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36화 (736/760)

736화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영화를 관람하는 기분.

성필은 철저한 관찰자가 됐다.

얇은 망막이 이중으로 나뉘어 완벽하게 현실을 차단하고 가상의 광경을 투사한다.

아니, 가상이 아니다.

직관적으로 알겠다.

저것은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니고, 그렇기에 미래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환각이나 환상 따위로 치부할 수 없는 초월적인 현실성이 느껴진다.

성필의 눈을 눈꺼풀이 덮었다.

어둠.

그리고 눈을 뜨자, 또다시 어둠이었다.

커튼의 옅은 재질을 겨우겨우 뚫고 들어오는 자그마한 빛의 입자들이 윤곽만을 비춰주었다.

웅크린 손혜빈.

그녀는 성필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성필의 입에서 새어 나올 말을.

“성필아……?”

침묵이 길어지자 손혜빈이 그를 불렀다.

“누나.”

“……어.”

“나는 누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어.”

또 침묵이 이어졌다.

손혜빈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저런 답이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다. 가장 편한 답이니까. 자기보다 어린 동생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세상 누구도 그러지 못해.”

하지만 성필의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손혜빈이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어둠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계시처럼 말이 쏟아졌다.

“누나는 타인의 말을 들어선 안 돼. 누나의 일이야. 이 세상 누구도 누나만큼 고민하지 않고, 누나만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조언을 구하면 몇 초 생각하다가 아무렇게나 나오는 말이나 지껄이겠지.”

몇 초 생각하다가 아무렇게나 나오는 말.

그 이야기는 손혜빈의 머리를 강타했다.

떠오르는 광경이 너무 많았다.

부모, 친구, 선배, 인생의 연장자, 그런 사람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했을 때였다.

그들은 공감하는 표정을 지은 후 곧바로 답을 쏟아내곤 했었다.

나름 고민이라고 할 것이래 봐야 몇 초 뜸 들이는 게 전부.

그땐 주의 깊게 들었었는데, 확실히 그렇다.

“단 몇 초의 사려(思慮)조차 없는 말이야. 없어.”

성필이 반복했다.

없다, 라고.

“책임지지 않는 인간들의 말에는 깃털 하나만큼의 무게조차 없어. 이랬어야 했다, 저랬어야 했다, 옆에서 훈수 두는 인간들은 게임판 위에 올라와 있지도 않아.”

성필의 목소리에 괴로움이 짙게 묻어나왔다.

“나조차도 그래. 이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 내 말조차 그렇다고. 생각해봐. 기적적으로 대표님이 누나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앨범 프로듀싱을 진행하고, 망하면? 주변에서 그러겠지.”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성공하면?”

대체 그 인간들이 무슨 말을 지껄일까.

그렇구나, 성공했네, 축하한다, 잘됐네.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렇게 말하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말과 종이 한 장 차이도 없는 가벼움. 그러한 칭찬을 개한테 먹이 던지듯 던져줄 것이다.

당연하다.

깃털 하나만큼의 책임도 없이 던졌던 만류와 조언과 설득과 지지와 칭찬이었을 테니.

“대표님이 누나의 제안을 거절할 때 단 1분이라도 고민했겠어? 그런 기색을 보였어? 아닐 거야. 바로 ‘미쳤냐’는 말이 튀어나왔겠지.”

폐부를 찌르는 지적에 손혜빈은 숨이 막혀왔다.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아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울음이었다. 손혜빈은, 그야말로 감동했다.

“이 세상 누구도, 설령 가족조차도, 누나만큼 오래 누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 다른 인간들의 말을 들어선 안 돼. 책임 없는 인간의 말에, 누나가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해.”

그로써 모든 성공을.

모든 승리를.

모든 영광을.

패배와 울분과 고통조차도.

“누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해. 누나의 의지로 시작된 성공을 다른 사람의 공으로 치부하는 것도. 누나의 실수로 야기된 실패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도. 너무 비참하잖아.”

