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19화 (719/760)

719화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케이어스의 방송 촬영이 끝나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에리카가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거다.

“내가 박 이사님께 드린 말씀…… 심했던 거 같아.”

에리카는 뭔지 모를 감정으로 얼굴이 거무죽죽했다. 김민주가 보기에 어제 신아름에게 욕을 들어먹어서 그런 것이었다.

비록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폰 너머로 새어 나오던 성난 목소리만 들어도 대강 알겠다.

거기에 더해 백지장처럼 변했던 에리카의 표정도 한몫했다.

“동의함미다.”

어제 에리카가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었을 때 아무 소리 하지 않았던 진저.

그녀는 에리카가 잘못을 시인하자 마치 원래 그렇게 생각했단 듯 그녀를 질책했다.

“정호환 이사님이 떠난 게 왜 박 이사님 때문임미까. 박 이사님이 총괄 프로듀서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슴미까?”

“근인(近因) 말고 원인(原因)을 말하는 거였어…….”

“근인이 뭠미까?”

“나도 동의해.”

웬일로 진소유가 대화에 참여했다. 평소였으면 ‘알 바야?’라며 샤워실로 직행했을 텐데.

“내가 너무 잘나서 하양이가 아이돌을 그만뒀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베르테르(‘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자살함)가 됐을 거야.”

“……너, 너.”

에리카는 자기 잘못이라고 한 주제에 진소유에게 반박하려고 했다. ‘베르테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굉장했다.

“비유가 이상하지 않아? 네 인생에 하양 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박 이사님 인생에 정호환 이사님이 차지하는 비중이랑 같을 거란 거야?”

“이젠 이사님 아니지.”

“뭐?”

“이젠 이사님 아니라고. 정호환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

“농담이었어.”

진소유가 고민하듯 중지로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너 나한테 욕한 거야?”

“민감하네, 우리 에리카.”

“‘예민하다’겠지. 어떻게 된 게 진저보다 한국어 구사력이 떨어지니?”

“또, 절박하고.”

“대충 상황은 알겠어.”

김민주는 일촉즉발의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언어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러했다.

빙 둘러앉은 바닥 중앙에 김민주가 철퍼덕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빙글 돌아 천장을 보았다.

“신아름 걔가 어제만큼 화냈던 게 ‘빛나솔그’ 때거든. 그건 진짜 화낼 만했어. 가출한 에리카 붙잡으려고 예비 여친도 차버린 데다가 욕이란 욕은 다 먹었잖아. 근데 그때만큼 화냈단 건…….”

에리카가 침을 꼴깍 삼켰다.

“화냈단 건……?”

“박 이사님 상태가 그때랑 비슷하단 거지.”

에리카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성필이 욕을 들어먹을 때, 그를 도와주겠답시고 사건의 내막을 밝혔더랬다.

때문에 성필에 이어 김하슬이 표적이 되어 연달아 욕을 먹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생각했는데, 원래 인터넷에서 욕하는 이들이야 진짜 무슨 사명감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 그냥 놀이터에 놀이기구가 바뀐 것 정도로 생각하고 김하슬을 욕했던 거다.

그때 성필은 화냈었다.

왜 그랬냐고.

에리카는 자신의 속셈을 밝힐 수도, 1팀장의 계획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때의 성필과 비슷하다, 고…….

“베르테르…….”

진소유가 그리 말하자마자 에리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진소유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슬쩍 물러났다.

“오늘 웃을 거 다 웃었네. 난 샤워하러 간다.”

진소유가 떠나가고 셋만 남았다.

진저가 우물쭈물 에리카에게 물었다.

“어떡하실 검미까?”

“……사과드려야지. 나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시는 거라면.”

“야, 걍 신아름이 급발진해서 욕 박은 걸 수도 있어. 일단 사실관계를 파악해야지.”

“파악하고 말 것도 없어. 다시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경솔했어.”

선전포고한답시고 정호환이 떠난 책임을 성필에게 지우려 하다니.

진짜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에리카의 선전포고 안에는 그 내용을 부정하는 말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성필에게 일이 생겨 끝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전화로?”

“빨리 오해를 풀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전화를 드려도 괜찮을까?”

“뭐 어떡해. 우리 지금 일본에 있잖아. 한국에 가서 직접 보기라도 하게?”

“그것도…… 그래.”

에리카는 폰을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바닥에 툭 내려두었다.

“뭐라고 말씀드릴지 생각해보고 연락드려야겠어. 이번엔 신중해야 해.”

