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16화 (716/760)

716화

“야, 신아름.”

신아름은 안대를 벗고 문을 보았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조아라가 맥주캔을 흔드는 중이었다.

신아름이 습관처럼 틱틱댔다.

“이 밤에 술 먹자고? 너도 참 가지가지 한다. 미주 투어가 지척인데 살찌면 어쩌려고.”

“나만 먹어.”

“그럼 뭔데. 네 술주정 들어달라고?”

“뭐, 그러든가.”

“참나…….”

그러면서도 신아름은 이불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이대로 누워 있어도 아침까지 한숨도 못 잘 게 확실했다.

신아름은 조아라의 뒤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에.”

침대에 앉아 있는 리카가 보였다.

신아름의 심장이 철렁했다.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빠졌지만, 그 이상으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뭐 해? 내 술주정 들어준다면서?”

조아라가 신아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것마저 무의식적으로 떨쳐내려고 했지만, 조아라가 쥔 힘이 더 강해져서 그럴 수 없었다.

그보다 더한 힘은 조아라의 눈이었다.

가게 두지 않겠단 것처럼 올곧게 신아름을 향했다. 그 시선을 피하며, 신아름은 버티고 있던 다리 힘을 뺐다.

문이 닫히고, 결국 한 방에 신아름과 리카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조아라는 리카의 곁에 폭 앉았다. 그녀는 맥주캔을 바닥에 두며 자신의 옆을 손으로 두드렸다.

신아름이 조아라의 옆 대신 책상 쪽 의자로 가려고 하자.

“이리 와.”

조아라가 말했다. 부드러우나 강압적이었다.

신아름은 몇 초간 서 있다가, 어쩔 수 없단 티를 내며 조아라의 옆에 앉았다.

조아라가 중앙에, 양옆에 리카와 신아름이 앉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기분 나쁜 침묵이 흘렀다.

‘화해…….’

화해해야 한다.

신아름은 침대에 누워 화해 생각만 했다. 그녀 본인도 화해의 필요성을 느꼈고, 성필이 그러라고 했으니, 해야만 했다.

사실 오늘 회의가 끝나자마자 리카를 불러 하려고 했다. 하지만, ‘리카’라고 한마디 떼는 게 얼마나 어렵던지.

누가 입에 마개를 씌워놔도 그보다는 더 입을 떼는 게 쉬울 듯했다.

리카가 눈에 보일 때마다 말을 걸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신아름은 자신의 왼손에서 온기를 느꼈다. 조아라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반대 손으로는 리카의 손을 잡았다.

“있잖아.”

조아라의 발아래에 놓인 맥주캔이 서늘한 냉기를 뿜어냈다. 자신을 마셔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이 보기에도 차가웠으나, 조아라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조아라는 양손에 친구들의 손을 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해 의자 기억하냐?”

기억한다.

소녀연맹이 숙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성필이 직접 한구인과 시연까지 해주었었다.

둘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손을 맞잡더니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했더랬다.

그리고 서로 싸우면 반드시 손을 잡고 이야기하며 화해하라고 했었다. 보기엔 웃기지만 반드시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원랜 너희 둘이 손잡게 하려고 했는데, 될 거 같지가 않아서 내가 대신했어. 뭐, 괜찮지?”

신아름과 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아라의 손이 전해주는 온기를 더욱 명확하게 느끼게 됐을 따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영화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수정할 수 없어. 그렇게 결정된 거야. 뭐, 액션 영화…… 예를 들어 ‘어벤져스’ 같은 거 있잖아. 꼭 팬들이 싸우거든. 누가 낫다, 누가 더 대단하다, 이 싸움에서 이긴 건 누구 덕분이다, 누구 지분이 더 크다…….”

자타공인 액션 영화 매니아답게 조아라는 예시도 영화로 들었다. 그런데도 전혀 웃기지 않았다.

“근데 실제로 지분을 따질 수 없지. 마지막 싸움에서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졌을 거잖아. 리카가 싫어하는 호크아이도…….”

