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성필은 올리비아의 무례를 지적하는 것처럼, 본인이 무례한 태도를 취했다. 의자에 등을 느슨하게 기대고 힐난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냥 노래만 받고 끝이 아니잖습니까. 소녀연맹은 콘서트 중이에요. 콘서트를 준비하는 건 힘듭니다. 몇 개월을 연습해서 겨우 오르는 거예요. 그 와중에 곡을 듣고, 노래를 연습하고, 당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레코딩을 해야 하는 겁니다. 도구라면 조금 닳는 걸로 끝나니 빌려드리겠지만, 사람은 도구가 아니잖습니까. 컨디션상의 난조도 개의치 않고, 단지 미국에 이름을 좀 알리겠단 이유로 이 제안을 수락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이익이 있어야겠죠.”
“오, 올리비아…….”
케빈이 걱정스럽게 부르자, 올리비아는 예상했단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영국과 미국 양쪽에 이름을 알린 디제이예요. 아까 노래도 들으셨죠? 아주 좋아요. 그의 곡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단 건, 고작 돈 몇 푼보다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요? 말씀드리지만.”
올리비아는 성필의 기세에 뒤지지 않고 기세를 벼려내었다.
“케빈은 훨씬 더 좋은 협업 상대를 마다하고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가로 엔터가 몇십만 달러도 없는 줄 압니까?”
“……예?”
“명성이 목적이라면 미국 유명 뮤지션 아무나 데려와서 피처링을 받겠죠. 근데 안 합니다. 우리나라 아이돌 전부 다 안 그래요. 왜인 줄 압니까? 치욕적이니까.”
성필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젠틀한 분위기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야성에, 올리비아의 동공이 거칠게 떨려왔다.
“타인의 이름을 빌려 외국 차트에 이름을 내건다는 게 치욕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인과도 없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돈으로만 산 피처링. 거기엔 어떤 스토리도 이미지도 없습니다. 가치도 모른 채 명품을 치렁치렁 두른 갑부일 뿐이죠. 제가 여기에 온 건, 그쪽이 피처링을 부탁했기 때문이에요. 저희가 사정하는 게 아니라 그쪽이.”
성필이 검지를 올리비아에게로 뻗었다.
“그쪽이 피처링을 부탁했기 때문에 온 거라고요. 그쪽이 부탁하는 입장이란 걸 모르는 겁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0원? 소녀연맹의 가치가 0이라는 겁니까!”
이윽고 성필이 고성(高聲)을 터뜨렸다.
올리비아와 케빈이 동시에 어깨를 떨었다.
“차라리 케빈이 옛정을 봐서 피처링을 부탁했다면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런데 와서 듣는 말이란 게 ‘이쪽이 아쉬우니 그냥 공짜로 해달라’?”
“사실이…….”
“사실이면, 뭐요? 배가 고픈 게 사실이라면 사람을 잡아먹어도 된단 겁니까? 이유가 반드시 결과로 이어지진 않죠, 모릅니까?”
올리비아가 피곤한 티를 내며 양손을 보였다.
진정하라는 듯 능숙한 제스처였다.
“박. 당신에게 돌아갈 이익을 생각해요. 디렉터죠? 이 일을 원활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훗날 있을 케빈의 성공을 기다려요. 그렇게 공을 쌓으면 사장이 당신에게 뭘 줄지요. 당신은 그냥 기분이 나빠서 명백한 이익을 거부하는 거예요.”
“제 말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소녀연맹이 협업에 참여하려면 콘서트 강행군 중 또 연습해야 합니다. 아티스트의 체력을 깎는 게 어떻게 이익만 있단 겁니까?”
“막말로 제가 뭐 10만 달러라도 준다면 받아들일 건가요? 아니요, 저희는 그런 돈도 없고 줄 생각도 없어요. 그리고 케이팝 아이돌과 협업한 디제이란 게 어떤 결과를 낼지 저희도 아는 바가 없어요. 인더스트리얼 베이비…….”
케이팝에 흔히 따라붙는 수식어다.
“미국에서, 어디까지나 미국에서, 진정성이 의심받는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게 케빈에겐 어떤 굴레를 씌울까요. 쉽게 답을 내리고 싶진 않지만, 지금 당장 생각해낼 수 있을 만한 여러 나쁜 미래가 있어요. 그걸 감안하고서, 케빈의 의향에 따라 이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아까 그러셨나요? 돈만 있으면 누구의 피처링이든 얻을 수 있다고? 이 업계를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는 ‘진정성 없는 것’에 대해 상상 이상의 반감을 품고 있어요. 저희가줄 가장 큰 교환물이 명성인데, 당신은 그 가치를 모르는 거 같네요. 저희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 이 제안을 하는 건지, 모르시니까 공짜라고 말씀하시는 거겠죠.”
올리비아는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싫어한다.
