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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26화 (726/760)

726화

아침, 성필은 눈을 떴다.

“으…….”

몸을 일으키자 삭신이 쑤셨다.

호텔의 침대는 푹신했으나, 집에서 쓰던 것과 달라 몸에 잘 받지 않았다.

혹여나 숙취가 있을까 싶어 머리를 흔들었으나 다행히 없었다. 하기야, 테킬라 두 잔 마신 게 전부인데 숙취가 있을 리가.

성필은 침대에서 가볍게 내려와 창문으로 다가갔다. 여름이지만 이른 시각이라 밖은 아직 푸르스름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정경을 감상한 후, 성필은 화장대 옆의 전신거울로 향했다.

드로즈 한 장만 걸친 자신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던 성필은, 복근을 흐릿하게 만드는 뱃살을 잡았다. 검지와 엄지로 잡았을 때 손 마디를 절반쯤 덮었다.

그러고는 옆구리에 붙은 살도 만져보았다.

“에휴.”

권강철 트레이너와의 PT를 끝낸 후, 성필은 대신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춤은 어디까지나 흥미 목적이었고, 러닝머신에서 수십 분 달리는 본격적인 유산소 운동보다 지방 연소 효과가 적었다.

소녀연맹 멤버들처럼 춤이 일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권강철의 지옥 같은 스케줄을 따를 때보다 살이 붙긴 했다.

‘애초에 복근을 계속 유지하는 게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만.’

식단도 주에 몇 번씩 빠뜨리게 되고 술도 마시게 되니, 살이 붙는 건 필연적이었다.

성필은 복근을 쓸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젠 자취를 감추어버린 사랑스러운 식스팩…….

그래도 다른 근육들은 멀쩡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릿해진 건 지방이 잘 붙는 부위인 배와 옆구리뿐이다.

그마저도 보통 사람과 비교해선 지방이 적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바디 프로필을 준비 중이라 살을 빼는 중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한테 또 바디 프로필을 찍자고 말씀드려볼까.’

그러면 동기 부여가 확실히 될 텐데.

성필은 양치와 세수만 하고 호텔을 빠져나와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그나마 기름기가 적은 것들로 배를 채운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은 운동용 레깅스에 반팔 티.

그대로 나가려다가, 너무 과시하는 느낌이 나서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입었다.

호텔의 헬스장은 한적했다.

거울 앞 벤치에 앉은 여자가 한 명 있을 뿐이다.

‘몸이 되게 좋네. 이 시간에 운동할 정도면 스포츠 모델인가?’

성필이 멀리서도 그녀를 여자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복장이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크롭 후드티, 그리고 후드티처럼 검은 레깅스를 입었다.

그리고 성필이 그녀를 모델 혹은 그와 비슷한 직업을 가졌으리라 추측하는 이유는, 그녀가 후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침이라 씻지 않았거나 화장을 안 했거나. 아무튼 주변의 눈을 신경 쓰는 직업을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성필은 스트레칭 매트 위로 올라가 폼롤러로 몸을 풀었다. 근육을 꾹꾹 세심하게 눌러준 후 가볍게 손목과 발목을 풀었다.

‘오늘은 가슴.’

일단 덤벨 프레스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그 여자는 덤벨 운동 공간에 있었다.

성필은 그녀가 괜히 자신을 의식하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 벤치를 들어 가져왔다.

그때였다.

그녀는 마주한 거울을 빤히 바라보더니, 뒤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사님?”

“어?”

성필은 놀라서 벤치 각도를 조절하다가 멈췄다.

“하양아?”

장하양이었다.

* * *

성필은 그녀가 이른 아침 운동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제 리허설을 마쳤으니 피곤하고 힘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어 운동하러 오다니.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리허설은 다른 도시에서의 것과 차원이 다르다.

훗날 있을 모든 공연의 리허설이니 강도든 빈도든 실제 공연과 매우 흡사하다.