“싫어하는 건 아닌데…….”

리카가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신아름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반가웠다.

조아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리카가 싫어하는 건 아닌 호크아이도 꼭 필요한 인물이고. 어벤져스는 팀이야. 누가 빠지면 어벤져스가 아니잖아. 지분 따위를 따질 수 없어. 이미 만들어진 거야. 한 편의 완결된 영화에선 단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어벤져스는 승리할 수 없었어.”

유치한 비유라고, 신아름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비유는 유치하고 직설적인 만큼 신아름의 가슴에 깊이 박혀 들었다.

“누군가를 빼는 순간 승리할 수 없다면, 거기서 지분을 나누는 의미가 없잖아. 모두에게 저마다의 자리와 역할이 있었고, 승리로 달려 나가는 길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었어. 첫 번째, 두 번째…….”

조아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지. 물론 아닐 수도 있어. 영화 속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지 당연히. 퓨리 국장이…….”

“저 아라쨩,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주면…….”

“비유 때문에 웃겨서 집중이 안 돼.”

리카와 신아름이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둘은 순간적으로 서로의 눈을 보았다.

바로 피했지만, 서로를 향한 눈빛은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신아름은 또다시 기뻐졌다.

“너희들은 너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아름은 아까 리카와 눈이 맞은 것만으로 가슴에 차올랐던 기쁨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보다 훨씬 감정적 변화가 컸던지, 리카는 아예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너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말은 마치 바늘과 같았다. 둘의 마음을 쑤신다.

서로를 향해 드러냈던 날 선 비난보다, 제삼자를 통해 듣는 이야기가 훨씬 더 아팠다.

“아, 아라쨩 난…….”

“조아라 그거 내가 했던 말은…….”

또 둘의 말이 겹쳤다.

그럼으로써 생겨난 공백에 조아라가 끼어들었다.

“너흴 욕하는 거 아니야. 진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팀게임에도 스타 플레이어가 있잖아. 수비수랑 미드필더 없인 골도 못 넣었을 거지만, 스트라이커는 항상 뻗대잖아. 내심 자기가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조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그만한 자신감 없이 어떻게 아이돌이 되겠냐?”

성필이 말한 적 있다.

아이돌은 수십만 명이 자신을 사랑할 거란 과대망상이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그런 비대한 자기애를 소유한 사람이,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물론.”

조아라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우리는 더 이상, 너희들이 했던 말을 듣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겠지. 너희가 실언이었다고 해도, 그리고 나랑 언니들이 믿는다고 해도, 계속 남아 있을 거야. 어느 때 어느 순간에 무의식 속에서 나와 이렇게 속삭일지도 몰라.”

쟤는 너를 깔보고 있어.

네가 자기보다 밑이라고 생각해.

“프로듀싱의 기획 의도에서 예외를 둬줄 정도로 특별한, 아저씨가 첫 번째로 데려온 리카.”

조아라가 리카를 바라보았다.

리카는 감히 조아라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바닥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저씨가 누구보다 아이돌이 되길 바랐던 신아름?”

조아라가 신아름을 바라보았다.

신아름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였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표정은 리카보다 못하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짜리몽땅 얼굴도 제일 못생기고 노래도 더럽게 못 부르는 좆밥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 아니야!”

리카가 발작하듯 부정했다.

“그래도 내가 괜찮다고 한다면, 믿어줄래?”

리카가 입을 뚝 다물었다.

“너희가 우릴 어떻게 생각하든, 난 딱히 너희를 미워할 생각 없어. 미워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기엔, 나한테 소녀연맹이 너무 소중하거든. 너무 비굴한 거 같기도 한데…… 비굴해질 정도로 소중해. 그러니까 옛날로는 못 돌아가도, 아예 원수지고 싶진 않아. 나를 봐서…… 적어도…….”

조아라의 목소리에 떨림이 더해졌다. 그녀가 울먹임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언니들이랑…… 회사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원래처럼…….”

