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화
“나 왔어.”
세이코가 제집인 것처럼 미사토의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있던 서유선은 이젠 뭐라고 하는 것도 포기했다.
세이코는 주방에서 물을 가지러 가며 서유선을 흘끗 보았다.
원래도 비 맞은 개처럼 우중충한 인간이었지만 오늘은 한층 더 비참하다. 간식 뺏긴 개처럼 찌푸린 얼굴이라니.
최근 서유선 주제에 프라이버시를 지켜달라며 뭐라 뭐라 하더니, 그것 때문일까.
세이코가 톡 쏘듯 말했다.
“내가 오는 게 싫으면 미사토랑 결혼을 하라니깐.”
“안 싫어.”
“싫잖아.”
“옛날엔 헤어지라고 성화였으면서 뭔…….”
세이코는 물을 입에 머금은 채로 집안을 살폈다. 미사토가 회사에 있단 사실을 알지만,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확인했다.
이윽고 세이코가 서유선 옆에 앉았다.
“알아? 미사토는 결혼 적령기가 지났어. 빨리 가정을 꾸려야 한다구.”
보아하니 세이코는 유일한 친구가 걱정된 모양이다.
안 그래도 ‘그 사건’ 이전에 인터넷 서핑을 밥 먹듯이 하던 그녀다. 흔히 세간의 시선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압박에 민감할 것이다.
“미사토를 너 같은 남자한테 넘겨주는 건 만 번 죽어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이젠 나도 포기했어.”
“…….”
“네 잘난 순정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그러니까 빨리 미사토랑 결혼하고 애를 낳아.”
“미친 거 아냐?”
“그러면 나도 이젠…….”
세이코의 안색이 서유선 못지않게 우중충해졌다.
“더는 여기에 오지 않을 거야. 신혼집에 찾아드는 건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민폐란 걸 알아…….”
서유선은 세이코가 상식을 발휘하자 꽤 놀랐다.
인간의 발달을 나타내는 3요소가 지능, 감성, 사회성이다. 서유선이 생각하기에 세이코는 감성을 제외한 지능과 사회성이 덜 발달했다.
그런데 저렇게나 사회성이 넘치는 사고를 할 수 있다니.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정해야 할까?
“미사토는 일중독이야.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결혼은 찾아오지 않아. 오늘 밤부터 노력하도록.”
세이코의 사회성은 9세에서 11세 사이임이 틀림없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미사토의 재산과 집과 시간과 사랑을 모기처럼 빨아 먹기만 하고 도망가려고?!”
“괜찮다니까. 난 결혼은 미사토가 원할 때 하고 싶어. 미사토도 그렇게 말했었고.”
“에, 미사토랑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했어?”
“했지. 몇 년을 사귀었는데…….”
“미사토가 뭐래?”
서유선이 얼굴을 붉혔다.
“아이에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면 결혼하자고 했어.”
“그게 언제인데?”
“현장에서 물러났을 때?”
현장에서 물러났을 때.
미사토가 본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하여 경영진에 포함됐을 때.
즉,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
“너무 멀잖아?! 그러다가, 그게, 못 하게 되면! 미사토가 힘들 나이가 되면 어떡해…….”
서유선은 이 이상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세이코가 미사토와 절친한 관계라 하더라도, 서유선 본인이 이 이야기까지 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았다.
“괜찮아. 착실히 준비해두고 있어.”
그리 대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설마…….”
과연, 아무리 사회성이 초등학생 수준인 세이코라도 이해한 듯했다. 그녀의 표정에 놀라움이 서서히 번져갔다.
“이미 애가 있는데 기르기는 싫어서 보육원에 버린 거야? 나중에 키울 마음이 들면 데려오려고? 이 쓰레기 같은 남자……!”
“쓰레기는 너야! 이럴 땐 과학기술을 먼저 떠올리지!”
“……과학? 노화를 되돌리는 기술이라도 있어?”
진짜 미치겠다.
어린애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이런 여자에게 사랑당했던 성필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데이트하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들었을까.
