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화
저녁을 먹은 후, 세이코는 거실의 헤드폰 앰프 앞에 쪼그려 앉았다.
텔레비전 선반 아래에 둔 헤드폰 앰프에 헤드폰을 연결하여 착용했다.
그녀가 택한 곡은 미사토가 오늘 만나러 간 후배 뮤지션, 토모에의 것이었다.
담백한 악기 구성과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진행이다.
타이틀곡 ‘맑아진 다음에’를 다 들은 세이코가 헤드폰을 벗었다. 그녀는 소파에 앉은 서유선을 의식하며 말했다.
“흐응, 그럭저럭이네.”
“…….”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네.”
“…….”
“작사든 작곡이든 나보다 훨씬 못하지만.”
“……에휴.”
서유선은 폰을 근처에 던져두곤 세이코에게 어울려주기로 했다.
“뭐가?”
“토모에 말이야. 오늘 미사토가 보러 간.”
“그럭저럭 이상이지.”
토모에는 첫 앨범을 15곡 이상의 볼륨을 자랑하는 정규 앨범으로 발매했다.
첫 앨범이 정규 앨범인 것이다.
아직 음악적 색이 확립되지 않은 신인 뮤지션으로선 상당히 위험한 시도다. 그럼에도 끝끝내 정규 앨범을 낸 것을 보면, 그녀를 담당하는 미사토가 어지간히 자신 있던 모양이다.
결과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스트리밍 횟수가 대단하다면서 미사토가 매일 말하던걸. 그리고 데뷔 앨범인데도 차트…….”
“어쩌라고? 나보다 대단해? 나보다 안 대단하면 대단한 게 아니잖아.”
“네 말이 다 옳아.”
서유선의 인정에 세이코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보였다.
그는 심란해졌다. 그가 보기에 세이코는 겉과 속을 판별하는 능력이 없는 듯하다. 무슨 뜻이냐, 사회성 혹은 감성이 어린아이 수준이란 뜻이다.
아니면 억지로 우겨서라도 서유선에게 ‘그래’란 답을 듣고 싶었거나.
세이코는 요즘 그 토모에란 뮤지션을 질투하는 듯했다.
‘하긴, 비슷하지.’
세이코와 비슷하게 어린 나이에 데뷔하고, 작곡과 작사를 전부 도맡을 능력이 있으며, 데뷔 성적 또한 굉장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제2의 가후’라며 호들갑을 떠는 중이다. 그 호들갑의 태반이 웨벡스의 바이럴이긴 하지만.
물론 토모에의 앨범 판매량은 세이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세이코가 데뷔했을 때, 일본은 아직 ‘앨범의 황금 시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판매량으론 둘을 비교할 수 없다.
‘스트리밍 횟수가 그나마 지표가 될 텐데…….’
세이코가 데뷔했을 땐 스트리밍 같은 게 없었다.
아마 ‘둘 중 누가 더 뛰어난가’란 질문은 음악계의 화두가 되겠으나, 영원토록 속 시원한 결말이 나진 않을 것이다.
마치 PTR―17이 초동 판매량 200만 장 이상을 달성하더라도, 최후의 초동 판매량이 10만 장을 겨우 넘었던 다키스트보다 위대하진 않듯이.
시간을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시대가 다른 작품이나 아티스트를 간단히 비교하진 않을 것이다.
“음?”
바닥에 둔 세이코의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액정을 확인한 세이코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치논쨩이야.”
세이코는 서유선이 묻지도 않았건만 발신인을 밝혔다.
“어떡할 거야?”
서유선이 물었다.
그는 아까 세이코가 치논의 문자를 받곤 발광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리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만약 세이코가 또 날뛰려 한다면, 이번엔 확실히 제압할 셈이었다.
“어떡하냐니? 치논쨩은 내 친구야.”
“뭐?”
“내가 치논쨩을 탐탁잖게 생각하기로 할까 봐? 유선은 마음이 좁구나.”
