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12화 (712/760)

712화

우리들의 프로듀싱 사전 미팅은 조기에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성필이 아무리 리카의 손목을 꺾어도 그녀는 ‘농담이었어요!’라 말하지 않았다. 성필을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하겠단 게 진심인 듯했다.

“뭐 하자는 거야?”

응접실까지 끌려온 리카는 삐친 기색을 팍팍 풍겼다.

성필은 어이가 없었다. 삐쳐야 하는 건 리카가 아니라 자신이니 말이다.

“전에 아타시(제)가 드렸던 말씀은 잊으신 건가요!”

“알아, 기억해.”

어떻게 잊겠는가.

성필이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었고, 그랬기에 들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인데.

“나를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하겠단 거, 진짜였구나.”

이사진과 소녀연맹 멤버들이 리조트 휴가를 떠났던 때가 있다. 그에 앞서 수요 조사를 했었는데, 성필은 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때 성필은 글로브의 신곡을 보곤, 자신이 미래를 앞당겼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었다. 만약 4세대가 예상보다 이르게 찾아온다면, 소녀연맹이 정상에 설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지니 말이다.

“그때 했던 말이 전부 장난이 아니라…….”

대화의 흐름은 이러했었다.

리카가 왜 리조트에 안 가느냐고 물었다.

성필은 일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리카의 프로듀싱 이야기까지 나왔고, 그녀는 성필에게 이리 말했었다.

‘이, 이사님의 바람대로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달까……. 이사님의 명령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단 느낌? 손나 칸지(그런 느낌)?’

이사님이 바라는 모습이 되고 싶어요오!

그녀의 외침은 여전히 성필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설마 했어.’

그때 논의는 흐지부지 끝났었다.

리카와는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냈기에 성필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불안이 남았었다.

훗날 리카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낼까 봐.

“혼또데스요(진짜예요).”

리카가 진중한 눈빛으로 성필을 올곧게 응시했다. 그 눈빛이 성필의 마음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성필이 리카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목으로.

리카가 기겁하면서 손을 뺐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손목을 꺾으시려는 건가요?! 이건 폭력이에요!”

“손을 잡고 체온을 전하며 진지하게 너를 설득하려고 했었어. 아니, 애원에 가까웠겠지.”

“여기요!”

리카가 결혼반지를 끼워달라고 내미는 것처럼 고아한 투로 손을 내밀었다.

성필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애꿎은 네 손목을 꺾어서 뭐하겠냐.”

“속인 건가요?!”

“그 일을 기억한다면 내 답도 기억할 거잖아.”

“모찌론(물론) 기억하고 있어요!”

성필이 리카의 제안을 거절하며 했던 답은 이것이었다.

모방할까 봐 무섭다.

그에 리카는 잔뜩 화냈다. 종일 성필을 따라다니며 그의 등을 토닥토닥 마사지하듯 때렸었다.

그게 성필과 리카의 대화가 흐지부지 끝났던 이유이기도 했다.

과연, 이번에도 리카는 뿔이 잔뜩 났다.

“하이 하이(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이사님의 머릿속에선 케이어스가 요지부동의 최고라서, 이사님이 프로듀싱을 하게 되면 케이어스처럼 된다는 뜻이네요! 하양 언니가 우시겠어요!”

“리카, 난 사실 미래에서 왔어. 어떤 그룹이 성공하는지, 어떤 컨셉이 패권을 쥐는지, 어떤 형식의 곡이 인기를 얻는지 모두 알아. 그래서 무서운 거야. 내가 직접 프로듀싱에 손을 대게 되면 그 미래를 따라할까 걱정돼.”

“이렇게 성의 없는 변명은 처음이에요…….”

성필은 그녀의 바람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저번에 리카와 함께 술 마시며 하소연했던 것 때문일까, 그녀를 향한 심리적 장벽이 자꾸만 낮아진다.

그는 그가 가진 불안을 리카에게 모두 고백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에게 자신이 지닌 짐을 모두 알리고 의지하고픈 망상이 떠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은 장난이었지만, 장난이 아니기도 했다. 물론 리카가 ‘정말인가요?’라고 물었다면 ‘아하하, 농담’이라고 했겠지만.