즉, 장하양은 콘서트를 마친 바로 다음 날 운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신에 피로가 쌓인 데다 근육통도 생겼을 거야.’

그런데, 이 무슨 성실함인가.

그리고 그러한 감명을 장하양도 받은 듯했다.

“대단하시네요. 외국에 일하러 오셔도 운동을 안 거르실 줄은 몰랐어요.”

“대단하긴, 대단한 건 리허설 다음 날에도 운동하는 너지.”

“제가 운동하는 건 일이지만, 박 이사님은 아니시잖아요.”

“그만하자. 이러다 계속 칭찬만 하겠어. 그럼 나 가볼게.”

성필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블루투스 이어폰 케이스를 열었다.

“저, 이사님.”

장하양이 성필을 멈춰 세웠다.

성필은 이어폰 케이스 뚜껑을 닫았다.

“응?”

“저희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잖아요. 이왕 기회가 왔으니 같이 운동하실래요?”

“너랑? 내가?”

성필은 장하양의 몸을 쳐다보았다. 딱히 그녀의 몸을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녀가 알길 바라서였다.

성필과 장하양은 드는 무게가 몇 배는 차이 날 텐데, 어떻게 같이 운동을 할 수 있겠는가.

덤벨은 그렇다 쳐도 성필은 이후 벤치 프레스도 할 예정이다. 서로 차례가 바뀔 때마다 원판을 계속 뺏다 꼈다 하는 건 너무 귀찮잖은가.

“같이 운동을…… 아…….”

애초에 둘이 하는 운동이 같을 리도 없다.

성필이 난색을 표하자 장하양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힘없는 웃음을 뱉었다.

“그렇죠. 그냥 말씀드려본 거예요…….”

“그냥 말씀드려본 말투가 아니잖아. 너무 실망하는 거 아니야?”

“같은 운동인으로서 언제 한 번 함께 몸을 쓰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될 줄은 몰랐네요…….”

장하양다운 농담조는 그렇다치고, 저렇게 시적으로 실망을 표현하니 성필도 가슴이 아팠다.

장하양은 처연하게 성필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였다. 그 눈이 향하는 곳엔 무엇이 있을까…….

보았더니 거울이었다.

장하양은 거울의 반사각을 이용해 성필을 관찰하고 있었다.

성필은 충격받았다.

‘하양이는 평소에도 저러는 건가?’

짐짓 슬픈 티를 내지만, 내심 냉철하게 성필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던 건가?

역시 연기를 지망했던 아이답다.

“그래, 하자.”

장하양의 얼굴이 밝아졌다.

둘은 45도 정도 기울인 벤치 앞에 섰다. 그 앞엔 3kg 덤벨 한 쌍과 16kg 덤벨 한 쌍이 두어졌다.

“피라미드로 올라가면서 할 거야. 넌?”

“저도요.”

성필이 먼저 덤벨을 들고 벤치에 앉았다. 무릎 위에 올려둔 덤벨을 무릎으로 차며 누웠다.

허리를 쭉 들고 나비처럼 상박을 펼쳤다.

“스읍.”

덤벨을 쭈욱 위로 들었다.

“후우.”

“하나.”

“스읍, 후우.”

“둘, 좋아요.”

“푸흡.”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하양의 말투가 마치 트레이너 같았기 때문이다.

권강철 트레이너도 ‘좋습니다’, ‘오 굿’, ‘오케이’처럼 추임새를 넣어주곤 했었다.

“스읍, 후우.”

“셋.”

“스으흐억!”

성필이 팔을 올리다 말고 숨을 확 풀었다.

장하양이 그의 가슴에 손을 댄 탓이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성필이 공포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극점 찾아드리는 거예요.”

“……아.”

운동은 자극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정확한 지점을 느끼는지 아닌지 운동자가 판별할 수 있게 서포터가 그 지점을 짚어주곤 한다.

하체 운동일 땐 둔부를 터치할 수도 있고, 가슴 상부라면 상부를, 등이라면 능연근이나 승모의 중앙 같은 부위를.