리카는 울음과 동시에 사과하려고 했다. 조아라와 신아름에게.

하지만 그보다 더 빨랐다.

“그런 부탁할 필요 없어.”

신아름이었다.

그녀의 뺨으로 눈물을 한 방울 타고 내려와 턱에 맺혔다. 울고 있으면서도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평소와 같았다.

“내가 했던 말 다 거짓말이야. 나도, 나도 알아……. 나 진짜 병신같지……?”

신아름은 넋 나간 것처럼 짧고 힘없게 웃었다.

“팀장님 말씀이 맞아……. 내가 팀장님 앞에서 리카한테 내가 제일 특별하다고 말한 건…… 팀장님이 아무 말도 못 할 거란 걸 알아서야…….”

신아름이 ‘내가 제일 특별하다’고 말했을 때, 성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걸 노렸다.

성필이 침묵을 지키는 게 리카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바랐다.

“간접적으로나마, 그렇게라도, 팀장님한테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나 같은 병신년이 최고일 리 없잖아…….”

신아름도 안다.

자신이 모두와 비교해 나을 게 없으며, 나을 게 없는 걸 넘어서 아예 하등하단 것을 안다.

“난 팀장님이 바라는 걸 이뤄줄 능력이 없어……. 그것만이면 괜찮게……? 너희랑 언니들보다 나은 게 없어서……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겨 먹으려고나 하고…….”

신아름의 턱에 눈물이 점점 더 많이 맺혀갔다. 종유석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그건 몇 방울이 모인 순간 규칙적으로 땅으로 떨어졌다.

“미안해 얘들아…… 나같이 아픈 년이랑 같이 지내는 게…… 힘들지……. 알아…… 나도 내가 병신인 거 알아…… 미안해 진짜…….”

신아름이 등을 굽히고 얼굴을 땅과 마주하게 했다. 자신이 떨어뜨린 눈물 몇 방울이 선명히 들어오자, 그녀가 서럽게 눈을 감았다.

“근데, 가진 것도 없는 쓰레기인데 나한텐 팀장님이 전부라서어……. 버티기가 힘들어……. 미안, 미안해, 리카…….”

질투했어.

신아름은 그리 말했다.

“나한테 없는 걸 전부 가진 네가 너무너무 부러워서 죽을 거 같아서, 흠집이라도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신아름이 끅끅댔다.

“다 거짓말이었어……. 아, 이젠 알겠다. 악플 쓰는 사람들이 무슨 마음인지……. 자기가 초라하고 열등하단 걸…… 남을 깎아서라도 보상받고 싶어서야…….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불쌍한 사람들……. 남을 상처입히는 것밖에…… 자존감을 채울 방법이 존재하지 않은 거야…….”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족속들.

자신이 그들과 같단 걸 알게 되니, 신아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은 저열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이런 게 무슨 최고의 아이돌…… 팀장님의 꿈이 된다고……. 최소한 이보단 나은 인간이어야 할 텐데…….”

인간이 거짓을 좋아하는 건 본능이다. 진실된 자신을 직시하고 버틸 수 있는 인간 따위 존재하지 않기에.

신이 없음을 선언하고 자기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오만한 족속.

그런데 어떤 신이 이렇게 추악하고, 거짓말을 일삼고, 정신이 나약하고, 또, 친구를 상처입히는가.

스스로를 직시하는 건 도미노의 처음이었다.

한 번 쓰러지기 시작하면 막을 수 없다. 그 끝에 남을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무너짐은 가속한다.

“애초에 난 아이돌 같은 건 돼선 안 됐…….”

“지가우(틀려)!”

어느새 앞에 다가온 리카가 신아름을 와락 안았다.

“어벤져스잖아, 우리는!”

그건 쓰러지던 도미노의 중간, 쓰러지지 않고 버틴 하나의 블록이었다. 톡, 분명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누군가가 블록을 붙잡았다.

