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화
리카는 자신감이 없는 아이였다.
케이어스 데뷔조로 떨어진 자신과 붙은 에리카를 자꾸 비교했던 걸로 알 수 있었다. 성필이 계속 리카를 띄워주어도 그녀는 안심하지 못했다.
아니, 굳이 외부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룹 내에서조차 그러했다.
리카는 자신이 다른 멤버에 비해 하등 나을 게 없다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었으니.
그에 성필은 자주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내가 첫 번째로 데려온 멤버는?’
답은 당연히, 리카다.
성필이 가로 엔터로 데려온 건 에리카가 아닌 리카이며. 모든 멤버 중 가장 먼저 가로 엔터로 데려온 멤버 또한 리카이다.
리카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언제 울적했냐는 듯 다시금 평소의 그녀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그녀는 눈치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첫 번째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말할게, 나라구. 첫 번째.”
리카가 신아름의 면전에서 그리 말했다. 그녀의 얼굴엔 일말의 죄책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의심 없이 확신한다는 듯, 자연적인 법칙처럼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진리라는 듯.
어떠한 감정도 없이, 그녀는 사실을 읊는 듯했다.
비판적이고 시니컬한 인간은 사실을 말하는 데 죄책감이 없다. 감성과 사회성이 덜 발달한 것을 본인이 똑똑한 줄 착각하고, 자기가 무슨 통렬한 일침이라도 날린 줄 알아 거만한데.
지금의 리카가 그와 닮았다.
“네가, 소녀연맹 중 누구보다 아이돌이 되길 바랐던 사람이라구? 이상하네. 그러면 박 이사님은 왜 석세스 엔터를 나오실 때 너를 데리고 오지 않으셨을까?”
“나오자고 했어.”
“그럼 또 이상하네. 내가 가로 엔터에 왔을 때 네 모습은 안 보였는데.”
“내가 안 간다고 했으니까!”
기어코 신아름이 목소리를 높였다.
리카는 그걸 보고 웃었다. 성필은 그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신아름의 얼굴엔 분노와 동시에 괴로움이 서려 있었다. 그렇기에 이 광경은, 리카가 타인이 화내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나도 그랬어.”
“뭐?”
“나도 처음엔 안 간다고 했어. 아니, 꽤 여러 번. 근데 결국 왔지. 왜일까? 그건, 이사님이 나한테 부탁했기 때문이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너도 그랬니?”
신아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피가 머리로 몰려 체온이 상승한 것이다. 체온을 낮추기 위해 수분이 배출된다.
슬픔이 아닌 분노로 눈물이 맺힌다.
“팀장님이, 팀장님이 제발 와달라고 여러 번 사정할 정도로 대단한 아이돌이…… 도망을 가? 못하겠다고? 거기서부터 틀렸어. 설령 네 말이 맞더라도, 팀장님이 틀렸던 거야.”
신아름은 동의를 구하듯 성필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성필은 아무런 답도 해줄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하고 뜨겁다.
둘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르겠다.
인간에겐 자존심의 기저를 이루는 기억이 있다. 기억나지도 않지만 반드시 무의식에 새겨져 있을, 친구들의 인정과 선생님의 칭찬.
부모에게 칭찬받고 지지받았던 경험.
아기일 때부터 부모에게 사랑받았던 기억…….
인간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릴 때의 경험 덕분이다.
‘만약 아이돌이 되는 게 인간으로서 제2의 탄생이라고 한다면.’
리카와 신아름, 둘이 지닌 자존감의 기저엔 성필이 깊숙이 박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리카의 말이, 신아름의 말이, 서로에게 역린이었다. 마치 ‘부모님은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들은 사람처럼 역정을 내는 것이다.
팬들에게 받는 무수한 사랑과 소녀연맹으로서 헤쳐 나갔던 수많은 고난은, 이를테면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받은 선생님과 친구들의 인정 같은 것이다.
중요하지만, 근본적이진 않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빛을 보고선,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지도 못 할 시절 만끽한 부모님의 사랑.
태어나서 다행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그러니, 나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어.
