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05화 (705/760)

705화

“다녀왔습니다…….”

통금 시간을 어기고 귀가한 아이처럼, 유빈은 잔뜩 쪼그라들어선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리자 멤버들의 시선이 그의 한 몸에 박혀 들었다.

웨이퍼센트의 리더인 강현은 몇 초간 말없이 유빈을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 몇 시야?”

“미, 미안. 근데 이 시간에 미친 듯이 막히는 거 알잖아.”

“연습 1시간이나 늦었어.”

유빈은 손으로 팔을 감싸며 시선을 돌렸다. 변명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강현은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빈.”

“어…….”

“네가 하는 게 중요한 일이란 건 알아. 그런데 그게 우리보다 중요해?”

“…….”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뭐 하나 나아지지 않았는데, 이제야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고. 아니, 나아지길 넘어 옛날엔 상상도 못 했던 성공도 할 수 있어.”

유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현재는 웨이퍼센트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일 수도 있다.

이번에 웨이퍼센트가 합당한 결과를 내지 못하면, 가로 엔터가 과연 어떻게 하려고 할까.

“물론 노력한다고 무조건 잘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건 우리들이 가장 잘 알잖아.”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이 업계는 아이돌과 회사의 이인삼각이다.

아이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회사가 말아먹을 수 있고, 회사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아이돌이 말아먹는 일이 다반사다.

혹은 둘 다 열심히 해도 망하거나. 사실 그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다.

“우리 노력에 걸맞은 지원을 보내주는 회사와 만났어. 그래, 노력한다고 무조건 잘되진 않지. 우리의 노력이…….”

유빈의 어깨를 쥔 강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너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근데, 이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연습을 해서 뭐 보이지 않는 어떤 수준에 다다른다, 그런 게 아니야. 적어도 실패했을 때 가로 엔터 사람들한테 부끄러우면 안 될 거 아니야.”

몇 번 정도 땡땡이 부릴 수 있다.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더 쉴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니, 그 정도의 일탈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하고 나서도 그럴까.

가로 엔터는 그렇다 쳐도, 웨이퍼센트 본인들이 그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말이 ‘그때 그랬다면’이야.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그런 말을 뱉을 미래가 오길 바라진 않아.”

강현이 유빈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연습 한 시간 더 하고 가. 나도 같이 있을게.”

“형 저번에도 그러다가…….”

강현은 됐단 듯 손을 내저었다.

유빈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형의 충고와 격려, 우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가 나에게 중요한 일인 건 맞아.’

하지만, 그래, 강현이 말한 대로다.

유빈의 꿈이 중요한 것처럼 웨이퍼센트의 성공도 중요하다.

사무라이 걸즈는 나중에라도 시도할 수 있으나, 웨이퍼센트의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강현이 꾸지람을 준 건 타당했다.

유빈은 ‘조금 늦어도 괜찮아, 연습은 충분히 했으니까’라며 끈질기게 노아와 윤상열을 설득했었다.

그 순간이 중요했던 것만큼, 웨이퍼센트 멤버들과 함께 있는 시간도 중요하다.

강현의 말마따나, 훗날 자기 자신과 멤버들 그리고 가로 엔터에게 부끄럼이 없기 위해서.

“유빈, 빨리 와.”

“……응.”

유빈이 멤버들 사이로 터덜터덜 다가가던 순간, 연습실 문이 열리고 성필이 들어왔다.

“유빈이 왔어?”

강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얼굴을 보고, 유빈은 왜 강현이 평소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알았다.

성필은 웨이퍼센트의 저녁 연습이 시작될 시간에 이곳에 왔던 것이다.

그런데 유빈은 없었고 말이다.

‘뭐, 뭐라고 변명하지?’

웨이퍼센트의 컴백이 지척이다.

그런데 그 일은 내팽개쳐두고 석세스 엔터에 갔다 왔다고 해야 할까?

정직함은 보물이라지만, 그딴 말을 지껄이면 성필이 흐뭇해하지 않으리란 건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알겠다.

‘안 그래도 박 이사님은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의 비현실성을 알고 계시니까…….’

유빈은 성필과 자주 상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은 한탄이었다.

