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리카는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라고 말한 직후 흠칫했다. 그리고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죄, 죄송합니다.”
일본어를 쓰는 게 상황에 맞지 않게 경박하다고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만도 했다.
성필은 물론이고 몇몇 가로 엔터 직원들은 장난스럽게 리카의 일본어를 흉내 내곤 했으니까.
그걸 볼 때마다 리카가 ‘인종차별이에요!’라고 외치는 게 웃음 포인트이긴 했다.
그렇기에, 일본어는 리카의 모국어라 가장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외국어를 써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고작 십수 분 만에 모든 감정을 정리하기라도 한 것일까.
성필은 리카가 아주 약간이라도 억울함을 표할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먼저 공격한 건 신아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신이 성필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이다, 라고. 신아름은 그리 말했었다.
남이 들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아름은 그 말이 리카에게 유효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단 걸 알았다.
‘당연히 알지.’
성필처럼, 신아름도 리카와 몇 년을 함께 지냈으니 말이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아름이가 아까 했던 말로 미루어보면, 아름이는 억울했던 거겠지.’
신아름은 성필이 백설하, 조아라, 장하양을 더 애정하는 건 이해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신아름의 기준으로 아무것도 이룬 적 없는, 그리고 그녀의 표현으로 아무것도 아닌 리카가 더 큰 애정의 대상이 되는 건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 상황은 신아름의 기준으로 불합리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래서 리카를 공격했다…….
공격이란 단어가 과한 것일까?
‘아니.’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의 공격성은 남녀에게서 차이가 있다.
남성의 공격성은 물리적으로 발현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여성의 공격성은 사회적으로 발현될 확률이 높다.
사회적으로 공격성이 발현된단 건 언어적 행위를 포함한다.
신아름은 리카를 공격했다. 그녀의 마음을 찢어발기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왜?
‘불합리하니까.’
불합리하기에, 그 상황을 합리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신아름은 정치(政治)를 한 것이다.
정치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언제 갖느냐를 정하는 행위다. 그 방법으로는 설득, 협박, 전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신아름은 정치의 방법으로 공격을 택했다.
언어적인 폭력으로 부당함을 호소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상황으로 되돌리려고 했다.
‘다른 애가 가진 장난감이 탐나서 때린 후에 억지로 뺏는 것 같이…….’
참담하기 그지없는 결론이다. 신아름이 그런 유아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서 저질렀다곤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론.
‘그리고…….’
그리고 리카는 공격받은 사람이 으레 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맞았으니, 마찬가지로 주먹을 쥐고 휘둘렀다.
‘억울한 마음이 충분히 있을 수 있어.’
정당방위와 쌍방폭행의 기준은 대중들에게 답답함을 쉽게 불러일으킨다.
상대가 때려서 나도 때렸는데 어째서 쌍방이 상해를 입힌 것으로 판결이 나는가?
리카도 그럴 것이다. 신아름이 먼저 공격해서 나도 공격했는데, 왜 같이 혼나는 건가?
‘근데…….’
리카에게선 자그마한 억울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두려움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연기인가?’
리카의 태도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전생의 경험과 기억을 믿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석세스 엔터의 매니지먼트 총괄 부대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간군상과 인간관계를 겪었던가.
윗사람한테는 일이 다 해결된 것처럼 속이고, 정작 해결은커녕 조금도 나아진 적 없던 사태 또한 많이 겪었다.
아이돌들도 그러하다.
성필이 볼 때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정작 깊이 들여다보면 내부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경우.
매니지먼트 일은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을 보며 마음을 정화해도 쉽게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의심하는 스스로에게 혐오감도 쌓여간다.
“리카.”
성필이 리카를 불렀다.
리카는 쭈뼛쭈뼛 고개를 들어 성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성필의 감정을 필사적으로 살피려는 듯했다.
저 눈을, 성필은 믿고 싶었다.
“왜 그랬어.”
