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화
망돌.
망한 아이돌의 줄임말이다.
음악 방송 출연 횟수도 적고, 텔레비전 예능이나 아이튜브 콘텐츠 채널에 등장하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덕질하고 싶어도 덕질할 요소가 없다.
‘웨이퍼센트가 누구야?’
민서가 고등학생일 때 자주 들은 말 중 하나다.
흔히 학년 초에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취향을 파악하는 시기가 있다.
부테스, WTP, SON, PTR―17, 라이츠, 쟁쟁한 아이돌을 최애로 꼽는 이들의 사이에서 언제나 민서는 소수였다.
‘너 이거 봤어?’
친구들은 그러한 유명 아이돌의 사진이나 영상을 곧잘 공유하곤 했다.
민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고픈 마음이 있었다. 소심한 영업을 몇 번 시도했으나, 얼마 안 가 포기하게 됐다.
‘걔네들을 왜 좋아해?’
이 또한 민서가 자주 들은 말 중 하나다.
왜 좋아하냐니.
덕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 좋아졌다.
물론 웨이퍼센트의 장점을 꼽자면 외모부터 인성까지 자세히 하나하나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픈 사람은 없겠지.
웨이퍼센트의 팬덤, 헌드레드인 민서는 외로운 덕질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됐고 그리 살아갔다.
[그래가지고요.]
방학의 끝 무렵, 민서는 알 수 없는 노스텔지아에 사로잡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물려둔 거치대의 핸드폰 안에선 웨이퍼센트 막내 유빈이 라이브 방송을 하는 중이었다.
누적 시청자 수는 수백 명이 정도였다.
민서는 무심코 실소가 나왔다.
‘팬덤 이름은 진짜 잘 지었어.’
헌드레드.
뷔라이브는 실시간 동시 시청자 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민서가 확신하건대, 아마 100명 남짓할 것이다.
웨이퍼센트 멤버들의 합동 방송이 아니고서야 시청자 수는 급격히 오르지 않는다.
아마 멤버별로 개인 팬 성향이 강하여 모든 방송을 보진 않는 듯하다.
그렇게 멤버들은 항상 100인 결사대 헌드레드들을 이끌고 라이브를 진행한다.
생각 없이 방송을 보던 도중, 유빈이 새로 배운 애교라면서 기세등등해졌다.
[여러분 캡처 준비하세요.]
그러곤 유빈은 어디선가 비눗방울 총을 꺼내어 자신의 머리 위로 쏘았다.
비처럼 떨어지는 비눗방울 속에서 유빈이 요정처럼 해맑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보냈다.
‘아, 이거.’
걔네들을 왜 좋아해?
민서가 들었던 그 질문의 답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들이 민서를 헌드레드로 있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덕질할 만한 게 없어서 괜히 마른 우물 아래로 양동이를 던져보는 것만 같은 덕질 라이프더라도, 가끔 건져 올라오는 물 한 모금이 있기에 살아간다.
게다가 오늘은 운이 좋다.
평소였으면 SNS 업데이트 훑어보기, 옛날 영상 재탕하기로 끝났을 덕질에 유빈의 라이브 방송이 더해졌으니 말이다.
[어땠어요? 사진 많이 찍었어요?]
민서는 웃으면서 우는 이모티콘을 백만 개는 찍어 채팅창에 올렸다.
유빈은 그 뒤로도 개인 방송 스트리머 못지않은 입담과 재롱을 선보이다가, 서서히 할 말이 떨어졌을 때 방송을 그만두었다.
[곧 만나요 우리 헌드레드들.]
검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며 민서는 낮게 한숨을 뱉었다.
‘가로 엔터로 옮겼을 땐 다들 기대하는 분위기였었지.’
소녀연맹의 기획사가 웨이퍼센트를 가져갔다.
설마 구석에 두어 썩이려고 영입했을 리는 없으니, 곧 웨이퍼센트에게도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가로 엔터의 웨이퍼센트 영입은 그야말로 컴백에 버금가는 엄청난 떡밥이었다.
더는 나사가 여러 개 빠진 곡이나 컨셉도 없을 거고, 우리 애들이 그렇게 나가고 싶었던 방송에도 마음껏 나갈 거고, 마침내 십만장벽을 뚫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컴백이 며칠 안 남은 현재까지도 웨이퍼센트의 스케줄러엔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 안 보인다.
