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7화
“그러니까, 같이 못 가…….”
문득, 손혜빈은 강성욱과 처음 만난 날 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필이 연인이냐고 물었던 말. 그리고 애인인 매니저를 회사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고 했던 말.
그런데 역으로 말하면, 상대가 매니저라도 다른 회사에 있으면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필이 하는 말도 그와 비슷한 어감인 듯했다.
‘듯했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손혜빈이 술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였다.
“아…….”
성필이 하는 말을 해석했다.
오랫동안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고서 비로소 이해했다.
이건 고백이 아닌 말이었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고백이었다.
그새 매니저 윤리 의식이 가득해진 성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혜빈을 사랑하기에, 그녀의 매니저가 될 수 없다고.
그래서 오늘따라 슬퍼 보였던 모양이다.
재단사가 잘라낸 공간의 천 사이를 빗소리가 메워주었다.
“…….”
“…….”
침묵도 같이.
성필은 손혜빈을 응시하고 있다. 이젠 손혜빈의 차례라는 것처럼.
손혜빈은 자문(自問)했다. 아니, 상상했다. 성필과 애인이 된 순간들을.
그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하고 싶다, 가 아니었다.
손혜빈은 매사에 확실한 인간이다. 상대 기분 좋으라고 ‘네’라고 답하는 성정은 아니다.
예의상이더라도 ‘네’라는 대답을 쌓아가다간 ‘아니요’란 말에 가치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원래 있던 회사를 나오기로 결심한 날, 성필에게 배운 것이다. 자기 자신만큼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
손혜빈은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서, 속이고 싶지 않았다. 100%가 아닌 마음을 억지로 심장 안에 구겨 박고 싶지 않았다.
“그렇, 구나.”
하지만, 손혜빈은 성필에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 100%가 아닌 마음을 억지로 심장 안에 구겨 박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쓰레기 같은 말밖에 못 하겠다.
“그럼 있잖아.”
언젠가 100%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100%가 될 날이 오도록 길을 걸어가 보고 싶었다. 보통 친구로 남자는 말은 거절의 의미로 쓰이지만, 손혜빈의 문자 그대로.
“친구로 지내자.”
그렇게 말했다.
“아니.”
손혜빈은 고개를 저었다.
“메이트(Mate)로 하자.”
아마 친구라는 뜻이겠지만, 친구와는 다른 의미로 쓰고 싶다.
왜냐하면 둘은 이제 친구가 아닌 친구가 될 테니까.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식사를 해보기도 하고, 뻘쭘하게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해보고, 날이 좋으면 공원에 가기도 하고.
그렇게 마음을 쌓아갈 것이다.
결국 100%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둘의 관계가 흐지부지될 수도.
그러나 애매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100℃에 도달하지 못한 마음에 실망하며 그제야 관계를 잘라내는 쪽이, 훨씬 더 잔인하다.
사랑받고 싶은 게 아니다.
사랑하고 싶다.
그러니 100%에 이른 순간 고백해야겠지. 고백은 마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확인이니.
이런 길고 긴 다짐을 말로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손혜빈은 다만 이렇게 말했다.
웃으면서.
“갈라졌다고 모른 척하기 없기다?”
그제야 성필의 눈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거절로 받아들인 것이고, 거절이 맞았다.
다만 손혜빈이 직설적으로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든가, ‘아직은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성필이 직접적으로 고백의 말을 입에 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수줍음에 대한 보답이고, 벌이었다.
남자답게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어차피 가지 않은 길이다. 그때 그랬다면, 그런 수준의 말장난.
“메이트가 뭔데…….”
성필이 울면서 웃었다.
손혜빈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다가, 말았다. 그 대신,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그의 입에 부드럽게 물려주었다.
“네가 슬프거나 화나거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우리 성필이도 내가 부르면 바로 와줘야 해?”
성필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성필이 울음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러고서 그는 웃으며 손혜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럴게.”
그렇게, 둘은 그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환영해요!”
며칠 후 손혜빈은 SMS 엔터로 출근했다.
강성욱이 포옹을 하자 손혜빈의 의심이 강해졌다. 이 오렌지색 머리는 자신에게 무언가 감정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하지만 다른 직원들에게도 다 포옹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그냥 미국에서 산 탓인 모양이다.
소속 연예인들과 친해지고 난 다음에 그 일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었다. 강성욱이 성희롱으로 건의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강성욱은 시무룩해져서 남자 직원들에게만 포옹하고 다녔다. 1년 넘게 말이다.
그러자 또 다른 음흉한 소문이 생겨났고, 여차저차 일을 거쳐, 현재의 강성욱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모양이다.
웃긴 사람이다.
그 웃긴 사람과, 손혜빈은 그토록 바라던 자체 프로듀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혜빈 양, 곡 제목은 뭘로 하겠어요?”