“그러든가.”

“저…….”

진저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박 이사님 얘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호환 이사님께 연락해보셨슴미까……?”

에리카와 김민주가 두 눈을 껌뻑였다.

없다.

“할 분위기가 아니잖아…….”

“그, 그렇슴미까.”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나간 사람이다. 게다가 정호환은 떠날 때 에리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어쩌면, 케이어스는 정호환에게 트라우마 스위치일 수도 있다.

“실은 정호환 이사님이 걱정됨미다…….”

“네가 걱정 안 해도 잘 살고 계실 거야. 돈을 한두 푼 모아두셨겠냐.”

김민주가 진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쯤 어디 좋은 데 여행 가셔서 즐겁게 보내고 계실 거야.”

“그건 좀 화남미다…….”

“……엉?”

“이왕이면 저희와 헤어져서 조금 슬퍼하셨으면 좋겠슴미다. 떠나자마자 하와이 같은 데서 놀고 계시면 약간 실망스럽슴미다…….”

“너 왜 그렇게 약았냐.”

김민주는 진저의 머리 위에 올린 손을 기분 나쁘단 듯 떼어냈다.

“진저 네가 어떻든.”

에리카는 억지로 활기차게 말했다.

“정호환 이사님은 잘 지내고 계실 거야.”

그래야만 한다.

* * *

정호환이 남긴 KS 엔터의 시스템.

윤희연은 그걸 완벽히 장악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애초에 정호환과 윤희연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극과 극이었으니.

정호환에게 올라오던 보고와 그의 일 처리 방식을 인계받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시스템을 파악하는 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그 시스템의 축을 담당하는 인간들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했다.

면담, 면담, 면담, 식사, 식사, 식사…….

‘정호환 이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바쁘게 지냈는지 모르겠어.’

확실히 총괄 프로듀서란 직함이 무겁긴 하다.

윤희연은 정호환과 같은 이사였으며, 그와 똑같이 한 파트의 수장이었지만, 총괄의 이름을 다는 순간 일이 몇 배는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일만 늘어나면 다행이지.’

책임은 수십 배 늘어났다.

앞으로 KS 엔터의 성공과 실패는 온전히 윤희연에게로 올 것이다. 물론, 윤희연은 자신이 수장 자리에 앉았다고 모든 일이 바람직하게 흘러가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시행착오가 있겠지.’

시행착오의 과정 도중 이사회가 윤희연에게 실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직 정호환의 은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인간들이니까.

정호환 외에 다른 사람을 믿는단 일이 처음인 인간들. 윤희연이 완벽하게 정호환을 대체하길 바라고 있을 터.

‘말이 안 되지.’

그렇다면 윤희연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인내심이 떨어진 이사회에게서 ‘물러나라’는 말을 들어야만 할까?

‘아니.’

버티고 버틸 거다.

그러나 버티는 것도 실적이 있어야 될 일.

“여러분, 반갑습니다.”

KS 엔터 대회의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케이어스를 담당해왔던 각 파트의 팀장급 인물들이었다.

KS 엔터의 촉망받는 인재들, 실력이 입증된 실무자인 팀장급들이 모인 광경은 장관이라고 부를 법했다.

저들의 말이 KS 엔터에서 발휘하는 힘을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는다.

그리고.

“제가 총괄 프로듀서가 돼서…… 이젠 케이어스도 관리하게 됐거든요. 메인 프로듀서로 쭉 담당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젠 윤희연이 저들 모두를 컨트롤한다.

KS 엔터에서 가장 강력한 실권자가 된 것이다.

윤희연이 잠시 심호흡했다.

‘이 순간을 계속 꿈꿨지.’

가장 완벽한 작품인 케이어스를 온전히 자신의 품 안에 넣을 날을, 계속해서 기다려왔다.

그러나 윤희연의 앞에 펼쳐진 현재는 그녀가 꿈꿨던 것과 살짝 달랐다. 이곳엔 윤상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상관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모든 게 주어진 상태에서 이룬 업적은 큰 빛이 없는 법이니까.’

윤희연 본인도 부족한 환경에서 악을 쓰며 이사 자리에 올랐다. KS 엔터가 한 연습실을 여러 명이 돌려쓰던 그 시절부터.

모든 게 부족해서 한 명이 몇 명의 역할을 해야만 할 때, 윤희연은 수십 수백 명이 있어도 하지 못할 업적을 세워왔다.

그래서 지금 현재에 이른 것이다.