그럼 메시지가 온 것을 보자마자 복잡미묘해졌던 표정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세이코는 자신이 정말 대인배라도 된 듯 자애로운 손짓으로 폰을 들었다.
“아까 내가 답을 안 해줘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연락한 거구. 파쿠 이사에게 접근한 건 내가 자비롭게 용서해줄 거야.”
어느새 세이코는 치논을 용서하게 됐다.
만약 저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세이코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서유선이 생각하기에, 그건 사실이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서유선은 동류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딱히 이상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세이코 정도의 위치에 있는다면 맨정신으론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
인간의 정신 상태가 환경과 상관없이 올곧을 수 있다면, 흔히 ‘도 닦는다’는 인간들이 왜 산골에 처박히겠는가.
수도사들은 왜 속세와 단절되겠는가.
그리고 싯다르타는 왜 한적한 보리수나무 아래서 가부좌를 틀었겠는가.
세이코는 환경에 알맞은 정신을 지녔을 뿐이다.
“어디 볼까.”
세이코가 경쾌한 웃음을 흘리며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그 즉시 그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서유선은 위기를 감지하고 한달음에 그녀의 곁으로 옮겨갔다.
“왜 그래?”
[(성필과 치논이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는 사진)]
[공연 마치고 같이 관광하러 왔어]
[이런 시간에 외식하는 건 처음이라서 설레]
[이사님이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
[세이코쨩이랑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사님도 그러시대]
“하?”
코웃음.
세이코가 급히 폰 화면을 끄고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리고 모은 검지의 끝으로 이마를 쿡쿡 찌르듯 두드렸다.
그녀가 무거운 숨을 뱉곤 서유선에게 물었다.
“유선, 이거 어떻게 생각해?”
“그냥 둘이 식사하는 거야.”
“미사토가 다른 남자랑 밥 먹으면서 이런 사진이랑 메시지를 보내도 그렇게 말할 거야?”
세이코답지 않게 적절한 비유에, 서유선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정말 세이코의 말대로 상상해본 후, 세이코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이…….”
서유선은 전율했다.
세상에, 친구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를 이렇게나 쉽게 빼앗으려는 여자가 존재할 줄이야.
그리고 아까 날뛴 게 세이코의 피해망상이 아니었다니.
“네 말이, 옳아…….”
* * *
“음식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저런 곳은 처음 가 봤어요.”
치논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라도 간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성필이 보기에 그냥 평범한 양식점이었다.
완전 평범하진 않고, 그래도 요리사가 자부심을 품고 음식다운 음식을 내놓는 곳 말이다.
음식 세 접시를 시켜 나눠 먹었는데, 인당 60달러 정도가 들었다.
“또 먹고 싶어요.”
치논은 꿈에 잠긴 듯 그리 말했다.
성필은 그녀의 환상을 깨기 싫었다. 그래서 싱긋 웃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맞춰주었다.
“그러게요. 제가 미국에서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을지도 몰라요.”
치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노란색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걸었다.
해가 졌지만 딱히 어두워졌단 느낌은 안 들었다. 주변의 건물이며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불빛은 낮보다 더욱 밝은 것 같기도 했으니.
물론, 감상이 그렇단 것이지 실제로 낮보다 밝진 않았다.
“제가 식단에도 신경을 쓰거든요. 믿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이 업계에서도 외모가 중요해요. 특히 여자한텐 더 외모를 기대하는 편이고요. 실력도 중요하지만, 날씬하고 예쁠수록 성공하기 쉬워진다는 게 눈으로 보이니까 연주자로서 착잡한 느낌도 있고…….”
치논은 명백히 낮보다 더 수다쟁이가 되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저도 어릴 때는 먹는 걸 참 좋아했는데, 음반사에서 시키는 대로 적게 먹다 보니까 어느새 음식에 큰 관심이 없어졌어요. 음식은 즐기는 거라기보다 살기 위해 먹는단 느낌이고요. 그거 때문인지 다른 데 더 까다로워졌어요. 패션이나 소리…… 제가 소리에 까다롭다고 하니까 약간 이상하게 들리네요.”
