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29화 (729/760)

729화

세로로 기다란 스피커가 눈으로 보일 정도의 진동을 토해냈다.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음악이 전신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정호환은 의자에 편히 기대고 앉아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음악에 집중하는 듯하다가, 갑작스럽게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고는 옆자리에 앉은 성필을 쳐다보았다.

성필은 세상에 더없이 경건한 표정으로 마치 기도하듯 음악을 듣는 중이었다.

‘좋아하는 건가?’

정호환은, 아니.

베일에 싸인 작곡가 헬독(Helldog)은 의뢰인의 심정을 알기 어려워 끙끙 앓았다.

KS 엔터에 있을 때도 직원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때면 긴장했었다. 하지만 성필에게 들려주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차원이 다르게, 긴장된다.

약 2분 30초에 이르는 곡이 끝났다.

“어떻습니까?”

정호환은 기다리지 못하고 감상을 재촉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필이 무사(武士)처럼 무릎 위에 굳게 쥔 주먹을 올렸다. 그의 태도를 보자 정호환은 저절로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다.

“예, 부디.”

박성필.

현세대 최고의 아이돌 프로듀서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정호환은 그가 만든 소녀연맹이 이룬 성과를 보고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를 원수처럼 대해도 모자라겠지만, 정호환은 그와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다.

성필이 선생님이라도 되는 듯했다.

늙은 사람이 괜히 젊은 사람에게 인정받고픈 심리가, 남부러울 것 없는 입지를 쌓은 정호환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솔직히, 호오(好惡)를 판별하기 힘듭니다.”

“……그렇습니까?”

“예, 인스트루먼털(Instrumental, 보컬을 제외한 곡)만으로는 아무래도…….”

“그렇군요…….”

“예.”

성필은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음악적 소양이 정지음 수준이었다면 자세하게 감상을 말해주었겠지만, 성필은 그러지 못했다.

“일단 가사 작업을 하고 가이드 보컬을 붙여야겠습니다. 보컬 라인을 알려주시면 제가 가사를 받고자 하는데, 괜찮을까요?”

“가사는…….”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 말하려던 정호환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KS 엔터에 있을 때처럼 직원을 시켜 가사를 받아오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KS 엔터에서 쌓은 인맥을 활용하여 가사를 받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작사가들이야 원래 프리랜서라지만, 정호환이 연락해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KS 엔터에 알려지면 곤란하시니, 제가 받겠습니다.”

성필이 정호환의 가려운 부분을 바로 긁어주었다.

“예,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가사는 곡의 영혼이니, 프로듀서이신 박 이사님이 직접 받는 게 맞겠지요.”

성필이 정호환에게 주문한 곡의 분위기는 매우 간단했다.

바로 ‘괴도(怪盜)’다. 요사한 수법으로 물건을 훔치는 도둑 말이다.

정호환은 괴도라는 단어를 듣고 곧바로 애니메이션 ‘루팡’을 떠올렸단 모양이다. 밤중에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물건을 훔치는 그 괴도 말이다.

정체가 알려져 있으니 괴도라고 부르는 게 맞을진 모르겠지만, 정호환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그 때문일까, 곡은 굉장히 화려하고 빵빵 터지는 사운드로 가득했다. 파티를 연상시키는 것 같기도, 신나는 대규모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 호기심에 여쭈는 건데.”

성필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자 정호환이 인자하게 웃었다.

“의뢰주이신데 마음껏 물으시지요.”

“KS 엔터는 보통 몇 명의 작사가들에게 가사를 받습니까?”

“보통…… 보통이라고 부를 게 딱히 없습니다. 프로젝트마다 천차만별이라서요. 작사가의 성향을 고려해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들에게 주지요. 케이어스의 최신곡인 ‘파에톤’은 30명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삼십.

성필은 그 단어를 내뱉곤, 그 엄청난 숫자에 압도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중에 가장 괜찮은 것을 골라내지요. 여의치 않으면 여러 개를 합치기도 하고, 좋은 작사가들을 모아 합동으로 쓰게 하기도 합니다.”

안무를 받는 방식과 비슷했다.

이 정도면 가사도 안무처럼 리릭 디렉터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조각조각 모은 가사를 하나로 모으는 작업은 누가 하는 걸까.

“그러면 일단 말씀해주신 대로 진행하지요.”

정호환은 오늘의 미팅을 마무리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시간이 시간이다. 밤잠이 빠른 노인인 정호환은 침대에 들어야 한다.

