던 악보의 계단은 바람에 흩날려 산산이 찢어졌다. 그가 포기한 악보로 이루어진 폭풍 안에서, 그는 상실감과 함께 이 자리에 왔다.
“나는.”
콜베르가 베이스를 꽉 껴안았다.
“그리워하려고 온 게 아니야.”
다짐하듯 그리 말했다.
언젠가 이 집착도 끝내야 하겠지.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다.
내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이 아련함이 너무 크다.
콜베르는 품에 안은 베이스를 내려다보며,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그것을 쓰다듬었다.
* * *
콜베르는 품에 콘트라베이스를 안으며 성필과 손혜빈을 바라보았다.
이 방은 채광(採光)이 잘 안 된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흐린 빛 때문에 둘의 얼굴이 괜히 심각해 보인다.
“이런 자세를 잡습니다.”
콜베르는 평소 하던 대로 콘트라베이스를 안았다. 성필과 손혜빈은 베이스와 그의 몸이 닿은 부분을 면밀하게 살폈다.
멍이 든 부위와 정확하게 맞아들어간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목에, 첼리스트는 가슴과 명치에 멍이 있습니다. 콘트라베이스 주자(奏者)들도 잡는 방법에 따라 그러한 흔적이 남습니다. 제가 서서 연주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아마 허리쯤에 멍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
손혜빈이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필은 잘됐단 듯 그녀와 어깨동무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었다.
둘이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둘 다 쉽사리 믿지 못했다.
일단 연주자들에게 그러한 멍이 생긴단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콜베르가 멍이 든 이유를 숨기려고 전문 지식을 조작하여 거짓말한 가능성도 있었다.
먼저 한구인을 불러 정말 그러냐고 물어보니.
‘그렇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만 콘트라베이스도 그런지는 모른다고 했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메이저한 악기가 아니니 말이다.
성필과 손혜빈은 혹시 모르니 함께 숙소로 가서 직접 이 광경을 보기로 했다. 보니까, 콜베르의 멍이 콘트라베이스에 닿는 부위와 일치했다.
성필은 감정을 추스르는 손혜빈을 대신하여 답했다.
“아직도 베이스를 연주하는 거야?”
“아니요. 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는데, 왜?”
콜베르는 망설이는 눈초리였다. 그의 눈동자는 몇 초간 방황을 거듭했다. 이윽고 방황이 끝나자, 그는 죄책감에 차서 답했다.
“향수(鄕愁)를 달래는 방식…… 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한텐 이 악기가 인생이었고, 이사님들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아직도 그리움이 남아 있어서…….”
소중한 악기를.
소중한 친구를 하루에도 수십 분씩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명상과도 비슷했다.
성필은 안타까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소중한 건데 왜 오디션에서…….”
“제 결심을 보여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심하는 방법이었고요.”
콜베르는 오디션에서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에 팝 컬쳐의 빛을 가져오고 싶다고 말이다.
물론 현재에도 폴란드의 차트에 오른 주요 뮤지션은 폴란드 사람이고, 팝적인 음악도 많지만, 외국인 뮤지션의 비율도 무시하지 못한다.
폴란드의 한 차트에선 50% 이상이 외국곡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콜베르는, 폴란드에서 팝 뮤직이 쇼팽으로 유명한 클래식처럼 중요한 위상을 지니길 바란다. 그 유명한 ‘쇼팽 콩쿠르’처럼 대중음악 시상식에도 이목이 모이기를.
그럼으로써 폴란드의 문화적 토양이 더욱 다양하고 단단해지기를.
‘자기가 그 방아쇠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유명해져서, 자신을 동경하여 팝 뮤지션이 되는 이들이 생긴다면 정말 좋겠다고.’
남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그런 거대한 목적을 위해서, 콜베르는 이전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다.
자기 어머니의 뿌리인 한국으로 와서 아이돌이 되어, 세계에 이름을 알리려고.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성필은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었다.