사실상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다. 그걸 보고 헌드레드들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소녀연맹의 기획사더라도, 망돌을 되살릴 순 없는 노릇이구나…….’
하긴, 가로 엔터에 보이그룹을 영업할 만한 노하우나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이상하다.
소녀연맹도 ‘애플 크러쉬’ 이전까지는 인지도가 있는 신아름 정도만 간간이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췄을 뿐 아니던가.
그래도 헌드레드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번 활동으로 웨이퍼센트가 성공하고 가능성을 증명한다면, 다음 컴백에야말로 진짜 큰 게 올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음 컴백은 진짜 프로모션이랑 콘텐츠가 빵빵할 거야. 소녀연맹이 자컨(자체 컨텐츠) 많기로 유명하잖아. 우리 오빠들도 꼭…….’
민서는 희망 회로를 돌렸다.
그래, 그건 오직 희망이었을 터였다.
[글로브·소녀연맹·케이어스…… 유닛 프로젝트?]
시각은 저녁.
글로브와 소녀연맹, 케이어스 멤버가 한데 모인 프로젝트 그룹이 만들어진단 기사가 나왔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동시에.
어느 기획사로부터 보도 자료를 받아 작성한 듯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사실상 어떤 기사를 보아도 다를 바 없으니 기사로서의 독점적 가치는 없었다. 그럼에도 모든 신문사가 기사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현시대의 정상급 아이돌로 평가받는 세 그룹이 모여 유닛 프로젝트를 한다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과거의 정상급 걸그룹이었던 븨이에스, 인티머시, 레이어드가 모인 것과 같다.
팬들이 안 이루어질 것을 알지만 그래도 희망해보는 궁극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이 소식은 곧 온갖 SNS와 커뮤니티로 퍼날라졌다.
[미쳤다]
반응은 이 하나로 통일됐다.
소녀연맹 팬덤인 인민과 케이어스 팬덤인 유스는 철천지원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녀연맹과 케이어스 멤버들이 개인적 친분이 있더라도 그러하다. 라이벌리는 경쟁심을 유발하고, 이는 팬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팬덤끼리의 경쟁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덕질하는 그룹이 이룬 성과를 자랑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건 다른 그룹에겐 욕이나 마찬가지다. 자랑하기 위해선 비교가 필요하니까.
그 비교가 상대를 헐뜯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스가 소녀연맹을 증오하거나 인민이 케이어스를 증오하진 않는다. 각자 곡이 나오면 듣고, 좋으면 ‘좋아요’를 눌러 저장하고, 뮤직비디오도 본다.
싫어해도, 작업물까진 작정하고 싫어하진 않는다.
[유닛 프로젝트면 몇 명씩 뽑히지?]
반응엔 평소엔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함으로 가득했으며, 희망과 기대가 흘러넘쳤다.
뇌피셜과 궁예질을 거듭하며 프로젝트 유닛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미쳤다.’
민서도 이 소식을 접하곤 기대감을 품었다.
그 세 그룹의 노래는 그냥 듣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톱티어 아이돌이 모인다는 건 그 자체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돌판 어벤저스였으니까.
아이언맨을 좋아하고 평소에 캡틴 아메리카를 ‘방패 원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어벤저스에서 둘이 만나는 순간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서의 기대는 단순한 기대에서 그쳤다.
‘곡 나오면 뮤비 꼭 봐야지.’
그 정도가 유일한 감상이었다.
웨이퍼센트를 덕질한다고 딱히 아이돌판에 밝고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다.
그랬을 텐데, 시간차를 두고 밤에 또 다른 정보가 튀어나왔다.
[프로젝트 유닛 멤버는 노아·리카·에리카.]
유닛 멤버가 밝혀진 것만으로도 또 돌판이 뒤집혔다. 에리카와 리카가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흥분해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노아는 왜 있음?]
[일본인이잖아.]
노아라는 인선에 의문을 표하는 이도 있었으나, 아무튼 리카와 에리카가 모였으니 OK라는 반응이 다수였다.
여기까지도 민서의 감상은 ‘와’ 수준에서 그쳤다. 그 뒤의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정식 상업성 기획 프로젝트가 아닌 믹스테입 기획으로서…….
모든 멤버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이 모든 멤버을 모으고 프로젝트를 기획한 프로듀서는…….]
