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궁극의 앨범……?”
성필은 이번 ‘우리들의 프로듀싱’에 대해 설명했다. 리카가 성필을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했단 것, 그리고 성필은 정호환의 곡을 받고 싶다는 것.
정호환은 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지음이 작곡했던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를 듣고서, 정호환 홀로 감탄과 열등감을 곱씹었었다.
성필에겐 굳이 정호환의 곡이 필요 없다.
게다가.
“곡이 어떻게 쓰이는지 아시잖습니까.”
대중은 작곡가라고 하면 무슨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떠올린다. 영감을 받아 홀로 악보를 채우는 위인들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곡은 그런 형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음악 교육이 대중화되어 인재가 늘어난 시점에서, 음악계는 굳이 한 명의 위대한 창조자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발에 채이는 인재들을 모아 곡을 쓴다.
각자의 장점이 발휘되게 저마다 파트를 맡고 의견을 교환하며 점점 곡을 완성시켜 나간다.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잡고 곡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게 뮤직 프로듀서다.
뮤직 프로듀서는 전면에 드러나진 않지만, 신념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단 점에서 아티스트이다. 아이돌 프로듀서가 그러하듯이.
“혼자 곡을 빼곡히 채워 넣는 시대는 가버렸습니다.”
정호환은 뮤직 프로듀서였다.
단일 곡을 써내던 작곡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옛날에 지나가 버렸다.
“제가 하는 일은 곡을 쓰는 게 아닙니다. 수백 명의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확인하고, 그중에서 선택하거나, 여러 곡을 섞어 편곡하기도 하고, 아예 마디마디 전부 떼어내어 새롭게 만들며, 혹은 작곡가들을 모아두고 감독하는…….”
그런 일을 해왔다.
곡 하나의 작곡과 편곡 크레디트에는 최소 서너 명 이상의 이름이 들어간다. 많을 때는 10명을 넘기도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KS 엔터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만한 인프라를 보유한 KS 엔터에 있었기에, 정호환은 가장 위대한 뮤직 프로듀서로 군림했다.
그건 돈 많은 설치 예술가가 작품에 수억 원의 자본을 때려 부어 온갖 희귀한 재료를 이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각양각색의 재료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정점에 군림했던 예술가가, 갑작스레 파산하여 골판지 따위로 작품을 만든다면.
그 끝은 과연 어떨까?
“오버 프로듀싱. 케이팝은 과잉의 미학입니다. 그런데 현재 제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제게 부탁하고자 하셨다면 협업 작곡가가 되어달라고 하셔야지, 곡을 달라고 해선 안 됐습니다.”
“저는 정호환 이사님의 곡을 바랍니다.”
정호환은 성필의 진심이 기꺼웠다. 그리고 그의 단호한 부탁을 들을 때마다 우울해졌다.
성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동정하는 겁니까…….”
자리 잃은 늙은이가 방구석에서 혼자 궁상떠는 꼴을 상상이라도 했던 건가. 그게 사실이라서 정호환은 더 수치스러웠다.
“아니요, 동정 때문이 아닙니다.”
성필은 정호환의 물음을 부정했다.
“정호환 이사님을 원래 계시던 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정호환 이사님은 반드시 KS 엔터로 돌아가셔야 해요.”
“제가 한 말을…….”
“다 들었습니다. 착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정호환 이사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입니다. 늙으셨다고요? 아닙니다. 정호환 이사님은 잠시 방황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 방황을 끝낼 방법은 자신감을 찾으시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라면, 제가 KS 엔터로 안 돌아가는 쪽이 박 이사님껜 훨씬 이로운 일 아닙니까?”
정호환은 성필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부정과 질문을 반복했다.
그의 제안을 간접적으로 거절하는 것일까? 외부에서 보면 그리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호환의 속내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웠다. 자신이 끊임없이 내뱉는 가식의 허울을 성필이 전부 벗겨주길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도 납득할 이유를 찾길 바라는지도.
“아니요.”
정호환의 기대대로, 성필이 부정했다.
그런데 그 부정은.
“저는 정호환 이사님이 없으셨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 부정은, 정호환의 예상을 아득히 빗나갔다.
“이 세계엔 정호환 이사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필이 절절히 끓는 외침을 내뱉었다.
이 세계에 정호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세계란 아마 성필의 세계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 세계는 고작 인간 한 명 따위를 바라진 않을 테니.