성필은 숨을 헐떡였다.

운동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찼다.

자신이 한 말에 담긴 무게를 알기에 힘든 것이다. 성필은 손혜빈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그럼으로써 자유를 부여하려고 했다.

진짜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다니는 학교, 선택한 직장, 가지는 취미마저 주변의 영향을 받은 것일 텐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전부 떨쳐내고 진정한 자유로 나아갈 기회가, 얼마나 많은 인간에게 주어질까?

새장을 뛰쳐나간 이들이 짊어지는 자유의 무게.

황금 족쇄를 끊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달픈 자유.

극소수의 인간만이 감당하는 고통을, 성필은 그녀에게 주려고 했다.

“누나가 선택해야 해. 누나의 마음을 따라서.”

“나는…….”

“지금 왜 울고 있어?”

손혜빈의 울음에 나약함이 담기자마자 성필이 되물었다.

그에 울음이 뚝 그쳤다.

왜 울고 있느냐.

무엇을 바라여 이 어둠 속에 갇혀 눈물을 삼키고 있는 건가.

“난…….”

손혜빈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성필은 그 방을 나왔다. 선택은 그녀의 것이다. 할 말은 전부 다 했다.

성필은 건물을 내려가 담배를 피웠다. 고개를 들고 손혜빈이 있을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꼬나쥔 손이 떨렸다.

아까 보았던 광경이, 미래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미래에서 성필과 손혜빈은 연인 사이였었다.

하지만 손혜빈은 우울과 절망 속에 살았다.

연예인으로서 그저 그런 인기를 구가하고, 밤을 술과 담배로 달랬다. 행동거지와 말투 하나하나에 체념이 서려 있었다.

끝없이 영락해버린 별이다.

그걸 지켜보던 성필은 손혜빈과 연인이 되었단 기쁨 따위 없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기쁨보다 슬픔이 컸었다.

후회, 했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말을 입에 담으며.

“그때 그랬다면…….”

그랬었다면, 달라졌을까.

* * *

손혜빈은 소문으로만 듣던 SMS 엔터의 강성욱 대표와 마주했다.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프로듀서 중 한 명이라, 절로 긴장됐다.

“흐음, 곤란하네요.”

강성욱은 머리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그럴 때마다 한 갈래로 묶어 어깨에 걸쳐 놓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40대에 소화하기엔 과하게 튀는 색이며 헤어스타일이지만, 옷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작은 구멍이 망사처럼 숭숭 뚫린 흰색 티셔츠라니, 손혜빈은 눈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계약 만료 전에 다른 음반사와 접하는 건 계약 위반일 텐데요.”

“그런 조항이 있나요……?”

“보통 다 있어요. 그렇지 않을까요?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아티스트가 딴마음 품고 스케줄에 소홀할 수 있으니까요.”

“아…….”

강성욱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을 멈추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뭐, 그렇게 따지면 저도 좋은 일을 하는 건 아니죠. 애초에 제가 만나기로 결정한 거니 공범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걱정 말아요, 제가 그쪽 대표한테 일러바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요.”

손혜빈의 안색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제가 곤란하다고 했던 건 위약금 쪽이에요.”

“그, 그건 제가 대출을 해서라도 지불할 테니 모쪼록 SMS 엔터로…….”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쪽 대표가 소송을 걸고 혜빈 양의 연예 활동을 완전히 정지시킬 거예요.”

“그, 그럴 수 있나요?”

“그럼요. 계약상 혜빈 양의 매니지먼트 권한은 관리권자, 즉 혜빈 양의 현 대표에게 있으니까요. 마음대로 방송에 출연하거나 곡을 내면 불법이에요. 감옥에 갈 수도 있다구요?”

“아, 그, 그럼…….”

손혜빈이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가 세상사 다 망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애초에 불가능한…….”

“아니요, 불가능하지 않죠.”

“네? 방금 하신 말씀이랑 다른데…….”