그 글을 읽는 순간, 민서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웨이퍼센트의 유빈.]
민서는 떨리는 손으로 커뮤니티와 SNS에 ‘웨이퍼센트’를 검색했다.
SNS에서 웨이퍼센트를 덕질하는 사람들이야 뻔하다. 민서가 진즉 팔로우해둔 이들이다.
그런데 웨이퍼센트를 검색하니, 처음 보는 닉네임들이 가득했다. 그걸 넘어 실시간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글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얼마 안 가 ‘웨이퍼센트’와 ‘유빈’이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
트잇이 실시간으로 수십, 수백 개씩 쏟아져 나온다.
‘나는 꿈을 꾸는 건가?’
구글에 검색해도 웨이퍼센트를 언급한 새로운 글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이젠 발품을 팔지 않고도 정보의 홍수가 몰아쳐 온다.
‘아.’
메이저 아이돌을 덕질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감상을 공유하고 있었겠구나.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아, 얘 걔잖아.]
그리고, 이젠 민서도 그 행복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분홍머리 걔.]
과거 유빈이 발표했던 믹스테입 뮤직비디오인 ‘하나사키 인 서울’이 다시금 재조명받았다.
조회 수가 몇 시간 만에 수십만 더 올랐다.
사람들은 이로써 유빈의 프로듀싱 능력과 방향성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유빈을 덕질하고 있다.
그들의 감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민서는 황홀감에 사로잡혀서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그리고 화룡점정이 찾아왔다.
유빈의 SNS에 글이 올라왔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방송으로 설명드릴게요 ㅋㅋㅋㅋㅋㅋ]
당연히 뭐, 난리가 났다.
* * *
주식을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수십억 규모로 투자하려면 더 이상 나이브한 정신 상태로는 있을 수 없다.
마음이 급해서 사고, 팔고, 물리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살까’라며 고심을 거듭한다.
기업 연간 보고서에서 리스크와 경영진 의견을 간단하게 읽어보고, 실적 보고서를 분석하여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보고, 스트리트 컨센서스와 자신의 결론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주가창을 보면서 ‘이쯤? 이 정도로 내려올까?’라며 다시 마음을 졸인다. 관련된 기사를 계속 확인하며 언젠가 올 그날을 기다린다.
YJS 엔터 회장, 이준호의 마음이 그러했다.
언젠가 막다른 길에 몰려 자포자기할 가로 엔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웨이퍼센트의 실패는 비유적으로 가로 엔터의 주가가 내려가기 시작하는 폭죽이 될 것이었다.
[꿈의 그룹, 등장 예고!]
[총괄 기획자는 웨이퍼센트의 유빈]
[웨이퍼센트 분홍머리 걔를 기억하시나요?]
[역대급 성과의 믹스테입 프로듀서 유빈.]
[웨이퍼센트의 컴백으로 프로젝트의 결과를 짐작해볼 수 있을까?]
[KS 엔터가 가로 엔터와 석세스 엔터를 인수한다? KS 엔터 주가 상승의 기대심리]
이준호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피를 벅벅 긁었다.
어느 기업의 주식 인버스(주가가 떨어지면 수익을 얻는 상품)를 구매했는데, 다음날 웬 대기업이 그 기업을 인수하기로 했단 기사가 쏟아진 기분이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이준호 회장님이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가로 엔터로 찾아갔을 때 홍규헌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준호는 일부러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죽상을 하고 자신의 앞에 찾아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이준호는 폰을 쥐고 한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KS 엔터의 문규완 회장이었다.
‘왜?’
아주 간단한 의문이다.
‘왜 나를 배신했지?’
함께 가로 엔터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가기로 했잖은가. 서로의 이득을 교환한 아주 좋은 거래였을 것이다.
이대로 둘이 2·3년간 쿵짝을 맞추었다면, 가로 엔터는 결코 이준호가 제시했던 1,0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어째서?’
이준호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가 떠올리는 이유는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머릿속에 떠올리면 열불이 끓어올라 버티기가 힘들었다.
문규완이 이준호와의 약속을 어기고서 가로 엔터를 도운 이유.
‘지분이라도 넘기지 않고서야…….’
가로 엔터의 이익이 곧 KS 엔터의 이익이 되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문규완이 갑자기 마음을 바꿀 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이준호가 한 일은 뭔가?