그러한 근본적인 자존감과 자신감은 인간의 탄생으로부터 짧은 기간 내에 발생한다.
즉, 리카와 신아름이 처참하게 패배하고 고개 숙여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나.’
최고의 프로듀서가 자신을 데려왔으며 인정해주었다는, 아이돌로서 최초의 경험.
그게 둘을 땅에 발 디디고 설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서로에게 동시에 부정당했다.
한 명은, 자신은 성필이 누구보다 아이돌이 되길 바랐던 사람이다.
또 한 명은, 자신은 성필이 선택한 첫 번째다.
“이런 애가…….”
신아름은 여전히 성필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팀장님이 바라셨던 최고의 아이돌이에요? 못하겠다고 도망가겠다잖아요! 팀장님.”
신아름의 어조가 애원하는 듯이 바뀌었다.
“서유선 선배 좋아하시죠? 옛날에 선배한테 들었어요. 서유선 선배는 매일이 힘들고 끔찍했지만, 결코 도망가지 않았다고요. 팀장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은 절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아요. 근데 얘를 봐요!”
신아름이 증오를 검지 끝에 모아 리카를 가리켰다.
“이런 애가 어떻게 첫 번째가 돼요! 자기가 하기 싫다고 짐을 팀장님한테 떠넘기는 애가 어떻게!”
리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걸 네가 말하기야? 우리들 앨범 회의마다 ‘모르겠어요’, ‘마음대로 해주세요’, ‘이걸로 그냥 해줘요’란 말밖에 하지 않은 네가?”
그건 명백한 비난이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나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 혹은 그땐 별생각 없었으나,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억지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말.
어느 쪽이든 성필은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건 준비가 안 돼서……!”
“누군 준비가 됐던 줄 알아?!”
리카의 외침에 신아름이 어깨를 떨었다.
“너야말로 부적격이야!”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절친한 동료에게 ‘부적격’이란 비난을 들어 먹은 신아름은 물론, 그 광경을 보는 성필 또한.
“박 이사님이 바라실 땐 도망만 갔던 주제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땐 안 그럴 거라고? 어차피 또 이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하겠지! 이사님, 안 그래요? 제 부탁은 들어주셨잖아요. 그에 반해 얘가 이사님한테 나랑 똑같은 부탁을 할 땐 안 들어주시고요. 그걸 위해 이 자리가 마련된 거잖아요. 이제 알겠니, 아름아? 너랑 나는 달라. 이사님이 너를 여기에 부른 건……!”
“그만해.”
성필이 말했다.
하지만 리카는 그만두지 않았다. 여전히 성을 내며 이야기를 이으려 했다.
“아뇨, 이 기회에 제대로 말해둬야 해요. 언제까지고 어리광을 받아줄 순……!”
“그만하라고!”
성필이 소리를 내지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깜짝 놀랐다. 그 반응은 마음에서 그치지 않고 겉으로도 드러났다.
공포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찾아온 것처럼 둘이 거칠게 몸을 떨었다.
“둘 다 미쳤어?”
이어진 말엔 몸뿐 아니라 마음도 반응했다.
미쳤냐.
성필에게 있어선 거의 쌍욕과 같은 수준의 단어 사용이었다.
리카와 신아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성필이 다시금 이야기하길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얼굴 안 보고 살게? 너희는……!”
성필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얼굴을 마구 문지른 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뭘 기대한 거야? 아름아, 네가 리카한테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하길 바랐어?”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성필이 어떻게 반응할 줄 알았냐고? 물론, ‘당연히 그렇지 아름아’란 말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당황하고 쩔쩔매다가 자리가 끝날 줄 알았다. 리카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건 오로지 리카가 듣기를 바라서였다.
“리카는?”
옛날의 리카는 성필이 혼내거나 질책하려고 하면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곤 굳어서 성필을 보기만 했다. 포식자를 마주한 동물 같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내가 ‘그래 리카가 첫 번째지’라며 맞장구라도 쳐줄 줄 알았어? 응? 그걸 바랐어? 아니지, 절대 아니지. 너희 둘 다 그냥 내가 곤란해하길 바란 거지.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길 바란 거야.”