한탄밖에 할 게 없는 일 때문에, 유빈이 웨이퍼센트의 스케줄을 무시하고 밖으로 쏘다녔단 말을 들으면.

‘당연히 화내시겠지…….’

하지만 유빈은 가로 엔터의 상황을 잘 모른다.

이 상황에서 되도 않는 변명을 했다간 자신의 이미지가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사실대로 말하려던 순간.

“유빈이 아까 박 이사님 오시고 나서 거의 바로 들어왔어요.”

강현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성필의 앞으로 나섰다.

강현은 거짓말에 서툰 인간이다.

뒷모습만 보아도 알겠다.

“죄송합니다. 바로 박 이사님께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연습에 열중하느라…….”

멤버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건 리더의 몫.

그러니 그 실패 또한 리더의 책임이다.

거짓말이 들킨다면 유빈보다 강현이 더욱 혼날 것이다.

어느 팀의 관리자가 거짓말을 하는 지경이라면, 윗선이 그 팀의 실상을 파악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회사로선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리더인 강현은 당연히 사실을 밝히고 책임이 유빈에게 쏠리도록 해야 할 텐데, 어째서…….

‘나 때문?’

유빈이 곧바로 정답에 이르렀다.

어느 그룹이든 컴백이 눈앞으로 다가오면 회사 사람들의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 예민함과 짜증은 돈을 들이붓는 당사자인 대표나 이사급으로 갈수록 더욱 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빈이 연습은 팽개쳐두고 밖으로 쏘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성필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나 때문에…….’

유빈의 꿈은 아이돌 프로듀서다.

그렇기에 성필과 자주 상담을 나누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

훗날에는 단순한 상담역에서 벗어나 비즈니스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강현은 이렇게 판단한 것이다.

성필이 유빈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가져선 안 된다고. 그래서 자신이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를 하고 대신 변명해준 것이다.

“예, 죄송합니다.”

강현의 짧은 변명이 끝났다.

유빈은 연습실의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느꼈다. 등 뒤에 있는 멤버들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겠다.

다들 판사의 얼굴을 보듯 성필을 보고 있겠지.

당장 유빈부터 그러할 테니.

“음.”

성필이 알겠단 듯 작게 읊조렸다.

그 얼굴을 보고 유빈의 뇌리가 번뜩였다.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박 이사님이 모르실까?’

유빈이 방금 왔다는 사실을 모를까?

그 의문이 떠오른 순간 유빈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강현의 옆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형은 나 따위가 뭐라고 거짓말을…….’

유빈이 앞으로 나아가려던 순간, 그보다 빠르게 성필이 유빈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양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유빈은 화들짝 놀랐다.

어깨에 성필의 손이 올라오자 속절없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 그러면 안 됐는데…….’

노아의 흐리멍덩한 얼굴을 보고, 그녀에게 프로젝트의 의의를 설명하려고 시간을 더 끌어선 안 됐는데.

조목조목 문제점과 리스크를 짚는 윤상열에게 반박하려고 시간을 끌어선 안 됐는데.

유빈은 강현이 아까 말했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말을 속으로 계속 되새겼다.

“유빈아, 고생 많았다.”

유빈이 황사 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사람처럼 눈을 거세게 깜빡였다.

“네……?”

“네가 가로 엔터의 보배야.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야? 나도 반쯤 포기해야 할까 생각했던 건데.”

“뭐, 뭐가요?”

“연락 왔어.”

노아가 사무라이 걸즈에 참여하겠다고.

성필이 유빈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후 손을 뗐다. 그 즉시 유빈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마침내 ‘사무라이 걸즈’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성립됐다.

성필은 리더 강현을 보고 말했다.

“미안한데, 유빈이 좀 데려가도 될까?”

“얼마든지 필요하실 만큼 데려가서 쓰세요!”

* * *

응접실.

성필은 유빈에게 캔음료를 건네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빈은 고작 캔음료를 황송하단 듯 받아들었다.

“현이는 요즘도 무리해서 연습하는 편이야?”

그 질문에 유빈은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며 답했다.

“이전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저희 멤버들 중에선 제일 열심히 해요.”

“피로골절이었지.”

