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저녁.
이준호는 약속 때문에 루프탑 바를 찾았다. 야경으로 유명한 그 바는 YJS 엔터가 소유한 자산 중 하나였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자마자 매니저가 이준호를 반겨주었다.
이준호는 인사를 대강 넘긴 후 안내를 따라 VIP룸으로 향했다.
주문액이 100만 원을 초과해야 사용할 수 있는 방이다. 고작 술 한 번 먹자고 쓰기엔 과한 돈이기에, 과한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인간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이준호는 1층을 거닐며 주변 풍경을 슥 훑었다.
“죄다 사진 찍고 영상 찍고, 난리도 아니군.”
심지어 아이튜브에라도 올릴 건지 가게 여기저기를 찍으며 홀로 뭐라고 하는 인간도 있었다.
손님 전원이 젊었다.
매니저는 바의 홍보 전략과 방침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했다. 딱히 이준호가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1층이 끝나는 계단에 발을 디디자 몇 개의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2층이 끝나고 VIP룸으로 향하는 계단에 또 발을 디디자, 이번엔 많은 이들이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보내왔다.
계단으로 갈린 각 층은 돈으로 갈리는 계급이었다.
다들 자신보다 높이 사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 했고, 모자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이준호의 주름에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등신들.’
돈이 많길 바라면 이딴 곳에서 술 마시면서 사진 찍을 게 아니라 일이라도 할 것이지.
룸 안으로 들어가자 드넓은 방이 반겨주었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이라 방의 사면(四面) 중 두 면이 통유리일 수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방의 조명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안쪽에 자리한 오늘의 손님.
“아, 오셨습니까.”
KS 엔터 문규완 회장이 천천히 일어났다.
이준호는 테이블 위를 보았다.
그가 주문한 주류는 전부 진열장에 따로 보관될 정도로 비싼 것들이었다. 매니저가 따로 와서 감사를 표할 정도의 값을 치렀겠지.
그런데도 문규완의 앞에 있는 술은, 아까 보았던 어린애들이 먹던 싼 칵테일이었다.
“단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
“예, 어린애 입맛이라.”
이준호는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문규완은 슬쩍 내밀려던 손을 뻘쭘하게 집어넣었다.
이준호가 눈치 보는 매니저에게 손을 젓자 방 안엔 둘만 남았다. 그가 말했다.
“반말할까?”
“그래.”
문규완이 빳빳하게 폈던 허리를 편히 굽혔다.
“오랜만이다 준호야.”
“이건 다 뭐야?”
“뭐가?”
이준호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미안해서 비싼 걸로 골라 시켰나? 가게 매출 올려주는 게 사과에 도움이라도 되리라 생각해서?”
“네가 사는 거 아니었어? 네 가게인데.”
이준호가 얼굴을 찌푸리자 문규완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고, 내가 사니까 마음껏 마셔.”
“지랄…….”
“어, 그리고 너한테 미안해서 비싼 걸로 시킨 건 맞아. 근데 사과하러 온 건 아니다.”
“신의도 잃더니 염치도 잃었나?”
“사무라이 걸즈 그거…….”
문규완은 ‘사무라이 걸즈’라고 말하면서 거부감이 들었다. 맨정신으로 발음하기 창피한 단어였다.
“내가 시킨 거 아니다. 네가 뭔 생각했을진 익히 짐작이 가. 내가 너를 배신하고, 가로 엔터에게 가했던 압박을 보상하려 에리카를 패로 줬노라며 부들댔겠지. 아니야?”
“너무 정확해서 이 자리에서도 부들댈 거 같은데? 뭐, 날 화나게 하려고 불렀나? 영상 찍어서 홍규헌 그 어린 년한테 보내주려고?”
“에리카가 멋대로 한 거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준호는 개봉하지 않은 와인병을 바라보았다. 웨이터를 불러 병을 개봉하고 잔을 채웠다.
그리고 웨이터를 짜증과 함께 쫓아 보낸 후 신경질적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넌 개새끼야. 사실이면 제 아티스트 하나 통제 못 하는 무능력한 개새끼고, 사실이 아니면 신의 따위 없는 개새끼지. 후자는 옛날부터 어렴풋이 알던 사실이었으니 놀랍진 않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내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설명은 안 할게. 암튼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은 아니지만, 네 화가 풀린다면 사과할…….”
