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세이코가 난동 부리기를 그만둔 건 마트에 갔다 온 서유선이 그녀를 제압했을 때였다.
서유선이 세이코의 팔을 뒤로 꺾어 바닥에 눕히자 세이코는 ‘히에에엑!’ 비명을 내질렀다. 당연히 그녀가 들고 있던 위험물도 저 멀리 내팽개쳐졌다.
“유선아 이제 됐…….”
미사토는 그 순간 보았다.
서유선의 얼굴에 희열이 감돌았다. 마치 여동생을 힘으로 이겨 먹은 오빠 같은 눈빛이었다.
평소에 세이코에게 쌓인 게 많았던 듯하다.
“졌다고 말해!”
“죽어어어어엇!”
“그래, 죽겠지?”
“서유선 죽어어어어엇!”
결국 미사토가 서유선의 팔을 뒤로 꺾고 바닥에 눕혔다. 속박에서 풀려난 세이코는 일어나자마자 서유선에게 발길질했다.
잠시 후, 서유선은 미사토에게 혼나 쫓겨나고 세이코만이 거실에 남았다.
세이코는 미사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안…….”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걸 들고 난리 치면 어떡해.”
세이코에겐 이러한 전적이 있었기에 딱히 놀랍진 않았다.
약 2년 전, 성필과 치논이 밀회를 즐기는(세이코의 주관적 의견) 걸 본 세이코는 눈이 돌아가 커피 컵을 들고 돌진하지 않았는가.
왜 그랬냐고 물으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혹여나 치논이 자신을 공격할 때를 대비하여 무기를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한단 것을 전제로 화를 낸단 게 참으로 기묘한 사고방식이었다.
어쩌면 인터넷에서 비난만 찾아보던 기억이, 그녀가 세상을 적대적으로 보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얘를 어떡하면 좋을까.’
최근 사회성에 큰 발전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성필과의 데이트도 잘 마치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 세이코가 주변 인물을 대하는 게 좀 더 유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얘를 떠받들고 살아줄 남자가 있을까…….’
미사토는 세이코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성필을 떠올렸다. 그라면 세이코가 위험물을 집어 들기도 전에 손목을 꺾고 ‘히에에엑!’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 수 있을 듯하다.
왜 손목을 꺾는 성필을 떠올린 것일까. 성필이 세이코 같이 가녀린 여자의 손목을 꺾을 리 없는데 말이다.
미사토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상상이었다.
“그치만 치논이…….”
“치논은 친구잖아. 친구를 못 믿는 거야? 우연히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말이 안 되잖아! 미국 투어 공연을 하다가 우연히 파쿠 이사를 만난다고? 이게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모든 만남은 운명이라고들 하잖아.”
“미, 미사토. 지금 내 편이 아니라 치논 편을 드는 거야?”
“내 말은, 크게 신경 안 써도 된단 거야. 치논은 세이코쨩의 연애 작전에 도움까지 줬던 거, 벌써 잊었어?”
잊을 리가 있나.
체스에서도 왕을 잡으려면 그 앞의 폰과 룩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세이코는 소녀연맹과 친해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도무지 친해질 방법이 보이지 않던 때, 치논이 소녀연맹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해주었다.
거기에 세이코도 참석했었고 말이다.
소녀연맹과 친해지진 못했지만…… 그 은혜는 아무리 ‘은혜는 절반으로, 복수는 두 배로’를 좌우명으로 삼는 세이코라도 기억한다.
“알아. 근데 남녀 사이 일은 모르는 거잖아. 미사토도 서유선이랑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몰랐지.”
다키스트는 웨벡스가 처음으로 일본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던 케이팝 그룹이다.
미사토를 미래의 중역으로 키우고 싶었던 윗선은 그녀를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했었다.
미사토는 다키스트를 보았을 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잘생겼네’ 정도가 전부였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인간은 절벽 위에 핀 꽃과 같아, 망상을 품기에도 미안해진다.
만약 서유선이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미사토가 먼저 대시하는 일 따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데, 크흠.”
미사토는 주변을 살피더니 헛기침했다.
“내가 보기엔, 크흠, 세이코쨩이 더 예쁘거든?”
“누구보다?”
“그…… 치논 씨보다…….”
