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08화 (708/760)

708화

에리카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인간처럼 말했다. 나무에 묶여 화형당하기 직전의 여자가 이단 심문관을 향해 무고를 호소하듯이.

그녀는 자신에게 죄가 없단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죄지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건 얼마 전 윤희연을 만난 사건이 큰 몫을 했다.

이 회사는 더는 정호환이 있을 때처럼 자신에게 따스하지 않다.

특히 문규완이 자신을 직접 부를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잘못이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문규완은 기다렸단 듯 치고 들어왔다.

“기사는?”

“기사라는 게…….”

“웨이퍼센트의 유빈과 사무라이 걸즈가 엮여 있다는 기사 말이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어떻게, 라니.

대체 문규완은 무엇을 듣고 싶은 걸까.

문규완의 질문은 취조에 가까웠다. 두루뭉술한 말 안에는 ‘네가 아는 걸 전부 토해내라’라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유빈 선배가 기사를 내야 한다고 하길래 괜찮다고…….”

“그걸, 그걸……!”

문규완의 어조가 높아지려던 순간, 그는 코로 한숨을 토해내곤 테이블을 짚었던 손을 떼어냈다.

2m의 좁은 폭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길 반복하던 그가 다시금 한숨과 함께 멈췄다.

에리카는 제 발이 저려,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계약상 문제는 없는 걸로 알아서…….”

에리카는 과거 ‘서울 시티 보이’ 믹스테입 당시 자신의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시 읽어보았었다.

정호환이 그녀를 부정하기 전에도, 부정하고 난 후에도, 화해하고 난 후에 또 다시 말이다.

그래서 에리카는 ‘케이어스의 에리카’가 지닌 운신의 폭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유출해선 안 되는 정보는 회사의 대외비다.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는 KS 엔터의 일이 아니다.

“된다고, 했습니다…….”

문규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에리카에게로 몸을 향하고 있었으나 시선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살짝 비켜난 시선은 허공을 보는 중이었다. 무언가 생각할 게 있을 때 그의 버릇이었다.

인간을 보면 감정이 치솟아 오르니, 감정을 배제하고 생각을 가다듬는 것이다.

“방송에 출연하지 않아요.”

에리카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단 걸 증명이라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이튜브 채널이나 SNS에 제 모습과 발언을 노출하지도 않을 거예요. 믹스테입이니까 음원 사이트에 곡이 등록되지도 않아요. 계약은 아무것도 어기지…….”

“안다.”

드디어 문규완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건 바닥에 주저앉는 모양새와 많이 닮았다.

“알아.”

“……예.”

“안다고…….”

알기에, 에리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었다.

문규완의 비합리적인 복수를 에리카가 거하게 틀어막았지만, 그럼에도 문규완은 에리카를 탓하지 않았다.

물론 문규완이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에리카를 압박하여 뭐든 할 수 있다.

웨이퍼센트의 이름이 컴백을 앞두고 아이돌 팬덤에게 노출된 건 엎지른 물 같은 거라서 주워 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에리카를 압박할 순 있다.

“알아…….”

문규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가 에리카를 탓하지 않는 건 오로지 정호환 때문이었다.

‘에리카에게 믹스테입을 발매할 자유를 준 건, 호환이 너니까…….’

에리카가 도망쳤다가 마침내 KS 엔터로 돌아왔던 과거의 사건.

그건 문규완에게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가로 엔터로 직접 정호환을 데리러 가서 뜨거운 화해를 하기까지 했으니까.

그 사건 이후, 정호환은 에리카에게 자유를 부여했다. 그러니 에리카가 벌인 일은, 문규완의 계획을 망쳐버린 일은, 어찌 보면 정호환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정호환이 에리카에게 남긴 자유가 문규완의 계획을 망쳤다.

‘호환아.’

문규완은 이 상황이 계시처럼 느껴졌다.

‘하지 말라는 거냐?’

어제 정호환을 데리러 그의 집에 갔었다.

문규완은 정호환이 받았던 절망을 가로 엔터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말했었다.

그에 정호환은 대경실색했다.

음악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무엇이 남느냐고 물었었다.

그게 싫다면 돌아와라.

문규완이 그리 말하자 정호환은 눈을 피했었다. 그리하여 문규완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가로 엔터를 몰락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 첫 단추를 끼우려던 순간, 누군가가 문규완의 손을 붙잡았다.