그렇게 외부에서 느껴지는 자극과 내부에서 느껴지는 자극을 비교하는 건데.

“그, 나 그렇게 해줘야 할 정도는 아니니까 손 좀…….”

“넷.”

장하양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손을 뗐다. 마치 정극(正劇) 배우처럼 한없이 진중하여, 괴상한 신음을 흘린 성필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한 세트를 마친 성필이 벤치에서 나왔다.

장하양이 뛰어들 듯이 벤치에 앉았다. 3kg 아령을 든 그녀가 능숙하게 벤치에 누웠다.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스읍, 후우.”

“하나.”

“스으흐우으으…….”

장하양은 숨이 풀린 듯했다. 성필이 당황해서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녜요. 이사님 거기 서 있지 마시고 위쪽으로 올라와 주실래요?”

“아.”

성필은 그녀의 다리 쪽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즉, 그녀의 얼굴 아래가 보인다.

흔히 굴욕샷이라고 불리는 각도이다. 장하양은 부끄러웠던 거겠지.

성필은 재빨리 그녀의 머리 쪽으로 이동했다.

“둘.”

“스읍.”

장하양이 팔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올려 성필과 눈을 맞추었다.

“저 자극이 잘 안 느껴지는데 찾아주시…….”

“장난치지 마.”

성필이 정수리를 톡 치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장하양과 성필은 번갈아 가며 덤벨 프레스를 마쳤다.

장하양은 5세트까지 올라갔고, 성필은 7세트까지 했다가 장하양을 기다리게 하기 싫어서 그만두었다. 30kg 이상으로까지 하고 싶었지만 뭐, 함께 하는 운동이니까.

“벤치 프레스.”

스미스 머신이 아닌 프리 웨이트.

빈 봉 주위로 여러 무게의 원판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이사님이랑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음.”

성필은 빈 봉을 손으로 짚었다. 그걸 한 손으로 잠깐 들어보곤, 약간 애매하단 듯 고개를 갸웃했다.

“뭐어…… 가벼운 무게로도 할 수 있긴 한데. 빈 봉으로 굳이 해 본 적은 없는데.”

“혼신의 힘을 다할 테니까 40kg까지 올려볼까요?”

“진짜 할 수 있긴 해?”

“혼신의 힘을 다하면요…….”

“빈 봉으로 하자.”

빈 봉의 무게는 20kg이다.

이 무게도 여자에겐 무겁다.

이미 강해진 채 헬스장에 오지 않는다면, 여자는 벤치 프레스로 웜업도 하지 못한다.

평범한 남자가 벤치 프레스 웜업으로 40kg을 드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떤 평범한 남자가 웜업으로 40kg을 바로 시도하겠는가.

헬스는 여자에게 친절한 운동은 아니다.

다행히 장하양은 이미 강한 사람이었다.

“음…….”

벤치에 앉으려던 성필은 10kg 원판을 들어 봉에 끼웠다. 그것을 본 장하양도 10kg 원판을 반대쪽에 끼웠다.

“이 정도면 뺏다 꼈다 바로 할 수 있으니까.”

“네.”

성필이 벤치에 누웠다.

40kg…… 가벼운 무게다.

성필은 허리를 아예 공중에 뜨도록 확 들고 발로 바닥을 밀었다. 더 힘들게 바벨을 드는 법이다.

그렇게 봉을 뽑아 가슴으로 천천히 내렸다. 아주 천천히, 가슴에 힘을 빡 주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부하를 내걸었다.

그리고 내린 것보다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 봉을 들었다.

“후우우우.”

권강철은 가슴에 힘을 꽉 주기만 해도 다음 날 알이 밸 수 있다고 하던가.

성필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벼운 무게에서도 부하를 주는 법을 배우고 숙달했다.

권강철 트레이너에 대한 감사를 담아서 모든 힘을…….

“흐어어……!”

성필은 화들짝 놀라서 팔을 후덜덜 떨었다.

