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27화 (727/760)

727화

레버 레코드는 케빈의 피처링 제안이 오자 이렇게 말했다. 소녀연맹 미국 진출의 발판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런데, 레버 레코드가 뭐라고 그런 걸 알 수 있겠는가. 케이팝 그룹을 미국에 진출시켜본 경험이 있기나 한가?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서 ‘미국인 아티스트와 협업 - 인지도 상승 - 미국에서 성공’ 같은 공식이나 그린 것이겠지.

‘단순한 발상이야.’

그리고 세상 누구도 그 단순한 발상 이상을 해낼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체계적으로 미국을 타깃으로 삼아 진출에 성공한 케이팝 그룹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다면 SMS 엔터의 강성욱이 유일하다.

‘세상 사람들은 강 대표님이 옛날에 미국 진출을 선언하고 들이박았던 걸 조롱하고 있다지만…….’

그건 정말이지 대단한 시도였다.

케이팝이 미국에서 통하리란 확신을 품은 것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스라엘의 프로듀서가 ‘우리 음악이 한국에도 통할 거야’란 확신으로 본인 가수를 워터멜론 차트 70위권에 걸어놓았다면.

그건 정말 굉장한 업적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강성욱의 행보가 저평가되는 이유는.

‘사업적인 실패. 그럼에도…….’

사업적 이익은 보지 못했으나, 그가 미국에 데뷔시켰던 걸그룹은 현재까지도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최고 순위를 기록한 걸그룹이다.

케이팝 그룹들이 옛날보다 훨씬 거대해진 현재다. 그들이 기를 쓰고 뚫으려고 했던 미국 시장을, 강성욱은 10년도 더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서나마 뚫어낸 것이다.

게다가 그 경험.

‘배움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다.’

강성욱이 미국 음반사·에이전시와의 협업으로 얻어낸 경험은, 훗날 SMS 엔터에 나침판이 되어줄 게 틀림없다.

만약 소녀연맹의 미국 진출을 논하고자 한다면, 가장 적합한 대상은 레버 레코드가 아닌 강성욱일 것이다.

‘하지만 타 기획사 대표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음반 작업에 참여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일이다. 그야말로 프로듀싱과 매니지먼트 전반에 걸친 도움을 구하는 일일 테니.

아무튼, 성필은 물론이고 한국의 모든 프로듀서들은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빈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러니 얻어내야지.’

이게 성필이 직접 미국으로 온 이유였다.

케이팝 씬 내에서 인지도를 얻어, 미국의 케이팝 팬들을 대상으로 굿즈 장사와 콘서트 팔이를 하는 것 이상으로.

그러니까 마치 세금 거두듯 미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수거해가는 것 이상으로.

소녀연맹이 성장하길 바란다.

그건 곧 소녀연맹이 새로운 케이팝의 사업 모델을 제안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인미답의 영역.

성필은 그곳을 밟기 위해, 오늘 케빈의 작업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사무적인 빌딩이라기보다 사람이 살 것처럼 보이는 주홍색 벽돌의 건물.

그 한 층에 케빈의 작업실이 있었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운 배경으로 올리비아와 케빈이 반겨주었다.

“성필!”

케빈이 팔을 활짝 펼치며 다가왔다.

성필도 함께 밤마다 클럽을 다니던 그때 그 시절처럼 매우 친밀한 투로 그를 안았다.

“진짜 디제이가 됐구나 케빈!”

“난 원래도 디제이였거든? 롤라팔루자에서도 봤잖아!”

둘이 갑작스럽게 한국어를 쓰자 뒤에 서 있던 올리비아는 당황했다.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케빈이 폭포수처럼 한국말을 쏟아냈다.

조아라의 통역을 할 때보다 훨씬 발음이 유창했다. 과거와 달리 반말을 쓰니, 그 유창함이 훨씬 더 돋보였다.

“아라 씨는 어때.”

“잘 지내고 있지. 옛날이랑 그다지 다를 게 없어.”

“이번엔 가방을 도둑맞진 않았고?”

“그렇게 두지 않지. 우리 회사는 옛날이랑 달리 돈과 직원이 많아.”

“그렇겠지.”

그렇겠지?

아, 소녀연맹에게 협업 제안을 줄 정도이니 가로 엔터의 사정도 알 것이다.