에리카가, 정호환이 남긴 유산이, 문규완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짓은 그만두라는 거냐…….’

너는 내게 떠나서까지 내게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구나.

“회장님.”

문규완이 좌절한 듯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자, 에리카는 아까보다 더 움츠러든 목소리를 냈다.

“제……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당연히 에리카는 문규완의 심정 따위 모른다.

문규완이 이준호와 짜고 계획했던 일 따위 알 턱이 없다.

에리카는 혼란스러울 터다.

“아니.”

문규완이 얼굴에서 손바닥을 떼어냈다.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하고도 따스한 표정이었다.

그는 에리카를 향해 표정만큼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만 나가보렴.”

“제가 혹여나 실수했다면…….”

“실수는 무슨.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내일 콘서트가 있으니 푹 쉬어라.”

“……예.”

에리카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규완도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프로듀싱 총괄 집무실로 향했다.

* * *

“걱정되는 게 많아요.”

윤희연과 문규완은 폭이 1m는 가뿐히 넘을 법한 커다란 스크린 앞에 서 있었다.

윤희연이 딸깍딸깍 리모콘을 누를 때마다 스크린에 나타난 이미지가 빠르게 바뀌었다.

KS 엔터가 의뢰를 넣은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보낸 PTR―17의 앨범 커버 시안들이었다.

디자인 감각이랄 게 딱히 없는 문규완으로선 하나같이 호오(好惡)를 판별하기 힘든 것뿐이었다.

“아, 이건 어떠세요?”

윤희연이 한 이미지에서 멈추었다.

문규완은 당황했다. 윤희연이 가리킨 이미지는 문규완이 보기에 굉장히 혼란스럽고도 조잡했다.

조악한 3D 이미지와 시인성이 과하게 높은 색과 기괴한 폰트의 로고, 배경엔 현대와 과거를 아우르는 여러 소품이 실사와 그래픽으로 혼재되어 자리했다.

과잉이란 단어를 주제로 앨범 커버를 만들면 이런 결과물이 나올까 싶었다.

“나는 잘 모르겠군.”

“하이퍼팝의 이미지적 요소를 감각적으로 잘 사용했어요. 요즘 스포티파잉이 하이퍼팝 플레이리스트와 장르를 큐레이션했는데, 그게 또 먹히고 있거든요.”

“하이퍼팝……?”

“아,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에요. 스포티파잉 피디들도 뭔지 잘 모를걸요. 얼마 전에 대중음악 세미나에서 누가 하이퍼팝을 정의한답시고 발표했는데 아카데믹한 느낌이 너무 강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윤희연은 자꾸 혼자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난 건 문규완이 헛기침을 했을 때였다.

“어디까지 했었죠?”

“시작도 안 했네. 걱정이 많다고 했던 게 다야.”

“아, 걱정이 많죠. 믹스테입이라니. 우리가 모르는 데서 아티스트가 자기 멋대로 날뛰는 건 솔직히 참기 힘들어요.”

“어떻게 생각하지?”

“으음…….”

윤희연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아랫입술을 더듬더듬 만졌다. 그리고 또 손등으로 턱을 괴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나온 그녀의 답은.

“맛있겠다?”

“맛있어?”

“빨리 보고 싶어요.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돼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감독했으면 하고 바라요. 물론 회장님은 계획이 틀어진 게 못마땅하실 테지만…….”

윤희연은 회사의 업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위치다. KS 엔터 내에서 프로듀싱 파트의 힘은 그 어느 곳보다 위에 있으니.

그렇기에 윤희연은 문규완이 가로 엔터를 향해 모종의 수작을 부리고 있단 걸 모를 수 없다.

“저는 그래요.”

“나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닌가.”

문규완이 힐난하듯 물었다. 그에 윤희연은 듣는 사람이 다 시원할 정도로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회장님, 제가 왜 KS 엔터에 취직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아이돌을 좋아해요. 아이돌을 좋아해서 이 회사에 들어왔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리카와 에리카가 한자리에 모인단 이벤트는 군침이 돌죠.”

“내 의중과 에리카의 돌발행동을 알고도, 재밌겠다는 이유만으로 방기한 건가?”

“에리카가 믹스테입인지 뭔지 그런 걸 하는 줄은 몰랐어요. 저도 기사를 보고 알았는걸요.”

변명인가, 그리 생각한 순간.