“설명해!”
문규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호는 이번엔 진짜로 부들댔다. 그는 정체를 숨기려 쓰고 왔던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졌다.
문규완은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초에 믹스테입은 상업적인 일이 아니니 회사가 제지할 사항이 아니다.”
“믹스테입 안 시켜준다고 도망간 아티스트를 보유한 네가 할 말은 아닌데.”
“호환이가 결국엔 허락했었어.”
“그래애…….”
이준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인간, 가로 엔터랑 친하다더니 너를 설득했나 보지? 넌 친구의 친구가 난처한 꼴을 못 봤던 거고?”
“이제 호환이는 없다.”
“뭐?”
“총괄 프로듀서를 관뒀어.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건 윤희연 이사야.”
이준호는 머리가 멍해졌다.
어느 날 건강했던 친구의 장례식 소식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 친구, 그저께까지 팔팔하더니 어째서…….
“호환이는 없지만, 호환이의 판단을 존중한다. 사실, 그래 맞아. 그 기사가 나오는 날까지 에리카가 그런 프로젝트를 하는 줄도 몰랐어. 네 말이 옳다. 난 무능력한 개새끼야. 근데, 알았어도 말렸을까 싶어.”
“호환이가…….”
“호환이가 허락한 일이니까.”
“그만둬? 총괄 프로듀서를?”
이준호는 더는 문규완의 배신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여전히 충격받은 눈으로 계속 되물었다.
“왜?”
“소녀연맹이 미국에서 선전하는 게 여간 충격이었던 모양이야.”
“왜 진즉 ‘인티머시’가 성공했을 땐 안 나갔지? 나한테 두들겨 맞은 걸론 충격이 부족했나?”
“너도 성격 참 더럽다. 왜냐면, 케이어스는 호환이의 진정한 꿈이었으니까. 븨이에스 애들한테 이런 얘기는 못 하겠지만, 케이어스는 모든 힘과 열정을 집대성한…….”
그렇기에 반드시 꿈을 이뤄내야만 할.
“불꽃 같은 거였어. 세상을 불태울……. 또, 핫 100은 아니라도 빌보드 200 차트 1위를 거머쥐었잖아. 걸그룹 최초야. 어떤 걸그룹도 이뤄내지 못한 기적이지. 호환이가 먼저 이뤄냈어야 할 기적.”
이준호는 설명이 끝났음에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치였다. 문규완은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평생을 라이벌이었던 이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링을 벗어났다.
그건 평생의 동료가 곁에서 떠나간 문규완 못지않은 충격이리라.
‘호환이가 그랬지.’
음악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일.
다른 사업 분야처럼 라이벌을 탈락시켜야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엄중한 제로섬 게임의 세계가 아니다.
과거 케이팝 시장이 동네 구멍가게 수준일 땐 그랬을지 몰라도, 현재는 아니다.
그런바, 이준호는 라이벌이 사라졌음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문규완은 그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는 듯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 짓은 계속할 거냐?”
“……네 덕분에 대차게 꼬였지. 이 개새끼, 말하면서도 열이 올라 죽겠군.”
“그런 짓은 그만두고 본업에 집중해.”
이준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너도 내가 겁쟁이라고 생각하나?”
“똑똑한 거지. 유례없는 성공을 거머쥐고 그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으니. 그런데, 숨 고르기가 너무 길다.”
“다 안다는 듯이…….”
“인티머시만큼은 네가 직접 디렉팅하려는 거잖아. 아니었으면 진작 다른 피디한테 권한을 넘겨서 컴백했겠지.”
“…….”
“인티머시도, 네 회사 사람들도, 팬들도 불쌍해. 이건 호환이가 했던 말인데, 창작자에게 재능이 필요한 건 처음뿐이라고 그러더라.”
창작자에겐 어느 순간 마음의 불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불꽃을 태워 자식이나 다름없는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 남은 건 재뿐이다.
거기가 갈림길이다.
더는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최초의 영감은 사라지고 품에 그러모은 재만이 남았다.
