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31화 (731/760)

731화

필요한 건 하이라이트에서 쓸 금관악기와 피아노의 합주다.

치논이 피아노 앞에 자리 잡았다.

금관악기 플레이어들은 아까 치논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인지 긴장한 기색이었다.

[브라스는 녹음이 끝났다고 했지만, 합주로 다시 해볼게요. 다시 수고해주세요.]

치논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마우스피스에 입을 가져가는 그들을 보곤 연주할 자세를 취했다.

힘찬 브라스의 외침과 함께 피아노의 반주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간단한 반주.

하지만 아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케빈이 요구한 대로 치논은 ‘델로니어스 몽크’와 ‘키스 자렛’을 반반 섞었다.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결코 얕지 않다. 힘찬 터치 안에는 여운을 짙게 남기는 잔향이 남는다.

그 단단한 대지 위에서 금관악기가 멜로디가 되어 달려 나간다.

녹음실 밖, 케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좋아…….”

다음 녹음.

이번에는 2절의 하이라이트다.

아까와는 주역이 바뀐다.

1절이 페이드되고, 2절의 빌드업과 프리 드롭까지 지나서, 곡의 하이라이트인 드롭 파트.

치논의 오른손이 빗방울 위에서 춤을 추었다.

이번에는 피아노가 멜로디였다. 반주일 때보다 더욱 힘차고 격렬했다. 퀵스텝을 밟는 모던 댄스 댄서처럼 한걸음에 보통 사람의 몇 발자국을 밟고 나간다.

케빈이 흥분하여 충혈될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너를 추억할 건 눈물과 술뿐이겠지.]

백설하의 보컬.

그게 분수령이 되어 다시 금관악기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치논은 언제 달렸냐는 듯 다시 왼손만 움직여 반주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피아노의 선율을 대신하여 금관악기가 주선율로 등장했다.

단순한 음색의 피아노 뒤에 화려함이 덧칠된 금관악기가 등장하자 효과가 더욱 극적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주체할 수 없는 고양감에 휩싸였다. 기쁘게 바람을 불며 주선율과 함께 질주했다.

“좋아, 좋아, 좋아……!”

앞으로 한 마디.

음악의 끝을 고하는 팀파니 소리.

쿵, 여운을 남기지 않는 강렬한 타격과 함께 모든 연주가 끝난다.

끝나야 했다.

“어?”

치논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연주를.

이제까지 그녀는 반주를 하거나 멜로디를 연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반주와 멜로디를 동시에 했다. 적막 속에 그녀가 생(生)으로써 발하는 현의 울림이 차올랐다.

이전까지 음악을 채우던 모든 음향을 압도했다.

풀 오케스트라와 같이 풍성했고, 독주(獨奏)처럼 정밀했다.

그 광경을 보는 성필은, 전날 재즈 클럽에서의 치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뮤지션이 무대에서 나가떨어져 홀로 피날레를 장식하던 그녀를.

치논 혼자 밴드가 되었던 기적이 다시 펼쳐졌다.

따로 존재하던 반주와 멜로디를 합쳤을 뿐인데, 그 연주는 비교할 곳을 찾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약 20초에 이르는 코다(coda, 종결부).

비틀즈의 ‘Hey Jude’처럼 페이드아웃은 없었다.

언제까지고 선명하고 또렷하고 명백할 것만 같이 쭉 뻗어나갔기에, 그녀가 건반에서 손을 뗐을 때의 여운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득 차 있던 바다가 빈 것처럼 쓸쓸하고 적막했다.

이 곡의 주제와도 비슷했다.

사랑하던 연인의 부재(不在).

“예에!”

케빈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넌 나쁜 놈이야(You’re Badass)!”

의자에 올라가 재킷을 빙빙 돌리며 발광하는 케빈은 없단 것처럼, 백설하는 치논의 연주를 듣고 감동에 떨었다.

“정말…….”

그 소리에 성필은 백설하를 쳐다보았다.

“저 정도는 되어야…… 동양인이 그래미를 받나 보네요…….”

치논은 백설하가 품은 꿈의 현현이었다.

심지어 치논이 그래미상을 수상했던 건 백설하보다 훨씬 어렸을 때였다. 그것도 본인의 앨범으로 수상한 것이다.

아니, 그러한 경력을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치논의 연주는 사람들의 심장을 강타했다.

“저게…….”

정상급 뮤지션.

한 분야의 정점.

백설하는 스승인 이인성과 마주했을 때의 감상을 다시금 느꼈다. 자신이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 말이다.

이 땅 어딘가에 이인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분야이지만 그와 같은, 아니, 그를 뛰어넘는 수많은 뮤지션이 있을 것이다.