성필은 그때 강현의 병문안을 가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눈앞에 도달해야 할 목표인 서유선이 있는데, 어떻게 쉴 수가 있겠느냐고 했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강현은 부상까지 입었다.

미련한 짓이라고도 볼 수 있다. 퍼포먼스를 아무리 연습해봤자,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대중은 그 완성도를 판단할 수 없다.

춤을 춰본 사람, 노래를 불러본 사람, 트레이너 혹은 그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는 완성도가 존재한다.

물론, 그 이상까지 도달하면 대중들도 ‘잘하네’라고 어렴풋이 느낄 수준에 다다를 수 있다.

그 수준이 바로 서유선이다.

“이해해. 부조리한 환경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연습이었을 테니까.”

부조리란 본래 존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염원을 담아 바라보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다.

강현에게 그 부조리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연습뿐이었다.

회사의 부족한 프로듀싱·매니지먼트 능력을 아이돌 개인이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현이한테 연습은 매달릴 뭔가였겠지. 그래도 조금은 쉬엄쉬엄 해줬으면 좋겠는데.”

“저희 다 그렇게 생각해요.”

“또 다른 한쪽은 연습은 빼먹고 자기 일만 하러 다니는데 말야.”

유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성필은 그런 유빈에게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유빈이 황급히 변명하려 했다.

“혀, 형은 저 때문에…….”

“알아.”

“…….”

“봐줄게.”

“가, 감사합니다.”

“사실 봐주고 말 것도 없지.”

“네?”

“지금은 네가 연습을 팽개치고 거기에만 매달려줬으면 하고 바랄 상황이었으니까.”

“네에……?”

“네가 웨이퍼센트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이라면 믿겠어?”

“제, 제가요?”

성필은 현재 웨이퍼센트의 상황에 대해 전했다.

가로 엔터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이들이 웨이퍼센트를 압박하고 있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당초 약속했던 지원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노라고.

“그건 하음이 형한테 들었어요. 근데 그런 뒷배경이 있을 줄은…….”

“난 웨이퍼센트의 프로듀서야. 이 일도 너희한텐 안 말하려고 했지만, 너는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네가 깊이 연관된 일이니까.”

“제가 웨이퍼센트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이란 게…….”

“만약 이대로 웨이퍼센트의 컴백이 이뤄진다면 유일하게 기댈 건 프로듀싱뿐이야.”

‘프로듀싱의 승리’를 바라야만 한다.

웨이퍼센트가 정직하게 승리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너무나 멍청한 짓이다.

“보이그룹은 걸그룹보다 주목도가 적어.”

“아, 그렇죠. 톱급이면 몰라도, 관심 있는 사람만 관심 있는 느낌이고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보이그룹이 이익을 내려면 걸그룹보다 시간이 더 걸리잖아요.”

“그래. 유의미한 팬덤을 구축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리지. 물론 웨이퍼센트엔 유의미한 팬덤이 모였지만, 이번에도 헌드레드(웨이퍼센트의 팬덤)의 성원에만 기댈 순 없어. 나는 너희에게 십만장벽 이상의 성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여기로 데려온 거야. 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꼬인 데는 미안함밖에 없다.”

성필이 고개를 숙이자 유빈이 기겁했다.

“아녜요! 어차피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 있었으면 이거보다 더 나을 게 없었는데요 뭐! 박 이사님이 프로듀싱해주셔서 그래서 저희는…….”

유빈은 진심이 담긴 미소를 띠었다.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할 수 있게 됐어요. 곡도 좋고, 안무도 좋고, 또 의상이나 뮤직비디오…… 전부 다 너무 좋았어요. 옛날엔 컴백곡 정해지면 우는 멤버도 있었는데…….”

“뻔한 사랑 노래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뻔한 사랑 노래도 노래 나름이죠.”

둘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이윽고 성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좋아. 웨이퍼센트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찾고 있어. 그때 떠오른 거야, 네가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사무라이 걸즈요?”

“대단한 프로젝트잖아. 현세대 걸그룹 쓰리톱이라는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의 멤버가 모여서 유닛으로 곡을 낸다니.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아직 다 모이지도 않았고…….”

“모였어.”

모였다고?

“아! 맞네요! 에리카 씨는 남은 두 명이 다 모였을 때 온다고 하셨으니까!”