“이에(아니)…….”
“저는…….”
“그게, 너희들이 한 말에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성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엔 옅은 물기와 그보다 진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너희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거란 걸 알았으니까! 너희는 서로를 상처입히려고 나를 이용한 거야!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성필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에 대한 반응은 아까완 달랐다.
신아름이 겨울바람 맞은 가지가 떨리듯 흔들리며 고개를 숙였다. 울먹임과 함께 눈물이 떨어졌다.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리카는 입을 뻐끔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주 옛날 신아름과 처음 만난 당시, 처음으로 성필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을 때처럼.
“어떻……!”
성필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심호흡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곤, 다시금 수축했다. 그는 천천히 문을 가리켰다.
“리카, 나가.”
“에.”
리카는 본인도 뭘 하려는지 몰랐다. 성필이 나가라고 했음에도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나가라고.”
“……왜.”
리카는 어떤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말은 아주 짧은 시간 머리를 거쳤다.
그걸 인지했을 때, 리카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나 너무 추하다.
“왜 저만요……?”
리카는 성필이 신아름만 남겨두고 그녀를 위로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럼에도 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꺼내었다.
“혼내시려면 저도…….”
“나가―!”
리카는 멍하니 있다가, 일어나서 응접실을 나섰다. 나가니 고여 있던 응접실의 공기와는 달리 시원한 공기가 맞아주었다.
눈가를 덮은 눈물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회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문 앞에 도착했다.
눈가를 문지른 리카는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지만, 리카는 별다른 생각 없이 본인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는 척했다.
“리카.”
조아라가 말했다.
“아저씨가 뭐래……?”
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리카.”
백설하가 물었다.
리카는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개 들어.”
백설하의 어조가 심상치 않았다.
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이 멎을 듯했다. 백설하가 명백한 적의를 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하양은 백설하의 곁에 앉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백설하가 장하양의 손을 쳐냈고, 장하양은 걱정스럽게 리카를 바라보았다.
“엿들었어.”
“하이(네)……?”
“응접실에서 했던 이야기 엿들었어. 사과할게, 미안해. 나중에 박 이사님께도 말씀드릴 거야. 근데 너.”
리카는 겁먹었다.
아까 성필이 고함을 내질렀을 때는 공포에 질렸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시간 없이 전신이 얼어붙었으니, 그건 공포라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이 상황은 겁먹었다고 해야 했다.
응접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성을 회복한 리카는, 백설하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정신이 남아 있었다.
이름처럼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백설하의 눈은 일찍이 마주한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연습생 때부터 박 이사님이 서열이나 순서를 가르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그걸로 여러 번 지적받기까지 했는데, 4년 차가 돼서 그딴 말을…….”
“그게…….”
“심지어 아름이 입을 닫게 하려고?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했니? 마음속으로 우리 사이에 단계라도 나눠놨어?”
리카는 성필과 같이 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공포에 휩싸였다.
소녀연맹의 프로듀서와 소녀연맹의 리더에게 동시에 비난받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
백설하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너 뭐 하는 애니?”
* * *
신아름은 울었다.
성필은 그녀를 달래주지 않았다. 울음을 그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울음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필은 신아름의 마음을 잘 알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의도는 항상 같다. 자신을 감싸달라는 뜻이다.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니, 오랜 시간이 흘러 신아름이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 나서야 성필은 불안한 듯 흘끔거리는 신아름에게 입을 열었다.
“다 울었어?”
그 물음에 신아름은 또다시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그녀는 최소한 위로 비슷한 답이라도 기대했던 모양이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지? 내 꿈이 너의 꿈이라고. 옛날이라면 널 위로했겠지.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고. 그런데 최고의 아이돌을 목표로 한다면, 오늘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어야지. 너를 우상으로 여기는 수백만 명의 팬들이 있어. 너는 수백만 명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 그건 짐이야. 그 무게는 부담스럽겠지만, 그 짐을 진 이상 책임을 져야 해. 더 성숙한, 최소한 팬들이 기대하는 모습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인간이어야 해. 왜? 네 목표는 정상이니까.”
