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아…….”
성필은 난감한 신음을 내뱉었다.
‘어쩌지?’
성필이 리카의 멱살을 붙잡은 이유가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리카는 특별한 고민 없이 치논을 부른 것일 터다.
사고의 흐름을 추측하자면, 케빈이 피아니스트가 필요하다니 어제 성필과 놀았다던 치논이 떠오른 것이겠지.
옛날에 따로 집에 초대받기까지 한 데다 공연이 끝났단 정보를 들었으니까, 혹시 가능하다면 악기 세션으로 참여해주길 부탁한다고 했겠지.
치논은 알겠다고 한 거고.
훈훈하며 정다운 일이다.
그런데 성필이 걱정하는 점이 있다. 바로 치논이 프로 피아니스트라는 것이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팔아 밥을 먹고 사는 종류의 인간. 어느 사람이건 안 그렇겠냐면, 예술가란 점에서 치논은 특별하다.
그녀가 파는 건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자아 그 자체다.
‘공짜로 해달라고 할 순 없어.’
그건 치논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치논의 페이는 얼마일까?
성필은 일본에서 그녀가 공연했다던 고급 재즈 클럽인 ‘블루노트 도쿄’를 떠올렸다.
‘블루노트 도쿄의 좌석 수는 300석 정도랬지. 가격이…….’
1만 엔 정도라고 했던가. 위였나 아래였나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계산하기 쉽게 대강 1만 엔이라고 치자.
그러면 300만 엔이다.
약 3,000만 원.
거기서 치논이 절반을…… 아니, 많이 잡아서 70% 정도를 가져간다고 치자.
치논은 어마어마한 수상 경력이 있고, 도쿄 올림픽 개막 공연을 담당했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니까.
그럼 치논이 하룻밤 공연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2,100만 원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런 사람을 피아노 세션으로 불렀다…….’
성필은 녹음실 안, 피아노 앞에 우중충한 얼굴로 앉아 있는 피아니스트를 보았다.
클래식을 전공했다는 그녀는 아까부터 케빈의 한숨을 계속 들어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았고, 콩쿨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으며, 현재는 관현악단 입단을 목표로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
‘저분만큼 드리는 건…….’
저 피아니스트의 페이는 시간당 수십 달러 수준이다. 치논에게 몇백 달러 쥐여주고 ‘수고했어요’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진짜 모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돈을 내는가?
치논을 세션으로 고용하게 될 케빈이?
통장에 만 달러를 겨우 넣어두고 있는 그 케빈이? 절대 안 된다.
그렇다면 리카가?
‘그래.’
리카가 내야지. 리카가 불렀으니까.
그런데, 치논을 고용하는 건 케빈일 텐데?
성필은 숨통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그는 치논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스튜디오 사람들을 보았다.
저 사이에 끼어서 ‘여러분 잠깐만요, 돈은 어떡할까요?’라고 물을 수 있을까.
‘치논 씨 매니저라도 있었다면…….’
성필은 리카를 곁눈질했다. 그녀도 성필의 낌새를 부지런히 살피고 있던 참이었다.
둘의 눈이 맞았다.
성필이 리카의 귀로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리카.”
“하, 하이(네).”
“치논 씨한테 뭐라고 말해서 부른 거야?”
“시간 괜찮으면 도와달라고…….”
“그게 끝?”
“그거 외에 뭐가 있나요……?”
성필이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주먹을 쥐자 리카가 쏜살같이 백설하의 뒤로 도망쳤다.
백설하는 영문을 몰라 성필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녀도 눈치가 없진 않아, 뭔지는 모르지만 어색하게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한 저 웃음을 보면, 성필은 10년간 묵었던 화도 가라앉는다.
코로 숨을 내뿜고 치논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려던 때.
“리카, 설하(세루하).”
치논이 리카와 백설하를 불렀다. 치논은 백설하를 ‘세루하’라고 부른다.
일본엔 받침 ‘ㄹ’에 해당하는 발음이 없어 ‘오’로 발음된다. 처음엔 ‘세오루하’라고 불렀는데, 입에 익었는지 ‘오’를 빼어 세루하라고 부른다.
치논은 그럴 생각이 없겠지만, 그녀의 발음이 퍽 애교스럽다.
“여기.”
치논은 장난을 숨긴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등 뒤에 돌린 손을 보아 실제로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했다.
“선물.”
그녀가 꺼낸 것은 세 송이 백합이었다.
그것이 앞에 내밀어지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성필, 리카, 백설하는 백합 향에 살짝 놀랐다.