공감하기엔 너무 커다란 목적이자 꿈이었으니까. 인간이 그런 꿈을 품을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게 하나 생겼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폴란드는 위대한 클래식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고향이다. 어린 클래식 연주자들은 선망 어린 시선을 받는다고 한다.
콜베르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했던 그는 분명 폴란드의 희망처럼 대해졌을 것이다.
그의 앞에 펼쳐져 있던 황금의 길을 내려온다는 게. 지금까지 올라왔던 피와 땀의 계단을 내려온다는 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가 겪는 고통으로 인해, 성필은 그의 꿈이 지니는 무게를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콜베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뒤 없이 달려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데 계속 과거만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린 것,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사님들께 걱정을 끼친 것도,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고개 들어.”
손혜빈이 눈가를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밝았다.
“걱정은 무슨. 우리가 안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걱정할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그렇지 성필아?”
“당연하지.”
그제야 콜베르는 고개를 들었다.
손혜빈은 그가 품에 안은 콘트라베이스를 유심히 보았다. 현 하나가 빠져 있었다. 오디션 때 바닥에 충돌함으로써 빠진 현.
“그 현 안 고쳐?”
“고치려면 제조사에 직접 보내야 합니다.”
“돈이 걱정되는 거면 내가 내줄게.”
손혜빈이 선선히 그리 말하자 성필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옛날에 한구인은 순수한 궁금증으로 콜베르에게 베이스의 가격을 물은 적이 있었다. 가격은 한화 9,000만 원에 달했다.
그걸, 비록 현 하나 갈아 끼우는 것이더라도, 수리하는 데엔 적잖은 돈이 들 터다.
‘아니, 고작 현 하나가 문제일까.’
이 무거운 악기가 땅과 박치기하듯 충돌했으니, 겉으론 안 보여도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수리하려면 대체 얼마가 들까.
“어때?”
콜베르의 눈에 기대가 서렸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아니요.”
콜베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베이스의 목을 세심한 동작으로 쓸었다. 그의 손짓엔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이 빠진 현은 제 결심입니다.”
“어떤 결심?”
그가 손혜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공하기 전까지, 출구를 두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절대 추억에 잠기지 않겠다.
그 달콤함에 이끌려 돌아가지 않겠다.
“제가 원하는 빛을 손에 쥐기까지.”
콜베르는 사랑하는 애기(愛器)에게 작별을 고한 것이다.
* * *
새하얀 바닥.
그 외의 공간은 모두 검다.
바닥에 올라 있는 건 콜베르와 유우토.
어둠 속에 있는 건 수많은 카메라와 스태프들이었다.
마치 어둠에게 응시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콜베르는 오른손의 활을 바라보았다.
콘트라베이스의 활은 길이가 80cm에 달하여, 차라리 검(劍)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검처럼 투박하진 않다.
한없이 섬세한 도구이다.
베이스 목을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애기(愛器)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완벽한 형태를 갖춘 콘트라베이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활을 현에 가져갔다.
그대로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형.”
콜베르는 등을 맞대고 선 유우토에게 물었다. 그의 손에는 일렉 기타가 들려 있었다.
유우토는 오랜만에 쥔 기타 피크를 열심히 놀리며 앰프에 연결되지 않은 기타를 멋들어지게 치는 중이었다.
“으응?”
“원래 록을 하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건조한 기타 현의 소리가 멎었다.
“나는 딱히 록을 하고 시펐던 게 아니야.”
“예?”
콜베르가 들어왔던 이야기와 달랐다.
유우토는 어린 나이부터 경음악부에 들어 기타리스트로의 소양을 쌓아왔다고 했다.
아마추어적인 레코딩 경험도 있고, 지역 공연도 몇 번 해봤다는 모양이다.
기타 실력은, 콜베르가 보기엔 상당하다.
그런 삶을 살아왔는데 뮤지션을 향한 열정이 없었다곤 보기 힘들었다.
“나는 그냥 내 노래를 들려주는 게 조았던 거야. 내 노래를 들려주고 시펐던 거야. 그럼, 딱히 록밴드든 아이돌이든 상관없쟈나?”
