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03화 (703/760)

703화

리카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기한 짓거리를 얼이 빠져서 바라보기만 했다.

4인 테이블.

리카가 앉은 자리 반대편에는 성필과 에리카가 함께 앉아 있었다.

아까 눈앞에서 신기한 짓거리가 펼쳐진다고 했던가. 수정해야만 하겠다. 저건 개짓거리다.

“에리카 씨 벌써 취하셨어요?”

성필이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장난치듯 묻자.

“네에? 왜요?”

에리카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얼굴이 발그레한데요?”

“이거 메이크업이에요.”

“숙취 메이크업?”

“숙취라뇨!”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요? 왜 이렇게 발그레해요?”

“당연히 오늘 만나는 사람들한테죠.”

“저도 포함이죠?”

“뭐…… 살짝?”

리카는 그 꼴을 보곤 잔을 가득 채운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별로예요……?”

“아뇨, 예뻐요.”

리카가 자신의 잔을 스스로 채워 또 들이켰다.

“아, 사진 찍어요!”

“그럴까요?”

“박 이사님 폰으로요.”

“에리카 씨 걸로 찍으면 되잖아요.”

“이사님 폰 안에 제 사진을 두고 싶어요.”

리카는 맥주잔에 소주를 부어 넣었다.

“에이, 그냥 에리카 씨 걸로 해요.”

“아 주세요 주세요!”

에리카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리카는 테이블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 없었지만, 에리카가 성필의 하반신을 마구마구 더듬는 듯했다.

성필은 곤란한 기색인 주제에 얼굴은 미소로 만개했다. 그리고 결국 에리카에게 폰을 넘겼다.

당연히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에리카가 그의 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비밀번호가 풀렸다.

리카는 사레가 들려 마시던 술을 뿜었다. 이건 묻지 않곤 못 배기겠다.

“왜, 왜애 에리쨩 얼굴로 잠금이 풀려……?”

“응? 박 이사님 폰에 내 페이스 ID도 등록돼 있으니까?”

그러니까 왜?

“자.”

에리카가 리카에게 폰을 내밀었다.

리카가 얼떨떨하게 폰을 받아들었다.

“우리 사진 찍어줘.”

에리카가 성필에게 팔짱을 꼈다.

리카는 넋이 나가 성필을 보았다. 그러자 성필은 변명하기는커녕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 * *

리카가 눈을 떴다.

머리맡에서 메시지 알람이 들린다.

베개 옆으로 손을 가져가 몇 번 더듬은 끝에 폰을 찾아냈다.

[에리카]

에리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씨이, 씨…….”

리카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폰을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가슴 속에 검은 덩어리를 매단 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세면실로 걸어갔다.

“야 리카 너 오늘은…….”

거실에 불가사리처럼 누워 있던 조아라는 리카의 얼굴을 보곤 급히 입을 닫았다.

리카는 세면실 문을 쾅 열고 들어갔다.

“문 쾅 쾅 열지 말라고 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면실로 달려온 신아름.

그녀는 세면대 앞에 선 리카의 얼굴을 보곤 순식간에 분노를 가라앉히곤, 불가사리처럼 누운 조아라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리카 왜 저래?”

“몰라.”

리카는 칫솔에 치약을 왕창 짜놓곤 분노의 양치질을 시작했다. 거울 안에 보이는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건치는 평소엔 미소를 돋보이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분노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이빨을 닦던 그녀는 새삼스럽게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응? 나 왜 화내고 있는 거지?’

아까 있던 일을 떠올렸다.

성필이 에리카의 여우짓에 넘어갔다. 혹은 성필이 에리카에게 여우짓을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여우이거나.

아까 있던 일……?

‘잠깐, 박 이사님 폰이 페이스 ID로 열릴 리가 없잖아.’

성필은 애플폰 유저가 아니다.

리카는 세면대를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잠기운으로 흐려져 있던 머릿속이 점차 밝아진다.

“아, 유메카(꿈인가)!”

그래, 그렇지,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지.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 건 오랜만이다.

옛날에 조아라가 리카 몰래 삼겹살을 구워 먹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의 결말은 리카가 조아라의 머리칼을 쥐어뜯는 것이었다.

일어나니 허공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더랬다. 일어나서 30분 동안 조아라를 향한 분노가 계속 가슴에 남아 있었고 말이다.