아무리 세이코를 달래주려 하는 말이라지만, 미사토는 죄책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외모까지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 여가수와 재즈 피아니스트를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박 이사님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이코쨩마저 져버리고 약속을 지키기로 하셨어. 5년 동안 연애 금지…….”
그리 말하던 미사토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사로잡혔다. 성필 나이에 그런 약속을 한단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미사토 이전에 본부장으로 있었던, 현재는 웨벡스의 이사가 된 상사가 말해주었다. 참고로 세이코와 성필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때, 둘을 받아준 자동차가 바로 그 본부장의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말했다.
여자에 관심 없는 남자를 조심하라고 말이다. 일반적인 가치 기준으로는 재단할 수 없기에, 차라리 엮이지 않는 게 편하다고 했었다.
그 ‘조심하라’는 말은 현실이 됐었다.
리카의 일본 솔로 활동 계약이 성사된 시점에서, 성필이 갑자기 파투 냈던 것이다. 공항에서 갑자기 붙잡았다던가.
근거가 가관이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소녀연맹 그룹 활동에 집중하는 게 후일 훨씬 더 큰 이익을 가져온다고 했었지…….
그땐 ‘시발 빠져나가려고 별소리를 다 처하네’ 싶었는데, 요즘 보면 거짓말이 아니었다.
암튼, 성필은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그걸 넘어 평범한 인간도 아닌 듯하다. 소문으로는 자발적으로 야근한다는데, 그게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겠는가.
“그래, 세이코쨩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기로 하셨잖아…….”
미사토는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끝맺었다.
어쩌다 세이코가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는지. 심지어 차인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그 사랑을 못 놓고 있는지…….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객관적으로 성필은 좋은 배우자감 같다만, 세이코가 평범한 연애를 해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애초에 성필이 전혀 넘어올 것 같지 않다…….
“만약 세이코쨩이 치논 씨를 못 믿더라도, 박 이사님은 믿을 수 있지?”
“…….”
세이코는 입술을 비쭉 내밀곤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토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했다. 그녀는 시계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만들어주고 나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되겠네. 나머지는 유선이한테 만들어달라고 해.”
“엑, 서유선이랑 둘이서만 밥 먹으라고?”
“이미 알고 있었잖아. 왜 처음 듣는단 듯이 말해?”
미사토가 앞치마를 벗고 나갈 채비를 하자 세이코는 더 삐친 티를 냈다.
“또 토모에 보러 가는 거야?”
“응. 그래야지.”
토모에는 미사토가 발굴한 뮤지션이다. 올해 데뷔했으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세이코는 토모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분 나쁜 티를 확 냈다.
미사토가 발굴하고 관리하는 뮤지션이 한 트럭이고,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닌데, 세이코는 유독 토모에를 시기하는 듯 보였다.
토모에에게서 다른 뮤지션과 다른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 갈게?”
세이코는 배웅도 해주지 않으려는 듯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미사토는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세이코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세이코쨩, 며칠 뒤에 행사 공연 있지? 거기에 케이어스라는 케이팝 그룹도 온대. 듣기엔 박 이사님이랑 친분이 있다는 거 같아.”
미사토는 세이코의 작전을 안다.
성필이 연애 금지 선언을 한 이후, 세이코는 공식적으로 성필에게 들이댈 명분을 잃어버렸다.
데이트를 했다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데다 한 번뿐일 사건이니.
아무튼 세이코는 성필 대신 소녀연맹과 친해지려는 계획을 꾸몄다. 그 계획은 아직도 폐기되지 않았다.
올해 하반기, 소녀연맹이 일본 활동을 위해 일본으로 오면 또 접근할 속셈이다. 그런데, 만약 성필의 주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소녀연맹일 필요는 없으리라.
“당일에 그분들이랑 이야기라도 나눠봐. 어때, 좋지?”
“걔네들 뭐 돼?”
“소녀연맹보다 더 유명하다는데?”
“난 들어본 적 없어.”
“들어봤으면서. 팬도 더 많대.”
“흠…… 그 정돈가?”
“일본 활동에선 변변찮은 성과를 못 내고 계신 거 같아. 한국에선 초(超) 유명한 아이돌이지만, 일본에선 기를 못 펴겠지. 거기서 제이팝의 대선배인 세이코쨩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감명받지 않을까?”