성필도 낌새를 눈치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정호환은 아직 할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평소와 마찬가지시군요.”

“예?”

“‘카오틱 에너지’의 데뷔가 있잖습니까.”

정호환이 소녀연맹의 후배 그룹, 카오틱 에너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더는 가명이 아니다.

그룹 이름은 카오틱 에너지로 공개됐다. 참고로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은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러려니 했었다.

아무리 처음에 충격받은 네이밍이더라도, 1년쯤 듣고 살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긴장…… 되죠.”

정호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질문을 드렸군요.”

카오틱 에너지의 성패(成敗)는 단순히 그들의 성패만이 아니다. 가로 엔터의 미래가 달려 있다.

아니, 더욱 직접적으로 형용하자면 성필의 평판이 달려 있다.

총괄 프로듀서로서, 성필의 능력은 어떠한가.

소녀연맹으로 능력을 증명했다지만, 고작 한 그룹일 뿐이다. 그렇다, 고작 하나.

‘이름이 알려진 뮤지션 중엔 원히트원더가 대다수.’

과장이 아니다.

진실로 ‘대다수’가 원히트원더다. 곡 하나 이름을 알리고 반짝 떴다가, 떠오른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진다.

지속적으로 인기를 구가하는 뮤지션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그건 창작에 관련된 어느 분야나 비슷할 것이다.

‘재능의 불꽃이 타오른 후에 남은 건 재뿐.’

타고 남은 재를 그러모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 길이 처음처럼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밝지 않은 길을 헤쳐 나가 처음과 같은 불꽃을 피워올리는 것.

그게 아티스트로 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이 조건은 성필에게도 해당한다.

‘원히트원더 프로듀서로 남을 것인가.’

‘대다수’의 프로듀서가 그러하듯이, 한 번의 히트를 끝으로 연예계의 바닥에 가라앉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불을 피워올릴 것인가.

한 번의 불은 피우기 쉽지만, 두 번째는 어렵다. 세 번째, 네 번째는 말할 나위 없다.

프로듀서의 진짜 능력은 지속성에 있다.

“그래도, 믿거든요.”

“믿어요?”

“저와 함께 일하는 분들을 믿어요. 제가 함께 일하기로 선택한 분들. 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들을, 믿습니다.”

가로 엔터는 시험대에 올랐다.

우효민, 웨이퍼센트와는 경우가 다르다.

이번엔 완벽히 무(無)에서 창조해내는 작업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가로 엔터의 로고 디자인이 바뀌고 모토가 공개됐다. 사소한 변화였지만, 업계 사람들은 그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효민과 웨이퍼센트에 이어서, 거의 텀을 두지 않고 카오틱 에너지를 발표했어.’

회사의 상황은 좋지 않을 터다. 칠공(七空)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무사와 비슷하다. 패배해도 죽고, 검을 멈춰도 죽는다.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른다.

그런 가로 엔터의 의지와 목적은 명명백백하다. 상처만이 늘어나는 싸움에서 얻을 건 승리다.

지금까지 입은 상처를 전부 무위로 돌릴 정도로 찬란한 승리.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의 도약.’

상장(上場)이 그 방법이다.

카오틱 에너지의 성패가 분수령이다.

그런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성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는다고 했다.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건가?’

그런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 아니다.

홀로 감당해내기 힘든 짐일 테니까.

하지만, 정호환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온화한 표정과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알았다.

정호환은 그의 뒤에 그를 받쳐주는 사람들이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한 명의 사람이 낼 만한 아우라가 아니었기에.

성필이 찌그러질 것만 같은 압박 속에서 버티는 건, 그의 말마따나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습니까.”

정호환의 눈꺼풀이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 시야로 비치는 건 문규완과 남홍범의 얼굴이었다.

총괄 프로듀서로서, 정호환도 항상 그들을 의지해왔다. 확실히, 책임 전가 따위가 아니었다. ‘믿는다’는 표현이 옳았다.

“노력과 능력만큼의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괴상한 응원에, 성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괴상한 응원이지만, 그건 매우 합당한 말이었다.

“예.”

12시로 달려가는 시침과 함께 그는 어둠이 드리운 밖으로 향했다.

* * *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은 연습실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리더인 김사무엘만 빼고.

그는 30분 전부터 벽면 거울 앞에 서서 정면만 응시했다. 거울을 보고 있으니, 자기 얼굴만 30분째 보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김사무엘을 제외한 멤버들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우리.”

그때, 김사무엘이 그만의 침묵을 깼다. 곧 샵으로 가서 스타일링을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각자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말해보자.”