성필이 세이코를 차버렸던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상하네, 아직 그리 깊이 사귀지도 않았는데’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세이코는 외적 조건으로만 보면 완벽한 여자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필과 데이트했을 때 별 희한한 망발을 지껄인 게 틀림없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확실하다.
“있어 그런 게…….”
“뭔데, 나도 말해줘. 알고 싶어.”
“아 몰라. 네가 알아봐.”
서유선이 자꾸 말을 피하자 세이코도 물어보길 그만두었다.
세이코의 사회성은 정말 초등학생 수준은 아니기에, 그녀는 이게 껄끄러운 주제란 걸 깨달았다.
그녀는 나중에 미사토에게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여기 오는 게 싫은 건 맞지? 오늘따라 더 싫어하는 거 같은데, 미사토를 위해 이벤트라도 준비한 거야?”
“…….”
“아아, 알겠다. 웨이퍼센트 때문이야?”
서유선은 이번 웨이퍼센트의 퍼포먼스 디렉터로 참여했었다.
세이코가 킥킥 그를 비웃었다.
“소녀연맹의 디렉터로 참여했을 땐 대대적으로 홍보돼서 유명해졌는데, 이번엔 아니라서 속이 상했구나? 그렇게 쉽게 인기를 얻을 줄 알았어? 전설적인 케이팝 아이도루라면서 순진하네, 바보같이.”
웨이퍼센트의 성공…….
“아니야.”
웨이퍼센트가 성공했으니 기쁘면 기뻤지 기분 안 좋을 이유는 없다.
안 그래도 다키스트의 멤버였던 하민이 메신저로 잔뜩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필이 프로듀싱의 신이니 뭐니 했었다.
“아니면?”
“관련이…… 있긴 있어.”
“거봐. 역시 질투인 거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해, 그렇게 음흉한 마음을 태우는 중인 거지? 미사토도 불쌍하지, 히히.”
웨이퍼센트와 간접적인 관련이 있긴 하다.
서유선은 하민으로부터 웨이퍼센트의 성공을 전해 들었다. 아이돌을 그만두고 한국과 연을 끊은 지 오래되어, 그러한 정보를 접하기 쉽지 않았으니.
서유선이 아이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건 커버댄스를 할 만한 안무를 찾는 일 정도였다.
하지만 하민의 이야기를 듣고 최근 한국 아이돌계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하민이는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 결정은 분명 웨이퍼센트의 성공 훨씬 이전부터 내려졌을 터다. 그런데도, 하민은 일언반구도 없더랬다.
서유선은 짜증스럽게 폰 화면을 세이코에게 보여주었다. 그를 심란하게 만든 기사였다.
과연, 세이코도 사태를 파악한 모양…….
“나 한국어 몰라.”
성필과 대화하겠답시고 한국어 학원도 다녔으면서, 글자도 못 읽는 건가? 아니, 읽긴 읽겠지. 읽어도 의미를 모르는 거지.
서유선이 침울하게 해석해주려던 차.
“그런데 이 사람은 알아. 유선이 싫어하는 할아버지잖아?”
기사에 뜬 사진은 정호환의 것이었다.
* * *
성필이 리카의 대리(代理)를 뛰어주려면 한 가지 벽이 있다.
“대리가 아니라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한 거예요!”
성필이 리카의 앨범 프로듀서 직을 수행하기 위해선 한 가지 벽을 넘어야만 한다.
바로 누군가에게 허락받는 것이다.
성필은 응접실로 그 누군가를 불렀다.
“팀장님?”
신아름이었다.
그녀는 응접실 안쪽에 결연한 표정으로 앉은 성필과 리카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만 부른 이유를 모르겠단 듯, 그녀는 둘의 기색을 살피며 맞은편에 앉았다.
“왜 저만 불렀어요? 리카가 이상한 말 한 건 어떻게 됐구요?”
“그건 결론이 났어.”
“흐음, 그럼 이번 프로듀싱에서 내가 좀 중요한 역할인가?”
신아름이 리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화사한 미소에 리카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리카가 판단하기로, 이 상황은 꽤 복잡했다. 성필도 그 판단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름이는 우리들의 프로듀싱 마지막 차례야.’