세이코의 귀가 쫑긋했다.
“박 이사님 귀에까지 들어갈지도 몰라.”
“그, 그럴까? 얼마나 친하대?”
“어…….”
모르겠다.
성필이 케이어스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꽤 길게 하긴 했었다. 그리고 몇 번 연락했다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세이코의 맥이 팍 빠질 것이다. 세이코가 허튼짓을 못 하게 무언가에 몰두시켜야만 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이?”
“그래?”
세이코는 ‘흐응’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성필과 관련 있는 누군가와 만난단 게 꽤 들뜨는 일인 걸까.
하긴, 성필을 만날 수 없으니.
“이 선배님이 특별히 신경 써줘야겠네! 파쿠 이사 지인이라서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하면 파쿠 이사한테 좋게 말해주겠지?”
“바로 그거야 세이코. 그럼 그 작전 짜고 있어. 알겠지?”
“응, 미사토 잘 다녀와!”
미사토는 그렇게 떠나갔다.
세이코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서유선을 불렀다.
“야 서유선! 놀지 말고 밥 차려!”
“미사토 갔어?”
서유선은 세이코를 한 번 흘기더니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미사토가 하던 요리를 이어서 했다.
세이코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기죽은 후배들에게 해줄 좋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찾아왔다.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세이코가 알기로 가로 엔터 소속 걸그룹은 소녀연맹이 전부다. 그렇다면 케이어스는 가로 엔터와 다른 회사의 아이돌이란 건데…….
회사 외부 아이돌과 왜 정기적으로 만나지?
“……아?”
세이코가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의 눈매가 치논이 보낸 사진을 봤을 때처럼 날카로워졌다.
‘파쿠 이사의 권력을 노리고 접근하는 거구나! 불순해! 순수한 파쿠 이사는 그것도 모르고……!’
치논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잊혔다.
* * *
“‘소련이’들이랑도 얘기하고 싶었어요.”
호텔 내부의 카페.
성필 맞은편의 치논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성필도 그에 공감하듯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리카랑 아라는 짬 내서 저를 마중하러 나왔을 뿐이고, 리허설을 해야 해서요.”
소녀연맹 멤버들은 치논에게 인사를 한 후 얼마 안 있어 호텔을 나섰다.
공연 리허설을 위해서였다.
원래 성필은 남는 시간에 소녀연맹의 리허설을 보려고 했으나, 치논을 만났기에 그녀와 있기로 했다.
성필이 본다고 하여도 달라지는 것도 없는 데다, 원래 올 계획도 없었으니.
게다가 콘서트 세트리스트와 대략적인 구성은 전부 다 알고 있다. 성필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여 모든 사항을 검토, 확인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리허설은 콘서트 감독인 조진만이 잘해 줄 거라고 믿는다.
“언제 한 번 만나면 좋을 텐데요.”
아쉬움을 잔뜩 담아 말하던 성필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목소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나?
치논은 농인이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적인 뉘앙스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다. 당연히 성필은 상황에 따라 어조를 달리한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치논과 소녀연맹이 만나지 못해 아쉽다. 단순히 말뿐 아니라 목소리에까지 자연스럽게 신경 썼던 것이다.
그런데, 치논과 대화할 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항상 사용하는 언어에 신경 쓰는 성필로선 이러한 상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는 남들에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그러하지만, 이는 성필이 일부러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마치 유치원 선생이 학생들을 향해 과장된 웃음과 높은 어조로 ‘그래요? 아주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매니저로서, 그런 태도가 더 도움이 된단 걸 체득했으니까.’
‘쿨찐’이라고 하던가.
쿨해 보이려고 일부러 무미건조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
성필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표현하고, 평범한 관계에서도 온 마음을 다해 공감을 이용한다.
표정, 눈빛, 어조, 목소리, 손짓, 몸이 향하는 방향까지, 모든 걸 세심하게 신경 쓰는 성필로선 그중 다수가 필요 없어지는 경험이 신선했다.
“네, 정말요.”
치논이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올곧게 성필을 향하고 있었다.
카페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치논은 단 한 번도 성필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눈은 항상 성필의 눈과 연결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온전히 내게 집중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치논이 그러는 이유는 명확하다. 성필의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는 것이다.
