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화
꽤 멋진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후 치논이 멀뚱히 있다가 얼빵하게 웃음으로써 멋짐은 죄다 사라졌다.
“어, 어떻게 참가하죠?”
성필은 바 테이블로 다가갔다.
주인은 이쪽을 보고 있던지 다가가자마자 곧바로 응대해주었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마. 로컬한 느낌이 덜한 곳을 알려줄까? 저 아가씨를 적당히 즐겁게 해줄 바(Bar)가 있어.”
“무대에 서고 싶은데요.”
주인이 머리칼처럼 희끗희끗한 눈썹을 올렸다. 그는 성필을 지긋이 응시하더니 무대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저기, 무대 가외에 앉은 가죽 재킷 입은 남자 보이지? 저 사람이 오늘 관리자(Manager)야. 말해두면, 적당할 때 부르러 올 거야.”
“감사합니다.”
“실력엔 자신 있나?”
아무래도 주인은 성필이 연주자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우리 가게 자랑을 하는 게 되겠지만, 이곳은 꽤 수준이 있거든. 여자친구 앞에서 폼을 잡으려고 어중간한 연주를 했다간 야유를 맞고 끌어 내려질걸. 같은 남자로서,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진 않군. 자네도 체면 구기긴 싫을 텐데.”
“괜찮습니다.”
“유학생인가.”
“제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요?”
성필이 방긋 웃자 주인이 허 웃었다.
“동양인 얼굴은 잘 모르겠어서 말일세. 아무튼 음대 1학년 수준이라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네. 그만둬.”
괜찮다.
물론 진짜 성필이 올라가면 끌려 내려오는 것만으로 다행일 사태가 벌어지겠지. 하지만 올라가는 건 성필이 아니라 치논이다.
그래미 수상 경력을 빛내는 그 뮤지션. 심지어 도쿄 올림픽 때 개막 공연에 서기도 했다.
그 실력을 성필이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어, 이거 좀 신나는데?’
성필은 흥분했다.
자신의 실력을 오해하고 까부는 적들을 순식간에 때려 부숨으로써 생기는 카타르시스.
관계의 순간적인 역전과 낙차.
보통 사람은 그렇게 드라마틱한 경험이 그다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클리셰에 열광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걸 성필이 직접 체험하게 되었으니, 물론 그 스스로 상황을 타파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살짝 흥분되었다.
그 눈을 주인도 읽었는지 혀를 찼다.
“한 곡 정도는 버틴다면, 그래, 여자친구에게 면이 살겠지. 그런데 자네에겐 평소보다 더 엄격할 거야. 그건 알아둬. 여기 손님들이 자네 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미안한 마음이 있어. 술이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그러면 연주가 엉망이 될 테니 주지 않겠네.”
결국 안 준다는 말이었다.
“그럼, 멋진 연주라면 한 잔 사주세요.”
주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성필은 주인이 말해준 남자에게로 향했다. 가는 도중 시선이 화살처럼 꽂혀왔다.
“연주하려는 건가?”
“가게를 착각하고 온 건 아니란 건데…….”
“동양인도 재즈를 해?”
이윽고 성필이 관리자 앞에 도착했다. 그도 성필이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왔을 때, 성필은 보지 않고도 뒤에서 날아드는 수많은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 성필이 말했다.
“연주를 하고 싶은데요.”
관리자는 성필이 주인과 대화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주인이 했던 이야기는 전부 생략하려는 듯, 담백하게 하나만 물었다.
“악기는?”
“피아노.”
“기다리고 있어. 앞으로 20분이면 오늘 메인 공연팀이 내려올 거야. 그 뒤론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올라가겠지. 적당할 때 부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성필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치논은 아까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사라지고 불안한 티를 냈다. 그녀가 걱정하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모욕당하시진 않으셨죠?”
“설마요. 대놓고 그러진 않죠.”
“뒤에선…….”
치논은 성필이 가게를 돌아다닐 때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보았다. 가게가 시끄러운 건 그녀에게 문제가 안 됐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입만 보인다면, 그녀는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으니까.
영어가 특기가 아닌 그녀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하는 데 국한된 설명이다. 읽는 건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치논은 성필에게 미안해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하세요?”
치논은 눈을 껌뻑이더니, 포식자의 눈치를 살피듯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네.
“그렇긴 한데…….”
“왜 그러세요?”
“제가 미안해하는 걸 빌미로 부끄러운 일을 시키시려는…….”