타이틀곡 ‘아니’ 하나만 내고 빠듯하게 생활하던 가로 엔터와 다르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케빈?”

올리비아가 다그치듯 그를 불렀다. 그제야 케빈은 영어를 썼다.

“이쪽은 내 비즈니스 매니저, 올리비아.”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성필과 올리비아가 미소 지으며 악수했다.

밝은 금발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밖을 자주 돌아다니는지 피부가 보기 좋게 탔다.

인사를 마친 셋은 작업실 중앙의 테이블에 앉았다. 성필의 맞은편에 올리비아가, 그녀 옆에 케빈이 있는 모양새였다.

“놀랐습니다. 총괄 프로듀서가 직접 오시다니요.”

성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처링 제안이라면 케빈이 먼저 곡을 보내고, 가로 엔터에서 확인하고, 회의를 통해 OK나 NO라고 답해도 됐을 일이다.

그야말로 놀랄 일일 것이다.

‘피처링 해줄래요?’라고 물었더니 회사의 중역이 와 버렸으니.

“소녀연맹이 콘서트 때문에 여기 있어서 겸사겸사. 그리고 케빈이랑은 친분이 있습니다. 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예요. 이름이 같아 혹시나 했더니, 진짜 그 케빈이라니요. 케빈, 더 멋진 디제이 네임은 없었어?”

“‘앨런 워커’도 본명이야.”

“디제이 ‘마시멜로’를 좋아한다면서. 내가 전에 바베큐는 어떠냐고 했던 거 같은데.”

“거지 같아. 내 이름이 훨씬 멋져.”

“나도 동의해.”

둘의 대화가 뚝 끊겼다.

케빈의 탓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테이블 위를 피아노 두드리듯 두드리더니, 씩 웃으면서 옆의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신변잡기를 끝내고 비즈니스적인 용무로 넘어가고픈데 방법을 모르겠단 듯이 말이다.

사실, 그는 성필과 한담이나 나눌 심정이 아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이 자리가 소녀연맹과의 컬래버레이션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자신이 관여하고 있단 건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었다.

올리비아의 말마따나, 케빈은 자신에게 비즈니스적인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크흠.”

케빈의 시선에 올리비아가 헛기침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스마트 패드를 꺼내어 자신의 앞에 두었다.

“먼저 곡을 들어보셔야겠죠? 이 자리의 본질은 음악이니까, 이게 가장 먼저일 것 같은데요.”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가 패드를 몇 번 터치하더니, 패드와 연결되어 있던 스피커가 음향을 뱉어냈다.

성필은 그 강렬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스피커가 내뿜는 진동이 공간을 가득가득 메운다. 그 질감이 어찌나 선명한지, 진동이 벽을 타고 천장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만, 그 스피커에 걸맞지 않게 소리가 질박했다. 스피커의 높은 해상도에 비하여 소리의 정교함이 부족했다.

“이건…….”

“데모죠. 압니다. 고려하고 듣겠습니다.”

올리비아가 입을 닫았다.

데모란 이름답게 이 곡엔 아직 아무런 음향적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걸 감안하고, 성필은 직관에 의존했다.

애절하게 이별을 부르짖는 노랫말…….

“케빈, 노래를 잘 부르네.”

불안하게 성필의 안색을 살피던 케빈이 흠칫 놀랐다.

“아, 배웠거든. 노래를 불러줄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내가 부르겠단 심정으로.”

“이대로 내도 괜찮은 거 아니야?”

실제로 케빈의 앨범엔 그가 직접 보컬을 맡은 곡이 몇몇 있었다.

가수인 동시에 디제이로 활동하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굳이 다른 보컬을 구하는 이유는, 첫째로 곡마다 어울리는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화제성 때문이다. 피처링한 가수의 화제성을 이용하고 싶어서.

“내가 듣기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가이드일 뿐이야. 생각해둔 목소리는 따로 있어.”

[나를 탓하며 물어

왜 너를 두고 갔냐고

두고 가야만 했냐고

떠나가야만 하는 거냐고

맞아 우린 좋은 한때를 보냈어

그런데 이젠 버티기 힘들어 자기

네가 준 모든 걸 버릴 거야]

연인의 이별을 묘사하는 곡이다.