프로듀싱 중 곡 선정 작업이 끝났다. 회의의 끝에 강성욱이 물었다.
손혜빈은 비 냄새를 떠올렸다.
그 비 냄새 안에는 향수 냄새가 섞여 있더랬다. 그날 맞은편에 서 있던 성필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성필이 갑자기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을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떠올리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픽 웃으며, 손혜빈이 말했다.
“‘퍼퓸’이요.”
“고저스!”
성필과 헤어진 후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너무 길진 않지만 충분히 긴 시간이.
손혜빈은 마음 정리가 끝났다. 성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100%의 길로 한 번 걸어가 봐야겠지.
손혜빈은 인터넷에서 인기인 영화를 검색했다.
‘남자는 무슨 영화를 좋아하지?’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들고 싸우는 영화로 골랐다. 시리즈물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있을 듯하고, 왠지 모르게 성필이 좋아할 느낌이 들었다.
손혜빈은 영화를 정한 후,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영화 보자고 말하려는 건데 은근히 두근거렸다.
‘놀라서 자빠지겠지?’
메이트니 뭐니, 그냥 거절의 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상대방이 통화를 받을 수 없어…….]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는데, 또 받지 않았다.
손혜빈은 그가 바쁜 거라 생각하고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약 30분의 고민 끝에 완성한 문자를 그에게 보냈다.
[이번 주 주말에 영화 볼래?]
바쁠 테니 답은 기다리지 않고 자기로 했다.
하지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중에도 괜히 폰을 들어 문자가 왔는지 확인하곤 했다. 알림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다음 날 일어나니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달이 야위고 다시 부풀어 오를 때까지.
* * *
“아이고, 드디어 끝났다!”
김태훈이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기나긴 석세스 엔터 인테리어 작업도 오늘날 드디어 끝을 맞이한 것이다.
반대쪽 소파에선 성필이 책을 읽으며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김태훈이 샐쭉해져선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형이 죽겠다는데 말도 없냐!”
성필은 재떨이에 재를 털며 답했다.
“거 배달까지 온 텔레비전 위치 좀 바꾼 거 가지고 엄살을 너무 부리시네.”
“매정한 놈. 어쩌다 너 같은 놈을 불렀는지. 아, 그리고 이제 담배는 옥상이나 아래에서 피워라.”
“네에?”
“아 작업할 때야 편하게 빨리빨리 여기서 했지, 이젠 연습생들도 올 거고. 비흡연자 직원들도 있을 텐데 그러면 쓰나.”
“에휴.”
성필은 좋은 시절 다 끝났단 것처럼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책을 테이블 위에 던지며 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럼 기념할 만한 돛대 하나.”
“너 그러다 죽어 임마. 근데 뭐 읽냐? 뭐야, 영어야? ‘All you need to know about music business’? 와, 뭐냐. 너 원서도 읽어?”
“한 시간에 한 페이지 읽습니다.”
“와, 어지간한 빡대가리구나?”
“형도 읽어봐요. 어려워요 그거.”
“내가 뭐 하러. 나느은 저기 텔레비전 님이나 만지러 가야지이.”
성필은 룰루랄라 춤추며 텔레비전으로 다가가는 김태훈을 웃으며 보았다.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텔레비전에서 손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돌리니, 음악 방송에서 ‘퍼퓸’ 퍼포먼스를 보이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야, 때깔 좋다! 여기서 막 우리 애들 음방에 서면 직원들이 모여서 막 보는 거야. 어때 어때, 죽이지?”
대답이 없었다.
김태훈이 뒤를 보자 성필은 넋 놓고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이상하게 여겨 그에게 다가가자, 성필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형, 내가 프로듀서가 되면요. 저기 혜빈 님 같은 아이돌을 만들고 싶어요.”
“혜빈 님? 새끼, 매니저라고 어지간히 공손한 말 쓰네. 야, 근데 너 저기 문자 왔다.”
성필은 테이블에 올려둔 폰을 들었다.
김태훈이 눈을 빛내며 그의 옆에 앉았다.
“거기 학원이냐? 연습생 걔 보내주겠대?”
“여자친구요. 오늘 못 만나면 헤어지겠대요.”
“하이고, 미안해서 어쩌냐. 한창 혈기 넘칠 나이인데, 요 며칠 내가 너무 잡아뒀네. 그래, 가. 가서 젊음을 즐겨.”
김태훈이 헉헉 과장된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튕겼다. 성필이 질색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야 부럽다 박성필! 브라보!”
“천박해 진짜…….”
“실례지만 너도 웃고 있는뎁쇼?”
성필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기 전, 무언가에 끌린 듯이 다시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무대를 마친 손혜빈이 거친 숨을 갈무리하며 엔딩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근데 왜 손혜빈 같은 아이돌이야? 뭐, 설마 기사 뜬 거 때문에 그래? 자체 제작 뮤지션? 그거 다 허위 광고야 임마.”