“……화가 났어요.”
리카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저 손은, 방금 전까지 성필과 프로듀싱에 대한 기대를 나누며 기쁨에 떨렸었다. 지금은 그와는 전혀 상반된 감정을 담아 떨렸다.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잘했어.”
리카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네?”
“잘했다고. 화는 삭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까. 근데, 이젠 어른이지?”
리카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평소처럼 생기 넘치는 웃음은 아니었다.
“네…….”
성필이 어린애로 취급할 때마다 의기양양하게 ‘아타시(저)는 어른이라구요!’라 말하곤 했었다.
리카는 성필이 무슨 소리를 할지 알았다. 그래서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이 더욱 우습게 느껴졌다. 세상에, 어른이라니.
“화를 내는 방법도 중요해. 물론 화가 났는데 방법까지 따지는 건 힘든 일이지. 당장 머리에 열이 오르는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겠어. 서른다섯 먹은 나도 힘겨워.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해. 순간의 실수가 평생 누군가에게, 그리고 너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어.”
“네, 정말, 그래요…….”
리카는 감정이 격해진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녀는 이윽고 물었던 입술을 놓고 젖은 한숨을 토했다.
“아름이가 슬퍼할 줄 알고 그렇게 말했어요……. 심지어 아름이가 울었을 땐 즐겁기까지 해서…….”
“왜?”
“이겼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긴 거 같아?”
리카가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타인을 상처입히는 곳에 승리는 없다.
하물며 가족 같은 사이인 신아름에게 이겨서 리카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친구를 울렸다는 게 어떻게 훈장이 되겠는가.
가슴에 새겨진 건 훈장이 아닌, 신아름이 입은 것과 같은 상처뿐이었다.
“…….”
성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반성하는 인간을 몰아붙여 얻을 건 없다. 누군가를 훈계하고 혼내는 건 그가 깨우치길 바라서지, 그를 몰아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하고자 한다면 리카를 더 추궁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울며 후회를 곱씹는 리카를 향해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왜 그랬는지, 그 뒤엔 어떤 마음이었는지, 필요한 건 전부 들었다.
“화해할 거야?”
“네…….”
“먼저?”
리카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거기서 성필은 살짝 감동했다.
물론 리카가 바로 답하지 못한 이유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먼저 주먹을 날린 건 신아름인데 내가 사과까지 먼저 해야 하는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머뭇거림이지만, 성필은 그 반응을 본 게 기뻤다.
리카가 바로 대답을 못 한 건.
‘내게 진실만을 말하고 싶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불려 간 학생이 거짓말하듯 ‘먼저 화해할게요’라 말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 끔찍한 방에서 최대한 빨리 나갈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하지 않았다.
리카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으, 느…….”
네, 라고 답하기 직전.
“알겠어. 아름이랑 꼭 화해해.”
성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카는 헐레벌떡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싸울 땐 더 성숙한 모습이길 바라.”
그리 말하는 성필의 얼굴엔 따스함이 한 조각도 묻어 있지 않았으나, 아까 전보다는 명백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일어나. 회의실로 돌아가자.”
성필과 리카는 응접실을 나서 회의실로 향했다. 고작 십수 걸음뿐이었다.
성필이 문을 열자 경직된 분위기가 맞아주었다. 그는 천천히 회의실을 상석으로 향했다.
리카가 착석한 것을 확인하고, 성필은 멤버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신아름을.
‘확실히 풀이 죽었네.’
아까보다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신아름 다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온 리카처럼 눈에 생기가 거의 빠져나가 있었다.
‘아름이가 싸운 일을 멤버들에게 말했을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조아라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딱히 훈계하는 선생처럼 모두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픈 마음은 안 들었다. 그러기엔 성필도 많이 지쳤다.
“사전 미팅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자.”
지금 성필이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됐니 뭐니 말해도 다들 제대로 알아먹을 분위기도 아니다.
그리고 아직 그 계획이 확정인지도 모른다.