리카는 씻기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불가사리처럼 누워 있는 조아라와 신아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아라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리카, 무슨 일 있었어?”

“꿈이랑 현실을 착각했어!”

“아아, 그럴 때 있지.”

신아름이 동감하며 불가사리 상태에서 탈출했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나도 그런 꿈 꾼 적 있어. 팀장님이 사실 숨겨진 딸이 있다면서 웬 중학생을 데려왔거든. 걔가 우리 회사 연습생이 됐었어.”

“뭐, 일어나서도 화났었냐?”

“황당했지…….”

굳이 신아름이 아니더라도 황당해했을 것이다.

성필에게 중학생 나이의 딸이 있으려면 성인이 되자마자 속도위반을 저질러야 한다.

심지어 성필은 속도위반을 저지르고 나 몰라라 도망가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은가.

확실히 황당하긴 하다.

“조아라 넌 없어?”

“난 꿈을 잘 안 꿔.”

“하긴, 넌 잘 때 누가 업어가도 모를걸.”

“그거랑 꿈이 상관이 있어?”

“꿈은 잠이 옅을 때 기억이 잘 난대.”

“어쩐지. 그래서 리카 넌 무슨 꿈 꿨는데?”

“음…….”

리카는 아까의 분노를 완전히 지우고 해맑게 웃었다.

“히미츠(비밀)!”

방으로 돌아온 리카는 드라이기를 집어 들며 생각했다.

‘그렇네, 어제 한국으로 돌아왔었지.’

오히려 숙소에서 지낸 시간이 짧아 잠을 옅게 잔 것일까. 그래서 꿈을 그토록 생생하게 꾼 걸까.

시간이 좀 지나니 아까 꾸었던 꿈이 점점 흐려진다.

이대로 수십 분이 지나면 아예 꿈 내용도 기억나지 않겠지. 꿈이란 뇌가 머릿속에 넣어두기엔 매우 비논리적이라서, 금방 기억에서 증발해버리곤 한다.

생각해보니 굉장히 신기한 꿈이다.

‘기록해야 해!’

책상 위의 일기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일기장에 적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성필과 공유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성필에게 연락해서 잡담이라도 떨어야겠다.

리카는 화장대에서 일어나 폰을 찾았다.

“핸드폰, 핸드폰, 어디 있나?”

움찔.

리카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바닥에 있었다.

리카가 폰을 들었다.

액정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끼에에에에에엑!”

그 비명을 들은 조아라가 허겁지겁 리카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뭔데!”

“아라쨩 이거 봐!”

“우와…….”

조아라는 산산조각 난 폰을 보곤 얼굴을 찌푸렸다. 액정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화면의 글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필름이라도 끼우라니까.”

“이게 감성이라구!”

“AS 받으러 갈래? 나도 나갈 일 있는데.”

리카는 우울하게 폰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폰을 책상 위에 두었다.

“이에(아니), 새로 하나 사지 뭐.”

“그럼 같이 나갈래?”

“응! 오랜만에 아라쨩이랑 데이트네! 근데 아라쨩은 뭐하러 나가?”

“나도 살 거 있어.”

“나니오(뭐를)?”

“차.”

Car.

* * *

케이어스 한국 콘서트 전날.

최후의 런스루 리허설.

각국의 콘서트장마다 리허설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케이어스는 콘서트를 수십 번도 넘게 한 상태이다.

전혀 떨지도, 긴장하지도, 실수하지도 않은 채 공연이 끝났다.

[끄으으으읏!]

공연 총괄 감독이 환희의 함성을 내질렀다. 목소리엔 울음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다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아!]

스태프들이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케이어스 멤버들도 하나같이 화기애애하게 그를 향하여 찬사를 보냈다.

이 콘서트는 케이어스의 콘서트다.

하지만 지켜봐 온 모두는 안다. 진정한 숨은 주역은 콘서트의 설계자이자 감독인 그였다.

“감독님 드디어 집에 들어가시겠네.”

김민주는 살짝 감정이 복받쳐선 말했다. 그리고 에리카에게 살짝 속삭였다.

“난 절대 공연기획자랑은 결혼 안 하게.”