심지어 우리들의 프로듀싱 주자를 뽑는 회의에서 단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무서움은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인식에서 나왔다.
무능이란 게 단순히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어떤 일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도 무능이라 할 수 있다.
‘아름이는 프로듀싱에 관심이 없어.’
옛날부터 그러한 성향 때문에 여러 번 마찰을 겪어오지 않았는가.
‘사실 리카가 제안한 건 아름이한테 가장 어울려.’
소녀연맹은 앨범마다 멤버들의 개인곡이나 유닛곡을 넣어왔다. 신아름도 그런 방향성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리고 본인의 곡에 본인이 의견을 내지 않는 건, 적어도 성필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설정한 프로듀싱 방향과 상충되니 말이다.
‘아름이는 항상 A&R팀의 이야기를 경청했었지.’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단순하게 ‘이게 좋겠어요’라며 곡과 퍼포먼스 등을 골랐었다.
이유를 물으면 누구나 답할 법한 간단한 이유를 몇 개 들먹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믿어요.’
신아름은 성필과 닮았다.
만약 우리들의 프로듀싱에서 어느 멤버가 메인 프로듀서가 아닌 프로젝트 총괄이 된다면, 그건 신아름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물론 그녀가 해온 간단한 선택과 총괄 디렉팅은 격이 다른 일이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녀가 프로듀싱을 한다면 그런 형태가 되겠지.
그러니.
‘리카가 나를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름이도 그러려고 할 거야.’
리카의 주장과 신아름의 주장은 겉은 같아도 속은 완전히 다르다.
성필과 리카는 신아름에게서 ‘그렇게 안 할게요’라는 대답을 들으러 왔다.
그리고 그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얼마나 힘드냐면.
‘딸한테 새엄마와 결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 정도…….’
상황이 비슷해서 그리 비유한 게 아니다.
난이도로 따지면 그렇다는 뜻이다.
성필은 옆에 앉은 새엄마, 아니, 리카를 보았다. 그녀도 막상 신아름과 대면하자 어지간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성필이 고민하는 동안 언제 시작했는지 횡설수설하는 중이었으니.
“날이 참 좋지!”
“더워 죽겠는데 좋으면 뭐 해. 좀 선선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또 리조트 가고 싶어!”
“난 별로. 또 팀장님 가서 발 삐면 어떡해.”
“아니, 내가 무슨 수영장에만 가면 발 삐는 사람도 아니고…….”
성필이 신아름의 말에 반박함으로써 대화에 참여했다. 그녀는 성필을 보며 리카에게 했던 것처럼 싱긋 웃었다.
“그래서 왜 불렀어요? 뭐, 부탁하기 힘든 일이에요?”
신아름은 벌써 머릿속으로 자신이 불려 온 이유에 대해 결론을 내린 듯하다.
서유선이 신아름에게 ‘오토마타’의 잔상 파트를 시켰던 것처럼 어려운 과제를 주리라고 생각한 걸까.
그녀는 가슴을 자신 있게 툭툭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시키는 건 다 할 수 있어요. 걱정 말고 말해요. 케이어스 ‘타임’처럼 1분 댄스 퍼포먼스라도 솔로로 해요? 아님 보컬까지 합쳐서?”
성필과 리카가 서로를 보았다.
먼저 말한 건 리카였다.
“아, 아타시(내)가 박 이사님을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했어!”
“아까 말했던 그거?”
“그리고 박 이사님 받아들이셨어…….”
신아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최근 들어 순둥순둥하게 변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녀다. 하지만 눈가를 찌푸리니 바로 옛날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윤상열이 그렇게 싫다고 했던 고양이상.
그러고 보면 윤상열은 고양이를 혐오했었다. 인간이 주는 밥을 처먹는 주제에 왜 가오를 부리냐고 말이다.
반면 성필은 고양이를 좋아했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그마한 강아지도 무서워하기 때문일까, 그 반동으로 고양이를 좋아했다.
“팀장님, 진짜예요?”
“……응.”
“그걸 왜 나만 불러서 말해요?”