내일 다시 리카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아야 한다. 리카가 그럴 만한 정신 상태일지는 모르겠지만, 일을 쉴 수는 없으니.
“해산. 설하는 잠깐 남아줘.”
멤버들은 터덜터덜 회의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성필은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그 즉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사님, 저희 사실 응접실 얘기 엿들었어요.”
“…….”
이미 리카와 신아름의 일로 머리가 터지기 전이다. 엿들은 일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다.
둘이 싸우지만 않았다면 ‘요 녀석 설하, 발랑 까져선 하하’라며 가볍게 넘어갈 일이기도 했으니.
“그래, 그럼 아는 거지?”
“네. 죄송합니다.”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괜찮단 뜻으로 손을 저어주었다.
“리카가 먼저 들어왔을 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정확히 어디까지 들은 거야?”
“둘이 말싸움하는 건 거의 다요.”
“그래…….”
큰 문제다.
신아름이 했던 말이건 리카가 했던 말이건, 다른 멤버가 들었을 땐 불쾌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필은 총괄 프로듀서다. 리카와 신아름의 싸움은 누가 총괄 프로듀서의 총애를 받고 있는가 따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자신이 성필의 넘버원이니 온리원이니 떠들었으니, 멤버들의 심기도 편치 않았겠지.
“알겠어.”
“……뭐라고 혼냈는지 안 물어보세요?”
“설하가 알아서 잘했겠지. 그 얘기를 다 들었으면…….”
성필이 따로 알려줄 필요도 없이 백설하가 잘 대처했으리라고 믿는다.
“혹시 아름이도?”
“네.”
표정이 응접실을 나갈 때보다 더 안 좋더라니, 백설하에게 한 소리 들었구나.
“숙소 분위기가…….”
성필은 숙소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남아 있는 기도 다 빨려가는 듯했다.
리카와 신아름, 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멤버들의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혹여나 둘을 편들어주는 멤버가 나오면 사태는 더 심각할 테고 말이다.
그리고 이건 정말 만약의 경우이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백설하가 한 명의 편을 들어줄 경우 사태는 더욱더 심각하다.
아예 왕따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자신이 멤버 중 첫 번째라고 호언장담했던 리카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성필이 걱정을 담아 백설하를 보자, 그녀는 걱정하지 말란 듯 아까보다 톤을 높여 말했다.
“둘 사이의 일은 전부 보고드릴게요. 또 사태가 더 나쁘게 흘러가지 않도록 제가 잘할게요.”
“그래, 고맙다. 나도 나름대로 뭔가 해볼게. 하루 사이에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때까지 힘들어도 잘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저는 리더잖아요.”
백설하가 활짝 웃자 성필의 가슴에 드리운 먹구름도 살짝 걷히는 듯했다.
“설하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 고맙다 우리 설하.”
“헤헤, 저도 ‘우리’ 붙여서 불러주시는 거예요?”
“내가 뭐 아라만 예뻐해서 ‘우리 아라’라고 부른 줄 알아?”
“아니면요?”
“…….”
음.
“그, 옛날에 아라가 연습생일 때 있잖아. 걔가 나 놀리니까 나도 놀리느라고 그렇게 부르던 게 입에 붙어서 그랬어.”
“저도 박 이사님 좀 놀릴 걸 그랬어요.”
기분 좋아지는 농담이었다.
그래, 무릇 농담이란 이런 거여야지.
옛날에 장하양이 했던 농담을 떠올리니, 이미 한참 지난 일인데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뭐랬더라, 자기 가슴으로 내 종아리를 만졌다고 했던 적이 있었지…….’
성필의 침대 위 천장에 소녀연맹 브로마이드를 재배치할 때의 일이었다.
성필이 넘어질 듯 보이자 장하양이 그의 다리를 꽉 껴안았을 때의 일인데, 지금 생각해도 농담보다는 성희롱에 가까웠다.