감독은 몇 개월이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콘서트의 기획부터 종료가 얼마 안 남은 현시점까지, 가족과의 관계가 어찌 됐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홀로 집에 있는 아내는 어떤 심정으로 남편을 기다렸을까. ‘네가 선택한 결혼이다, 버텨라’라기엔 외로움을 참기 힘들 것이다.

남편을 향한 원망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뒤풀이 감독님 집에서 하잖아. 그때 사모님한테 칭찬 많이 해드리자. 최소한 우리가 가정의 평화를 지켜드려야지.”

“민주 오랜만에 기특한 말 하네.”

“아니, 콘서트 하면서 새삼스럽게 느꼈는데. 스태프분들이 되게 고생이 많으시잖아.”

그렇다, 고생이 많다.

아이돌은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세공품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이돌에게 주어지지만, 그 아이돌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모두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

에리카는 박수 치는 도중 윤희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돌의 아티스트십은 기능인으로서의 것…….’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마라.

에리카는 윤희연의 말을 그리 이해했다.

세찬 박수 안에서 팔을 번쩍 올린 감독을 보니, 그 말이 더욱 잘 이해된다.

에리카가 솔로로서 발휘하고픈 창조성, 아티스트십은 비대한 자아로부터 기인한다. 그리 팽창한 자아는 아이돌을 위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케이어스라는 세공품 안에는 모두의 자리가 있다. 에리카의 자아는 그들의 자리를 밀어내어, 결국엔 케이어스의 완전성을 붕괴시킬 위험성이 있다.

윤희연은 그 위험성을 경계한다. 동시에 감히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는 인간을 혐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균의 낙원을 더럽히려는 이를, 윤희연은 혐오한다.

“쉬자.”

김민주가 에리카에게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이 콘서트만 끝내면 진짜 늘어지게 자는 거야. 그 전에 내일을 대비해서 최대한 쉬고.”

그건 권유이자 강압이었다.

쉬는 것도 일의 한 부분이라면, 최근 에리카는 일을 잘해오지 못했다.

에리카는 김민주의 어깨동무를 떨쳐내었다.

“회사에 가보게.”

“너…….”

“걱정 마.”

“…….”

김민주는 말없이 한숨을 뱉었다.

케이어스는 리허설을 끝내고 백스테이지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있었다.

“안녕, 얘들아.”

PTR―17의 리더인 시온이었다.

그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또렷한 이목구비를 전혀 가릴 수 없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사이사이로 잘생김이 새어 나온다.

케이어스를 마주한 그가 마스크를 벗자, 케이어스 멤버들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그래.”

같은 리더로서 에리카가 그와 마주 보고 섰다.

“어쩐 일이세요?”

“일이 생겨서 내일 응원하러 못 오게 됐어.”

내일 콘서트에는 KS 엔터의 여러 선배들이 응원하러 온다. 관객석에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앉아 있을 예정이다.

어디 있을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위치를 알면 멤버들이 자꾸 그곳을 신경 쓸 테니 말이다.

같은 회사 선배는, 케이어스가 KS 엔터 최대의 성공을 구가하고도 어려운 이름이었다.

그게 PTR―17의 리더라면 더욱 그러하다.

“오늘 미리 온 걸로 성의 표시가 되진 않겠지만.”

시온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순간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주변을 거닐던 스태프들이 죄다 멈춰선 시온의 얼굴을 보았다.

감히 ‘한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타이틀을 붙여도 될 만한 외모였다.

심지어 그녀의 주변엔 ‘한국에서 가장 예쁜 여자’ 타이틀(이견의 여지 있음)을 지닌 진소유도 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그 광경만을 보고도 전율했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는 예술품을 보고 느낄 법한 감각이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아우라가 퍼져나갔다.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겠다고 생각해서.”

“따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콘서트가 마지막인 건 아쉽네. 난 처음인 편이 낫다고 생각하거든. 난 첫 콘서트 때 너무 기뻐서 울었어.”

“진저도 울었어요.”

“저만 운 거 아니잖슴미까…….”

“아마, 콘서트는 아이돌로 일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거야. 잘 즐기길 바란다.”

시온은 미소와 함께 고개만 까딱였다.

그 흔한 악수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는 자신의 스킨십이 일으키는 효과를 일생 동안 체험해왔을 테니까.