바로 앞에 그림자가 졌다. 장하양이 성필의 배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앉았단 뜻이 아니다. 그녀는 성필의 배 위로 사타구니가 오도록 섰다. 벤치 양쪽 바닥에 발을 디디고서 말이다.

떨어져 있긴 하지만, 마치 장하양이 성필의 배 위에 탄 모양새다.

그러고서 장하양은 봉의 중앙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그녀가 말했다.

“40kg은 저한테 무거워요. 머리 위쪽에서 잡으면 거리가 있어서 만약의 사태에 도와주기 힘들어요.”

“어, 그래…….”

장하양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성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필은 옆구리에 닿는 그녀의 허벅지를 신경 쓰지 않으려 고개를 더 위로 쳐들었다.

동작을 한 번 더 수행한 성필이 말했다.

“근데 하양아, 내가 40kg을 놓쳐서 깔릴 거 같진 않는데…….”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이 봉이 이사님의 가슴으로 떨어져서 흉부가 함몰되면, 저는 영원한 후회와 고통 속에 살게 될 거예요.”

“진짜 운동에 진심이구나.”

“그런데 이사님.”

“응?”

“별로 안 놀라시네요?”

“놀라게 하려고 한 거였냐?!”

성필은 또 동작을 한 회 수행했다.

“권강철 트레이너님이 이렇게 보조해주셨어.”

“네?!”

“왜 놀라. 네 말대로 무거우면 이렇게 잡아줘야 하니까 그렇지.”

장하양은 성필의 위에 탄 권강철 트레이너(얼굴은 모름)를 떠올리는 듯 표정이 복잡해졌다.

성필의 횟수가 15회를 넘었다.

그때까지도 장하양은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제 도움이 필요 없어 보이시네요. 대신 자극점을 찾아드릴까요?”

“너 나 웃겨서 흉부 함몰시키려는 거지?”

세트를 마치고 성필은 기도하듯 손바닥을 모았다. 확실한 펌핑감이 만족을 주었다. 권강철 트레이너에게 배웠던 몇 년은 결코 쓸모없지 않았다.

이번에도 장하양은 성필이 벤치에서 나오자마자 달려들 듯 그곳에 앉고, 누웠다. 그녀는 봉을 쥐고 허리를 번쩍 들었다.

“와, 자세 좋네.”

성필이 원판을 빼며 감탄했다.

장하양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딜 보시는 거예요.”

“흉추와 요추.”

“봉 들 거예요. 빨리 제 위에 타세요.”

“하양아, 나 슬슬 기 빨려.”

“아하하.”

“입만 웃고 있네.”

장하양은 운동할 때 이런 느낌이구나.

운동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지하게 대하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이다.

성필은 장하양의 머리 쪽으로 가서 봉을 아래쪽에서 쥐었다. 쥐는 것을 넘어 아예 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속박하듯 했다.

만에 하나 장하양이 봉을 놓쳐 흉부가 함몰되면, 성필이야말로 영원토록 후회와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었다.

장하양이 봉을 번쩍 들어 뺐다.

그러곤 얼떨떨한 투로 말했다.

“무게가 안 느껴져요. 저,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걸까요?”

“아, 미안.”

성필이 너무 긴장해서 힘을 주었던 모양이다. 천천히 팔에서 힘을 뺐다.

장하양이 ‘스읍’ 상박을 내리고, ‘후우’ 봉을 들었다.

“이사님.”

“왜.”

“자극이 잘 안 오는 거 같은데, 자극점 찾아주실래요?”

“아라가 농담 통제 풀어주고 나서 아주 살판났지? 아라가 아니라 나한테 당해볼래? 어? 그보다 왜 이렇게 신났어.”

“좋아하는 걸 이사님이랑 하니까요. 평소보다 기분이 몇 배는 업됐어요.”

장하양은 오늘 거의 처음으로 미소에 진심을 담았다. 그 말을 들은 성필도 농담 통제를 쏙 집어넣고 씩 웃어주었다.