아이돌은 노래와 춤, 얼굴이 전부가 아니다.
대중을 향한 이상적인 모습과 투철한 팬서비스 정신을 근본 요소로 삼은 순간부터, 아이돌에겐 비인간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비인간적일 만큼 완벽한 인간상.
“많은 사람들이 너의 노래를 듣고 너의 영상을 봐. 심지어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도. 너처럼 되고 싶다는 애들도 있겠지. 그런데 네가 친구를 상처입히려고 그 친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우상일 수 있겠어?”
성필이 바라는 건 인간적인 수준을 뛰어넘은 도덕성이 아니다. 단지, 보통 사람보다는 나은 인간이 됐으면 한다.
물론 그게 힘들다는 건 안다.
인간성이란 단어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일반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인간성은 사실상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온갖 철학자가 인간성에 신화를 덧씌웠기에, 연예인들에겐 일반인을 아득히 넘어서는 도덕 기준이 요구된다.
그러한 환경이 연예인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시킨다.
계속 사람들이 쫓아다니면서 무언가를 할 때마다 ‘왜 그랬어요? 착한 척합니까? 귀여운 척입니까? 왜 그렇게 게을러요? 왜 열심히 하는 척해요?’라고 묻는다 생각해보라. 머리털이 다 빠질 정도로 괴롭겠지.
“당연히, 힘들단 거 알아. 난 누가 시켜준다고 해도 아이돌 같은 건 안 해. 나는 안 하지만, 너는 그게 꿈이라고 했잖아. 그래, 화낼 수 있어. 짜증도 낼 수 있어. 고함도 지를 수 있겠지. 근데 악의에 가득 찬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몇 년간 동고동락한 멤버한테…….”
신아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똑 떨어지고,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죄송합…….”
“말해.”
성필이 신아름의 사과를 단칼에 잘랐다.
“난 리카랑 네가 친하다고 생각했어. 다른 멤버들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그건 내가 보는 외면일 뿐이고 실은 그렇지 않다면, 지금 말해.”
“네……?”
“그냥 비즈니스로 친구 행세하는 거라면 지금 말하라고. 조치하게.”
비꼬는 게 아니다.
성필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거기서, 신아름은 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흐느끼면서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아녜요, 실수였어요, 화나서어…….”
“뭐가 화났는데? 알겠지만 먼저 리카한테 악담을 날린 건 너야.”
“걔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게에…….”
앨범 프로듀서 일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나 사소한 일로…….
“팀장님, 팀장님이…….”
신아름은 계속 울었다. 아까처럼 동정을 구하고자 우는 게 아니라, 정말로 슬프기에 우는 것이었다.
울음을 멈출 수 없는 듯, 신아름이 여전히 흐느끼며 말했다.
“팀장님이 쌤이랑, 조아라랑, 하양 언니를 더 좋아하게 된 거는 이해해요…….”
“…….”
성필은 ‘그게 무슨 소리니 아름아?’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강 추측하기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겠다.
신아름은 모종의 이유로 성필이 다른 멤버들을 편애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그리 생각할 이유가 있다.
자의든 타의든, 성필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진행 중인 멤버들과 자주 붙어있을 수밖에 없으니.
같이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 게, 신아름 입장에선 편애로 보였을 법하다.
“근데 리카는 왜…….”
리카를 편애한다, 고…….
성필은 신아름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골똘히 되새겨보았다. 표정에선 아직 분노를 풀지 않고서.
되새겨보니, 그리 생각할 만하기도 하다.
리카는 딱히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진행하지 않아도 성필과 자주 붙어있곤 했다. 회사 사람들이 괜히 리카와 성필의 관계를 농담 삼아 떠들고 다니는 게 아닐 테니.
나이를 먹으며, 신아름은 과거처럼 성필에게 달라붙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반면 리카는 옛날과 다름없이 성필을 대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성필이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리카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애……. 나머지 셋은 프로듀싱으로 성과를 냈으니까, 알아요, 안다구요……. 팀장님이 바라는 이상적인 아이돌이 됐으니까아, 더 좋아하는 거 알겠는데에…… 리카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에 왜…….”