“뜬금없네.”

백수현이 손으로 바닥을 받치며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평소였다면 ‘개소리 No’라며 답했겠지만, 때가 때이다 보니 백수현도 신경을 돌릴 만한 대화가 절실했다.

“나는 예쁘고 돈 많은 아이돌이랑 결혼.”

“속물 같군, 다음.”

“뒈진다 너?”

“저, 저는.”

김사무엘과 백수현의 사이에 스파크가 튀자 막내인 임한결이 버릇처럼 입을 열었다.

이게 임한결이 대화에 참여하는 패턴이었다. 형들이 싸우려는 걸 말리려고 하듯이 실없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아서, 그룹이 해체된 뒤에도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목표가 카오틱 에너지와 관련이 없네. 기회 보이면 나가기라도 하려는 거야?”

“아뇨 아뇨 절대로! 카오틱 에너지로 성공하는 게 전제예요!”

“다음.”

임한결이 ‘진짜 아니에요!’라 악쓰는 것을 무시하고, 김사무엘이 다음 타자를 불렀다.

유우토가 대답했다.

“누나같이 유명하고 사랑받는 아이돌이 될래.”

“정말…… 고결한 소명이야.”

“김사무엘 저 새끼 당황했다. 쟤 그냥 심기 불편하니까 우리한테 푸는 거야. 선배님 얘기 안 나왔으면 우리한테 한 것처럼 욕 박았을걸?”

“다음.”

다음은 콜베르였다.

그는 멤버 중 누구보다도 결연하고 비장한 투로 말했다.

“고국의 아이들에게 꿈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대화가 뚝 멎었다.

백수현이 항의하듯 물었다.

“너는?”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

김사무엘이 숨을 길게 내뱉곤 말했다.

“집을 사고 싶어.”

“속물.”

“내 동생이 보육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꼭 이뤘으면 좋겠다.”

“내 동생이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니고, 용돈에 쪼들리는 일이 없고, 연에 해외여행 두세 번쯤 가게 해주고 싶어. 하고 싶은 건 전부 했으면 좋겠어.”

김사무엘이 뒤로 돌아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잘 들어. 우리는 우리만의 꿈을 위해 카오틱 에너지로 데뷔하는 게 아니야. 우린 서로의 꿈을 함께 짊어지고 있어. 비록 백수현처럼 속물 같은 이유도 있지만.”

“넌 농담도 모르냐?!”

“그럼에도, 서로의 꿈에 경중의 차이는 없다.”

김사무엘에게 라이트 펀치를 날리려던 백수현이 우뚝 멈추었다.

“저마다의 소중한 꿈을 함께, 서로 의지하며, 결승선을 향해 다 같이 나아가는 거야.”

김사무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만이 아니라, 가로 엔터의 모두. 홍규헌 사장님, 박성필 이사님, 민경섭 이사님, 정지음 피디님, 그리고 우리의 프로듀서 손혜빈 이사님.”

손혜빈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모두의 꿈을 걸고, 나아가자. 그리고 내가 보기에.”

김사무엘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재능도, 노력도 부족하지 않았어. 할 수 있다.”

“와아아아아!”

백수현이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다른 멤버들도 그런 백수현을 보고 얼떨결에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전쟁! 결코 전쟁!”

온화했던 김사무엘의 얼굴에 혐오가 번졌다. 백수현이 이상한, 주로 인터넷 드립을 칠 때면 이렇게 반응하곤 했다.

하지만 백수현은 개의치 않았다.

벌떡 일어나 손을 앞으로 뻗었다.

“구호 외치고 나가자!”

멤버들이 백수현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김사무엘만 빼고.

다들 리더를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돌렸다.

“싫어.”

백수현과 유우토가 억지로 그를 끌고 왔다. 어쩔 수 없이 손을 겹쳤다.

김사무엘은 창피해서 귀가 붉어졌다. 이 구호, 진심으로 창피했다. 소녀연맹의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 리더가 선창해야지!”

김사무엘이 입술을 뻐끔댔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외쳤다.

“컴베인드 위어들리(Combained weirdly)!”

멤버들이 구호를 이었다.

“케이아틱 에너지(Chaotic Energy)!”

“조인 어스(Join Us)!”

“포 유어 라이프(For yor Life)!”

기묘하게 결합된 혼돈의 에너지!

함께하라, 너의 삶을 위하여!

와아아아아!

김사무엘은 손바닥으로 낯짝을 문지르며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가자.”