보통 이별 곡이라고 하면 슬픔이 주요한 정서다. 이 곡도 그러하다. 가사가 아니라 곡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잔잔하게 전자 피아노와 그 피아노를 따라가는 수많은 사운드들. 시작부터 현재까지 블록처럼 단단하게 쌓여간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에 진입할 거라고 예상되는 시점에서, 화려한 사운드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로크가 들어온다.

담백한 기타 선율 속에서 케빈의 애처로운 가사가 이어진다.

[내가 사이코패스 같니

절규하는 널 보면서도 웃고 있으니

이 웃음은 슬픔을 가리기 위한 거야

내 눈물이 내 심장을 녹이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마침내 곡의 하이라이트.

[우리를 추억할 물건이 없었으면 좋겠어

너를 떠올릴 방법은, 마른 눈물과 술뿐이겠지]

드롭.

하이라이트가 찾아오자 성필은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악기가 등장했다.

금관악기다.

군대의 개선을 축하하듯 세상이 떠나가라 경쾌한 음색을 내뱉는 금관악기들.

황금빛 나팔 아래서 행군하는 기병대가 절로 생각나게 하는 가볍고 화려한 멜로디다.

오직 슬픔만이 가득했던 이전과 대비되어 더 놀랍고, 더 신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따스한 금관악기의 입바람은 듣는 사람을 압도한다.

무엇보다.

‘멜로디가 좋아.’

왜 어떤 멜로디는 좋고, 어떤 멜로디는 별로인가.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의 호오(好惡)를 판단할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직관이다. 그렇기에 음악만큼 호불호가 큰 취향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필의 직관은 금관악기가 불어대는 이 간단하고도 담백한, 경쾌하고 화려한 멜로디가 좋다고 말한다.

조금 더 집중하려던 때, 성필은 화려한 금관악기 아래에 깔린 어느 악기를 인지했다.

‘피아노다.’

꽃이 만발한 들판 아래를 받쳐주는 토양처럼, 피아노의 반주는 존재하고 있었다.

소리가 작은 게 아니었다. 다만 금관악기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총 7개의 코드를 매우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피아노는 숨은 주역이었다.

성필은 더 진지한 자세로 음악을 경청했다. 케빈과 올리비아가 그런 성필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짧고도 강렬한 하이라이트가 끝나자 즉시 다음 벌스(Verse)로 이어졌다.

1절과 완벽히 같은 보컬 라인이다. 아까와 같은 감성의 가사가 이어지고, 또다시 하이라이트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그 하이라이트인가.’

아니었다.

이번에 메인 멜로디를 차지한 건 피아노였다. 피아노는 금관악기가 읊던 멜로디를 그대로 가져와 소리쳤다.

같은 멜로디가 몇 번 반복되고, 다시 피아노가 반주로 숨어들었다. 금관악기의 멜로디가 터져 나왔다.

하이라이트가 끝나고, 그대로 곡도 끝났다.

성필은 곡의 전개 때문에 당황했다. 이 곡은 1절과 2절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즐겁고 화려한 축제가 너무 빨리 끝난 것처럼, 아쉬움과 여운이 짙게 남았다.

“……어때?”

케빈이 묻자 성필은 잠시 뜸을 들였다. 예의상으로라도 ‘좋다’는 말이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성필은 생각을 거듭하듯 미간만 좁힌 채 답을 주지 않았다.

케빈이 불안한 낯짝으로 올리비아를 응시하던 때, 성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좋아.”

한국어였다.

올리비아가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케빈이 신나서 답했다.

“존나 좋(Xucking Good)대요!”

“아…….”

올리비아는 한국어 ‘너무’를 기억했다.

어느 나라 말이건 욕을 기억하는 건 좋은 일이다. 언젠가 한국어로 욕을 먹게 된다면, 그게 욕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고 싶진 않았다.

“이 곡 제목이?”

“Tear&Alcohol.”

눈물과 술.

슬픔과 즐거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곡이다. 가사와 전반적인 분위기, 그리고 하이라이트 파트에서의 대비가 돋보인다.

“2절에서 바로 끝나기에 놀랐어.”

“그게 포인트야. 짧을수록 좋은 곡도 있어. 그럼 이제…….”