치논이 웃자 성필도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동시에 안심했다.
치논이 공연을 떠나기 전, 왠지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려는 듯한 분위기가 됐었다.
성필은 자신의 일본어 뉘앙스에 대해 묻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고도 치논은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 일부러 저를 의식하게 하려는 건가요……?’
치논은 성필의 플러팅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일부러 의식하게 만들어서 마음을 끌어내려고 한다고? 성필은 살면서 그런 음흉한 방법은 쓴 적이 없었다.
애초에 모든 연애를 고백받아서 시작했으니, 누군가를 유혹해본 경험도 없었다.
그나마 고백인지 뭔지 모를 걸 한 번 해보긴 했는데, 그땐 고백이 사랑을 확인하는 최종 단계란 것을 몰랐었다.
아무튼 오해를 풀고, 치논이 공연을 마치고, 그렇게 다시 만났을 때.
그때도 치논은 성필을 경계했었다. 무슨 성필을 숨만 쉬어도 여자를 꾀어내려는 인간처럼 보았던 것이다.
성필로선 기분이 좋은 듯하면서도 곤란한 오해였다.
그리고 현재.
“직접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텐데, 저는 음악을 들을 때 스피커를 껴안아요.”
치논은 처음의 의심을 완벽히 벗어던진 듯 흥겹게 이야기했다.
성필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원래 시간이란 같이 보내는 사람에 따라 밀도가 달라진다. 성필은 좋은 사람으로서, 처음인 그녀의 관광을 아름답게 칠해주고 싶었다.
“멋지네요. 하프를 껴안은 뮤즈가 상상돼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보고 싶은데요?”
치논은 걸으면서도 얼굴을 반쯤 돌려 성필을 바라보았다. 입을 보려 하는 그녀의 버릇은 이런 때에도 발휘되는 것이다.
치논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젠가 기회가 되면요.”
“정말요? 웨벡스에 치논 씨가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스피커가 있던가요.”
치논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가요?”
그쯤에서 성필은 뭔가 이상하단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모르는 일본어 화법이나 뉘앙스인가?
더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치논 씨 댁에 커다란 스피커가 있던 거 같기도 하…….”
치논은 성필을 바라보며 또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리고 그보다 빨리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멈춰 세우게 했다.
치논은 깜짝 놀란 얼굴로 멈췄고, 곧 또다시 놀라야 했다. 바로 앞에 가게의 입간판이 있었다.
자칫하면 부딪칠 뻔했다.
“아, 아, 못 봤네요. 감사합니다.”
“……치논 씨, 불편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실래요?”
치논은 놀란 표정에 이어 당황을 드러냈다.
‘아뇨, 딱히’라 말하던 그녀는, 잠시 고민한 후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잘 안 보여서요…….”
“안 보인다뇨?”
“밤이라서, 이사님 입이 잘 안 보여요…….”
성필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만, 해가 진 밤이었다. 도시의 불빛으로 밝다지만 낮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
성필은 그제야 치논의 답이 이상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낮보다 훨씬 더 수다쟁이가 된 이유도 말이다.
‘어두우면 입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밤이라 가끔 드리우는 어둠과 그림자는, 치논에겐 영상에 낀 노이즈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건 마치 외국 영화를 보다가 잠시 자막이 사라진 듯한 경험이겠지. 그렇기에 치논은 성필의 이야기를 전부 다 볼 수 없다.
중간중간 빠진 내용을 추측으로 꿰맞춰야 하는데, 그게 100% 옳으리란 확증이 없다.
그래서 치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가요?’, ‘그러면 좋겠네요’, ‘기회가 있으면요’ 같은 두루뭉술한 답을 했던 것이다.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될 텐데.
물론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잠시뿐이었고, 성필은 곧바로 그녀가 왜 안 그랬는지 짐작했다.
‘불편하겠지.’