솔직히,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 이토록 큰 부분을 차지한단 게 기쁘다. 치열하게 싸워온 30년이 헛되지 않았단 게 느껴져서 더욱 뿌듯하다.
“이사님은 세계를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거니까…….”
그런데.
성필의 저 말은 꼭 이렇게 들린다.
“제 곡이 필요하다기보다, 그저 제가 떠난 걸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 같군요. 이거야말로 동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른바 성필은 대규모의 팬질을 하는 중이다.
여건이 되고 힘이 있기에 은퇴한 밴드 멤버들을 모아 억지로 컴백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엔 밴드를 향한 음악적인 기대보다, 과거를 추억하는 걸론 만족하지 못하여 과거를 다시금 불러오고자 하는.
그러한 유아적인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박 이사님께 제가 그토록 중요한 존재란 건 기쁘지만…….”
정호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박 이사님의 배려는 저를 더 슬프게 만들 뿐입니다. 이제 그만…….”
“혹시 제가 정호환 이사님의 곡을 무조건 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호환 이사님의 자신감을 되찾아주려고 억지 아부를 하려 한다고요?”
“……아닙니까?”
“제가 말씀드렸죠. 곡을 써달라고요. 당연히 그 곡은 가로 엔터가 수집하고 만들어낸 모든 곡과의 경쟁을 거치게 될 겁니다. 탈락할 수도 있어요. 저는 정말 곡을 받고자 할 뿐입니다.”
경쟁을 거친다.
그 경쟁을 판단하는 자는 성필과 리카, 그리고 정지음일 것이다.
자신의 곡이 정지음에게, 아직까지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그 젊은 작곡가에게 심판받을 수도 있다.
정호환은 절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전 이사님의 곡이 반드시 앨범에 담길 걸 믿습니다. 가로 엔터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소녀연맹이 부르게 될 걸 의심하지 않아요. 아무렴, 다키스트의 ‘더 킹’을 만들어내신 분의 곡인데…….”
정호환이 홀로 완성한 것으로는 최후의 작품인 다키스트의 ‘더 킹.’
그 곡은 케이팝의 고전으로 남았다.
또한 소녀연맹에게도 의미가 각별한 곡이다. 소녀연맹은 ‘더 킹’을 편곡하여 일본에서 유명해졌으니 말이다.
그때 정호환은 정지음과 만나 그의 열등감을 자그맣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정지음은 ‘더 킹’을 자신이 만들었다면 좋았겠다, 그리 생각할 정도로 정호환을 시기했더랬다.
“리카에게 약속했습니다. 이번 앨범은 제가 앨범 프로듀서를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하고, 당연히 최고로 만들 거라고요. 궁극의 앨범. 그 자리엔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작곡가인…….”
성필은 정지음을 알고 있다. 아는 것을 넘어 그를 뮤직 프로듀서로 두고 있다.
그런데도 성필은 단언했다.
“정호환 이사님께 곡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정호환이 최고의 작곡가라고, 성필이 단언했다.
“이사님이 KS 엔터에 계속 계시는 것보다, 이사님이 안 계시는 현재의 KS 엔터가 더 나을 거다. 그리 말씀하셨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KS 엔터를 철저하게 부술 겁니다. 궁극의 앨범으로, 케이팝의 정상에 위치한 회사를 이번에야말로 완벽히 무릎 꿇릴 생각입니다. 그러면 증명할 수 있겠죠.”
성필이 손을 내밀었다.
“정호환 이사님이야말로 KS 엔터의 왕좌에 어울리는 분이란 걸,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
정호환은 눈이 충혈되는 걸 느꼈다. 피가 몰려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눈을 감은 동시에 눈가를 거칠게 쓸었다.
‘이런 뜻이었나.’
세상을 향해 증명하자는 건 이런 이야기였던가.
‘나 보고 KS 엔터를 무릎 꿇리라고……. 내가 없는 KS 엔터를 부수라고…….’
정호환에겐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프로듀서로서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정호환은 신적인 위상을 보유하고 있다.
최초의 1세대 아이돌에 이어 다키스트로 정점을 차지하여 글로벌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3세대에서 본격적으로 글로벌적 위상을 획득했다.
케이어스는 걸그룹 최초 밀리언셀러를 달성하여, 마침내 걸그룹의 팬덤이 3세대 보이그룹을 따라잡았단 것을 증명해냈다.
가는 걸음마다 기적이었다.
그가 손을 댄 모든 그룹이 성공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정상에 발을 들이밀었다.