“아, 아름이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서! 아름이도 나처럼 하면…… 더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아니구…….”
신아름이 리카를 노려보았다. 아까 눈매를 가늘게 뜬 수준이 아니었다. 칼처럼 예리해진 눈빛이 리카를 향하자, 그녀는 천천히 성필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야 리카, 너 안 떨어져?”
리카가 천천히 성필에게서 떨어졌다.
신아름이 코로 한숨을 뿜으며 다리를 꼬았다.
“어, 들어나 볼게요. 나는 왜 그러면 안 돼요? 얘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소레가(그게)…….”
“너한테 안 물었어.”
“내, 내가 말해야 하는데…….”
리카가 성필을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하여 방향성을 결정할 권한을 준 것.
성필은 그 이유를 모른다. 당연한 게,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필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고 싶다 뭐다 말하긴 했지만, 그건 절반의 이유일 뿐이다.
“팀장님?”
“리카는 소녀연맹을 프로듀싱할 수 없어.”
리카와 신아름 둘 다 놀랐다.
신아름은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 놀랐고, 리카는 성필이 이유를 맞췄기에 놀랐다.
“리카는 소녀연맹 중 유일하게 온전한 작곡이 가능한 멤버야. 그걸로 ‘플로리 걸’이라는 부캐를 만들어서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어.”
“그건 ‘송 포 피플’ 활동 때 밝혔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리카가 우리 앨범에 넣은 개인곡들이나 따로 발표한 곡들, 아름이도 들어봤지?”
“네.”
“리카는 아티스트야.”
그건 선언이었다.
그리고 리카에겐 인정이었다. 그녀는 문뜩 ‘아라베스크’ 때 성필이 병문안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에겐 소중한 추억이라 자주 입에 담았었고, 그렇기에 자주 기억나는 일.
그때 성필은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지는 모르겠어요’라며 고민하는 리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인 대로 있어도 돼.
리카는 성필의 말을 그대로 따랐었다. 그녀인 채로 있기 위해 노력했다. 더는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세상에 단 한 명은 있다는 게 큰 위안이었고, 아주 큰 선물처럼 느껴졌기에.
그런데, 리카인 채 그대로 있었을 뿐인데.
‘내가 아티스트라고…….’
성필은 그리 말해주었다.
성필이 ‘아티스트’라고 표현하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칭찬이다. 소녀연맹의 시작부터 그는 멤버들이 아티스트가 되기를 바라왔으니까.
그건 소녀연맹의 시작이자 지향점이었다.
성필은 리카가 이미 그 자리에 도달했음을 선언했다. 리카에겐 기대하지 않은 커다란 포상이었다.
“에, 에, 아타시가(제가)……?”
“계속해서 창작을 이어가고, 타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가 있어. 아티스트야. 카와이 베이스, ‘러브 미러’랑 ‘너만의 경찰이 될래’ 같은 곡을 계속해서 앨범에 담는 것만 봐도, 타협하지 않는 리카의 신념을 느낄 수 있어.”
“‘같은’은 뭔가요?! 그리고 ‘너만의 경찰이 될래’는 정통적인 레트로 제이팝 넘버라구요!”
“또, 리카의 신념은 소녀연맹과 맞지 않아.”
“에.”
“리카가 좋아하는 음악, 리카가 좋아하는 스타일, 리카가 좋아하는, 너무나 사랑하는 자신만의 예술. 그걸 소녀연맹에 투영할 순 없어. 리카도 그걸 알아서…….”
성필에게 앨범 프로듀서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성필은 옛날부터 창조성을 발휘하는 멤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리카가 성필을 실망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스스로의 프로듀싱 권리를 포기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기에 성필은 이렇게 생각했다.
리카는.
“나를 실망시키더라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로 한 거야. 리카는 알고 있어. 남에게 떠밀려서 만들어낸 게 결코 좋을 리 없단 걸 누구보다 잘 알아. 당연하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창조해왔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리카의 심금을 울렸다.
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리카는 성필에게 자신의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필은 리카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녀의 가슴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리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고 싸우다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타인에게 이토록 이해받을 수 있단 사실이 신기하고, 또, 기뻤다.