“농담이시죠?”
“절반은…….”
“이런 얘기였어요. 죄송하시면, 확실하게 이겨주세요. 공연에 이기느니 지느니,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치논 씨와 함께 있는 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대단한 연주를 보여주세요.”
치논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의욕이 가득해져선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네.”
둘은 이제야 음악에 집중할 여유가 생겼다.
치논은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본다고 했었다. 그래서 성필은 그녀가 진짜 음악을 듣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그쪽으로 고정한 치논은 여느 사람들처럼 음악을 듣는 듯했다.
궁금했다.
그녀가 듣는 음악은 성필이 듣는 것처럼 다채로울까. 혹은, 성필 이상으로 음악을 깊이 이해하는 것일까.
“내려왔어요.”
치논이 말했다.
오늘의 초대 공연팀이 연주를 마치고 떡하니 중앙의 자리를 차지했다.
주인이 다가가 술과 음식을 내놓으며 웃는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실력 있는 이들은 듯하다.
“이봐.”
그때 관리자가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손을 짚으며 무대를 엄지로 가리켰다.
“지금.”
성필이 놀란 눈을 했다.
설마 바로 부를 줄은 몰랐다. 치논도 성필과 같은 생각인지 눈이 동그랗다.
‘아.’
왜 그런지 알겠다.
‘실력이 별로일 거라고 생각하는군.’
무대엔 기다렸단 듯 세 명의 연주자가 올라갔다. 연주자의 퀄리티는 곧 가게의 평판과 직결되니, 어중간한 이들을 공연팀 다음으로 올리진 않았으리라.
그들이 오르자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이전에도 자주 무대에 올랐던 모양이다.
‘흥이 오른 상태에서 치논 씨가 올랐다가 실력이 형편없기라도 한다면, 가게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러니 이왕 실력이 형편없다면, 사람들의 기대감을 떨어뜨리는 에피타이저로라도 쓰겠다는 속셈이다.
치논이 말했던 영웅 요법을 활용한 거라고 해야 할까.
“치논 씨, 차례예요.”
성필이 그리 말하자 치논이 일어났다.
관리자는 물론이고 재밌단 듯 지켜보던 이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설마 성필이 아니라 치논이 오를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음악계의 성비(性比)는 대체로 반반이다. 하지만 상위권으로 갈수록 성비가 남성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기까지, 성비가 절반으로 맞춰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럼에도 아직은 완벽한 반반은 아니다.
이 법칙은 재즈계에도 적용될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수입 상위권 연주자 중에선 여자가 남자보다 드물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듣는 재즈 연주자 중에선 남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가게는 남자 연주자가 우세인 듯하니, 저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여자가?”
관리자는 당황해서 물었다.
성필이 연주자일 거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더 탐탁잖은 눈치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무시하는 게 느껴질 지경이다.
“여자는 무대에 설 수 없나요?”
치논이 영어로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녀의 물음에 관리자는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라고 말하듯 과장된 동작으로 양손을 들었다.
“전혀. 그냥 놀랐던 거야. 여자가 저 무대에 오르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뭐, 학교에서 배웠나?”
“네.”
“재즈를 가르치는 학교도 그렇지 않나? 알 텐데.”
“그렇죠. 이해해요.”
치논은 이번에야말로 무대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시선이 실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앉아서, 의자 높이를 조정했다. 앞서 연주한 사람이 큰 남자였기에 작은 체구의 치논에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한 높이는 꽤 높았다.
의자가 낮으면 손에 힘을 주어 두드려야 하지만, 의자가 높으면 손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타건에 힘이 실린다.
치논이 의자에 앉았다.
성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곡은?”
드럼을 만지던 연주자가 물었다.
치논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드러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논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My favorite thing’.”
색소포니스트와 베이시스트가 연주할 준비를 했다. 드러머가 치논에게 큐 사인을 보냈다.
치논은 건반에 손을 얹고, 쳤다.
빛이 튀었다.
* * *
“또?!”
“존, 지금 난리라니까! 웬 일본인 여자가 와서 죄다 때려눕히고 있잖아!”
“벌써 몇 번째야!”
“좀 더 근성을 보이라고!”
베이시스트가 땀으로 젖어 무대를 내려오자 그러한 고함이 빗발쳤다.
성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연주자가…… 줄줄이 내려왔지……?’
그렇다, 연주자가 줄줄이 내려왔다.
