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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21화 (721/760)

721화

케빈의 비즈니스 매니저, 올리비아는 기분이 좋았다. 이 일은 그녀가 매니저로서 케빈에게 줄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까.

올리비아는 목청을 가다듬어 들뜬 기운을 없앴다. 그리고 곧바로 케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올리비아?]

“케빈, 통화할 수 있어요?”

[물론이죠. 제 매니저이신데.]

올리비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기뻐해요. 제가 컬래버레이션할 아티스트를 구했으니까요.”

[네? 진짜요? 설마…….]

“‘애슐리’예요!”

애슐리는 최근 빌보드 톱100에 차트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여성 보컬리스트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그녀는 여성 아티스트에게선 드문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졌다.

보이시한 매력과 털털한 성격으로 여성 팬이 많으며, 앞으로 대중적인 히트가 한 번 터지면 메인스트림으로 올라갈 게 확실시된다.

그녀가 속한 음반사가 레버 레코드 산하에다 최근 성적도 좋았으니, 소속사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라.

“컬래버레이션이라고 할까…… 케빈이 피처링을 받는 입장일 테지만요.”

이 핫한 여가수와의 피처링을 성사하기 위해 움직이던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았다.

올리비아가 그들을 모두 쳐내긴 어렵지 않았다. 애슐리의 음반사, 그리고 그녀의 매니저와도 친분이 있으니 이 일을 만드는 건 쉬웠다.

일이 쉬웠다는 건 곧 올리비아의 유능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

케빈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단 듯 어벙한 소리만 냈다. 올리비아는 결국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저를 찬양하려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케빈에게 칭찬받으려고 일하는 게 아니니까요. 케빈은 제 도움으로 성공하기만 하면 되…….”

[소녀연맹이랑 컬래버레이션한다는 건…….]

“그 말 진심이었어요?!”

[진심이죠. 진심이니까 매니저인 올리비아에게 말한 거잖아요…….]

“그래서요? 그건 그거고 애슐리에게 피처링을 받는 건…….”

[소녀연맹 쪽에도 말씀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영락없이 올리비아가 그 일을 진행하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아니, 일단 이 일을 받아들이고…….”

[소녀연맹을 위해 곡도 준비해뒀어요. 제 영감과 열정이 전부 들어간 곡이요. 그걸 소녀연맹이 아닌 애슐…… 누구라고 했죠?]

“애슐리.”

[그 사람한테 쓴단 건 탐탁지 않아요. 최소한 들이대 보기라도 하고 싶어요.]

“돌았어요? 지금 어디예요.”

[작업실…….]

올리비아는 날 듯이 케빈의 작업실에 들이닥쳤다. 고작 수십 분 만의 일이라, 케빈도 놀랐다.

올리비아가 화난 티를 팍팍 내면서 케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기회는 지나가면 안 돌아오는 거 알죠?”

거의 협박하는 투였다.

케빈은 먹던 빵을 접시 위에 툭 내려놓았다.

“전엔 좋게 봐주셨잖아요. 저랑 같이 롤라팔루자도 가주시고요. 소녀연맹을 높이 평가하시던 거 아니었어요?”

“그렇죠. 근데 애슐리와 협업하는 기회를 쳐내면서까지 얻어내야 할 기회는 아니죠.”

케빈이 한 발짝 물러났다.

“정 그러시면 애슐리를 위해 한 곡 쓰…….”

“그 곡에 열정이 있나요?”

“…….”

“영감은? 그냥 제가 하라고 해서 만든 거에 불과하잖아요. 그에 비해 케빈이 소녀연맹에게 주려고 만든 곡엔 케빈의 영혼이 깃들어 있고요. 아니에요?”

“……맞아요. 근데 올리비아의 말을 그냥 넘기긴 힘드네요. 소녀연맹이 미국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셨는지 보셨잖아요.”

“뭐요. 빌보드 200 차트 1위? 거기에 올라가는 뮤지션이 1년에 53명이에요. 어쩌라고요?”

케빈은 입이 쏙 들어갔다.

케이팝 커뮤니티에선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며 다들 들떴었는데…….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1년에 53명만이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이라면, 꽤 커다란 명예 아닌가?

“심지어 미국에 인정받아 앨범 판매량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들만의 커뮤니티에서 유명했기에 달성한 거잖아요. 그거 알아요? 소녀연맹은 빌보드 톱100에 발톱 하나 못 들이밀었지만, 애슐리는 데뷔와 동시에 진입했어요.”

빌보드 200 차트는 앨범 판매량 차트다. 음원 다운로드, 스트리밍 횟수를 판매량과 함께 집계하여 순위를 매긴다.

반면 빌보드의 메인 차트인 톱100은 음원 스트리밍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빌보드 200이 ‘팔리는’ 차트라면 톱100은 ‘듣는’ 차트인 것이다. 애슐리가 소녀연맹보다 돈은 못 벌지 몰라도, 인지도는 확연히 높다.