프로듀서로, 정호환은 신이다.
‘하지만…….’
두 번째 세계는 작곡가로서의 세계다.
아이돌 프로듀싱이 종합적이고 시스템적인 과업이기에 1대1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면, 작곡은 아니다.
곡으로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톱 라인이, 트랙이, 리듬과 보컬이, 그러한 모든 요소가 비교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것이 채택되면 다른 누군가의 것은 버려지니까.
다키스트의 대성공으로 말미암아 KS 엔터의 인재풀이 질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전 세계의 작곡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시점.
정호환은 전곡(全曲)을 홀로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 작곡가들이 지구상에 수백 명이나 있었으며, 그의 곁엔 윤상열과 강동현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주변에선 정호환을 찬양했다.
최고의 작곡가이자 최고의 뮤직 프로듀서라고. 그 찬양을 달갑게 들으면서도, 정호환은 가슴속에 자리 잡은 찝찝함을 털어버리기 힘들었다.
혹시…….
‘내가 작곡가로서 인정받는 건 실력보다 명성 때문이 아닌가?’
예술은 명성의 세계다.
오죽하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하는 학술적인 기준 중 하나가 ‘권위 있는 기관에 전시될 것’이다.
좋은 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알려진 게 좋은 것인 세계이기도 하다. 때론 작품의 가치보다 프로모션의 힘이 더 크기도 하다.
고흐가 왜 죽기 전엔 인정받지 못했겠는가. 그저 알려지지 못했을 따름이다.
현재는 그의 기구한 일생과 스토리가 작품과 결합하여 작품 이상의 가치를 가진 작가가 되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자아도취 속에서도 번민하기 마련이다. 정호환처럼, 이렇게 생각해버린다.
‘명성을 제외한 뒤 헐벗은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그 뒤에 찾아오는 건 강렬한 자기 증명 욕구다.
이게 정호환이 살았던 두 번째 세계다.
프로듀서로서의 첫 번째 세계.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두 번째 세계.
이 모두를 버렸다고 생각했건만, 두 번째 세계가 다시금 정호환에게로 찾아왔다.
작곡가 정호환만 남았다.
헐벗은 그에게 증명의 기회가 도래했다.
“싫으십니까?”
성필이 불안한 투로 물었다. 아까까지 몰아치던 게 전부 거짓인 듯, 정호환의 침묵에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정호환이 웃음기를 섞어 답했다.
“싫을 리가요…….”
작곡가로서든 프로듀서로서든, 정호환은 이런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곤 못한다.
눈앞의 성필도 그러할 것이다.
성필은 남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망상을 자주 했을 것이다.
‘내가 케이어스를 맡게 된다면.’
그리고 정호환도 그러했다.
‘내가 소녀연맹을 맡게 된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소녀연맹에게 곡을 줄 수 있다면.’
과거, 김민주와 신아름이 ‘라우더’의 커버 특별 무대를 마친 후 KS 엔터로 왔을 때.
KS 엔터 사옥 옥상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정호환은 강렬히 이렇게 소망했다.
‘프로듀싱 하고 싶다.’
그 욕망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 정호환은 작곡가이며 프로듀서이기 이전에 KS 엔터의 중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사로서의 책임감이 있다.
케이어스에게 소녀연맹을 상회하는 이익이 돌아오지 않고서야, 감히 경쟁사와 협업할 생각 따위를 어떻게 하겠는가.
“첫 번째…….”
정호환이 말문을 텄다.
“가로 엔터에 곡을 제출한다. 그리고 심사를 거쳐 앨범 수록곡으로, 운이 좋다면 타이틀곡으로 낙점받는다…….”
두 번째.
“소녀연맹이 그 곡을 써서, KS 엔터를 무릎 꿇린다…….”
두 번의 고난과 시련이다.
그리고 그 시련을 전부 이겨냈을 때, 정호환은 성필의 말마따나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KS 엔터의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으리라고.
“KS 엔터를 무릎 꿇린단 건…….”
“케이어스를 이긴다는 뜻입니다.”
현세대 걸그룹의 정점을 완벽히 꺾는다.
그럼으로써 가로 엔터는 KS 엔터를 상회하는 프로듀싱 능력을 증명한다.
아니, 성필이 윤희연 이상의 프로듀서임을 증명하는 것일 터다. 그녀가 고른 곡을, 성필이 훗날 받아낼 정호환의 곡이 꺾는다.
