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화
“이게 뭠미까!”
진저는 폰 너머의 1팀장을 향해 역정을 냈다. 그녀의 근처로 급류처럼 인파가 지나쳤지만, 누구도 진저에게 관심을 주진 않았다.
단지 ‘예쁜 사람이다’ 싶어서 눈길을 줄 뿐.
“모처럼 일본에 왔는데 나가는 방송이 왜 그런 것밖에 없슴미까!”
[왜 그렇냐니, 네가 밟고 선 땅이 어디야?]
“일본임미다.”
[그래,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그래도 인기 있는 방송이야. 케이팝 아이돌 일본에 오면 거의 다 나가.]
“남들 거의 다 나가는 방송은 우리 명성에 안 어울리지 않슴미까!”
[너 왜 그렇게 뿔났어?]
“진저, 이리 와.”
에리카가 부르자 진저는 자신이 그녀와 멀리 떨어졌단 걸 알아챘다.
진저는 ‘이리 와’란 말에 곧바로 인파를 넘어 에리카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그녀들이 있는 곳은 일본 도쿄의 번화가였다. 함께 구제 편집숍으로 가서 옷 쇼핑을 하기로 했다.
진저는 계속 1팀장에게 말했다.
“우리도 소녀연맹처럼 더 많은 방송! 더 많은 잡지! 더 많은 공연! 에 서고 싶슴미다!”
[좀 봐줘라. 한국에선 너희가 훨씬 훨씬 훨씬 더 대단하잖아. 너희 잠실 2일 연속으로 매진시켰어. 매진이라고. 3일 연속으로 했어도 자리가 찼을걸? 소녀연맹이 그런 거 할 수 있겠어?]
“저는 일본 일을 말하는 검미다.”
[진저 너, 내가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치와와는 귀엽지만 계속 개빡쳐서 으르렁거리면…….]
“본인 이야기 하는 검미까?”
[내가 개빡친 치와와라는 거야 지금?!]
1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암튼,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가지고 볶는 것 좀 그만해. 오히려 좋게 생각해. 이번 기회에 유명해진다고.]
“우리도 ‘뉴아사’ 나가면 안 됨미까? 그 세이코이인지 세이코인지 하는 가수를 꺾으면 우리도 유명해지는 거 아님미까?”
[경연에 나가겠다고? 미쳤니?]
“가, 감히 최고의 아이돌을 상대로 ‘미쳤냐’고 한 검미까……!”
[한 번 싸워봐? 나는 개빡친 치와와라는 말 듣고 괜찮을 거 같아? 어?!]
“윤희연 이사님이 누굴 택할 거 같슴미까? 저? 아니면 화난 치와와 1팀장님?”
기세 좋게 말을 이어가던 1팀장의 답이 뚝 끊겼다.
진저가 KS 엔터 내부에 촘촘히 얽힌 꽌시의 그물을 가지고 있단 건 알았지만, 윤희연 이사에게마저 뻗어 있었단 말인가?
1팀장이 전율하여 기세를 줄였다.
[아니, 진짜 싸우자고?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진짜 미안하다.]
“처신 잘하는 검미다.”
[……암튼 뭐, 고생해라.]
“1팀장님도 밤길 조심하십쇼.”
[안부 전하는 거 맞지?]
“고생하시는 김에 우리 스케줄도 늘려주시는 검미다.”
[그래, 내년에는 이보다 나을 거다…….]
통화가 끝나자 에리카가 웃었다.
“많이 친하네.”
“저는 마성의 아이돌임미다. 제가 반말하고자 하면 정호환 이사님한테도 할 수 있슴미다.”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뺨은 보이니까 안 때리실 검미다. 아마 배 아니겠슴미까?”
“진지하게 대답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기분 나쁘다니, 상처임미다.”
가던 도중, 둘은 프리쿠라(스티커 사진) 가게를 발견했다. 일본 하면 또 유명한 게 프리쿠라다.