“나는, 아타시(나)는, 항상 아름이를 보면서 버텼어!”

“어……?”

“아름이는 내 희망이야!”

“무슨…….”

“다키스트처럼…… 내가 다키스트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

성필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룹이 있다.

그 그룹의 이름은 다키스트라고 한다.

숨이 넘어갈 퍼포먼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몇 년이 흘러서도 결코 옛것이 되지 않는 자들.

몰락한 아이돌계를 부활시켜 2세대의 막을 연 전설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케이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이돌.

“나랑 같은 사람인 아름이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나랑 같이 연습생으로 지냈고, 같이 자고 먹었고, 같은 그룹인 아름이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처음엔 안 된다.

신아름처럼 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아름도 리카와 같은 인간이다. 그녀가 할 수 있다면 리카도 해낼 수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아니’로 데뷔할 때, ‘롱 포’로 컴백할 때, ‘아라베스크’도, ‘애플 크러쉬’도, ‘오토마타’도, ‘송 포 피플’도.

무대에 서고 앨범 활동기가 끝나고서도, 리카는 절대 연습을 그만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름이가 있으니까!”

자신보다 훨씬 나은 인간, 신아름이 있으니까.

그녀가 도달한 곳을 보고 리카는 알게 된다. 방송에서 볼 땐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퍼포먼스이지만, 노력하면 저곳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완벽을 바라는 사람의 손에서 태어났잖아…….”

다키스트를 선망하는 인간에게서 소녀연맹이란 이름을 얻고 세상에 태어났다.

신이 바라는 닮은꼴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그들의 퍼포먼스를 볼 때마다, 솔직히 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든다.

“아름이가 없었으면 난 이미 포기했을 거야! 근데 포기 안 했어! 아름이가 할 수 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 계속, 계속, 난 아름이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갔던 거야……! 나도, 나도……!”

리카가 신아름을 꼬옥 껴안았다.

“거짓말이었어! 내가 항상 뒤따라가던 아름이…… 박 이사님이 가장 아끼는…… 다키스트의 가장 완벽한 닮은꼴……. 그런 아름이를 부정할 수가 없어서, 깎아내리고 싶었어! 그거밖에 나를 보호할 방법이 없어서……!”

무너져가던 도미노의 블록을 붙잡은 손. 그 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그리고 그 손은 쓰러진 도미노를 다시 세우기 시작한다.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걸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서로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거……. 그러니까, 서로 기대고 서자…….”

신아름의 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리카의 등을 감쌌다. 그대로 안았다.

리카는 그 온기를 느끼며 절박하게 외쳤다.

“난 아이언맨 슈트가 있고 아름이는 비브라늄 방패가 있으니까!”

“그 비유 쓰게? 분위기 다 깬다.”

“그리고 아라쨩은 호크아이 활이 있어!”

“뒈질래?”

“미안…….”

신아름이 흐느꼈다.

“미안해, 얘들아…….”

둘은 서로에게 했던 말을 거짓말이라고 했다.

진짜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진짜가 됐다. 거짓말은 모두가 믿는 순간부터 거짓이 아니게 되니.

서로가 서로를 동경한다는 달콤한 거짓말을, 둘은 진실로 믿기로 했다. 불완전할 과거로 돌아가는 대신 앞을 모르는 미래로 나아가기로.

“나도 마찬가지야, 리카 널 보면서 버텼어…….”

신아름이 리카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네가, 아티스트가 됐으니까…….”

나도 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꼭.

“너를 보며, 버틸게…….”

“……응.”

리카는 신아름의 머리에 뺨을 가져갔다.

“서로 무너지지 말기야!”

셋의 발밑에 놓인 맥주 한 캔. 끝끝내 위로할 주인을 맞이하지 못한 맥주 한 캔이, 셋의 발 근처에서 식어버린 물기를 머금었다.

* * *

새벽.

장하양은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 옆에는 가방이 있었다.