구화(口話)라고 부르는 기술이다.
혹여 성필이 말하는 도중 치논이 시선이라도 돌린다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를 테니.
치논에겐 필요에 의해서 하는 행동이지만, 성필에겐 그게 굉장히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성필은 평소보다 입을 크게 벌려 명확한 발음이 만들어지도록 했다.
치논이 더 잘 관찰할 수 있도록.
“옷이 굉장히 예쁜데요?”
치논은 방금 공연이라도 다녀온 듯 붉은색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신체에 밀착한 그 옷은 파티에 가는 게 아니고서야 평소에 입을 만한 건 아니었다.
“공연 다녀오셨어요?”
“아니요, 곧 공연이에요.”
성필이 눈을 크게 떴다. 평소보다 표정 변화가 더 드라마틱했다. 이 또한 치논을 신경 써서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랑 이렇게 대화나 나누고 계셔도 되는 거예요?”
“대화‘나’라뇨.”
“공연인데 준비해야 할 게 있지 않으세요? 긴장을 가라앉히는 루틴이라던가…….”
“오히려 이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긴장이 더 잘 풀리는걸요?”
그렇다니 다행이다.
“소련이들도 공연인가요?”
“네. 콘서트요. 사실 저는 그거 때문에 온 게 아니고, 미국에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마침 그 일이 소련이들 첫 번째 콘서트 도시여서 만난 거고요.”
“으음.”
치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단 한 번도 성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서 말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것도 수십 분 동안 말이다.
농인이 아닌 사람이라면 주변의 풍경을 보려고, 폰에 뜬 알람을 확인하려고, 그것도 아니면 한 곳에만 시선을 두기가 어색해서, 한 번이라도 눈을 돌렸을 법하다.
그런 대면에 익숙해 있던 성필은 슬슬 치논과 계속 눈을 맞추고 있기가 부끄러워졌다.
어제부터 1일이 된 여자친구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도 이렇게 똑바로, 오랫동안 바라봐 줄 것 같지는 않다.
성필이 일부러 눈을 여기저기로 돌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헤헤.”
치논이 단아한 웃음을 흘렸다.
“부담스러우시죠?”
“아…….”
성필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치논이 팔꿈치부터 아래팔을 테이블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윽고 둘의 얼굴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말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 크게 말씀해주시면, 입술을 보지 않고도 들을 수 있어요. 부담스러우시면 이렇게 할까요?”
“아, 아뇨.”
성필은 당황해서 작게 말했기에 치논에겐 전해지지 못한 듯했다. 성필은 역으로 상체를 뒤로 빼서, 정면에서 살짝 빗나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게 더 부담스럽네요, 하하.”
치논이 장난기 넘치는 웃음과 동시에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아예 안 들리시는 건…….”
“네, 아니에요. 농인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저는 청각 손실이 있는데, 으음. 예를 들어 기차 소리가 100데시벨이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50데시벨이라고 했을 때요. 청각 손실이 50데시벨이면, 기차 소리가 사람들 이야기하는 수준으로 들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청각 손실이 50데시벨일 때 평범하게 대화하는 소리는 아예 안 들린다는 뜻이다.
성필은 새삼스럽게 그녀의 보청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예시를 50데시벨로 들었지만, 그보다 손실이 더 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화(口話)를 배울 수준이니까.
“궁금한 게 많으시죠? 다들 그렇더라구요.”
“죄송합니다, 불편하셨죠?”
“아니요, 저에 대해 더 알아주신다고 생각하니까 좋네요. 더 아시고 싶으세요?”
뉘앙스가 묘했다.
성필은 몇 초 고민하다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게 궁금하세요?”
“언어를 어떻게 배우셨는지…….”
치논은 소리의 존재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언어를 알 수 있을까. 성필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게 궁금했다.
헬렌 켈러의 선생님이던 앤 설리번은 헬렌에게 물을 끼얹음으로써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건 헬렌에게 혁명이었을 것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인 순간부터, 인간은 이미지뿐 아니라 언어적으로도 사고(思考)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넘어 혁명, 분노, 삶, 사랑, 아름다움, 파괴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사고한단 건 혁명임이 틀림없다.
언어 없는 인간은 짐승과 다르지 않으니.