진저가 눈을 빛내며 에리카의 소매를 붙잡고 이끌었다.
“저기서 사진 찍는 검미다!”
“어린애도 아니고.”
“22살이면 어린애지 뭠미까.”
둘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이펙트를 설정하던 진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뭠미까. 내 얼굴이 도자기보다 더 하얘졌슴미다.”
“그 맛이야.”
“에리카 언니는 별로 바뀐 게 없슴미다.”
“이 기계도 놀랐을걸.”
사진을 찍으려던 때, 에리카의 폰이 울렸다.
진소유나 민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진저도 그 이름을 보고 놀랐다.
“박 이사님한테 왜 연락 오는 검미까?”
“음, 글쎄.”
에리카가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에리카 씨, 일본 스케줄 때문에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매니저님이 안 받네요?]
“오늘은 휴일이라서요.”
[통화 가능하세요?]
“물론이죠. 썸이 1호신데요.”
[하하…… 그, 정호환 이사님 이야기 말인데요.]
아, 그 기사를 봤구나. 이 시각이면 기사가 뜰 때가 됐을 것이다.
정호환을 생각하자 에리카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다. 오랜만에 고국에 와서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유가…….]
“이유요…….”
기계가 어서 사진을 찍으라고 독촉했다.
진저는 리모콘을 초조하게 들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카메라를 향해 V를 그렸다.
“이유…….”
찰칵.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찰칵.
“꿈이죠. 정호환 이사님이 품어온 30년의 꿈.”
찰칵.
“부서졌어요. 아니, 누가 먼저 얻어내서, 이젠 발을 들일 자리가 없네요. 그게 더 맞는 표현이겠어요.”
찰칵.
“누구냐니…… 박 이사님답지 않으시게 짓궂으시네요. 아니면 승리를 만끽하고 싶으시다던가.”
찰칵.
“당연히, 박 이사님이죠.”
찰칵.
“정호환 이사님의 꿈을 부순 사람……. 축하드려요. 정호환 이사님이 생각하시기엔, 박 이사님이 승자셨던 것 같네요.”
찰칵.
사진 촬영이 끝났다. 진저는 ‘다 포즈가 같으면 어쩌잔 검미까…….’라며 작게 항변했다. 하지만 에리카는 사진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선전포고의 시간이니까.
과거 성필이 정호환을 향해 소녀연맹의 승리를 선언했듯이…….
‘이젠 내 차례.’
사라져버린 정호환을 향한 가장 화려한 진혼곡(……).
케이어스의 승리와 그의 명예를 복권하는 최초의 발걸음이 될 게 바로 이 순간이다.
에리카가 선언했다.
“하지만 저와 케이어스는 반드시…….”
[아, 너희들…….]
폰 너머 성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누군가 와서 폰을 입에서 멀리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에리카는 살짝 심술이 났다.
방금은 만화로 따지자면 아주 아주 중요해서 한 페이지가 모두 할당되어야 마땅할 장면이었다. 그런데 불청객 때문에 선전포고가 맥없이 끊겼다.
[감사합니다.]
돌연 성필이 감사를 전했다. 전화를 끊으리란 표시였다.
에리카는 ‘잠시만요’라며 그를 조금이라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중, 에, 다시…….]
성필의 목소리에서 짙게 풍기는 우울함에, 에리카는 감히 그를 잡지 못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란 말을 남기고, 성필이 끝끝내 전화를 먼저 끊었다.
에리카는 의문을 담아 전화가 끊긴 폰을 들여다보았다.
“박 이사님이 뭐라고 하셨슴미까?”
“……응, 정호환 이사님 이야기. 방금 기사 보셨던 거 같아.”
“그래서, 어떻다고 하심미까?”
“못 들었어. 중간에 일이 생기신 모양이야.”
“……그건 진짜임미까?”
“어떤 거?”
“정호환 이사님이 박 이사님 때문에 그만두셨다는 거. 그러니까, 저희가 소녀연맹보다 못해서…….”