정호환의 전장은 음원 차트일 거고, 성필의 전장은 판매량일 것이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정호환이 말했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없어요. 제가 계속 있는 게 KS 엔터와 케이어스, 다른 애들에게 더 나으리란 확신이…….”
정말 웃긴 상황이다.
실제로 정호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확신을 얻기 위해 할 일이란 게, 제 곡으로 제 자식을 꺾는 거라니…….”
하지만 확실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호환의 곡이 KS 엔터의 완성된 프로듀싱 시스템을 꺾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야, 예, 확신이 생기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진정으로 박 이사님이 저를 그토록 높게 평가하신다면.”
프로듀싱의 신이 또다시 적이 되는 상황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제가 돌아가길 바랄 수 있습니까?”
성필이 하는 말은 이율배반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KS 엔터를 꺾는 거다. 그런데 KS 엔터에 어떤 상대보다 더 버거운 인간을 다시 앉혀두겠다니.
앞뒤가 안 맞는 것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성필은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손에 쥘 영광은 허무할 거고, 빈집털이일 뿐이겠죠.”
성필은 진심이었다.
진심이지만, 진실을 전부 말하진 않았다. 게다가 거짓말도 섞었었다.
성필은 정호환을 동정한다.
그는 도저히 정호환이 물러난 상황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KS 엔터로 되돌리고 싶었다.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
몇 년이 걸려도 좋다.
언젠간 그가 자신감을 얻어 KS 엔터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게 성필이 지워버린 전생의 역사에 대한 예의이고, 정호환을 향한 존경의 표시가 될 테니.
성필은 정호환을 져버릴 수 없다.
그게 이 세계의 누구도 알지 못할, 알아주지 않을, 그리고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성필만의 도덕률이다.
하늘에 뜬 별과 같이 영원토록 성필이 길잡이로 삼을 그만의 법이다.
“그럼, 제 의뢰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성필이 내민 손을 정호환 쪽으로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정호환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빠르게 밝혀졌다.
“예, 윤 이사님.”
윤희연이었다.
성필이 놀라는 가운데 정호환이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KS 엔터로 곡을 보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판단하시기에 괜찮으시다면 써주시지요.”
정호환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부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성필이 긴장하여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퍼블리셔를 통해 공식적으로 곡을 보내라고 하더군요.”
성필은 윤희연의 대처를 이해했다.
그녀의 발언은 정론이지만, 상대는 정호환이다. 전관예우로 비유하는 건 좀 그렇지만, KS 엔터가 직통으로 곡을 받아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윤희연은 그 일의 부작용을, 정호환에게 제안받은 순간 바로 파악해냈다.
‘정호환 이사님이 회사 바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
그리고 휘하에 둔 직원들이 정호환의 후광에 눈이 멀어 객관적 판단이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
둘 다 합리적인 추론이고, 그리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정호환이 미쳐선 아방가르드한 하이퍼팝을 보내도 A&R팀은 십계명 받은 모세처럼 ‘끼얏호우!’ 공중제비를 열 번 돌 것이었다.
그래, 성필은 윤희연의 판단에 십분 공감했다. 하지만 감히 정호환에게 그 생각을 드러내진 못했다.
“이해합니다.”
정호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박 이사님.”
정호환이 성필의 손을 붙잡았다.
“저에겐 KS 엔터가 가진 음악적 자산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낡아버린 머리와 취향, 그리고 30년의 경험이 전부겠지요. 작곡을 시작한다면 소스(Source)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종일 사운드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모으고, 한 트랙 완성했다가 지우고 버리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여, 그러고도 나오는 게 부끄러운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정호환이 진중하게 부탁했다.
“만약 제가 곡을 드린다면, 들어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백 번도, 천 번도 듣겠습니다.”
“결코 대충 하지 않겠습니다. 그도 그럴 게, 세계를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에 들어갈 곡이니까요. 또, 저는 이 곡으로 반드시 인정받고 싶으니까요. 다시 돌아가고 싶으니까…….”
스스로를 믿고 싶으니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모두에게 돌아가고 싶으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
“예, 말씀해주세요.”
“가명(假名)을 쓰고 싶습니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정호환이란 이름이 곡에 드리울 후광을 경계하는 것이다.
또한 KS 엔터의 모두가 받을 충격을 없애고 싶은 것이겠지.
딱히 정호환 본인의 이름으로 성공할 필요는 없다.
만약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에게 이번에야말로 완벽히 꺾인다면, 윤희연 이사는 자리를 지키는 게 어려울 테니.