치논도 옛날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때 ‘다시 한번 더’라거나 ‘한 번 더 이야기해 줄래?’라고 말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짜증 내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귀찮단 티를 확 내는 사람도 있었겠지.
그런 일을 몇 년간 겪다 보니, 치논은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를 습득한 것이다.
상대의 짜증을 유발할 가능성을 없애려, 못 알아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당한 답을 내놓는 것이다.
성필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즉, 몸의 정면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또, 측면을 봐야 해서 제대로 구화(口話)를 쓸 수 없고요?”
“……네.”
치논이 귀찮게 해서 미안하단 듯 고개를 짧게 꾸벅 숙였다.
성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곤란하네요.”
“죄송하…….”
“치논 씨가 또 간판에 부딪히면 안 되잖아요. 게다가 걸을 때도 손을 모으고 계신데.”
치논은 그의 말에 아래를 보았다.
그녀는 양손을 겹쳐 골반쯤에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걸을 때도 항상 이러한 자세였었다.
성필이 말했다.
“사고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손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버릇 같은 거라고 한다.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 등의 연주자는 손이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평소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거나, 혹시라도 사고가 있을까 봐 손을 몸 안쪽 가까이 둔다는 모양이다.
치논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며 걸었다. 양손이 다 중요하지만, 이왕 사고를 당할 거라면 왼손이 낫겠단 생각인 걸까.
치논은 성필이 그녀의 자세까지 입에 담자 조금 놀란 듯했다.
“아 그게…….”
“걸을 때는 이야기를 하지 말죠.”
“네……?”
“어디 멈출 때까진 둘 다 입을 닫고 가는 거예요. 어때요?”
“하지만, 그러면 이야기를…….”
“관광이잖아요. 저랑 이야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 도시를 보고 느끼는 게 목적이니까요.”
치논은 성필이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의아스러운 눈빛이다.
그렇겠지.
‘말하지 말자’라는 제안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 몇 개나 되겠는가.
성필은 굳이 그녀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치논이 한 발짝 늦게 따라오더라도 충분히 옆에서 걸을 수 있게 아주 천천히.
성필이 걷자 치논도 걸었다.
그를 흘끗거리며 걷는 게 몇 걸음이나 이어졌을까, 치논이 물었다.
“불편하진 않으세요?”
성필이 멈췄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놀라는지, 치논도 놀라면서 멈추었다.
성필은 앞으로 향하던 발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처럼 치논에게로 몸의 정면을 향했다.
짜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어떤 게요?”
그 간단하면서도 짧은 동작.
멈춰서 자신을 바라봐주는 동작에, 치논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둘은 침묵 속에서 걸었다.
사람 사이의 침묵이란 불편한 법이다. 그것도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 간의 침묵은 더.
하지만 둘 사이의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성필은 볼거리가 나타나면 치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검지로 그곳을 가리켰다. 치논도 그것을 보고 다시 성필을 보면, 성필은 볼거리가 참 재밌단 듯 과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논은 웃었다.
“구경하는 거라면 표정을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하하, 그런가요?”
그게 몇 번 반복됐다.
성필이 걸핏하면 치논의 어깨를 두드리고, 멈추고, 어딘가를 가리키고, 연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치논은 웃었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치논도 멈추길 거리끼지 않게 됐다. 볼 게 있으면 멈췄다. 그러면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삼자가 바라보면 무슨 짓인가 했을 것이다. 닭살 돋는 커플이라면서 피부에 난 소름을 쓸며 도망쳤을지도.
하지만 이게 두 사람의 대화이자 소통이었다.
치논은 더 이상 수다쟁이가 아니었지만, 수다쟁이일 때보다 감정이 더욱 풍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즐거운 곳이네요.”
그런 그녀를 보는 성필은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뿌듯했다.
“여러 번 와 봤지만 오늘처럼 도시를 깊이 느낀 적이 없어요. 재밌어요.”
“다행이네요.”
“아니면 이사님이 재밌는 걸까요.”
“아마…….”
“아마?”
“둘 다?”