“뭐, 알았어도 말리진 않았을 거지만요.”

윤희연이 말했다.

“애초에 제가 뭐라고 그래요. 제가 하는 일이 매니지먼트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리고?”

“에리카의 자유는 정 이사님이 남기신 유산이니까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폐기했지 않나.”

“했죠. 그거랑은 달라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미완성이었어요. 쓰이지 않은 소설의 결말이고, 완결을 앞두고 종영한 드라마예요. 아무리 머리가 용이면 뭐해요. 몸과 꼬리가 그려지지 않은 이상, 용 머리에 닭의 몸이 달린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니, 닭 몸이라도 달린 게 차라리 낫지.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거에 무슨 평가를 내릴 수 있죠? 그에 비해…….”

에리카가 ‘서울 시티 보이’로 얻어낸 자유는 명백히 정호환이 부여해준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에리카가 믹스테입으로 표현하는 창조성과 자율성은, 제가 부정할 수 없는 정호환 이사님의 온전한 판단이에요.”

“…….”

“회장님의 편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녀의 경쾌한 어투는 ‘아부 못 해서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 다음 분기에 잘리는 건 아니죠? 대답 바꾸길 바라세요?”

“아니.”

완벽한 답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뺏어도 되겠나?”

“조금만이에요.”

윤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웨이퍼센트는 어떻게 될 거 같지?”

“저는 신이 아닌데요. 예지 능력은 없어요.”

“윤 이사가 맡는다고 치면, 이전의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겠나?”

“가능하죠.”

윤희연은 자신만만했다.

“KS 엔터의 인프라를 죄다 쓸 수 있으면 식은 죽 먹기죠.”

“윤 이사가 가로 엔터에 있었다면?”

“농담하세요?”

윤희연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청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요. 그도 그럴 게 6년 차 보이그룹이잖아요? 심지어 활동의 5년을 쓰레기처럼 날려버린? 평범한 그룹도 판매량이 떨어질 걸 걱정해야 할 시기인데 거기서 자체 커하(커리어 하이)를 경신해야 한다고요? 운이 따라준다면 모를까, 안 되죠. 여태껏 판매량이 유지되는 게 신기할 지경이예요. 애초에 승부에 들어서선 안 되는 종목이고요.”

“……보통 사람들은.”

문규완은 눈앞의 스크린을 검지로 천천히 쓸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성공을 운이라고 표현하곤 해. 근데 기실 운이라는 놈은 능력이더군. 단지 인간이 계산할 수 없을 뿐이야. 나는 알 수 있어.”

KS 엔터를 일궈오고.

SMS 엔터, YJS 엔터와 수십 년간 싸움을 거듭해온 문규완은 알 수 있다.

“이 업계는 운이 전부라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극소수의 경우가 존재해. KS 엔터를 비롯한 대형 기획사들이 그러해. 운이 연속해서 이어진다면 그건 더 이상 운이 아니고…….”

“실력이죠.”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운이야.”

문규완은 그걸 목격하고 있다.

가로 엔터가 바로 그러하다.

“이렇게까지 세상이 도와준다면 더는 운이 아니겠지.”

감정과는 별개로, 다음이 보고 싶어진다.

윤희연이 삐친 듯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어째 저보다 그 사람을 더 고평가하시는 느낌이네요.”

“첨언이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하는 일은 없어.”

“예를 들면요?”

“아이돌 문화가 쇠락하여 더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00년대 초중반의 긴 세월. 호환이는 그 꿈을 끈질기게도 붙들고 있었어. 그리고 다키스트란 이름과 함께 부활시켰지.”

윤희연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전설이시죠.”

한국의 대중문화를 영원히 바꾸어버린 남자.

둘은 그의 빈자리를 느끼듯, 흘러가는 시간의 공백을 침묵으로 채웠다.

그 침묵이 끝난 순간, 윤희연이 묘한 열기와 함께 물었다.

“내기하실래요? 그 6년 차 그룹이 커하를 달성할지 말지. 저는 못 한다로 할게요. 고작 이름이 좀 알려진 걸로 팬을 모을 수 있다면, 세상 유명해진 사람들은 죄다 사업에서 성공하겠죠. 저는 실패한다에 걸게요.”

“만약 신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내기하라고 한다면.”

“뭐예요 그게?”

“나도 실패한다에 걸 거야.”