치논에게도 그러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언어의 존재를 처음 깨우쳤던 혁명의 순간이.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의외의 상식적인 답변이었다.
무언가 극적인 계기가 있으리라 여겨서였다. 그 생각을 한 성필은 자신이 차별적인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치논이 성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검지가 성필의 목젖에 톡, 가볍고 부드럽게 닿았다.
성필이 놀란 눈을 하자 그녀가 자신의 목도 가리켰다.
“네?”
“대보세요.”
“아…….”
성필은 치논처럼 그녀의 목에 검지를 댔다. 당연하지만 따스했고, 또 부드러웠다.
꺾으려고 리카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
“아.”
치논이 말했다.
성필의 검지로 진동이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성필에게로 고갯짓했다. 따라 하란 뜻인가 싶어 그렇게 했다.
“아.”
“어.”
“어.”
“우.”
“우…….”
그제야 성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발음에 따라 진동이 다르잖아?’
그렇구나.
치논이 소리를 깨달은 건 청각적인 경험으로부터가 아니었다. 촉각이었다.
이 진동의 차이가, 치논에게 각양각색 소리의 존재를 깨우쳐준 것이다.
아마 어머니는 치논이 다른 발음을 낼 때 ‘아니다’란 뜻으로 고개를 젓거나 했겠지. 그리고 치논에게 계속 올바른 발음의 진동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아…….”
성필이 깨달은 듯하자 치논이 그의 목에서 손을 뗐다. 성필도 그러했다.
“이런 느낌?”
치논이 배시시 웃었다.
“궁금증이 풀리셨어요?”
“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손으로 쓸었다. 그런데 곧 그만두었다. 아까 전까지 치논이 손대고 있던 곳을 만지는 행위는 꽤 변태적으로 보일 듯했다.
“그럼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할 때도 진동을 느끼시는 거예요?”
인간은 진동을 소리로 바꿔주는 청각 세포를 가지고 있다.
청각장애 중에는 그 세포만 손상되어, 소리는 못 느끼지만 진동은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무거운 게 쿵 떨어진다면, 소리는 못 들어도 진동은 느껴서 그쪽을 쳐다볼 수 있는 것이다.
“소리가 들려요. 물론 구화를 구사할 때처럼 제 시야 안에 넣어두어야 하지만요.”
“아…….”
자막 없이 영어 영상을 볼 때는 명확하게 알아듣기 힘들지만, 영어 자막이 추가되면 갑자기 잘 들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밴드 연주자들은 보통 드럼을 왼쪽에 두고 연주하잖아요? 그게 계속되면 왼쪽 귀의 청력이 떨어진대요. 큰 소리가 지속적으로 청력에 손상을 입히는 거예요. 저는 그럴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죠.”
웃어야 하는 건가?
치논이 웃으니 일단 성필도 웃었다.
“뭐, 저는 공연을 한다 해도 보통은 솔로예요. 델로니어스 몽크의 ‘Monk’s solo’처럼요.”
성필도 몇 곡 들어본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처음 들은 감상은 ‘어린애가 치는 것 같다’였다. 뭔가 기대했던 것과 달라 그다지 관심을 갖고 알아보진 않았었다.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같은 앨범을 내는 게 꿈이에요. 굉장해요.”
“낭만적이네요. 이름이 ‘키스’예요?”
“아, 그런 거에 신경 쓰시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키스’보다 ‘케이th’에 가까울 텐데……. 영어 발음은 자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 후로 치논은 열기를 띠고 키스 자렛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쾰른 콘서트’ 앨범에 대해서.
“피아노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대요. 그런데도 전혀 주눅 들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고 해요. 피아노 한 대로 한 시간에 가까운 즉흥 연주를 펼쳤어요. 한 시간이요! 대단하지 않아요? 한 시간이나…….”
“설마요. 다 즉흥이라고요?”
“정말이에요!”
치논은 이야기에 더더욱 열을 올렸다.
한 시간 동안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해도 못 할 텐데, 피아노를 한 시간이나 치다니.
심지어 그게 불후의 명작이 되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아무런 모티프도 없어요. 그래서 앨범에 수록된 곡 이름도 ‘쾰른’일 뿐이에요. 뒤에는 일, 월, 연도를 붙였고요. 곡 이름이 ‘쾰른 1975년 1월 24일’인 거예요. 꼭 들어보세요.”