“돈은 사랑을 비롯한 소수의 문제를 제외하고 많은 것들을 해결해줘요. 위약금 이상의 돈을, 그러니까 혜빈 양의 기대 수익을 초과하는 금액을 주고 데려올 수도 있을 거예요.”

손혜빈의 기대 수익 이상.

즉, 손혜빈의 활동 계약 기간 동안 벌어들일 것으로 추정되는 금액 이상을 지불하겠다는 뜻이다.

그리해야만 대표가 깔끔하게 손혜빈을 놔줄 테니까.

대체 얼마일까.

손혜빈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그게 고작 1억 원 2억 원 수준일 것 같진 않았다. 위약금까지 합치면 그 금액을 아득히 넘어가겠지.

“그렇게 해주실, 거예요……?”

“혜빈 양.”

강성욱이 엄하게 그녀를 불렀다.

손혜빈은 곧바로 사과했다. 자신이 몰염치한 부탁을 했단 걸 깨달아서였다.

하지만 강성욱은 곧바로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혼내려던 게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감이 매우 좋다고 생각해요. 제 감이 말하는바, 혜빈 양은 제게 지출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줄 것 같아요. 그러니, 노력해볼게요.”

감?

고작 그런 이유로 몇억을 쓰겠다는 소리인가?

손혜빈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 이 오렌지색 머리의 변태(손혜빈의 개인적인 의견)가 자신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더 오므렸다.

“아니지, 이렇게 표현하면 혜빈 양께 실례겠지요.”

“뭐가…….”

“지출 이상의 수입이라는 표현은 혜빈 양을 상품처럼 말하는 거니까요. 혜빈 양은 스타가 될 거예요. 한국을 휩쓰는 스타요. 그러니까 고작 몇억, 얼마든지 쓸게요.”

“진심이세요……?”

“진심이에요.”

강성욱이 싱긋 웃었다.

“저는 Cool하니까요. 허언은 입에 담지 않아요.”

“그럼 언제쯤…….”

“지금 바로 시작할까요?”

손혜빈은 슬슬 이 사람이 거짓말하는 게 아닌지 의심됐다. 그녀가 사업 경험은 없지만, 모든 일을 대표 독단적으로 할 수 없단 것만은 안다.

독단적으로 할 수 있더라도, 그런 회사였다면 진즉 망해야 정상이다.

머리 맞대고 고민할 직원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왜 굳이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한단 말인가.

‘아니야.’

전에 성필은 말했었다.

세상 누구도 자기 자신만큼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건 회사 직원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판단은 회사의 주인만이 온전히 할 수 있다.

손혜빈이 얼마 전에 깨달은 사실을, 강성욱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타인의 비난이나 칭찬, 만류와 지지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초인이다.

그래도, 손혜빈은 굳이 되물었다.

“회의 같은 건…….”

“회의는 고민되는 사안에나 필요한 거예요. 제 회사니까 제가 결정해요. 그럼 바로 가볼까요?”

강성욱은 핸드폰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현재 회사에 쓸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지정된 시일까지 현금으로 마련인지 가능한지 묻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혜빈 양.”

“어디로요?”

“혜빈 양네 회사요. 오늘 담판을 짓죠.”

“네헤?”

거짓말이 아니다.

느낌 같은 게 아니다. 강성욱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논리적 증거가 있다.

만약 이대로 손혜빈과 강성욱이 대표에게 찾아간다면, 강성욱의 말마따나 대표가 소송을 걸고 손혜빈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간다는 건 이런 말이다.

“반드시 혜빈 양을 Get 하겠어요.”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태도이지만, 말투가 소름 끼쳐서 참기 힘들었다.

심지어 윙크까지 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고맙다. 고마워서 읍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꿈인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전에.

“저기,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요.”

“네에, 뭐든지 말씀하세요.”

“매니저를 한 명 더 고용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남자인가요?”

“네? 네.”

강성욱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애인인가요?”