정호환이 갑작스럽게 KS 엔터를 떠난 이유. 그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고 있는 건 그와 친했던 몇몇 이사들과 회장뿐이다.
그 외엔 정호환을 배웅했던 에리카와 PTR―17의 시온 정도일까.
하지만 그의 근처에 있는 이들은 정호환이 떠나간 이유를 어림잡아 추측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은퇴를 결정한 시기를 떠올린다면…….
“우리 때문임미까…….”
에리카가 진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 동작은 정말 ‘올린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높은 굽을 신은 진저는 에리카보다 키가 컸기에, 에리카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야만 했다.
진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에리카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투로 말했다.
“못하긴? 우리가 왜 소녀연맹보다 못해. 판매량을 봐, 진저.”
케이어스가 소녀연맹보다 높다.
“우린 항상 이겨왔고, 이제야 출발선 비슷한 곳에 함께 선 것뿐이야. 안 그래?”
“하지만 아까 에리카 언니가 박 이사님한테…….”
“‘정호환 이사님이 생각하시기에’.”
에리카의 어조는 단호했다.
“정호환 이사님이 떠나가신 이유는 착각 때문이야. 잘못된 이유이고, 그렇기에 우리 때문이 아니야. 정호환 이사님이 착각하셨을 뿐…….”
에리카가 진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곤 자신의 어깨로 당겼다. 그리하여 진저를 가볍게 안았다.
“그 착각을 바로잡아드려야지.”
드디어 소녀연맹과 케이어스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
현재 총괄 프로듀서가 된 윤희연 이사는 그마저도 못 견디는 듯했다. 이런 상황까지 끌고 온 KS 엔터와 그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었다.
같은 선에 서서 다음 경기를 치르는 것 자체가 문제…… 하지만 에리카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윤희연과 같은 마음이라 상심이 컸으나, 이젠 아니다.
‘같은 선에 섰으니, 드디어 공정한 판결을 받겠지.’
케이어스는 소녀연맹을 밥 먹듯이 이겨왔다. 그런데 그 승리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둘이 붙을 땐 항상 소녀연맹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갔었다.
막 사랑에 빠져선 남자친구의 없는 장점도 만들어서 사랑해주는 여자처럼, 사람들은 소녀연맹의 선방을 마치 승리처럼 떠벌렸다.
‘그런데 이젠 그것도 안 되겠지.’
아이돌의 성공에는 한계가 있다. 시장의 크기에서 비롯된 명확한 한계가.
아직은 그 한계가 밝혀지지 않았다. 걸그룹이 어디까지 팬덤을 확장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규모의 콘서트 투어를 돌 수 있을지 등등.
그 천장에 먼저 도달하는 자가 승리한다.
정호환이 없는 지금의 케이어스가 그게 가능할까? 그런 의문을 품고 싶진 않았다.
‘난 관성을 믿어.’
정호환이 남겨준 KS 엔터라는 유산. 그 유산이 발휘하는 관성을 믿는다.
KS 엔터의 시스템을 믿는다.
그리고 케이어스를.
“박 이사님도 슬프시겠슴미다.”
속으로 결의를 다지고 있자, 진저가 그리 말했다. 에리카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놓곤 무슨 뜻이냐며 바라보았다.
“정호환 이사님을 존경했잖슴미까.”
“음?”
에리카가 생각해보지 못한 방향이었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관계를 승부라는 틀 안에 가두어 사고하다 보니, 성필이 슬퍼하리란 데엔 생각이 가닿지 못했었다.
성필이 슬퍼한다, 라…….
‘나는 어떨까.’
만약 소녀연맹이 케이어스 때문에 해체한다면, 에리카의 마음은 어떨까.
“……그러게.”
슬플 것 같다.
* * *
정호환의 은퇴 기사를 본 후, 성필은 놀랄 정도로 아무런 동요를 겪지 않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사전 미팅을 순조롭게 마무리했고, 신인개발팀과의 회의와 업무 지시도, 카오틱 에너지에 관한 보고를 받는 것도, 전부 완벽하게 끝냈다.