성필은 웃으면서 ‘그럴까요?’라고 답했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자 치익, 물먹은 휴지가 연기를 흘렸다. 그날 비 웅덩이에 담배를 던졌을 때처럼.
‘고마워, 누나.’
성필은 몇 초 손혜빈을 더 보다가 등을 돌렸다.
‘꿈이 생겼어.’
아니, 어렴풋한 꿈이 확실해졌다.
프로듀서가 될 것이다.
프로듀서가 되어서.
‘다시 보자.’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 * *
손혜빈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깨어남을 인지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카오틱 에너지’였다.
아무런 인과도 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을 뜨자 보인 건 희미한 빛을 받아 윤곽을 드러낸, 익숙하지 않은 배치의 방이었다.
부드러운 이불을 손으로 매만진 손혜빈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렇게 인식한 순간, 매캐한 향이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반쯤 뜬 눈을 향의 진원지로 돌리자 성필의 넓은 등이 보였다.
처음 느끼는 침대의 감촉과 성필.
그 두 개를 연결시킨 손혜빈은 눈이 커졌으나, 곧이어 동요가 가라앉았다. 성필의 복장이 어제와 똑같았다.
심지어 헤어스타일부터 땀을 머금어 달라붙은 모양새까지.
“어, 누나 일어났어?”
성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물린 담배를 본 손혜빈이 3차 충격을 받았다.
“너 담배…….”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혜빈은 잠시 상체만 일으킨 채로 침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불을 확 들어 시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다음 이불을 품으로 가져와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그러고선 ‘하’ 숨을 내쉬었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네.”
“꼭 해주길 바랐던 거 같네.”
“아니이.”
손혜빈은 성필 쪽으로 풀썩 엎드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굉장히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혜빈은 양팔꿈치를 가슴 앞으로 가져와 턱을 괴었다.
“네가 너무 수상한 모양새잖아.”
“수상해?”
“꼭 뭐 해놓고 의심 안 받으려고 옷 갈아입은 거 같아서.”
성필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뭐 한 건 아닌데, 의심 안 받으려던 건 맞아.”
“나도 담배 한 개비.”
“다 피웠어.”
손혜빈은 그의 발치에 놓인 쓰레기통을 내려다보았다. 안에는 물먹은 휴지가 깔려 있고 담배가 십수 개비나 버려져 있다.
몇 시간 동안 여기 앉아서 담배만 피운 건가.
손혜빈이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성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꽂아주었다.
“누나 금연했잖아.”
“사돈 남 말 하네.”
손혜빈은 연기를 빨아들이더니 황홀하게 내쉬었다.
“오케이, 금연 1일 차다.”
“나도.”
“리카한테는 뭐라고 할 거야. 실버타운 메이트의 맹세로 금연하기로 한 거잖아.”
“약속하고도 몇 번 피웠어.”
“그래? 나쁜 남자네 우리 성필이.”
한동안 담배 빠는 소리만 들렸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이 비치는 분위기가 좋았다. 밖에선 짹짹 청량한 새 소리와, 한적한 도로를 조용히 달리는 차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손혜빈은 마지막 한 모금을 남기고, 그것을 성필에게 돌려주었다. 성필은 거리낌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둘이 동시에 연기를 내쉬었다.
“성필아, 어떻게 될까?”
콜베르에 관해 묻는 것이다.
“아무 일 없으면 좋은 거고, 일이 있어도 할 건 정해져 있어.”
“그렇지…….”
“걱정하지 마.”
“위로해주는 거야?”
손혜빈이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성필은 웃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처럼 같이 쌓아가면 될 일이야. 누나가 아무리 괴롭고 절망해도, 내가 억지로 일으켜서라도 데리고 나아갈게.”
“믿음직스럽네, 우리 성필이.”
“메이트잖아.”
“……가끔은, 그때가 그리워.”
“언제?”
“너에게 내가 전부였던 시절.”
“나만 일방적으로 손해잖아.”
“그리고, 나에게 네가 80%쯤이었던 시절.”
“손해 맞잖아.”
“싫어?”
성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나도 알잖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더 강렬하게 살아야만 한다. 맹렬하고 화려하고 우직하게, 절대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한 걸음 걷는 것조차 세상을 다 가질 것만 같이.
“데려다줄게, 나 씻어야 해.”
손혜빈은 찬찬히 방의 풍경을 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침대 위에 붙은 소녀연맹 멤버들의 브로마이드였다.
벌렁 드러누워 그것을 십수 초쯤 바라본 그녀는, 숙취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부탁할게.”
시간도 없는데 그냥 성필의 집에서 씻으면 안 되냐.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 * *
회의실에 성필, 손혜빈, 민경섭이 있다.
민경섭은 아까부터 무어라 떠드는 중이었다.