“네?! 절대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해주셔야 해요. 다시 물을게요. 정말 애인이 아닌가요?”

손혜빈은 혼란스러웠다.

그야, 성필은 애인이 아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망설이면서, 손혜빈은 답했다.

“그, 아니라니까요…….”

“알겠어요. 신뢰는 모든 관계의 기본. 먼저 그 말을 믿도록 할게요. 자, 가죠.”

손혜빈은 강성욱의 뒤를 따라나섰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 사무실 중앙 복도를 가로지르자 직원들이 소리 높여 인사했다.

사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손혜빈은 담고 있던 의문을 드러냈다.

“애인이면 안 되나요?”

“그럼요.”

“왜요?”

“매니저와 연예인이 사귀는 건 직업의식 부재, 직업윤리 위반,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에 큰 리스크예요. 대외적인 이미지로선 최악이죠. 알겠지만 우리 회사는 아이돌이 메인이고 주력이에요. 그런데, 매니저와 사귀는 가수가 있는 회사라고 소문이 나 봐요. 팬들은 아이돌이 순진무구하고 완전무결하며, 또한 순결하기를 바라는 법이거든요. 이브가 유황 구덩이에 있어선 안 되죠. 그런 이미지를 파는 거예요, 저는.”

강성욱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미국에서 산 적이 있고 미국 문화를 동경하는 그는, 아직 아이돌의 대우에 관한 고민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용납할 수 없어요.”

손혜빈은 고개를 주억였다.

강성욱은 뭔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는 얇은 한숨과 함께 질문을 날려버리고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요.”

손혜빈은 조수석에 탔다.

차가 최후의 전장으로 출발했다.

어쩐지 모르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슴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 * *

“오늘은 뭐든 마음껏 시켜!”

손혜빈은 가게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모처럼 회포를 풀 생각으로 고깃집의 가장 안쪽 방을 예약했는데, 성필은 소리가 새어 나갈까 걱정하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누나 좀 조용히…….”

“에이, 이렇게 기쁜 날에 무슨 예의야?”

지난했던 과정이 끝났다.

대표가 강성욱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손혜빈은 바로 어제까지 원래 있던 회사의 일로 스케줄을 뛰었다.

미리 계획되어 있던 스케줄은 전부 처리하고 회사를 떠야 했기 때문이다.

대표는 이미 남의 식구가 된 손혜빈에게 각박하게 굴었다. 최대한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여 스케줄을 소화하는 건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필도 손혜빈을 따라 회사를 나갈 게 거의 확실시됐다.

둘 다 졸지에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그러했지만 말이다.

“부어 마셔 다 비워!”

세상이 둘을 찌그려 부숴버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수록 둘은 서로에게 더욱 밀착하여 온기를 쌓아갔다.

서로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고단한 시절이었지만, 동시에 둘의 신뢰가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힘들었단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던 터라, 손혜빈은 그 고통이 끝난단 게 마냥 기뻤다.

“난 안 마실래. 누나 태워줘야 하니까.”

“뭔데 뭔데. 나만 술 마시게 하고 뭘 하려고?”

“아 진짜 그만해…….”

“그래, 알겠어.”

귀엽기는.

그래도 성필은 결국 술을 마셨다. 차를 타고 가는 거야 대리기사를 부르면 될 일이니까.

각자 소주를 한 병 반씩 비우자 자리가 끝날 기미가 보였다. 그러자 손혜빈은 쑥스러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성필아 고마워. 그때 나 다잡아준 것도 그렇고, 오늘까지 같이 버텨준 것도…….”

“새삼스럽게 뭘. 난 누나 매니저잖아.”

“그치, 내 매니저지, 우리 성필이…….”

손혜빈은 몽롱한 눈으로 소주병을 응시했다.

마시려면 더 마실 수 있겠지만, 이 이상 마시면 정신을 확실히 잃을 것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고생했던 성필에게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술의 마력이란 게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내일 일어났더니 성필과 한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떡하는가.