그는 미소 짓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방송이나 팬의 앞이 아니고선 쉽사리 웃지도 않는다고 한다.

“저 묻고 싶은 거 있는데요.”

“어, 소유야.”

“성형하셨어요?”

물이라도 맞은 듯 주변 분위기가 싸해졌다. 에리카는 진소유의 뒤통수를 한 대 후리고 싶었다.

시온이 낮게 웃고는 속삭였다.

“어, 했어. 쌍꺼풀. 여기 보여?”

시온이 한쪽 눈을 감고 검지로 눈꺼풀을 짚은 후 아래로 쭉 내렸다.

“피부 안에 실밥 보이지?”

“왜 하셨어요?”

“데뷔조로 뽑히고 사진을 많이 찍었어. 아, 그런데 내가 짝눈이더라.”

“원래 사진으로 더 잘 보여요. 더 신경 쓰이고요.”

“맞아. 회사 분들도 다 그러셨어. 굳이 할 필요 없다고. 근데 내가 신경 쓰이니까 결국 했지. 너무 못생겨 보여서.”

“선배님이 못생겼으면 세상 남자들은 다 어떻게 살아갈까요.”

시온은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자연스럽게 발의 위치를 바꾸어 진소유와 거리를 벌렸다.

“쌍꺼풀이랑 또 뭐…… 다른 거 해서 짝눈 교정했어. 근데 완전히 대칭은 안 되더라.”

“수술 잘되신 거 같아요.”

“고마워.”

시온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다들 숙소로 가는 거야?”

“네.”

“그래, 고생해. 선물 가져왔는데 매니저님한테 맡겨뒀어. 파이팅.”

시온은 다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곤 떠나갔다. 정말 응원만 하러 온 모양이다.

그가 떠나간 후, 멤버 전원이 진소유를 쳐다보았다. 진소유가 누군가에게 흥미를 드러내거나 대화를 이끄는 건 매우 희귀한 광경이었다.

진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소유 언니 너무 노골적으로 호감 드러내는 거 아님미까?”

노골적인 호감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물음표를 띄울 만한 소리였다. 그저 평범한 대화였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케이어스 멤버들은 그게 굉장히 특이한 일이란 걸 안다.

“아름다운 사람한테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

“……으엉?”

진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그게 뭔…….”

“사람답게 생긴 사람은 오랜만에 봐서, 사람다운 대화를 하고 싶었어.”

그럼 평소에 보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란 건가? 이건 얼빠도 아니고, 외모지상주의도 아니고, 아름다움을 인간성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거다.

“넌 늙으면 X됐다.”

김민주가 진소유를 향해 혀를 찼다.

그러곤 에리카에게 물었다.

“근데, 에리카 너 숙소 안 가잖아.”

에리카는 회사로 간다.

그런데 시온이 숙소로 가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었다. 거짓말한 것이다.

“회사로 간다고 하면 시온 선배가 같이 가자고 할 거 같아서. 자차로 오셨을 거야.”

“아, 거절하기도 어색하겠다.”

“에리카 언니 자의식과잉 아님미까?”

“나한테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친절하신 분이니까. 그리고 우리 회사…….”

에리카는 한숨을 쉬었다.

“바로 소문날 거야.”

밖으로 퍼지진 않겠지만, 직원들끼리 에리카와 시온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게 싫다.

인터넷에서 아무런 근거 없는 루머만 보아도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데, 실제 근거를 들어서 남들이 숙덕거리면 뒷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다.

“에리카 소문은 그게 진짜 웃겼는데.”

김민주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보이그룹 전원한테 고백받았다고 했나? 걔들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에리카한테 단체로 고백하냐? 개웃겨.”

그래, 이런 거.

눈앞에서 말하는 건 양반이다.

눈 밖에 난 곳에서, 자신도 모르는 장소와 시간에서,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게 너무나 싫다.

시온이 콘서트가 아이돌 일 중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이돌이 돼서 가장 짜증 나고 화나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 자신에 대해 쑥덕대는 것일 터다.

‘아이돌 그만두면 아무도 없는 시골에 집 짓고 살아야겠다.’

인적이 드문 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서만 사는 것이다. 누구에게 무슨 말 들을 이유도, 필요도 없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사는 삶.

상상하기만 해도 꽤 기분이 좋다.