본인 입장을 좀 알려준 것으로 이렇게 성을 내다니, 앞으로도 같이 이야기를 못 나눌 위인이다.
오히려 잘됐다.
애슐리와의 협업 기회가 시간상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지만, 올리비아가 그쪽 매니저에게 애원하든 그를 구워삶든 다시 기회를 가져올 방도는 있으니.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케빈에게 말했다.
“케빈, 끝났…….”
“이, 이게 내 통장 전액인데 말야.”
케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폰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소녀연맹 피처링을 받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에 비굴한 빛이 드러났다.
“이걸로 부족하면 레이블한테 손을 벌릴 수도 있어!”
올리비아는 탄식하며 이마를 탁 쳤다.
“지금 뭐 하는 짓…….”
“올리비아는 닥쳐요!”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케빈이 울상을 지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하나도 못 이뤄주면서, 오히려 망치면서, 뭐가 매니저예요!”
“저는 케빈에게 항상 이익이 될…….”
“이익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고요! 남들이 다 못생겼다는 꽃이더라도 나한텐 아름답게 보이는 게 있다고요! 그러니까 음악가가 된 거잖아요!”
올리비아는 머리가 텅 비었다.
그녀의 상식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그녀가 뮤지션들과 계약할 때, 뮤지션들이 부탁한 내용은 하나같이 동일했다.
돈을 벌게 해달라.
올리비아는 유능한 매니저여서, 그 바람을 이뤄주려고 온 힘을 다해왔다.
비즈니스 매니저는 뮤지션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바람,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을.
그 과정에서 뮤지션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일도 있지만, 그건 매니저가 알 바 아니다. 매니저의 일은 뮤지션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게 아니니까.
뮤지션이 돈을 벌면 매니저도 돈을 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공생 관계일 텐데…….
“성필, 이게 내가 가진 전 재산이야. 할 수 있을까? 부탁할게.”
케빈은 그 관계를 깨버리고, 계약서에 없는 욕망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워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필은 대화 상대가 케빈이 되자 아까보다 누그러졌다. 그는 미안한 투로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어? 그럼 뭐가 문제인데?”
성필은 올리비아를 힐끗 보았다.
“아이돌의 이미지는 공들여 쌓은 성과 같아. 그건 모든 뮤지션이 그러하겠지만, 아이돌은 더 특별해. 더 섬세하지. 그래서 그 이미지가 외부로 투사되는 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해.”
케빈의 피처링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케빈의 입지야.”
“내 입지……?”
“올리비아가 옳아. 소녀연맹은 미국에 활로를 뚫는 게 절실하지. 그렇다고 아무 뮤지션이랑 협업한다면, 소녀연맹의 이미지가 소비되겠지. 모든 협업이 이익은 아닌 거야. 아까 말했다시피, 조심스러워야 해. 네 음악적 성과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부족하단 거…….”
“그보다…….”
케빈은 성필의 시선을 눈치챘다.
성필은 올리비아를 보고 있었다.
케빈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올리비아가 문제라고?
성필은 이유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영미권의 뮤지션은 팀으로 움직인다.
개인 매니저, 비즈니스 매니저, 변호사, 에이전트, 음반사 담당자, 투어 회사 등. 한국에서 한 회사가 전부 담당하는 것을, 영미는 파편적인 개개인이 맡는다.
그중에서 비즈니스 매니저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매니저와 아티스트는 이인삼각이다. 이는 절대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티스트는 매니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나쁜 예시로는 거지 같은 전략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거의 노예처럼 부린 그의 매니저가 있다.
좋은 예시로는 레드 제플린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마침내 스타로 만들어낸 그의 매니저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
배우를 캐스팅하거나 뮤지션을 무대에 올려주는 것에, 배우와 뮤지션 본인보다 매니저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신인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더 크다.
신인의 뭘 보고 감독이 그를 뽑겠는가? 매니저의 인성과 실력을 믿고, 눈 딱 감고 뽑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딱 서양권 매니저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할 듯하다.
매니저들은 뮤지션의 수익에서 일정 비율을 가져가기에, 뮤지션 본인보다 더 수익에 민감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온갖 감언이설과 심리적 조작으로 뮤지션을 세뇌하는 이들도 있다.
뮤지션 주위를 인(人)의 장막으로 둘러놓고 현실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매니저 본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올바른 전략이지만, 도덕의 측면에서는 그른 전략.
올리비아가 그러한 경우 같다.
‘케빈을 구워삶으려고 뭔 일인들 못 할까.’
저 매니저 아래에서 케빈이 어떻게 될지, 성필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혹여나 소녀연맹이 이 일을 받아들였다가, 케빈이 훗날 예상치 못할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면 어떡할까. 그건 소녀연맹에게도 피해로 돌아올 것이다.