“케이팝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 케이팝 다 먹어 치우는 게 빌보드예요! 미국 시장이고요! 미국에서 유명해지면 세계에서 유명해져요! 소녀연맹과 컬래버레이션했다고 쳐요. 그래서 글로벌 케이팝 팬들에게 인지도가 생기면, 뭐요? 애슐리 피처링받아서 톱100에 오르면 그보다 100만 배는 더 유명해질 텐데! 네, 이게 가장 큰 차이예요.”

올리비아가 똑똑히 들으란 듯 케빈의 어깨를 검지로 콕콕 찔렀다.

“소녀연맹과 협업하면 빌보드에 못 들지만, 애슐리랑 협업하면 들 수 있어요. 자, 선택하세요.”

올리비아는 팔짱을 낀 채 앉은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반에 두세 명씩 있는 너드(찐따)들이 케빈을 찬양해주는 거랑, 반 학생들 전부 케빈의 노래를 듣는 거.”

비즈니스 매니저는 담당 아티스트의 성공을 위해 매진한다. 아티스트의 성공이 곧 매니저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케빈을 정상급 디제이이자 뮤지션으로 키워낼 셈이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올리비아의 수익도 정상급 매니저가 될 테니.

“어느 쪽이 더 이익일지, 제가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죠?”

“이익이 중요한가요?”

“……네?”

“제가 뭘 하고 싶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케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둘의 시야가 역전됐다.

이젠 케빈이 올리비아를 내려다보게 됐다. 올리비아는 그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아우라에 어깨를 움츠렸다.

웬만한 미친놈들은 다 겪은 그녀다. 기세 정도로 눌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녀마저 고개 숙이게 되는 진짜배기 아티스트들 정도가 있을까.

케빈의 눈이 그런 이들과 비슷했다.

“올리비아 씨.”

“뭐, 뭐예요.”

“매니저, 올리비아 씨.”

“네……?”

“제가 올리비아 씨와 계약한 건.”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올리비아를 고용한 건, 제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그걸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거 같네요. 제가 올리비아를 믿어야 할까요?”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

칼로 찌르는 듯한 말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감돌고, 케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올리비아가 어떤 마음인지 알아요. 저한테 해가 될 일을, 올리비아가 왜 하려고 하겠어요? 그 마음은 정말 고맙고,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엔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알겠죠, 매니저?”

“…….”

올리비아의 가슴이 부풀었다. 깊고 긴 심호흡 끝에 그녀가 숨을 탁 뱉었다.

“레버 레코드에 지인이 있어요. 물어볼게요.”

“어, 정말요? 그렇게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거였어요? 이얏호우!”

케빈은 아까까지의 아우라는 온데간데없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올리비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무것도 안 하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야,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애슐리의 매니저에겐 제대로 사과해둬야겠다.

‘억지로 큰 파이보다 작은 파이를 고르게 됐다지만, 그래도 배를 채우긴 하는 거니까.’

답신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왔다.

게다가 올리비아가 상당히 놀랄 만한 일도 있었다. 상대로 오는 게 소녀연맹의 음반사, 즉 그녀들의 소속사 이사(Director)급이었으니.

‘온다고? 그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이사급이? 그냥 곡을 받아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화상으로 대화해도 될 텐데?’

올리비아는 애슐리와의 피처링 기회를 던져버린 게 허망하면서도, 또 일이 잘 진행되니 조금은 기뻤다.

‘저쪽이 거절할 리는 없겠네?’

소녀연맹은 미국 진출에 사활을 거는 듯하다.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외국인들이 미국에 가지는 환상은 굉장히 강하다. 어떻게든 이 땅에 머리를 들이밀어 보려고 하는 게 일상이기까지 하니.

이러면 이야기가 쉽다.

‘값을 후려쳐야겠다.’

어쩌면 공짜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케빈, 미팅이 성사됐어요.”

“끼아아아아악!”

올리비아는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날뛰는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래, 공짜로 할 수도 있겠지. 더 절박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일 테니.’

케빈이 ‘라이온 킹’의 첫 장면처럼 인형을 천장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라이온 킹’의 OST를 엉터리로 불러댔다.

‘……아닌가? 케빈이 더 절박한가?’

* * *

샌프란시스코.

성필은 입국하자마자 최대한 어깨를 쪼그리고 눈에는 생기를 뺐다.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아라가 미아가 됐을 때 심사소에서 잡혔으니까.’

사실대로 질문에 답했더니 몇 시간 동안 억류되어버렸었다. 때문에 조아라를 혼자 두는 시간이 길어져서, 성필에겐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입국 목적은?”

“비즈니스.”