‘한 이사님이 사람의 행동은 95%가 무의식적인 거라고 하셨지.’

성필의 무의식은 자신만이 지닌 고뇌를 누군가에게 말하여 짐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모방에 대한 두려움은 소녀연맹이 데뷔하고 1년 정도가 지나서야 생겨났었다.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를 보면 볼수록, 그건 너무나 시대를 앞서나간 프로듀싱이었다.

곡이며 안무, 컨셉 등이 말이다.

성필은 갑자기 시간 경찰이 튀어나와 자신을 연행해가진 않을까 하는 괴상한 망상마저 했었다.

‘롱 포’와 ‘아라베스크’에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경청하여 독창성을 발휘하려고 했던 건, 그 두려움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들의 프로듀싱마저도…….’

“이사님이 미래에서 오신 게 사실이더라도 그건 문제가 안 돼요!”

리카가 그리 말했다.

성필이 한 타이밍 늦게 반응했다.

“문제가 안 된다니?”

“소설가가 과거로 간다고 자기 시대의 히트작을 그대로 쓸 수 있나요! 줄거리나 뼈대 정도만 베껴오는 게 고작일 거예요! 문장과 전개의 템포, 특색은 전혀 달라요! 당연히 성공할 수도 없어요! 프로듀싱은 문장 같은 거라서 베끼는 게 불가능해요!”

그러곤 리카는 과거 성필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다시 해주었다.

만약 여러 프로듀서들이 정해진 곡과 안무, 의상, 뮤직비디오 디렉팅한다면, 전부 다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오리란 이야기였다.

예를 들어 성필, 윤상열, 정호환이 각각 소녀연맹의 데뷔를 프로듀싱했다면. 같은 요소를 가지고 데뷔시켰더라도 전혀 다른 형태의 세 그룹이 나오리란 뜻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물음표를 띄울 만한 이야기였다.

디렉팅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곡, 안무, 의상, 뮤직비디오 등의 요소가 모두 같으면 정확히 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할 테니.

거기서 성필은 프로듀싱은 소설과 같은 거라고 설명했었다. 뼈대는 공유할 수 있겠지만, 결코 온전히 모방할 수 없는 거라고.

소설가의 예시를 다시 들자면, 완결된 텍스트를 전부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대로 출판하면 되니 완벽한 모방이 되겠지.

프로듀싱도 마스터플랜이 있다면 그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든 프로듀서든 기억만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뼈대다.

그들의 손이 쓰는 건 그들이 본 미래와는 전혀 다른 작품일 것이다.

“장난도 성의 있게 해주세요! 아타시(저)는 진지하게 부탁드리고 있는 거예요! 자, 다시 대답해주세요! 앨범 프로듀서가 되어주실 건가요!”

“아니.”

“즉답?!”

“배신이야. 팬들은 네 아티스트십을 기대하고 있을 거잖아.”

“프로듀서가 다른 디렉터를 영입하는 게 왜 배신인가요! 저의 프로듀시즘…… 프로듀…… 제작자주의(製作者主意)가 영어로 뭔가요? 아이돌리즘처럼 입에 달라붙는 단어가 있나요?”

“사실 아이돌리즘도 딱히 ‘아이돌주의’ 같은 뜻은 아니야. 영어사전에 등재되지도 않아서 자기 좋을 대로 쓸걸.”

“그럼 제가 처음으로 뜻을 부여할게요! 저의 프로듀시즘은 이사님을 따라가요!”

리카가 눈을 빛내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그녀의 눈에는 흥분과 기대감이 드러냈다.

그건 존경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애정을 전할 수 있어 기뻐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성필이 정호환을 바라보았었을 때처럼.

“적재적소, 최적의 인선으로 최적의 서포팅을 제공하는 거! 그게 제가 바라는 프로듀서의 길이에요! 언젠가 가로 엔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사람으로서, 박 이사님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성필을 목표로 한다.