“네가 소녀연맹과 협업하는 게 이미지상으로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고, 아까 올리비아가 말했지. 그건 우리도 같아.”
“아니, 올…….”
케빈이 올리비아를 변호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는 단순히 이 일이 틀어질까 봐 올리비아를 감싸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진심을 알기에 감싸는 것이다.
동네 클럽에서 변변찮은 돈도 못 벌던 케빈을 찾아준 게 올리비아였다. 그녀 덕분에 좋은 음반사와 계약하여 프로모션 투어도 돌았다.
끝내 롤라팔루자에까지 라인업으로 섰다.
게다가, 올리비아는 결국 애슐리와의 협업 기회를 포기하고 이 자리까지 와주었다. 그녀는 성필을 향해 ‘더 좋은 아티스트와 협업할 수 있다’고 했으나, 그건 허세였다.
이미 애슐리와의 컬래버레이션은 저 멀리 떠나가 버렸으니.
방금은 화를 냈지만, 케빈은 올리비아를 신뢰했다.
고작 한 번 실망한 것으로 인간관계를 칼처럼 잘라낸다면, 인간(人間)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테니.
“케빈의 입지는.”
그때였다.
시선을 내리깔던 올리비아가 말했다.
“지금은 그야 물론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어요.”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느라 성필과 케빈의 아이컨택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모르는 것이다.
성필이 말했던 ‘케빈의 입지가 문제’란 데에 꽂혀, 맥락에 맞지 않는 변호를 시작했다.
“하지만 영미권과 클럽 씬에서 케빈이 가진 위상은 절대 낮지 않아요. 빌보드 일렉트로닉 차트 TOP10에도 들었고, 그게 고작 일 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에요. 케빈은 재능이 있어요.”
올리비아가 깔았던 눈을 똑바로 떴다.
“그 재능을 보고 매니저를 맡았어요. 케빈은 다음 앨범으로 세계적인 디제이가 될 거예요. 일렉트로닉 씬을 휩쓸 거예요. 그게 안 되면 다다음 앨범에서, 그것도 안 되면 또 그다음 앨범에서.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그녀의 진지한 말투에선 케빈을 향한 신뢰가 느껴졌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케빈의 성공을 믿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여러 뮤지션과 동시에 계약한 그녀다. 케빈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뮤지션도 있다.
그럼에도 케빈을 위해 이 자리에 왔고, 더 많은 시간을 그에게 내준다.
훗날 그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리라 믿지 않고선 보일 수 없는 헌신이다.
“제 화법이 무례했던 건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는 게 저 때문이 아니라…….”
올리비아 때문이 맞다.
“케빈의 입지 때문이라면, 후회할 거라고 말씀드리겠어요. 케빈은 박 이사가 돈을 주고서 피처링으로 참가해야 할, 그런 디제이가 될 거예요.”
“…….”
“…….
성필과 케빈은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성필이 물었다.
“더 유명한 뮤지션의 협업 제안이 들어왔다면서요? 그쪽으로 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케빈이 바라는 게 소녀연맹이라면…….”
올리비아는 동양식 예의를 배운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도 그걸 따라야죠. 그러니 다시 진지하게 제안합니다. 피차 미래를 보는 입장에서, 지금 케빈의 입지는 가불로 남겨주세요. 제가 내년에 증명할게요. 내년 롤라팔루자에, 케빈을 반드시 서브 헤드라이너급 스테이지에 세울게요. 그리고…… 소녀연맹의 피로도는 돈으로 배상할게요. 피처링 비용, 가능한 한 내겠습니다. 케빈의 전 재산 이상으로요.”
“올리비아.”
케빈이 아랫입술을 숨겼다.
웃음을 참는 것이다.
“괜찮겠어요? 이 일에 올리비아의…….”
“당연히 그냥 주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전부 다 받아낼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미안해하지 말고 그냥 받아요.”
“얼마까지 됩니까?”
성필이 묻자, 올리비아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단위를 말했다.
이럴 수가.
“그 돈으로 차를 사서 저 좀 태우고 다녀줘요…….”
케빈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건 퍼스널 매니저한테 부탁해요.”
“없는 거 알면서…….”
“저는 비즈니스 매니저예요. 박 이사, 이게 제가 미래를 걸고 내는 담보예요. 제가 담당하는 뮤지션들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케빈은 그 이상으로 성장할 게 분명해요. 10년 넘게 매니저로 있으면서 갈고 닦은 감이 말해요. 케빈을 위한 마스터플랜도 있어요.”
“있어요?”
“케빈이 첫 번째 계단을 부쉈지만요. 한국 사람에게 미국에서 제가 지니는 신용이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부디.”
성필은 팔짱을 끼고 숨을 길게 뿜었다.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다른 조건을 묻고 싶네요. 피처링에 참여하는 건 소녀연맹 전원입니까?”