케빈은 또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일 이야기를 진행해달란 뜻이었다.

올리비아는 재빨리 뿌듯함을 얼굴에서 지웠다. 그리고 성필을 향해 차가운 매니저로서의 태도를 보였다.

“소녀연맹이 피처링에 참여해도 괜찮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예. 진짜로 참여하게 될지는 이후의 이야기에 달렸죠.”

이후의 이야기.

즉, 돈 문제다.

올리비아는 긴장했다.

‘피처링을 받는 데 돈을 쓴다…….’

아직 케빈은 돈을 쓸어 담는 수준의 디제이는 아니다. 애초에 최근까지 본인이 큰 의욕이 없었다.

그런데도 음향 장비와 사운드를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으니, 그의 통장이 가득 차 있을 날이 없다.

‘음반사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겠지.’

음반사는 신인 아티스트를 위해 투자해주는 여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적자가 나올 게 확실하지만 투어를 열어준다거나, 마찬가지로 적자겠지만 앨범 제작에 돈을 퍼부어준다거나 말이다.

소녀연맹의 피처링을 받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음반사에 손을 벌릴 수도 있겠지만…….

‘소녀연맹을 대상으론 가능성이 낮지.’

음반사의 중역들께서 케이팝 아이돌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둘 진 모르겠다.

당장 올리비아마저도 이 컬래버레이션을 반대했으니, 음반사가 호의적으로 반응할 리 없다.

케이팝 아이돌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과연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볼 수 있는가. 그건 아무도 답할 수 없다.

모험이다.

‘케빈은 애슐리와의 협업을 때려치우고 소녀연맹을 택한 거야.’

더 확실한 답이 있음에도 소녀연맹이라는 모험을 택했다. 그 모험에 음반사가 돈을 투자해줄 가능성은, 솔직히 말해서 0에 수렴할 것이다.

아니면, 혹시 모른다.

케빈과 올리비아가 일생에 다시 없을 기적의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시켜 음반사 사람들에게 기립 박수를 이끌어낸다면.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기각.

‘다음으로는 내 사비를 쓴다, 는 건데…….’

올리비아가 미쳤다고 케빈에게 사비를 빌려주어 소녀연맹 피처링을 받게 해주겠는가?

매니저는 아티스트에게 돈을 받는 직업이지, 아티스트에게 돈을 주는 직업이 아니다.

그렇다.

돈을 받는다.

케빈 수익의 일정 비율을.

그 돈값을 하는 게 올리비아의 역할이며, 그렇게 할 생각이다.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이야.’

얼마를 주어야 할까?

미국에서 톱급 뮤지션에게 피처링을 받기 위해선 몇십만 달러의 돈이 필요하다. 뮤직비디오 출연 옵션까지 더해지면 가격이 두 배 가까이 뛴다.

메인스트림에 이름을 알려 파급력이 있다면 십만 달러라는 상징적인 단위에 들어선다.

그렇다면 소녀연맹은 어떠한가?

‘우리의 목적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지.’

케빈의 목적이 화제성을 모아 차트에 드는 거라면, 소녀연맹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안 그런가?

소녀연맹 본인들부터가 ‘빌보드 핫100’에 들어선 경험이 없다.

‘빌보드 200’은 앨범 판매량, 디지털 다운로드, 스트리밍 횟수를 종합하여 계산되는 차트이다.

소녀연맹이 그곳에서 1위를 했단 건, 미국 내에서의 인지도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팬덤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몇 명쯤일까? 만 단위는 되겠지.’

몇만 명이 듣고, 그다음에는?

‘케이팝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우리 케빈의 노래를 지속적으로 소비해줄 리는 없어.’

유명 아티스트를 쓰는 이유는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함이다.

그중에 케빈의 음악을 마음에 들어할 사람이 있으리라 믿고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다.

그런데 소녀연맹의 이름으로 음악을 들을 인간의 숫자야 뻔하다. 글로벌로 따지면 많겠다만, 중요한 건 미국이다.

‘애초에 케이팝 아이돌을 섭외해본 사람은, 적어도 내 주위엔 없었어.’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즉, 이 자리가 케이팝 아이돌 섭외의 기본값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올리비아는 어깨가 무거웠다. 이 비즈니스적 현장은, 미국에서 누구도 헤쳐 나간 적 없는 미답지이다.