‘난 그냥 이미지를 조지면서 문규완 그 인간 좋은 일만 해준 거잖아.’
해답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준호는 끈기 있게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 * *
케이어스의 콘서트 첫째 날이 끝났다.
둘째 날의 콘서트만 마치면 길고 길었던 ‘파에톤 월드 투어’도 끝을 맺는다.
케이어스 멤버들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숙소에서 쉬며 체력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소녀연맹 전부 온대.”
김민주는 신아름과 통화를 끝내고 멤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과거 케이어스도 소녀연맹의 콘서트에 갔으니, 이번에 소녀연맹이 오는 건 의리를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진소유가 진중한 투로 물었다.
“좌석은?”
“2층 어디래.”
“……하양이가 표 달라고 했으면 스탠딩석으로 잡아줬을 텐데.”
1층의 스탠딩석은 이름과는 달리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는다면 케이어스를 2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누구든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명당이지만, 같은 아이돌인 소녀연맹에겐 그다지 끌리는 옵션은 아니었으리라.
“미안했겠지.”
김민주가 답했다.
초대권을 달라고 하는 건 친한 사이에게 더 어려운 일이다. 초대권은 줄 때 받는 거지, 먼저 달라고 할 만한 게 아니다.
초대권에선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아는 아이돌의 입장에선, 상대에게 초대권을 달라고 하는 게 ‘공짜로 공연 보게 해줘’와 같았다.
이전 소녀연맹 첫 콘서트 때, 케이어스도 소녀연맹의 티켓을 직접 샀었다.
“용케 2층 티켓을 구했슴미다.”
진저가 감탄했다.
“경쟁이 치열했을 거 아님미까.”
“그래서 그런지 다 따로 앉는다더라.”
“그럼 박 이사님도 따로 앉겠슴미다.”
“박 이사님도 오신대?”
“제가 물어봤슴미다.”
“하기사…….”
케이어스 팬미팅에도 오는 사람인데 콘서트는 당연히 올 듯하다.
김민주는 팬사인회에서 마주했던 성필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팬이란 존재는 얼굴도 잘 알 수 없는 불특정 다수다. 그래서 팬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힘들다.
뭔가…… 실체가 없는 슬라임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성필이라는 명확한 인간을 떠올리니 감상이 전혀 달라졌다.
‘콘서트엔 박 이사님처럼 오랫동안 케이어스를 사랑해준 분들이 많이 올 거야.’
데뷔하는 날 에리카를 쫓아가 사인도 받고.
앨범을 많이 사서 팬미팅에도 오고.
콘서트까지 찾아오고.
그렇게나 케이어스를 사랑하는 건 보통 노력과 마음으론 안 될 것이다.
‘그렇구나, 팬들은 다 박 이사님 같이 살아있는 인간인 거구나.’
오늘 팬들의 떼창과 함성을 들을 때도 감동이었는데, 내일은 더 감동적일 듯하다.
자리를 메운 한 명 한 명이 성필처럼 실재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 말이다. 저마다의 인생을 살면서도 꾸준히 케이어스를 사랑해준,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다.
“근데 진저 너 요즘도 박 이사님이랑 연락해?”
“이번에 오랜만에 한 검미다. 민주 언니는 제가 무슨 박 이사님이랑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전서구인 줄 아는 검미까. 저도 용건이 없으면 안 함미다.”
“있으면 하고?”
“그게 무슨 질문임미까. 보통 사람들은 용건이 있을 때 연락하는 검미다.”
“음…….”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에리카가 묻자 김민주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신아름이 박 이사님이랑 사귀고 있지 않나?’
신아름과 김민주가 아육금 댄스스포츠 종목을 준비하면서 쌓였던 오해는 ‘아름청과’ 개업일에 꽃을 피웠다.
그리고 김민주가 품었던 오해는 현재 진행 중이다.
‘진저가 박 이사님한테 따로 연락하는 걸 신아름이 곱게 받아들이진 않을 거 같은데.’
신아름 본인이 진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돌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객관적이기 힘드니, 신아름은 본인이 특이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즉 신아름의 눈에 성필은 매우 매우 매력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도 있다. 아이돌인 자신을 매혹했으니 다른 아이돌도 매혹할 수 있는 마성의 남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아름 성격에 이 일 알면 박 이사님 가만 안 둘 거 같은데.’