히.
유우토가 웃었다.
“콜베르는 후회하는 거야?”
그 질문에 콜베르는 베이스의 목을 꽉 쥐었다.
“아니요. 후회할 정신머리로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러치. 그러케 노력했는데, 후회하면 아깝기만 하쟈나.”
시작합니다!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콜베르와 유우토는 연주할 준비를 했다.
콜베르는 현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카메라 옆의 어둠에 두 명의 인형(人形)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총괄 프로듀서 성필과, 카오틱 에너지(가명, 假名)의 메인 프로듀서 손혜빈이다.
‘이 길을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야.’
콜베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십 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십 명이 함께 만든 자리다.
그리고, 앞으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십·수백만 명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타(Star).
‘나의 자랑스러운 고국에 새로운 문화의 빛을.’
드라이브를 한껏 머금은 유우토의 강렬한 스트로크를 시작으로, 콜베르의 콘트라베이스가 묵직한 울림을 토해냈다.
* * *
하얗고 동그란 바닥 위, 유우토와 콜베르의 이중주(二重奏)가 황홀하게 울려 퍼진다.
일렉 기타와 콘트라베이스의 조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네오 클래식? 퓨전 록?
무엇이든, 이 조합이 아름답단 데 이견의 여지는 없었다.
“이…….”
손혜빈이 달뜬 한숨을 뱉었다. 그녀는 막 사랑에 빠진 여중생처럼, 혹은 소녀연맹의 데뷔를 지켜보던 성필처럼,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성필의 옷소매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쩜 좋아 진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어, 진짜, 진짜로…….”
스태프들도 무아지경이다.
특히 무대의 원형 레일을 따라 회전하며 촬영하는 카메라맨들이 그러했다.
두 사람의 360도를 전부 촬영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레일. 그곳을 도는 카메라맨과 뒤따르는 감독의 눈은 보석을 보았을 때보다 더 빛났다.
“고마워.”
뜬금없이 손혜빈이 감사를 전했다.
“너 아니었으면 이런 호강 못 해 봤을 거 아냐.”
그에 성필은 나지막이 웃었다.
손혜빈은 전생에서도 프로듀서였으니까.
“나 아니었어도 누나는 언젠가 자기 그룹 만들었을 거야. 고마워 안 해도 돼.”
“그것만 고마운 게 아니야.”
“그럼?”
“메인 프로듀서 맡겨준 거. 사장님은 당연히 너한테 권한을 전부 주고 싶었을 텐데. 그렇잖아. 이미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그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이, 누나를 메인 프로듀서로 추천한 거야. 최적의 인선으로.”
“……고마워.”
손혜빈은 무의식적인지 의식적인지 목소리에 애교가 깃들었다.
성필이 ‘괜찮다’고 해도 손혜빈은 연신 고맙다고 할 기세였다. 유우토와 콜베르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러겠지.
그래서 성필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면 벅찬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하지만 덮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책장을 덮는 것을 거부하고 끈질기게 다음 이야기를 창조하는 이들.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글자와 잉크가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결코 손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놓지 않는 사람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끝내 상상을 현실로 만들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아티스트.
성필과 마찬가지로, 손혜빈도 그러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전생에서도, 지금도.
* * *
‘케이팝의 이해’ 강의 시간.
김채현은 중간에서 살짝 뒤의 자리에 앉아 졸음과 싸우는 중이었다. 막 점심을 먹은 참이라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기 힘들었다.
이 강의의 담당 교수인 남태섭은 딱히 자는 사람을 터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김채현이 눈을 감지 않는 이유는 국격(國格)과 관련이 있었다.
‘자, 자면 안 돼…….’
이 강의의 수강생은 70% 이상이 외국인 학생들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라 그런 듯했다.
이렇게 외국인들이 많은데, 한국인 학생인 자신이 침을 줄줄 흘리면서 자면 대한민국의 국격에 심대한 악영향을 줄 것이다.