리카는 상황에 맞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다.
“알고 계셨네요…….”
“알지.”
친구니까.
5년 내내 거의 항상 붙어서 지냈으니까.
성필은 멤버들을 본 지 얼마 안 되어서도 그녀들의 심리를 거의 꿰뚫어 보듯 했었다. 적어도 아이돌 활동에 관련해서는 그랬었다.
그런데 함께한 시간이 연 단위다.
모를 수가 없다.
“한국의 많은 작곡가들. 뮤직 프로듀서들. 한국 대중음악 시상식에서 상을 타 가는, 시상식의 이름과는 달리 대중들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걸출한 작곡가들. 그 사람들이 못해서 대중적인 곡을 안 만드는 게 아니야. 그런 걸 만들고 싶지 않은 거야. 자신의 취향과 신념과 세계가 있으니까.”
리카도 그럴 것이다.
시키면 케이팝 비슷한 걸 만들 순 있겠지. 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즐겁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 또한 썩 좋진 않을 게 분명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쓴 프랑수아즈 사강한테 ‘연하남들이 집착하는 사정’ 같은 소설을 쓰라고 하는 꼴일 거야. 우위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스타일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역(逆)도 마찬가지일 거고. 쓰려면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자신이 원치 않는 걸 창조하는데 결과가 좋을 리 없어. 따라서 나는.”
성필은 심호흡을 하고 신아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진 신아름의 코를 보고 있었다. 감히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기에.
하지만 이젠 아니다.
아까부터 노려보는 신아름을 직시했다.
“리카의 부탁을 받아들였어.”
“그런데 내가 그런 부탁을 하면 안 받아주실 거고요?”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를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한다면, 그건 그냥 도망치는 걸 테니까.”
설명이 끝났다.
신아름은 성필의 이야기를 곱씹을 생각이 없는 듯 바로 되물었다.
“리카가 케이팝을 프로듀싱하기 싫어한다고요? 나도 싫다면요?”
“넌 두려운 거지, 싫은 게 아니야. 두려운 건 모두가 그랬어. 설하가, 아라가, 하양이가. 모두에게 말했듯 내가 곁에 있어. 물론 두렵겠지만, 나를 믿어줘 아름아.”
“리카는 되고 난 안 된다…….”
신아름이 짧게 웃었다.
비웃음처럼 들렸다.
리카가 움찔했다. 오랜만에 신아름이 처음 가로 엔터로 왔을 때를 떠올린 것이다.
아니, 가로 엔터에 오기 전에도 신아름은 항상 리카보다 우위에 있었다. 천성적으로 기가 강하여 사람을 깔아뭉개는 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인을 향해서 그러하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관심과 애정을 아끼지 않으니.
그럴 텐데, 신아름이 리카를 보는 눈이 심상찮았다.
“다 맞는 말이라서…….”
신아름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계획이 틀어진 사람이 내뱉을 법한 힘 빠진 웃음이었다.
“뭐라고 할 수가 없네요. 맞아요. 팀장님이 리카 제안 받아들였다고 할 때 막 가슴이 뻥 뚫리더라고요. 나도 그러고 싶단 생각이 바로 들었어요. 근데 바로 안 된다니까 뭐…….”
“아름이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당연히 아니겠죠. 팀장님이 날 싫어할 리 없고, 싫어해서도 안 되잖아요.”
신아름의 어투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성필은 그녀의 강압적인 말에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싫어해서도 안 된다. 그 말은 그야말로 폭력적이었다. 성필마저도 아주 짧은 순간 반감을 느낄 정도로, 타인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성필이 반응하지 않은 건,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성필은 신아름이 ‘인류에 반한 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 그녀를 싫어하지 않을 거고, 싫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아름이는 불꽃이니까.’
소녀연맹이 세이코와 맞붙었던 ‘뉴아사’ 때 다시금 절절하게 느꼈었다.
전생의 신아름과 현재의 신아름을 겹쳐보며, 그리고 그 둘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성필은 다시금 확신했었다.
신아름은 성필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빛이다.