그 성희롱이 장하양의 입에서 나와도 경찰서에 가는 건 성필일 거란 점에서 더욱 무서웠다.
농담이 그치자 찾아온 침묵에, 성필은 다정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부탁할게, 설하야.”
“음?”
“응?”
“으으음?”
“응? 아, 너 설마…….”
“으으으으음?”
분명 아까는 웃을 기력도 없을 줄 알았는데.
성필은 절로 나온 경쾌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그녀에게 부탁했다.
“우리 설하, 부탁할게.”
그녀가 믿으란 듯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맡겨만 주세요.”
* * *
회사를 나와 밴을 타고 숙소에 가기까지,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서도, 리카와 신아름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눈빛조차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둘만 문제였다면 소녀연맹의 구심점인 백설하가 어떻게든 했을 테지만, 백설하도 둘에게 화를 냈었다.
학교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선생이 두 학생의 손을 맞잡게 하고 화해하라 해도 화해가 이루어지던가?
절대 아니다.
이러한 수준의 불화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모두가 미숙한지도 몰랐다.
다른 멤버들은 끼어들 생각도 못 하고 그 분위기에 휩쓸린 듯 차가운 공기 속에 빠져들었다.
냉전이었다.
늦은 밤.
백설하는 숙소 방의 책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을 기울였다지만 거창한 건 아니다.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양주와 종이 소주 컵을 책상 위에 올리고, 안주도 없이 양주만 마셨다.
백설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술을 마셨다. 정면을 흐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컵에 술을 채우고 입에 넣길 반복했다.
어두운 방 안에 켜진 책상 위의 조명이 붉어진 백설하의 얼굴을 밝혔다.
무미건조한 주홍색 조명 아래에서 백설하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꽃 사이에 술 한 병을 놓고.’
문득 백설하는 시가 떠올랐다.
‘함께 마실 사람 없어 혼자 잔 기울이네.’
성필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품은 그의 얼굴은 백설하와 둘만 남은 순간부터 빛을 되찾아갔더랬다.
‘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둘만 남게 된 어른들처럼, 둘은 서로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냈더랬다.
‘그림자와 나, 그리고 달 셋이 되었네.’
그는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도 나를 따라 하기만 하네.’
그가 부탁했다.
평소에도 그녀가 헤아릴 바 없이 많은 짐을 지고 있을 그가, 자그마한 가방 하나를 풀어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이 몇 배는 환해졌다.
어둠을 부수고 비쳐오는 새벽의 햇살 같았다.
‘잠시 달과 그림자와 함께했네.’
그에게 감히 어떻게 말할까.
자신도 어린애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림자와 함께…… 달과 그림자와 함께…… 즐겁기가 봄과 같구나…….’
백설하가 잔을 들었다.
조명의 빛을 받아 벽에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도 잔을 들었다.
빛과 그림자의 사이에서, 백설하는 다시 술을 목 안으로 넣었다.
흐린 정신 사이에서 불안이 녹아가고, 머릿속에 남은 건 성필의 부탁과 미소뿐이었다.
그 미소는 새벽빛이 맞나 보다. 어둠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할 수 있다…….”
백설하는 술과 근심과 밤을 함께 넘겼다.
넘기려 했다.
“언니.”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언니.”
똑똑똑.
백설하와 장하양의 침대 사이에 쳐진 간이벽에서 노크 소리가 타고 전해졌다. 그제야 백설하는 술에 잠긴 정신 속에서도 환청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언니 방으로 가도 될까요?”
백설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후― 깊은 한숨을 토해낸 후 말했다.
“나 얘기할 기분 아니야.”
그 목소리는 백설하 스스로가 깜짝 놀랄 정도로 서늘했다. 하지만 술에 마비된 정신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알코올은 인간에게 정신적인 자유를 부여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술은 신의 음료로 불렸다.
초자아(超自我)의 목줄이 느슨해진 백설하가 다시금 말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
저벅저벅.