몇 개월 전이었다면 ‘성필이가?’라며 반문했을 생각이었다. 그가 그럴 리 없다면서, 이 생각을 떠올린 즉시 속으로 웃어넘겼겠지.

애초에 이성으로 보이지 않던 애니까. 그냥 연년생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제 나갈까?”

“그러자.”

성필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둘은 계산을 끝내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건물 외곽으로 살짝 나온 지붕 아래로 향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서로 불을 붙여주었다.

몸 안에서 알코올과 연기가 얽혔다.

손혜빈은 술기운에 자꾸 좌우로 몸이 왔다 갔다 했다. 기어코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디려는 것을 성필이 부축했다.

“아, 미안, 쏘오리.”

“조심해.”

“어, 그래야지. 이제 새 인생 시작인데 여기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어떡하냐.”

손혜빈은 담배를 절반쯤 피우고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수락받을 게 거의 확실한 사항이지만, 손혜빈은 약간의 긴장을 품고 물었다.

“너 지금 회사 계속 있을 건 아니지?”

“미운털 다 박혔는데 어떻게 있어.”

“그럼, SMS 엔터로 올래?”

성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손혜빈이 물어본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성필이 막 연기를 들이켰을 때 물어버렸으니.

그래서 생겨난 고작 1·2초의 공백.

손혜빈은 제 발 저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마구 쏟아냈다.

“계속 내 매니저 하고 싶잖아. 그치? 나처럼 잘해주는 연예인 앞으로도 없을걸? 요즘 매니저 된다고 하면 너보다 한참 어린애들 수발드는 일 외에 없을 텐데, 요즘 애들 성질 더럽다더라. 막 엄청 부려 먹는다던데?”

“응, 내 친구도 그렇다더라.”

“네가 매니저 친구가 있어?”

“하음이라고, 있어.”

“그 사람이 그렇대? 뭐 어떻대?”

“왜 모르는 사람처럼 놀라. 아까는 다 아는 것처럼 말하더니.”

“아, 그렇긴 한데 건너 들은 거라서…… 신기해서 그랬지이 임마!”

손혜빈은 쑥스러워서 성필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실실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조이고 있는데,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뻘쭘해서 그의 머리를 놓았다.

성필은 아련한 눈초리로 바닥을 보았다.

그제야 손혜빈은 심각해졌다.

“내 매니저 하기 싫어?”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성필과 떨어진다는 미래는,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다.

“어.”

성필이 즉답하자 손혜빈은 피가 식는 듯했다.

술기운과 담배의 효과로 짜릿하게 달아 있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리가 혈관을 지나며 상처를 수도 없이 만들어내는 것만 같았다.

아팠다.

“나는…….”

성필은 입을 다물고 다시 담배를 빨았다. 그는 담배를 거칠게 땅에 버렸다. 물웅덩이와 만난 담배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빠르게 꺼졌다.

그가 손혜빈을 마주 보았다. 목울대가 선명하게 떨려왔다.

“나는, 누나 매니저 하기 싫어.”

“……왜애?”

손혜빈은 자기가 생각해도 멍청한 소리로 되물었다.

“내, 내가 자꾸 마사지시켜서 그래? 그, 그게 귀찮았나? 헤헤, 미안. 그게, 내가 너무 부려 먹었지? 아아, 알겠어! 그럼 그건 없다! 계약 조건에 써둘게. 그거 말고 또, 아. 월급이 많이 짜긴 했지? 음음, 그렇지. 미래가 안 보이긴 해. 그럼 내 사비로 더 채워줄게. 또 뭐가 있지…….”

“난 누나 매니저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재단사가 천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가위를 들이밀었다. 가위의 안쪽과 맞물린 천이 찌익, 균열을 내며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시간의 단절과 함께, 공간도 갈라진 듯했다. 둘이 서 있는 공간이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외따로 존재한다.

“누나 매니저가…….”

성필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나는 누나의 매니저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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