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4화
성필은 뒤에서 들리는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되지만, 치논이 못 들어서 다행이다.
본토의 재즈 클럽에 간다고 그토록 기대했던 치논이, 처음 문을 밟자마자 듣는 이야기가 저딴 거라면 얼마나 상처가 클지.
성필과 치논은 카운터 바 앞에 섰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마른 백인 노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메뉴판 주시겠어요?”
성필은 입장료 10달러를 그에게 건넸다.
주인은 성필과 치논을 번갈아 보더니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툭 두었다.
메뉴를 고르는 건 빨랐다.
“테킬라, 탄산음료.”
성필이 테킬라였고 치논이 탄산음료였다.
치논은 멀쩡한 정신으로 음악을 듣고 싶다며 술을 주문하지 않았다.
둘은 잔을 받아 홀을 둘러보았다. 앉을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치논이 홀을 절반도 훑기 전에, 성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올렸다. 그리고 벽에 붙은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로 가죠.”
가게는 어두웠다. 게다가 사람들로 가득하여 오밀조밀하기도 했다.
성필은 치논의 어깨를 느슨하게 감싸며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벽에 붙은 테이블. 치논이 벽을 바라보는 자리에, 성필은 홀을 보는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이곳을 고른 것이다.
‘치논 씨가 저 꼴을 안 봤으면 하니까.’
이 재즈 클럽의 구성원은 당연하지만 모두 서양인이다. 그리고 흑인(African―American)의 비중이 높았다. 절반 이상이었다.
절반인데 뭐가 높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흑인의 비율은 10% 남짓이다. 한 가게에 흑인이 절반을 차지한다면, 충분히 많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가게의 이들은 인종 가리지 않고 성필과 치논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니, 호기심 이상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여기 관광 사이트에 등록이라도 됐나?”
“그럴 리가. 우연히 근처 호텔에서 가까운 재즈 클럽을 찾아온 거겠지.”
“일본의 미적지근한 바(Bar)를 떠올리고 온 거 아니야?”
“뭐든 음악 들을 생각은 없고 서로 물고 빨려는 생각이겠지 뭐.”
“네가 괜찮은 스시 레스토랑이라도 소개해줘. 쟤들이 음악이나 제대로 듣겠냐?”
리카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이 생각난다.
‘인종차별이얏!’
이곳은 인종차별의 향연이었다.
저들은 들리지 않도록 수군대는 것도 아니었다. 들을 테면 들으란 듯 말했다.
게다가 이곳의 손님들은 모두 서로를 아는지, 서로의 이야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참여했다.
아마 단골손님들이 매상을 올려주는 형태의 가게겠지. 애초에 음식과 술을 파는 가게라기보다, 공연장의 형태에 가깝다.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오랫동안 교류하며 끈끈한 분위기를 형성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이야.’
이방인이 환영받을 가게가 아니다. 심지어 그 이방인이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관광객일 게 확실한 동양인이니 취급이 더 박하다.
성필은 가게를 잘못 골랐음을 자책하며 작은 컵 안에 든 테킬라를 홀짝였다.
“역시.”
그때 무대를 바라보던 치논이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안 좋나요?”
분노를 삭이던 성필은 정신이 번쩍 뜨였다.
“이사님 표정으로 보여요.”
“아…….”
“미국은 지역색이 강한 나라예요.”
치논이 탄산음료를 한 모금 홀짝였다.
“거대한 땅이니까요. 주마다 서로 다른 법이 있고, 다른 문화가 있고, 그러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요. 그 거대한 땅과 다양한 사람들을 묶어주는 게 애국심이죠. 그런데, 아시죠? 미국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 결과를 가지고 몸싸움까지 벌이잖아요.”
지역팀이 이기고 지는 것으로 격렬하게 주먹다짐을 하는 풍경이 그다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나라이다.
미국처럼 크고 인종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한국 스포츠도 다른 지역팀을 향해 온갖 원색적인 비난을 삼가지 않곤 한다.
“이 가게도 이 가게만의 자긍심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이물질이 들어오는 걸 반길 리 없죠. 사람은 모르는 것을 배척하니까요.”
성필은 한구인을 떠올렸다.