뭐, 사람의 연애 방식은 친구에게 보이는 표면적인 모습과 다른 경우가 있긴 하지만.
살짝 걱정이 되긴 한다.
“뭠미까.”
진저는 김민주의 떨떠름한 얼굴과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제가 박 이사님과 오래 연락하고 지냈다고 연심이라도 품고 있는 줄 아는 검미까. 나이 차가 13살인데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하는 검미까.”
“너 박 이사님이 무릎 꿇고 데이트하자고 울고불고 매달리면 해준다면서.”
진저는 진소유를 어처구니없단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유 언니, 박 이사님이 저한테 무릎 꿇고 데이트하자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일이 현실에 발생할 수 있슴미까?”
“0은 아니겠지만 아마 없겠지.”
“0이 아닌 수준이 아님미다. 그냥 0임미다. 애초에 이 세상에 저한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없슴미다. 발생하지 않을 일이라면 없는 거랑 마찬가지 아닙니까.”
“논리적이네.”
“그렇습니다.”
“말투도 정확해졌고.”
“오, 진저 너 드디어 한국어를 똑바로 할 수 있게 된 거야?”
김민주의 안색이 밝아지자 진저는 안절부절못하며 볼멘소리로 답했다.
“혀가 꼬인 검미다.”
“흠, 수상하네.”
진소유는 진저를 놀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이대로면 진저는 진소유의 손아귀에 놀아나다가 울음을 빽 터뜨리며 에리카에게 안겨올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에리카가 진소유를 말렸다.
“소유야, 조금 더 겸손해져. 누군가를 안다는 건 착각일 확률이 훨씬 높아.”
“뭐라는 거야.”
“그게 사랑에 관련된 거라면 더더욱…….”
에리카는 성필과 리카의 관계를 오해했던 과거를 씁쓸하게 씹었다.
뱃속에 구렁이 천 마리 넣은 리카에게 얼마나 놀림당했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 진저 기분 나쁘겠다.”
김민주도 중재에 들어갔다.
“13살 더 먹은 아저씨랑 엮으면 진저가 불쌍하지.”
“사람을 스펙과 급으로 파악하지 마십쇼……!”
진저가 화난 치와와 혹은 화난 1팀장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인간 사이에…… 누가 더 이득이거나 아까운 건 없는 검미다……!”
“어, 어, 응.”
갑자기 인본주의자로 각성해버린 진저. 그녀의 기세에 밀린 김민주가 자기도 모르게 수긍했다.
애초에 무조건 옳은 말이라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녀연맹이 내일 온다는 소식에 저마다의 각오와 기대를 품고, 케이어스 멤버들은 각자의 방으로 찢어졌다.
에리카는 방으로 가며 폰을 보았다.
톡방 중 하나, ‘사무라이 걸즈’가 있었다. 얼마 전에 유빈과 에리카, 리카, 노아 넷이서 개설한 방이었다.
유빈이 흥분한 듯 사무라이 걸즈 관련 기사를 자꾸만 공유했다. 어젯밤엔 그럭저럭 반응해주었지만, 오늘도 이러니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다.
[코이츠wwwww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wwww]
노아만이 유빈에게 반응해주고 있었다. 에리카가 보기에 굉장히 이상한 방법으로 말이다.
에리카가 픽 웃으며 방문을 열려던 순간, 화면이 갑자기 바뀌며 벨소리를 토해냈다.
[문규완 회장님.]
* * *
“내일이 마지막 콘서트라서 쉬고 싶을 텐데, 회사로 불러내서 미안하다.”
문규완은 에리카가 책상 너머 맞은편에 앉았는데도 쉽사리 자리에 앉지 못했다. 창가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겨우 평정을 찾았는지 책상 앞으로 왔다.
그리고 앉는 대신 책상 모서리에 양손을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문규완을 만나는 건 데뷔조로 정해진 이후 처음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으니 심장이 거세게 뛰며 식은땀이 흘렀다.
오래도록 응시를 이어나간 문규완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어조로 물었다.
힐난하듯이.
“믹스테입, 유닛?”
에리카는 기시감을 느꼈다.
‘아, 그래.’
이건.
‘정호환 이사님에게 믹스테입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때의 정호환과 문규완이 겹쳐 보인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에리카는 침을 꼴깍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설명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