조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 * *

“왜 아이돌을 좋아하세요?”

갑작스럽게 유빈이 그리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성필은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멋지고 귀여워서.”

“멋지거나 귀여워서가 아니고 멋지고 귀여워서요? 교집합이에요?”

“응.”

유빈은 쉽사리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소녀연맹의 근본적인 컨셉만 하더라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귀여움을 주장하기엔 어느 멤버의 나이가 높기도 하다.

하긴, 성필의 나이쯤 되면 그 어느 멤버의 나이도 귀여워 보이긴 하겠지.

“추가설명 필요해?”

성필이 그리 묻자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면 어떤 이야기든 달게 들을 듯하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고 싶었으니까.

“멋지다는 건 그거야.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이 넘치도록 있는 사람이, 예술에 삶을 걸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잖아. 적어도 난 아름답다고 생각해. 동경하고 있어.”

“거기에 저도 포함돼요?”

“당연하지.”

“쪼금 부끄럽네요. 그럼 귀엽다는 건요? 말 그대로 외모가 그렇다는 거예요?”

“아기 있잖아.”

“아, 이사님 나이쯤 되면 저희들은 전부 귀여워 보이는 거네요. 저희들이 아기를 볼 때처럼…….”

“나 35살이야. 너희들이 다 아기처럼 보일 나이는 아니거든?”

성필은 나이와 관련된 공격에 일찍이 면역 비슷한 것을 얻었다. 조아라가 아저씨라고 불렀을 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유빈이 성필의 나이를 농담 소재로 써먹는 건 기껍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친근하게 여긴다는 표식 같은 거였으니까.

“아기들은 보통 그렇지. 자기가 사랑받을 걸 의심하지 않아. 사람을 가려서 울지도 않고, 사람을 가려서 웃지도 않아.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면서 팔을 뻗어. 그런 아기를 보면 귀엽잖아.”

“……아이돌이 그래요? 제가 아기처럼 보이세요?”

“음.”

성필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를 상상해봐.”

“했어요.”

“몇 명이야?”

“어…… 한 서른, 마흔? 제가 2층 카페에 있는데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어요.”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상상해봐.”

“백 명?”

“더 많이.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평범한 거리로는 안 되겠는데요.”

유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성필도 웃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과대망상.”

“……네?”

“그런 어처구니없는 나르시시즘이 탄생시키는 인간을 떠올려봐. 그 인간이 아이돌이야. 그 망상이 아이돌을 만드는 거야. 실제로 수만 명, 수십만 명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신과 같은 인간을. 거짓말이 살짝 들어간 믿음으로, 아이돌은 탄생해.”

성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귀엽지? 예를 들어 아라가 대표적인데. 걔는 누가 자기를 싫어할 거란 생각을 거의 못 하는 거 같아. 자기가 뭘 해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나 봐.”

“그래서 이사님을 공격하는 건가 보네요.”

“공격…….”

가볍게 놀리고 가볍게 손바닥으로 치는 걸 공격이라고 부른다면 뭐, 성필은 조아라에게 공격당하는 게 맞긴 하다.

“귀엽다는 걸 이렇게 정의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사람들은 아는 걸 더 좋아하고 사랑하게 돼 있어. 앎이 깊어질수록 더 그래. 지식이 인간을 집어삼키는 거지. 그래서, 유빈이 넌 아이돌을 왜 좋아해?”

유빈은 테이블 위에 올라온 핸드폰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화면이 밝아지며 시각이 표시됐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이 남았다.

“뭐라고 할까, 별거 없어요. 어떤 사람들이 코코넛에 관심을 가지듯이 저는 아이돌에 관심을 가진 것뿐이에요.”

“와, 뭔데? 방금 네가 한 말 애정을 엄청 잘 표현한 거 같아. 네가 만들었어?”

“어떤 책에서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그리고 방금 이사님 말투 아라 후배님이랑 좀 비슷했어요. ‘와, 뭔데’라는 부분이 특히요.”

“어쩌라고.”

“네?!”

유빈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까의 설명은 불충분하단 듯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사랑받고 싶다기보다, 사랑을 주고 싶어요. 아, 근데 아이돌이 사랑을 주려면 일단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 이사님 말씀이 맞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사랑을 주고 싶어?”

“적어도 저는, 그리고 미래에 제가 만들지도 모를 아이돌들은, 사랑을 주는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해주는 그런 존재이길 바라요.”