‘참아야 해…….’
김채현은 안 그래도 영어라 알아듣기 힘든데 잠까지 쏟아지니, 남태섭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볼펜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케이팝의 꽃미남형 아이돌이 아시아권, 중동, 남미에서 반향을 얻은 이유는…….”
자면 안 된다.
“여성의 성적 표현과 행사는 유교권 아시아, 이슬람권 동남아시아와 중동, 천주교권 남미에서 터부시됩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남성성에서 한 발 떨어진 남자 아이돌은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여성의 성적 욕망을 발현하는 이미지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허용되는…….”
자면 안 되는…….
“케이팝은 성적으로 무해하다고 판단되어 청소년, 특히 소녀들에게 허용…… 아.”
갑자기 강의가 끊겼다.
김채현은 ‘스읍’ 침을 삼키며 반쯤 기울어진 고개를 들었다. 강단의 남태섭 교수는 폰을 꺼내며 말했다.
“잠시만요.”
김채현은 고개를 흔들흔들 저었다. 그리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에 침이 떨어져 있다.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어 재빨리 침을 닦았다.
한숨과 함께 책상의 모서리 쪽에 둔 폰을 보았다. 수많은 알람이 떠 있고, 가장 위에는 아이튜브 알람이 있다.
가로 엔터 채널의 알람이다.
[……Debut Teaser#1…….]
‘데뷔 티저’라는 단어가 눈에 보이자마자 모든 잠이 달아났다.
“오.”
김채현이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터뜨린 순간.
“오.”
강단에 선 남태섭도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래서 김채현의 얼빠진 소리는 묻히게 되었다.
김채현은 다행이라 여기며 폰의 미디어 음향 볼륨을 0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알람을 눌러 영상을 재생했다.
검은 배경과 흰색의 바닥.
그리고 등지고 선 두 명의 남자.
한쪽은 혼혈처럼 신비로운 외모를 가졌고, 다른 한쪽은 동양인이지만 서구적인 미(美)가 느껴졌다.
‘어, 이 애…….’
김채현은 본 적 있다.
리카의 자체 콘텐츠인 ‘자정의 인터뷰’에서 본 적 있다. 그때 그의 얼굴은 이 영상에서보다 어렸지만, 누구였더라.
‘아.’
김채현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리카 동생이다.’
그리고 데뷔 티저라면.
‘드디어.’
나왔다.
소녀연맹의 후배 그룹.
이윽고, 김채현은 영상에 사로잡혔다. 콘트라베이스와 일렉 기타 연주라는 언밸런스한 조합. 그 신비로움에 홀려버렸다.
이상하게도, 남태섭은 김채현이 영상을 볼 때까지 강의를 재개하지 않았다.
* * *
비서가 문을 반쯤 열고 말했다.
“매니지먼트 1팀장 왔습니다.”
“기다리라고 해요.”
윤희연은 단호한 답에 비서가 당황했다.
윤희연은 의자에 느슨한 자세로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는 중이었다. 비서로서는 그녀가 뭘 보고 있기에 정해진 미팅마저 기다리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서는 알겠단 뜻으로 고개를 숙인 후 문을 닫고 나갔다.
윤희연은 팔짱을 끼고 영상에 더 집중했다.
‘데뷔 티저.’
소녀연맹의 후배 그룹, 그 첫 번째 데뷔 티저 영상이다.
영상 속에선 헐렁한 나시 티를 입어 육감적인 신체를 뽐내는 유우토와, 말끔한 턱시도 차림으로 단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콜베르가 있었다.
둘은 등을 맞댄 채 각자의 악기를 연주했다.
1분에 걸친 연주가 끝나자 둘은 악기를 헐렁하게 잡았다. 그러자 화면에 노이즈가 꼈다.
“음?”
윤희연은 인터넷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급히 모니터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까 비서가 찾아왔을 때도 흐름이 끊긴 게 짜증 났는데 이번엔 인터넷이 문제라고?