치논과의 연주를 마칠 때마다 전부 다 낭패한 얼굴로 무대를 내려왔다.
처음엔 색소포니스트가, 다음엔 드러머, 그리고 베이시스트가. 그리고 연주자가 내려온 다음엔 다른 연주자가 다투듯이 올라와 치논과 대결(?)을 펼쳤다.
솔직히, 성필은 그게 대결인지 모르겠다.
치논이 여유롭게 피아노를 치면, 다른 연주자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기랄(Shit)!’ 같은 말을 내뱉으며 눈에 불꽃을 피우는 것이다.
‘합주는…… 싸우는 게 아니라 화합하는 거 아닌가? 상대방과의 호흡? 화합?’
아닌가 보다.
무대를 내려온 이들마다 패배한 장군처럼 화를 내거나 망연자실하게 술을 들이켰으니.
“나, 나도.”
눈치를 보던 드러머가 이미 내려간 베이시스트를 따라서 무대를 내려갔다.
남은 트럼페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여 치논을 응시했다. 그가 슬그머니 빠지려던 때.
“너 설마 내려올 생각은 아니지?!”
“변변찮은 연주도 못 해놓고 벌써 내려와? 네가 그러고도 웨스트 코스트 출신이냐!”
“일본인한테 져서 내빼는 게 말이나 되냐!”
이게 싸움판인지 재즈 클럽인지 모르겠다.
물론, 재즈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성필도 격의 차이는 느낄 수 있었다.
메인 테마 이후 다른 연주자들의 레퍼토리와 프레이즈는, 전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이 창의성이 없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지혜와 경험을 펼쳐낸 것이겠으나, 치논과 비교해서 그렇단 것이다.
치논의 파트가 아닐 때, 즉 그녀가 다른 악기를 받쳐주며 반주를 할 때도 다른 연주자들은 진땀을 흘렸다. 그리고 뭐에 쫓기듯이 독창적인, 아니, 괴상한 연주를 하다가 한숨을 내뿜는 것이었다.
‘대체 뭘까.’
치논이 차례를 맞아 멜로디를 칠 때면 몰라도, 그녀가 반주할 때도 무언가 있는 건가.
그녀의 반주조차 다른 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단 건가.
그때였다.
환성이 퍼졌다.
허수아비처럼 깡마르고 큰 흑인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오늘 메인 공연팀.’
그 베이시스트다.
그는 무대로 올라가더니 치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베이스 자리에 앉아 베이스를 품에 안았다.
“드숀이 올라갔어!”
“한 방 먹여줘!”
이곳에선 가장 잘하는 연주자인 듯하다.
그제야 트럼페터는 눈치 보지 않고 무대를 내려갈 수 있었다. 자신이 낄 급이 아니란 것처럼, 테이블에 앉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숀이 말했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
“네.”
아무런 낌새도 없이 치논이 건반을 두드렸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의 메인 테마가 연주됐다. 건반을 세 개 눌렀을까, 곧바로 드숀이 따라잡았다.
더블 베이스라곤 믿을 수 없이 빠른 피치카토(손으로 현을 튕기는 베이스 주법)다.
순식간에 둘의 연주가 어우러졌다.
베이스와 피아노뿐인 공허한 듀엣이었으나, 무대를 채우는 음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안 됐다.
피아노가 앞서나가려 하면 베이스가 따라잡고, 베이스가 두각을 드러내면 피아노가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이건 합주라기보다…….
‘경쟁.’
성필은 이 둘의 연주를 듣고서야, 어째서 다른 연주자들이 패배감을 느꼈는지 알게 됐다.
아까까지 몰랐던 건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이 치논이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드숀은 어떤 식으로든 치논과 맞서는 형태를 자아낼 수 있었다. 그것에 성필은 전율했다.
‘말이 되는 건가 이게?’
한 명이 선율을 연주할 때 당연히 다른 한쪽은 반주를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저 둘은 서로가 선율을 연주하는 듯했다.
대위법(두 개의 멜로디를 동시에 사용하는 방법)을 고려하는 것도 아닐 터다.
둘 다 서로의 이야기를 좋을 대로 지껄이는 걸 텐데, 그게 조화를 해치지 않는다.
그 순간, 드숀의 강렬한 피치카토가 터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 힘을 다하여 현을 쥐며 동시에 현을 튕겼다.