전생의 그녀가 도달했었던 계단은 최고란 수식어를 붙이기에 아깝지 않았다.
비록 케이어스에게 그룹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빼앗겼었지만, 신아름은 솔로로서 정점에 올랐었다.
‘결코 타오르지 않고 남아선 안 될…….’
언젠가 가장 밝게 빛날 불꽃.
성필이 미래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이상(理想).
마침내 다키스트의 서유선을 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애초에.”
성필이 상념에 잠기느라 대답하지 않는 게 거북하게 느껴졌는지, 신아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된다고 했어도 안 해요.”
“어?”
놀란 성필의 반문.
하지만 신아름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결국 리카가 먼저 물었다.
“왜……?”
“팀장님이 그걸 바라니까. 팀장님이 그걸 좋아하니까. 내가 프로듀싱하길 바라시고 프로듀싱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난 너처럼 도망가지 않아.”
리카를 바라보는 신아름의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치 과거에 케이어스를 바라보던 때 같았다.
“이런 일로 사과할 필요 없어, 리카. 네가 뭘 하든, 나는 너한테 질투 같은 거 안 해. 팀장님께 실망하지도 않아. 왜인 줄 알아? 난…….”
* * *
“너무 늦는데요?”
조아라가 말하자 백설하와 장하양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와 성필이 나갔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신아름이 불려갔다.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슨 얘기하는지 안 궁금해요?”
궁금했다.
조아라는 옛날 버릇을 못 버렸는지 벌떡 일어나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옛날에도 소녀연맹 중 새로운 연습생이 들어오거나 오디션을 치른다고 하면 연습도 땡땡이치고 구경하러 갔던 조아라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어차피 다 우리 얘기일 텐데, 가봐요.”
장하양이 백설하를 지그시 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건가 싶었지만, 오랫동안 장하양과 지내 온 백설하는 안다.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려구? 내가 먼저 일어나면, 박 이사님한테 들켰을 때 내가 시켰다고 할 거야?”
“아니요?”
장하양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는 그냥…….”
“그냥, 뭐?”
“됐어요. 제 입만 아프지.”
“맞잖아아!”
백설하가 울상을 지으며 장하양의 어깨를 토닥토닥 때렸다.
결국 셋은 함께 응접실로 향해갔다. 회의실과 가까워 몇 걸음 걸을 필요도 없었다.
“예상, 아저씨가 리카 혼냄.”
“그럼 아름이는 왜 부르셨어?”
“예상, 신아름도 혼냄.”
“왜?”
백설하의 물음에 조아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한테 띠껍게 대해서요? 걔 요즘 심하긴 했잖아요. 아까도 회의실 분위기 갑분싸 만들고.”
“아, 아라야 뒷담은 하지 말자…….”
“앞담도 해서 괜찮아요.”
세 사람은 응접실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지나가던 직원이 셋을 이상하단 듯 보았지만 감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가로 엔터의 기둥인 소녀연맹이다. 그녀들이 홀에서 술판을 벌여도 홍규헌 정도만 뭐라 할 수 있지, 다른 사람들은 ‘아, 그런 건가’라며 넘어갈 것이다.
안쪽에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조곤조곤 조용히 말하는 듯했다.
조아라는 김이 빠져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으려 목소리를 줄였다.
“리카 걔 아저씨를 앨범 프로듀서로 둔단 거 진짤까요?”
“진심일 거 같아.”
장하양이 답했다.
“느낌이 그래.”
“날먹 미쳤네. 우리가 한 고생은 뭔데요.”
“고생…… 인가?”
“쌤, 그럼 고생이죠. 고생 아니면 뭐예요?”
“음, 헤헤. 그래두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내가 직접 프로듀싱했을 거 같아. 다들 안 그래?”
조아라는 찜찜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장하양은 당연하단 듯 동의를 표했다.
프로듀싱 과정은 기쁨도 있었지만 고통도 있었다. 겪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상반적인 감정이 번갈아 몰아쳤었다.
괴롭기도 했으나,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은 행복 또한 있었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목소리가 명확하고 컸다. 신아름의 것이었다.
한껏 감정이 달아오른 신아름의 목소리.