“그 재를 품고도 계속 나아가야 한대. 재능이 필요한 건, 불꽃이 피어오르는 건 오로지 시작뿐이야.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게 창작자라고 불릴 수 있는 조건이야. 너도 알겠지.”
30년이나 무언가를 만들어왔으니.
“뭔 자기계발서라도 읽고 왔나? 뭐, 포기하지 말라고?”
“여기서부터가 진짜야. 호환이가 말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
“……뭐지?”
“‘나도 쓰레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쓰레기를, 뭐?”
“모든 게 완벽할 수 없다는 자각. 때때로 내가 만든 결과물이 쓰레기일 수 있다는 인정.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중간에 포기해버려. 그리고 못 보게 되지. 언젠가 결승선에 도달했을 때 자신이 넘어왔던 수많은 지점. 그곳엔 쓰레기도 있겠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꽃도 있어. 뒤로 돌아가서 꽃만 모아 향기를 맡는 거야.”
아, 이거야.
이걸 위해 난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어.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넌 곧 포기해버릴 거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나 아름다운 걸 만들어왔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걸 만들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 앞을 더럽힐 바엔 차라리 포기하겠다, 그리 판단할 수도 있지. 그런데, 아니거든.”
문규완은 얼마 전 윤희연 이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머리가 용이면 뭐하냐. 몸이 없는데. 최소한 닭의 몸이라도 붙여줘.”
“……호환이가 말했다고?”
“그래.”
“염치도 없지. 너나 정호환이나. 중간에 포기해버린 인간이 그딴 말을 했단 것도 웃기고, 그런 인간의 말을 인용한 너도 웃기고.”
그리 말하면서도 이준호의 눈은 그다지 반항적이지 않았다.
“인티머시, 곧 7년이지? 재계약은?”
“…….”
“7년 활동의 성료를 기념해야지. 비록 용의 꼬리가 아닐지라도, 뭐라도 필요해. 인티머시를 좋아해준 팬들에 대한 예의이고.”
“예의라고?”
“인티머시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활동이 흐지부지될 줄 알고 좋아했겠어? 꾸준하고 충실하게 활동하다가 아름다운 피날레 속에서 활동을 끝내리라 믿겠지. 그 믿음을 지켜주는 게 아이돌을 만든 사람의 책임이다, 준호야. 만약 인티머시가 이딴 식으로 끝나버린다면, 앞으로 누가 YJS 엔터를 믿겠어? 네 회사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인티머시를 위해, 그리고 인티머시를 좋아해준 팬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해야만 한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불꽃은 찾아오지 않을 거야.”
다 타버린 재를 그러안고 계속 달려야 한다.
이준호는 침묵을 지키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말, 실은 정호환한테 하고 싶었겠지?”
문규완이 쓰게 웃었다.
“그래. 직접 찾아가서도 결국 하지 못한 말이다. 너에게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사과받으러 와서 좆같은 말이나 쳐들었군. 결국은 이거 아닌가, 가로 엔터 괴롭히기는 그만두고 네 본업이나 잘해라.”
“그게 더 생산적이야.”
“뭐가 생산적일지는 회장인 내가 정한다.”
“넌 가로 엔터를 가질 수 없어.”
“그래, 누구 덕분에.”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어디에 사는 누구 덕분에 그의 계획이 거하게 망가졌으니까.
그럼에도 포기하기엔 이준호가 소모한 자본이 너무 많았다. 상징적 자본과 인적 자원, 사회적 자본을 과하게 써버렸다.
돈으로 표기하기도 힘든 손실이다.
그에 문규완은 쐐기를 박았다.
“우리 회사에서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다더라. 가로 엔터에 박성필 이사가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근데 진짜 그렇게 됐어. 웨이퍼센트가 성공했으니. 차기 그룹마저 그리될 거야.”
“확신하는군. 네가 도와주기라도 하려나 보지?”
“흐름이야. 강물처럼 명확한. 최소한 내년까지, 가로 엔터는 억지로라도 성공을 만들 거다. 훗날 허세인 게 들키더라도 말야.”
“상장(上場)…….”
“정정당당하게 가자.”
이준호는 어이가 없었다.
“내 손에 칼이 있었으면 네 배를 쑤셨을 거다. 개 같은 새끼…… 네가 할 말이냐?”