그 말에 성필이 울컥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의 격류였다. 눈에 왈칵하고 전해지는 혈류 혹은 무언가에 그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살면서 ‘당신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그게 일본 최고의 미소녀에게 듣는 거라면, 확률은 더더욱 낮아질 것이다.

“아주 옛날에 박 이사님이 프로듀싱의 의미를 설명해주셨어요! 프로듀서는 감독이거나 컨설턴트, 스카우터 혹은 서포터라고……. 저는 감독이 아니라 서포터로서 우리들의 프로듀싱에 임할 생각이었어요!”

리카가 손을 내밀었다.

“아타시(저)의 장자방이 되어주세요! 한중왕의 제갈량이, 메인 프로듀서의 앨범 프로듀서로서 저를 도와주세요! 이게 제 첫 번째 인선이에요!”

“…….”

성필이 짧은 웃음을 토했다.

“아니지, 리카야.”

“에?”

역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걸까.

리카는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포기한 척하면서 성필의 미래 프로듀싱 계획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 그게 자신의 계획인 것마냥 떠벌릴 것이다.

성필은 개빡친 치와와처럼 부들부들 떨겠지.

‘근데 어쩔 건데. 박 이사님이 뭘 할 수 있는데?’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가 전부 끝나면, 성필이 총괄 프로듀서이자 메인 프로듀서로 복귀할 것이다.

성필이 그때를 위한 비전을 만들지 않았을 리 없다. 리카는 믿음을 넘어 그 비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재호 오빠를 통해서 봤으니까!’

A&R 3팀장(진)인 이재호에게서, 꽤 옛날에 성필이 작성 중인 기획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끝나고 소녀연맹에게 주어질, 모두를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

성필이 소녀연맹의 피날레에 선사해줄 최고의 선물이 존재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획일 테지만, 뼈대는 존재한다.

“알겠어요…… 포기하면 되잖아요…….”

리카가 속에 품은 구렁이 천 마리 중 한 마리를 풀려고 할 때.

“프로듀서 임명을 너무 쉽게 하잖아.”

“에?”

“내가 뭘 할지는 들어봐야지. 나도 미래의 내 상관에게 내 비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정도는 해두고 싶어.”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리카가 입 밖으로 나오려던 구렁이를 꾹 삼켰다.

“예전에 한 이사님께 생일 선물을 받았어. 슈퍼밴드 ‘토토(Toto)’의 앨범인 ‘Toto IV’였어.”

성필은 로큰롤의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대중문화에 대해 빠삭하다. 하지만 그게 성필이 과거의 음악을 즐긴다는 뜻은 아니었다.

성필의 취향은 어디까지나 케이팝 최적화였다.

“내가 너희한테 음악사 강의를 했었잖아. 한 이사님은 내가 과거의 노래도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나 봐. 아무튼, 나도 토토는 알고 있었지. 역사적인 밴드여서 곡도 몇 개 들어봤었고. 하지만 딱 그 정도였어.”

성필은 한구인의 성의를 생각해서 오랜만에 앨범 전곡을 들어보았었다.

그는 디지털 세대에 청춘을 보냈으니, 앨범을 트랙 리스트에 따라 듣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다. 한구인의 성의가 있으니까.

“대단하더라. 레코딩, 곡의 짜임새, 연주, 보컬, 전부 다. 한 곡도 버릴 게 없어.”

“설마, 저희의 컨셉은 록인가요! 록에 빠져버리신 건가요!”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대단했지만, 그래도 현재와 비교해선 세련미가 부족해. 당연하지. 세련미란 게 시간과 관련된 표현이니까. 현대에 가까울수록 세련돼. 생각이 깊어졌어. 과거에 칭송을 들었던 뮤지션들의 곡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빛이 바래지. 의문이 들더라고. 음악은 진보하나?”

현대의 사람들이 과거의 곡을 지겹거나 구식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음악이 좋은 쪽으로 발전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현대의 음악에 익숙하기에, 과거의 음악에 익숙하지 않기에, 과거의 음악을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뿐일까. 리카는 어떻게 생각해?”

“……둘 다 맞아요!”