신아름이 눈가를 서럽게 문질렀다.
“걔는 되고 나만 안 된다고오…….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팀장님이 꼭 바라는 일인데에…… 리카만 제외시켜주고오…….”
“아니야.”
“편애 맞잖아아…….”
“아니라고 했다.”
신아름은 끅끅거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녀를 위로하면 안 된다.
리카와 신아름이 싸운 이유가 자존감의 기저에 성필의 인정이 있기 때문이라면, 성필이 둘을 혼낸 게 둘의 갈등을 막는 기제가 될 수 있었다.
자의식 과잉 같아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둘 모두에게 성필의 인정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나는 계속 둘이 잘못했단 걸 알게 해야 해.’
그러려면 금방 혼내고 금방 달래면 안 된다.
그룹 내에 균열이 나는 현상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소녀연맹 데뷔 전에도 조심했던 일인데, 소녀연맹이 정상에 도달한 현재는 훨씬 조심해야만 한다.
두 사람이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겉으론 친분을 유지할 수 있지 않냐고?
‘재벌들도 빡쳐서 망발하는데 이 어린애들이 무슨?’
사람들이 다 이성적이라면 회사 내에서 파벌이 갈리지도 않고, 싫어하는 걸 대놓고 티 내는 동료 직원도 없을 테고, 정치질도 하지 않겠지.
모두에게 친절히 대하는 게 압도적으로 이득인 태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든 뒤에서든 드러낸다. 나이 40 이상 먹은 차장님들도 그러는데, 이 어린애들이 잘 해내리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거 때문에 불화설 도는 아이돌이 얼마나 많았는데.’
조심한다고 해도 평소 태도에서 다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내심 그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픈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쟤네 왜 저러지?’라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추측을 시작한다.
사람들이 ‘쟤가 X같은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리카나 아름이가 생각할 날이 과연 오지 않을까? 거하게 싸운 다음 날 스케줄이 잡혔다면 원한이 사그라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화나서 그랬으면.”
성필은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제 어쩔 건데?”
“화해하께요오…….”
“그래, 나가서 리카 데려와.”
그때 신아름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성필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양손을 내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이게 뭔가.
몇 초 후, 성필은 신아름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겨우 당황을 숨기며 말했다.
“너 뭐해?”
“잘못했어요…….”
성필은 신아름이 석세스 엔터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의 훈육을 담당했었다.
어머니도 신아름의 성격이 더럽다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삶을 살며 모자람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부둥부둥 키웠다던데, 정말 그 말대로 성장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신아름이 정말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때 성필이 했던 일이 있다.
손바닥 회초리로 때리기.
그걸, 23살 먹은 현재까지도 몸이 기억하는 듯했다. 본인이 잘못했음을 알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을 내밀었다.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너 23살이야.”
마지막으로 신아름의 손바닥을 때렸던 건 3년 전이다. 20살일 때 딱 한 번.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아름이 김민주와 ‘죽고 못 사는 친구’를 촬영할 당시, 욕설 섞어 김민주를 계속 조롱한 영상을 봤을 때였다.
진짜 큰일 나겠다 싶어,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다 큰 성인인 신아름에게 회초리를 들었었다.
“그치마안, 팀장님 화났자나…….”
“너 23살이야, 23살이라고.”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신아름의 사고방식은 유아기적이었다.
“손바닥 맞는 걸로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어릴 때뿐이야.”
성필도 손바닥 맞는 걸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다. 뭣하면 칠판을 짚고 서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아도 좋다.
하지만 어른이니 그럴 수 없다.
어른은 매보다 더 무서운 것을 감당해야 한다.
“23살이면 본인 행동에 책임을…….”
“화났잖아요오…….”
성필은 더 어이가 없었다.
“그, 그래서? 내가 널 때리면, 내 화가 풀린다고,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 말을 들어서 화날 것 같다.
신아름은 지금까지 성필을 어떻게 생각해온 건가? 어린애를 때리면서 화 푸는 사람? 도대체 누군가, 그 인간 말종은.