리카와 신아름을 앞에 두고 좌절한 기색을 보였던 게 전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손혜빈은 그의 이상을 눈치챘다.
“한 이사님, 쟤 아무리 봐도 이상하거든요.”
“그렇습니까?”
퇴근 시각이 다가왔다.
소녀연맹의 앨범 활동이 순조롭게 마무리된 현재, 가로 엔터의 직원들도 정시 퇴근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퇴근 10분 전의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필은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니터만 보았다.
“굳이 이상한 짓을 안 해도, 충분히 이상할 이유가 있잖아요. 정호환 이사 은퇴요.”
“케이어스가 해체한 것도 아니고 정호환 이사님이 은퇴한 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큰일이죠. 성필이한테 정호환 이사님은 영웅이에요.”
“롤모델이란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한구인은 그럼에도 손혜빈의 추측이 미심쩍었다. 성필은 정호환을 반드시 꺾어야 하는 적처럼 여기곤 했으니 말이다.
몇 년 전의 일인데, 정호환과의 술자리를 가지고 온 성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환상이 깨졌다고 하셨지.’
아이돌의 아티스트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모양이다.
그에 정호환은 아이돌이 보이는 아티스트십은 그저 눈요기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게 꾸며진 것이고, 따라서 진실이 아니지만 아름답다고.
즉, 정호환이 무너진 건 성필에게 있어 딱히 나쁜 일은 아닐 터다.
‘박 이사님의 신념이 옳았다는 방증이니.’
그 외에도 성필은 몇 번 정도 공공연히 ‘정호환을 꺾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박 이사님께는 오히려 좋은 일 아닙니까? 에리카 씨는 정호환 이사님이 물러나신 게, 박 이사님께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
“그러니까 문제죠!”
손혜빈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동시에 손혜빈은 한구인의 어깨를 붙잡고 파티션 아래로 쏙 내려갔다. 혹여라도 성필이 볼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들리기 싫은 이야기면 다른 곳에 가도 괜찮지 않습니까. 굳이 사무실의 몇 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아무튼 쟤 저렇게 놔두면 안 돼요. 오늘 저랑 같이 붙잡고 한탄이라도 하게 해야 한다구요. 같이 술자리 만들어봐요.”
“그렇게까지…….”
이 정도면 그냥 손혜빈이 성필과 술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닌가 걱정됐다.
한구인이 미심쩍은 눈빛을 버리지 않자, 손혜빈은 답답하단 듯 이야기를 이었다.
“쟤 태도가 저 회사 떠난다고 했을 때랑 비슷하다고요.”
“아, 그러고 보니 박 이사님이 처음 맡은 아티스트가 손 이사님이셨군요. 손 이사님이 회사를 나간다고 하셨을 때 박 이사님이 저러셨습니까?”
“네. 겉으로는 괜찮다가 나중에 터져요. 왜, 최근에도 자아 찾기 여행 같은 거 떠났었잖아요? 옐로 서브마린 엔터 인수 건으로 바쁜데 말예요.”
그땐 한구인도 당황했었다.
갑자기 연차를 죄다 때려 박고 무슨 여행을 간다고 하니, 솔직히 성필의 멱살을 잡고 싶기도 했었고 말이다.
덕분에 무슨 오피스물 드라마 같은 짓거리도 할 수 있게 됐다지만, 아무튼.
“확실히, 그런 리스크가 있다면 미리 들어보는 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한 이사님이 권해보세요.”
“제가 말입니까?”
“제가 뭐 하자고 하면 또 으레 술 마시자는 건 줄 알고 거절할 수도 있어요. 근데 한 이사님이 술 먹자고 하는 건 진짜 큰일이잖아요.”
“저희 자주 같이 술 먹습니다만…….”
“네?”
손혜빈이 놀랐다.
둘이 그런 기미가 있었나?