그가 음악에 푹 빠져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 때마다 땀이 비산했다. 혼을 태운다, 그 말이 딱 알맞았다.
관객 사이에 침묵이 나앉았다.
치논도 그마저 치고 들 순 없었는지 간단한 코드 반주로 호응해주었다.
“하.”
드숀이 웃었다.
즐거워서였다.
치논의 피아노를 발판 삼아 현을 튕기니 어디로든지 갈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형태만 아니었다면 즐겁게 음을 주고받았을 텐데.
그러나 그럴 순 없다.
‘어디서 나온 년이냐.’
드숀은 격렬한 적개심을 품었다.
갑자기 저런 피아니스트가 펑 등장할 리는 없다. 다른 곳에서 사주를 받아 왔거나, 가게를 박살 내어 평판을 떨어뜨리는 게 취미인 쓰레기일 게 분명하다.
어디 가서 ‘블루지’는 쓰레기더라. 그런 말을 지껄일 수도 있다.
‘여긴 내 집이나 마찬가지다.’
그딴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드숀은 연주했다.
계속 연주했다.
사용하는 음의 범위가 대양처럼 넓었고, 옥타브를 뛰어넘는 모험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속도는 기타라도 튕기듯이 빨랐다.
드숀 스스로가 연주가 깊이 빠져들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바다로 뛰어든 부테스처럼, 그는 그저 음악이라는 물속에 잠겼다.
“3분이 넘었어…….”
누군가 숨죽이며 말했다.
드숀이 파트를 가져간 지 3분이 넘었다. 그런데도 선율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반복되는 것도 없었으며, 초마다 새로움을 더해갔다.
바닥이 없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연주였다.
“언제까지 할 수…….”
사람들이 경탄에 마지않았다.
하지만 드숀은 자신이 이 정도의 연주를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안다. 전부 자신의 곁에서 연주하는 저 피아니스트 여자 덕이다.
그녀가 드숀을 이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끊임없이 영감이 샘솟는다. 영감이 끊어지려고 하면, 치논이 적절한 변주로 다시 우물을 파낸다.
‘세계적인 재즈 플레이어가 나를 배려해준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마침내 드숀이 눈을 떴다.
5분 동안, 관객들이 지루해하지 않을 연주를 해내었다.
베이스가 이렇게나 오래 파트를 잡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베이스가 5분을 전부 다채롭게 만들 만큼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구사하기 위해선, 그 경험과 능력이 그야말로 정상의 경지에 닿아야 하기에.
애초에 어떤 악기든 5분을 채우는 건 힘들 것이다.
‘자, 나는 5분을 채웠다.’
다음은 너다.
그리 생각하며 가장 낮은 음을 튕겼다. 치논의 반주에 화답하듯 따스하고 단단한 음을.
치논이 받았다.
이어진 연주에, 드숀은 또 웃었다.
이윽고 2분이 지나자 드숀은 끝이라는 듯 현을 무겁게 여러 번 튕겼다. 그러자 치논도 알아듣고 피날레를 장식했다.
드숀이 고개를 숙인 후 한숨을 토했다.
“내가 졌다.”
좌중이 술렁였다.
“나는, 네 연주를 망치기만 하는군.”
드숀은 그리 말하곤 미련 없이 무대를 떠났다.
박수는 없었다.
환호도 없었다.
치논은 조용한 가게를 쭉 둘러보더니 싱긋 미소 지었다.
“또 올라오실 분 없나요?”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치논이 성필에게 손짓했다. 성필은 한 박자 늦게 일어나 무대 위의 그녀에게 다가갔다.
“쇠 자와 앞치마를 사장님께…….”
“네? 아, 네.”
성필은 주인에게 가서 쇠 자와 여분의 앞치마를 받아 무대로 돌아왔다.
치논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피아노 뚜껑 안쪽에 쇠 자와 앞치마를 넣었다.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했다.
치논이 물건을 넣은 곳은 피아노의 해머가 현을 치는 바로 위다. ‘가온 도’의 오른쪽 옥타브 건반에 쇠 자를, 왼쪽 옥타브 건반에 앞치마를 넣었다.
그리고, 치논이 우측의 건반을 쳤다.
챙그랑.
“……!”
피아노는 건반악기다.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튀어 올라 현을 때린다. 그러면 피아노의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에 쇠 자가 올려져 있다. 현을 때린 진동을 쇠 자가 받아 쇳소리를 낸다.