바닥을 밟는 몇 번의 발소리.
문 앞, 방을 두 개로 나누는 벽 사이에 장하양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백설하는 그쪽을 보지 않고 있었지만 발소리로 대충 위치를 파악했다.
이번엔 짜증이 났다.
“잠시만요. 잠시면 돼요.”
백설하의 마음도 모르고 장하양이 졸랐다.
백설하는 또 술을 들이켰다. 생각이 말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아니, 아예 말까지 도달하지도 않았다.
침묵뿐이었다.
장하양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걸 곁눈질로 보며, 백설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시원찮은 얘기라면 차라리 화풀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뭐?’
고개 숙인 백설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방금, 장하양을 향해 화풀이한다고 생각한 건가?
이 술이란 건 도저히 사람이 먹을 게 아닌 모양이다. 순간적으로 생겨난 자기혐오에 백설하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괜찮으세요?”
장하양이 걱정을 듬뿍 담아 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와 백설하의 옆에 앉았다.
“어…….”
아까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백설하의 손은 어느샌가 또 잔으로 향했다.
입에 또 술이 들어갔다.
장하양은 바로 옆까지 온 주제에 아무런 할 말도 없어 보였다. 멀뚱멀뚱 지켜보는 꼴이, 백설하는 장하양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왔다.
“왜, 뭐? 내가…….”
술은 인간에게 정신적인 자유를 부여한다.
그래서 백설하가 내뱉은 말은 지금껏 그녀를 괴롭힌 죄책감이었다.
“애들을 혼낸 게 심했어?”
백설하는 리카와 신아름을 각각 따로 혼냈다.
따로 부를 필요는 없었다. 그녀들 본인이 성필에게 차례로 따로 불려 갔으니, 백설하는 오는 순서대로 혼내면 됐다.
그때, 백설하는 자기가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심하게 둘을 비난했었다.
특히 리카에게.
“아니, 그렇잖아. 리카가 한 말 너도 들었잖아. 자기가 첫 번째라고……. 그럼 뭐야? 우리는 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무슨 순위야? 어이가 없지, 없어…….”
장하양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게 백설하의 신경을 더 뻗치게 만들었다. 소리 없는 비난이 귓가를 징징 울렸다.
“누구, 누군 그딴 말 하고 싶었는 줄 알아? 내가 나빠? 나도 좋은 사람이고 싶어! 욕 같은 거 입 밖으로 안 꺼내고 살고 싶다고! 근데 어떡해, 내가 리더인데! 나도 리더 안 하면 좋아! 리더 한다고 내가 정산 비율이 더 높니 아니면 따로 보너스라도 받니? 막말로 나한테 이득인 게 뭐 하나 있는데? 근데 내가…….”
백설하의 손에 들어온 종이컵이 구겨졌다. 그녀의 꽉 쥔 손에서 싸한 향의 알코올이 뚝뚝 떨어져 흘러내렸다.
“내가 애들 혼내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장하양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정신이 나갈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그곳에 붙은 눈, 마음의 창은 백설하를 투명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백설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양아,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소리는 없었다.
응시뿐이었다.
분명 자신의 시커먼 눈보다는 훨씬 반짝일 장하양의 눈이, 괴롭게도 백설하를 꿰뚫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리더가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고 하잖아아―!”
장하양이 움직였다. 그녀가 상체를 기울여 백설하에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때, 웃기게도 백설하는 겁을 먹었다. 반 팔을 입은 장하양의 팔은 조명을 받아 잘 단련된 근육이 더 명확히 보였다.
백설하가 무의식적으로 반격 자세를 취하려 했으나 술 때문에 전신이 말을 잘 안 들었다.
결국 장하양이 가까워졌고, 곧이어 가슴과 등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장하양이 백설하를 껴안았다.
“힘드시죠.”
그 한마디로 백설하의 정신이 밝아졌다.