그 가방에서 5인분 도시락을 꺼내 가져와 다시 문을 닫았다. 그녀는 주방으로 와서 하품을 하며 도시락을 차례로 데우기 시작했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건조한 소음 속에서, 장하양은 팔짱을 끼며 기다렸다.

다섯 개가 모두 돌아갔다.

백설하의 자리에는 가장 마지막에 데운 도시락을,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는 가장 먼저 데운 도시락을 두었다.

커피까지 각자의 자리에 둔 후.

“식사 시가안!”

장하양이 외쳤다.

방 안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1분도 되지 않아 동생 라인이 비척비척 식탁으로 걸어왔다.

그에 비해 백설하는 얼굴에 총명함이 감돌았다. 자리에 각 잡고 앉은 그녀는 바로 옆의 장하양에게 눈짓했다.

‘하양아, 준비됐지?’

‘모찌론(당연).’

둘은 어제 계획을 세웠다.

한구인에게 배우기로, 혐오와 증오는 접촉하지 않을수록 증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 혐오는 외국인과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미움을 품은 채 관계를 단절해버리면 혐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스스로의 기준으로 상대를 자꾸만 악하게 바꾸게 되겠지.

“먹자.”

“잘 먹겠습니다.”

백설하를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메뉴는 아침답게 간단한 것들이었다. 매쉬 포테이토, 삶은 달걀, 샐러드, 과일, 그리고 커피.

부담되지 않는 것들이라 입에도 술술 들어갔다.

“크흠.”

백설하가 헛기침했다.

동생 라인이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얘들아. 아니, 리카랑 아름이.”

“하이(네).”

“네.”

“너희들 싸운 거 알아. 어떤 말로 싸운 건지도 알고. 아, 뭐, 어, 어제 말했으니까 알겠지만. 계속 어제처럼 있을 순 없잖아?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같이 있을 땐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자. 억지스러운 거라도 좋아.”

리카와 신아름은 백설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백설하는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또, 그, 마지막으로, 서로 눈이 마주치면 꼭 ‘안녕’ 인사하기로. 알겠지?”

대답이 없었다.

두 동생의 응시에 백설하가 반사적으로 역정을 냈다.

“알겠냐고?!”

“…….”

“…….”

리카와 신아름이 답도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백설하는 허파가 뒤집히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 그래. 결국 피를 봐야겠다 이거지?”

“리카.”

그때 신아름이 밥 먹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걸 보고 백설하는 인지부조화에 빠졌다. 신아름의 표정이며 말투며 싸우기 전 옛날과 다른 게 없었으니까.

신아름은 매쉬 포테이토를 숟가락으로 뜨며 말했다.

“날이 참 좋지?”

리카는 고개를 돌려 거실과 연결된 배란다 통유리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절호의 여름 날씨였다. 벌써부터 땀이 흐르는 것만 같다.

“소다네(그렇네).”

“오늘 사전 미팅 빨리 끝날 거 같으니까, 끝나면 피크닉이라도 갈까?”

“응, 좋아!”

백설하가 어벙하게 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장하양을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보란 듯했으나, 장하양이라고 답이 있을 리 없다.

하루 만에 둘이 화해했다고?

어떻게?

“언니들도 가죠?”

“으헤? 에, 어, 으, 으응…….”

“한강이야?”

“하양 언니는 뭐만 하면 한강이래. 그렇게 한강 공원이 좋아요?”

“응, 좋아.”

“야 신아름, 난 안 물어보냐?”

“호크아이 활은 오든가 말든가.”

“호크아이도 아니고 호크아이 활?!”

신아름과 리카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아라는 씩씩대다가, 둘이 웃는 것을 보고 함께 웃었다.

“에헤헤.”

“언니는 왜 웃으세요.”

“아, 아니, 웃기잖아…….”

아무튼, 백설하와 장하양도 웃었다.

* * *

밴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유리창으로 본 햇볕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신아름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때 리카가 팔짱을 껴왔다.

“아 뭐 해. 더워.”

“더워도 버텨! 박 이사님을 안심시켜야 해!”