그리고 치논이 좌측 건반을 쳤다.
퉁.
현의 진동을 앞치마가 받았다. 깔끔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퉁. 옷이 진동을 죄다 흡수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마지막 곡은 제 완전한 즉흥입니다.”
연주가 시작됐고, 이젠 다들 놀라서 입을 열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던 까닭이다.
그녀가 우측 건반을 누를 때마다 쇠 자가 떨려 마치 심벌즈 같은 소리를 냈다.
좌측 건반을 누를 때마다 옷이 진동을 머금고 둔탁한 현악기의 음, 베이스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중앙의 건반은 정상적인 피아노 소리를 냈다. 그리하여 이 세 부분의 건반을 모두 쓰는 치논은, 마치 세 개의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연주자들이 줄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분을 삭이던 관리자마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을 가녀린 여자가 동시에 세 개의 악기를 연주하여,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음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은 그저 감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치논은 어깨를 들썩이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쁨을 담아 짧게 웃었다. 그녀도 자신의 연주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뮤즈…….”
치논은 음악을 들을 때 스피커를 껴안는다고 한다. 그걸 떠올리며, 성필은 하프를 껴안은 뮤즈가 생각났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 뮤즈에 어울렸다.
음악의 여신이다.
* * *
재즈 클럽 ‘블루지’에서의 한바탕 소동이 끝났다.
성필과 치논은 열띤 찬사와 무수한 악수 요청에서 겨우 벗어나 클럽을 벗어났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치논은 시도 때도 없이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걸으면서도 쭉 성필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빠에게서 염원하던 선물을 얻어낸 딸이 아빠를 바라보며 재잘재잘 감사를 전하듯이.
“저희가 잘 아는 클래식 작곡가들이 반드시! 반드시 즉흥 연주를 했을 거예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시대에 즉흥 연주를 기록할 기술이 없었단 거예요. 인간의 손이 그렇게 빠르지 않으니까요. 모차르트의 즉흥 연주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리스트는요? 쇼팽은요? 결국 클래식은 악보 위에만 남은 음악이 되어버렸어요. 그걸 얼마나 정확하게 치느냐가 클래식 주자(奏者)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됐고요.”
치논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십수 년 묵은 리벤지를 화려하게 성공했기 때문일까.
“녹음 기술의 등장은 재즈의 탄생을 필연적으로 만들었어요.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곡을 기록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심도 깊은 고민과 완벽한 짜임새로 만들어진 곡이 반드시 즉흥적인 연주보다 나을 거라곤 할 수 없죠. 어느 땐, 뮤즈의 흥얼거림을 전해 받은 사람의 손이 모든 이성적인 계획을 압도할 수도 있어요. 빌 에반스가 ‘빌리지 뱅가드’에서 그랬듯이, 키스 자렛이 ‘쾰른 홀’에서 그랬듯이요.”
치논이 수줍게 웃었다.
“저는요, 어릴 때부터 계획에 약했어요. 방학 계획표를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었거든요. 모든 일을 막상 닥치고 해내는 게 익숙했어요. 얼빵하고, 계획성 없고, 조심성 없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저보고 바보라고 했었는데…….”
재즈에선 달랐다.
문제와 당면한 순간, 치논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날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선 천재라고 불러주더라구요. 아, 이 일을 시작해서 다행이에요. 정말요. 이렇게 좋은 날이 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행복해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이사님이 오늘 클럽에 데려가주시지 않으셨으면, 저는 평생 이런 기분은 못 느꼈을 거예요.”
“저도요.”
“네?”
치논의 재잘거림을 듣다 보니, 둘은 어느새 호텔 앞에 이르렀다.
성필은 멈춰서 그녀에게로 정면을 향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대화할 때 으레 보이는 의례적인 미소가 아니었다. 그의 입가엔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복이 걸려 있었다.
“치논 씨를 알게 되어 다행이에요. 행복해요.”
“그, 그런가요오……?”
“치논 씨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멋진 음악이 있단 것도 몰랐겠죠. 이렇게나 아티스트란 단어가 어울리는 분은 처음이에요.”
치논은 성필의 찬사를 들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칭찬받은 적은 처음이다.
그녀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말을 지어내도 성필처럼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치논은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
“그으, 그리구…….”
“네, 말씀하세요.”
“기쁘셨나요?”
성필이 시원하게 웃었다.