“그래. 그 기분 나도 알지.”

홍규헌과 함께 운동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성필은 간식 받은 개처럼 신나서 온갖 재롱을 떨었었다. 그때 홍규헌도 지금의 성필과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정말 창피해서 죽고 싶다.

“……하양아?”

창피한 기억을 떠올리던 때, 성필은 이상을 눈치챘다. 계속 봉이 들려있다.

그제야 장하양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팔을 후들후들 떨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무겁나?

그럴 리가.

덤벨로 열도 충분히 얻었고, 빈 봉이라면 장하양에게 이렇게나 무거워할 무게가 아닐 텐데.

“하양아 왜 그래?”

성필이 혹시 몰라 봉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누운 그녀와 마주 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만할까?”

“흐아, 아, 하아아…….”

그날, 성필은 영원토록 고통과 후회 속에서 살 뻔했다. 이상한 신음을 흘린 장하양의 팔에선 힘이 빠져나갔고, 다행히 성필이 곧바로 봉을 잡았었다.

역시 리허설 다음 날 아침부터 바로 운동하는 건 무리였다.

장하양이 아픈 듯하여 운동은 그렇게 끝났다.

* * *

“언니도 진짜 독종이에요.”

조아라가 버팔로 윙을 우적거리며 말했다.

“다들 힘들어 죽겠다잖아요. 나도 그렇고요. 근데 언니는 어떻게 아침에 운동하러 가요? 난 시켜도 못 하겠구만.”

“아하하.”

장하양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답은 하지 않았다. 접시 위에 올라온 샐러드를 포크로 쿡쿡 짚는 꼴이, 영 입맛이 없는 듯했다.

어제 몸을 혹사시켜 놓고 아침에 또 운동을 했으니, 입맛이 당기긴커녕 몸이 휴식을 갈구하느라 비명을 지를 터다.

“하아…….”

뜬금없이 애달픈 한숨을 쉬기까지 한다.

조아라는 장하양의 프로 정신이 존경스러웠다. 동시에 그녀가 진 짐이 너무 무거운 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언니를 아끼는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하양은 깨작깨작 풀을 씹었다.

지금도 봐라. 모처럼 호텔 조식 뷔페를 먹는데 풀과 퍽퍽한 고기만 담아왔지 않은가.

“아저씨.”

조아라는 둥근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성필을 포크로 가리켰다.

“언니한테 뭐라고 좀 해줘요. 언니 열심히 하는 거야 옛날부터 유명했는데, 그게 몇 년을 이어지니까 좀 걱정돼요.”

“아라야, 포크 치워.”

성필의 지적에 조아라는 아무 일 없었단 것처럼 포크 끝을 아래로 축 떨어뜨렸다.

“사람이 계속 달릴 순 없는 거잖아요. 마라톤도 몇 시간 안에 끝나는데, 우리 아이돌 활동하는 건 몇 년이에요. 하양 언니도 지칠 거라고요. 뭐라고 해줘요.”

“와, 내가 알던 아라가 맞나?”

성필이 웃으며 고기를 입 안에 넣자 조아라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뭐요. 난 계속 철없는 애여야 하나?”

“보기 좋아서 한 말이야. 그 마음으로 날 희롱하는 걸 멈춰줬으면 좋겠다.”

“희롱은 무슨. 진짜 희롱 한번 해봐요?”

“아니.”

“뭐…… 아니, 누가 진짜 한대요? 왜 그렇게 심각하게 대답해요? 농담한 사람 무안하게.”

“아, 나도 농담이었어. 아무튼.”

성필은 이틀간의 혹사로 넋 나간 장하양을 쳐다보았다.

“아라 말이 맞아. 우리들의 프로듀싱 끝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

장하양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성필을 흘기기만 할 뿐 마땅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게 무언의 거절이라고 여겨, 성필은 따로 더 설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특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 아이다.

장하양은 성필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겠다고 말했었다. 그건 맹세와 같았다.

장하양은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리라.