화가 나려고 한다.
‘시설관리하는 애들은 노는 거야? 대표 집무실 인터넷이 이따위…….’
노이즈가 배경과 섞여들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노이즈가 끝나자, 유우토와 콜베르는 전혀 다른 복장으로 정면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올 블랙의 테크웨어다.
그 모습은 특수 요원 같기도, 현대적인 닌자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투명한 고글을 쓴 유우토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윤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헛삼켰다.
‘와.’
이건 진짜.
‘변태 같다…….’
변태 같은 스타일링이다.
나쁜 의미가 아닌 의미로.
유우토와 콜베르가 건조한 걸음으로 점점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의 시점은 점점 낮아진다.
이윽고 둘이 카메라 앞에 쪼그려 앉았다.
콜베르의 손이 카메라로 다가왔다. 그리고 쓰다듬는 것처럼 화면의 아래를 손으로 매만진 그가, 갑자기 손을 팍 위로 올렸다.
화면이 뒤집혔다.
뒤집힌 화면이 비추는 건 해변이었다.
파도가 규칙적으로 몰아치는 해변의 한가운데에 수영복에 래쉬가드를 걸친 남자가 서 있다. 그의 넓은 등과 어깨, 긴 다리가 아름다운 자연을 모두 다 제치고 시선을 빼앗는다.
그가 멀리 떨어진 카메라를 돌아본다.
윤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모니터에 눈을 가져갔다. 멀어서 얼굴이 잘 안 보이지만, 윤곽만으로도 잘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다가온다.
그리고 화면이 어두워졌다.
윤희연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멋지, 네…….’
비주얼적으로는 합격점이다. 어떻게 저런 얼굴만 뽑았을까, 놀라울 정도다.
‘저게 앞으로 내가 깔아뭉개야 할 애들이라는 거지…….’
정호환은 과하게 소녀연맹에게 관심을 두었었다. 그럼에도 소녀연맹이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케이어스와 접점을 너무나 많이 만들어주었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친분, 그리고 둘의 라이벌리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켜 소녀연맹을 성장시켰다.
모르긴 몰라도, 소녀연맹의 성장엔 KS 엔터의 지분이 40%쯤은 될 터였다.
‘난 그런 실수 안 해.’
옛날에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정호환의 자리에 있었다면, 소녀연맹을 그토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 이렇게 올라오기도 전에 깔아뭉갰을 것이다.
‘난 정호환 이사님과 달라.’
그 사람과 같은 실수는 안 한다.
윤희연은 비서에게 말해 1팀장을 들여보내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영상이 끝나지 않았다.
모니터에서 무언가 움직이자, 윤희연은 비서 데스크와 연결된 버튼에 둔 검지를 멈추었다.
하얀 배경.
주황색의 원이 있다. 그 안엔 간략하게 표현된 인간이 있다. 인간은 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오른쪽을 주먹으로 때린다. 원에 틈이 생겨 C 모양이 됐다.
인간은 그 틈으로 날아가듯 몸을 날린다.
그리고 그대로 멈춘다.
C에 가로획이 새겨져 G가 됐다. 그 G에서부터 글자가 하나씩 나타난다.
A, R, O.
[GARO Entertainment]
가로 엔터테인먼트.
새로운 가로 엔터테인먼트의 로고다.
그 아래로 로고보다 작은 글씨가 새겨진다.
윤희연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회사들마다 하나씩 있는 것.
모토(Motto)다.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이자 회사의 가치.
윤희연의 눈이 그 모토에 박혔다.
[We make the way to artistry!]
하.
윤희연이 헛웃음을 뱉었다.
이건 선언이다.
가로 엔터가 하나의 브랜드로 도약하게 되리란 선언. 그들이 쌓아온 모든 것을 부딪쳐, 도달하게 될 거라는 선전포고.
누구에게?
‘우리.’
KS 엔터에게.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거인들에게.
카오틱 에너지(진명, 眞名), 데뷔 시동(始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