아, 왜 몰랐을까. 장하양은 백설하의 물음을 무시한 게 아니었다.
이 가녀리고 어린 동생은, 단지 언니가 화내는 걸 두려워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언니가 화내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리라.
거기에다 대고 언니라는 작자인 자신은 더욱 윽박지를 뿐이었던 것이다.
“하아, 하아, 하아……!”
술 때문에 피가 빨리 돌고 그에 비례하여 호흡이 더욱 가빠졌다. 전력 질주라도 한 듯이 숨을 빠르게 들이켠 건, 뱃속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무언가를 막으려는 시도였다.
하아, 하아, 하아, 아.
“아아…….”
거친 심호흡에도 기어코 울음이 튀어나왔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양아아…….”
장하양은 백설하의 울음에 오히려 용기를 얻었다. 아까보다 더 꽉 안고, 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더 과감해졌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포옹 한 번 받아본 적 없었기에, 장하양이 흉내 낼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뿐이었다.
옛날에 성필이 해준 것처럼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 있잖아 무서워서, 그랬어어…….”
장하양의 어깨 너머로 뺀 백설하의 얼굴이 괴로움을 머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어……. 나도, 나도 애인데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일 뿐인데.
그 애새끼에게 너무나 많은 짐이 걸려 있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애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모두들 자신을 어른처럼 대하고 어른처럼 행동하길 바란다.
그야 당연하지.
백설하라는 사람 하나의 몸에 수십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릴 책임이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나도 어린데에…….”
누군가 화내면 겁먹고.
누군가 울면 당황하고.
누군가 좋아하면 같이 좋아하는.
아직 세상의 풍파를 덜 겪어 겉과 속이 같은 그런 족속인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해결될지 모를 짐이 맡겨졌다. 어쩌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소녀연맹을, 다섯의 관계를 영원토록 망쳐버릴지 모를 짐이다.
만약 백설하가 잘못 처신하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소녀연맹은 어떻게 될까.
가로 엔터는? 그리고 그 결과를 마주했을 때 성필의 얼굴은?
“이런 일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몰라아…….”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물어봐도 ‘애들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무책임한 말 하나 던져줄 일이다.
사회생활 좀 한 어른이라도 무심하게 ‘애들 싸운 게 뭔 대수인데’라고 할 일이다.
후배들에게 폼 잡는 사회초년생에게 물어봐도 ‘그걸 왜 나한테’라고 말할 일이다.
애초에 인간관계는 타인에게 물어볼 종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주어진 족쇄이고, 그 족쇄가 너무나 무겁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고,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회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데, 그 짐을 맡은 게 하필 자신이며, 그 짐을 같이 들자고 맡겨준 게 그 성필이다.
은인인 사람이 부탁했고, 그의 부탁으로 리더가 돼선 어떻게…….
“나 무서워어…….”
어떻게, 그를 실망시킬 수 있을까.
23살 어린애들 사이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는 26살의 애새끼인 자신.
그나마 3살 많단 이유로 리더가 되어선, 고작 3살 많은 걸론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맞닥뜨렸다.
“괜찮아요 언니, 괜찮아.”
장하양은 계속 괜찮다는 말만 했다.
왜 괜찮다는 걸까.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모른다.
모르지만, 백설하는 그녀의 아무런 이유 없는 위로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행복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떻게 도와줄지는 당연히 장하양도 모른다.
그녀가 지금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백설하를 위로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의 방법은 역시 성필에게 배운 것이었다.
“언니가 잘못해서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변한다고 해도, 저는 언니를 계속 좋아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전부 언니를 탓해도, 저는 언니를 사랑할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게, 제가 언니를 도와드리겠다고 했으니까요. 이젠 같이해요.”
백설하는 목이 막혀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울음을 토했다.
술과 함께 밤을 삼키려고 했건만, 이제 와 삼켜지는 건 눈물과 위로밖에 없었다. 그리고 술보다 이게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