그녀가 대견스러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콘서트만 끝나면 휴가이니, 그땐 그녀도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다들 힘들긴 했나 보다.”

“그죠.”

조아라가 세심한 손길로 고기의 뼈를 발라냈다.

“아저씨가 치논 언니랑 마음 편히 노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리허설했으니까요.”

“아니, 그, 논 건 맞지만 꼭 의무를 배반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건…….”

“옛날엔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케어해 줄 기세였으면서, 이젠 뭐 다 잡은 물고기라는 거죠?”

조아라가 고기를 향해 포크를 쿡 내리 찔렀다.

“회사에 아이돌들도 늘었고 하니까.”

성필은 옛날의 조아라와 현재가 겹쳤다.

옛날, 조아라가 ‘우리보다 다른 아이돌들이 더 소중하냐’고 서슬 퍼렇게 물었을 때. 바로 다음에 농담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성필은 그 안에 진심이 있다고 느꼈었다.

“아저씨, 조심해요.”

조아라가 고기를 꽂은 포크 끝을 성필에게로 가리켰다. 이번엔 성필도 내리라고 하지 못했다.

“우리 3년 뒤에 재계약할지 말지, 아저씨 태도에 달렸어요. 옛날처럼 잘해요, 알겠어요?”

“은혜를 모르는 것도 유분수지.”

장하양이 조아라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조아라가 ‘아, 악!’ 비명을 지르면서 울상을 지었다.

“잘해야 할 게 우리야 이사님이야? 박 이사님이 태만하기라도 하셨어?”

“아뇨, 그냥 옛날에 비해서어…….”

“우린 좋게 봐줘도 이사님과 동등한 입장이야. 최소한 동업자로서 예의는 갖춰야지. 그렇게.”

장하양은 조아라의 포크를 빼앗아 접시 위에 거칠게 두었다.

“버릇없이 굴지 말고.”

조아라는 미안해하는 대신 억울한 듯 눈꼬리를 내렸다. 장하양이 또 뭐라고 하기 전, 성필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은혜는 아니지. 아라가 제발 아이돌 시켜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거 아니잖아. 부탁은 내가 했지. 하양이 너도 마찬가지고. 미안해, 아라야.”

“이사님…….”

장하양은 납득이 안 되는 듯했다. 그녀도 조아라가 별것도 아닌 걸로 성필에게 트집 잡는 일을 여러 번 보아왔다.

이 기회에 그 부조리를 지적하려 했는데, 성필이 말리고 들어오니 탐탁지 않으리라.

“확실히 내가 옛날보다 너희와 있는 시간이 적고, 또 신경 써주는 게 덜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너희가 열심히 잘해줘서 회사가 큰 덕분이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줄 수 없을까? 프로듀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온 힘을 다해서 할 거고.”

성필은 조아라가 보란 듯이 장하양에게 앙갚음할 줄 알았다. 성필이 저렇게 말하니 자신의 행동이 옳았노라고.

전생에도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그런데.

“그냥…….”

조아라는 지그시 눈을 감곤 천천히 다시 떴다. 그녀의 눈에 후회가 배어 나왔다.

한숨을 뱉고선, 그녀가 사과했다.

“내가 미안해요.”

“어?”

“걍 쫌…… 옛날이랑 괴리가 있나 봐요 나한테. 어렸을 때랑 지금이랑.”

성필은 정확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조아라도 모르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아, 그게에…… 걍, 나는 옛날 그대론 거 같고 아저씨도 그런 거 같은데, 주변만 바뀐다고 해야 하나. 그게 잘 안 받아들여지는…… 여하튼 그래요.”

조아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해요.”

조아라는 장하양이 접시 위에 거칠게 올려둔 포크를 들었다. 그 포크 끝을 그녀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엔 이런 장난도 웃으면서 했었는데. 나도 그럴 나이가 아니고, 아저씨와 내 관계도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네요.”

“…….”

“…….”

성필과 장하양이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조아라의 반응이 예상외라 놀란 것이었다.