“멋지네.”

“귀엽고요?”

“넌 사랑받고 싶은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귀여운 건 아니지. 그냥 멋진 걸로 하자.”

성필은 손목시계를 보며 일어났다. 유빈도 그를 따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둘은 휴게실을 나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웨이퍼센트 멤버들은 아직 갈 시각이 되지 않았는데도 가로 엔터 1층 홀에 모여 있었다.

그 주위엔 웨이퍼센트의 컴백을 배웅하러 가로 엔터의 중진들이 대기했다. 마치 소녀연맹의 데뷔 때를 연상시키는 풍경을 보며 성필이 감상에 젖어 있는 순간도 잠시.

“살짝 빠르긴 한데, 지금 갈까?”

유하음이 성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사형대 올라가길 기다리는 애들 같아. 뭐라도 일단 진행이 되어야 진정하겠다 싶어서.”

성필은 유하음의 어깨 너머로 웨이퍼센트 멤버들을 보았다. 그들은 유하음의 말마따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컴백할 때도 저랬어?”

“저러긴 무슨. 다 힘 빠진 닭 같았어. 근데 이번엔 이상하게 긴장하네.”

“기대 때문이겠지.”

유하음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사람은 기대가 없으면 긴장도 안 하니까.”

성필은 진행하자는 듯 유하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음이 손뼉를 치며 웨이퍼센트 멤버들에게 외쳤다.

“얘들아 가자! 출발!”

웨이퍼센트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줄줄이 현관을 나섰다.

성필도 그들을 따라갔다.

웨이퍼센트와 동행하는 건 유하음과 로드매니저, 그리고 성필이었다. 이후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다.

“얘들아 파이팅!”

손혜빈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뒤이어 홍규헌과 한구인, 민경섭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웨이퍼센트를 응원했다.

아마 웨이퍼센트에겐 그 응원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응원은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성필은 현관을 나서기 전 잠시 멈추었다. 돌아보곤 홍규헌과 눈을 맞추었다.

성필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홍규헌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성필이 현관을 나섰다.

“박 이사님.”

주차장 저 멀리로 가 있는 멤버들과 달리, 강현은 아직도 현관 근처에 서 있었다.

“어, 현아.”

그는 초조함과 불안이 극에 달한 표정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강현이 사과했다.

성필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투로 되물었다.

“뭐가 죄송해.”

“이, 이게, 그러니까, 이건, 저희의 컴백은 박 이사님의 두 번째…… 두 번째 커리어잖아요. 그게, 이사님의 두 번째가 저희라는 게…….”

오직 빛과 영광만이 가득해야 할 성필의 길에 웨이퍼센트가 끼어들었다.

강현은 그에 죄책감을 표했다.

황금으로 포장된 길에 끼어든 비렁뱅이처럼 그의 얼굴엔 구차함과 비굴함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불안. 초조. 그게 쌓여서 공포가 됐다.

강현은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성필에게 미리 사과했다. 감히, 정말로 감히, 자신이 성필의 프로듀싱 커리어 중간에 끼어들어 죄송하다고.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실패를 기정사실로 했다.

그래서 사과하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성필을 잡아둬서 죄송하다는 걸까, 아니면 아까 이야기하던 것의 연장선으로 말한 걸까.

강현은 허리를 꾸벅 숙인 후 주차장의 밴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성필은 그와 거의 동시에 걸어 그를 따라잡았다.

“현아.”

성필이 강현에게 어깨동무했다.

강현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곧 다시 걸어야 했다. 성필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기에.

“네 말이 맞아. 내가 두 번째로 프로듀싱하는 그룹은 훨씬 대단했을 수도 있어.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으로 이름을 알렸어. 오디션을 열면 연습생들이 많이 찾아오고, 오디션 영상을 보내는 애들은 그보다 훨씬 많아. 그중엔 굉장한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다수 있겠지. 그런 아이들을 뽑고,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트레이닝시키고,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며 시간을 들였다면, 분명 대단한 그룹이 나오겠지. 내 두 번째 커리어는 이보다…….”

흐린 달이 뜬 밤.

의지할 건 주홍색 가로등뿐.

어둠으로 향하듯 두려움을 품고 차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현재보다.

“훨씬 더 밝고 희망찼을 수 있지.”

강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동시에 힘을 잃고 아래로 축 떨어졌다.