“아니야.”

“아니라고요?”

“에리카 씨는, 오늘 노아에게 연락이 오기 전에 이미 참여 의사를 밝혔어.”

“왜요?”

유빈이 얼빠진 소리로 물었다.

진짜 몰라서였다.

왜?

“에리카 씨가 RRBKZ 아지트로 오셨을 때 있잖아. 그때 리카가 했던 말이 가슴을 울린 모양이더라.”

“아…….”

그건 유빈이 보아도 꽤 감동스러운 구석이 있는 광경이었다.

항상 뒤를 쫓아가기만 했던 우상을 향하여, 리카는 이젠 같은 선에 서서 달리자고 말했었다.

“세계가 도와준다는 게 이런 걸까 싶어.”

“확실히 아다리가 전부 딱딱 맞아들어가네요. 저, 그런데…….”

유빈은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저는 결국 그 프로젝트의 기획자잖아요. 그런데 프로듀서가 전면에 나선다는 게…… 괜찮은 일일지…….”

“당연하지.”

“당연…… 한가요?”

“이 믹스테입은 프로듀싱 앨범일 테니까.”

프로듀싱 앨범.

뮤직 프로듀서가 내는 앨범이다.

그 안엔 여러 가수가 참여한다.

보통 곡의 주인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표기되지만, 프로듀싱 곡은 아니다.

프로듀서의 이름이 적힌다.

“물론, 일반적인 프로듀싱 앨범과는 의미가 다르지. 이 앨범이 프로듀싱 앨범인 이유는, 네가 모두를 모았기 때문이야.”

유빈의 사소한 아이디어로부터 모든 게 이루어졌다.

“네 비전과 이상을 따라 곡이 만들어질 거야. 그러니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너지. 네 이름이 알려져야 할 이유는 충분해.”

그 답을 듣고도 유빈의 얼굴은 어두웠다.

성필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나 따위가’라고 생각하지 마.”

“…….”

“소녀연맹과 케이어스, 글로브를 모두 한자리에 모은 시점에서 네 능력은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야. 섭외도 프로듀서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니까. 열심히 했고, 잘했어.”

열심히 했다.

잘했다.

그 한마디에 유빈은 울 것 같았다.

이 황당한 계획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인정해주는 사람이, 다키스트의 하민이 표현하길 프로듀싱의 신인 성필이었으니까.

“난리가 나겠지.”

이 소식을 인터넷 신문사들에게 뿌리기만 해도 돌판이 들썩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걸그룹의 정상들이 모인 그룹인 것이다. 비록 기획사들이 참여한 정식 기획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티스트십을 무기로 삼고 있는 소녀연맹 리카.

과거 ‘서울 시티 보이’ 사건으로 자신만의 비전과 창조성을 증명했던 케이어스의 에리카.

그리고 그냥 노아.

“별다른 홍보도 필요 없어. 홍보자료를 돌릴 필요도 없어. 이 소식을 전하기만 해도 세간의 이목을 모으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거야.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케이팝 팬덤이 주목하겠지. 그리고 거기에.”

성필은 유빈의 손에 들린 캔음료를 부드럽게 가져왔다. 그리고 캔을 딴 후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성필은 자신의 캔을 그의 캔에 짠, 가볍게 부딪쳤다.

“거기에, 세상의 모든 이목이 모여 타오르는 그 장소에, 웨이퍼센트 유빈의 이름이 박히는 거야.”

유빈의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성필이 씩 웃었다.

“어때, 이제 알겠지? 네가 웨이퍼센트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 웨이퍼센트의 이름은 이제껏 받아본 적 없던 관심을 받게 될 거야.”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설 것이다.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의 팬들은 웨이퍼센트의 컴백에 신경을 집중하겠지.

과연 어떤 인간이 에리카와 리카, 그냥 노아를 모으고 프로듀싱할 것인지.

“웨이퍼센트 이야기에서 잠시 떨어져서. 유빈아, 너는 세상 어떤 프로듀서도 받아본 적 없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하게 될 거야.”

첫 작품이 톱급 그룹의 멤버들을 모아 프로듀싱하는 것이니까.

* * *

첫 사무라이 걸즈 미팅.