“이사님이 재밌는 거 같아요.”
치논은 웃음을 남기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치논이 멈추었다. 치논이 검지로 어느 것을 가리켰다.
거리를 향해 드러난 입구와 벽이 모두 통유리인 가게였다. 다가가 안을 보니 벽에 악기들이 가득했다.
‘재즈 악기점이다.’
정면의 유리 진열장에는 황금처럼 번쩍이는 트럼펫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논이 가리키는 건 그러한 악기가 아니었다.
가게 앞에는 조촐한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치논이 성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장님이 머리가 좋으신 거 같아요.”
“그러게요.”
입간판을 세워두는 것보다 더 유용한 홍보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저 업라이트 피아노는 누구든지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연주할 때, 사람들은 한 번씩 피아노를 쳐다볼 게 틀림없다.
그러면서 가게의 유리 벽 안을 들여다볼 테고.
심지어 현재, 그 싸디싼 업라이트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는 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다.
“전에 드린 이야기 기억나세요?”
치논이 다짜고짜 그리 물었다.
성필은 순식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다. 워낙 재밌는 이야기라 간간이 떠오르곤 했던 까닭이다.
“세계적인 현악 콰르텟이 하루에 수십만 명이 지나가는 역에서 공연했는데, 멈춰서 들은 사람이 고작 몇 명뿐이었다는 이야기요?”
“네. 도전해볼까요?”
치논은 호승심이 넘쳤다. 성필이 본 적 없는 그녀의 일면이었다.
“상처받지 않으시겠어요?”
“그러면 보험이 필요하겠네요.”
치논이 피아노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성필에게 다가오란 뜻으로 손짓했다.
성필은 그녀의 왼편에 섰다.
그러자 치논이 왼손을 ‘가온 도’의 왼편에 두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는 ‘도’의 왼쪽, 즉 무겁고 낮은 음계를 내는 건반 쪽으로.
“가장 처음 제대로 들은 재즈곡이 빌 에반스 거라고 하셨죠?”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 엔터 야유회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한구인의 이어폰을 한쪽 빌려 들은 게 빌 에반스의 ‘When I fall in love’였었다.
‘When I fall in love’가 수록된 빌 에반스의 ‘포트레이트 인 재즈’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치논이 앉은 채 성필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황송하지만, 제가 빌 에반스의 ‘My foolish heart’를 연주해보겠습니다.”
공연자가 관객을 향해 하듯 공손한 태도였다.
성필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치논은 왜 그러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오셔야죠?”
“네?”
“보험이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이사님이 보험이에요. 자, 오세요.”
치논이 장난스럽게 인상을 썼다. 그녀의 눈썹이 귀엽게 사선을 그리며 섰다.
성필은 곤혹스러워하며, 농담 아니고 진짜 곤혹스러워하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어떻게…….”
“보세요.”
치논이 세 개의 건반을 동시에 울렸다.
페달 밟는 소리가 들렸다. 삐걱거렸다. 역시 피아노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 삐걱거림과 함께 음이 진득하게 주변을 울렸다. 그리고 가게 유리 벽 안쪽에 움직임이 나타났다.
카운터 뒤쪽에 앉아 잡지를 읽던 노인은 이쪽을 흘끗 보더니, 동양인인 것을 보곤 관심을 잃어선지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이게 첫 번째.”
치논이 다른 세 건반을 눌렀다.
코드(Code, 和音)다.
“이게 두 번째.”
치논이 또 다른 코드를 눌렀다.
“이게 세 번째. 이사님은 이거 세 개만 반복하시면 돼요. 제가 누른 속도로요.”
“아, 제가, 아…….”
치논이 건반에서 손을 떼자, 성필은 허겁지겁 아까 치논이 짚었던 화음을 기억하려 애썼다.
검지, 중지, 약지로 건반을 꾹 누르곤 치논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미약한 비굴함이 서렸다.
“이, 이렇게요?”