“이 새끼는 내 앞에서만 여포네. 왜, 남들 앞에서도 그러지?”
“너는…….”
이준호가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죄지었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자각이나 있나……?”
문규완이 능글맞게 웃었다.
“말했잖아, 내가 한 거 아니라고. 호환이가…….”
이준호는 살인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그리고 저러한 문규완의 태도를 보자 드디어 확신이 섰다.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이준호가 절대 불가능하리라 호언장담했던 웨이퍼센트의 성공.
성필은 그걸 이뤄냈다.
문규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건 거대한 흐름이다. 더는 거역할 수 없다.
웨이퍼센트의 성공은 가로 엔터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이었고, 이루어졌다.
다들 가로 엔터의 차기 그룹을 주목하겠지. 프로모션을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돌 팬덤의 대다수가 가로 엔터의 차기 그룹에 신경을 곤두세울 텐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초기 팬덤을 구축하고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나갈 게 분명하다.
맨바닥에서 소녀연맹을 성장시켰는데, 그보다 조건 좋은 후배 그룹이라고 불가능할까.
“하아…….”
이준호는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발작하듯 몸을 떨곤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문규완 이 씹새……!”
“그니까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닥쳐!”
문규완은 닥쳤다.
* * *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 사전 미팅.
성필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소녀연맹 멤버들이 박수갈채를 날렸다.
성필은 열받게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프로듀싱의 신 박성필입니다. 사인 요청은 자제 부탁드려요.”
“아저씨 그거 진짜예요? N플릭스 다큐 출연 섭외 들어왔다는 거?”
“하하하, 프로듀싱의 신에겐 당연한 일 아닐까?”
N플릭스에서 제작 중인 케이팝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다고 한다. 케이팝 산업의 주역들을 조명한다는 의도인데, 성필에게도 섭외 제안이 왔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으로 방송 출연 트라우마가 생긴 성필에겐 고민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정호환이 이미 촬영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곤 바로 섭외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 아저씨 좀 멋진데? 자신감 넘치는 거 보기 좋아요.”
“난 자신감이 없어. 다음 프로듀싱은 어떻게 될까…….”
성필은 근육 빠진 시바견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 침울해하는 모습도 좀 맛있는데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느낌?”
놀리는 거구나.
성필은 그냥 무시하고 회의실 상석에 앉았다. 그 옆엔 미리 자리 잡은 시즌4의 메인 프로듀서, 리카가 싱글벙글 미소 지은 채 있었다.
“오…….”
“아라야, 그만해.”
조아라의 놀림을 이어지려는 걸 장하양이 재빨리 제지했다.
“아니야 하양아. 내가 앉기만 했는데 무슨 칭찬을 할지 궁금하다. 그래 아라야, 내 어떤 모습이 멋지니?”
“오…….”
조아라가 기분 나쁜 감탄사와 함께 성필의 머리부터 테이블 위로 드러난 상체까지 눈으로 훑었다.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대체 뭔, 어떤 의식으로 흐름으로, 저런 반응이, 나오지……?”
“이사님이 진심으로 기분 나빠한다?!”
리카가 깜짝 놀랐다.
사실이었다.
자연스럽게 성희롱으로 넘어가는 조아라의 장난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조아라도 성필이 진심으로 기분 나빠함을 눈치챘는지 장난을 그만두었다.
“농담이었어요.”
“하양이 죄가 크다. 농담이라고 고백하면 다 봐주는 줄 아네.”
“아하하, 하아.”
“하양 언니도 기분 나빠한다?!”
“근데 설하는 자니?”
백설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눈을 깜빡이는 중이었다. 졸린 사람이 잠을 깨려고 노력하는 듯하여 성필이 물었다.
“아, 어제 잠을 별로 못 자서, 오시기 전까지 좀 자고 있었어요, 헤헤…….”
“왜 못 잤는데?”
성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곧 미주 투어를 떠나야 할 텐데 컨디션 난조라도 오면 큰일 아닌가.
“그, 그냥 잠이 안 와서…….”
성필은 장하양을 보았다. 그녀는 백설하와 같이 방을 쓰니, 백설하가 왜 늦은 밤 잠 못 들었는지 알 것이었다.
장하양이 아하하 웃었다.
“글쎄요.”