독일인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민족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까지 찾아왔지만, 결국 이방인일 뿐이라고 했던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혐오는 접촉한 경험이 없을수록 더 강해지는 거라고. 나치가 가장 먼저 행한 정책은 유대인과 독일인을 분리하는 것이었다고.
“알고…… 계셨어요?”
성필은 치논이 아까 보였던 애매한 반응을 떠올렸다.
성필이 ‘지역 클럽’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지역(Local)……’이라고 짧게 고민하는 뉘앙스를 보였었다.
치논이 싱긋 웃었다.
“제가 처음 미국 공연에 갔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게 뭔지 아시겠어요?”
“……재즈 클럽?”
“맞아요. 기대했는데, 느낀 건 ‘나는 이 사람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뿐이었어요. 저는 어린 동양인 여자였거든요. 아무리 봐도 재즈랑은 어울리지 않는. 그게 트라우마가 됐나 봐요. 외국에 숱하게 다녔지만 관광한 경험은 아예 없게 된 건…….”
“그냥 다들 신기하게 볼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이 정도일 줄은…….”
성필은 미국의 음악 청취층에 대한 지식이 있다. 예를 들어 록 장르는 백인 청취자가 압도적이고, 힙합은 흑인 청취자가 압도적이다.
그 중간다리가 팝이다.
글로만 보았을 땐 ‘인종으로 음악 청취층이 갈린다는 게 말이 되나? 음악은 음악이잖아’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오니 어째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피부로 느껴진다.
치논은 일부러 뒤를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 테이블에 꾸욱, 마치 나무가 뿌리를 박는 것처럼 팔꿈치가 몸을 지탱하도록 올렸다.
“‘브랜포드 마살리스’라는 재즈 뮤지션이 있어요. 꽤 옛날 일인데, 그 사람이 ‘일본인은 재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게 꽤 큰일이 됐어요.”
“네에……?”
일본인은 재즈를 이해할 수 없다?
콕 집어서 어느 나라 사람을 그렇게 평했단 말인가? 굉장히 인종차별적이고 국가 차별적인 발언이다.
리카가 들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온 힘을 다해 인종차별이라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품은 종합적인 무언가. 그렇기에 그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이는, 그 토양에 서 있지 않은 이는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무슨 그런…….”
“일본의 재즈 애호가들은 당황했죠. 왜냐하면, 일본은 아시아 중에선 가장 진지하게 재즈를 받아들여 온 국가라고 스스로 자부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의견도 두 개로 갈렸어요.”
브랜포드 마살리스가 옳다.
우리가 재즈를 아무리 듣는다 한들,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 설 순 없다.
아니다, 그는 차별주의자에 불과하다.
재즈는 세계적인 장르가 되었고, 그곳에 이미 국적과 인종은 무의미하다.
“아마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발언은 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의 말마따나, 그는 누구보다 재즈의 근원과 가까운 토양에서 자라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걸 이해한다고요? 인종으로 음악의 진정성과 이해도를 따지는 일이…….”
그때, 성필은 소름 끼치는 사건을 하나 떠올렸다. 과거에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백인으로 이루어진 케이팝 그룹이다.
그들은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아이돌과 같은 안무를 소화하고, 또한 한국 음악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에 대한 당시의 반응이 이것이었다.
‘서양인이 하는 케이팝은 어색하다. 이상하다.’
이상하고 어색한 이유가 곡이나 안무가 아니라, 그들의 인종이었다.
대중과 케이팝 팬은 물론이고 대중음악 전문가들도 그리 말했다. 웃기게도, ‘진정성(authenticity)’이 없다고 했었다.
그리고 당시의 성필도 그리 생각했고, 심지어 치논의 이야기를 들은 방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백인이 아닌 사람이 하는 케이팝은 어색하다. 왜?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하물며 아시아인도 아니니까.
성필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니까 그건…….’
흑인이 리스트의 음악을 연주한 것을 본 백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꼴이다.
‘이상하고 어색해. 왜냐고? 넌 흑인이니까.’
지금 그리 말하면 당장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혀 사회생활을 마감할 반응이다.
그런데 단어를 조금만 바꾸면, 그건 곧 성필이 한 말이었고 한국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인종차별이얏!’ 리카가 했던 말이 성필의 머리를 쿵쿵 울렸다.
‘그럼 내가 저 사람들에게 화낼 자격이 있나?’