클럽에서 성필이 ‘저를 기쁘게 하는 영광 외에 다른 게 필요하세요?’라고 했던 말을, 치논은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다.
“물론이죠.”
치논은 발그레 뺨을 붉히며, 클럽에서 했듯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잘했어요, 나이트 치논.”
“나이트…….”
치논은 손목에 걸린 앙증맞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는 다시 성필을 보곤 활짝, 순박함과 순수한 기쁨이 일렁이는 웃음을 보였다.
“나이트도 좋지만, 다음엔 제가 레이디였으면 좋겠네요.”
“그럴 기회가 있다면요.”
호텔 안으로 들어가, 둘은 서로가 가야 할 방향으로 찢어졌다. 한 여름밤의 아방튀르는 그토록 담백하게, 또 깊은 여운을 남기며 끝났다.
성필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았다. 그리고 치논의 최신 앨범을 검색하여 첫 번째 트랙부터 듣기 시작했다.
첫 트랙부터 음이 소나기처럼 꽂힌다. 굉장한 속주(速奏)였다. 아까 클럽에서 보였던 실력은 음반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될 듯싶다.
바닥이 없는 아티스트다.
성필이 음의 비에 빠르게 젖어가던 때, 음악 대신 전화음이 들렸다.
이어폰을 검지로 톡 누르자.
[어디신가요! 기다리다가 지쳤다가 이젠 화가 날 거 같아요!]
리카였다.
“지금 가고 있어. 많이 기다렸지?”
[30분이나 오버예요! 안 그래도 리허설 때문에 힘들었는데 제가 앨범 프로듀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확 잘라버릴 수도 있어요!]
“그래 그래, 미안해. 바로 올라갈게.”
[빨리 오셔야 해요! 그리고 잘라버린단 말은 농담이에요!]
전화를 끝내고, 다시금 성필의 귀를 음의 소나기가 뒤덮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층수가 바뀌는 것을 보며, 성필은 오늘 있던 일을 가만히 음미했다. 치논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쏟아지던 박수갈채들…….
‘봐서 다행이야.’
그건 성필에게 강렬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성필은 치논과 대화를 나누며, 미국이란 거대하고 단단한 시장을 공략하는 데 얼마쯤 회의를 느꼈었다.
과연 소녀연맹이 미국을 제패하는 게 가능할까. 그럼으로써 그래미에 설 수 있을까. 아니, 최소한 케이팝 아이돌로 유명해져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나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인기상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미래를 향한 불확실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그만큼 클럽에서 받은 차별적인 눈빛은 성필의 자존감을 깎아내는 것이었다. 위대한 문화를 이루어낸, 위대한 국가의 국민들…….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유산은 전 세계를 풍요롭게 했다. 그 땅에, 소녀연맹의 이름이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어.’
치논이 그러했다.
그녀의 연주는 적대적이던 인간들을 순식간에 호의적으로 뒤바꾸었다.
음악이 그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그들의 심경 변화가, 성필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위대한 아티스트, 치논이 심어준 것이었다.
그건 소녀연맹이 미래에 그릴 꿈의 맛보기였다.
“이제 오시나요!”
약속한 층.
복도를 따라 걷자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리카가 보였다. 그녀는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성필을 노려보았다.
“맛타쿠(정말이지)…… 프로듀서 회의보다 중요한 일이 뭐였나요!”
“프로듀서 회의보다 중요한 건 없지. 메인 프로듀서님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사과할게.”
“……어쩔 수 없네요!”
리카의 심통 난 얼굴엔 순식간에 웃음꽃이 피어 꽃이 만발했다.
“빨리 오세요! 간식과 술을 준비했어요!”
“술은 안 먹을래.”
“에엑?! 스코틀랜드의 추억을 되살릴 겸 일부러 준비한 건데!”
“최대한 맨정신으로 있고 싶어.”
치논은 맨정신으로 공연을 보고 싶다며 술을 먹지 않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맨정신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단 뜻이었을 것이다.
무대는 치논의 전장이었다.
전장에 취해서 서고 싶진 않다.
그 마음은 성필도 같았다.
‘리카와의 회의는 나에게 전장이니까.’
세상을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 그것을 위한 회의이고, 그렇기에 성필에겐 전장이다.
맨정신으로, 전심전력을 다한다.
“가자.”
성필은 다시 자문(自問)했다.
소녀연맹이 미국을 제패할 수 있는가?
“하이(네)!”
답은, ‘할 수 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