백설하는 그러한 땅에 있다.

숨 쉬듯이 위대한 예술가를 배출해내는 나라에.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피부를 찔러서, 그녀는 떨었다.

그때 성필의 손이 그녀의 어깨로 올라왔다.

“설레지?”

“네?”

“너도 언젠가 저런 모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뮤지션으로서, 언젠가 치논에게 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직 그만한 길이 있음을 떠올리면.

“설레지 않아?”

“……네.”

뱃속에서 퍼지는 이 울림이 설렘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설하는 성필의 말이 맞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러네요.”

설렘은 아니겠지만, 설렘이 섞인 건 맞을지도 모른다.

미소가 지어지니까.

* * *

레코딩이 끝난 후 케빈은 성필에게 연신 감사를 전했다. 그의 손을 붙잡고 어찌나 재잘재잘 말이 많던지, 성필이 그만두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난 한 게 없는데 왜 그래.”

“설하 씨의 피처링을 허락해줬잖아! 또 저기 치논 씨도!”

치논은 대화하는 둘에게서 살짝 떨어져 있었다. 현관홀에 벽 쪽 화분에 핀 용설란(龍舌蘭)을 흥미 깊게 보는 중이었다.

“그뿐이면 이렇게 좋아하지 않지! 내 감이 말해주는데, 이 곡이 진짜 미치게 끝내줘! 이 곡이 차트에 못 오르면 세상에 오를 곡 하나도 없어!”

“그 정도야?”

“성필은 의외로 감이 없구나. 척 들으면 모르겠어? 이건 마스터피스야. ‘디제이 맥(DJ Mag, 디제이 매거진)’에서 올타임 레전드 곡 탑1,000 안에 꼽아줄 거라고!”

그리 말한 케빈은 꺼칠한 수염을 쓸더니 실없이 웃었다.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올타임 레전드 탑1,000이란 게 실재하지도 않고. 있다면 정말 역사를 바꿀 정도의 혁신적인 곡에게 주어지겠지.”

“아까랑 말이 다른데? 엄청 좋은 곡이라면서?”

“지금 씬에 있는 인간들이랑 싸워볼 만하단 뜻이지. 암튼, 감이 왔어. 음반사 인간들도 들어보고 ‘이건 바로 발매해야 해요!’라면서 난리를 칠걸?”

미국의 음반사들은 뮤지션에게 악명이 높다.

뮤지션이 혼을 갈아 작업한 앨범도 안 팔리겠다 싶으면 다시 만들라고 한다.

슈퍼스타에게까지 그럴 순 없겠지만, 케빈 같은 신인들에겐 당연히 지나야 할 관문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앨범과 곡을 홍보하고 제작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만큼, 상업성이 없다면 굳이 발매해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케빈도 그런 악명을 알고, 직접 겪기도 했을 텐데,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진짜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필이 좋다고 생각한 곡이 미국에서 통한단 보장은 없다. 그의 전문 분야는 어디까지나 아이돌이니 말이다.

그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야 할 필드는 한국과 세계의 케이팝 팬덤이다.

‘그러니까 내 말에 케빈이 용기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성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음반사 임원이었어도 그럴 거야. 이건 네 말대로 진짜 끝내주는 곡이거든.”

케빈이 씩 웃어 보였다.

“고마워, 정말. 언제 한 번 놀자. 나 요즘도 가끔 내 동네 클럽 디제이로 서거든. 거기 와. 좋은 술이랑 자리를 준비해둘게.”

“내 얼굴을 봐.”

성필이 눈가에 서린 주름을 검지로 짚었다.

“입구에서 안 막히면 다행이지.”

“음…… 확실히 옛날보다는 동양의 신비가 많이 죽었네. 그래도 뭐, 괜찮지 않아?”

“안 괜찮아. 됐고 빨리 가봐. 올리비아가 기다리고 있잖아.”

“올리비아는 다른 뮤지션 일로 딴 데 갔어. 아무튼, 수고했어 성필. 고맙고.”

그렇게 둘은 인사를 끝냈다.

성필은 케빈을 보내고 치논에게로 다가갔다.

성필의 그림자와 치논의 모습이 포개어졌다.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그녀는 성필이 곁에 왔음을 눈치챘다.

치논이 미소 지었다.

“이사님.”

“오늘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빚을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네.”

성필은 양손을 모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떤 작별 인사를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만나서…….”

내리깐 성필의 시야로 치논의 얼굴이 나타났다.

성필은 깜짝 놀라 발을 뒤로 물렸다.

그녀가 화난 척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얼굴을 보고 말씀하셔야죠?”