이글거리는 것처럼 강하고 꿀처럼 달콤한 향이었다. 백합이란 이런 향이 나는 꽃이었나?
“처음 봤을 때부터 두 사람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꽃이야. 오는 길에 꽃집이 있어서 샀어.”
“아, 감사합니다.”
백설하는 얼떨떨하여 꽃을 받았다. 그녀와는 달리 리카는 잔뜩 들떠서 꽃을 받곤 향기를 음미했다.
“왜 저희한테 어울리나요!”
“청초(淸楚, せいそ)해서.”
청초(淸楚). 매우 깨끗하고 맑고 순수하다.
그 칭찬을 들은 백설하는 자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건지 마땅히 반응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리카는.
“제가 좀 청초한 편이죠!”
그렇게 위풍당당해졌다.
치논은 둘의 반응을 보고 기뻐했다. 성필은 기뻐하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의 손에 들린 남은 한 송이 백합을 보았다.
치논은 백합을 든 손을 허벅지 옆에 느슨히 두고 있었다.
리카와 이야기하느라 몸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백합도 찰랑였다. 그때마다 달콤한 향이 성필의 코를 찌르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백합이 움직일 때마다 성필의 눈동자도 그 움직임을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성필의 눈과 백합에 사슬이 걸려 연결된 듯했다.
세 송이 백합 중, 하나가 남았다.
“그리고.”
치논이 나머지 백합을 가슴께로 들었다. 그녀가 옆의 성필을 힐끗 보았다.
그 힐끗한 순간에, 성필도 때마침 백합에서 눈을 떼어선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치논이 씩 미소 지으며 백합을 드레스 왼쪽 가슴께, 심장과 가까운 곳에 달았다. 브로치 장식처럼 가슴을 장식한 백합은 손에 들렸을 때보다 더 빛났다.
“나머지는 내 거.”
마치 무언가를 받으려는 듯이 앞으로 나가려던 성필의 오른손. 그 오른손이 움찔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엄두도 못 냈다.
덫에 걸린 것처럼 성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울려요!”
리카가 그리 치논을 칭찬하자, 그제야 성필도 입이 움직였다.
“아, 어울리네요.”
“그래요?”
치논은 성필의 그러한 태도가 재밌는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엔 자그마한 자책이 감돌았다.
성필을 당황케 한 것이 미안한 듯하다. 그가 가엾은지, 장난을 친 지 몇 초 만에 그녀는 백합을 다시 빼었다.
그녀의 심장을 장식하던 백합이 성필에게로 다가왔다.
“왕자님이 질투하시면 안 되니까.”
아까는 손이 먼저 뻗어나간 게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손이 뻗지 않는 게 문제였다.
리카와 백설하가 물음표를 띄웠다.
백설하가 물었다.
“왕자님요?”
“응?”
성필을 보고 있던 치논은 백설하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백설하가 재차 물었다.
“왕자님요?”
“아, 응. 어제 재즈 클럽에서 잼 세션에 참여했어. 이사님이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으셔서, 내가 기분을 풀어드리려고 기분을 안 좋게 한 사람들이랑 싸웠어. 그러니까 내가 나이트, 이사님이 프린스였던 거야.”
백설하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오묘할 만한 이야기다.
치논은 이야기의 재주가 있었다. 이야기의 줄기만 말했는데도 대략적인 이해가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상황을 전부 제거하고 줄기만 말하니, 그야말로 오묘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성필은 재빨리 그녀가 내민 백합을 받아 들고 변명하듯 말했다.
“별거 아니야. 치논 씨가 나를 놀리신 거야.”
“승리의 주문도 걸어주셨잖아요?”
성필은 당황했다.
치논이 이 이야기를 이어가서가 아니었다.
분명 치논은 백설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서 말한 성필의 이야기를 들었단 듯이 반응했다. 아까 옆에서 백설하가 말했을 땐 재차 물었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백설하에게 한 말이었는데.
“승리의 주문은 뭔가요!”
“응?”
치논이 리카를 바라보았다.
리카가 재차 묻자 치논이 단아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길 수 있도록 주문을 걸어달라고 부탁드렸어. 그랬더니…… 뭐라고 하셨더라. ‘저를 기쁘게 하는 것 이상의 보상이 필요한가요?’였나.”
“에에…… 이사님 무슨 오만한 귀족 남자 주인공 같은 말씀을 하셨나요…….”
“그만하자.”
성필은 얼굴이 붉어져선 그리 말했다.