* * *
이불이 포근하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이불에 잠겨 자는 건 최고다. 가장 좋은 건 흐릿한 정신으로 자는지 깨어 있는지 모를 때다.
이불이 살을 에워싸는 기분이 너무 좋다.
평생 이대로 살고 싶어…….
까톡!
침대 옆 선반에서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백설하의 머릿속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열이 피어올라서 짜증이 부지불식간에 심장을 채웠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니 다시 잠이 덮쳤다.
기분 좋게 또 이불의 온기를 느끼…….
까톡!
“씨…….”
백설하가 멍한 정신으로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다. 선반을 더듬던 그녀가 마침내 폰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빨아들였다.
액정을 켜자.
“우, 윽.”
눈이 부셨다.
한쪽 눈을 반만 뜨고 눈부심과 싸웠다. 누구에게 온 걸까.
광고 메시지이기만 해봐라. 평생 그 업체는 이용 안 할 거다.
[박성필 이사님]
“…….”
백설하가 천천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톡을 확인하니, 그곳엔 음원 파일 하나가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다운로드했다.
용량이 꽤 크다. 곡이 길어서는 아닐 것이다. 아마 아직 믹싱과 마스터링 과정을 안 거쳐서 온갖 데이터가 때려 박혀 있는 모양인데…….
음악을 들었다.
약간 거칠지만 노래를 배운 티가 나는 목소리다. 잠이 덜 깨서 가사를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대강 슬픈 노래란 건 알겠다.
그때 화려하고 경쾌한 금관악기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이라이트를 들은 백설하가 눈을 번쩍 떴다. 하이라이트 멜로디가 상당히 좋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번쩍 뜨였다고 해도 반만 뜨인 거지만.
백설하는 성필에게 톡을 보내려 폰을 양손으로 잡았다.
“아오, 어깨…….”
백설하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제 리허설을 한다고 계속 뛰어다녔더니 어깨가 결렸다. 다른 애들은 종아리와 허벅지가 아프다는데, 백설하는 어김없이 오늘도 어깨다.
‘젊어서(26세)도 이런데 나이 들면 어떡하지…….’
나이 들면 지방이 좀 빠지려나.
백설하는 토독 토독 손가락을 놀려 성필에게 질문했다.
이 음원이 뭐냐고. 혹시 우리들의 프로듀싱 타이틀이냐고. 외국 작곡가에게 곡을 받은 거냐고.
그리 의식의 흐름으로 메시지를 쓰고 있자니 전화가 걸려 왔다.
백설하는 혼비백산했다.
“크흠, 크흠, 아아, 아아아아.”
‘가온 도’에서 ‘3옥타브 도’까지 스케일 연습을 마치고, 백설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설하야 자고 있었어?]
“아니요. 시간이 몇 시인데 제가 자겠어요, 헤헤.”
[그 노래 얼마나 연습하면 완벽하게 부를 수 있겠어? 정식 음원 발매가 가능한 수준으로.]
“……네헤?”
백설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단 것을 깨닫곤 고개를 홱홱 저었다.
“그, 시간이 어느 정도 있을까요?”
[미국에 있을 동안?]
“어…….”
백설하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하품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눈썹을 검지로 긁적이며, 그녀가 답했다.
“디렉팅이 어떨지에 따라 다르겠는데, 하루?”
[거짓말하는 거지?]
성필이 허 웃으며 물었다.
백설하가 기지개를 켜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이사님한테 왜 거짓말해요오.”
[……갑자기 웬 애교?]
“아, 아아, 기, 기지개 켜느라구요! 애교 같은 거 아니에요…….”
[자고 있던 거 맞지?]
“……네에.”
[아무튼, 하루라고? 진짜?]
“네, 뭐, 네. 그렇게 어려운 곡도 아니고. 지금도 하라면, 하음…….”
어차피 자고 있던 게 들켰다면 이젠 거리낄 게 없다. 백설하는 가볍게 하품했다.
“바로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콘서트에 무리가 가진 않겠어?]
“음정이 2옥타브도 겨우 올라가는 곡인데 무리는……. 러닝머신 위에서도 부를 수 있어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백설하가 짐짓 삐친 티를 내자 폰 너머의 성필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믿음직스럽네.]
백설하는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누워서 성필과 이야기하고 있자니 무례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동시에 배덕감에서 오는 은밀한 기쁨도 있었다.
누워서 이야기하다니.
내가 이렇게 불량한 아이였던가.
백설하가 피식 웃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이 곡은 뭐예요?”
[으응, 별건 아니고.]
“별게 아닌데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 주신 거예요? 아, 그런데 지금 아침은 맞나요?”
[사실 별거 맞아.]
“네?”
* * *
레코딩 스튜디오로 백설하가 들어오자 케빈과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광경을 성필이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으헤?”
백설하, 일어나자마자 잡혀 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