“둘 사이에 간이벽 있댔나? 그거 아직도 있어?”
“네. 언니가 프라이버시에 민감하셔서요.”
“가로 엔터가 미안해. 방 다섯 개는 있는 집으로 구해줬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너무 비싸더라고.”
“아, 아녜요. 하양이랑 같이 지내는 거 좋아요. 그치 하양아?”
“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으응.”
백설하는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모양이다. 어쩌면 계속 숙소 생활을 하기로 결정한 일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필은 아직 말을 못 섞은 신아름을 보았다. 그녀는 특유의 새침한 눈초리로 허공을 바라본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름이는 오늘 어때?”
“……그저 그래요.”
“아,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딱히…….”
그리 말한 신아름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첫째로 조아라가 기분 나쁘고요.”
“……그래 미안해요 다들. 아저씨 죄송해요. 하양 언니도요.”
조아라가 신아름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됐냐?”
“두 번째로 조아라가 접촉해서 기분 나쁘고요.”
“이 개…….”
“세 번째는…… 걍, 오늘이 진짜 오니까…….”
“오늘이라니?”
“내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마지막으로 확정됐잖아요. 부담돼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리카는 아직이긴 하지만, 그래도 프리 프로덕션 단계까지 왔다. 그러니 신아름을 제외한 이들은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가 지니는 중압감을 알았다.
마지막 차례일 신아름의 부담감도 말이다.
그 불안에 경중은 없겠지만, 마지막은 상징성이 크다. 심지어 신아름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성필이 위로를 건네려던 순간.
“네 번째로…….”
“또 있어?”
“케이어스 콘서트 봤잖아요. 생각보다 너무…….”
너무, 대단했다.
스케일에서도, 창조적인 발상에서도, 무대 퀄리티에서도, 모두 다 소녀연맹을 앞지르고 있었다.
“걔네들이 우리보다 낫단 생각은 요즘 들어 별로 안 나긴 했는데, 콘서트 보니까 또 들었어요.”
성필도 동감하는 바였다.
전생에 케이어스 콘서트를 빠짐없이 다녔던 성필조차 감탄할 퀄리티였으니 말이다.
‘전생에 이 시점에서 했던 공연보다 훨씬 더 대단했어.’
분석할 마음도 안 들었다.
매 순간 놀라면서 보았다.
하나하나 요소를 열거하기도 힘들었다. 레이저, LED, 무대 장치, 조명, VCR, 전부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났었다.
그에 비하면 소녀연맹의 콘서트는 빈약했단 느낌마저 들었다. 어쩔 수 없는 게, 들어간 자본의 크기가 다르다.
‘KS 엔터의 자회사 중엔 아예 공연 기획과 제작만 담당하는 곳이 있어.’
원래는 다른 공연 제작사에게 외주를 주었으나, 몇 년 전부터 자회사를 만들고 노하우를 축적했다.
최고의 아이돌 기획사가 오직 아이돌 콘서트만을 위해 만들어낸 기업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확립한 주역은 윤희연 이사였다. 한국 최고의 아이돌 비주얼 디렉터.
“돈 많이 들이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신아름의 물음에 성필은 쉽사리 답을 주지 못했다. 케이어스의 콘서트는 아이돌 콘서트에 해박한 성필조차 놀랄 퀄리티였다.
그만한 퀄리티를 가성비의 영역에서 이룰 수 있는 건 한국에 KS 엔터뿐일 것이다.
‘조진만 사장님이 그런 콘서트 제작이 가능할까?’
미지의 영역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성필이 줄 수 있는 답은 딱 거기까지였다. 공연 기획자가 아닌 성필이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사기나 마찬가지니까.
“다섯 번째로…….”
“또?”
성필이 아연해졌다.
신아름의 기분이 안 좋을 만도 하다. 걱정되는 일이 저렇게나 많은데 기분이 좋은 게 이상하지.
“요즘 팀장님이랑 있는 시간이 줄어든 거.”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 싸해졌다. 다들 이런 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보다 웨이퍼센트 선배님들이랑 카오틱 에너지(임시) 애들 보는 시간이 더 많은 거 같구…….”
그야 최근엔 웨이퍼센트의 컴백이 있었고, 카오틱 에너지가 곧 데뷔하니 그에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지…….