성필의 표정을 읽은 치논은 담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었다.
“재즈는 미국이 탄생시킨 문화예요. 미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면서, 흑인들의 정신적 토양이기도 해요. 재즈의 역사가 저항의 역사였으니까요.”
“……예, 책에서 본 적 있습니다.”
흔히 록의 기치(旗幟)가 자유와 저항이라고 한다. 하지만 재즈의 입장에서 보면 코웃음이 나올 발언이다.
심한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록이 재즈만큼 치열했던 적이 있느냐고. 치열하게 저항해온 적이 있느냐고.
마약을 태우며 기분 좋게 중지를 쳐든 게 록의 대표적인 이미지라면, 재즈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경찰에게 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마일스 데이비스라고 할 수 있다.
재즈는 흑인이 투쟁하는 전장이었다.
그러고서 전혀 기쁘지 않은 평가를 결국엔 쟁취해냈다. 흑인은 최소한 음악에서만큼은 백인과 동등하다, 라고.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게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한 말이었기 때문이요. 재즈의 황금기에도 결국 돈을 쓸어모은 건 어느 시기에나 백인 뮤지션과 사업가였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났던 연주자조차 음반사로부터 노예처럼 착취당했었다.
“어떤 것을 정의하기 위해선.”
치논은 탄산음료를 모두 비웠다. 투명한 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것’과 ‘저것’을 구분해야 하잖아요. ‘나’와 ‘너’를 구분하듯이요. 저희는 ‘너’죠. 이물질이요. 이 나라가, 자신들이 세운 자랑스러운 땅 위에 감히 발을 걸친 이방인…….”
“어느 정도 공감이 가네요.”
케이팝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였다.
이름에 ‘케이(K)’가 붙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케이팝은 다분히 지역적인 장르다. 다른 민족과 인종에게 배타적으로 작동한다.
한국과 일본의 아이돌을 비교하여 우월감을 표출하는 건 흔한 광경이다.
케이팝은 글로벌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구가하고 있으나,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글로벌 장르가 되진 못 하리라.
“이건 정말…….”
성필은 입을 다물었다.
충격적이었다.
미국인들이 지닌 문화적 자부심과 배타성을 파편적으로나마 체험한 듯하다.
치논은 자신을, 그리고 아시아인을 이물질이라고 표현했었다. 미국인들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소녀연맹의 미국 진출.
아니, 케이팝이 미국에 나아간다.
그걸 보는 미국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치논의 말마따나, 이물질을 바라보듯이 불쾌감을 드러내겠지.
‘우리나라도 그렇잖아.’
어느 나라이건 자기 문화에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세계 1위의 대국이라는 미국인이 다른 나라를 자애롭게 볼까?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외국인을 향해 드러내는 배타성과 비슷할 것이다. 국가 경제력을 가져와 그 나라 사람들을 향해 온갖 모멸적인 단어를 만들어내고 비웃기도 한다. 그 나라의 문화를 무시하기도 한다.
미국은 더할 것이다.
아무렴,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유산이 한국과 비할 바가 안 되는데.
웬 코딱지처럼 자그맣고 자기네 나라와 비교하여 무엇이든 모자란 곳에서 아이돌이란 게 왔다는데, 좋게 봐주기나 할까?
“하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호환 이사님의 꿈은 미국 진출이라고 하셨지.’
왜 꿈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이 땅에 문화적 유산을 남기겠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꿈인지, 이제야 체감됐다.
‘소녀연맹은 이런 땅에서 성공해야 하는 건가…….’
심지어, 성필은 미국 음악의 총본산이라는 ‘그래미’에 가길 꿈꾸었던 건가.
지금까지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백설하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건가.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러니.
‘이 땅에 소녀연맹의 깃발을 확실하게 꽂는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 될 거야.’
허황되었다고까지 느껴지는 꿈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 꿈을 이루었을 때 보게 될 풍경이 기대된다.
‘정호환 이사님은 이런 마음이었을까.’
타인이 만든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항상 어둠을 거닐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했던 사람.
성필은 케이어스를 따라잡음으로써 정호환이 겪어야 했던 선구자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 조금은 덜 무서울 테니.
바라던 대로, 아주 조금 정호환의 마음을 알겠다.