정호환의 후계자로서.

“동기 부여를 해드리자면, 케이어스의 다음 앨범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소녀연맹보다 성적이 좋아야 해요. 앨범 판매량, 음원 순위, 콘서트 동원인수, 파급력, 전부 다요.”

팀장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윤희연이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해라!’라고 안 해요. 저는 정호환 이사님과 다르거든요. 저랑 일해보셨던 비주얼 파트 분들은 익숙한 일 처리 방식이겠지만, 지금부터는 제가…….”

이 윤희연이.

“모든 파트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빠짐없이 감독하겠습니다.”

“전부 다…… 어느 정도로 말씀이신가요?”

뮤직 스튜디오의 치프 중 한 명이 물었다.

윤희연이 산뜻하게 답했다.

“아주 간단한 결재라도 전부 저에게 올리세요. 인과관계를 명확히 볼 수 있게요. 그리고 팀장급이 참석하는 회의엔 반드시 저를 부르세요. 제가 없으면 시작하지 마세요.”

“예, 예……?”

“잘 모르시겠죠? 익숙지 않으시면 저랑 일한 분들한테 조언을 구하세요. 뮤직비디오, 공연, 아트, 비주얼 등등 저랑 관련된 저기 팀장분들한테요.”

호명된 파트의 팀장들이 익숙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핼쑥한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시겠죠? 제가 케이어스의 절반이었어요. 그리고 이제부턴 제가 나머지 절반까지 얻어서, 제가 케이어스 그 자체가 될 겁니다.”

케이어스의 머리칼 한 올부터 모든 신체에 이르기까지, 윤희연의 생각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케이어스는 완벽한 저의 페르소나가 될 거예요.”

윤희연이 인내심 부족한 이사회로부터 보신하기 위해선, 케이어스만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KS 엔터의 상징이자 정호환이 남긴 꿈의 집합체는, 앞으로 결코 패배해선 안 된다.

그리고 윤희연은 자신이 있었다.

* * *

“그런가…….”

정호환은 유쾌한 목소리를 지어내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잘됐구만.”

[예…….]

폰 너머 들리는 1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아직도 정호환이 떠났단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다.

정호환은 1팀장에게 현실을 일깨워줄 요량으로 그가 했던 말을 자신의 입으로 돌려주었다.

“윤 이사라면 잘할 거라고 믿었네. 벌써 조직을 다 장악했다니, 앞으로는 탄탄대로만이 남았겠군. 나와는 달리 젊으니 잘할 거야. 지금까지도 내가 하지 못하는 절반의 일을 완벽하게 해 오지 않았나.”

[……예,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바라는 걸로 끝나면 안 되지. 자네가 도와줘야 해.”

[매니저인 제가 뭐 도와줄 게 있다고…….]

“매니저는 아티스트와 회사와의 가교이네. 자네가 케이어스와 윤 이사를 연결하는 거야. 허투루 볼 일이 결단코 아니네.”

1팀장의 말이 뚝 끊겼다.

그를 보고 있지 않아도 그가 당황했음이 느껴졌다. 정호환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뇨, 어색해서요.]

“뭐가 말인가? 허허, 내가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게 어색하다고 말할 건 아니겠지? 평소에도 섞어 쓰지 않았나.”

[그게 아니라, 정호환 이사님이 ‘아티스트’라고 말씀하신 게……. 몇 번 쓰긴 하셨어도 자주 쓰던 건 아닌데, 방금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말씀하셔서…….]

“…….”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직도 딱딱하게 날 대하는군. 그냥 ‘동네 할배다’ 생각하고 말하라니까.”

[제가 어떻게…….]

그 뒤로는 서로 안부를 묻곤 통화가 끝났다.

‘윤 이사가 잘하고 있단 거지?’

케이어스가 다음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다리는 건 즐거운 일일 터다.

옛날엔 컴백이 다가오면 조마조마했지만, 이젠 즐겁게 기다릴 수 있을 듯하다.

정호환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영업을 시작한 지 40년도 더 된 레코드샵의 선반을 돌아다니며 가치 있는 음반을 찾아내는 것이다.

헌책방처럼도 보이는 이 낡은 가게엔 레코드와 CD 앨범이 혼재했다.

진열대 사이를 흥겹게 오가던 도중, 영화 ‘나 홀로 집에’의 OST 앨범을 발견했다. 현재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어린 케빈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호환이 씩 웃으면서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아까 1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티스트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썼다, 라…….’

아마 성필의 영향일 것이다. 에리카의 영향이고 말이다.