이번엔 몇 년 전처럼 괴상한 답변을 늘어놓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아가 된 소녀를 찾으러 왔으며 숙박 장소와 기한을 정해두지 않았다거나…….

입국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제야 성필은 어깨와 얼굴을 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쾌청한 날씨가 반겨주었다. 이곳에 있던 날은 한 달이 될까 말까인데, 알 수 없는 향수가 느껴지기도 했다.

‘케빈…… 결국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뮤지션이 됐구나.’

성필이 케빈과 처음 만났을 때, 케빈은 부업으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못했다.

새벽엔 클럽 디제이, 낮에는 조아라의 통역을 비롯한 온갖 잡일로 생활비를 벌었다지.

그가 일하는 클럽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건 성필에게 여러모로 좋은 추억이었다. 그가 취해서 내뱉는 예술론은 꽤 재밌었으니.

‘미팅은 내일이니까…….’

성필은 택시를 잡고 소녀연맹이 묵는 호텔로 향했다.

정문에 내리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반겨주었다. 리카와 조아라가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성필이 택시에서 내리자 그녀들이 성필에게로 다가왔다.

조아라는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성필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 진짜 아저씨네. 하이요.”

“오, 아라.”

성필도 조아라의 차림새를 훑었다.

크롭티를 걸쳐 배를 훤히 드러내고 아래엔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미국 하이틴 댄스 영화에 나올 법하다. 얼굴만 동양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디 항구에 가서 다른 크루랑 댄스 배틀이라도 하려고? 힙하네.”

“힙이요? 제 엉덩이 말하는 거예요?”

“미치겠네, 또 시작이다.”

“이젠 뭐라고 하기도 귀찮네. 이렇게 생겨 먹은 내 잘못이지. 봐요 봐.”

“리카야, 아라 약 좀 먹여라.”

“아라쨩한테 약을 먹여서 어쩔 속셈인가요!”

“맞다, 리카도 이상했었지.”

“아타시(저)는 정상이에요!”

리카는 갑자기 허리에 손을 얹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또 조아라와 맞먹는 개소리를 내뱉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제가 너무 너무 너무 소중해서 떠나보낼 수 없던 이사님!”

“혹시 나를 말하는 거니 리카야?”

“겨우 하루도 못 참고 저를 보러 오셨네요! 야레 야레(이런 이런),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게 이런 걸까요…….”

“가자, 아라야.”

성필이 리카의 옆을 쌩 지나쳤다.

그러자 리카는 도도도 달려 성필을 제쳤다. 그리고 다시 성필의 앞에 서선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했다.

“모른 척하는 이사님도 귀엽네요! 하지만 제 앞에선 좀 더 솔직해져도 괜찮다구요?”

“와, 아저씨가 뭔 기분인지 알겠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토 쏠리는데 어떻게 참아요?”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울상을 지었다.

성필이 생각하기에도 조아라의 말이 심했다.

“토 쏠리는 정도는 아니야.”

“그럼 어느 정도인가요?!”

“아라야 너 배우할래?”

“무시했다?!”

리카는 ‘같이 가요!’라 외치며 매정하게 떠나가는 성필과 조아라를 쫓았다.

“배우요?”

“너 머리 기니까 배우 해도 괜찮을 거 같아서.”

“아저씨 무슨 속셈인지 알아요.”

“너무 티 나나?”

“날 칭찬해서 아저씨 취향의 여자로 만들려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니 아라야?”

성필은 리카나 조아라의 이런 장난을 워낙 자주 당해서 대처법이 확립됐다.

진짜 어처구니없단 듯 딱딱하게 말하면 대부분은 흥이 식어서 그만둔다.

‘그게 정말이니 리카야?’, ‘그게 사실이니 아라야?’, ‘그게 무슨 소리니 얘들아?’ 같이 말이다.

괴상한 연극투의 반문을 들은 멤버들은 싸늘한 반응에 금방 장난을 접어버린다.

“왜요, 단발은 너무 많이 봐서 질리나?”

“그게 정말이니 아라야?”

“아 개짜증 나 진짜. 장난을 치면 좀 장난으로 받아줘요. 그거 진짜 띠꺼워요. 알아요?”

“그게 사실이니 아라야?”

조아라가 성필의 엉덩이를 팍 발로 찼다. 물론 장난이라 큰 힘이 실리진 않았다.

“슬슬 재계약할 때 다가오니까 아저씨도 불안하긴 한가 보네요? 뭐, 나 배우로라도 잡아두고 싶어요?”

“어때?”

“배우는 하양 언니 시켜요. 배우는 아무나 하나. 일이 년은 배우기만 해야 할 텐데.”

조아라는 배우의 재능이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성필은 알고 있지만, 현재의 조아라를 설득하려면 다른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그녀를 배우로 만들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성필은 딱히 진지하게 조아라를 배우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냐.”