‘무섭기도 하지만, 가슴 떨리기도 한 것.’
지금 심정을 표현하자면, 소녀연맹 멤버들을 불러놓고 한바탕 연설이라도 하고 싶다.
그리고 멤버들과 손을 모아 구호를 잔뜩 외치며 미래를 향해 선전포고를 내지르고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써야 했다.
성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즐거운 관광을 선물해드리고 싶었는데.”
성필은 치논과 달리 이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취재에 성공한 종군기자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 처한 치논은 불편할 게 틀림없다.
“너무 무거운 대화로 이어졌네요. 코스 선정이 엉망이었어요. 치논 씨에게 죄송한 마음이에요.”
치논은 처음 재즈 클럽에 가서 받은 대접을 트라우마라고 표현했었다. 그렇다면 성필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 게 된다.
성필이 테킬라를 깔끔하게 비웠다.
“갈까요?”
“아니요.”
일어나려던 성필이 멈칫했다.
혹시 조명이 어두워 치논이 자신의 입술을 제대로 못 보았나 싶었다.
그래서 바로 위에 있는 조명으로부터 음영이 잘 지도록, 성필은 상체를 앞으로 빼어 앉았다.
치논이 놀라며 굳었다.
“왜, 왜 다가오세요……?”
“아, 제 입술을 잘 못 보셨나 해서…….”
“자, 잘 보여요…….”
성필이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편한 건 이사님이잖아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치논이 눈썹을 사납게 세웠다. 아마 일부러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겠지. 그녀의 불타는 마음을 표현하려는 모양인데, 딱히 사나워 보이진 않았다.
다른 사람으로 비교하자면 장하양이 짐짓 화난 척 농담할 때 같았다.
“저도 이사님과 같은 마음이에요. 오늘의 관광이 이사님께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해요. 그러니까, 이사님 기분이 안 좋은 게 탐탁지 않아요.”
“……그게 나가기 싫은 이유가 되나요?”
성필이 이 장소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면 나가면 그만일 일이다. 그런데 굳이 이곳에 계속 남아 있겠다는 저의가 무엇일까.
“영웅 요법(Heroic Therapies)이라고 아세요?”
“아니요.”
치논이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성필의 팔로 손을 가져갔다.
“아!”
갑자기 팔이 꼬집힌 성필이 신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 치논을 쳐다보자, 그녀는 실실 웃으면서 꼬집은 곳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팔을 쓸자, 잠깐 찾아왔던 따가움이 순식간에 가셨다.
“기분 좋으시죠?”
“저를 유혹하는 것입니까?”
“아, 말투가 딱딱해졌어요.”
“성희롱입니까?”
“네?”
“아니에요.”
성필이 고개를 젓자 치논은 잠시 생각하더니 화들짝 놀라 변명했다.
“아니에요 절대!”
“알겠어요. 그래서 저를 성추행하신 게 영웅 요법이란 건가요?”
“아닌데, 장난, 이었는데요…….”
“알아요 알아. 설명해주세요.”
“……요컨대, 고통과 쾌락의 조화예요. 원래 인간은 계속 행복하면 안 된대요. 적어도 현대인처럼 항상 행복해선 안 된대요.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고, 그걸 넘어서 간식이 도처에 널려있어요. 폰을 켜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게 넘쳐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언제든지 구할 수 있어요. 저희 조상님들이 누릴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환경이에요. 그래서, 현대인은 우울하대요.”
조상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행복하기에, 우울하다.
“일부러 고통을 주어서 기울어진 쾌락치를 정상으로 돌리는 방법이 ‘영웅 요법’이에요. 고통과 행복의 낙차라고 할까요.”
“높이 날면 떨어질 때 더 아픈 거랑 비슷하네요. 아프니까 일부러 더 낮게 날도록 한다는 거죠?”
“좋은 말이네요.”
영웅 요법이라.
전생의 조아라가 사용하던 방법 같은 건가. 일부러 고통을…… 치욕을 주어 후에 올 행복을 극대화하는…….
‘악, 머리가!’
성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플래시백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간신히 지우고, 다시 치논에게 집중했다.
“지금 이사님은 고통 속에 계세요. 그렇죠?”
“굳이 따지자면 유쾌한 상황은 아니죠.”