그와 처음 술자리를 가졌을 때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했던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정호환은 ‘나 홀로 집에’의 OST 앨범을 손에 쥐고 다시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음반 디깅이 요즘 그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재밌지만, 즐겁진 않다.

그저 할 게 없어서 매일 이러고 있을 뿐이다.

“음?”

그때 정호환의 눈에 띈 게 있었다. 여러 겹 겹쳐 있는 레코드판 사이에서도 강렬한 색채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검지와 엄지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커버가 드러났다.

“킹 크림슨…….”

보기만 해도 충격과 공포가 엄습하는 커버 아트다. 정호환은 그걸 들고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부채질하던 주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청음 가능하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주세요.”

주인이 레코드를 꺼내어 플레이어 위에 올렸다. 바늘 긁히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트랙인 ‘21세기 정신분열증 환자’가 재생됐다.

정호환은 가만히 서서 그 음향에 귀를 기울였다.

‘프로그레시브 록…….’

록 안에 인류의 모든 음악 장르를 혼합하려고 했던,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실험적 조류 중 하나.

‘프록(프로그레시브 록) 덕분에 븨이에스를 만들 용기를 냈었지.’

과거 처음으로 이 곡을 들었을 땐 ‘시발 이게 뭐야?’ 싶었다.

하지만 재즈에 조예를 갈고닦은 후 들으니 ‘이건 신이 내린 곡이다’란 감상이 들었다.

가만히 곡을 듣고 있자니, 흐리게 번진 시야 속 눈에 띄는 커버 아트가 또 눈에 들어왔다.

보란 듯이 벽면에 전시된 앨범,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였다.

“아…….”

마이클 잭슨.

저 뮤지션이 태어난 것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마이클 잭슨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키스트를 생각해냈다. 처음부터 마이클 잭슨처럼 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며 성장해가는 그들을 보고 뿌듯했었지. 또…… 그들이 은퇴를 선언했을 땐 가슴이 찢어졌었고.

정호환이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눈을 꽉 감았다.

“괜찮아요?”

사장은 정호환의 낌새가 이상하자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정호환이 손을 저었다.

“예, 괜찮습니다. 저어기, 마이클 잭슨 ‘스릴러’랑 킹 크림슨, 그리고 여기 이 앨범 계산해주시겠습니까.”

“날도 더운데 피곤하시면 쉬고 가세요.”

“괜찮습니다, 하하.”

정호환은 종이백 안에 레코드와 앨범을 넣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찌는 듯한 더위 속을 걷고 또 걸었다.

차는 타고 다니지 않는다.

걷는 게 건강에 좋다는 모양이다.

가방에서 DAC를 꺼냈다. 흔히 ‘소니 워크맨’이라고 불리는 모델 중 하나다. 줄 이어폰을 꽂고 액정을 몇 번 터치하여 음악을 재생했다.

록밴드 ‘산타나’의 ‘스무스’였다.

라틴적인 리듬과 멜로디가 귀를 사로잡았다.

‘그래, 이걸 듣고 라틴적인 음악을 만들려고 했었지. 부테스의 곡 중 하나에 뭄바톤을 도입한 것도…….’

정호환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더위만 느끼기로 했다.

분명 추억일 텐데, 떠올릴수록 괴로웠다.

걷고 걸어, 정호환은 땀에 젖은 옷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반상회에 나가 집에 없었다.

에어컨을 틀고 샤워했다.

나와선 뽀송뽀송한 새 옷차림으로 작업실로 들어갔다. 약간은 뻣뻣한 옷의 질감을 느끼며 오늘 사 온 킹 크림슨의 레코드를 꺼냈다.

LP플레이어에 두고 바늘을 올렸다.

가게에서 들었던 ‘21세기 정신분열증 환자’가 다시금 흘러나왔다. 가게에서 들었던 음질과 음량보다 훨씬 커다랗게.

다시 들어도…… 정말 멋지다…….

‘이런 곡을 만들고 싶었어…… 이런 음반을…….’

정호환은 테이블 중앙에 올라온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1,000만 원에 이르는 가격으로 구매한 애플의 컴퓨터였다.

더는 쓸 일이 없을 것이기도 했다.

곡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프로그램 창만 보아도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한 노트(Note)도 찍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다시 작곡을 한단 게 몰염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

젊은이들의 차지해야 할 새로운 세대 속에 추하게 남아 있을 권리 따위, 어떤 늙은이에게도 없다. 생기 넘치는 청춘이 시체를 경배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저렇게 음반으로 남아야만 한다.