성필은 예술가를 흠모한다. 그런 만큼, 자신이 예술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게 마치 예술을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기닌 사건 이후, 댄스 학원에 다님으로써 그러한 환상을 어느 정도 벗겨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돌에 관해서다.
재즈는 아직도 성필에게 ‘잘은 모르겠지만 고급 음악’ 정도의 인식이다.
그런 데다가 그래미까지 수상한 피아니스트와 한 피아노 앞에 앉으니,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네, 맞아요. 그렇게요.”
화려한 수상 경력의 재즈 피아니스트는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이 두 번째 코드로 손을 옮겼다.
그때였다. 치논의 손이 성필의 손등을 덮었다.
“이렇게요.”
치논은 성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아 위치를 옮겨주었다.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힘을 아래로 주어 건반이 누르게 했다.
똑같이 건반을 누르는 행위일 텐데, 아까 성필이 했을 때보다 훨씬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게 세 번째.”
또다시 건반이 눌렸다.
치논이 성필의 손등에서 손을 뗐다.
“세 개를 반복하면 돼요.”
성필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그 세 개의 화음을 반복해서 쳤다.
피아노를 배운 지 하루 된 어린아이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성필은 리스트의 ‘초절기교(Transcendental Etude)’라도 치듯이 진땀을 흘렸다.
“조급해요, 조금만 더 천천히.”
“아, 네.”
“이 곡은 아세요?”
“아…… 어느 앨범에 있죠? 제가 재즈는 곡이 아니라 앨범 단위로 들어서 곡명을 잘…….”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예요. 첫 번째 트랙이요.”
“아, 그럼 들어본 거 같아요.”
“그러세요? 그거 빨라요.”
“죄, 그, 이렇게요?”
“네에, 네, 좋아요. 그렇게 천천히, 깊이.”
“이런 식으로…….”
그건 매우 갑작스러웠다.
치논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른손만으로 건반을 부드럽게, 마치 파도가 바위를 핥듯이 눌렀다.
고작 두 개의 음이 울렸을 뿐이다.
그 두 개의 음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그 두 개의 음만으로 성필은 ‘My Foolish Heart’라는 곡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래, 첫 번째 트랙…….’
치논은 삐걱삐걱 페달을 밟으면서 연주를 이어갔다. 특별한 기교가 필요한 곡은 아니다. 느린 템포의 곡이다.
그럼에도 성필은 그녀의 연주가 대단하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건반을 누를 때마다 온기가 새어 나와 주변을 덥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느낄 법한 봄처럼 훈훈한 애정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곡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곡이 성필의 반주와 함께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필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땀이 배어 나오는 손이 코드를 누를 때마다, 슬롯머신에서 당첨이 나왔을 때처럼 호화로운 선율이 옆에서 쏟아진다.
간단한 반주 위에 덧씌워지는 치논의 멜로디가 너무나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아래에, 성필이 도화지가 된 듯이 깔린다.
무언가를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경험이다. 심지어 그 무언가는, 성필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소리의 미(美)를 담았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 손으로 이런 게…….’
아니, 성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 황홀함은 오로지 치논의 덕이다. 애초에 원래 구사해야 하는 코드보다 한참 모자람에도 그 부족함이 보이지 않는 건, 당연히 치논 덕일 수밖에 없다.
치논 혼자였다면 재즈답게 즉흥 변주가 이루어져 이보다 훨씬 유려한 곡이 되기도 했겠지.
그녀가 왜 성필을 보고 보험이라고 불렀는지 알겠다.
‘내가 망치고 있는 꼴…….’
성필은 죄책감을 머금었다. 그러자 건반을 두드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윽고 연주를 거의 멈추기 직전까지 갔을 때, 치논이 박차를 가하듯 건반을 두드리는 힘을 더했다. 느려지는 코드와 대비되는 빠르고 강한 선율이 뿜어져 나왔다.
그 대비가 곡을 변칙적으로, 그럼으로써 더 아름답게 했다.
성필은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만큼은 곡을 망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곡을 ‘쌓았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착각일 게 분명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연주한 것만 같았다.