“얘들아, 가자.”

매니저의 부름에 멤버들이 쪼르르 달려갔다.

* * *

강동현 프로듀서의 골방.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강동현이 율무차를 내밀었다. 처음엔 식감이 이상해서 싫어했지만, 이젠 에리카도 율무차를 꽤 즐기게 되었다.

“어떻게 됐어?”

강동현이 심각한 투로 물었다.

에리카는 율무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컵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쥐고 절망했다.

“답장이 없어요……!”

에리카는 아침 일찍 리카에게 연락했었다.

부끄럽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사무라이 걸즈에 관해 물었다. 자신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답이 없다.

“왜, 왜애? 그쪽에서 먼저 하자고 한 거 아니었어?”

“그랬죠, 그랬는데…….”

에리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새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때의 리카는…….

‘더는 에리쨩처럼 되고 싶지 않아. 난 에리쨩을 꺾을 거야. 소녀연맹의 뒤에 숨지 않을 거야. 이시카와 리카로서, 사쿠라바 에리카와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고 싶어.’

그렇게까지 말했었다.

결코 중간에 마음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그 결의에 찬 눈동자와 한이 서린 목소리가, 겨우 몇 달만에 사라지리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째서…….

‘아.’

그때, 에리카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대화가 살아났다.

‘솔직히 이기겠다느니, 꺾겠다느니, 앞지르겠다니, 기분이 나빠.’

리카의 진심이 서린 질문에 돌려주었던 답.

‘KS 엔터의 역사가 곧 케이팝의 역사야. 내 선배들이 역사고, 나 또한 그렇게 될 거야.’

에리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에리카?”

강동현이 불렀음에도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좁은 골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던 도중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의자 위에 앉힌 시바견 인형이었다. 몸은 비대하게 크지만, 그 몸 위에 올라온 얼굴은 귀엽고도 작았다.

에리카가 인형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헬창 시바아아아아아아아!”

강동현이 비명을 내질렀다.

‘헬창 시바’ 인형은 복부가 찌그러져선 안쓰럽게 의자에 축 늘어졌다.

“어째서어어어어어어!”

극진공수도 정권 지르기로 마음을 가라앉힌 에리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이지만, 가장 확률이 높은 가정이 있다.

‘이젠 내가 우스워 보이는 거야……?’

리카가 비웃는 건가?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를 넘어선 거나 마찬가지이니, 이제 나와 비교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거야……?’

이, 이, 발칙한…….

“초동판매량도 우리보다 낮은 게…….”

“시바, 시바아, 시바…….”

강동현이 소중하게 헬창 시바를 쓰다듬었다. 에리카의 정권에 당한 헬창 시바는, 몸 안에 든 솜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난 원하는 건 전부 얻어왔어.’

그랬기에, 원하는 건 전부 얻어야 직성이 풀리겠다.

에리카는 김민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더는 세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김민주는 노력하라고 했었다.

너무나 쉽게 모든 걸 얻어온 너에게, 하나쯤은 노력하여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맞는 말이야.’

노력해서 얻어야 할 게 눈앞에 다가오니 흥분되기까지 한다. 정호환을 거스르고 믹스테입 작업에 뛰어들었을 때 같다.

‘그래, 해줄게, 얻어줄게.’

에리카는 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강동현은 헬창 시바를 품에 안고 물었다.

“누구한테 전화 걸어?”

대답하려는 찰나, 통화가 연결됐다.

에리카는 침을 삼키곤, 말했다.

“박 이사님?”

강동현이 입을 떡 벌렸다.

감히 에리카에게서 들을 거라고 예상치 못한, 애교 수치가 100% 이상을 돌파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에헤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썸이 1호, 박성필.

다음에 만날 땐 적이라고 선언했던가.

그 선언은 잠시 미룬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왜긴요! 박 이사님 목소리도 듣고 싶구, 또…… 할 이야기도 있어서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에리쨩인가요!]

그때 통화에 타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투지 가득했던 에리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 리카.]

[에리쨩이랑 통화하고 계시는 건가요!]

[응.]

[저도 바꿔주세요!]

[그래.]

[에리쨩 안녕!]

“어, 어…… 리카 안녕…….”

히히.

웃음소리.

그리고 리카가 물었다.

[웬일이야?]

0