정호환이 돌아가겠다고 언질만 주면 이사회가 발로 박수를 치며 환영할 게 분명하다.
케이어스는 KS 엔터의 상징. 윤희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고픈 최후의 성벽이다.
그 성벽이 무너지면 은퇴한 영웅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다. 경험 부족의 젊은 장수를 쳐내고, 몇 번이나 나라를 구했던 영웅을 다시 불러오는 수밖에…….
그 귀환은 개선(凱旋) 못지않을 것이다.
영웅 본인에게도, 회사의 모두에게도.
“가명은 어떤 걸로 쓰실지, 생각해두신 게 있으십니까?”
“예. 제가 90년대에 쓰던 작곡가명이 있습니다. 조금 유치하지만…….”
“말씀해주세요.”
“헬독(Hell Dog)입니다.”
지옥견(地獄犬).
과거 유명했던 미국의 힙합 프로듀서들을 따라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봤던 것이다.
성필의 얼굴이 굳었다가 순식간에 밝게 펴졌다.
“……멋지네요!”
정호환이 어렴풋이 웃으며 성필의 손을 더 꼭 쥐었다.
“작곡가 헬독,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에.”
성필은 그에게서 허락을 얻어냈다. 그렇기에 마음껏 찝찝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힘든 결정이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힘들지요, 당연히 힘듭니다. 지금도 죄책감이 차오르는걸요.”
자식처럼 생각했던 케이어스를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음악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정호환 스스로도 농담 삼아 그리 부르곤 했으니.
“괜찮으실까요?”
성필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죄책감이 정호환을 집어삼킬까 불안한 거겠지. 그에 정호환은 코로 한숨을 내뿜었다. 이어서 공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케이어스를 성공시키고자 했던 게, 그 아이들을 소중히 여겨서겠습니까. 제가 프로듀서로서 성공하기 위함이지요. 만약 소중하기 때문에 아이돌로 성공시키려던 거면, 제 딸아이를 아이돌로 만들었어야 했겠지요. 아이돌 이전에 프로듀서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아이돌은 프로듀서가 성공하기 위한 도구.
성필은 아이돌을 도구로 취급하는 화법에 순간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 말이 맞았다.
성필이 소녀연맹 멤버들을 찾아 데려온 것도 그녀들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아이돌이든 그 탄생엔 프로듀서의 자의식이 있다.
승리와 성공, 명성을 향한 프로듀서의 강렬한 열망이 있고서 아이돌이 존재한다.
아이돌과 프로듀서 사이엔 특이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명백한 선후관계가 있다. 프로듀서가 무조건 선(先)이다.
“거기에다, 저는 이제 프로듀서가 아닙니다.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지요. 제 능력을 증명하여,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인간이 되어 돌아가고자 합니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아이돌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다.
그리 선언한 정호환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세뇌하려고 일부러 강경하게 말한 걸지도 몰랐다.
성필은 같은 프로듀서로서 그 마음을 알았기에,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진짜 정호환 이사님이 소녀연맹 곡을 써서 준다고 이게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니 소련이들도 다키스트 더 킹 같은 곡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건가 난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닐까 안 돼 티 내면 안 돼 정호환 이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야 아 근데 이게 현실이라는 게 아직도 안 믿겨 진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세상을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 그런데 온전히 맡길 순 없겠지 앨범의 색이라는 게 있으니 정기적인 연락을 통해 곡의 방향성을 전달해야 할 거야 근데 그러면 정호환 이사님이랑 협업을 하게 된다는 건데 아 내가 5년 동안 쌓은 위치란 이런…….’
정호환이 침울해해서 티를 낼 수 없었지만, 성필은 기뻤다.
리카에게 약속했던 궁극의 앨범에 한 발짝 다가간 기분이었다.
* * *
소녀연맹이 미국 투어를 위해 한국을 떠났다.
성필은 리카에게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받았으므로, 한국에 남아 앨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 했다.
A&R팀 회의.
성필은 모인 면면을 쭉 둘러보곤 이재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이렇게 일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재호 씨.”
“‘아라베스크’ 때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이사님이 디렉팅하시니 든든합니다.”
성필이 이해한단 듯 어중간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하기사, 우리 애들이랑 같이했던 프로젝트는 여러모로 다사다난했죠?”
“예에.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던 터라…….”