성필은 넋이 나갔고, 그에 따라 손도 멈추었다. 당황하여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지만 어떤 건반을 눌러야 하는지 잊었다.
반주가 멈추었다.
“죄송하…….”
멜로디는 멈추지 않았다.
치논은 반주가 없는 것도 곡의 요소로 삼아, 물수제비가 튀는 간격이 짧아지듯 건반을 튕기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마침내 잠기는 물수제비처럼.
그리고 가라앉으며 남긴 강 위의 파문처럼.
“끝.”
여운이 남았다.
그녀의 검지가 건반 하나를 꾹 누르고, 그 소리는 여운이 되어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정적.
그 정적이 최후의 멜로디였다.
치논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곤 성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멋진 연탄(連彈, 한 대의 피아노를 두 사람이 연주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느끼기엔 좋았는데, 이사님이 들으시기엔 어떠셨어요?”
“…….”
성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대답하려던 순간, 성필은 주변에 퍼지는 박수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가게의 문을 붙잡고 고개를 내민 사장도 보였다.
성필이 뒤로 고개를 돌리자 몇 명이 멈춰 서서 박수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제야 치논도 뒤에 관객이 있단 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겸손한 웃음과 함께, 그녀가 다시 성필을 보며 말했다.
“다섯 명이네요. 그 현악 콰르텟분들보다 낮네요. 그분들은 출근 시간의 지하철이었는데도…….”
“아뇨.”
성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사장을 보았다.
“여섯 명이죠. 가게 사장님까지 합쳐서요.”
이후로 사장은 치논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성필이 대신했다. 그러자 사장은 성필이 치논의 매니저쯤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치논이 자신을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밝히자, 사장은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말하자, 그는 미안하지만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잠시 음원 플랫폼에 이름을 검색해본 그는 ‘오래 활동했군요’라고 말하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을 해줄 수 있겠냐고 했다.
“물론이죠. 영광이에요.”
성필은 그 광경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치논은 그래미, 즉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상식에서 수상한 뮤지션이다.
‘올해의 컨템포러리 재즈 음반’이라고 했었던가. 그런데 재즈 악기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치논을 모른다고 한다.
지금도 열린 문 사이로 재즈 음악이 새어 나오는데 말이다. 재즈에 관심이 없지만 악기점을 운영하는 것도 아닐 텐데…….
사인을 마치고 나오며 치논이 말했다.
“재즈는 뭐랄까, 괴리가 있어요. 나라마다, 사람마다, 나이대와 인종마다…….”
‘사실 어느 분야든 그렇죠’라고, 치논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메인스트림 팝 록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든 록 장르를 아는 건 아니니까요. 메탈, 블루스 록, 펑크, 프로그레시브, 얼터너티브, 컨템포러리. 록이란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아예 없을 수도 있죠. 재즈도 같아요. 과거의 거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퓨전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컨템포러리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죠. 저에겐 정말 운이 좋게도, 여자 아시아인 컨템포러리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해 주시는 미국분도 계시구요. 저분은 아니었던 거죠.”
성필은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치논이 멈춰서, 이제는 당연하단 것처럼 성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보다, 연주는 어떠셨어요?”
그 눈에선 기대감이 엿보였다.
세이코였다면 ‘저는 대단해요’라고 할 타이밍이겠지.
그러나 치논은 성필을 응시하기만 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반쯤 섞여서.
당연하지만, 성필은 남이 실망하는 걸 보는 취향은 없었다. 그녀의 불안감을 최대한 빨리 없애주고 싶었다.
“좋았어요. 치논 씨의 연주도, 제가 한 경험도요.”
치논이 가지런히 모은 손을 들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녀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정말 다행이란 듯 미소도 함께였다.
“저도 즐거웠어요. 함께 연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님.”
“저야말로요. 즐거웠어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점점 치논과 보내는 시간이 좋아졌다.
좋아서…….
‘불안해.’