‘솔직히 수만 달러도 아까워.’

이건 랜덤 박스를 얼마에 구매하겠느냐는 질문과 같다. 거기에 다짜고짜 수만 달러를 들이붓는 인간은 미쳤거나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선구자의 비애라고 할까.

올리비아는 아무런 전례도 없이 성필과 케빈, 둘을 만족시킬 결과를 내어야 한다.

“미국 진출이 절실하시죠?”

올리비아가 운을 뗐다.

성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 포괄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저희 쪽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좀 들었어요.”

비즈니스 매니저인 올리비아는 에이전시들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중 투어 에이전시에게 소녀연맹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거대 투어 에이전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지사(支社)를 가지고 있다. 외국의 사정을 미리 알아보고 콘서트를 설계하는 이들 말이다.

그중 동남아시아에 포진한 지사 직원과, 올리비아는 겨우 접촉해볼 수 있었다. 그는 케이팝에 꽤 훤하다는 모양이다.

“상장(上場)을 준비하고 계신 거 같은데…….”

가로 엔터는 상장하여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사의 에이전트는 그리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로 엔터가 기업 정보를 그토록 체계적으로 공시하고 관리하진 않을 거라고.

또한 작년을 비롯한 올해의 파격적인 행보들도 그러한 추측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노라고.

솔로 뮤지션이 있는 기획사에 투자하고, 보이그룹을 영입하고, 차기 그룹까지 준비하고 있다.

하나만 해도 벅찰 일을 연달아서, 무언가에 쫓기듯이 거칠게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장이 미쳐서?’

그럴 리가.

‘소녀연맹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현재에만 가능한 곡예(曲藝).’

소녀연맹을 간판으로 내걸고, 그 옆엔 킹 앞의 폰처럼 다른 뮤지션과 그룹을 병행해 둔다.

그건 아마 가로 엔터가 지닌 음반사로서의 역량을 증명하려는 것일 터다.

고작 그룹 하나 성공시켜서 상장했다 하더라도, 누가 가로 엔터를 믿고 주식을 사겠는가.

안 그래도 미국에서 공전절후의 인기를 구가하는 WTP의 기획사 주식이 초기의 반의 반토막 났다는 기사가 뜬 마당이다.

투자자들은 더 조심스러워졌을 터다.

게다가 어느 사업이든 크기가 불어나면 문외한과 하이에나들이 몰려들기에, 예측불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그 모든 악재를 이겨내고 공고한 자금을 획득하기 위해선, 철옹성 같은 명성이 필요하다.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올리비아가 싱긋 웃었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가로 엔터 쪽이 더 절실하리라 판단한 근거였다.

소녀연맹이란 간판을 더욱더 키운다. 그 이름값은 결코 다른 이들에게 뒤처져선 안 된다.

아마도, 가로 엔터의 목표는 한국의 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것일 테니.

‘미국도 똑같아.’

후발주자가 앞서나가는 듯하면 여러 회사가 몰려 들어와 반병신을 만들어 놓는다.

선두를 빼앗기지 않는 방법은 노력하여 실력을 갈고닦는 것만이 있는 게 아니다. 뒤에서 쫓아오는 놈을 두들겨 패서 못 달리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저희가 요청하는 입장이었지만, 이 컬래버레이션은 양쪽에 이득이 있을 거 같군요. 아뇨, 실상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케빈의 강권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일 뿐이지만요. 다른 뮤지션과의 협업 기회를 가져왔더니 소녀연맹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지 뭐예요.”

“제 입장은.”

성필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올리비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주지시켜주지 않으셔도 괜찮단 겁니다.”

케빈은 성필의 싸늘한 어투에 놀랐다. 그와 있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케빈이 올리비아와 성필을 번갈아 보며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길게 이야기하신 이유가 있으실 텐데, 말씀하시죠.”

“그럴까요. 케이팝 아이돌에게 피처링을 제의한다. 미국의 뮤지션이. 이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제가 제시할 값은 0입니다.”

“거부합니다.”

케빈이 절망했다.

올리비아도, 성필의 ‘너무’나 단호한 답에 당황한 낯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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