그런 그의 어깨를 성필이 꽉 붙잡았다.

“그럼에도 너희를 선택한 거야.”

강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미래보다 너희를 데려온 지금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기에, 너희를 데려왔어. 이게 내가 선택한 미래야. 내가 선택한 미래가 너희야. 현아.”

“예…….”

“네가 가로 엔터로 오기로 한 날 기억해? 그때 내가 말했었지. 자본주의는…….”

“……희소한 재능에 반드시 보상한다.”

“너는 오늘 밀린 보상을 받으러 가는 거야.”

성필은 어깨동무를 풀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정신 차리도록 조금 강한 힘으로.

“만약 너희가 내 눈에 안 찼다면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고.”

그 뒤, 성필은 강현의 등을 힘차게 밀었다.

“컴백시키지도 않았을 거야. 가자.”

가자고 한 주제에, 성필은 강현보다 빠르게 걸어 그를 추월했다.

가로등이 비추는 밴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을, 강현은 뒤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똑바르지 않은 걸음과 흔들리는 어깨.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필도 긴장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돌의 성패는 곧 프로듀서의 성패이니.

결코 가벼운 마음일 리 없다.

강현의 걸음이 단단해졌다. 그는 올곧고 똑바르게 걸어 밴으로 다가갔다.

* * *

이전과 확연히 다른 공기다. 5년 동안 방송국을 드나들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없었다.

모든 게 선명하다.

복도를 가로질러 무대로 향하는 길.

중간중간 마주치는 아이돌, 스태프들과의 인사.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업무에 관한 이야기들.

시시콜콜한 잡담과 짜증 섞인 고함.

흰색의 복도가 이토록 많은 감정을 품고 있는 줄 이전엔 미처 몰랐었다. 아마, 유빈 자신의 감각이 날카롭단 뜻일 터다.

왜일까.

웨이퍼센트의 성공을 알리는 새로운 장(章)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밝고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지길 바라는 희망이 싹텄기 때문일까.

“얘들아.”

웨이퍼센트에겐 매우 희귀한 경험인 사전 녹화.

최근엔 경험해본 적도 없는 이벤트를 앞두고, 성필이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이유는 알겠다.

멤버 전원이 오늘 데뷔하는 아이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기 때문이겠지.

유빈은 일곱 명의 멤버 중 가장 뒤에 서서 성필에게 집중했다.

“긴장했지? 당연히 긴장했을 거야. 나도 그런데 무대에 서는 너희라고 안 그럴 리가 없지. 사전 녹화니까 몇 번이나 다시 찍을 수 있어. 틀려도 돼. 실수해도 돼. 그러니까 과한 긴장은 안 해도 괜찮아.”

별다른 위로는 되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모두의 얼굴이 어둡다.

성필은 긴장했단 게 거짓말이 아닌 듯 급하게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생각을 바꿔. 너희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게 아니야. 너희를 보기 위해 온 100명의 헌드레드들을 위해서도 아니야.”

스태프들이 오밀조밀 모인 웨이퍼센트와 성필을 바라본다. 곧 무대에 오르는데 스테이지 입구에 있긴커녕, 구석에 틀어박혀서 스포츠 경기 작전회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러나 다들 주변의 시선엔 개의치 않았다.

웨이퍼센트는 성필의 얼굴만 보고, 그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데뷔 6년 차, 이토록 프로듀서에게 의지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의지할 만한 프로듀서를 만난 게 처음이었다.

성필은 뚫어버릴 듯 강렬한 눈으로 멤버 전원과 눈을 맞추었다.

“관객들이 들어오겠지. 보통은 앞에서 중간쯤 되는 사람들 얼굴이 가장 잘 보이지? 눈도 제일 잘 마주치고. 아이돌 중엔 공연 중 딱 한 사람을 찍고, 그 사람에게 잊지 못할 공연을 선사하겠단 마음가짐을 품는 사람도 있어. 혹은 팬들 바다처럼 보고, 어떤 덩어리를 향해 공연한다는 마음가짐을 품는 사람도 있고.”

“……어느 쪽이 옳을까요?”

리더인 강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말을 끝낸 후 필사적으로 입술을 닫았다.

두려움으로 몸이 덜덜 떨려, 입을 열면 이빨끼리 따다다닥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지금의 너희에겐 어느 쪽도 옳지 않아. 가장 뒤의 팬을 봐.”