치논도 짧게 웃고는 본업에 집중하려는 듯 케빈 쪽으로 향했다.
성필은 잠시 그녀를 잡아 페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투자라고 생각하자.’
케빈을 향한 투자.
이 곡엔 백설하가 참여한다. 그 곡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일이니, 치논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정도야 아깝지 않다.
치논을 부른 값은 리카가 7, 성필 자신이 3으로 내면 되겠지.
정상급 피아니스트를 부르는 데 2,000만 원이면 싼 거지.
‘치논 씨의 하루가 2,000만 원이면…… 치논 씨를 하루 부르는 걸로 2,000만 원이면…….’
진짜 싼 거 같은데?
어제의 연주를 잊지 못한 성필은 그 가격이 굉장히 저렴하게 느껴졌다.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언젠가 정말 한 번쯤 내 볼 만도 하단 생각도 들었다.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성필은 백합을 코로 가져가려다가,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백설하와 리카 때문에 그만두었다.
굳이 코에 가져가지 않아도 향이 강렬하여 맡을 수 있었다.
치논과 케빈의 대화가 꽤 오래 이어졌다.
성필, 리카, 백설하가 아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백합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백설하가 문득 무언가 깨달았단 듯 눈이 커졌다. 그녀는 슬금슬금 성필의 눈치를 보더니 타이밍을 보아 입을 열었다.
“이, 이사님 그거 아세요?”
“오, 설하가 나한테 아는 척하려고 그런다. 리카 봐봐.”
“귀엽네요! 아라쨩 같아요!”
“…….”
백설하를 샐쭉해져선 다시 백합을 바라보았다.
성필이 사과했다.
“말해줘. 듣고 싶어.”
“……백합은요.”
백설하는 심기가 상한 티를 냈으나, 내심 말하게 돼서 기분이 좋아진 게 눈에 보였다.
“고결함을 상징해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었대요.”
“진짜? 몰랐네.”
백설하는 그 말을 듣고 더 신이 난 듯했다. 성필이 모르는 것을 자신이 안다는 게 즐거운 것일까?
그녀가 말하는 속도가 약간 더 빨라졌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 뜻이 바뀌게 돼요.”
“어떻게?”
“왕가를 상징하던 백합은, 프랑스 혁명의 ‘국왕 처형’ 사건으로 죽음을 상징하게 됐어요. 백합의 향이 강한 건 죽기 직전의 불꽃 같은 거라고…….”
“아 그렇구나…….”
선물로 받은 건데 그 의미가 ‘죽음’이라고 하다니. 치논이 들었다면 실례였을 것이다.
그래서 백설하가 한국어로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꽤 용의주도한 거지만, 저 청초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한국어가 편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나온 듯했다.
둘이 이야기하는데 굳이 일본어나 영어를 쓸 필요도 없고 말이다.
“왠지 백합이 음산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제 보니까 꼭 수의(壽衣) 같기도 하네요…….”
리카가 더 끔찍한 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성필도 대꾸해주기 힘들었다.
“더 정확하게…….”
그때 치논과 케빈의 대화가 성필의 이목을 끌었다. 그 곁에는 방금까지 케빈에게 갈굼 당하던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케빈이 팔을 휘저어가며 설명했다.
“단단한 느낌으로. 그니까 빰바바밤 빠빠빰, 같은? 이해하시겠어요?”
치논은 ‘응? 으응?’ 곤란한 미소를 보이며 피아니스트를 쳐다보았다. 피아니스트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귀가 들리는 피아니스트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데, 구화를 쓰는 치논이 저 말을 이해할 리 없다.
“아……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치논은 케빈에게 무어라 설명했다.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치논은 목소리가 작은 편이다.
여럿이서 나누는 대화에 참여한 경험이 거의 없을 테니 목소리의 크기에 대한 감각이 부족할 만도 하다.
그녀에게 대화란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 그렇기에 자그마한 목소리로도 충분했으리라.
치논의 설명을 들은 케빈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논이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더니, 다시 일어나서 의자의 높이를 조정했다.
재즈 클럽에서처럼 높이를 일반적인 경우보다 살짝 더 높였다.
“어떻게 하기로 한 거지?”
“그러게요.”
치논은 케빈에게 어떤 방식을 제안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레코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만두었다.
어차피 곧 밝혀질 테니.
[자.]
안쪽에서 치논이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치논이 건반을 치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쾌함을 넘어 쾌속의 연주. 듣는 사람의 귀를 붙잡고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듯하지만, 그 강요가 결코 불쾌하지 않다.