“뭐어…….”

성필은 당황을 숨기고 여느 때처럼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근데 난 옛날이랑 딱히 다른 거 같진 않은데? 우리 아라.”

성필이 그녀에게로 주먹을 내밀었다. 조아라는 픽 웃으면서 주먹을 맞추었다.

식사가 재개됐다.

“근데 다른 셋은 많이 피곤해? 조식 끝나겠어.”

“신아름은 앓아누웠고요.”

“앓아누워?”

“말이 그렇다고요. 쌤은 걍 자고…… 리카 걘 어제 아저씨랑 회의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둘이 술 많이 마셨어요?”

“난 안 마셨어.”

“그럼 걔 혼자 마신 거예요? 뭔 창작의 고통이라도 세게 겪나. 혼자 술을 그렇게 퍼마시곤 끙끙대고, 왜 그랬대요?”

“몰라.”

한 잔 마실 때마다 성필에게 술을 권하긴 했었다. 성필이 전부 거절해서 리카 홀로 병을 다 비우게 됐지만 말이다.

“아라처럼 술맛을 안 거 아닐까.”

“드디어 술친구가 생기나?”

“너무 많이 마시진 마. 콘서트 있으니까.”

“알아요. 아이돌 짬바 4년이에요 4년. 하양 언니 보면 알잖아요. 우리 몸 관리의 프로인 거.”

“알지.”

“그럼 아저씨는 오늘 거기 가는 거죠? 케빈 오빠 만나러. 나도 갈까요?”

“나 혼자 갈게.”

“뭐, 내가 정에 휩쓸리기라도 할까 봐요?”

“어.”

조아라가 놀랐다.

“네?”

“진짜 그럴 수도 있다고. 케빈이 옛날의 추억을 말하며 소녀연맹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고, 네 귀가 녹아내리도록 단 말만 하면, 안 넘어갈 거라고 확신해?”

“음…….”

“그렇게 정으로 덥석 받아들였다가 진짜 이상한 조건으로 의뢰받게 되면 어떡해? 나도 네가 진짜 하고 싶다고 하면 매몰차게 거절 못 할 거야.”

그건 아티스트 대 아티스트의 결정일 테니까.

“그러니까 가는 건 나 혼자야.”

“……뭐.”

조아라는 채소를 씹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저씨가 잘할 거라고 믿어요.”

무심한 어투였다. 그렇기에 조아라의 신뢰를 진하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성필이 어떤 조건을 가져와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을 것이다.

조아라의 말마따나 아이돌 짬바 4년이다. 그동안 성필과 쌓은 신뢰는 이렇게나 단단한 것이었다.

* * *

성필을 초대한 곳은 케빈의 작업실이었다.

성필이 오기 전, 올리비아는 케빈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친밀한 이야기는 최대한 나누지 마세요. 알겠어요 케빈?”

“넵!”

“비즈니스는?”

“올리비아에게!”

“왜 그렇죠?”

“올리비아가 제 비즈니스 매니저니까요!”

“좋아요.”

올리비아는 잘 훈련된 강아지를 보듯 케빈을 보았다. 케빈도 생각이 있다면 뮤직 비즈니스에 통달한 올리비아를 신뢰할 것이다.

다짜고짜 튀어나와 올리비아의 계획을 망치려고 하진 않겠지.

“알겠어요? 이야기가 잘 흘러간다면 공짜로 피처링을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 조건은?”

“올리비아의 말을 잘 따르는 거예요!”

“잘했어요 케빈!”

그리고 1시간 후.

“이, 이게 내 통장 전액인데 말야.”

케빈이 비굴한 표정으로 폰 화면을 성필에게 보였다. 폰에는 그의 은행 어카운트가 떠 있었다.

“이걸로 소녀연맹 피처링을 받을 수 있을까?”

올리비아가 허 탄식했다.

“이걸로 부족하면 음반사에 손을 벌릴 수도 있어!”

올리비아가 이마를 탁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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