“네?”

“웨이퍼센트, 너희를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지만 안타깝게도 맨 뒤에 서게 된 팬을. 관객석의 가장 뒤. 마지막의 마지막, 최후의 최후에 선 팬 한 명에게 너희의 마음을 전하는 거야. 그러면 자연스레, 모두가 너희를 보게 돼.”

성필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그 위에 손을 겹쳤다.

성필이 외쳤다.

“헌드레드(100) 퍼센트!”

웨이퍼센트가 답했다.

“여러분의 마음으로 가는 길!”

웨이퍼센트입니다!

멤버들은 우르르 스테이지 위로 나섰다.

방청을 위해 모인 ‘헌드레드’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보냈다.

가로 엔터에서 새롭게 제작하여 판매한 응원봉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었다.

봉의 끝부분에 달린 실린더엔 0부터 100까지의 눈금이 있었다. 그 눈금은 이미 100에 도달하여 바다와 같은 푸른빛을 내뿜었다.

웨이퍼센트는 바다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유빈은 바다 내음을 들이키듯 코로 스테이지의 공기를 음미했다. 눈을 감고, 다시 떴다.

피부를 뚫을 듯 밝은 조명은 여름날의 태양 같았다. 방송국으로 올 때 느꼈던 태양보다 훨씬 강렬하지만, 눈앞의 바다 덕분에 그리 뜨겁진 않다.

‘관객석의 가장 뒤. 마지막의 마지막, 최후의 최후에 선 팬 한 명에게 너희의 마음을 전하는 거야.’

성필이 했던 말을, 유빈은 가만히 곱씹었다. 그리고 금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유빈은 100명의 팬 중 가장 뒤를 보았다.

가장 뒤, 가장 구석에 자리한 팬.

그녀는 키가 작아 까치발을 드는 듯, 자꾸만 얼굴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손을 번쩍 들어 응원봉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관객석의 가장 뒤, 마지막 한 사람에게 닿도록 마음을 전한다.’

그런 거.

‘데뷔할 때부터 알고 있었어.’

최후의 한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사랑이 닿도록. 그런 아이돌로 살아왔다.

‘그게 나의 아이돌리즘이니까.’

곡이 흘러나왔다.

귀를 사로잡는 메인 멜로디 악기의 선율을 듣자, 유빈은 어째서 아까 방송국이 이전과 달리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기뻐서다.

드디어, 사랑하는 헌드레드들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줄 수 있는 노래가 생겨서.

기뻤다.

“강도다! 강도야!”

강현이 다급한 얼굴로 유빈에게 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강도예요! 강도가 훔쳐 갔어요!”

“뭘요?”

유빈은 정면을 보고 화사한 웃음을 보였다. 찡그린 눈가에선 장난기가 경쾌하게 요동쳤다.

유빈이 장난스러움과 애절함을 절반씩 담아 소리쳤다.

“제 마음을요!”

웨이퍼센트 신곡.

‘강도가 심장을 뺏어갔어요(Heart robbery)’.

* * *

“한다.”

가로 엔터 1층 홀.

사장 홍규헌을 비롯한 이사진들.

이재호가 부팀장으로 있는, 웨이퍼센트의 프로듀싱을 담당했던 A&R팀과 디자인팀, 홍보팀.

웨이퍼센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곡이 흐르고 헌드레드들이 함성을 내지른다.

홍규헌이 손에 땀을 쥐었다.

‘이 순간이 분기점.’

가로 엔터의 생존이 이 순간에 달렸다.

웨이퍼센트가 실패하면 가로 엔터의 성장에 제약이 걸린다. 그리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압박에 쪼그라들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웨이퍼센트가 성공하면.

‘가로 엔터에겐 다음 스텝을 향한 길이 열린다.’

가로 엔터의 모두와 약속했던, 한국 최고의 기획사로 가는 길이.

‘미안하다 얘들아.’

홍규헌은 속으로 웨이퍼센트에게 사과했다.

약속했던 것만큼의 지원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심장이 흘러넘칠 듯하다.

가로 엔터가 보장할 수 있던 건 프로듀싱의 퀄리티뿐. 그것만으로 승리를 비는 건 그래, 조금은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부탁할게.”

홍규헌은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강도가 훔쳐 갔어요, 제 마음을요!]

웨이퍼센트,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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