무기질의 금속 덩어리로만 존재해야 한다.

시체가 남긴 유산으로서, 어떠한 영향력도 없이 오로지 영감만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괴롭고 아프고 원통하다.

자신은 아직 청춘인데, 청춘이고 싶은데, 그걸 부정해야만 하는 삶이란 너무나 추하고 고통스럽다.

차라리 이 쓰레기 같은 인생이 끝났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아니면 스스로를 죽여버릴 것만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의미 없는 삶을 위해 밥을 처먹고, 밖으로 나가 음반 가게를 둘러보며, 또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잠드는 삶.

늙어서 그런지 꿈도 없어,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벨이 울렸다.

정호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

A면 재생을 마친 레코드 암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정호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가 뿌옇다. 늙어서만은 아니었다. 정호환은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고 현관으로 나섰다.

다시 벨이 울렸다.

누구인지는 안다.

오늘 손님이 오기로 했다.

반가운 손님이다.

문이 열리자.

“안녕하세요, 이사님.”

성필이 있었다. 그는 만개한 미소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왔다. 정호환도 미소를 돌려주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성필이 종이백을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뭐 이런 걸 다…….”

종이백을 받는 도중 본의 아니게 내용물을 보았다. 레코드였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보았음에도 그게 무슨 레코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킹 크림슨의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정호환이 듣고 있던 그것이다.

그제야 정호환은 꾸며내지 않은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성필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LP플레이어가 있다고 하시기에, 선물로 사 왔습니다. 이미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해서…….”

“감사합니다. 들어오시지요.”

성필이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호환은 그의 모습을 한순간 넋 놓고 보았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와이셔츠에 슬랙스 차림의 그는 풍채가 좋고 젊은이다운 생기로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이런 청춘이야말로 한국의 음악계를 이끌어갈 보석이겠지. 그러한 종류의 감동과…… 체념. 그것을 담아 흐려진 그의 눈앞에 성필이 섰다.

“정호환 이사님, 왜 총괄 프로듀서 직에서 물러나신 겁니까?”

성필은 현관에서 한 발짝 벗어났을 뿐이다.

거실의 초입에서,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더는 이사가 아니라고 지적할 틈도 없었다.

정호환은 그의 질문이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성필은 정호환이 물러난 이유이니까. 그의 입에서 듣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못해서, 못나서, 정호환은 본심을 말해버렸다.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니까요…….”

그의 말엔 억울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예술 하는 자는 영원히 청춘이어야만 한다…… 그게 제 삶의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는 푸르지 않게 된 데다 봄도 아닌 시간 속에 사는 저는…… 예술가일 수가 없게 된 거지요…….”

정호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침이 아닌 것을 삼킨 그는 미소 지었다. 예술가로서의 아집이 주름 대신 박혀 있었을 그의 얼굴엔 이젠 정말 주름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게 아닐 텐데요.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드디어 제대로 된 담소를 나눌 수 있겠습니다. 들어가서…….”

“아뇨,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겁니다.”

“예……?”

“정호환 이사님은 떠나셔선 안 됩니다.”

정호환이 울컥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젠 이사가 아닙니다.”

“그럼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선생님, 착각하고 계십니다.”

“착각, 제가?”

“선생님은 영원토록 청춘일 겁니다. 당연히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지금…… 저를 능멸하는 겁니까……?”

세상 어느 것보다 푸르른 청춘에게 이런 말을 들어 먹다니,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 시대는 끝났습니다. 제가 깨닫기 아주 오래전에 이미 끝났던 거겠지요. 윤희연 이사가 그랬습니다. KS 엔터를 뒤에 두고도 소녀연맹에게 지면 그 무슨 망신이냐고. 예, 망신살이 뻗쳤군요. 예, 저는 병신입니다. 병신 쓰레기지요!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저는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벌인 장본인입니다! 물러났어야 할, 진즉 물러났어야 할……!”

정호환이 비틀거렸다.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는데, 제가 어떻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단 겁니까! 옛날의 업적으로? 아니요, 그럴 순 없지요. 우리가 복종하는 법은 지금 무덤 안에 있는 시체들이 만든 겁니다. 그걸 시대에 맞게 바꾸는 게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지요. 미래에 희망을 걸고! 다음 시대에 넘겨주는 게! 저 같은 늙은이의 의무란 말입니다!”

“저는…….”

성필이 애달프게 말했다.