유빈은 파티룸을 예약하여 멤버들을 초대했다.

사이즈는 아담한 편으로 소파와 8인용 테이블, 선반 등이 가구의 전부였다.

하지만 파티룸이라는 이름답게 방 여기저기 꼬마전구와 색종이 장식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게 주인이 미리 청소를 끝냈을 테지만, 유빈은 땀을 뻘뻘 흘리며 테이블과 소파 등을 한 번 더 닦았다.

벌써 알코올 티슈를 두 팩이나 쓴 참이었다.

‘과자는 이 정도면 충분할까?’

그 세 명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과자를 종류별로 준비했다.

단 거, 짠 거, 혹시 몰라 어르신들이 좋아할 법한 종류도 샀다.

그리고 셋 다 일본인이니, 마트에서 일본 과자도 종류별로 구비해두었다.

테이블에 가득 쌓인 과자를 보니 유빈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의 정성을 그 세 사람이 알아줬으면 좋으련만.

그때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리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건.

“안녕 유빈아.”

“안녕하십니까!”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인 정지음이다.

정지음은 성필이 준비해준 비밀 무기였다.

‘유빈아, 음악은 어떻게 구할 거야?’

유빈은 퍼블리셔로부터 데모곡을 구하고, 그와 동시에 한 명의 작곡가에게 곡을 부탁할 거라고 답했었다.

그 작곡가는 바로 다키스트의 하민이다.

하민은 다키스트가 해체한 후 자체 프로듀싱에 뛰어들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긴, 하민 씨는 차트 1위 곡도 만드신 적이 있으니까.’

성필도 하민에게 곡을 부탁한다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참고로, 하민이 차트 1위를 달성했던 건 본인의 곡이 아니었다.

총 두 번인데, 하나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경연곡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 RRBKZ에 속했던 아이돌 출신 솔로 가수에게 주었던 곡이다.

본인의 솔로곡 최고 순위가 차트 39위이니, 본인으로선 속이 쓰릴 수도 있겠다.

‘하민이 형은 웬만해선 싫다고 했지만.’

그 세 명에게 줄 곡을 쓰려고 하면 몇 달간 소화불량에 시달릴 거라고 했었다.

게다가 하민의 곡은 본인의 스타성에 어울리지 않게 대중적인 테이스트를 맞추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곡의 색이 확실하다.

그 때문에 KS 엔터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 프로듀싱에 뛰어든 것이겠지.

“도와줄 거 있어?”

“아, 앉아계시면 돼요. 제가 다 할게요. 제가 모신 거니까…….”

정지음은 별다른 말 없이 8인용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리카도 정지음의 옆으로 가 앉았다.

“저, 리카 후배님.”

“넵 유빈 선배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다고 했으니까 오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감개무량해서…….”

“이 일은 유빈 선배님에게 중요한 것만큼, 이에(아니), 저에게 더 중요할 수도 있어요! 5년 넘게 칼을 벼려왔던 라이벌과의 정면 승부니까요!”

“승부…….”

한 팀이 돼서 곡을 내는 게 승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커뮤니티나 SNS를 돌아다니면서 누가 더 큰 관심을 끌었는지 통계라도 내려는 걸까.

“유빈아 과자 먹어도 돼?”

“네 네 드세요!”

정지음이 프로틴 과자를 까서 먹기 시작했다.

유빈은 천천히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냥 과자를 먹고 있을 뿐이지만, 그에게선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흘렀다.

단순히 키가 190cm를 넘어서 흐르는 아우라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뮤직 프로듀서 중 한 명.’

소녀연맹의 견인해온 천재 작곡가다.

정지음은 소녀연맹의 거의 모든 타이틀곡을 제작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과장을 보태서 ‘정지음 그는 신이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소녀연맹의 타이틀곡 크레디트를 읽어보면 정지음의 이름이 거의 모든 곳에 적혀 있다.

유빈은 그걸 읽을 때마다 전율하곤 했다.

‘진짜배기 천재야.’

그가 도와준다면 ‘사무라이 걸즈’의 성공이 허황된 이야기는 결코 아닐 터다.

유빈의 가슴에 따스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곧 다시 긴장이 찾아왔다.

성필에게 받은 한 가지 지령 때문이었다.