성필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해결해줄 수 있겠네. 앞으론 아름이한테 더 시간을 낼 수 있을 거 같아.”
“진짜요?”
“당연하지. 프로듀싱의 신은 거짓말 안 해.”
“그 호칭 계속 쓰게요?”
조아라의 태클에도 성필은 신아름만 보았다. 성필의 약속에도 신아름은 기분이 안 풀린 듯했다.
“우리보다 다른 그룹이 더 관심 가요?”
성필은 말문이 막혔다.
성필이 소녀연맹 멤버들 간에 편애하지 않으려 노력하듯이, 그룹들 간의 편애를 드러낼 수 있을 리 없다.
신아름의 표정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보이그룹이 돈 더 잘 번다니까 당연한가…….”
신아름이 그리 말하자 다른 멤버들이 미어캣처럼 성필에게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성필은 2차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식의 발언은 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말하고 싶으나, 신아름의 표정을 보니 도저히 싸늘한 반응이 안 나왔다.
이렇게 곤란할 때는 백설하가 제지해주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도 성필을 지긋이 쳐다보기만 했다.
‘다들 신경 쓰고 있던 거야……?’
아니, 장하양의 프로듀싱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건가.
웨이퍼센트 프로듀싱에 본격적으로 힘을 쏟기 시작하기 전까진 소녀연맹만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팀장님 진짜 나빠…….”
기어코 신아름이 울상을 짓자.
“어, 어, 당연히 너희가 1순위지.”
성필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리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신아름이 처연한 미소를 띠었다.
“말만으로도 기쁘네요…….”
성필이 당황해서 백설하를 보았다. 신아름의 이 태도가 진심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자신을 놀려먹으려는 장난은 아니느냐고.
백설하가 모른단 뜻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애정을 물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애초에 금기이기도 했다.
누구누구가 돈을 더 많이 버니까 더 좋아하죠? 어떤 아이돌이 프로듀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겠는가.
“아름아, 그, 아…….”
“죄송해요. 아까부터 이상한 말만 해서. 회의 들어가세요.”
“…….”
신아름이, 아름이가, 이럴 애가 아닌데.
전생의 신아름은 성필 멱살을 잡고 ‘쟤예요 나예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물었지, 저렇게 은연중에 질투를 드러내진 않았었다.
게다가 전생의 그녀는 내심 자신이 언제나 성필의 1순위임을 확신했다.
물론 전생과 현재를 1대1로 두고 판단할 순 없다. 그러나 신아름의 저러한 태도는 성필로선 심히 당황스러웠다.
“에, 엣헴!”
오늘의 주인공인 리카가 분위기를 바꾸려 꾸며낸 헛기침을 했다.
“조금 꿀꿀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의 시작을 알립니다!”
눈치 빠른 장하양이 박수를 치자 다들 따라 손뼉을 부딪쳤다.
성필도 황망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그럼 메인 프로듀서로서 이번 소녀연맹 앨범에 대해 중대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자, 박 이사님!”
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필의 뒤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양어깨를 짚었다.
과연, 성필도 뒤에서 어깨를 만지자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비틀지 못했다. 게다가 여전히 신아름이 보여준 반응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도 했다.
“저, 메인 프로듀서 이시카와 리카의 결정이에요! 앨범 프로듀서로 박 이사님을 임명합니다!”
성필의 박수가 멎었다.
“어엉?”
“다들 새로운 앨범 프로듀서님을 향해 박수 한 번 주세요옷!”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너 뭐라는 거…….”
“이해 못 하셨나요! 아타시(저),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 이시카와 리카는 이번 앨범 프로듀서로 박 이사님을 섭외할게요!”
성필의 뇌가 여과 과정을 거쳐 리카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총괄 프로듀서인 나를 앨범 프로듀서로 임명해서…….”
“앨범 프로듀싱 디렉팅을 맡길게요!”
성필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황망해졌다.
“뭐……?”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 시작.
“잘 부탁드려요 이사님! 자 그럼, 과연 그들의 앞날엔 어떤 미래가 기다릴 것인가! 다음 주에 계속!”
성필이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리카의 손을 붙잡고 손목을 꺾었다.
“끼에에에에엑!”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