“알아요, 선생님은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못난 인간이 아닙니다…….”

“그럼 저는 뭡니까! 모든 걸 손에 쥐고도 꿈을 빼앗긴 저는 대체 뭐란 말입니까!”

성필이 애처롭게 읊조렸다.

“최고의, 프로듀서…….”

“……뭐라고요?”

“정호환 이사님은, 제가 아는 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최고의 프로듀서십니다.”

이건 진짜 모욕인가?

그를 엄하게 꾸짖으려 했으나, 정호환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성필의 얼굴을 보았다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그러했으리라.

성필은 진심으로 그리 여기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걸 알아주지 않는 정호환 탓에 매우 슬퍼 보였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래, 자신은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데 성필의 반응은 왜 저런가? 그 대단한 인물을 꺾고 마침내 은퇴하게 만든 인간이 원래 저러한가?

“진정으로…….”

성필은 정호환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굳게 그리 믿는다.

거대한 업적을 달성한 젊은 프로듀서가, 어떻게 저토록 겸손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지금의 제 꼴이 그리 보이십니까……?”

“지금은 아닐 수도 있겠죠. 정호환 이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그 윤희연 이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러니까 증명하길 바랍니다.”

“증명이요? 증명이요?! 어떻게 말입니까! 이 초라한 늙은이가 뭘 할 수 있단 겁니까! 회장님께 빌어서 다시 돌아갈까요? 그 얼마나 추한 짓거리입니까? 아니, 추한 걸 떠나서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KS 엔터는 미래에 맡겼습니다.”

밑천이 드러난 겁니다.

정호환이 분한 듯 그리 말했다.

“븨이에스가 톱이 되지 못하고, 부테스마저 밀려났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제 밑천은 바닥난 겁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건 분에 넘치는 인재들 덕입니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 윤희연 이사, 그리고 정호환을 보필했던 수많은 인재들.

그들 덕에 정호환은 체면치레나마 해왔던 거다.

“이 초라함이 본래 제가 입어야 할 옷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증명? 증명이요? 무엇을? 제 바닥을 이 이상 드러내자고요? KS 엔터로 돌아가서? 아니요, 안 될 말입니다.”

성필은 간헐적인 한숨을 뿜으며 계단을 내려가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호환은 드디어 그가 고집을 포기했나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속상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율배반적이며 양가적인 태도였다.

본인을 본인의 입으로 한껏 비하한 주제에, 성필에게 찬양과 칭찬을 듣고 싶었던 건가?

‘호환아, 늙어도 어찌 이렇게 추하게 늙었느냐…….’

정호환의 어깨에도 힘이 빠졌다. 그는 소리 지른 것을 사과하려 했다.

그때였다.

성필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 * *

“정호환 이사님.”

성필은 마음 정리를 마쳤었다.

한구인과 손혜빈의 위로를 들었다. 그날부로 모든 고민과 걱정을 술과 함께 날려 보냈다.

날려 보냈다고 생각했다.

“프로듀서는 그만두셨지만, 작곡가이시죠?”

모든 책임감을 해방하리라 결심했다.

인간 주제에 신의 고민을 품어선 안 된다. 현대의 법과 도덕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를 스스로에게 물어봤자 결판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하나만은 놓아줄 수 없었다.

“곡을 부탁드립니다.”

정호환.

성필이 그토록 사랑하는 케이팝을 만들어낸 장본인. 그리고 미래엔 자신이 만들어낸 케이팝을 자기 손으로 직접 구원할 자.

역사상 최고의 프로듀서.

성필의 꿈이자 이상향이다.

“곡을 써주세요.”

몇 년 전 그와 아티스트십에 관한 대화를 나눈 뒤, 성필은 그를 쓰러뜨려야 할 거짓 우상으로 규정했었다.

그를 쓰러뜨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쓰러지길 바라진 않았다. 정호환은 계속해서 우뚝 서 있어야만 한다.

그는 쓰러져선 안 된다. 그가 정상에 서 있으면서, 성필이 그 위로 올라갈 것이다. 정상보다 더 높은 구름의 끝까지.

“도와주세요. 저와 함께 만듭시다.”

멋대로 쓰러지게 두지 않는다.

나의 우상.

나의 영웅.

나의 꿈이자 지향점, 반드시 도달해야 할 풍경이며, 언젠가 넘어서야 할.

성필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배기 신.

프로듀싱의 신.

“뭘, 말입니까……?”

신이 물었다.

인간이 답했다.

“세계를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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