‘오늘 세 사람 모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

웨이퍼센트의 컴백 전에.

즉, 일주일 내로 사무라이 걸즈 결성 소식을 언론에 전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내야 한다.

가로 엔터가 자기 멋대로 이 정보를 흘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혹시나 그게 에리카와 노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미리 둘에게 허락을 얻어두는 게 좋다.

‘리카 후배님은 우리 편이니까 당연히 허락이 된 상태고.’

나머지는 노아와 에리카인가.

‘왠지 KS 엔터는 빡빡할 거 같아.’

당장 에리카의 믹스테입 때만 떠올려도 그러하다. 에리카는 KS 엔터의 간섭을 피해 도망가기까지 했다고 하던가.

그 기사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유빈은 남모르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뮤지션의 이야기 아닌가.

‘그리고 석세스 엔터는…….’

잘 모르겠다.

하루 만에 노아의 믹스테입 참여를 허락해준 것을 보면, 은근 허락받기가 쉬울 거 같기도 하고.

유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건 그거고…….’

곧 이 자리에 에리카와 노아까지 온다는 거지.

제대로 고개나 들 수 있을까.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빛나는 이들인데 말이다.

유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성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유빈아, 두려워하지 마. 그리고 혹여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민폐라고 생각하지 말고. 왜냐하면 우린 이제…….’

가족, 이니까.

유빈이 가슴에 얹었던 손을 뗐다. 그리고 뺨을 약하게 짝짝 때렸다.

‘힘내라, 유빈.’

웨이퍼센트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

그리고, 이 광경은 그가 그토록 꿈에 그렸던 것이다. 두려움은 가질지언정, 겁먹어서 허둥대지는 말자.

‘나는 지금 꿈 안에 있다.’

이 꿈에 도달한 현재의 자신을 믿어라.

* * *

사람이 모두 모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시카와 리카(石川梨花)입니다!”

리카가 헤헤 웃으면서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그녀의 천성적인 밝음과 귀여움이 파티룸을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사쿠라바 에리카(桜庭絵梨華)입니다.”

에리카는 공손히 손을 모으곤 한 사람 한 사람 빼먹지 않고 인사를 전했다.

역시 아이돌 명문가인 KS 엔터의 아이돌이다, 그런 느낌이 확 전해져온다. 아니면 인간 자체에 배인 품위가 있거나.

“안녕하다요! 아, 안녕하세요! 오오가이토 노아(大海渡希明)다입니다!”

노아는 리카와 에리카가 했던 인사를 되새기면서 여기저기 인사를 남발했다.

팔을 어디 둘지 모르겠단 듯 옆구리에 척 붙인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정지음(鄭知音)입니다.”

정지음이 일어나자 다들 그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는 허리를 한 번 크게 숙인 후 자리에 털썩 앉았다.

리카가 과장되게 박수를 치며 휘익 휙 휘파람을 불었다.

“가, 강동현(康動絃)입니다…….”

강동현은 에리카 못지않게 예의 바른 투였다. 하지만 특유의 소심함은 지우지 못하여, 인사 한번 한번이 어설픈 데가 있었다.

에리카는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창피함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자신감이 있어도 좋으련만.

“윤상열(尹相悅)입니다.”

윤상열이 가볍게 일어나 일어난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앉았다.

노아는 아까 리카가 박수 치며 휘파람 불던 것을 뒤늦게 기억했다. 그래서 윤상열이 다시 앉는 순간에야 박수 치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윤 피디 멋지다! 휘익 휘이익!”

“흐즈므르(하지 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

유빈.

그에게로 여섯 명의 눈이 향했다.

‘이, 이게 뭔…….’

한국 최고의 케이팝 뮤직 프로듀서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세 명.

그 세 명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유빈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돌아가는 시야로 어제의 인자했던 성필이 모습이 비쳤다.

‘유빈아, 두려워하지 마. 그리고 혹여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민폐라고 생각하지 말고. 왜냐하면 우린 이제 가족이니까.’

유빈은 성필의 따스한 격려를 기억해냈다.

그리하여 용기를 얻은 유빈은.

“우웨엑…….”

“선배님?!”

유빈, 첫 미팅에서 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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