“달에 두세 번쯤 집에 모여서 영화 보면서 술을 마십니다.”
“둘이서만요?”
“예.”
“아니, 뭐 하는데요 둘이?”
“영화 보면서 술 마신다고 했잖습니까.”
“아, 그래요…….”
“이상합니까?”
“……아뇨, 이상하긴요. 근데 진짜 영화만 봐요?”
한구인이 의아하단 기색을 보이자 손혜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암튼 부탁드립니다.”
“예.”
한구인은 파티션 아래에 숨어 있던 몸을 일으켜 성필에게 다가갔다. 손혜빈은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조마조마 지켜보았다.
다행히 성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과거 손혜빈이 회사를 떠난다고 했을 때, 성필은 일에 미친 사람이 됐었다.
당시의 손혜빈은 ‘내가 나가고 나서 제대로 자리 잡으려고 열심히 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나갈 때가 오니, 성필이 정상이 아니었단 게 밝혀졌었다.
물론 현재의 성필은 그때와는 달랐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는 비슷했다.
‘에리카랑 통화하고 난 이후부터였지.’
처음 정호환의 은퇴 기사를 보았을 때, 성필은 ‘응? 어? 으응? 어?’ 같은 이상한 소리만 내뱉었었다.
그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에리카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선 세상 다 포기할 것처럼 굴었었다. 그 뒤로 좋아지긴 했다지만, 손혜빈은 고작 몇 분 만에 성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호환 이사가 은퇴한 게 성필이 때문이라고?’
에리카가 그리 말했다고 들었다.
성필이 정호환의 꿈을 부숴버렸다고.
당연히, 손혜빈은 그딴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스포츠 선수가 경기에서 한 번 졌다고 은퇴하면, 그게 그 선수를 꺾은 자의 잘못인가?
성필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손혜빈은 그가 20대 초반일 때부터 지켜봐 왔고, 그래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안다.
‘성필이는 에리카가 한 말을 순화해서 우리한테 전해준 거겠지.’
손혜빈이 이를 까득 물었다.
에리카 그년, 대체 뭐라고 지껄였으면 성필이 저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자기네 프로듀서가 사라진 탓을 성필에게 돌려? 물론 소중했던 프로듀서가 갑자기 가버렸으니 분하겠지, 슬프겠지, 화가 나겠지.
근데 그 화풀이를 엄한 성필에게 해? 아무런 사려도 없이 ‘너 때문에 정호환 이사님이 가버린 거야(손혜빈의 추측)!’라고 지껄여?
어처구니가 없다.
배려심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러니, 오늘 손혜빈은 성필을 위로하고자 한다. 마음씨 착한 성필이 스스로를 탓하지 않도록.
“에이.”
셋이서 함께 퇴근하려 사무실을 나서는 길, 성필이 겸연쩍게 말했다.
“나 뭐 기분 안 좋은 티라도 냈어? 웬일이래, 누나가 한 이사님까지 끌고 나랑 술 마시자고 하고.”
“티를 내야 아냐.”
“티는 안 났습니다. 그런데 손 이사님은 박 이사님께서 뭔가를 보신 모양입니다.”
“그래요?”
성필이 손혜빈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혜빈은 그럴수록 성필이 불쌍해 보였다. 괜히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1층 홀로 내려오자 리카와 신아름이 보였다. 그녀들은 휴게 공간의 소파에서 일어나 세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아마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신아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 분이서 어디 가세요?”
“응.”
손혜빈이 성필의 머리칼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아 나 애 아니라고.”
“얘가 계속 우울한 티를 내잖아.”
“에리쨩한테 들은 말 때문에요……?”
에리카와의 통화를 끝내고 성필이 보인 반응은 짧았지만 굵었다.
‘아…….’
‘왜…….’
‘어째서…….’
‘……게…… 아닐 텐데…….’
왜 그러냐고 리카가 물었었다.
성필은 계속 바닥을 보며 말했었다.