그녀가 말했다.
“난, 소녀연맹 멤버 중 누구보다도 팀장님이 아이돌이 되길 바랐던 사람이야. 석세스 엔터에서 나올 때도 팀장님은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셨어. 소녀연맹의 데뷔가 4인으로 확정됐을 때도 팀장님은 억지를 부려서 나를 데려왔어. 내가 팀장님의 꿈이야. 내가 팀장님의 꿈이니까, 난 결코 도망갈 수 없어. 도망가지 않아. 너처럼 신념이란 이유로 비겁하게 도망 안 간다고.”
문에 귀를 댄 세 사람의 눈이 보름달처럼 크게 뜨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보며 ‘들었냐’란 듯 입을 뻐끔댔다.
“뭔 얘기가 나왔길래 신아름 쟤가…….”
“마, 말려야 할까……?”
“방금 말은 아무리 아름이라도 도가 지나쳤어. 세이코도 안 할 저런 망발을…….”
백설하와 조아라가 장하양을 붙잡아 결박했다. 조금만 더 자유롭게 해뒀으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 것 같다.
과거 리카가 성필과 사귄다는 거짓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주변에 있는 무언가를 집어서 신아름에게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하양을 붙잡은 뒤, 백설하와 조아라는 조마조마 두근두근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신아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는 팀장님 마음 다 알아요. 팀장님도 그렇죠? 제가 힘들더라도, 팀장님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전에 ‘뉴아사’ 때도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그전부터, 그 이후에도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팀장님이 행복하길 바라요. 팀장님의 행복이 제 행복이에요. 제 미래에 고난이 있어야만 팀장님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갈게요. 기꺼이 할게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조아라가 기겁했다.
“저게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쟤 진짜 뭐 아저씨가 하라는 건 다 하는 거 아냐……?”
“언성을, 그렇게 언성을 높이지 마…….”
“네, 네에, 언니.”
“아름아…… 그런 괴상한 말 하면서 언성을 높이지 말라고오…….”
“나 말고 신아름 말하는 거였어요?”
장하양을 결박해두길 잘했다.
조아라는 백설하의 반응도 살폈다. 그녀의 눈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사랑과 전쟁 재현극이 클라이맥스로 들어설 때 같다. 확실히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만 들어도 재밌긴 하다.
다음에 들린 목소리는 이전보다 낮았다.
그래서 듣기 힘들었으나, 대강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겠다.
“그러니까 리카, 그렇게 미안한 얼굴 하지 마. 팀장님도요. 저는 포기 안 해요. 팀장님이 저에게 바라는 방법으로, 저는 다키스트를 넘어서는 아이돌이 될 거예요.”
이야기가 끝난 듯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신아름의 목소리를 넘어서는 단호하고 무겁고 차가운 대답.
“소레와 치가우요(그건 틀려).”
리카였다.
짧고 경쾌한 웃음.
“소노 캉가에니와 아나가 아루네(그 생각에는 구멍이 있네). 소모소모(애초에)…….”
그 뒤에 리카가 다시 말했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목소리엔 즐거움이 깊이 서렸다.
“키미와 마치갓타(너는 틀렸어).”
“뭐…….”
“쇼죠렌메노 사이쇼와 아타시다요(소녀연맹의 첫 번째는 나인데)?”
“너 뭐라는…….”
“일본에 안 간 지 오래됐다고 벌써 까먹었니, 아름아? 박 이사님의 처음은 나라고. 내가 최초의 꿈이야. 한 달 동안 이사님이 빌고 애원해서 데려온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
“이시카와 리카야.”
조아라는 소름이 돋았다.
리카가 화내고 있다. 그걸 알 수 있는 건 과거 성필이 세이코를 구하느라 입원했을 때, 소녀연맹이 부도칸에 섰던 경험 덕이었다.
못 하겠다고 울던 장하양의 뺨을 거세게 때리던 리카. 그때의 목소리와 같았다.
그랬기에 표정도 손에 잡듯 떠올릴 수 있었고, 그래서 소름이 돋았다.
“다시 말할게, 나라구. 첫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