“그럴게요. 치논 씨를 떠나보내고 할 일이 생겼네요. 이왕이면 더 추천해주세요.”
“아, 정말요? 전에는 재즈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어느 분 덕에 관심이 생겼죠. 꽤 들었어요.”
물론 성필은 근래 재즈에 관심이 생겼었다. 하지만 온전히 치논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에리카의 믹스테입을 도와줄 때 그녀가 ‘대중음악에 종사하시면서 마일스 데이비스를 안 들어보셨어요?’라고 한 게 더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지금 대화하는 상대는 치논이고, 그녀의 기분이 좋은 게 더 중요하다. 어디선가 에리카가 이 이야기를 들을 리도 없을 테고.
과연, 성필이 앨범과 뮤지션 이름을 줄줄이 말하자 치논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제 연주로 재즈에 관심이 생기셨다니, 정말…… 고맙네요. 저 살짝 벅차요…….”
“고마운 건 저죠. 이렇게 좋은 음악을 알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이러다가 재즈 음반사 프로듀서가 되면 어쩌죠?”
치논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보였다. 오늘 함께 대화하며 저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 보았다.
성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백 개라도 추천할 수 있어요. 먼저 ‘후쿠이 료’라는 피아니스트인데, 이분이 굉장히 특별한 게…….”
치논은 정말 백 개의 앨범을 추천할 기세로 이야기했다. 앨범과 뮤지션의 히스토리를 말하다 보니, 결국 추천받은 건 다섯 개뿐이었다.
“언제 같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치논은 그리 말하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리고 그 직후 곧바로 주제를 바꾸었다.
“오늘은 할 일이 없으신가 보네요.”
아까 성필이 ‘치논을 떠나보내고 나면 할 일이 생겼다’고 한 데서 눈치챈 듯했다.
“네. 일이 내일 있어서, 원래는 ‘우리 애들’…… 이 아니라 소련이들 리허설을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래미 수상자와 대화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헤에, 부끄럽네요. 10년도 더 전 일인데…….”
“치논 씨는요?”
“며칠 후에 돌아가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네요.”
“미국에 많이 와보셨죠?”
“음, 그런 편인 거 같아요.”
“관광할 곳 좀 추천해주세요.”
치논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 저는 투어를 돌 땐 호텔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요.”
“왜요?”
“그…… 겁이 나서요…….”
겁이 나서?
단순히 외국이 무서운 걸까? 그리 생각하던 성필은 곧 답을 찾아냈다.
‘귀가 안 들려서…….’
소리가 안 들리는 상황에서 도시를 돌아다니면 위험할 게 분명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자동차 소리였다.
성필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며 걸어 다닐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이나 차를 보고 놀란 경험이 꽤 있었다.
그런데 아예 소리가 안 들리면, 그것도 익숙한 고향이 아니라 외국을 다니면, 그거야 위험할 만도 하다.
어쩌면 치논에겐 낮보다 밤이 훨씬 안전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미국의 밤이란…… 홀로 돌아다니기 안전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저는 영어도 잘 못 해서…….”
“매니저님은요?”
“으음, 제가 놀러 다니는 건 일과 다른 부분이고…….”
결국 치논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나, 외국 투어를 갈 때마다 호텔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단 뜻이다.
치논이 아련하게, 그리고 성필을 안심시키려고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호텔도 재밌는 게 많아요. 보세요, 이렇게 박 이사님을 만났잖아요.”
“그래요…….”
성필은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깍지 낀 손을 혼자 이리저리 만지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저랑 놀러 가실래요?”
“……네?”
“제가 의외로 샌프란시스코에 일가견이 있거든요. 옛날에 몇 주 정도 살았어요.”
조아라 때문에 억지로.
“저도 할 일이 없고, 치논 씨도 그렇죠? 치논 씨만 싫지 않으시다면, 어떠세요?”
치논의 눈이 당황을 담아 커졌다. 그리고 곧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의외로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
“Pity's akin to love…….”
“네?”
치논은 영어로 말했다. 그런데 성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였다.
‘akin’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동사가 가장 중요한데 동사를 모르니 이해할 수 없었다.
치논이 이야기를 이었다.