재밌는 심리학 실험이 있다. 처음 보는 남녀가 단 몇 분간 아이 콘택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올라간다는 것이다.
성필은 치논과 아이 콘택트를 족히 몇십 분은 했을 것이다. 호텔 카페에 있던 때부터 계산하면 몇 시간을.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라면 당장 머릿속에 선명히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말이다.
그렇다, 성필은 자신이 연애 감정을 품을까 봐 불안했다.
“아, 그런데 저희 너무 정처 없이 걷기만 했네요. 혹시 이사님이 생각하신 곳이 있을까요?”
“…….”
치논에게 사랑을 느낄까 봐, 불안했다.
최근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장하양이 성공에 감격하며 성필에게 감사를 돌렸을 때나, 홍규헌에게 ‘옆에서 걸어도 돼’라는 말을 들었을 때나, 리카가 속내를 밝히며 성필을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했을 때나, 정호환이 성필의 제안을 받아들여 곡을 써주기로 했을 때 정도를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이다.
성필이 불안을 억눌렀다.
“그, 재즈 클럽을 알아봤는데…….”
“본토의 재즈……!”
치논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그래서, 성필은 ‘오늘은 이쯤 하자’고 말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연맹 멤버들과 한 맹약을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하양을 떠올리는 게 도움이 됐다.
‘저도 7년 활동이 끝날 때까지 이사님을 따라서 연애는 뒤로 미뤄둘게요. 함께 힘내요.’
‘저와 맺은 맹약은요?’
‘연애는 안 하지만 약혼은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런 중세 수도가 같은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확실히 도움이 됐다.
“아쉽게도 기대하시는 것처럼 ‘빌리지 뱅가드’나 ‘더 버드’처럼 대단한 곳은 아니라서 모시긴 저어되지만…….”
치논은 성필의 단순한 농담에도 화사하게 웃었다.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지역에서 유명한 곳이래요. 음대에서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랑 지역 연주자들이 자주 오른다는 모양이에요.”
“지역…….”
“그럼, 갈까요?”
치논은 눈동자를 위를 향해 좌우로 굴리더니,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네. 모처럼이니까요.”
밤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다.
성필은 폰을 꺼내어 지도를 살폈다. 근처에 재즈 클럽이 하나 있는 것을 확인했고, 메뉴와 입장료도 미리 알아두었다.
도로와 접한 번화가로부터 골목으로 들어가 걷기를 어느 정도, ‘블루지’라는 네온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성필은 나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강렬한 라이브 사운드가 터지듯이 덮쳐왔다. 십수 미터 멀리, 스테이지에선 네 명이 라이브 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다.
넓은 홀에 둥근 테이블들이 산개해 있으며, 오른쪽엔 바(Bar)가 보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근처에 서서 공연을 보던 몇몇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와…….”
치논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성필은 일단 입장료를 지불하기 위해 바 쪽으로 가려 했다. 재즈 클럽에서 입장료란 공연을 보는 값이다.
‘일단 내가 살짝 뒤에 있자.’
성필로서도 처음인 공간이다. 그는 치논을 지키는 경호원이라도 된 듯 그녀에게 가까이 섰다.
치논은 둘의 거리가 밖에서보다 확 줄어들자 움찔했으나, 이유를 눈치챘는지 금방 진정했다.
이렇게나 어둡다면 치논이 입 모양을 보지 못할 테니, 그녀를 보호하듯이 그녀의 반걸음 뒤에 서서 카운터 바를 가리켰다.
치논은 찰떡같이 이해하고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걸은 순간, 뒤에서 자그마한 웃음과 함께 이런 뒷담이 들려왔다.
“여긴 스시집이 아닌데.”
“일본인들은 영어 이상하게 말하잖아.”
“그러네. 쓰는 것도 이상하게 써서 간판을 못 읽었나 보다. 말해주고 올까?”
“됐어. 메뉴판에 스시가 없는 걸 보면 알아서 나가겠지.”
낄낄거리는 소리가, 귀를 압도하는 음악 가운데서도 선명하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