“어떤 점이?”

“왜냐하면, 현대의 곡은 과거의 자양분과 결실을 빨아들여 만들어지니까요!”

성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당시에는 혁신적이던 테크닉과 짜임새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모방하기 마련이지. 음악은 그러한 뮤지션들의 결실을 자양분 삼아 나아가는 거라고, 난 결론을 내렸어.”

리카는 성필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었다.

꽤 진지한 이야기라, 리카는 자신이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단 기분을 느꼈다.

요즘 성필과의 대화라고 하면 농담을 던지다가 손목이 꺾이는 게 다였으니…….

“또 이건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몇몇 사람들이 나를 매국노라고 부르는 건 알아?”

리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수가 없다.

신아름이 숙소에서 길길이 날뛰었으니.

“에스타스 때문이지.”

웨벡스 사무소의 아이돌인 에스타스는 소녀연맹과 비슷한 시기에 컴백했다.

즉, 그녀들은 최근에 컴백했다.

성필은 소녀연맹과 동시에, 웨벡스 사무소와 약속했던 에스타스의 총괄 프로듀싱을 진행했었다.

“결과가 좋았어. 결과가 좋았던 게 논란이었지.”

일본의 한 천재적인 아이돌 프로듀서는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란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했었다.

팬들이 투표를 통해 팀을 꾸리는 ‘선거형 아이돌’이다.

오랜 세월 인기를 누려온 그러한 비즈니스 형태는 몇 년간 수명을 다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하락세를 맞이해왔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 중 하나를 음악적 성과의 부족이라고 일컬었다.

선거형 아이돌은 아이돌이라고 불리지만, 한국으로 따지면 스트리머와 BJ에 가까웠다. 팬들과의 내적 친밀감을 주요 셀링포인트로 삼아 수익을 얻는 비즈니스다.

스트리머와 BJ가 노래 부르고 춤을 춰봤자, 팬들만 귀엽다고 보아줄 뿐이다. 음악으로 사랑받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기에 사랑받는 거다.

“일본 아이돌계는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왔어. 회사가 크잖아. 머리 좋은 사람들을 끌어모았을 텐데, 수익이 떨어지니 어떻게든 방안을 내려고 했겠지.”

변화를 바라는 쪽과 현상 유지를 원하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현상 유지도 답이었다. 변화하는 것도 용기지만,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수익이 줄었지만, 여전히 그 이익은 상당하다. 만약 변화가 더한 실패를 동반한다면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변화를 거부하는 조류가 대세이지만, 업계엔 변화를 바라는 자들이 점점 두각을 드러냈다. 그들은 케이팝 아이돌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웨벡스 사무소의 히무라 실장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 변화는 대부분 실패했지.”

한국 사람들은 어쭙잖게 케이팝 아이돌을 흉내 낸 일본 아이돌을 찾아와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그들이 말하길 ‘문화적인 수준 차이’라고 하며 우월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일본은 언제까지나, 최소한 아이돌에 있어서 만큼은 후진국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에스타스가 나타났다.

비웃을 수준이 아니라, 진짜 케이팝과 다를 바 없는 완성도를 지닌 그룹이 나타난 것이다.

“최초의 성공이 바로 에스타스야. 내가 자문을 맡고 지음이가 뮤직 디렉팅을 맡은…….”

놀란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분노를 표했다. 성필과 가로 엔터를 매국노라 표현했다.

문화도 기술이다.

그 문화를 외국에 팔아먹었으니 기술 유출이요 매국이란 논리였다.

중국이 한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아 가는 것처럼, 일본의 문화도 그리되면 어떡할 거냐며 가로 엔터를 가열차게 욕했다.

성필은 그들의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케이팝은 세계에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최초로 창조해낸 유일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현대문화’다.

현존하는 현대문화 대부분을 창조하고 수출한 미국과 유럽은 익숙한 일이겠지만, 한국 사람 입장에선 처음 손에 넣은 창조적 문화 결실이 전파되는 게 타국의 도둑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필은 눈썹을 검지로 긁었다.