보기 좋게 정렬된, 이 따분한 세상에 혼돈을 전파하러.

* * *

시계가 12시를 향해간다.

홍규헌의 눈은 벽에 걸린 모던한 디지털 시계에 거의 박혀 있었다. ‘거의’라고 표현되는 건, 그녀가 초조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이사들과 계속 눈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때 성필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뭐야.”

손혜빈이 살짝 삐친 티를 냈다.

“우리 애들 데뷔하는 날인데 어디서 놀다 왔어?”

“업무적으로 사람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작곡가님.”

성필은 ‘헬독’이라는 작곡가의 존재를 가로 엔터에 알렸었다. 가로 엔터 사람들은 성필이 직접 접촉하는 작곡가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성필은 그 존재를 철저하게 숨겨왔다.

손혜빈은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이 장소엔 정지음이 없지만, 버릇처럼 정지음을 찾았던 것이다.

정지음은 ‘헬독’의 이야기가 나오면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그 또한 성필이 직접 모셔 온 작곡가였기에, 성필이 다른 작곡가에 관심을 가지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언제 소개시켜 줄 거예요?”

민경섭이 실실 웃었다.

“엄청 예쁜 사람이라서 소개 안 시켜주는 거 아니에요?”

“그게 박 이사님이 숨기는 이유가 됩니까?”

“아 한 이사님, 당연히 되죠! 괜히 회사 사람들 눈에 띄었다가 막 빼앗길 수도 있잖아요. 특히 한 이사님한테요!”

“꼴갑을 떤다 아주.”

성필이 의자에 앉으며 민경섭의 어깨를 툭 쳤다.

“음, 일리가 있군요.”

그런데 한구인은 민경섭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혹시 그 작곡가분이 굉장히 예쁘지만 히키코모리에 연애 경험이 없으며 수줍음을 많이 탑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 이사님?”

“리카 씨가 추천해준 만화에 그런 캐릭터가 있던 거 같아서 해본 말입니다.”

“만화는 현실이 아니에요. 그건 캐릭터잖아요.”

“노, 농담으로 한 말입니다. 현실 구분 못 하는 인간 보듯 보지 말아주십시오…….”

“한 이사님 그런 만화를 읽으세요?”

손혜빈이 눈을 빛냈다. 한구인을 놀려먹을 거리가 생겨서 좋아하는 것이다.

요즘 한구인은 상장 준비로 바쁘다. 가장 신경 쓰는 건 주식의 분산이다. 주식의 분산 비율과 주주의 수가 장(場)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즉, 주식을 퍼뜨려야 한다.

이외에도 감사 이사와 사외 이사를 두는 일이나 견실한 자기 자본 보유, 최근 3사업연도의 감사를 받아 투명성을 입증하는 일 등도 있다.

물론 이건 김칫국 마시는 짓거리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기업의 크기를 판단할 척도, 즉 매출이다.

한구인은 가로 엔터가 반드시 도달할 미래를 보고 작업하는 중이다.

유령과 싸우는 일과 다름없지만, 한구인은 ‘반드시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을 하는 중이다.

아무튼, 한구인이 바빠서 최근 영 놀려먹지를 못했는데…….

“어쩜, 의외다. 되게 현실적이실 거 같은데 그런 데서 판타지를 충족하시는구나?”

“아닙니다…….”

“연애 경험 없는 히키코모리 미소녀가 취향이세요?”

손혜빈이 놀리는 것을 그만둔 건 한구인이 울먹이기 직전이 되어서였다.

“저는 평범하게…….”

“평범하게?”

“……그러고 보니 최근엔 연심을 느낀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미남자……. 그래요, 본인이 만화 캐릭터 같은데 만화 캐릭터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한구인 놀리기가 끝을 맺고, 사장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까지 신나게 웃고 떠들었던 게 거짓말 같다.

“민 이사.”

홍규헌이 부르자 민경섭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예.”

“몇만 장 이상으로 팔아야……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이그룹은 걸그룹보다 앨범 판매량이 더 중요하다.

걸그룹 콘서트는 팬미팅형 콘서트가 아닌 이상에야 타 팬이나 일반인도 많이 보러 온다. 이는 최근에 일어난 변화다.

그런데, 보이그룹은 그러한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팬덤이 알파이자 오메가이고, 팬덤의 힘은 걸그룹을 아득히 상회한다.

예상 판매량을 알고자 하는 건 당연한 욕망이다.

민경섭은 이미 몇 번이나 계산한 판매량을 읊었다.