“용한 점집에 가서 물었는데, 아니 글쎄 저한테 액운이 껴 있단 거예요. 어제 바로 닭 잡고 굿했거든요. 그랬더니 액운이 자취를 감추었으니 한동안은 좋은 일만 있을 거래요. 그러니까 오늘도 분명 좋게 넘어갈 거예요. 그쵸?”
“경섭아 너 미쳤니?”
“샤머니즘은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 고유의 과학적인 종교란 말입니다아아아!”
미친 것 같다.
만약 콜베르가 멤버에게 폭행당한 게 사실이라면 가로 엔터는 되돌릴 수 없는 손해를 입는다. 손해의 이름은 시간이다.
그 불안을 미신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다만, 그 굿에 몇백만 원을 일시불로 냈단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수씨한테 들키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다시 생각하니까 들켜야만 한다. 그래야만 둘의 관계가 건전하게 이어질 수 있다.
“제가 무속인들 인터뷰집이랑 연구 논문도 읽어봤거든요? 이거 진짜 일리가 있어요! 영혼은 실존한다고요! 만약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몇천 년간 명맥을 이어오겠어요! 성경에도 귀신 나오잖아요! 코란에도 나와요! 역사가 곧 증거예요!”
“영혼 같은 건 없어.”
“혜빈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검증이라도 했어요?”
“영혼은 무게가 없으니까 중력의 영향을 안 받잖아. 그럼 지구 자전과 공존 속도를 합쳐서 초속 수천 킬로미터로 이동한다는 건데 그 좌표 설정을 고작 귀신 따위가 어떻게 하는데? 우주 공간을 떠돌면서 항상 땅 가까이 붙어 있단 게 말이 돼? 그게 되면 물리학자들이 제발 방법을 가르쳐달라면서 굿을 해야지. 굿해서 물어보라고 해,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
“……어쩔티비.”
민경섭은 품에서 부적을 꺼내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곧 부적을 씁쓸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상처받았는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비척비척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누나 너무 공격적이었어.”
“경섭이의 미래를 위해서야.”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 없었다.
둘은 정적에 잠긴 회의실에서 한마디 대화도 없이 있었다. 그때 성필이 입을 뗐다.
“설령 최악의 미래가 와도 자책하진 마.”
“안 해.”
“어제 그렇게 울어놓고선?”
“내가 힘들면 네가 도와줄 거잖아. 네가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있을 거 같아.”
“……그래.”
어떤 절망이 가로막아도 둘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소녀연맹, 우효민, 웨이퍼센트, 가로 엔터의 모두, 그리고 홍규헌을 위하여.
여기서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목표는 상장(上場).
자본과 시스템을 손에 넣어 권력을 얻어낸다. 그리하여 무엇에도 쓰러지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하고, 마침내 자유를 구가할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거국적인 목표를 뒤로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도와줄게.”
손혜빈을 위해서.
민경섭이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콜베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예상치 못한 무거운 분위기에 놀랐는지 움츠러들었다.
“콜베르, 어서 와라.”
“네…….”
성필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즉시 표정이 사라졌다.
“벗어.”
* * *
홍규헌은 시계를 보았다.
세 명의 이사가 콜베르를 대면하기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다. 이렇게 길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홍규헌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해소할 데 없는 짜증을 드러냈다. 여섯 개비째 담배를 입에 물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성필의 뒤로 손혜빈과 민경섭이 따라왔다.
“사장님.”
“어, 박 이사. 어떻게 됐어?”
성필의 표정으로는 사태가 어떻게 풀렸는지 판단할 길이 없었다.
성필이 거두절미하고 결과를 전했다.
“예상했던 나쁜 사태는 아닙니다.”
“흐아아아아으아에…….”
홍규헌이 그대로 의자에 널브러졌다. 전신에 힘이 빠졌고, 부하들 앞에서 체통을 지킬 정신조차 없었다.
“그리고 콜베르는…….”
성필의 템포가 빨랐다. 기다리고 있었을 홍규헌을 배려하여 최대한 빠르게 보고하려는 것이다.
홍규헌은 겨우 테이블의 모서리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막았다.
“뭐 어떻게 된 건데?”
성필이 입술을 뻐끔댔다.
고작 1초 정도에 불과했지만, 홍규헌은 그것만으로도 속이 타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1초,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고 성필이 말을 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해(自害)입니다.”
“……자해? 뭐, 힘자랑하다가 다쳤어? 아니면 혼자 놀다가 어디 들이박거나.”
그리 말한 홍규헌은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성필은 ‘자해’라고 표현했다.
자해에는 스스로 자(自)가 포함된다. 스스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의지로…… 멍이 생기는 게……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정말로…….
“진짜 자해……?”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베르는 자해로 왼쪽 가슴, 명치, 허벅지 안쪽에 이르는 멍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