“아, 네.”

성필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나중에…….”

나중에.

그리 말한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먹죠.”

“밥이요?”

“어…… 한국식 인사예요.”

“언젠가…….”

치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젠가 다시 만나요.”

그녀가 떠나갔다.

성필은 잠시 시선을 내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그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져 해가 기울었다.

벽처럼 대로(大路) 양옆을 메운 빌딩, 그 사이로 주황색의 빛이 비쳐 들어왔다. 비친다기보다는 뚫고 오는 것만 같았다.

한풀 꺾이는 더위를 느끼며, 성필은 리카와 백설하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리카가 금방 아는 체했다.

“쌤이 무료 노동을 했단 게 사실인가요!”

“무료는 아니야. 보컬로 이름을 올릴 테니까 스트리밍 저작권료를 받겠지.”

“아타시(저)도 할 걸 그랬네요!”

“30초 이상 목소리가 나와야 해.”

“에, 그런 제한이 있나요!”

“응. 매니저님은 오신대?”

소녀연맹은 미주 투어 전용 투어 매니저들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가로 엔터에서 파견한 매니저가 그녀들의 생활을 돕기로 되어 있다.

민경섭이 ‘레벨업 이벤트’라고 부른 건데, 가로 엔터의 최고참 중 하나인 김수희 매니저가 와 있었다.

“하이(네)!”

“오늘 저녁은 프리로 뒀는데, 이렇게 부르니까 미안하네.”

“수희 언니가 얼마나 신나 하시는지 몰라서 그러세요.”

백설하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1년 내내 미국 출장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걸요?”

“그래? 아주 편한가 보네.”

투어가 시작되면 그런 말이 입에서 쏙 들어갈 거다.

2년 전에 미국 투어를 해본 소녀연맹은 그 고충을 알았지만, 김수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백설하의 표정이 사악했다. 곧 고통을 겪고 초췌해질 김수희의 몰골을 기대하는 듯했다.

하기야, 소녀연맹 멤버들은 투어 생각에 편히 못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정 모르는 김수희가 ‘미국은 좋네’란 말을 하고 있으니, 소녀연맹 멤버들은 기가 막혔겠지.

‘언니도 당해봐요’란 마음으로 멤버들 전원이 김수희에겐 입을 꾹 닫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이사님은 오늘 돌아가시는 거죠?”

“그렇지.”

“갑자기 잡히신 미팅만 아니셨어도 빨리 돌아가셨을 텐데.”

“뭐 어떡해.”

레버 레코드의 사람이 성필을 불렀다.

용무는 모처럼 가로 엔터의 이사님이 오셨다니 밥이나 함께 먹자는 건데.

‘비즈니스적으로 연관된 사람이 밥을 먹자는 게 정말 밥을 먹자는 뜻일 리 없지.’

김수희가 도착하고, 성필은 택시를 잡아 탄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잠시 후 택시 기사가 물었다.

“꽃입니까?”

“네? 아…….”

성필에겐 익숙해진 향기여서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주머니에 곱게 꽂아두고 있던 백합을 꺼내었다. 택시 기사가 웃었다.

“향이 좋군요. 여자친구분께 드릴 겁니까?”

“……아니요. 받았어요. 백합입니다.”

“좋으시겠네요. 흰색이 아름답군요. 의미가 순결이던가요?”

백합은 죽음을 상징한다.

백설하가 그리 가르쳐주었다.

성필은 백합의 줄기를 잡고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느리게 말했다.

“글쎄요.”

* * *

치논은 성필에게 빚을 갚았다.

성필의 입장에선, 쥔 것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손에 들어온 카드였다.

성필도 모르고 있던 치논과의 연결점.

예를 들자면, 그 카드는 관심 있는 이성에게서 들은 ‘오늘 얻어먹었으니 다음에는 제가 밥을 살게요’라는 말이다.

심리적인 빚, 그 무게가 사람을 이어준다.

그 카드를 쓸 결정권은 성필에게 있었을 텐데, 치논이 그 카드를 내놓으라고 말했었다. 성필과 크게 관계없는 일에 내놓아야 할 판돈으로서 말이다.

성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굳이 성필이 인지하고 있지 않아도 될 빚을 꺼내고, 그것을 청산한다.

‘아예 아무런 접점이 없도록.’

명분이 필요했다기엔 그게 리카와 관련이 없는 명분이었다. 그녀를 부른 게 리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마음이 더 자라나기 전에.’

그 마음을 미래를 짜낼 실이 아닌,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기기 위해서.