그 속도에 무심코 끌려가듯 케빈이 놀란 눈으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게 ‘버드 파웰’.]
치논이 어깨를 들썩이자 주법(奏法)이 바뀌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우나 들인 힘은 결코 적지 않은 음색. 영혼을 건반으로 쏟아붓는 것만 같아, 한계량 이상의 생명을 받아들인 피아노가 넘쳐흐른다.
[이게 ‘빌 에반스’.]
치논이 손을 높이 튕겼다.
땅으로 내리친 공이 튀어 오르듯이 치논의 손가락이 가볍게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날 때만큼이나 가볍게 다시 떨어졌다.
그 소리는 단순하고 정직하다.
얼핏 들으면 기교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으면 저 정직함과 단순함은 우물의 끝에 다다른 자가 마침내 찾아낸 해답이란 게 느껴진다.
[이게 ‘델로니어스 몽크’.]
이번에는 별이 반짝인다.
건반 하나가 가라앉을 때마다 별이 뜬다. 그렇게 별을 하나씩 세어서 마음을 채우는 듯하다.
채워진 마음은 별이 촘촘히 박혀 밤하늘이 됐다. 밤은 수위(水位)가 올라가듯 위로 상승하길 거듭하여 머리에 닿아, 영혼의 황홀함을 분출시킨다.
[이게 ‘에디 히긴스’.]
소리가 발이 달린 듯하다.
그림자와 포갠 발이 땅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끈적하다. 하지만 붙잡는 느낌이 없다.
얼음이다.
미끄럽지만 닿아 있다.
과거로 사라진 음의 끝자락을 붙잡아 현재와 연결하고,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소리.
[이게 ‘키스 자렛’.]
그 뒤로도 수많은 이름이 나왔다.
치논 자체가 악기가 된 듯했다. 그녀는 생명이란 이름의 악기로서 수많은 현(絃)을 가졌고, 각기 현을 튕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한 사람이 지니기엔 너무나도 많고 다양한 생의 울림.
그 경이로움에 다들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리고 끝끝내 모든 현이 울린다.
현이 떨리며 진동을 뱉어내고, 그 여운을 잠재우려는 듯 치논이 건반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이게 ‘오토나시 치논’이에요.]
치논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안 보일 텐데도 보이는 것처럼, 그녀는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어떤 걸로 할까요?]
“세상에…….”
케빈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겼다.
정신 사나운 행동을 이어가던 케빈이 흥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예수 운다(Jesus crying)……!”
뒤에서 듣고 있던 피아니스트는 어이가 없는지 자꾸만 ‘허, 하, 허어’ 같은 소리를 냈다.
음색이 피아니스트의 지문(指紋)이라면, 치논은 손가락마다 다른 지문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환상이었다.
케빈이 의자를 천천히 돌려 리카를 보았다.
“누구를 데려온 거예요?”
리카는 본인이 대단한 일을 해냈단 양 기세등등했다. 그녀는 ‘치논을 내가 불렀으니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성필을 곁눈질하면서 말했다.
“정상급 재즈 피아니스트인 치논 언니예요!”
“정상급?”
“그래미에서 무슨 무슨 앨범상을 받았어요!”
케빈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두가 경악했다. 다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미.
그 이름은 한국인에게는 ‘미국에 있는 상인가 보다’ 정도의 인상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에 사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 무게감은 외국의 사람들이 감히 판단할 게 아니다.
미국 음악 산업을 추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 상은, 오랜 역사와 엄격한 기준 그리고 신념으로부터 비롯된 강철같은 위상을 지닌다.
그 위상의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뮤지션들이 투표권을 지닌단 사실이다.
소수의 심사 위원, 대중들의 투표, 그런 걸로 정해지지 않는다.
같은 뮤지션이 심사하여 수상한다. 그 해, 미국의 음악 산업을 한 단계 진일보시켰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
그것은 동료이자 경쟁자인 뮤지션들의 인정이고, 미국의 인정이며, 세계의 인정이다.
그러니까, 그래미를 수상했단 건 이런 뜻이다.
신이 인류의 문화를 기록한 책이 있다면, 그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 무게감에 짓눌린 것처럼 케빈이 신음했다.
“어, 어어…….”
“어떤가요! 아타시(저)한테 고맙나요!”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부른 거야아아앗―!”
“끼에에엑!”
케빈의 고함에 리카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성필의 어깨 뒤로 숨었다.
“어, 얼마를 줘야 하는데! 아니, 지금까지 얼마로 계산됐어? 아, 아아,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케빈이 패닉에 빠졌다. 그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케빈이 화내는 이유를 알아낸 리카가 다시금 기세등등해졌다.