“어이없는 말 아니야? 문화에 도둑질이 어딨어.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아이돌부터가 일본과 미국의 모방이었는데. 그게 싫으면 척화비를 세워야지.”

문화는 전파되는 것이다.

리카는 성필이 아까 했던 ‘토토’의 이야기와 ‘에스타스’의 이야기가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리카가 이재호를 통해 보았던 성필의 계획은, 현재 그의 이야기와 맞아들어갔다.

그게 이거였구나, 리카는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딛고 선 이 문화적 토양은 과거의 수많은 뮤지션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어. 그들의 치열한 삶 덕분에 현재에 이르렀어. 난 그걸 표현하고 싶어.”

리카는 그 계획서를 떠올렸다.

많이 보진 못했지만, 뮤직비디오 의상 컨셉은 기억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입을 법한 펭귄 수트 차림의 백설하. 간단한 스케치 속의 그녀는 흰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웨스트코스트의 서정적인 쿨 재즈를 대표하듯 차분한 클래식 정장 차림의 장하양. 스케치 속의 그녀는 원형 의자에 앉아 어쿠스틱 베이스를 품에 안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와 자유분방한 스타일링이 눈에 띄는 락시크 스타일의 신아름. 스케치 속의 그녀는 일렉기타를 메고 하늘을 향해 검지를 뻗고 있었다.

코르셋 블라우스와 망사 스타킹, 그리고 절반만 올린 숏컷. 전성기의 마돈나를 벤치마킹한 게 틀림없는 스타일의 조아라. 스케치 속의 그녀는 흰 가죽 재킷을 반만 걸친 채였다.

그리고 마지막, 리카.

“우리를 이 자리에 도달하게 해준 모든 뮤지션과 음악, 문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서.”

리카의 복장은 일본 아이돌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하늘하늘하고 반짝이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스케치 속의 그녀는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클래식.

재즈.

록.

팝.

그리고 한국적인 아이돌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재패니즈 아이돌.

이게 성필이 뮤직비디오에서 그리고자 하는 의상 비주얼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모든 음악과 문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구상한 비주얼들…….

“노래의 주제는 사랑. 마음을 훔친다, 그런 고전적인 소재야.”

“의…….”

리카는 세쿠시(섹시)한 조아라와 카와이(귀여운)한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리느라 뒤늦게 답했다.

“의외로 정석적이네요!”

“네가 ‘송 포 피플’ 앨범 구성품인 포스트 카드에 썼던 문구 중 하나, 기억해?”

아타시는 괴도다!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지! 낄낄 네 마음은 벌써 내 손에 있어!

“그거 보자마자 뭔가 막 떠오르는 게…….”

“제 귀여움이 도움이 됐나요!”

“응. 아마 ‘롱 포’와 ‘애플 크러쉬’의 중간쯤 될 거야.”

둘 다 소녀연맹이 사랑을 표현했던 타이틀이다.

갈망을 부르짖었던 ‘롱 포’와 달콤한 사랑을 드러냈던 ‘애플 크러쉬’의 중간.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기도 하면서 음악의 비유야. 그러니까 가사에선 사람의 마음을 훔치지만 뮤직비디오에서는…….”

“문화를 훔치…….”

리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문화를 전달받는 거네요! 저희의 까마득한 선배님들한테서요!”

“미국적인 요소가 많을 거야. 이 아이디어들을 떠올렸을 때부터 그렇게 정했어.”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모두 끝난 시점에서 성필이 디렉팅할 앨범이다.

당연히 목표는 대중음악의 정점인 미국이다.

“클래식, 재즈, 록, 팝. 뮤직비디오엔 미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가득 채워 넣을 셈이야. 아마 미국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할 만한 비주얼적 암시와 장치, 미장센이 많겠지. 그리고, 미국에서 뮤지션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은 두 개야. 얼마나 쿨(Cool)한가,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가. 나는 소녀연맹이 선한 영향력,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적 힘을 표현하길 바라.”

리카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이 계획엔 백설하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백설하는 스승을 만나고서 하나의 꿈을 더 가지게 되었다. 신들의 전당인 그래미에 입성하는 것이다.