치논은 성필에게 카드를 쥐여주고 다시 테이블 위로 내놓으라고 말했다. 이젠 두 사람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다.

성필은 시원하게 카드를 테이블로 내던졌었다.

치논이 굳이 꺼낸 ‘빚’의 의미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알겠다’고 했던 그의 얼굴에선,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는 짓지 못할 후련함이 보였었다.

“아.”

치논은 한 가게 앞에서 멈췄다.

통유리 안으로 가득한 책이 보인다.

대형서점이다.

치논은 몇 번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는 해외 소설 코너로 향했다.

일본 소설만으로 채워진 책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고전 소설만이 있었다.

[Natsume Sōseki]

나쓰메 소세키.

치논은 한 책을 꺼냈다.

[And Then.]

‘그 후’다.

흔히 청춘 3부작으로 불리는 것 중 중간을 차지하는 소설.

치논은 책장을 곧바로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주인공인 다이스케가 친구의 아내인 미치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당신 때문에 서른 살이 되도록 미혼으로 지냈으며, 이는 당신의 복수라고 말한다.

다이스케의 고백을 받은 미치요는 운다. 기쁨인지 원망인지 모를 것으로.

미치요가 다이스케한테 말한다.

[“You are cruel…….”]

그 번역을 본 치논은 실소가 나왔다.

‘You are cruel’이라니, 이렇게나 의미가 와닿지 않는 번역이 있을까. 애초에 영어와 일본어는 서로 전혀 맞물리지 않는 언어인 듯하다.

그 우스운 번역으로 말미암아, 치논은 심각한 소설 속 상황을 희극처럼 볼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 * *

미사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이코가 약 30분간 설명한 것을 들어보니, 그녀의 친구인 치논이 성필을 채가려고 한다는 듯하다.

그 옆의 서유선은 세이코의 주장에 감화된 듯 심각한 얼굴이었다.

미사토가 핸드백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뭐어?”

결국 나온 말이 그거였다.

세이코가 또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잖아 이상하잖아! 둘만 밥 먹으러 가고 공연장도 가고! 이게 데이트가 아니면 뭐냐구! 유선, 빨리 뭐라고 말 좀 해봐!”

“네 말이 옳아.”

“유선도 그렇대! 애초에 남녀가 둘이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부터 의도가 불순해!”

“박 이사님을 못 믿는 거야?”

“상황이란 게 있잖아 상황이!”

미사토는 더 어이가 없었다.

“너희 둘을 한 집에 놔두고 나가는 내 심정, 생각해본 적 있어?”

세이코의 말문이 턱 막혔다.

서유선도 그랬다.

둘이 천천히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웨에엑!”

“미사토 나, 나를 그렇게 의심했어? 내가 세이코한테 저열한 욕망을 품을 거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서유선 죽어어어엇!”

“너나 죽어!”

“봤지? 이런 거야. 환경은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거지. 알겠어 세이코쨩?”

“……알겠어.”

미사토의 얼굴에 어머니의 것처럼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정답에 도달했구나.”

“치논이 음탕한 마음을 품었단 거지?”

“미치겠네.”

결국 미사토는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서도 씻지 못하고 세이코의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기분도 안 좋은데, 자꾸 서유선이 붙으려고 해서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서유선이 ‘괜찮다니까 오히려……’라며 자꾸 다가오는데, 미사토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를 계속 밀어내며, 미사토가 세이코에게 신신당부했다.

“자, 우리 세이코쨩의 친구인 치논 씨에게 아주 정중하게 물어보는 거다? 알겠지? 정중해야 해?”

“안다니까.”

세이코는 치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사토가 이마를 탁 치고 헛웃음을 뱉었다.

“치논 씨한테 전화를 걸면 어떡해!”

“뭐가?”

“치논 씨는 귀가 안 들리시잖아!”

“……아아.”

세이코는 전화를 끊었다. 부끄러운 듯 귀가 천천히 붉어졌다.

그녀는 치논에게 메신저로 문자를 보냈다.

[치논쨩, 박 이사한테 꼬리 치니까 기분이 좋…….]

미사토가 세이코의 손을 쳐내어 폰을 저 멀리 튕겨 보냈다.

세이코는 미사토의 훈계를 듣고 다시 치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치논, 내가 박 이사를 좋아하는 건 알지? 그런데 밤에 같이 놀았다는 문자를 보니까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 혹여 박 이사에 대한 저의가 있던 게 아닌지 자꾸만 신경 쓰여. 내가 결례를 저지른다는 자각은 있어. 그렇지만 꼭 알고 싶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미사토는 떨떠름했지만 OK 사인을 보냈다.

세이코가 신나서 바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결례가 맞지만, 이게 세이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사 표현이니까.’