그녀는 성필의 어깨에서 빠져나와 케빈을 안심시켰다.
“쌤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시원하게 지불할 거니까요!”
“얼마일 줄 알고?”
성필이 묻자 리카는 짐짓 화난 척 눈꼬리를 세웠다.
“아타시(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치논 언니를 부른 게 아니에요! 언니의 재능에 정당한 보상을 제공할 생각이 당연히 있었다구요!”
“어느 정도?”
“저희 녹음할 때 밴드 세션 분들 부른 값이…….”
리카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몇 번 두드렸다. 계산을 끝낸 그녀가 당당히 외쳤다.
“치논 언니는 대단한 분이니까 그 값의 열 배에서 더 드릴 거예요! 통 큰 제가 1,000달러를 낼게요!”
성필이 리카에게 ‘블루노트 도쿄’의 공연 페이에 대해 귓속말해주었다.
리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자동차 한 대…… 사라졌다……?”
“얼마인데 그래?”
백설하에게 답해주지도 않고 리카는 분한 듯 자기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쌤한테 이렇게까지 비싼 선물을 해줄 마음은 없었는데에……!”
“어, 얼마인데 그러냐니까?”
“여러분?”
혼란 속에 치논이 등장했다.
그녀는 반쯤 열린 녹음실 문을 붙잡은 채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가 겸연쩍은 태도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쪽에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안 들려서…….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소리가 안 들린다뇨?”
레코딩 엔지니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장비에 결함이 있는 겁니까?”
“네?”
“장비에 결함이…….”
“아, 저는 귀가 잘 안 들려요(I’m hard of hearing).”
누군가 스튜디오에 찬물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성필, 리카, 백설하를 제외하면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녀의 청각에 대해 되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야기하기 민감한 주제였으니 말이다.
단지 놀라움만을 가지고, 레코딩 엔지니어는 ‘아……’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케빈은 리카를 보다가, 역시나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가 의자를 돌려 치논을 바라보았다.
“그…… 치논이 연주하는 동안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굉장히 실력 있는 분이시라고…….”
“어머, 감사합니다.”
“그 페이가…… 아무래도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닐 듯해서…….”
“아하.”
치논은 눈동자를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곤 배시시 웃으며 리카를 바라보았다.
“리카가 내주는 거 아니었어?”
“에.”
리카의 눈동자는 치논이 고민할 때보다 훨씬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떨리는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다, 당연하죠! 제가 불렀는걸요! 쌤의 팝송 데뷔 기념 선물이에요!”
백설하가 동태눈으로 리카를 보았다.
리카는 헤실헤실 웃다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래서 얼마입니까 치논 님?”
“값을 치르기 곤란하면, 박 이사님께 진 빚을 갚는단 건 어때요?”
“빚이요?”
성필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네, 빚. 저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주신 일, 감사하고 있어요. 그 빚을 언제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모처럼 이런 기회가 왔네요. 어때요?”
“빚이라뇨, 그건…….”
“저는 빚을 진 기분이었어요. 실은 그럴 마음으로 오기도 한 거구요.”
떨리는 손으로 신용카드를 꺼내던 리카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수평선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어온 것을 목격한 노아처럼 눈에 희망이 번들거렸다.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이기 직전 여호와로부터 ‘그만두라’는 말을 들은 아브라함처럼 안도의 기색이 비쳤다.
“빚이요…….”
성필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치논과 마주 보고 있는 녹색의 테이블 위, 그의 텅 빈 손에 카드가 들어온 것 같았다.
둘이 마주 본 테이블.
테이블의 모서리에서 리카와 케빈이 눈을 굴리고 있다. 판의 형세를 관망하던 그들은 애절하게 성필을 쳐다본다.
“갚는다, 고요…….”
치논이 만든 그 게임판 안에서, 성필은 그녀가 쥐여준 카드의 의미를 가늠했다. 그가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가에 보기에도 시원한 웃음이 번졌다.
“예.”
성필이 후련하게 카드를 던졌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리카와 케빈이 환성을 내질렀다.
치논은 성필의 화답에 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이려다가 숙인 채 멈추었다. 그 동작이 오히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귀부인을 향해 숙인 기사처럼.
고개 숙인 그녀의 가는 속눈썹이 떨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였다.
그녀가 어제 재즈 클럽에서 보였던 것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와타시(저).”
그리고 고아한 자태로 문을 닫고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피아니스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