“이제 쾌락을 드릴 차례예요.”
“…….”
성필은 꾸민 듯한 침묵을 자아냈다.
치논은 이번에도 당황하진 않았다. 대신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이상한 의미가 아니니까요, 아시겠죠?”
습득력이 빠른 사람이다.
요컨대 이런 이야기다. 이음 엔터의 김명운이 자주 말했던 ‘스스로 위기를 연출하여 깔끔하게 반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말이다.
“저에게 어떻게 쾌락을 주시려고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기대하지 마세요.”
“어쩔 셈이세요?”
웹소설 주인공들처럼 뒷담하는 인간들의 머리를 부술 것도 아니고.
그런 주인공들과 달리 매우 상식적인 인간인 치논은, 어떤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걸까.
뒷담하는 인간들에게 다가가 논파(論破)한 다음 ‘우리가 잘못했다, 사과할게. 미안합니다’란 말이라도 들으려는 셈인가? 서희가 살아 돌아와도 그런 답은 못 들을 것이다.
과연 치논은 어떤…….
“저 사람들의 머리를 부술 거예요.”
“……???”
“확실하진 않지만, 이 클럽은 공연 참가를 받을 거예요.”
그런 재즈 클럽이 있단 것을 알긴 한다. 누구든 올라가 연주할 수 있는 시스템 말이다.
모르는 사람끼리 합주할 수 있는가?
보통 밴드가 무대에 서기 위해선 피나는 연습으로 합을 맞춰야 한다. 그러니 록 밴드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즉흥 합주 따위, 만화 속에나 나오는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즈는 다르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 연주, 임프로비제이션이다. 그건 합주로도 가능하다.
애초에 재즈 앨범에 녹음된 곡 대부분이 즉흥이다. 그래서 나중에 ‘확장판 앨범’이 재발매되면, 원본 앨범엔 실리지 않았던 다른 테이크가 실리기도 한다.
그걸 들으면 ‘이게 정말 그 곡인가?’하는 느낌이 절로 든다.
‘진짜 가능하다고?’
알고 있지만, 선뜻 납득하긴 힘들었다.
왜냐하면, 성필이 들은 모든 재즈곡은 엄격한 설계도로 만들어진 것처럼 짜임새가 완벽하다시피 했으니까.
알고 있지만, 그게 정말 즉흥으로 가능한 건지 계속 의심해왔다. 지금도 보라. 스테이지 위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저게 어떻게 즉흥으로 나올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건 성필의 생각일 뿐이다. 직접 보기 전엔 믿지 못하겠지만, 오늘 직접 보게 될 듯하다.
“이건 박 이사님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기도 해요.”
“역시, 화가 나셨어요?”
“아뇨. 화가 났다면 이사님의 기분이 나쁜 쪽이 더 화가 나죠. 이건 다른 의미로, 그러니까, 네, 리벤지예요.”
“리벤지요?”
“과거의 움츠러들었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요.”
과거 차별적인 대우를 받은 후, 치논은 외국에 가도 밖을 돌아다니지 않게 됐다.
재즈 뮤지션으로 살 만큼 재즈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재즈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 가서 호텔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던 것이다.
그녀가 손해 본 십수 년의 세월을, 오늘 보상받는다.
그렇기에 리벤지, 복수다.
“이사님.”
치논은 성필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저는 지금부터 이사님을 대신해서 싸우러 가는 거예요. 나이트인 거죠.”
“아…….”
성(性) 역할이 바뀌었다고 하면 시대착오적이겠지. 그래, 치논이 나이트라면 성필은 프린스인가.
이런 역할을 맡는 건, 백설하가 성필을 ‘프린스 챠밍’이라고 부르던 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나이트를 거느리게 되어버렸다.
“이사님을 위해 싸우러 가는 저에게 승리의 주문을.”
치논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배시시 흐르는 웃음은 도저히 싸우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성필은 그녀를 황당하단 듯 바라보다가, 결국엔 맞춰주기로 했다.
보통 이런 장면에선 귓속말을 해준다지만, 치논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저를 기쁘게 하는 영광 외에 다른 게 필요하세요?”
치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단 듯 얼굴에 결의를 새겼다.
“저(와타시).”
치논이 자리에서 일어나 위풍당당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피아니스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