가로 엔터를 떠받치는 기둥을 향해 ‘저는 좀 반대인데요?’라고 반대 의사를 비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범하고 인자한 성필이라면 ‘그렇군요’라고 받아들일 테지만, 예민한 나이의 멤버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악감정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재호는 그녀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특히 백설하 때는 다른 의미로 그러했다.
프로젝트 관련 미팅을 할 때마다 겁먹은 눈초리를 하고 있으니, 무슨 말이든 최대한 잘 포장해서 전달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고민도 끝이다.
‘아라베스크 때를 떠올리면, 박 이사님이 불도저 같은 실행력으로 프로젝트를 휘어잡으실 거야.’
가로 엔터의 모두는 그 파도에 쓸려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명확한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있단 게 이토록 안심되는 일이었던가.
“자, 그럼 시작할까요.”
성필이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 첫 번째 미팅의 개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당일(當日) 오후 3시.
성필은 일에만 매진하기로 했던 게 무색하도록 빨리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떠나서 어디로 가느냐, 미국이었다.
짐을 챙기고 급히 회사를 나서는 성필은, 현관에서 손혜빈·유우토와 마주쳤다. 마치 출장 가는 남편이자 아버지를 배웅하는 아내와 아들 같았다.
손혜빈이 유우토를 붙잡곤 성필을 흘겼다. 일밖에 모르는 워커홀릭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다.
“누나, 다녀올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우리만 남기고 가려고? 카오틱 에너지(가명) 곧 데뷔야. 우리 애들도 좀 신경 써줘야지! 유우토, 너도 얘한테 뭐라고 말 좀 해봐. 네 누나에게만 정신 팔렸잖아!”
“정치란 나눔이요! 분배요! 한 사람의 배만 채우게 해선 아니 되오!”
“얘 왜 이래?”
“한국어 공부하라고 사극 보여줬더니 이렇게 변했어.”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오오.”
성필이 유우토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주자 그가 헤실헤실 웃었다.
“발음 많이 좋아졌는데?”
“감사하니다.”
“……아닌가?”
“유우토, 사극 톤으로 말해봐.”
“내 감사드리오.”
“맞나……?”
좋아지긴 한 것 같다.
리카도 한국 드라마를 보며 발음을 갈고닦았다고 하니, 유우토에게도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게 분명하다.
몇 달 전에 백수현이 유우토의 한국어 공부를 도와주겠답시고 한국 커뮤니티를 하란 충고를 해주었는데, 그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낫다.
유우토의 언어 구사를 듣고 손혜빈이 기절 직전에 몰리고 홍규헌이 눈물을 흘리며 성필이 초단기 실어증에 걸렸으니,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굳이 표현할 필요도 없다.
아직도 유우토의 그 방정맞은 말이 머릿속을 쿵쿵 울린다.
‘게이야, 공중제비 좀 그만 돌게해라이기야!’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다.
성필은 다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데뷔 최종 평가에 참석 못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바쁘신 거 아라요.”
다음으로 성필은 손혜빈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대놓고 성필을 탓했다.
“내 마음 알면서, 나랑 있어 주면 어디 덧나?”
유우토가 흠칫했다.
“알지, 알아. 뼈저리게 알지. 마음 같아선 종일 누나랑 있고 싶은데.”
유우토가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
“치, 매일 일 일 일 일 핑계만 대고. 그냥 나는 말라 죽으라는 거지?”
“말을 왜 그렇게 해.”
유우토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빠질 타이밍을 살폈다.
“빨리 올게.”
“……빨리 와야 해?”
“응.”
성필과 손혜빈이 악수했다. 그리고 서로 동시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둘의 어깨가 가볍게 부딪쳤다. 담백한 작별 인사였다.
유우토는 그마저도 자극적이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았다.
“유우토, 조만간 또 보자.”
“아, 안녀히 가세요.”
성필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곧 카오틱 에너지의 데뷔다. 그들의 메인 프로듀서인 손혜빈의 마음이 어떨지, 방금 말했듯 성필은 뼈저리게 알았다.
그럼에도 오늘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일주일 정도 머무를 수도 있다.
오늘 점심 즈음 소녀연맹의 글로벌 유통사인 레버 레코드에서 연락이 왔다.
‘컬래버레이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누구에게?
‘케빈, 일렉트로닉 디제이요. 저희 팀의 판단으로, 이 컬래버레이션이 미국 시장 돌파의 주춧돌이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큰 성과는 없을 수도 있고, 아마 그렇겠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성필도 그리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즉시 미국행 비행기에 발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