그래미는 보수적인 조직이다. 미국 음악 업계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답게, 그들이 음악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미국에 맞춰져 있다.

‘그러니 그래미를 뚫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 문화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

팝의 요소를 최대치로 끌어내는 거다.

성필은 백설하의 꿈을 ‘그렇게 되면 좋겠다’ 수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이뤄주고 싶다.

“그로써 미국의 가치 기준에 맞추고 미국을 공략한다.”

“일본도요!”

“일본?”

리카가 아차 했다.

성필은 아직 리카가 성필의 미래 계획을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리카가 입을 막자, 의외로 성필은 되묻는 대신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응, 그래야지. 리카 네가 있으니까.”

“에, 아타시(저) 때문에요?”

재패니즈 아이돌의 비주얼 요소는 자신 때문에 일부러 넣은 건가?

리카는 성필 모르게 감동했다.

“미국적인 요소와 일본적인 요소를 넣을 거야. 그 이유는, 내 이 계획이 소녀연맹의 마지막 앨범을 되리라고 생각해서야.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최대한 세계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 내 목표는…….”

성필이 리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까 리카가 성필에게 앨범 프로듀서 직을 부탁할 때처럼 진지했다.

“세계를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이야.”

그야말로 거창한 단어에 리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세계를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

원래라면 소녀연맹의 피날레를 장식했을, 성필의 모든 소망과 바람이 들어간 계획.

“그걸 지금 써도 괜찮나요……?”

리카는 이제 와서 미안함을 느꼈다.

그에 성필은 무슨 소리냐는 듯 씩 웃었다.

“항상 너희들한테 최선을 다하라고 했지. 그런 말을 한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지.”

리카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성필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또 감동적이고,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윽고 리카는 결심을 마치곤 무릎 위에 공손히 손을 올렸다. 참고로 성필의 무릎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성필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꺾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님은 나를 앨범 프로듀서로 써주실까?”

“제 손이 대답이에요.”

리카가 성필의 무릎을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꺾기 전에 리카가 휙 손을 뺐다.

“후우.”

리카가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을 천천히 가슴으로 가져갔다. 왼쪽 가슴으로 손이 모이고, 그녀의 양손 검지와 엄지가 반(半) 하트를 그렸다.

이윽고 양손의 검지 끝과 엄지 끝이 만났다.

그녀가 손으로 하트를 그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케이팝을 이 자리에 도달하게 해준 모든 음악, 뮤지션, 문화에 감사와 존경, 애정을 담아서…….”

리카가 활짝 웃었다.

“아타시(제)가 허락할게요!”

“고마워, 리카.”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리카는 양손을 성필에게로 뻗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성필의 양손을 꼬옥 붙잡았다.

둘의 사이엔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리하려면 리카가 상체를 앞으로 쭈욱 내밀어야 했다.

둘의 얼굴은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둘은 서로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둘의 눈에 비친 서로를. 그 안에 비친 자신들의 열망에 가득 찬 눈을.

“감사합니다 이사님! 제 첫 번째 앨범 프로듀서가 이사님이어서 영광이에요!”

“고마워, 내 첫 번째 총괄 디렉터가 되어주어서.”

“헤헤, 둘 다 첫 경험이네요!”

“너 그 뉘앙스 알면서…… 됐다.”

성필의 양손은 리카가 꼭 쥐고 있었다. 성필은 그러한 자세를 바꾸었다. 손바닥을 위로 뒤집어 그녀와 손을 맞잡은 형태로 바꾸었다.

둘은 손을 위아래로 꼭 맞잡았다.

“서로가 처음이니 미숙한 부분도 많을 거고, 좋기만 하지도 않겠지만.”

“이사님 표현이 더 음흉해요!”

“그래, 내가 잘하기만 하진 않을 테지만.”

성필이 리카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최선을 다할게.”

“하이(네)! 함께 최선을 다해 만들어요!”

리카도 성필의 손을 꼭 쥐었다.

“세계를 무릎 꿇릴 궁극의 앨범!”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 진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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