‘내가, 정호환 이사님의 꿈을, 부쉈대.’
누가 그래요?
‘에리카 씨…….’
거기까지 말한 성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주변을 향해 미소를 보였었다. 거기까지였다. 성필이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건.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두가 걱정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팀장님, 그 말 믿는 건 아니죠?”
성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닫았다.
대신 입꼬리만 올렸다. 눈은 웃지 않았다.
“그럼, 알지.”
그리 답할 뿐이었다.
세 사람은 리카와 신아름을 남겨두고 회사를 나섰다. 아마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리라.
“박 이사님한테…….”
리카는 성필에게 슬픔이 전염되기라도 했는지 눈썹을 우울하게 늘어뜨렸다.
“정호환 이사님은 큰 의미잖아. 아이돌이야. 그런데 박 이사님 때문에 은퇴하셨단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상심할 만도…… 아름이 누구한테 전화해?”
“에리카 그 씨(검열).”
* * *
“우리는 홍백가합전 같은 곳에 못 나가?”
김민주가 묻자 에리카는 꽤 오래 고민했다.
“아마.”
“얼마나 유명해야 해?”
“수치적으로는 모르겠네.”
에리카는 기타의 줄을 민감하게 조율했다.
“근데 케이팝 아이돌이 나간 적은 손에 꼽아.”
“뭐, 기사들 보면 케이팝 아이돌들 차트 10위에 자주 들잖아? 그 정도면 일본에서도 유명하니까 나가기 충분한 거 아냐? 아님 나라 차별?”
“민주야.”
에리카는 조율을 끝내고 기타 줄을 유려하게 튕겼다. 순식간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만들어졌다.
“1년은 365일이야. 일간 차트 10위권 안에 드는 노래가 중복해서 3,650개란 뜻이고. 하루 이틀 10위권에 있어봤자 그게 유명하단 뜻은 아니지. 홍백가합전에 나오는 뮤지션은 수십 명이잖니. 그 안에 들려면 네가 말했듯이 ‘어느 정도 유명’해선 안 돼.”
“그럼 소녀연맹은 엄청 많이 유명한 거네?”
“엄청 많이 유명하지. ‘애플 크러쉬’가 연간 앨범 차트…… 4위였나. 거기까지 올랐으면, 그래, 엄청 엄청 유명했던 거야.”
“그러냐.”
김민주는 에리카를 구경하다 지쳤는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몸이 지친 게 아니라 마음이 지친 것이었다.
김민주가 바닥을 손바닥으로 쿵쿵 두드렸다.
“이놈의 호텔 생활은 언제 끝나냐. 어디 가면 이런 무미건조한 데에 갇혀 있는 거 진짜 싫다.”
케이어스는 일본 활동 때문에 앞으로 몇 주 정도 계속 호텔에 있을 것이었다.
나름 KS 엔터의 영업력을 발휘하여 여러 스케줄을 딴 덕이었다. 게다가 앨범을 내면 일본에서 몇만 장씩 계속 팔리고 있으니, 케이어스는 유명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결국 케이팝 아이돌 중 유명한 것이다. 일본 대중에게 다가갈 정도는 아니었다.
케이팝 장르 안에서만 유명할 뿐. 아는 사람만 아는 아티스트란 뜻이다.
“다키스트 선배님들은 일본에서 제일 인기 많았다고 했잖아. 우린 왜 그렇게 안 되지?”
“글쎄. 그걸 알면 우리가 프로듀서겠지.”
크흠.
에리카가 헛기침했다. 김민주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크흠!
에리카가 다시 헛기침하자 김민주는 어쩔 수 없단 듯 몸을 일으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해봐.”
“잘 들어줘. 좋은지 아닌지 확실히 말해줘야 해.”
에리카가 연주를 시작했다.
귀를 확 사로잡는 기타 리프다. 리프가 시작된 지 5초 후, 바로 에리카가 노래했다.