“너무 보여주기식 아니야?”

“보여주기식이면 어때서! 싫으면 관둬!”

리카가 흥 팔짱을 풀자 신아름이 다시 잡았다.

“팀장님 안심시켜주기는 중대 사항이지.”

둘은 소풍이라도 온 듯 천천히 가로 엔터 현관으로 걸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리카는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그냐앙, 좋아서!”

“……나도.”

“앗, 아름이 귀여워!”

“진짜야, 좋아.”

“에, 혹시, 고백?! 아라쨩한텐 730번이나 해도 안 넘어왔는데 아름이가 넘어왔어! 역시 친구를 먼저 공략하라는 말이 맞구나! 쌤, 보셨죠!”

“왜, 왜 나한테…….”

앞서가던 백설하가 울상을 지었다. 아직까지 동생들한테 연애에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속상한 듯했다.

물론 연애 관련 아이튜브 영상을 매일같이 찾아보긴 하지만, 로맨스 드라마에 빠져 있긴 하지만, 로맨스 영화와 소설도 많이 보긴 하지만.

그렇게 연애에 미친 건 아니다.

신아름이 기분 좋게 코웃음을 흘렸다.

“어젯밤에, 조아라가 우리 부르기 전에 있잖아. 너랑 평생 얘기 못 하고 살면 어쩌지, 그런 걱정도 했어.”

“에, 진짜? 어떻게 나랑 한마디도 안 하고 살아! 나의 카와이함을 보면 그건 불가능해!”

“그러게, 어제 고민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지네.”

현관 앞에 다다랐다.

들어가기 전, 신아름은 시간을 확인한 후 말했다.

“팀장님 부르러 갈래?”

“아직 20분 남았는데?”

“에이, 우리 일찍 보면 팀장님도 좋지.”

“마아(뭐어), 박 이사님도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 빨리 우리가 짱친이 됐단 걸 보여드리자!”

“잠시만요, 호크아이 화살 지나갑니다.”

조아라가 기다리다 못해 둘을 지나쳤다.

신아름과 리카는 정답게 팔짱을 끼고 2층의 사무실로 향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은 후,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리카가 활기차게 외치면서 사무실에 들어갔다.

성필이 바로 눈에 띄었다.

그의 곁엔 민경섭이 있었고, 둘 모두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박 이사님, 이거 보세요!”

리카가 과시하듯 신아름과 낀 팔짱을 가리켰다.

그런데 성필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리카와 신아름은 이상하게 여겨 성필 대신 민경섭을 보았다. 민경섭의 얼굴은 곤혹을 담고 있었다.

둘이 천천히 성필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성필은 정신을 차린 듯 퍼뜩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너희들…….”

성필은 리카와 신아름이 팔짱을 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극적인 반응은 없었다.

그는 손에 든 폰을 보더니, 폰 안을 향해 짧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중, 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통화를 끝내고 성필이 둘에게로 의자를 돌렸다.

“아, 그래, 사전 미팅 시간이구나. 갈까?”

“팀장님……?”

“이사님……?”

리카와 신아름은 성필의 이상 행동을 걱정스럽게 여겼다. 누가 보아도 그는 이상했다.

그에게 몇 걸음 더 다가갔을 때, 모니터에 뜬 글자가 보였다.

[KS 엔터 정호환 프로듀싱 총괄 이사, 돌연 퇴임 발표. 후임 총괄은 윤희연 이사…….]

“가자.”

성필은 의자의 팔걸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쯤 일어났을 때, 그는 힘이 빠졌는지 털썩 나앉았다.

“아.”

당황스럽고, 또 허망한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신음이었다.

“아…….”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성필은 팔걸이를 짚은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왜…….”

답해줄 자 없는 질문이 사무실에 퍼졌다.

“어째서…….”

이런 미래를 바란 게 아닌데.

이런 걸 보기 위해서.

“돌아온 게…… 아닐 텐데…….”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온 게,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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