신아름이 손을 거두지 않는 걸 보니, 그 인간 말종은 성필인 듯했다.
“나…….”
나가, 라고 하려던 순간.
성필은 최근 조아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아름이 훨씬 더 띠꺼워졌다고 했던가.
아마 미국에서의 일 때문에 자신과 떨어져서라고 생각한다.
성필은 무릎에 손을 얹고 눈을 꽉 감았다. ‘웨스턴 불렛’ 만화에서 가족이 있으면 약해진다는 악당의 대사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다.
도저히 신아름에게 모질게 대하기 힘들었다. 아니, 모질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성필 자신이었다.
전생보다 훨씬 의존적이며 유아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성필이 그녀를 소녀연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필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신아름의 손 위에 착, 자신의 손을 올렸다.
“됐어?”
신아름은 꼬물꼬물 성필의 손을 쥐었다.
성필이 내리친 손은 왼손이었으므로, 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왼팔과 오른 다리에 감각이 없다.
“잘못했어요…….”
“사과는 리카한테 하고, 나가봐. 나가서 리카 데려와.”
“화 풀렸어요……?”
성필은 난제를 마주한 수학자처럼 한숨을 쉬었다.
“네가 리카랑 화해하면 풀릴 거 같아.”
신아름은 코를 훌쩍이고, 성필의 손을 또 몇 번 조몰락거리고, 그러고 나서야 일어났다.
그녀는 응접실을 나섰다.
잠시 후, 신아름이 리카를 데려왔다.
“리카, 앉아.”
리카는 성필의 맞은편에 고분고분 앉았다.
그리고 신아름도 리카의 곁에 앉으려던 때.
“아름이는 나가 있어.”
“화해…….”
“나중에 너네끼리 하고, 리카랑도 얘기해야지.”
신아름은 아까 전의 리카처럼 우물쭈물하다가 힘겹게 응접실을 나갔다.
성필은 또 한 차례 남은 파도를 앞에 두곤 한숨을 삼켰다. 바닥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친구라니.’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니 알겠다.
리카와 자신은 진실된 친구 따위 될 수 없다.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를 ‘혼내려고’ 따로 부르겠는가.
톱아이돌답게 리카가 회사를 상대로 주도적인 태도를 취하면 모르겠다만, 그녀는 여전히 회사에 의존한다.
아이돌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미국 뮤지션들이 눈탱이 퉁퉁 부어가면서 배우는 비즈니스를, 아이돌들은 데뷔부터 회사가 해주니까.’
퍼스널 매니저, 비즈니스 매니저, 회계사, 사업 변호사, 에이전트, 음반사, 공연 프로모터.
뮤지션에게서 한 방울이라도 더 피를 빨려고 혈안이 된 모기들에게 몇 번이나 당하고서야, 뮤지션은 그럴듯한 팀을 꾸리고 마침내 완전한 팀의 중심이 된다.
한국 기획사는 그러한 뮤지션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다.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 에이전팅을 올인원으로 해결해주니 ‘종합 기획사’라고 불린다.
뮤지션의 위험을 차단하는 동시에, 뮤지션이 위험에 처할 자유 또한 박탈한다. 그건 곧 뮤지션이 사업적인 면모에서 성장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단 뜻이다.
‘리카가 아이돌이고 내가 회사의 중역인 이상, 진짜 친구 사이는 될 수 없어.’
웨벡스의 미사토와 세이코도 친구보다는 모녀관계에 가까웠었다.
성필은 리카와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필요 없는 기억이다. 가지고 있어봤자 지금부터 할 일에 방해만 될 것들.
깡그리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리카를 똑바로 바라보.
“리카?”
성필의 목소리가 절로 부드러워졌다.
리카의 표정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있었다.
마치 성필이 처음으로 부대에 전입한 날 새벽, 선임들에게 둘러싸인 채 창고에서 원산폭격을 당한 이후 같았다.
원산폭격(양팔을 뒷짐 지고 발과 머리로만 바닥을 지탱하게 하는 고문성 가혹행위)을 당한 듯한 리카가 애처롭게 마른 입술을 벌렸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