케이어스의 곡을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R&B 느낌의 끈적하고 여운이 남는 목소리.
“넌 묘해 오 예, 아 예.”
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김민주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객관적으로 에리카의 저 자작곡은 좋았다. 다만 계속 들으니 질릴 뿐이다.
저 자작곡의 제목은 ‘블루 와이셔츠’였다. 그리고 저 곡의 주제는 김민주가 판단하기로 블루 와이셔츠 패티시다.
곡 내내 어떤 남자가 입은 블루 와이셔츠를 찬양하는데, 매번 들려줄 때마다 그 찬양하는 표현이 달라졌다.
김민주가 너무너무 좋다면서 발로 박수를 쳐도, 에리카는 계속 가사와 멜로디를 바꾸어갔다.
“반쯤 걷은 소매가 그 위를 상상하게 해. 베일, 베일, 널 가린 파란 베일. 바닷속에 잠긴, 무심히 풀어헤친 목깃에―.”
저 파란색 와이셔츠 패티시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곡은 좋다.
들려줄 때마다 가사와 곡이 미묘하게 달라지긴 하지만, ‘블루 와이셔츠’를 듣는 게 100번쯤 되지 않았다면 김민주도 이렇게 심드렁하진 않았을 것이다.
“맞아 이건 네 이야기야, 네 얘기―.”
김민주는 솔직히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알고 싶지 않은 친구의 성적 취향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으니까.
걷은 소매에 드러난 불룩 솟은 전완근이 어쩌니, 가슴 부분에 팽팽하게 가로로 당겨진 주름이 어떻니, 파란색의 천이 바다가 드리운 베일 같아 안을 보고 싶다느니 뭐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을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걸 읽은 듯한 기분이 든다.
“너의 그, 너의 그, 너의 그, 블루 와이셔츠.”
노래를 끝낸 에리카가 김민주를 흘끗한다. 김민주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발로 박수를 쳤다.
“불후의 명곡이다. 대단하다 우리 에리카!”
“아직은 부족해. 강동현 피디님이랑 더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도입부는 기타보다 신디가 나을…….”
“그래서 누군데?”
“응?”
“야, 이런 기사가 그냥 튀어나올 린 없잖아. 뭐 야동을 봤더니 배우가 파란 와이셔츠 입은 거에 꽂혔다, 이건 아닐 테고.”
“누구냐니?”
에리카가 시침을 뚝 떼자 김민주가 은근한 투로 물었다.
“주인공이 있을 거잖아 주인공이.”
“아…… 딱히? 남자분들 오피스룩의 기본이 와이셔츠잖아. 난 그냥 그 복장이 좋아. 너도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 정도는 있잖아.”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모처럼 얘기 나왔으니까, 민주는 좋아하는 복장 있어?”
“수영복.”
“너무 적나라하잖아…….”
“그래서 누구냐고오.”
김민주가 팔을 붙잡고 흔들자 에리카가 피식 웃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파란 바다 안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 남자가 누군데에.”
“아니라니까.”
“무심히 풀어헤친 목깃으로 우리 에리카 마음을 뺏어간 그 새끼가 대체 누군데에.”
“쓰읍, 자꾸 그럴래?”
“우리끼린데 말해줘도 되…….”
그때 김민주의 폰이 울렸다.
김민주는 폰에 떠오른 이름을 보곤 반갑게 손에 들었다.
“어, 웬일이…….”
반가움이 가득했던 김민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녀는 에리카를 곁눈질하더니 그녀에게 폰을 넘겼다.
에리카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 누구신데?”
“아름이…….”
신아름.
에리카는 트라우마가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성필이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 출연했을 때…….
‘에이, 설마 이번에도 그렇겠어. 그, 그리고 난 이번엔 잘못한 게 없잖아.’
에리카는 용기를 내어 폰을 받아들였다.
“여보세요? 아름 씨?”
[네 프로듀서가 도망간 게 왜 우리 팀장님 때문인데 이 씨(검열).]
에리카는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