이번 생의 조아라는 전생의 조아라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명성을 이용해 안무가의 세계로 가도 좋겠지. 혹은 옛날에 그녀가 했던 말마따나 댄스 대중화를 위해 큰 학원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어느 쪽이건, 전생의 조아라보다 나은 환경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뭐예요. 그게 끝?”

“어? 싫다면서.”

“더 매달려봐요.”

“매달리면?”

“글쎄요, 아저씨 하는 거 봐서 해줄지도 모르고요?”

“응 절대 안 매달려.”

“머리 확 자른다?”

“너 반말했냐?”

리카는 둘의 뒤를 따르며 눈치를 보았다. 둘의 대화 사이엔 공간이 없었다.

마치 막역한 친구를 대하는 듯한 분위기는, 아무리 리카라도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의도치 않게 소외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던 도중, 성필이 갑작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가 빵끗 웃었다.

‘아앗, 내가 신경 쓰이시는구나!’

그렇지, 소외된 자신을 성필이 내버려 둘 리 없다. 아무렴, 자신을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일본에 남는 것도 잡은 게 바로 성필 아닌가.

어쩌면 조아라에게 당하는 와중에도 리카와 대화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필은 곧바로 다시 앞을 보았다.

“에?”

리카는 당황했다.

그때였다.

성필이 이번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리카도 성필이 자신을 신경 써서 뒤를 본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리카는 성필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쪽도 가던 길에 멈춰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치논 언니?”

세이코의 친구, 재즈 피아니스트인 오토나시 치논이 멋들어진 드레스 차림으로 있었다.

“리카…….”

리카를 보자 치논의 얼굴에 온화한 기쁨이 번져갔다. 그녀의 미소는 보는 사람도 그녀를 따라 따스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눈은 리카에게로,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성필에게로 향했다.

“이사님.”

* * *

“아, 미사토!”

거실에서 한가하게 누워 있던 세이코가 헐레벌떡 미사토에게로 달려갔다.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던 미사토는 비닐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아직 요리 다 안 됐다니까. 좀만 더 기다려.”

“그게 아니야! 치논쨩한테 연락이 왔어!”

“정말? 잘됐네!”

과거, 세이코는 치논과 친구가 됐다. 미사토가 친구를 사귀라고 했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성립한 관계가 아니다.

세이코는 진심으로 치논을 대등한 친구로서 대했다. 그녀가 오죽 좋으면 그녀가 ‘블루노트 도쿄’에서 공연할 때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었다.

고급 재즈 클럽인 ‘블루노트 도쿄’에서 경박한 환호와 개인 멘트, 박수를 보내던 세이코를 향해 치논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더랬다.

그 보답인지 치논도 세이코의 콘서트를 보러 가기도 했었다. 세이코가 감상을 묻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어, 헤헤’란 답을 돌려주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둘은 최근 만난 적도 없었고, 연락은 뜸했다. 치논은 공연 때문에 해외로 나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같이 보자!”

세이코는 미사토를 붙잡고 그리 말했다.

미사토는 기뻐하는 그녀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딸이 유치원에서 친구가 생겨 함께 주고받은 이야기를 자랑하는 듯했다.

“그래, 같이 볼까?”

세이코가 치논과의 메신저 대화창을 열었다.

사진이 있었다.

성필과 치논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치논은 과거와 다름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성필은 조금 부끄러운 듯 입꼬리가 어중간하게 올라가 있다.

셀카여서, 한 앵글 안에 들어오려다 보니 둘의 어깨가 닿아있다시피 했다.

[세이코쨩, 엄청난 사건이 있어! 우연하게 박 이사님을 뵀어!]

“뭐야 이거?”

행복이 가득했던 세이코의 눈빛이 싹 식었다.

[대단해, 운명 같지 않아? 3억 명이 사는 나라에서 마주쳤잖아.]

“운명? 죽고 싶은 건가?”

“세, 세이코 참아. 그건 위험하니까 내려놔!”

반두라의 ‘보보 인형 실험’이라는 게 있다.

방에 인형이 있다. 아이들은 어른이 인형을 가만히 놔두거나 때리는 영상을 시청한다.

인형을 때리는 영상을 본 아이들은 백이면 백 전부 다 인형을 때렸다.

‘사회학습이론’이 이렇게 탄생했다.

아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유 없이 모방하려고 한다. 이를 모방학습이라고 부른다. 아이에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매체의 시청을 금지하는 건 이런 이유가 있다.

굳이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애들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못한단 속담엔 이러한 지혜가 있다.

미사토는 그걸 오늘,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됐다.

“치논쨩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에……!”

위험한 물건을 쥐고 날뛰는 저 모습은, 아마 소녀연맹의 장하양에게서 배운 것이리라.

아하하, 그녀의 차갑고도 무서운 웃음소리가 미사토의 뇌리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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