애초에 세이코처럼 저돌적이지 않고서야 치논의 저의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미사토가 대필을 해준다면 매우 상식적인 질문만 나올 것이고, 그건 일종의 취조와 비슷할 거기 때문에, 차라리 세이코의 무례함이 이 상황에선 더 나았다.

‘얘를 어쩌면 좋아.’

나중에 결혼하면 의부증을 달고 살겠다.

이제 곧 치논이 ‘무슨 소리야?’란 답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 세이코는 열렬히 추궁하겠지.

그 끝에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어져선 미사토에게 매달릴 게 분명하다. 앞으로 치논을 어떤 얼굴로 보아야 하냐고.

“아, 왔다.”

서유선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알림음이 뜨는 것보다 빠르게 세이코의 눈이 메시지를 읽었으니까.

[미안해 세이코쨩. 일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온도가 수십 도는 떨어진 것처럼 차가워졌다.

세이코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타자를 쳤다.

[이야기하자니? 뭐를?]

[미안해.]

[뭐가?]

[미안]

“…….”

“…….”

“…….”

서유선이 어버버거렸다.

“어, 어어?”

“하.”

세이코가 웃었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날숨이었다.

“하아.”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아, 하아.”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악……!”

그녀가 절규했다.

“친구의 남자를 뺏으려 하다니이이이이이이이이―! 네년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

성필은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레버 레코드에서 나온 직원과 마주했다.

그녀는 40대의 푸근한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니 성필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도 아이가 갖고 싶어요.”

“어서 결혼하세요.”

“그럴 사람만 있다면요.”

“소개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급하진 않은가 보네요.”

레이첼은 감자튀김을 몇 개 집어먹더니 티슈에 손을 닦았다.

‘많이 먹는 게 연년생 애를 셋 키운 비결이에요’라고 말하던 그녀는 씩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오늘 돌아가실 분을 이렇게 따로 부르고요.”

“미안하긴요.”

소녀연맹의 첫 번째 단독 미주 투어다.

레버 레코드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단 모양이다. 그 시작점인 이곳 샌프란시스코의 콘서트를 관찰하고 싶다며 담당자를 보내왔다.

그게 바로 이 레이첼이다.

“담당자로서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담당자…… 사실 그거 거짓말이에요.”

성필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거짓말…… 이라고요?”

“박 이사님을 뵈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요. 저는 콘서트 사업부 소속도 아니고요. 그래서 죄송한 거예요. 일적인 거였다면 미안하지 않았겠죠.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원래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한 이유는 박 이사님을 뵙는 게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될 거기 때문이에요.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예, 이기적인 거 맞아요. 하지만 제 이기심은 박 이사님께…….”

레이첼이 잘못 말했단 뜻으로 웃었다.

“아니지, 제 이기심은 귀사(貴社)에 지대한 이익을 주리라 감히 판단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건 다시 사과드립니다. 후엔 책임도 지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없으실까요?”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옛말에…… 아니, 요즘 말에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받는 게 더 쉽다’는 게 있다.

그 말을 체화한 사람이 레이첼이다.

그녀는 성필과의 만남을 허락받기보다 용서받기로 결심하고 이 당돌한 거짓말을 저질렀다.

거짓말로, 가로 엔터의 이사와 만난 것이다.

성필이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레버 레코드에서 나왔단 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죠?”

“그건 아니에요.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머천다이징 사업부의 레이첼이에요.”

“저를 왜 보자고 하셨죠? 아이들을 다 독립시켰으니 새 삶을 살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요.”

“오우, 까칠하시네요.”

“첫 만남이 거짓이니까요. 그리 떳떳한 이유는 아닐 거고, 그걸 알게 된 이상 저도 달갑지는 않습니다. 빨리 말씀하세요.”

“이직(移職)하고 싶은데요.”

“이직……? 어디로요?”

레이첼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가로 엔터요?”

“네.”

“뭘로요?”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머천다이징 사업부 소속이라고요.”

머천다이징.

상품을 뜻한다.

뮤지션과 관련된 상품.

한국적으로 말하면 굿즈쯤 되는 물건.

그때, 성필은 과거 홍규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래의 가로 엔터를 위한 플랜, 그중에서 훗날 생겨나게 될 세 개의 사업부.

해외사업부.

아티스트 IP사업부.

공연사업부.

아티스트 IP는 여러 분야를 포괄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굿즈다.

그에 정통한 사람이 가로 엔터로의 이직을 요청해왔다.

“흥미가 있으신가요?”

성필은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아까보다 진지해진 태도로 물었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경위를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면접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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