“연민은 사랑과 닮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서, 에프라 밴의 소설을 서던이란 사람이 극으로 개작한 데 나오는 대사를 인물들이 해석하는 장면이 나와요. 바꾸면 Pity is similar to love가 될 거예요.”
연민은 사랑과 닮았다.
좋은 번역이었다.
그리고 번역을 듣자 성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실례되는 말씀이 되겠지만, 혹여나 제가 불쌍해서 그런 제안을 주신 거라면…….”
치논은 아까 큰 웃음을 터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는 안쓰러움을 담았다.
“괜찮아요.”
거기서 성필은 치논이 가진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치논에게 동정과 연민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직설적으로, 치논을 불쌍하게 여겼던 것이다.
동정으로부터 시작된 관계.
그 끝에 남자들이 치논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떠났을지, 성필은 굳이 듣지 않고도 예상할 수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헤헤”
치논의 저 웃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정적이 흘렀다.
성필과 치논에게 정적이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성필에겐 소리의 부재로, 치논에겐 움직임의 부재로.
어느 쪽이건 곤란한 상황이다.
“음.”
성필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치논은 겸연쩍게 시선을 피했다. 이 또한 오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치논 씨.”
성필이 테이블 위에 올렸던 손깍지를 풂으로써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성필로부터 비켜났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의 입술로 돌아왔다.
치논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쁘셨으면…….”
“저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시죠? 웨벡스 사무소 내의 카페. 거기서 제가 치논 씨에게 처음 말을 걸었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치논 씨가 불쌍해서 그랬던 걸까요.”
“……아, 네?”
“그냥 치논 씨의 피아노가 제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었어요. 제 마음을 울린 치논 씨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다가갔던 거고요. 제 직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예술가를 좋아해요. 호감이 생기죠. 지금도 같아요. 그냥 치논 씨와 놀고…….”
성필은 ‘논다’라고 할 때의 ‘아소부(놀다)’가 이 상황에 맞는 어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리카에게 몇 번 이 단어를 썼는데, 그때마다 ‘엣찌(음란)!’라는 말을 들었었다.
상황과 나이에 따라 한국어의 ‘놀다’와는 의미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단 듯하다.
그래서 성필은 그 단어를 쓰지 않고 풀어서 설명했다.
“치논 씨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예요.”
이야기를 마치고, 성필은 자신의 일본어 실력이 꽤 늘어난 듯하여 살짝 만족스러웠다.
상황에 맞춰서 문장을 바꿀 수 있다니. 아무튼, 이젠 치논의 답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 아.”
치논이 얼굴을 붉혔다.
창피한 거겠지.
성필은 이해했다. 성필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전생에 조아라가 자꾸 찝쩍대자 반쯤 농담으로 ‘나한테 관심 있어서 이러냐?’라고 했다가, 조아라에게 온갖 비아냥을 들어 먹었다.
비아냥을 넘어 비난이었지.
성필은 울뻔했었다. 창피했고 말이다.
치논은 그때의 성필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다른 점은, 전생의 조아라는 진짜 성필에게 관심 있었단 것이다.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억울하던지.
억울한 데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사실을 안 순간, 성필은 조아라의 사슬에 묶여 있었으니.
“그, 그러면…….”
마침내 치논이 말을 꺼냈다.
성필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치논은 안심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러시면 세이코쨩은 어떡하나요…….”
이젠 성필이 당황할 차례였다.
“네……?”
아까 치논이 나쓰메 소세키를 예로 들었었지.
성필도 나쓰메 소세키가 떠올랐다. 리카가 추천하여 읽은 ‘그 후’라는 소설이 말이다.
주인공이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여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한 후, 아내가 ‘남편은 어떡하냐’고 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치논의 단아한 분위기 때문일까.
그녀의 모습이 소설 속에 묘사된 수수한 그 아내와 겹쳤다.
“앞으로 세이코쨩을 어떻게 보나요……. 저, 저뿐만 아니라 박 이사님도…….”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성필은 치논의 태도 때문에 마치 자신이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착각이 들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정말 그런 생각이 없었고, 또 불륜도 아니건만, 마치 아내 얼굴이 떠오르듯 세이코의 얼굴도 떠올렸다.
‘히에에엑!’
왠지 모르지만 상상 속의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