“저희는 대형 기획사가 아니죠. 공격적인 성장 전략으로 대형 유통사들에게도 미움받는 중이고요. 그건 솔직히 누가 손 쓴 억까 같긴 한데, 암튼 덕분에 유통사 덕도 못 입고……. 3만 장이면 제가 물구나무서서 박수 칠 정도는 되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그 수치를 넘는다면?”

“넘는다면…… 요?”

“한 5만 장, 6만 장씩 판다면?”

“그러면…….”

그러면, 답은 명확하다.

“가로 엔터의 브랜드 가치가 확립되었다는 증명이겠죠. 그룹을 데뷔시키는 것만으로도 인지도가 모인다는 건, 그런 뜻입니다.”

“그래, 그러면 목표는 10만 장이다.”

다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눈을 크게 떴다.

홍규헌은 자기가 말해놓고서 자기가 박수 쳤다.

“10만 장, 가자! 파이팅!”

뒤를 이어 성필과 한구인이 박수 쳤다.

“6주 뒤에는 호텔 뷔페에서 전 직원 회식하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직원 발리에 휴가……!”

“그건 아니야 한 이사.”

한구인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썹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민경섭과 손혜빈도 박수 치며 분위기를 달구었다.

“제 신혼집에 냉장고!”

“저는 스포츠카!”

“민 이사는 언제까지 신혼이려고? 또 손 이사는 스포츠카 두 대나 있잖아.”

“많으면 좋잖아요.”

“암튼, 10만 장이다. 알겠지?”

그 패기로운 선언에 누구도 감히 토 달지 못했다.

홍규헌의 눈이 또 시계로 향했다. 그녀가 책상을 짚으며 일어났다.

“가자.”

홍규헌과 이사들이 사장실을 나섰다.

짠 것처럼 3층에서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사장과 이사들이 다가오자 바짝 기합이 들었다.

홍규헌이 김사무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무엘.”

“네, 사장님.”

“잘하고 와.”

김사무엘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자신감도 망설임도 없는 표정.

하지만 곧 명확한 감정이 떠올랐다.

결의였다.

“예.”

홍규헌이 뒤로 고갯짓하자 손혜빈과 성필, 민경섭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가자, 얘들아.”

손혜빈이 말하자 멤버들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홍규헌과 한구인은 건물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배웅했다. 마침내 그들이 사라지고 적막함이 찾아오자, 한구인이 말했다.

“엔터테인먼트는 구체적인 실적보다 이미지가 중요한 세계라고, 흔히들 말하잖습니까.”

“그렇지. YJS와 SMS가 KS 엔터에 비빌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우리한테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이럴 때는 답답합니다.”

홍규헌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라는 건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으니까요. 누가 숫자로 가르쳐줬으면 합니다.”

“……한 이사.”

홍규헌이 난간에 팔을 걸치고 몸을 기댔다.

“우리 회사 모토 정했잖아. 뭐였지?”

한구인은 잠시 뜸 들이다가 말했다.

“‘우리는 예술성으로 가는 길을 만듭니다’, 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 그걸 알려고 하지 마. 우리가 만들어낸 예술의 가치를 보자.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거야. 한 이사가 보기엔 어때?”

한구인은 카오틱 에너지와 이사들이 빠져나간 현관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확신이 없다는 거야?”

“아시다시피 저는 예술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믿을 따름입니다.”

“믿어?”

“박 이사님과 손 이사님을 믿습니다.”

예술품이 아니라, 예술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손을 믿는다.

“그 손에 가로 엔터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부정적이네. 어쩔 수 없이 믿는단 뜻이야?”

“아니요. 믿고 싶어서 믿습니다. 믿는 것밖에 할 수 없단 게 분하기도 합니다.”

카오틱 에너지의 데뷔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전투의 양상일 뿐이다.

가로 엔터의 미래를 위한 투쟁은 그들의 프로듀싱 과정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다.

웨이퍼센트.

우효민.

소녀연맹.

가로 엔터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온갖 압박을 기적처럼 이겨내고 마침내 이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 오기까지, 한구인은 자신이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회사에서 예술가가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은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

“그 말 들으면.”

홍규헌이 한구인의 등을 팍 때렸다. 한구인이 화들짝 놀랐다.

“다들 무슨 소리냐고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기다리는 게 우리의 일일 뿐이야. 노는 게 아니라.”

“……그렇군요.”

한구인은 난간을 손으로 꽉 쥐었다.

“그럼 전심전력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의 승리를 온 마음으로 믿으면서.

카오틱 에너지 데뷔 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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